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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다녀와서
1, 내금강 옥류동 구룡폭포
이 기행문은 20여년전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내용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1, 내금강 옥류동 구룡폭포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1, 내금강 옥류동 구룡폭포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1, 내금강 옥류동 구룡폭포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1, 내금강 옥류동 구룡폭포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기행문은 내가 부산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교육시책으로 금강산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봉래산, 풍악산, 갑골 산 개골산으로, 불러온 것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해온 일본 속설이 있는가 하면,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고려 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라의 문인 최치원은“천길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의 진주알을 흩뿌렸는가.”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모든 사람이 그리움으로 애태웠던 금강산을 가게 된 행운을 얻었다.
일행은 2003, 11, 21, 01시에 출발하여 오전 11시경 속초항에 도착하여 출국 절차를 거쳐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배 안에 선원들은 대다수 필리핀 사람들로서 서투른 한국어와 손짓 몸짓으로 승객을 안내했다. 모두 바다를 품어 마시는 파도가 뱃길을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석양을 등에 메고 기울어가는 북녘의 노을빛이 참으로 고왔다.
뱃길은 남단의 끝자락으로 북한과의 경계선인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바다를 거쳐 저녁 6시경 북한의 고성 항에 도착하였다. 네온사인이 바다를 물들인“해주 항”이란 글씨가 관광객을 유혹했다. 고성 항에 하선하여 출입국 검문을 받아야했다. 검문은 무기를 소지한 인민군의 통제가엄격하여 숨소리마저 멈출 정도로 엄엄한 검문검색을 밭아야했다.
우리일행의 70명은 아산에서 북한에 넘겨준 명부사진과 관광객의 실물을 하나하나 대조하는 것뿐 아니라, 소지품은 물론 여권, 금강산 출입카드, 카메라 등 인민군 대좌의 검문검색은 무척 까다로웠다. 검문을 마치고 버스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검문소 근무자들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천재들이며 한번 본 것은 반듯이 기억한다고 한다. 본 대학을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나, 교사나 경찰보다는 군인이 출셋길이 빠르기 때문에 지망자가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버스 주차장에 도착한 일행은 금강산입구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숙소를 지정받아 10명씩 배정된 숙박시설에 여장을 풀어놓고 금강산 온천을 위해서 셔털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한 목욕탕은 등빛에 고인 물이 맑고 깨끗하여 온몸이 녹아내린 듯, 가슴을 출렁거렸다.
남한과 다른 것은 화장실이 보건실로 표기된 것과 또한 노천탕은 남탕 여탕의 경계를 바위로 쌓아올렸을 뿐, 뒤편에는 도보로 오갈 수 있는 나지막한 동산으로 되었었으나 통제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인민들은 모두작업장에 근무 중이므로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관광객을 위한 목욕탕으로서 목욕 비는 12불이었다. 오전에는 운영하지 않았으며 오후에만 영업을 하는 통제지역이었다. 목욕이 끝난 20시에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덜어갔다.
아산에서 경영하는 식당의 재료는 북한의 무기 농으로 재배된 농작물물로 준비한 뷔페식으로 안주는 마음대로, 그러나 시원이나 참이슬의 소주1병이 6000원이고 북한산 소주는 만원이 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북한에서 처음 하룻밤을 넘긴 새벽, 옥외 화장실을 가는 길목위로 지나가는 인민군 병사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의 교대근무가 하루의 시작임을 알리는 금강산 꼭대기에는 새벽달이 어스름이 비춰왔다.
적막강산인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나온 08시30분 주변을 살펴보았다. 금강면소재지인 이곳이 우리들이 거주하는 숙소와 상가 주변 주차 시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천 건너편 양지마을 주변에는 차량한대 보이지 않는 한산한 내천에는 아낙네들이 물을 길러가는 모습과 빨래나 채소 같은 것을 씻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행들은 내금강인 구룡연 코스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금강산은 내금강과 해금강을 포함한 외금강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내금강은 내륙 쪽의 비로봉 만폭동의 우아한 여성적 풍모가 있으며, 동쪽 부분 바닷가 쪽의 외금강은 만물상과 구룡연의 장대하고 남성적인 기품과 해안의 절경인 해금강을 포함하여 외금강으로 나눌 수 있다.
내금강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군의 농장 입구에서부터 산을 오르는 버스 길은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이 길의 폭에 맞추어 현대에서 제작된 버스였다. 금강산 중턱을 이은 좁은 도로 폭에 널어선 버스의 차량번호는 금강1호 금강2호―로 부착된 총 35대였다.
