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어제 밤새 내린 비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 날씨가 개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긴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를 뒤로 하고 배낭을 맸다. 6시 50분 동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청주공항에 갔다. 8시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했는데, 다행히 일찍 도착하고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9시 15분쯤 제주 도착, 하이킹 랜드 아저씨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자전거점에 가서 간단히 코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전거를 골랐다. 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흐리더니 자전거를 타기 시작할 때는 폭우가 쏟아진다. 비옷을 입고 그냥 출발했다. 용두암을 잠시 거쳐 해안도로를 타고 이호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런 날씨에도 자전거를 타겠다고 온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호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떼우고 잠시 쉰 후 애월을 향해 가는데, 소나무 언니가 잘 따라오지 못해 자전거 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언니의 자전거를 내가 바꿔서 타는데, 페달이 정말 안 돌아간다. 어찌나 힘이 드는지 여기까지 이런 자전거를 타고 온 언니가 용하다. 결국 내리막길에서 뒷바퀴가 서 버렸다. UFO 레스토랑에서 1시간 반정도 기다려 하이킹 랜드 아저씨가 오셨다. 이호까지만 무료 수리란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우린 수리비를 안 줄 요량으로 불평을 늘어 놓는데, 아저씩 화를 내시려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우린 아저씨께 미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운좋게 아저씨께서 수리비를 안 내도 된다고 하신다. 갈 길이 바쁜데 오래 기다린 건 너무 짜증났지만 더 멀리 가기 전에 고장나서 수리도 받을 수 있었고, 더이상 고생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소나무 언니는 원래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언니도 정말 대단하지!!! 애꿎은 나이탓만...
6시 반쯤 곽지해수욕장에 도착. 2만원에 이어도 민박을 잡았다. 남들이 놓고 간 감자와 양파, 거기서 산 김치로 제주도에서의 첫 저녁 식사를 맛있게 했다. 하루를 너무 일찍 시작해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니와의 수다는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밤에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쳐 모기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8월 8일
7시 30분에 기상. 비가 많이 왔다. 8시 반에 민박집에서 나와 곽지 해수욕장에서 잠깐 사진만 찍고 출발했다. 곽지에는 무료 노천 목욕탕이 있는게 특징이었다.
해안도로를 타고 가는데 빗줄기가 굵고 하늘은 온통 잿빛이어서 전혀 비가 갤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킹 강행. 한림 입구 킹마트에서 비상식량과 오늘의 부식, 모기향을 사고 협재 해수욕장에 갔다. 깨끗한 모래사장과 비취색 바닷물이 인상적이었다. 비가 와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바로 옆에 한림 공원에서 어제 폭우 때 같이 하이킹 하던 전북녀 세 명을 만났다. 여행 오기 전 읽었던 하이킹 팁 중 입장료 안내고 들어가는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라 화장실 쪽을 쳐다 보았지만 차마 교사로서의 양심<?>을 버리지 못해 거금 4500원을 들여 표를 샀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가려는데 필름이 부족해 자전거 주자시킨 곳에 다시 다녀왔다. 그런데 입장하려는 찰나 항순 언니 왈, "야, 표 없어. 잘 넣어 놨는데, 자전거에 두고 왔나?"
"뭐야, 언니!"
"내가 가져올게. 넌 여기서 기다려."
잠시 후 나타난 언니.."야, 없어."
엥??? 순간 슬쩍 들어갈까 하는 마음에 느슨한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갑을 다시 뒤져보니 반으로 접힌 천원짜리 사이에 잘 간직한 표. 덕분에 천금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이건 정말 나이 탓이라고 구박을 하며.. 우린 까먹은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한림공원을 경보하다시피 둘러보고 어제 비 때문에 (사진기 꺼내기가 힘들다) 못 찍은 사진에 분풀이라도 하듯 사정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여기서만 40방이 넘게 찍었으니~
12시쯤 공원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금릉석물원에 갔다. 하루방을 비롯해 다양한 다양한 돌 조각상들이 있었다. 규모가 워낙 작아서인지 입장료 무료.
신창에서 점심 먹고 2시 출발. 날씨는 우릴 향해 미소라도 짓듯 적당히 흐린 날씨가 계속 되었다.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차귀도가 보이는 부두에 들렀다가 수월봉에 갔다. 경사가 가팔라서 올라가는데 무지 힘들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다면 별로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기어 변속이 안 돼서 모슬포 자전거점에 갔는데, 비를 맞아서 그렇단다. 고치기엔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고 그냥 가란다. 새 자전거라고 좋아했는데, 겨우 하루 타고 그렇게 되다니!
