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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이충무공 산소
대은 추천 2 조회 82 12.09.19 08:54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본 자료는 본인이 직접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자락에 영면하고 계신 이충무공의 산소를

               찾아 촬영한 사진과 여러 백과 사전을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교육적, 학술적 이용 이외에 상업적 사

               용을 금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조국을 구하시고 민족의

               영웅으로 우뚝 서신 충무공 이순신 장과 부모형제에 관한 자료도 들어 있습니다. 행여 본인의 궤적이

               덕수이씨 가문에 흠이 될까 걱정이 되면서도 저 혼자 보기 보다는 여러 후손들이 함께 공유하며 충무공

               의 공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각자의 가문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

               니다.

 

                                                                                                    2012. 9. 18.   인천에서  여강 최재효 拜

 

 

 

 

 

 

 

 

 

 

 

       

         이충무공묘(李忠武公墓)는 사적 제112호로써 충남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묘소이다.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이 충무공이 전사하자 남해 고금도(古今島)에 모셨다가 이듬해인 1599년 2월에 충남 아산 음봉면

  금성산(錦城山)으로 이장했다가 1614년 현재의 어라산(於羅山)에 묘역은 9,583㎡이며 묘 1기 외에 비석 1기, 상석(床石) 1기,

  장명등 1쌍, 석상(石像) 1쌍이 보존되어 있다.

 

 

 

   이충무공 산소 입구  좌측은 화장실이고  우측은 관리소

 

 

 

 

 필자가 이충무공 산소를 찾은 날이 2012.9.16(일) 휴일인데 주차장이 텅 비었다

 

 

 

  현충사에서 8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충무공이 영면해 계시지만 정작 님을 찾는 발길이 보이지 않아 너무 공허하다 못해 쓸쓸하다

 

 

 

 

 

 

   현충사는 여러번 다녀가도 정작 임이 계신 산소를 찾는이는 드물다

 

 

 

 

  충우공의 강직한 성품과 절개를 상징하듯 산소 가는 길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하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고하지만 님의 산소를 찾는 발길이 뜸하다 

 

 

 

     풍전등화 앞에 선 조국 조선을 구한 충무공의 기상을 대변하듯 임의 산소 주변에 독야청청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저기  이충무공의  합장묘가 아련하게 보인다

 

 

 

 

  산소 입구 좌측에 이충무공의 비석이 서있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하여

 

 

 

 

개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출생과 가족관계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의 후손으로 조선에 들어와 7대손 변(邊)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인 10대손 백록(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지내 가세도 기울어져 있었다.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당시 한성부 건천동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성장했다. 그의 전몰 후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품계에 오른 보성군수 진(震)의 딸인 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의 사이에 회(?)·열()·면(?) 등 3형제와 딸을 두었고, 서자로 훈(薰)·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회는 현감,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면은 난중에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훈과 신은 무과에 올랐다. 두 형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또한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극진하게 대했다고 한다.



무과급제와 초사(初仕)시절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 되는 1572년(선조 5)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했다. 그뒤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했다.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충청병사의 막하 군관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7월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워 11월에 훈련원참군이 되었으나 15일에 아버지가 죽자 휴관했다. 1586년 1월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16일 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천거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녹둔도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하고 있을 때 섬의 방비를 위하여 증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사 이일(李鎰)은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랑캐의 습격을 당하여 패한 죄로 하옥되었다. 1589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고, 또 순찰사의 주청으로 조방장(助防將)을, 이어 11월에는 선전관도 겸직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모두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2월 13일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지금의 여수)에 부임했다. 유성룡(柳成龍)은 이미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을 당시 이순신의 이름을 소개한 바 있었으나, 이순신은 이이가 자기와 성씨가 같은 문중이라 하여 그의 재직시에 찾아가기를 사양했다 한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임진왜란 때의 행적