우리 일행을 싣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우리 일행을 실고 갈 버스는 금강1호-3호를 타고 온정 각 입구에 내렸다. 산을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듯 골짝이었다. 이제부터 도보로 능선을 향하는 산길은 말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옥 같은 구슬로 흘러내리는 골로서 이 골짝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도 없이 옥류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절경은 모두가 시적으로 표현되는 맑은 물소리, 맑은 돌, 맑은 하늘, 그리고 검은 땅마저 모두가 맑아 보이는 산길을 가슴에 담는 듯 상쾌한 걸음이었다. 산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싼 골 안의 풍경이 황홀하고 아름답다, 골을 따라 수정을 쏟아 부은 듯이 맑고 푸른 담소가 옥류담이며, 비단을 풀어 놓은 듯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폭포가 옥류폭포라고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솟은 세존봉이 동쪽으로 안아 막고 서쪽에 서 있는 옥녀봉 앞에 천 화대, 뒤에 숨은 산봉우리 쀼죽하면 곱지나 말든지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든지 흐르는 물은 넓고 깊은 물이 옥색이었다.
세존봉에 도착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넓은 하늘은 어디에 감춰두었는지 산과 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세존봉 중턱에 탑같이 쀼죽한 산봉우리가 칼을 뽑고 서 있은 듯 병풍을 치고 있었다. 높은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암벽을 타고 내리는 긴 비룡폭포는 금강산의 4대 폭포의 하나인 비봉폭포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날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거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저으며 날아오르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 폭포라고 하며, 또 봉황 바위가 날개를 편 봉황새와 같다 하여 비봉폭포라고 각각 불리고 있다. 암벽을 층층이 타고 쏟아지는 비룡폭포와 무봉폭포는 암벽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여인의 치마폭을 풀어 헤치는 듯했다. 이 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조양폭포와 함께 하는 비봉폭포는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지면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어 깊이 5m의 봉황담을 걸러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간다고 한다. 계곡은 하늘에 구름이 떠돌 때면 폭포수는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고 햇빛이 비치면 은빛 물안개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주변의 상류에는 상팔담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문·무봉폭포 등 이름난 봉우리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모두가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 구룡폭포 쪽을 향해 올라가면 무용교라는 흔들다리를 건너서부터 좁고 긴 골짜기가 구룡동이다.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상팔담으로 가는 다리가 있는 갈림길에서 상팔 담으러 오르는 길이 가파른 탓으로 한숨 돌리며 오르던 길 뒤 돌아보니 절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구룡대 전망대에 오르니 깊고 깊은 계곡 아래로 상팔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으로서 크고 작은 담소가 8개로 이어져 있다고 하여 상팔 담으러 불리는 이곳이 바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아스라이 스치는 옥빛에는 온 산을 태우는 水煙의 비경에서 한편의 詩作 노트를 메모하였다.
내금강 옥류동玉流洞
전 병구
세존 봉 탑塔 위에 설봉산은
창을 꽂은 듯 수천 년 병풍을 치고
층층절벽 은빛 토하는 비봉폭포飛鳳瀑布
암벽에 요동치며 터지는 진주 아ㄹ
봉황새 조각인양 날개를 펼치며
낙하하는 물줄기
흐르는 물결 선율 따라
여인의 曲線을 더듬는 계곡은
옥같이 맑구나.
설렘을 채운 어여쁜 玉流峰
저 멀리 꽃 같은 天花臺는
송두리째 주겠다고
육체의 내장을 들춰낸 저 계곡의 몸짓소리
갈증을 덮어버린 水煙 깊숙이
저무는 가을 눈동자
기다림이 암담한 선녀탕에
단풍잎 옷 벗는 소리
조연助演이 되어 겨울로 떠나는 모습
금강의 변곡선 밤의 꿈으로
금강산 일대는 산행의 안전과 여행객의 보호를 위해 아산에서 지원된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또한 중요한 요소나 쉼터에는 북한의 감시 요원들이 재건 복을 입고 관광객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 자유를 침해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금강산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관광객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방법이 타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침 뱉는 것, 코 푸는 것, 휴지 버리는 것, 계곡에서 세수하며 손 씻는 것, 소변 하는 것, 휴지 버리는 것 사진 촬영 등 모든 것을 감시를 당해야 했다. 적발되면 금강산 여행카드로 처리되는 벌금은 물론이며, 시빗거리로서 아산과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는 방법이 최대의 수단이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죄 없이 감시를 당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라 자유를 구속당하는 특별한 여행이었다. 