다시 해안도로로 진입해 연풍연가 촬영지라는 송악산에 들렀지만 시간도 늦고 자전거로 올라가긴엔 경사도 심하고 거리도 멀어 올라기기를 포기하고 다시 출발했다. 여기서 마라도 가는 배를 탄다고 한다.
대정까지 오는 해안도로를 하이킹하며 정말 멋지게 파도치는 장면을 보았다. 높이 치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포말은 멋진 분수와도 같았다.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더욱 운치가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방산이 운무에 싸여 신비롭게 보였다. 산방굴사에 도착했을 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날도 어두워지고 입장료 내고 가기도 좀 아까워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밑에 있는 용머리 해안도 예전에 와 본 기억으로 대신했다.
산방굴사 밑에서 귤파는 할머니가 언니에게 아주 인자한 모습으로 귤 하나를 건내며 먹어보라고 한다. 이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할머니를 보라! 이에 감동한 언니 귤을 산다. 우린 비타민 씨에 굶주린 헐크처럼 20개쯤 되는 귤을 마파람에 개눈 감추듯 개걸스럽게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비닐봉지가 아쉬워 할머니께 부탁하자 달가워하지 않는다. 아! 아까의 그 모습은 귤을 팔기 위한 할머니의 고난도 수법이었단 말인가?
화순 해수욕장에서 민박을 하려로 홍마트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고 나오다 어떤 아주머니께 민박집을 어디로 가면 얻을 수 있냐고 묻자(정말 입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아는 집을 소개시켜 준다. 중문을 향해 2km쯤 달려 완민박(794-9466)에 도착. 시설 좋고, 인심 좋고. 이어도 민박이 바가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할머니 부부가 사시는데 밑에 며느리가 관리하신다. 아줌마가 밭에서 깻잎이며 고추, 오이를 비를 맞아가며 따 주시고, 게다가 고추장 된장까지 듬뿍 퍼 주신다. 세탁기도 이용하라고. 이게 왠 떡이란 말인가!!! 고객 감동!~~~
우린 인터넷에 홍보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였다. 가 봐야 알지만^^
둘째날 힘들다더니 생각보다 몸이 말을 잘 들어 고맙기까지 하다. 엉덩이와 손이 부어 오르긴 했지만. 오늘도 수다는 계속~
8월 9일
어제 늦게까지 수다를 떤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아픈 것 같다.
어제 한 밥이 모자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 잘하면 밥 얻어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기에..) 할머니께 밥 좀 있으면 달라고 했다. 밑져야 본전이지 싶었는데, 할머니께서 밥이 얼마 없다고 하신다.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 그냥 누른밥과 비상식량으로 배를 채우려는 순간 할머니께서 밥 한 그릇과 국 한 대접을 주시는게 아닌가!!! 언니는 고상한 척은 혼자 다하고 밥은 맛있게 먹는다.^^ 나의 철판 연기가 두 아낙(총총이 언니 말)의 배를 행복하게 한 것이다.
9시 15분 출발.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천제연 폭포로 갔다. 비가 많이 와서 폭포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선암교를 건너는 내내 몸이 찌뿌둥하니 영 말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길이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께 물었더니 그냥 길이라기에 우린 되돌아 왔다. but 그 길이 여미지로 이어지는 길이었으니! 하이킹에서 온 길을 되돌아 가는 건 정말 죽음이다.
우린 오던 길을 조금 되돌아 가 중문 관광단지에 들어갔다. 언니가 테디베어 박물관에 꼭 가보고 싶대서 거금 6000원을 내고 들어갔다. 2억이 넘는 인형까지 세계 각국의 테디인형들을 모아 놓은 곳인데, 입장료가 600원이라면 그리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을껀데...
첫날부터 만난 전북에서 온 처자들을 또 만났다. 같이 사진 찍고 테디에는 안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충고를 해 준 뒤 여미지 식물원에 갔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지라 대학 때 본 것처럼 탄성이 나오진 않았다.
너무 지쳐 있던 터라 아래로 내려가야 되는 중문 해수욕장을 뒤로 하고 우린 일주를 계속했다. 조금 가다 대포에서 냉면과 영양밥을 먹고 주상절리로 갔다. 아직 개발이 덜 되어서인지 공짜. 자연이 만들어 낸 위대한 조형물에 우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제 차귀도가 보이는 곳에서 만난 총각 2명도 또 만났다. 체력이 우리보다도 못한가?
