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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에 의해 분단되었으며, 국제정치적 냉전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분단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은 국제정치적 변화에 기인하여 가능할 수 있었다. 즉 동서진영간의 화해 분위기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주변 강대국들의 묵인 속에서 독일 민족의 염원이었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을 우리는 흡수통일이라고 부른다. 즉 자유주의 진영이었던 서독의 경제적 우위 하에 사회주의 진영이었던 동독을 흡수하는 모습으로 통일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다면 독일의 통일과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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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독의 분단 |
독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2월 12일 미국,영국,소련은 얄타협정을 체결하였고, 1949년 9월 20일 미국,영국,프랑스의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 10월 7일 소련의 점령지역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었다. 동서냉전 속에서 초기 독일연방공화국의 통일정책은 서방국가와의 결속을 바탕으로 한 힘의 우위에 입각한 흡수통일방안이었으며, 1961년 동독의 베를린장벽 구축으로 인하여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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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정책과 베를린장벽의 붕괴 |
서독의 브란트수상은 “선평화 후통일”을 기조로 하는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1972년 “동서독 일반통행 협정”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동방정책으로 인하여 교류협력의 제도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교류의 증가는 동서독주민 상호간의 동질감을 확대하였고 전체 독일인의 통일의지를 강화하였다. 1989년 소련 및 동구국가들의 개방과 개혁정책에 의해 변화되어진 동서진영의 화해 분위기는 더 이상 베를린 장벽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결국 통일을 열망한 동독인들에 의해 11월 9일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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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을 향한 발걸음과 통일의 실현 |
1989년 11월 28일 동독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정부구성과 독일민족의 자결원칙에 의한 통일실현을 골자로 하는 서독 콜수상의 “독일통일을 위한 10개항”이 제의되었다. 이러한 서독의 통일정책은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얻었고,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아래 자유?비밀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기민당을 중심으로 한 연립내각이 구성되어 서독으로의 가입을 추진하였다. 5월 18일 동서독은 “화폐.경제.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 8월 3일 “선거조약”을 체결하여 경제통합 및 정치통합에 합의하였으며, 8월 31일 통일 “독일 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간의 독일통일의 완성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동독의 서독으로의 가입을 확정지었다. 9월 12일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4대 전승국은 “독일의 지위에 관한 종국조약”을 체결하여 통일 후에도 독일이 유럽경제공동체(EC)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남을 것이라는 조건 하에서 통일을 승인하였다. 10월 3일 동.서독은 “독일 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간의 독일통일의 완성에 관한 조약”을 발효시켜 독일민족의 자결에 의한 평화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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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연표> |
연 도 |
주 요 내 용 |
1945 |
..2월 12일 - 전후독일에 대한 점령.관리 및 배상문제에 관한 비밀협정 |
1949 |
..5월 23일 - 서독(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정 ..9월 21일 - 독일연방공화국 수립 ..10월 7일 - 동독(독일민주공화국)정부 수립 |
1961 |
..동독의 베를린장벽 구축 |
1969 |
..10월 28일 - 동방정책 발표(빌리 브란트 서독수상) |
1972 |
..10월 17일 - 일반통행협정 체결 및 발효 ..12월 21일 -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
1989 |
..9월 11일 - 헝가리와 오스트리아간의 국경개방 ..11월 9일 - 베를린장벽 붕괴 ..11월 28일 - ‘통일방안10개항’ 제의(콜 서독수상)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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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 동독의 자유총선거 ..5월 18일 - 경제통합 합의(‘화폐.경제.사회통합에관한국가조약’ 체결) ..8월 3일 - 정치통합 합의(선거조약 체결) ..8월 31일 - 통일조약 체결 ..9월 12일 - 4대 전승국의 통일 승인(‘독일의지위에관한종국조약’ 체결) ..9월 25일 - 연방선거법(5%저지조항) 위헌 판결 ..10월 3일 - 독일 통일(통일조약 발효) ..10월 8일 - 연방선거법 개정 ..12월 2일 - 연방의회 총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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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독일의 후유증 |
독일의 통일은 국제정치질서의 변화로 인하여 갑작스레 찾아오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은 통일 후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동.서독의 경제통합과정에서 나타난 구 동독 산업체의 도산, 대량실업, 동서독 임금격차, 재산권 반환 문제, 통일비용 충당을 위한 서독주민들의 희생 등은 통일독일에 심각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단지 이러한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분단이후 이질화된 사회.문화적 차이는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동독민들에게 심리적 억압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서독 또한 막대한 통일비용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이러한 통일 후유증을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인해 이전의 서독경제 조차도 어려움을 겪었다. 통일독일은 이러한 사회.문화적 이질감에 따른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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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독일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
어느새 독일의 통일은 1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통일독일은 심각한 후유증을 점차적으로 해결해 왔으며, 이제는 정치경제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독일의 분단에서 통일까지의 경험은 우리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바램에도 많은 시사점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통일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남북한 당사자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주변국의 협력과 도움도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점진적이며 현실 가능한 통일방안을 마련하여,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갈등요인을 최소화해 나간 이후 평화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즉 통일여건을 충분히 마련한 이후에 차근차근 통일을 조성해 간다면 독일과 유사한 후유증은 감소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한민족은 서로의 삶과 가치를 존중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새로이 창조될 통일한국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한민족의 염원이 담긴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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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회담의 역사 |
남북간의 대화와 협상의 역사는 6.25 전쟁으로 인한 단일 민족의 분단과 함께 시작됐다.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국제사회에 남북한이 단일 민족임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지금까지 3백50여 회의 남북 대화가 꾸준히 전개됐다. 그러나, 남북회담은 남북한 양측의 정치적 상황 변수에 커다란 영향을 받으면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제자리 걸음을 걸어온 것이 사실이다.