전라좌수사의 취임 이듬해인 1592년 3, 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병력이 도합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침략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와 닿았다"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통첩과 "왜선 350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닿았다"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공문을 받은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순찰사와 병사,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에게 공문을 보냈다(4.15). 경상좌우도 수군은 왜군의 부산 상륙을 보면서도 전혀 싸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원균은 배와 화포와 군기를 미리 바다에 침몰시켜 버렸다고 한다(〈징비록 懲毖錄〉). 원균은 비장 이영남(李英男)의 책망으로 전라좌도 수군의 구원을 청했으나, 이순신은 맡은 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영역을 넘어 경상도로 출동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등 막하 장령들의 격렬한 찬반논의와 그들의 소신을 확인한 끝에 출전의 결단을 내렸다. 4월 27일에 올린 〈경상도 구원에 출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赴援慶尙道狀)〉에서 '같이 출전하라는 명령'(往偕之命)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그로부터 전라좌도의 수군, 즉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제1차 출전으로 5월 4일 새벽 전선(戰船:판옥선) 24척과 협선(挾船) 15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동, 5월 7일 옥포(玉浦)에 이르러 3회의 접전에서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되었고, 제2차 출전인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으나 그대로 독전(督戰), 6월 5일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및 6월 7일의 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모두 72척의 적선을 무찔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었다. 제3차 출전인 7월 8일의 한산해전에서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본함대를 견내량(見乃梁:지금의 거제군 시등면)에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鶴翼陣)의 함대 기동으로 급선회하여 일제히 포위 공격함으로써 적선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이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이어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에서는 적선 42척을 분파했다(→ 색인 : 한산도대첩). 일본수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바다에서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제4차 출전으로, 9월 1일 부산포(釜山浦)를 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서 치명상을 입혔다. 1593년 7월 14일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8월 15일에는 수사의 직에 더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한편 호남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산도(突山島)에 입주하게 하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과 장기전에 대비한 둔전(屯田)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1594년 3월 4일 2번째 당항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분파하고 9월 29일의 장문포해전(長門浦海戰)에서는 적선 2척을 격파했으며, 10월 1일의 영등포해전에서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과 약속하여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했다.

 

1595년 2월 27일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사이의 불화를 염려하여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켰으나, 이듬해 원균의 중상과 모함이 조정 내의 분당적(分黨的) 시론에 심상치 않게 파급되고 있었다. 1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막하 간첩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를 통하여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그날 조선수군의 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하며 간곡히 권유했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조정에 보고되자, 조정 또한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명했다. 1597년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직접 한산도에 와 요시라의 헌책대로 출동 대기하라고 명을 전했으나,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간계(奸計)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출동하지 않았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고 했다. 일본측 기록에는 정월 14일(일본력 1.13)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왜장은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온 것보다 6일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비열한 모함으로 파직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올린 신구차(伸救箚:구명 진정서)에 크게 힘입어 도원수 권율 막하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하명을 받고 특사되었다. 4월 1일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그는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났다. 아산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으나 죄인의 몸으로 잠시 성복하고 바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한편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는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신한 원균은 왜병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이번에도 김응서 및 권율을 경유한 요시라의 같은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정유재침의 다급한 사태에 엄청난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청하여 수군 수습에 나선 그는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고, 칠천량에서 패하고 온 전선들을 거두어 재정비함으로써 출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대문궤 事大文軌〉 권24의 〈명량대첩 장계초록〉에 의하면 8월 24일 어란(於蘭) 앞바다로 12척을 이끌고 나왔는데,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일에는 13척이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8월 29일 명량(속칭 울두목)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 9월 15일에 우수영 앞바다로 함대를 옮긴 후에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하여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도리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했거니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킴에 넉넉히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엄달했다. 9월 16일 이른 아침 명량해협으로 진입한 적선 200여 척과 사력을 다하여 싸워 일본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했다. 일본군은 패전 후 웅천으로 철수했다.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서해 진출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여 7년 전쟁에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임진년의 '한산도대첩'과 정유년의 '명량대첩'은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박해와 수난과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이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명량대첩으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서훈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심신의 쇠약이 더해지며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 피난민들의 생업을 진작시켰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일본력 8. 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이를 물리쳤다. 조·명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토모[宗義智], 다치바나 도오도라[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500여 척의 적선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 이순신은 독전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이순신의 전사에는 의자살설[擬自殺說]이 남게 되었다. 즉 그것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전설과 더불어 7년 전란에 위태로운 전투를 몇 십 회나 치르면서도 그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노량해전의 전과에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순신의 상여는 마지막 진지였던 고금도를 떠나 12월 11일경에 아산에 도착,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에 아산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으나, 전사 16년 후인 1614년(광해군 6) 지금의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 10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1704년 유생들의 발의로 1706년(숙종 32)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세워졌다. 1793년(정조 17) 7월 1일 정조의 뜻으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 1795년에는 역시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가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간행되었다.