결과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하려는 내막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감시원과 안내원들이 관광객의 행동을 유심히 지키면서 감동적인 절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주변의 암벽에는“김일성 수령님”이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는 마음대로 앉을 수도 쉴 수도 없는 장소로서 감시원이 지정하거나 또한 정해진 곳을 피하여 사진촬영장소와 쉴 수 있는 주변의 공간을 안내하면서 기념사진도 촬영해 주었다.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았든 안내원의 친절은 물질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덜었다. 잠시 쉬는 동안에 뒤따라오시던 80대의 할머니가 도착하자, 건강하심을 격려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은“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환이 없소”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금강산, 이 아름다운 내 고향 산에서 묻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북한이 고향인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귀에 녹음을 한 것 같이 아롱거렸다. 잠시 쉬었던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일만 이천 봉의 먼 산들을 뒤에 두고 하산하는 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저녁 17시 문화회관 모란봉 예술의 곡예단 서커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60불(7만원 ) 입장료 금은 사전예약 되어있기 때문에 입장하는데 복잡하지 않았다. 극장 안에 꾸며진 무대도 예술적이었지만 사회자의 약삭빠른 재치와 맑은 음성에 아름다운 미모가 관람객의 육안을 집중시켰다. 다양하게 짜인 공연마다 환호의 박수가 우렁찼다. 우리 동포임은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극장 안에는 통일을 맞이한 듯이 감정의 눈물이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공중낙하 3단계 그네타기를 세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한 사회자의 설명이 너무도 고상하고 슬픈 함정에 빠지는 우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로 막을 내리는 手旗의 푸른 땅덩어리가 통일을 맞이한 실감 나는 눈물이었다. 개방적 예술 단원에게 큰 박수를 보내는 예술의 감정으로 유혹하는 이들의 뿌리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예술은 예술일 뿐 동정에 눈물 흘리게 만든 동포들의 모습 쉬움만 남아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금강산 산악의 풍경 대자연을 눈으로 다 보지 못하거늘 말과 글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2, 외금강 만물상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외금강 만물상을 가는 기대감으로 지정된 버스에 올랐다. 만물상 입구까지 50여 곳이 S자로 가파른 고갯길을 35대의 버스가 올라가는 험난한 길이다. 이 길은 일정시대에 닦아놓고 사용하지 못한 암흑의 길을 현대아산에서 도로를 포장한 후 관광버스를 도로 폭에 맞추어 특수 제작한 35인석 버스라고 한다. 운전기사는 모두 중국 조선족을 채용하여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주차장을 올라가는 버스는 S코스의 도로에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듯이 보이는 그 자체의 광경이 예술품이었다.
만물상은 해금강에 만물의 예술을 차려 놓은듯하다고 하여 만물상으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만물상은 금강산의 조형적 조각적인 미를 대표하는 곳으로서 사람들은 경탄과 감탄만 할뿐 말과 글 시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곳이다. 옛날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신선, 선녀들의 길만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곳을 19세기 시인 박세당은 1만 송이 연꽃이 피어있는 만물상을 보고 천 자루의 창을 꽂아 세운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문인 최치원은 층암절벽 봉우리의 山岳 美를 보고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뿌렸는가.”라고 감탄을 했던 곳이라고 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비탈길에 올라서서 선녀들이 놀았다는 천선대를 기점으로 하늘 문을 열고 망양대에 올라섰다.
전망대에서 보는 절경은 외금강의기세차고 장엄한 봉우리와 함께 온정동의 골안이 손금을 보듯 보였으며, 멀리 내금강 일대가 두루 보였으며 어디가 어딘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로봉을 비롯하여 세존봉 일대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었다.
천선대는 만물상 경치가 하도 좋아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비치는 듯 머리 위에는 낮달이 해와 같이 맑게 떠 흐르고 있었다. 때 늦은 단풍이 띄엄띄엄 흩날리는 이곳은 화강암의 벽이 비바람에 깎이고 삭아서 이루어진 기묘한 전망대다. 해발936m로서 온통 돌로 된 칼등 같은 등마루가 잘려나간 것 같으며, 그 아래는 수 백길 벼랑이 만물상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 뛰어난 경치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여기서 서남 쪽 방향으로 옥려봉 산등봉 세존봉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뒤를 돌아 올려보면 높이 1,236m나 되는 오봉산으로 불리는 우의봉, 무애봉, 천진봉이 하늘을 더 받들고선 기둥 같은 천주봉, 천녀봉의 다섯 봉우리와 세지봉이 색다른 모습으로 병풍처럼 빙 둘러솟아 모든 경치를 독차지 한 듯하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갑골 산으로 변하는 만물상 정상을 향하는 삼선암은 알 수없는 이상야릇한 봉우리들과 천태만상을 이룬 기암괴석들이 황홀경을 펼쳤다. 선속에 능선을 따라 탑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칠층암의 바위를 보며 아래 위가 절벽인 산벼랑에 턱이진 윗부분은 말안장 같아서 마음 놓고 쉴만한 장소였다.