6.25 전쟁 이후 첫 남북대화는 전쟁으로 인한 실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3년 12월 11일부터 1954년 3월 1일까지 휴전 협정 제3조 59항에 따라 열린 '실향민간 귀환 협조위원회'였다. 그리고 1962년 북한이 국제 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참가를 주장하고 판문점 체육회담을 제의함에 따라 그 해 12월 스위스 로잔과 홍콩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이후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료됐다. 이 두 회담의 목적과 성격은 70년대와 80년대 다양한 형태의 회담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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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
1970년대는 7.4 남북공동성명과 조절위원회, 적십자 회담이 대표적인 남북 회담으로 기록되고 있다. 71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적십자 파견원 접촉으로부터 시작된 남북 적십자 회담은 현재의 남북회담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낸 모태이다. 예를 들어, “판문점 상설연락사무소 설치 및 연락관 상주” 및 “직통 전화가설" 등 오늘날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이 되는 장치들이 이 때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이어 판문점 예비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의제로 정한 남북 양측은 72년 8월부터 73년 7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의 적십자 본회담을 가졌지만, 이산가족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인식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없이 회담을 끝냈다. 남북 적십자 접촉 및 회담과 병행해 당국간에는 71년부터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간의 비밀교섭이 진행됐다. 이후 이 부장의 평양 방문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이어지고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개항으로된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다. 이어 남북조절위 회의가 개최됐지만 국내 및 국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성과를 얻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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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1980년대 남북회담의 성사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재개되었다.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과 서울에서 열리는 두 게임에 단일팀을 출전시키자는 남측의 제의에 북측이 호응함에 따라 판문점에서 체육회담이 세 차례 열렸고 85년 10월부터 87년 7월까지 네 차례의 회담이 로잔에서 열렸지만 아무런 소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어 84년 여름 남한에서 발생한 수해에 대해 북측이 구호 물자 지원을 제의했고 남측이 이를 수용함에 따라 적십자 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리면서 남북대화가 본격화됐다. 이를 기회로 73년 중단됐던 적십자 본회담이 재개되면서 85년 5월 이산 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교환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85년 9월 20일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동시 교환방문이 실현됐다. 또 당국간에는 84년 11월부터 경제회담이 열렸다. 남북간 교역과 경제 협력을 추진하는 상설기구 설치 등을 논의한 이 회담은 남북간 경제협력문제를 대화 테이블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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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1990년대는 고위급 회담으로 남북대화의 문을 열었다. 서울과 평양을 8차례 오가며 열린 이 회담에서는 92년 남북 문제 해결의 '권리장전'으로 평가되는 기본합의서가 체결돼 군사 교류와 협력, 화해, 핵 통제의 4개 공동위원회를 가동키로 했다. 고위급 회담이 가동 중이던 91년 북한은 그동안 입장에서 후퇴해 유엔에 남한과 동시에 가입하는 등 남북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남북회담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북한의 핵 위기로 남북 관계는 악화되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남북간 실무절차 합의 등으로 역사적 정상 회담이 기대를 모았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불발되고 말았다. 이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98, 99년 비료지원과 이산가족문제를 연계한 차관급 회담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잇따라 열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베이징 특사접촉을 거쳐 새 천년 첫해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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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대화.교류 연표> |
연 도 |
주 요 내 용 |
1972 |
*7.4남북공동성명 발표(7.4) *남북적십자회담(8.29) *남북조절위원회(11.30) |
1985 |
*남북국회회담 예비접촉(7.23) |
1985 |
*남북이산가족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실시(9.20) |
1988 |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8.19) |
1990 |
*남북고위급회담(9.4) |
1991 |
*남북한 UN 동시가입(9.17)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2.10)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합의(12.31)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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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 채택(6.28) |
2000 |
*남북정상회담(6.13) *6.15남북공동선언 발표(6.15) *남북장관급회담(7.29) *남북이산가족 방문단 교환방문(9.25) *남북국방장관회담(9.25) |
2001 |
