듬직한 맏형, 살림밑천이 되는 맏딸. 가족 안에서 주어진 ‘역할’은 때때로 너무 무거운 등짐이 되어 나라는 ‘존재’를 고꾸라지게 한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는 트라우마로 시달리는 가족들을 돌보느라 매일의 삶이 판박이로 지겹다. 그나마 가족들은 점점 나이 들고, 자라고, 커져만 가는데, 그럴수록 길버트는 점점 작아지고, 움츠러들고, 주눅이 드는 것 같다. 피난처로 여겼던 ‘집’을 버리고 거기서 떠나는 순간, 길버트와 가족은 자유를 찾는다.
1. 가족이 나를 좀먹고 있다
만약 지금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런 상상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는 아마 사춘기 때일 것이다. 사춘기는 바로 ‘우리 부모가 최고로 멋지고 대단하다’고 믿었던 ‘부모의 이상화’가 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점점 세상과의 접촉면을 넓혀 가면서 세상에는 우리 부모보다 훨씬 멋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부모의 절대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들의 부모가 아닌 보다 특별하고 대단한 부모를 향한 낭만적 상상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상하기 시작한다. “나는 업둥이일 거야.” 혹은 “나는 사생아일 거야.” 나의 ‘진짜 부모’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나를 버린 거겠지. 언젠간 날 분명히 찾아오실 거야. 이런 ‘상상의 나래’를 일컬어 마르트 로베르는 ‘업둥이 콤플렉스’, 그리고 ‘사생아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소설의 기원, 기원의 소설>에서 마르트 로베르는 이렇게 ‘부모의 이상화’가 깨지는 순간, 가족소설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즉 가족소설은 자신의 가족을 계속 미화하고 찬양하기 위해 어린아이가 날조하는 나르시시즘적 전기라는 것이다. 업둥이 혹은 사생아 콤플렉스는 단지 독특한 괴짜들의 쓸모없는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한다. 때로는 불만스럽고, 때로는 숨기고 싶은 내 가족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성장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소설들의 중심에는 끊임없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몽상가들이 있다. 몽상가들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꾼다. 여기에 가족을 사랑하지만 증오하고, 지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인 한 소년이 있다. 바로 조니 뎁 주연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다. 길버트에게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거구의 어머니, 결혼도 포기한 채 가족을 돌보는 누나,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철부지 여동생 엘렌이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아버지가 있다. 식구들은 모두 그 끔찍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길버트는 식료품 점원 일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하지만, 그의 가장 큰 임무는 동생 어니를 돌보는 것이다. 밖에서는 돈 버느라, 집에서는 쉴 새 없이 사고를 치는 어니를 돌보느라, 길버트는 '꿈꿀 시간'조차 없다.
병원에서는 어니가 열 살까지만 살아도 운이 좋은 거라고 했었다. 열 번째 생일이 지나가고 나서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밤마다 누이들과 나는, 그리고 엄마도, 내일 아침에 어니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걱정하며 잠자리에 든다. 어니가 살기를 바라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지금 같아서는 달려오는 자동차 앞으로 녀석을 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피터 헤지스의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 중에서
길버트는 한 번도 이 동네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는 어니, 그가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할 것만 같은 가족을 돌보느라, 그에게는 ‘자기만의 시간’이 없다. 그는 늘 가족들과 뒤섞여 살면서도 고독하다. 누군가를 항상 등에 짊어지고 있지만,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안도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자살한 후, 어머니는 우울증과 폭식증으로 거구가 되어 집 밖으로 전혀 나가지 못한다. 17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뜬 날부터 폭식하기 시작한 후, 이제는 아무도 정확한 몸무게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집밖을 출입한 건 3년 전의 일이다. 엄마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면, 엄마는 질색하며 반항한다. “이봐! 나 안 죽었어! 살아있다고! 우리가 아는 누구처럼 몰래 도망치지 않았단 말이야!” 그렇게 몰래 도망친 사람은 바로 아빠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충격에서 17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 안 죽었어! 살아있다고!' 외치지만, 폭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서서히 느린 자살을 꿈꾸는 것만 같다. 누나 에이미와 여동생 엘렌도 간신히 제 앞가림을 하느라 바쁘다. 그는 이 많은 가족들 속에서 늘 혼자다.