 

 

 


 


인품과 문학


이순신은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高尙顔:당시 삼가현감)이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서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끼고 있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泰村先生文集〉 권3).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난중일기 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난중일기〉는 그 친필원본이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필사원본 〈임진장초 壬辰狀草〉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 현재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순신의 문필은 〈난중일기〉와 더불어 몇 편의 시가와 서간문이 남아 있어 그의 문재(文才)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1에는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작별하는 시〉·〈무제육운 無題六韻〉·〈한산도야음 閑山島夜吟〉, 그리고 말미에 24자로 한역(漢譯)된 〈한산도가〉가 수록되어 있다.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 亂中雜錄〉에는 한산도의 작품이 20수나 있었는데 그중에 "바다에 맹세함에 고기와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아네"(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에 간행된 조윤제(趙潤濟)의 〈조선시가사강 朝鮮詩歌史綱〉은 조선 중기의 시조문학발휘시대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이순신을 꼽고 있다.





 

    어라산 중턱에 자리잡은 공의 유택은 보는 사람에게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소나무 숲에서 소나무 향이 풍기는 청풍이 불어 기분이 상쾌하다

 

 

 

 이충무공과 부인 상주방씨의 합장묘

 

 

 

 

 

  공의 산소 둘레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공을 향해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서있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정조대왕이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려 직접 쓴 신도비(어제비 御製碑)를 모신 비각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의 비각

 

 

 

 

  정조대왕의 어제비의 내용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명으로 한글로 번역 제작한 안내판

 

 

 

신도비는 임금이나 2품 이상 관직자의 무덤 또는 길목에 세워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으로서 본 신도비는 이 충무공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하여 정조대왕이 친히 비명을 지어 세운 '어제신도비(禦製臣道碑)'라한다.

 

 

  노송이 모두 공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松人

 

 

 

 


                                                                                                                              - 여강 최재효

 

 

 

 


                    하늘의 명을 받은 것일까
                    백송白松, 백송金松, 흑송黑松, 청송靑松
                    문무백관 도열堵列해 있듯
                    임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네


                    낯선 타관 나그네 맞는 바람도 푸르고
                    풀벌레 소리도 푸르러
                    임을 먼발치에서 우연히 한번만 뵈어도
                    청의靑衣를 입을 것 같네


                    임에게 어라산 송풍松風 한 짐 얻어서
                    저 아래 황금 마을에 풀면
                    잡귀雜鬼들 서둘러 도망치고
                    청학靑鶴 울음소리 들을 수 있겠네


                    이목耳目 없는 소나무도 저리 하거늘
                    눈먼 사람들 고개 거만하게 들고서
                    무례하게 하늘을 노려보는데
                    눈 감으면 머리 위로 뇌성벽력 떨어지리

 

 

                              - 창작일 : 2012.9.16. 16:30


 

 

 

 

 

 

 

 

 

 

고즈넉한 소나무 길

 

 

 

 

  바람과 산새 그리고 종종 산짐승들의 울음 소리만 들려온다

 

 

 

 

 

          초,중,고등학교 학생이 있는 가정에서는 현충사만 돌아 보고 가지 말고  이곳 이충무공 산소를 직접 방문해서 임의 숨결을 느껴보면 이충무공에 대한

          감정이 새로울 것 같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무척 인상적이다

 

 

 

 

  임을 찾는 부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소나무의 수령이 보통 100년은 넘을 듯

 

 

 

 

 

       묘소 주위에는 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망주석 1쌍·석상 1쌍·문인석 1쌍·광명등·

   묘비석이 배치되어있다. 