*제3차 남북적십자회담 개최(1.29~31) *제4차 남북군사실무회담 개최(1.31) *제5차 남북군사실무회담 개최(2. 8) *제3차 이산가족방문단 상호 교환방문(2.26~28) *남북 이산가족 서신교환(3.15) *제6차 남북 장관급 회담 개최(11.9~1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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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 통 령 ...................................국 방 위 원 장 김 대 중 ...................................김 정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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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정상회담의 의의 및 재개 노력 |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공동선언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첫째,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최고당국자가 만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의의를 갖는 큰 사건이다. 또한, 6.15공동선언은 남북의 최고당국자가 윈칙적 합의를 양산하기보다는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직접 합의.서명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둘째, 남과 북이 상호 체제 인정을 바탕으로 한반도 문제를 그 당사자인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와 가능성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도 남북정상회담의 커다란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주변4국의 이해와 협조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당사자인 남북한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분단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이 제3국(인)의 개입이나 중재없이 남북한 당사자들의 협상을 통해 성립되었다는 점과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당국간의 상시적 대화채널을 구축한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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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경협을 비롯한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교류와 협력의 활성화를 위한 기반도 마련하였다. 남북경협은 남북간의 신뢰구축을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인 동시에 통일로 가는 대장정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전략이다. 남북경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남북한의 기술자,근로자의 접촉은 민족동질성의 회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두 정상이 이산가족문제 해결의 시급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이산가족 상봉 등에 합의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정상회담의 역사적 상징성을 가장 실감케 해준 것이었다. 이처럼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경협을 비롯한 다방면의 교류협력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넷째,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 정착의 계기를 이끌어 냄으로써 동북아 국제질서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였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두 정상은 상호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상대방을 위협하는 행위를 자제하기로 함으로써 한반도의 불안정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 데 기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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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정부의 일관된 대북 화해협력정책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의미로 강조될 만하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정부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고, 이에 대해 북측이 초기의 의구심을 버리고 당사자간 대화에 응했기 때문이다. 즉 남과 북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각종 회담의 다양화.정례화, 이산가족 상봉 등 각종 교류의 활성화와 한반도 냉전종식 과정 진입 토대 마련 등 괄목할 진전을 이루었다. 한편, 2001년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문제가 남북관계에 있어서 큰 관심사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이후 2000년 9월 14일 김용순 특사의 서울 방문시 재확인된 사항으로 실현 여부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높았다. 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루어질 경우 남북관계가 한 단계 더 진전될 수 있다는 인식하에 북측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남북공동선언의 합의사항을 이행할 것을 여러차례 촉구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8월 방북한 우리측 언론사 사장단과 2001년 5월 평양을 방문한 페르손 스웨덴 총리 등에게 서울 방문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2001년 12월말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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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역대 남북한 합의서 내용 |
■ 남북공동성명(1972.7.4 발효) ■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1972.11.4발효) ■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에 관한 합의서(1985.8.22발효) ■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2.2.19발효) ■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2.2.19 발효) ■ 남북이산가족방문단 교환과 면회소 설치운영 및 비전향장기수 송환에 관한 합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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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해 우리 민족이 해야 할 노력은 무엇보다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바램을 하나로 통합하여 단결하고,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점진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50여 년 간의 분단으로 인한 남북한간 이질화의 심화는 이러한 노력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남아있다. 최근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류는 가장 중요한 통일의 기반일 수 있는데, 이는 대북지원에 따른 노력의 결실이라고 보여진다.