만물상을 둘러 산행을 마친 일행은 하산하여 목련관에 들어갔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종업원들의 예쁜 얼굴과 쭉 빠진 몸매에 복장 또한 세련된 모습이었다. 식사를 위해서 사전에 준비된 식탁에는 빈대떡 하나와 오차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임금이나 맛볼 수 있는 빈대떡은 한입에 넣어도 되는 적은 양이다. 맛이 좋아서 “하나 더 줄 수 없나요”라고 했더니, 맛이 있으면 사 잡수세요, 1개당 4불입니다“ 모두 한 방 맞은 듯 말을 멈추고 말았다. 점심은 북한의 전통음식 냉면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아가씨를 보니 비록 사상은 다르지만, 한민족이기에 필자는“집에 두고 온 내 딸같이 귀엽네요. 말을 건네면서 2불을 손에 쥐여 주었다. 표준어를 쓰며 인사하는 모습이 궁전에 사는 여인같이 아름답고 겸손해 보였다. 비록 속에는 검칙한 살생 무기를 감추고 있을망정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 있는 애교가 만점이었다.
외금강 만물상
천하절경 천일 문을 열면 해금강을 둘러싼 만물상
없는 것 빼고 상점을 차린 외금강
오봉산의 연봉들과 세지 봉 기암괴석
우뚝우뚝 솟아선 벽옥의 군상을 지키는 수문장같이
갑옷을 입고 앉은 무사바위
사람을 위압하는 삼선 암의 정선 대
굴곡을 걸친 쀼쭉 쀼쭉한 천연이 망양 대를 묀 조각달은
바다를 저어가는 돛단배 같다
산 건너 외로이 떨어진 독선 암을 돌아서
천여봉과 세지봉의 천계 천의 암벽에 올라서면
칠증암 벼랑 끝 험상궂은 얼들로 서있는 귀면 암이
주인같이 만물상을 지키고 있다
조선의 맥 산등을 실은 옥빛 바다
층층이 쌓은 산들의 탑들 출렁이다 못해
무너질까 두려운 분노가 날 잡는 임 같아
돌아서는 길을 어이할꼬!
북한 여자들은 못 살면서도 대다수 자존심이 강하여 사람이 보는 곳에서는 관광객이 건네주는 선물은 거절한다고 했는데 반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받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왜 못 밭아요. 라고 하는 말은 사양할 줄 모르고 달러를 탐내는 무서운 여자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도 1불을 손에 지워주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1순위로 금강산에 근무하게 된 수준 높은 지식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여성 상위시대의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인의 미인계에 끌려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작전인 듯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후 버스로 하산하여 자유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3박5일의 여정은 끝난 셈이다. 자유 시간을 마치고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첫날 목욕을 했던 자연의 경관에 넋을 잃은 동료들은 도보로 목욕탕에 도착했다. 겨울의 날씨에 눈발이 휘날리는 노천탕은 적막강산이다, 마지막 목욕이 끝난 후 모두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식사는 만찬이었다. 술 파티로 이루어진 밤은 12시를 넘기면서 비틀거린 몸으로 숙소에 덜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집으로 가는 것만 남아있다. 점심을 마친 후 자유 시간은 선물 사기에 여염 없이 바쁘다.
모두 버스를 타고 출국절차를 밟기 위해 고성항에 도착했다. 출국절차는 입국 절차보다 더 까다로웠다. 돌아가는 길은 뱃길이 아니고 육로로 통행하였다. 철책으로 막아둔 4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가는 도로주변에는 군데군데 배치된 검문소와 高地의 초소 등 군사시설에서 여행객을 지키고 있었다.
경계의 한계선 2킬로에서 1km 침범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내 젊은 청춘을 7사단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곳의 군사시설은 남한의 60~70년대의60-70년대의 시설에 불과한 비참한 첨사였다. 분계선에서 공동으로 작업 하는 철로의 노무자들도 보였다. 또한 현대에서 기증한 도자와 지게차도 보였다. 기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길어보이던 비무장지대를 지나 어느덧 고성군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를 벗어나자 대한민국 국군이 철책선 문을 열었다. 환영의 인사를 받을 때, 모두 환호의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조국의 땅으로 들어섰다. 출입국 관리소의 간단한 검색으로 짧은 기간의 여행은 끝났으나 물 수 없는 금강산이 가슴 안 구석구석 차지하고 있었다.
세대가 바뀐 북한은 핵무기를 멈추고 남한의 미래에 다가올 눈부신 세계에 동참하는 기세는 보여 왔으나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아직도 미지수에 머문 북한의 공산주의를 믿지 못하는 레닌 사상을 기억하며 쇼펜하우어의 명언을 생각해본다.
“인생의 저녁은 그 등잔을 들고 찾아온다. 인생의 처음 사십 년은 본문이고, 다음 삼십 년은 그 주석이다. “핵실험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듯이 날뛰는 정치인들을 보며 과연 통일은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는 점점 제자리로 돌아서고 있는 북한은 북한일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것으로 예측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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