 

 

 

 

 

 

 

         임의 산소는 위압적이지 않고 누구든 반갑게 맞아주는 수더분한 모습이어서 마음이 평안하다

 

 

 

 

 

 

 

 

 

 

 

 

 

                                                       赤山
                                                  - 寄, 李忠武公 -

 

 

 

 

 


                                                                                                                            - 여강 최재효

 

 

 

 

 

 

 

                               가을비에 어라산於羅山 촉촉이 젖으니
                     노송老松은 기지개를 켜는 듯
                     더욱 푸르게 빛나는데
                     찬바람에 나그네 흉금胸襟을 고쳐 매네


                     천지가 뒤바뀐다 한들
                     무엇이 임의 충정忠情 가릴 수 있을까
                     비록 남녀가 유별有別하여도
                     동혈同穴은 천지신명의 뜻인 것을


                     한 세월이 바람에 날리고
                     조국도 파하여 청사靑史에 남았지만
                     장부丈夫의 단심丹心은
                     오래도록 산하山河에 중심이 되리


                     사백 성상星霜도 한낱 수유須臾 같아서
                     밖에서 잡음이 커지면
                     어제 처럼 장검長劍을 휘둘러
                     검광劍光이 사해四海를 숨죽이게 하시리

 

 

                                - 창작일 : 2012.9.16. 15:00
                                              이 충무공 산소에서

 

 

 

 

 

 

 


                                [주] 1. 赤山(붉을 적, 뫼 산) 2. 흉금 - 앞가슴 옷깃
                                       3. 수유 - 손가락 한번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4. 寄 - 부칠 기


 

 

 

 

 

 소나무 산책로

 

 

 

 

 

 

 

 

 

 

400년 풍상에도 石人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靑節

 

 

 

 

 

                                                                                                                             - 여강 최재효

 

 

 

 

 


                    어제 오늘이 가을풀 시들듯 쉬 변하고
                    세인世人들 조석朝夕으로 얼굴이 바뀌는데
                    어라산於羅山 청송靑松은 누굴 닮아
                    저리 독야청청獨也靑靑하고 있을까


                    먹구름 내려앉아 풍우風雨 거칠어도
                    청죽靑竹은 우우우 잠시 울기만 할 뿐
                    결코 스러지지 않으니 산천초목이 모두
                    임의 절개節槪를 흠모한 듯 하여라


                    귀신이 건네는 한잔 술에 가벼이 웃고
                    도깨비 한 치 혀에 홀린 요즘 사람들
                    거울 속 제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니
                    잔인한 세월이 언제 번개처럼 지나갈까


                    청풍淸風 불어 회색하늘 파랗게 변하고
                    설풍雪風 내려와 녹음 붉게 물들거든
                    송풍松風 휘몰아쳐 아랫마을 사람들
                    옷깃 여미고 고운임 오래도록 우러르기를

 

 

                               - 창작일 : 2012.9.16. 16:00
                                             아산 음봉면 이 충무공 산소에서

 

 

 

 

 

 

 

 

 


                               [주] 靑節(푸른 청, 절개 절)

 

 

 

 


 

 

 

 

 

  이충무공과 부인 상부방씨의 애틋한 붑의 정을 나타내듯 산소 옆에 연리지가 있고 .......