귤 파는 아주머니 설명으로 호젓한 해안도로를 달릴 수 있었다. 내리막길을 달리는 그 짜릿함이 하이킹의 묘미인 것 같다.
제주 월드컵 경기장에 네시쯤 도착. 아름다운 건축물상을 받았다고 해서인지 경기장이 멋지긴 했지만 TV에서 보던대로 지붕이 날라간 채 보수도 안하고 있었다. 월드컵 끝난 다음에 날라갔기 망정이지 세계적인 망신거리가 될 뻔했다. 우리들의 특기대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앞에서 사진만 찍고 성산을 향해 출발...
얼마 안가 교차로에서 나는 성산 이정표를 보고 그 쪽으로 향해 달렸다. 내리막길의 유혹 땜시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 화근. 내려가서 한참을 기다려도 언니가 오지 않았다. 내 뒤를 쫓아오던 남학생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나타난 총각에게 물었더니 언니를 못 봤단다. 할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 아저씨께 길을 물어 남원쪽으로 갔다. 서귀포 여고를 지나도 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정한 언니, 날 버리고 가다니!!! 하지만 이 길밖에 없기에 조금 더 가서 노점상 아줌마께 여쭈었더니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갔단다. 얼마 안 가서 언니를 만났다. 큰 소리로 "언니! 나 여깄어!" 언니:"어디갔었어??!!!!" 이렇게 우리의 극적 상봉은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은 하여튼 길을 잘못 들어 무지 고생하는 날인가 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딱 맞다.
우린 천지연, 정방폭포를 천제연을 관람한 것으로 대신하고 남원을 향해 달렸다. 중간에 마신 포카리가 몸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 얼마나 맛있던지...
12번 도로를 타고 계속 가니 남원이 나왔다. 두 번이나 남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는데 우린 마지막까지 달렸다. 결국 들어간 곳은 남원의 끄트머리. 다시 돌아가기도 지쳐 조금 더 가서 민박을 잡기로 했다. 7시가 넘어 길가에 표지판을 보고 태흥 1리에서 2층에 있는 민박을 잡았다. 표독스럽게 생긴 아줌마는 처음엔 7만원, 5만원을 운운하더니 학생이라 3만원만 받겠다고 한다. 어제보다 시설이 더 좋은 것도 아닌데 여기서 이 고생 끝에 얻는 것이 바가지라니!!! 완민박의 아줌마가 그렇게 눈에 아른거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생이라는 말에 억울함을 참아가며 어제 산 카레와 고추 장아찌로 고픈 배를 달랬다. 나의 또 한 번의 철판 연기로 얻는 김치는 왜 그리 맵고 맛이 없던지.
하여튼 오늘은 날씨는 엄청 좋았는데 (비가 별루 안 옴) 많이 꼬인 날이었다. 우리의 수다는 오늘도 계속....
8월 10일
8시 45분 출발.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표선에 있는 제주 민속촌박물관에 갔다. 제주의 여러 지방의 촌가들과 오랜만에 걷는 시골길에서 정감이 느껴졌다. 우진이에게 줄 풍경을 하나 샀는데 30대 중반인 충청도에서 왔다는 가게 아저씨가 우리 나이를 정확히 맞추며 넉살을 부린다. 깎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친한 척은!!! 이 눔의 나이는 속일 수도 없어!!
제주도 와서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다. 계속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비교적 좋은 날씨가 계속 된 것 같다.
신양 해수욕장 입구에서 간단히 간식을 하고 섭지 코지(곶)에 들어갔다. 성산 일출봉의 해돋이를 볼 수 있고 윈드서핑하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늦게 점심을 먹고 성산항으로 와서 우도행 배를 탔다. 비가 많이 와서 혹시 배가 뜨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 정도 비는 괜찮다고 한다. 날씨 탓인지 하이커들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도의 하우목동항 근처에서 별이네 민박을 잡았다. 나의 강한 입심으로 5천원을 깎아 25000원에 합의 봤다. 짐을 내리고 아줌마, 아저씨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우비를 입은 해 출발! 두 시간이면 돈다는 말에 우도를 너무 쉽게 생각한 죄로 우린 길을 잘못 들어 먀냥 헤맸다. 해안도로로 갔어야 했는데, 안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어물어 비양동 해수욕장에 갔다. 아주 작지만 깨끗한 모래가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검 래. 검은 모래가 있는 해안으로 동굴 속에 동굴이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가 동굴인지 모르겠다.