대북지원은 1995년 자연재해로 북한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정부차원에서는 국제기구나 적십자사를 통한 간접지원과 당국간 협의를 통한 직접지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대북지원이 이루어졌다. 민간차원에서는 초기 대한적십자사가 국제적십자사를 경유하여 대북지원을 하였으나, 1997년 5월 남북적십자사간 합의 이후에는 남북한간 직접전달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동포를 위한 대북지원을 다음과 같은 세 방향에서 전개하고 있다. 첫째, 인도적 차원의 무상지원은 조건없이 추진한다. 둘째, 남북상호간 이익이 되는 경제교류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적극 추진한다. 셋째, 정부차원의 지원은 신축적 상호주의에 따라 지원한다. 즉 국민의 부담으로 귀결되는 정부차원의 지원은 국민의 의사에 따라 북한의 상응한 조치를 보아가면서 지원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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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차원 대북지원 현황(2001.12.31 현재) |
기 간 |
지원 규모 |
비 고 |
2000년 |
7,863만달러 |
- 비료 30만톤 직접 지원(944억원) * 20만톤(635.7억원), 추가 10만톤(307.9억원) |
2001년 |
7,045만달러 |
- 내의 150만벌 직접지원(46억원) - 비료 20만톤 직접지원(638억원) - 세계식량기구를 통한 옥수수 10만톤 지원(223억원) - 세계보건기구를 통한 말라리아 방제 지원(6억원) |
계 |
4억5,005만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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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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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차원 대북지원 현황(2001.12.31 현재) |
기 간 |
규 모 |
내 역 |
2000.1~ 2000.12 |
3,513만달러 (421억원) |
- 한적창구(3차 추가지원 : 16개 단체 113억 2,992만원 *쌀떡 20톤, 감귤, 의료장비 11종, 기초의약품 59종, 밀가루, 비료, 농약, 비료생산컨테이너, 구충제, 건빵, 한우 500두, 장난감, 분무기, 옷감, 의류, 이불, 의약품 및 의료장비 등
- 독자창구 : 13개 단체 307억 3,871만원 *이웃사랑회, 우리민족서로돕기, 월드비전, 한국JTS, 천주교민화위, 북한동포후원연합회(남북나눔), 유진벨,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한민족복지재단, 어린이어깨동무,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의약품, 의료장비, 의류, 농기계, 비료, 밀가루, 설탕, 분유, 농약, 학용품, 수경재배자재, 가축, 사료 등 |
2001.1~ 2001.12 |
6,494만달러 (844억원) |
- 한적창구(18차) : 286억원 *배 3,150톤, 사과 4,000톤, 감자 5,000톤, 못자리용 비닐 552톤, 당근 2,000톤, 전지분유 23톤, 이유식 2톤, 항생제, 담요 759장, 내의 159만벌, 연어(치어) 55만마리, 구급차 10대, 포스팜 액제 등
- 독자창구 : 19개 단체 558억원 *남북나눔, 유진벨, 월드비전, 한국JTS, 한국이웃사랑회,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천주교한마음한몸운동본부, 국제옥수수재단, 불교종단협의회,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한민족복지재단, 남북농업발전협력민간연대, 새마을운동중앙회, 평화의 숲, 남북협력제주도민운동본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원불교 등
*의약품, 의료장비, 의류, 농기계, 비료, 밀가루, 설탕, 분유, 농약, 학용품, 수경재배자재, 가축, 사료 등
* 유니세프한국위원회 : 구충제(230만정) $684,843(85,605만원상당) |
계 |
16,191만달러 (1,960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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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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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교류협력의 기반 조성 |
지난 1988년 7월 7일에 우리 정부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를 토대로 같은 해 10월에는 ‘남북경제개방조치’를 통해 남북한간 교역을 인정하고, 이듬해 6월에는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지침”을 제정하였고 북한과의 교역이 합법적으로 추진되는 등 북한주민과의 접촉도 성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북교류를 더욱 효과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우리 정부는 1990년 8월 1일에는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관련 법령을 제정하는 등 남북교류-협력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1993년 3월에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남북교류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로 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림에 따라 정부는 1994년 11월 ‘남북경제협력 활성화 조치’를 비롯한 실천적인 경제협력추진기반을 조성하는 등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남북교류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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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교류-협력 현황 |
1. 인적교류 |
인적교류는 남북한의 주민이 상대측 지역을 방문 또는 접촉하거나 제3국 등에서 만나 교신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남북한주민의 왕래는 판문점을 통한 왕래와 제3국을 통한 왕래가 있는데, 판문점을 통한 왕래는 주로 당국간 회담을 위한 왕래 또는 당국의 주선에 의한 민간인들의 한정적인 왕래이고 대부분 제3국을 통해서 왕래하고 있다.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송한 것이 지금까지 판문점을 통과한 최초의 민간인 왕래였다. 현재까지는 주로 남북한 당국간의 단체회담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최근에는 보다 많은 인적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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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10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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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물적교류 |
지난 1988년 10월부터 시작된 남북한간 물적 교류는 북한의 경제난 타개라는 실리적 목적에 기인하여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인적교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활발한 편이다. 물적 교류의 연도별 추이를 살펴보면, 1988년 교역이 시작된 이래 1990년까지 3년 간은 그 실적이 저조하다가 남북교류-협력 관계법령이 제정?시행된 1991년에는 전년에 비해 8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후 1998년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 당시에는 상당히 감소하였으나, 1999년의 증가를 거쳐 2000년에는 4억 2,515만 달러, 2001년에는 남북관계와 국내경기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4억296만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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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12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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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북협력사업 |