 

 

 

 

 

 

 

 

 

   충무공 산소 가는 길 우측에 조성된 연못

 

 

 

 

 

 

 

     백련(白蓮)을 보니 평신 무인인 낭군의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 일을 챙기고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건사하시던 이충무공 부인이신 상주방씨가 연상되는 건

   어인일 일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 직계 조상 소개

 


- 11대조 이돈수(李敦守) : 시조(始祖) 고려조 중랑장(高麗朝 中郞將) 부인은 황려(여주) 이씨(黃驪(驪州)李氏)
- 10대조 양 준(陽 俊) : 2세조, 樞密公(추밀공) [1202년(고려신종5)~1243년(고려고종30)] 朝山大夫 興威保勝將軍 贈 銀光靑祿大夫 同知樞密院事

                                   御史大夫 吏部尙書 上將軍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 9대조 소(?) : 3세조, 三司公(삼사공) [1223년(고려고종10)∼1282(고려충렬왕8)] 通議大夫典法判書 知三司事 世子內直郞 贈 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

                        上將軍 判禮部事 부인은 무안 박씨(務安 朴氏)
- 8대조 윤 번(允 蕃) : 4세조, 1309년(고려충선왕원년) 문과 급제. 行 都事 贈 資憲大夫 議政府 左參贊. 7대조 현(玄) : 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 6대조 공 진(公 晋) : 수사재시사(守司宰寺事) 증 영의정(曾 領議政)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
- 5대조 변(邊) : 문과 급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시호 정정공(諡號 貞靖公) 부인은 양성 이씨(陽城李氏)
- 고조(高祖) 효조(孝祖) :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부인은 행주 기씨(幸州奇氏)
- 증조(曾祖) 거(?) : 문과급제(文科及第) 병조참의(兵曹參議) 호랑이 장령(掌令)으로 유명. 부인은 임피 진씨(臨陂陳氏)
- 조부(祖父) 백록(백록) : 생원(生員) 참봉(參奉) 봉사(奉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증 평조참판 부인은 초계 변씨이다. 1519년(중종14) 정암 조광조를

                               구하는 천인소(千人疏)에 참여하는 기묘사적(己卯士籍)에 들어 사화(士禍)를 당하시었다. 이로 인하여 시골에 은거하였다.
- 부(父) 정(貞) : 기묘사화로 인하여 벼슬을 접게 되었다. 서울의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수년을 사시다가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사시었다. 부인은 초계 변씨이다.



 

 

 


 

      친족관계

 

 

 

? 이효조(李孝組) (고조부)

? 이거(李?) (증조부)

? 이백록(李百祿) (조부)

? 변수림(卞守琳) (외조부)

? 덕연 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부)

? 초계 변씨(草溪 卞氏) (모)

? 이희신(李羲臣) (형)

? 이뢰(뇌) (조카)

? 이분 (조카)

? 이번 (조카)

? 이완(李莞) (조카)

? 이요신(李堯臣) (형)

? 이봉 (조카)

? 이해 (조카)

? 이순신(李舜臣) (본인)

? 이우신(李禹臣) (동생)

 

 

 

 

 


       충무공 가계

 

 

 

? 방진(方震) (장인)

? 이순신(李舜臣) (본인)

? 상주 방씨(尙州 方氏) (본처)

? 이회(李?) (장남) 

? 이울 또는 이예(李?) (차남)

? 이면(李?) (삼남)

? 홍비(洪?) (사위)

? 홍가신(洪可臣) (홍비의 부)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 이훈(李薰) (서자)

? 이신(李藎) (서자)[32]

? 임진(任振) (사위)

? 윤효전(尹孝全) (사위)

 

 

 