집안의 남자이자 그레이프로서 난 많은 걸 참고 살았다. 누나, 여동생, 엄마, 이 마을. 뭐든 참아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아무도 어니는 못 건드린다. 어니를 위해서라면 사람이라도 죽일 수 있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 중에서
어니의 몸집이 커질수록, 길버트는 불안해진다. 이대로 가다간 사고뭉치 어니를 업어 나르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길버트는 시도 때도 없이 어니를 아기처럼 들쳐업고 사태를 뒷수습해야 한다. “너 자꾸 자라고 있다고. 형이 안아주기가 점점 힘들어. 게다가 힘도 세졌어.” 그러자 어니는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형이 점점 작아지는 거야. 오그라들어.” 이 말은 마치 주문처럼 길버트의 영혼을 친친 감는다. 가족들은 점점 나이 들고, 자라고, 커져만 가는데, 그럴수록 길버트는 점점 작아지고, 움츠러들고, 주눅 드는 것 같다. 목을 매달고 자살한 아버지의 환영이 여전히 가족들을 괴롭힌다. 사라진 아버지의 대역이 되긴 싫다. 그러나 사라진 아버지를 극복하는 법을 모른다. 그것이 길버트의 고통이었다. 그것이 길버트 인생의 화두였다. 어떻게 죽은 아버지가 남긴 트라우마를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책임질 것인가. 그런데 정작 그 문제에 빠져 있는 동안 길버트는 ‘자기 인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내 인생, 나, 미래. 과연 그런 것들이 있기는 한 걸까. 이렇게 ‘오늘’만 사느라 ‘내일’을 돌볼 수 없었던 길버트에게 그녀가 나타난다. 오늘을 내일처럼 사는 여자. 과거에 얽매이지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도 시달리지 않는 여자, 캠핑카 유목민 소녀 베티(줄리엣 루이스).
2. 도망치고 싶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베티는 신기한 소녀다. 그 나이 또래 소녀들의 일반적인 관심사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는다. 아름답게 꾸미고, 남자친구를 사귀고, 미래에 대한 희망에 들떠 있는, 그런 소녀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베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베티는 할머니와 함께 캠핑카로 유랑 하며 어느 곳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다. 길버트는 당황스럽다. 단 한 번도 이곳 엔도라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길버트의 눈에 비친 베티는 부럽지만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애써 부정하는 길버트에게는 가족 말고도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다. 바로 카터 부인이다. 삶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족에 시달리는 카터 부인은 아직 나이 어린 길버트를 노골적으로 유혹하여 성적 파트너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길버트는 할 수만 있다면 카터 부인과의 ‘일&rlsquo;을 지워버리고 싶다. 베티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길버트. 그런 길버트의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베티는 조금씩 길버트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고민을 베티 앞에서는 저절로 털어놓게 된다.
길버트는 무엇보다도 가족이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신이 진정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그런 길버트의 판단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루는 어니가 사고를 쳐서 유치장에 갇혀버린다. 경찰이 어니를 ‘구제불능의 저능아’로 취급하자, 길버트는 심한 상처를 받는다. 길버트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어머니는 뜻밖에도 자신이 직접 경찰서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식구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벌써 몇 년 동안 한 번도 외출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동네 사람들은 별별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네스 호의 괴물’로 취급했고, 몰래 길버트네 집 근처로 와서 그녀를 엿보고 놀려먹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어니를 위해 경찰서에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알고 보니 어니를 유치장에 집어넣은 보안관 제리는 젊은 시절 엄마에게 청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엔도라 근방의 수많은 남자들이 젊은 시절 길버트의 엄마에게 프러포즈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토록 아름다웠기에, 더더욱 그녀의 급격한 변화를 ‘가십거리’로 삼았던 것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길버트의 엄마, 보니를 ‘구경’하러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다.
“내 아들. 내 아들을 내놔요.”
그녀는 모든 경찰 규칙을 무시하고, 오직 ‘내 아들’을 내놓을 것만을 경찰에게 부탁했다. 아니, 명령했다. 그녀의 위엄 넘치는 모습은 모든 경찰들을 압도해버리고 만다. 어니의 엄마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누구도 어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엄마를 조롱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장엄함을 느낀다. 군중 사이에서는 모종의 숙연함마저 감돈다. 길버트는 자신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이 길버트 가족을 떠받쳐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기어이 자신의 힘으로 어니를 유치장에서 빼내온 엄마를 보면서, 길버트의 눈빛은 촉촉해진다.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우리 가족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교회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추방했고, 어머니가 거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놀림감으로 만들었지만, 아직 우리에겐 살아남은 ‘서로’가 있다.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떳떳하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꿀 권리가 있다.
