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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봉준호(왼쪽), 박찬욱 감독 © 뉴스1 DB |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없었다면?" 영화인은 물론 일반인들조차 하기 싫은 상상이다.
26년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없었다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됐을지도 모른다.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와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신화의 서막인 '살인의 추억'은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전검열이 일상이던 26년 전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반공이념, 선정성, 폭력성 등 명목으로 수많은 영화가 빛을 보지 못했고, 가위질 당했다. 원로 김수용 감독은 "잘린 필름만 서울·부산을 왕복할 것"이라며 "검열이 없었다면 한국영화가 지금보다 30~50년은 더 앞질러 봉준호가 50년 전에 나왔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사에 일대 획을 그은 사건은 1996년 10월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헌법재판소는 영화 사전심의를 규정한 영화법 조항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권위주의·독재시대가 낳은 기형적 유산은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에도 10여년을 더 연명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헌재 결정 이후 한국영화계는 대부흥을 맞이한다. 창의력과 참신한 시도가 돋보인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1999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영화·문화계는 그 황금기가 헌재의 위헌 결정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찬욱·봉준호 감독이 태어날 수 있는 토대가 이 결정으로 마련된 셈이었다.
◇일제시대 태동기부터 '목줄'…87년 이후에도 '사전검열' 10년간 지속
영화 사전심의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때다. 조선총독부는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영화를 검열했다. 한국 영화사의 태동과 동시에 검열 '목줄'이 채워진 셈이다.
해방 이후 잠시 검열이 느슨해지긴 했지만 미군정 하에서도 검열은 이어졌다.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 들어서며 한국영화는 다시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1962년 제 5차 개정헌법은 영화 검열을 명시했고,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헌법이 다시 개정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명시적 검열 규정은 헌법에서 삭제됐지만 법률에 규정된 영화 사전검열은 사라지지 않았다. 구 영화법은 상영 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명시했고, 이를 근거로 이른바 '반사회적' 내용을 담은 영화들은 상영이 불허되거나 칼질을 당했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크래쉬'는 10분간 삭제돼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검열에 저항한 영화인들의 투쟁의 역사는 민주화·노동 운동과도 맥이 닿아있다.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통해 노동운동 영화 상영·배급을 이끈 영화제작사 '장산곶매'는 1992년 전교조 교사의 노조활동과 해직 문제를 다룬 '닫힌 교문을 열며'를 내놨다. 정진영 배우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당시 교육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노태우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당국은 사전심의를 피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암암리에 상영해온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자 강헌 대표를 영화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강 대표는 이에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고 서울형사지법이 이를 받아들여 1993년 10월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앞서 1990년 '오! 꿈의 나라'를 제작한 홍기선 감독도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한 바 있다. 그러나 법원에서 기각돼 강 대표의 영화법 위헌심판 제청 신청 역시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우려가 상당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수용하며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반영했다.
3년을 끌며 장고를 거듭해온 헌재는 1996년 10월4일 재판관 전원일치로 구영화법 제12조·13조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
◇헌재 "헌법이 금지한 명백한 사전검열"…재판관 전원일치 위헌 결정
구영화법 제12조 제1항은 '영화(그 예고편을 포함한다)는 그 상영 전에 공연법에 의하여 설치된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제2항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심의를 필하지 아니한 영화는 이를 상영하지 못한다'고 했다.
구영화법 제13조 1항은 △헌법의 기본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 △공서양속을 해하거나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국제간의 우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을 때 △국민정신을 해이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는 공륜 또는 방송심의위원회가 해당 부분을 삭제할 수 있도록 했다.
헌재는 이같은 구영화법 조항에 대해 "심의기관인 공연윤리위원회가 영화의 상영에 앞서 그 내용을 심사하여 심의기준에 적합하지 아니한 영화에 대하여는 상영을 금지할 수 있고, 심의를 받지 아니하고 영화를 상영할 경우에는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이 그 핵심이므로 이는 명백히 헌법 제21조 제1항이 금지한 사전검열제도를 채택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검열을 행정기관이 아닌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행한다고 하더라도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검열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라면 실질적으로 검열기관은 행정기관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공연윤리위원회가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율적인 기관이라고 할지라도 영화법에서 영화에 대한 사전허가제도를 채택하고, 공연법에 의하여 공연윤리위원회를 설치토록 하여 행정권이 공연윤리위원회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였으므로 공연윤리위원회는 검열기관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명시했다.
역사적 결정을 이끌어낸 당시 헌재 재판관은 △김용준 △김진우 △김문희 △황도연 △이재화 △조승형 △정경식 △고중석 △신창언 등 9인이다. 보수 성향 재판관들도 이견 없이 위헌 결정에 동의했다.
◇영화상영·비디오물 등급제도 줄줄이 위헌…'사전검열 불용' 원칙 정립
헌재 위헌 결정으로 영화인들은 환호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노골적 성행위 묘사나 자유로운 사상 표현 등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이를 명분으로 당국은 영화진흥법을 개정하며 또 다른 검열 우회로를 만들어냈다.
개정 영화진흥법은 사전심의제도를 '상영등급부여제도'로 바뀌었고 △전체 관람가 △12세 이상 △15세 이상 △18세 이상 관람가 등으로 세분화했다. 하지만 여기에 '등급분류보류제도'를 더해 사실상 상영을 틀어막는 장치를 마련했다.
당시 영화 '둘 하나 섹스'의 제작배급사의 대표인 곽용수씨는 상영등급분류보류 제도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을 신청했고, 서울행정법원은 이를 수용해 위헌제청 했다. 이에 헌재는 2001년 재판관 9명 중 7명의 다수의견으로 원고 청구를 받아들여 위헌 결정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이 위원을 위촉하고 국가예산에서 경비를 보조받을 수 있는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는 실질적으로 행정기관인 검열기관에 해당한다"며 "등급분류 보류는 영화상영 이전에 내용을 심사해 허가받지 않으면 발표를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하므로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이같은 판단은 1996년 구영화법 위헌 결정의 취지에 따른 것이다. 우회적 검열기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재 입장을 거듭 분명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에 이어 비디오물의 등급분류 보류 제도 역시 2008년 위헌 결정을 내리며 '표현의 자유' 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고수하고 있다.
영화계의 투쟁 끝에 사전검열 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문화산업의 영역이 다양해지며 보수적 당국 규제와 이에 맞서는 신(新)문화산업 간 다툼은 여전하다. 게임산업진흥법, 메타버스 등 규제 여부 및 필요성을 둘러싼 논쟁 등이 대표적이다.
새로운 형태의 산업이 등장, 발전하면서 마찰은 끊이지 않지만 넘지 말아야 할 확고한 선은 생겼다. 문화·창작 영역에서 사전검열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이다. 정부 당국의 규제도 창작 결과물이 나온 이후의 문제이지 사전검열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됐다. 1996년 위헌 결정은 기본권이 일보전진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eonk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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