이순신의 이름은 항렬자인 ‘신(臣)’자를 돌림자로 하였다. 맏형은 삼황(三皇)중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를 본 따 희신(羲臣)이라 하였고, 둘째 형인 요신(堯臣)은 오제(五帝)의 요(堯)임금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신(舜臣) 또한 오제(五帝)의 순(舜)임금을, 동생 우신(禹臣)은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禹)임금을 따서 지은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와 고대사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제왕들이다. 희신(羲臣).요신(堯臣)은 일찍 죽었으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은 순신과 함께 글을 읽었고, 《사마방목(司馬傍目)》에 요신은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 방씨(方氏)와 결혼하여 회·열·면 등 3형제와 서자로 훈(薰)과 신(藎), 그리고 2명의 서녀를 두었다. 이 중 셋째인 면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6세 때 아산 본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면은 다섯 아들 중에서도 담력과 총기가 출중하여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이순신도 면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희신의 둘째 아들 분(芬)은 왜란 당시 성천(成川)으로 피난 가 그곳 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지냈다. 넷째아들 완(莞) 역시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했는데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끝까지 독전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왜란 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병사와 의주부윤을 거쳤으며 정묘호란 중에 종제 신(藎)과 함께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순신과 그의 아들, 조카 등의 전적을 기리기 위해 충남 아산 배암골에 정려비를 세웠다. 덕수이씨 문중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같은 유명한 문인도 있다. 율곡은 13대 손으로 촌수로 따지면 이순신과 19촌 정도가 되며, 두 집안 사이에 교류는 없었다.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 손이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1218년 거란의 침입 때 출정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4대조 때 조선왕조의 개칭을 맞이하면서 문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7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증조부인 이거(李據)는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한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엄격한 탄핵과 간쟁을 서슴지 않아 ‘호랑이 장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卞氏)이다. 이순신의 형제로는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 등 4형제가 있다. 덕수이씨 종중에서는 이순신과 이율곡(栗谷) 그리고 이식(李植 : 1584 ~ 1647) 등 몇몇 집안을 명문으로 치고 있지만, 이순신과 이율곡은 제 4대 조상 때에 나누어져 이순신은 제 12대가 되고, 이율곡은 제 13대가 되어 두 사람의 촌수는 19촌 숙질간이 되며, 이율곡과 이식은 이율곡의 증조부 때에 서로 나누어져 이식은 제 15대가 되고, 이순신은 이식의 먼 증조 뻘이 된다.


한편 이순신은 21세가 되는 1565년에 결혼했다. 배우자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그런데 공교롭게 이순신이 결혼한 이후부터 그간의 문과 수업이 아닌 병학 수련으로 바뀌는 점이 눈에 띈다. 왜 그랬을까. 결혼 후 수학 방향의 변화에 대해 장인인 방진이 열쇠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방진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이충무공전서”의 다음 기록이 눈길을 끈다. ‘정경부인 온양 방씨(溫陽方氏)는 충무공의 부인이다. 부친의 이름은 진(震)인데 벼슬은 보성군수를 지냈다.




 

 

   이충무공 아버지  이정(李貞)님의 묘비석  -  사후  정1품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경연, 병절교위를 증정되었다

   이충무공 어머니 초계변씨는 정경부인에 증정되었다

 

 

 

 

 

 

 

조선시대 품계

 

 

1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현록대부 수록대부
1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흥록대부 성록대부
1 숭록대부(崇祿大夫) 소덕대부 광덕대부
1 숭정대부(崇政大夫) 가덕대부 숭덕대부

2 정헌대부(正憲大夫) 숭헌대부 봉헌대부
2 자헌대부(資憲大夫) 승헌대부 통헌대부
2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의대부 자의대부 이상 대감
2 가선대부(嘉善大夫) 정의대부 순의대부

3 통정대부(通政大夫) 명선대부 봉순대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 당상관 영감
3 통훈대부(通訓大夫) 창선대부 정순대부 어모장군(禦侮將軍)
3 중직대부(中直大夫) 보신대부 명신대부 건공장군(建功將軍)
3 중훈대부(中訓大夫) 자신대부 돈신대부 보공장군(保功將軍)

4 봉정대부(奉正大夫) 선휘대부 진위장군(振威將軍)
4 봉열대부(奉列大夫) 광휘대부 소위장군(昭威將軍)
4 조산대부(朝散大夫) 봉성대부 정략장군(定略將軍)
4 조봉대부(朝奉大夫) 광성대부 선략장군(宣略將軍) 이상 당하관

5 통덕랑(通德郞) 통직랑 과의교위(果毅校尉)
5 통선랑(通善郞) 병직랑 충의교위(忠毅校尉)
5 봉직랑(奉直郞) 근절랑 현신교위(縣信校尉)
5 봉훈랑(奉訓郞) 신절랑 창신교위(彰信校尉)