아무튼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정한 권위를 지닌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 중에서
3. 따로 또 같이, 사랑하되 거리를 두는 용기
삶이 고통스러울 때는, ‘역할’에 매몰되어 ‘존재’를 망각하기 쉽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의 시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길버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렇다. 사람들은 길버트가 ‘그레이프 일가’의 ‘가장’이기를 바라고, 무슨 일이든 친절하게 처리해주는 성실한 마트 직원이길 바란다. 그래서 길버트의 마음속에 어떤 꿈이 숨어있는지,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길버트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에 중독되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겨져 있던 길버트의 존재를 일깨운 존재가 바로 베키다. 베키는 길버트의 의무가 아니라 길버트의 감정을, 길버트의 욕망을, 길버트의 꿈을 투시하는 혜안을 지녔다.
베키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길버트 어머니의 마음까지 활짝 열어준다.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 갑자기 나타난 길버트의 여자 친구 베키의 출현에 당황한 엄마가, 소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단다.” 베키의 날씬한 모습이 엄마를 더 주눅 들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베키가 싱긋 웃으며 맞받아친다. “저도 원래부터 이런 건 아니었답니다.” 우린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첫눈에 우린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보는 두 사람. 관객들은 긴장을 풀고 그들과 함께 웃게 된다. 베키는 싱그러운 봄비처럼 길버트네 가족들의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역할에 매몰되어 존재를 망각하는 것. 그것은 길버트 뿐 아니라 모든 가족에 해당된다. 엄마 역시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연약한 '여자'였으며, 누나는 가족들 걱정 때문에 결혼도 하지 못한 처지였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엘렌은 한창 멋 부리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꿈 많은 소녀다. 그들은 어니를 돌보느라, 엄마를 돌보느라, 아버지를 원망하느라, 저마다 타인의 존재에 '구속'되어 스스로의 삶을 돌보지 못한다. 캠핑카 하나 달랑 몰고 할머니와 함께 유랑하는 베키는 특별한 수입도 없고 대단한 미래도 기대하지 않지만 언제나 행복해 보인다. 영원히 붙박여 있어 결코 떠날 수 없는 ‘집&lrsquo;에 갇힌 이 가족들, 반면에 정해진 집은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곳을 언제든지 집처럼 편안하게 여길 수 있는 베키네. 길버트는 베키의 자유롭고 탐욕 없는 삶을 엿보며 자신이 잃어버린 삶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나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도 새로운 꿈을 꾸어도 되지 않을까.
길버트와 베키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는 동안,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되고 있었다. 엄마가 그토록 염원하던 어니의 열여덟 살 생일잔치를 마친 후, 마치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편안히 잠들고 만다. 식구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어머니를 어떻게 ‘옮길까’를 걱정할 처지에 놓인다. 크레인을 불러야 하나. 헬리콥터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엄마의 시체를 구경하려고 모여들 텐데. 모두들 그녀를 평가하고, 조롱하고, 무시 할 텐데. 견딜 수 없다. 엄마를 그런 자리에 놓아둘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걸 잃더라도, 엄마의 마지막 길을 그렇게 외롭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길버트는 절규한다.
엄마는 놀림감이 아냐. 사람들은 엄마를 보고 웃고, 엄마를 찔러대고, 이러니저러니 평가를 할 거야! 그렇게 하게 놔둘 수 없어! 엄마는 그것보다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자격이 있다고! 우리 엄마는 아름다워. 아무도 엄마를 보고 비웃으면 안 돼. 아무도!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 중에서
식구들은 길버트의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는다. 이제 이 집을 버릴 때가 온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이 낡아빠진 집 한 채뿐이지만, 어머니와 이 집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을. 길버트는 쓸 만한 모든 세간을 집 밖으로 치우며 엘렌 누나에게 말한다. “누나. 우리한테 물건이 이렇게 많다는 거 알았어?” “아니. 그런데 정말 많다.” 이 대화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우린 너무도 가난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많은 짐 때문에 그토록 무거웠구나. 이렇게 많은 짐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이젠 떠날 때가 되었구나.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길버트네 집을 바라보며, 남은 가족들은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도 함께 얻는다. 엄마를 놓아드렸듯이, 우리의 과거도 놓아주어야 한다. 이 집을 태워버렸듯이, 우리의 상처도 태워버려야 한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집이 불타버린 이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나와 엘렌은 자신들의 갈 길을 찾아서 떠나고, 어니와 길버트는 베티와 함께 떠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가족’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족을 넘어선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길을 떠난다.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이 지긋지긋한 엔도라를 떠난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엔도라에서 사는 것은 ‘음악 없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그러나 이제 길버트와 어니, 그리고 우리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음악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다고. 우리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 어떤 참혹한 상실 위에서도 그 폐허를 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야말로 어떤 춤에도 기꺼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족소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부모님을 만나 신분상승을 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부모님이 안 계시더라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라도, 살아남은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여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