남북한간의 교역의 성과에 따른 우리 기업들의 북한지역 투자도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4년 11월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달 ‘남북경제협력 사업처리에 관한 규정과 국내기업 및 경제단체의 북한지역 사무소 설치에 관한 지침’을, 1995년 6월 28일에는 ‘대북 투자 등에 관한 외국환 관리지침’ 등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 1998년 경협활성화 조치와 2000년 12월에는 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상사분쟁해결절차, 청산결재 등 4개 경협합의서가 서명되었다. 이와 같은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에 따라 경제교류와 협력이 꾸준히 증진되어 2001년 12월 현재 총 45개 기업이 남북경제 협력사업자로 활동중이다. 이 중 협력사업 승인을 받은 기업은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지역에 공단조성사업을 추진하는 (주)현대아산을 비롯하여 (주)태창, (주)녹십자, (주)한국전력, (주)한국통신, 외환은행 등 23개 기업이며, 나머지 22개 기업은 현재 북한측과 구체적인 사업추진에 대한 협의를 진행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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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14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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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분야의 협력사업은 대한탁구협회 등 30개 단체가 협력사업자 승인을 받았으며 2001년 12월까지대한탁구협회는 물론 중앙일보사의 통일문화연구소 등 23개 단체가 협력사업 승인을 받아 북한측과 구체적인 사업추진을 완료했거나 진행 중에 있다. 사회?문화 협력사업의 경우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단일 팀을 구성하여 참가한 사례가 있으며, 최근에는 평양교예단의 서울공연(2000.6.1~10),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2000.8.5~12, 56명), 남북교향악단(KBS교향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합동연주회 개최(2000.8.20~22, 서울), 춘향전 평양공연(2001.1.30~2.3), 8.15남북공동행사(2001.8.15~21, 평양) 등 점차 다양화되는 추세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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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통일부, 『2002통일백서』. 2001.(15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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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교류협력 관련 법.제도 정비 |
정부는 1990년 8월 1일에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관련 법령을 제정하여 남북교류협력이 제도의 범위 내에서 운영되도록 노력해 왔으며 변화되는 상황에 맞게 남북교류협력과 관련된 제도를 지속적으로 정비해 왔다. 또한 남북관계 상황변화에 맞도록 법령의 개정을 추진하는 한편, 법령 적용과정에서 필요한 세부사항을 정하기 위해 고시.훈령 등 하위법령도 갖추어 왔다. 이처럼 지속적 제도의 정비와 보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남북관계의 불안정성과 주변국과의 관계로 인한 남북교류와 협력의 장애들은 서로간의 경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평화적 방법들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남북한은 정상회담을 비롯한 상호간의 약속을 저버리지 말고 꾸준히 교류와 협력을 추진해 나간다면 양국의 경제적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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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
주 요 내 용 |
1998 |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시행령" 개정 *"남북 경제협력사업처리에 관한 규정" 개정 |
1999 |
*“남북 경제교류협력에 대한 남북협력기금지원지침”을 제정 |
2000 |
*“남북경제교류협력에 대한 남북협력기금지원지침”을 개정 |
2001 |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시행령” 개정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시행규칙” 개정 *“남북교류협력법 시행령” 개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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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교류협력법 |
■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시행령 ■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시행규칙 ■ 남북협력기금법 ■ 남북협력기금법시행령 ■ 남북협력기금법시행규칙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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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소년들이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선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통일은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주인정신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강한 의지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살아가며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 부모님의 도움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감을 가지고 성취해보는 정신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 자신감과 더불어 어떠한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한 자세와 올바른 판단력으로 합리적인 해결능력을 키우는 것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위 친구와 부모님을 대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귀담아 들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가 다른 부분은 인정하며, 자신만을 생각하고 않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미래의 통일 한국에 꼭 필요한 청소년의 자세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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