6 승의랑(承議郞) 집순랑 돈용교위(敦勇校尉)
6 승훈랑(承訓郞) 종순랑 진용교위(進勇校尉)
6 선교랑(宣敎郞) 여절교위(勵節校尉)
6 선무랑(宣務郞)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상 참상관

7 무공랑(務功郞) 적순부위(迪順副尉) 이하 참하관
7 계공랑(啓功郞) 분순부위(奮順副尉)

8 통사랑(通仕郞) 승의부위(承義副尉)
8 승사랑(承仕郞) 수의부위(修義副尉)

9 종사랑(從仕郞) 효력부위(效力副尉)
9 장사랑(將仕郞) 전력부위(展力副尉)

이상 30 22 12 22

 

 

 

 

 

 

 

덕수 이씨(德水 李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이돈수(李敦守) 또는 그의 아들 이추밀이다. 덕수이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충무공 이순신율곡 이이가 있는데 둘 모두 시조가 이돈수이고 추밀은 아들이라고 하였다.

덕수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05명, 상신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배출하였다.

 

고려사의 조충전을 보면 1217년 거란과의 전쟁 때에 조충(趙沖)이 서북면 원수가 되어 지방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경상도 안찰사 이적(李勣)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을 만나 고립되자 이돈수(李敦守)와 김계봉(金季鳳)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덕수이씨는 중종∼영조대에 이르는 약 300년간 성세를 보였는데, 거란을 격파했던 시조 신호위중랑장 이돈수부터 시작하여 원래 무가였지만 조선 중기에 문인파계가 생겨져 무인파계 집안과 문인파계 집안 둘로 나눠졌다는 것이 특색이다. 2000년 대한민국의 인구조사에서 1만 5711가구에 5만 4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지폐에 오른 인물 가운데 덕수 이씨의 사람은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으로, 두 사람이 오른 가문은 덕수 이씨가 유일하며 2009년 6월 23일 발행된 5만원권 지폐의 인물인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덕수 이씨와 관련된 지폐의 인물은 총 3명이다. 참고로 동전 5원 앞면 그림은 충무공 이순신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낳으신 어머니 초계변씨의 산소  -  바라보는 필자의 콧날이 찡하다. 무수한 날 밤을 지새우며 공의 무사를 빌었을 .......어머니

 

 

 

 

 

 

 

 


품계

기관계급

조선

정부기관

일반행정

지방행정

경찰계

문반계 

무반계 

부인호명

대감

영감

관직

 

 

 

대통령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국무총리

 

 

 

대광보국숭록대부

보국숭록대부

부부인

정경부인

대군,군,영,좌,우의정,영사,도제조

종1품

 

좌찬성

우찬성

부총리

 

 

 

숭록대부

숭정대부

봉보부인

정경부인

정2품

 

판서

좌참찬우참찬

장관

차관

도지사

 

본부장

정헌대부

자헌대부

정부인

5위도총관,한성판윤,지사,총리영사

종2품

 

참판

관찰사

차관보

차관보

 

 

가정대부

가선대부

정부인

대사헌,동지사,관찰사등

정3품

1급

참의

목사

관리관

관리관

 

 

통정대부

통헌대부 

절충장군

어모장군

숙부인

도승지.참의,목사,병마절도사,첨지사

종3품

2급

집의

사관

이사관

국장

이사관

 

치안

정감

중직대부

중훈대부

건공장군

보공장군

숙인

 

 

정4품

3급

군수

사인

장령

부이사관3년이상

이사관

 

치안감

봉정대부

봉열대부

진위장군

소위장군

영인

 

 

종4품

 

경력

첨정

 

 

 

 

조산대부

조봉대부

정략장군

선략장군

 

 

정5품

4급

현령

판관

지평

서기관

과장

서기관

군수

부군수

국장

경무관

총경

경정

통덕랑

통선랑

과의교위

충신교위

 

 

 

종5품

5급

정량

교리

사무장

계장

사무관

과장

면장

 

봉직랑

봉훈랑

현신교위

창신교위

 

 

 

정6품

좌량

감찰

승의랑

승훈랑

돈용교위

진용교위

종6품

현감

찰방

 

 

 

 

선교랑

선무랑

여절교위

병절교위

 

 

 

정7품

6급

박사

주사

주사

주사

계장

경감

경위

무공랑

적순부위

 

 

 

종7품

정8품

7급

직장

저작

주사보

주사보

주사보

경사

계랑공

통사랑

분순부위

승의부위

 

 

 

정9품

8급

정사

훈도

서기

서기

서기

경장

종사랑

효력부위

 

 

 

종9품

9급

참봉

서기보

서기보

서기보

순경

장사랑

전력부위

 

 

 

 

 

 

 


 

이충무공 부모님  묘소 - 좌측이 아버지 이정님, 우측이 어머님 초계변씨 묘

 

 

 

 

 

 

 

 

 

 

                          於羅山

 

 

 

 

 


                                                                                                                                 - 여강 최재효

 

  

 

 

                     하늘 뜻으로 씨앗 하나 심어져 고목 되고
                     큰 가지 내려 사방에 재목으로 자라나니  
                     푸른 숲 짙게 우거져 큰 가산家山 이루어
                     덕수德水 가문에 대대손손 광영이어라
 

                     수백 년 세월이 바람처럼 흘러갔어도
                     주렁주렁 달려있는 청송靑松 솔방울
                     가지는 자라나서 단단한 마디 이루니 
                     찬바람에 폭우 몰려 와도 두렵지 않겠네


                     해동海東에 크고 깊은 뿌리 무수히 내려
                     충무忠武, 율곡栗谷 두 거목

                     추풍낙엽 금수강산 붙잡아 세우시니
                     만대萬代에 그 미명美名 밝게 빛날지어다


                     천지가 어둑어둑 비구름으로 뒤덮여도
                     고목 아래 들어가면 빗기운 물러가고
                     까막까치 조차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리니
                     산하는 긴 세월 단잠에 빠질 수 있겠네

 

 
                                 - 창작일 : 2012.9.16. 16:00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이 충무공 산소에서

 

 

  

 

 

 

 

 

                              [주] 어라산(於羅山) - 덕수이씨인 이 충무공과 이 충무공

                                                             부모형제가 영면해 있는 선산으로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다.

 

 

 

 

 

 

 

 

 

 

 

 

  위의 묘의 주인공은 이충무공 큰형님이신 이희신 님이시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시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이충무공과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충무공 둘째 형님이신 이요신과 부인 청풍김씨 합장 묘 - 관직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시었다

 

 

 

 

 

 

 

이충무공의 동생 이우신님과 부인 온양조씨의 합장묘이다. 벼슬은 참봉으로 네 형제 중 가장 낮다

 

 

 

 

 

충무공 신도비 왼쪽에는 이인좌의 난으로 술절한 충무공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가있다

 

 

 

 

  구국의 명장 성웅 이순신 장군의 신도비

 

 

 

 

   좌 - 이충무공 5대손인 이봉상의 신도비     우 - 이충무공 신도비

 

 

 

 

 

 

 

 

- 갈때 : 인천관교동 시외버스터미날 - 아산시 온양읍 시외버스터미날(2시간소요) - 택시로 음봉면 삼거리 이충무공 산소로 이동 (택시 요금 9,200원)

- 올때 : 음봉면 삼거리에서 평택시외버스 가는 500번 버스 승차 - 평택시외버스터미날에서 버스 탑승 - 인천 관교동 시외버스 터미날 (1시간 40분 소요)

 

 

- 대중교통 이용방법 :  서울 구로동에서 아산행 전철 탑승 - 온양읍 하차 - 온양시외버스터미날에서 980번 버스 탑승 - 음봉면 삼거리 이충무공 산소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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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9.22 21:52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_()()()_

  • 12.09.26 08:15

    생할속불교에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배웁니다 ()

  • 12.09.26 08:25

    오늘도 편안하고 즐거운 날되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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