우도봉은 우도 전체와 성산 일출봉까지 관망할 수 있었고 드넓은 잔디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을 보자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가 절로 나왔다. 7시가 넘고 날이 어두워져 그냥 민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는 길에 또 한 번 헤맸다. 지도상의 거리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았고 이정표가 없어서 이 작은 섬에서 두 처녀가 헤맸다고 변명할 수 밖에.
우도의 인구는 1750명. 불과 3년 전에 정수장이 설치되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 전엔 빗물을 받아 썼고 지금도 물이 그리 풍부한 편은 아니라고 한다.
8월 11일
7시쯤 일어나 간단히 야채죽을 먹고 우도를 한바퀴 다시 돌았다. 몸이 피곤해서 출발시각이 늦어질 법도 한데, 언니가 서두르는 바람에 일정에 맞게 움직일 수 있었다.
산호사 해수욕장은 동양 유일의 산호 해수욕장이라는데, 산호가 부서진 것이라 발바닥이 무지 아팠다. 천진항을 거쳐 어제 그렇게 찾았던 솔개 서식지인 톨간이에 갔는데, 솔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간 비양동은 밀물 때라 어제의 아름답고 깨끗한 백사장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비양동에 등대가 있는 곳까지 시멘트 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썰물 때는 길이 드러나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돌고 민박집에 돌아와 짐을 챙긴 후 천진항에서 11시 배를 타고 나왔다. 성산 일출봉 입구에 있는 오복식당에서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었다. 하이킹 팁에 적혀 있던 일출봉 공짜 입장방법인 화장실 뒤로 가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사람이 적고 매표소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차마 거기로 가지 못하고 표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울타리도 없는 잔디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뭔가를 보고 있어 우린 유유자적하게 그걸 보러 가는 척하고 일출봉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누가 잡을까봐 얼마나 가슴이 떨리던지. 그럴 때일수록 태연히 걸으라는 충고를 떠올리며 한편으로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일출봉에 올랐다. 내려오면서 보니 입장료 2200원!
제주까지의 길은 실크로드라 초보라도 5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총총이 언니의 말만 듣고 우린 해안도로를 따라 여유있게 하이킹했다. 그러나 해안도로를 벗어나 12번 도로를 타고 가다 보니 32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럴 수가! 시계는 벌써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도데체 뭐가 실크로드야? 오늘 가기로 한 김녕 미로공원은 이정표가 없어 그냥 지나치고 우린 제주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마지막으로 해 보려던 해수욕도 못하고 김녕, 함덕 해수욕장을 모두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시속 10km이상 달린 것 같다.
드디어 제주 입성! 제주항 이정표를 따라 제주 교대, 국립 제주박물관을 지나 드디어 하이킹 랜드 도착. 먼저 도착한 하이커들이 박수를 쳐 줬다. 그 때의 가슴벅참이란!! 그네들은 우리랑 똑같은 날짜에 반대로 돌아 비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언니랑 기념촬영하고 완주증을 받았다. 뭔가를 성취하고 났을 때의 느낌이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하이킹랜드에서 소개해 준 민박 (실은 여인숙)에 왔는데 싼게 비지떡이라고 시설이 영 형편없었다. 아저씨가 우리를 태우러 오지만 않았어도 다른데를 알아 봤을텐데..
간단히 씻고 제주 이마트에 가서 등산바지와 판초우의를 사고 저녁을 먹은 후 탑동 광장에서 관현악 연주 공연을 감상했다. 좀더 일찍 왔더라면 더 즐길 수 있었을텐데... 젊음의 열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과연 내 다리로 사고 없이 해낼 수 있을까? 차라리 취소할까 하고 많이 걱정했는데 별탈없이 건강하게 완주한 내 자신에게 새삼 고마웠다. 이런 걸 사서 고생한다고 하던가? 그냥 완주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에 큰 기록이 될 만한 일인 것 같다. 무엇을 배웠는지 누가 물으면 뭐라고 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살면서 28살의 제주도 하이킹은 두고두고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8월 12일...
허접한 영산도 민박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다른 날보다 일찍 서둘렀다. 8시쯤에 나와서 제주 터미널로 가 간단히 빵과 제주 우유로 아침을 떼운 후 터미널에 가방을 맡기고(1000원) 9시 10분 버스를 타고 영실매표소까지 갔다.
제주도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고 하는데 등산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산 판초우의가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10시 10분 산행 시작. 비가 와서 그런지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경사가 완만해서 마치 휴양림의 산책로를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비가 우박같이 내렸다. 무지 아프고 손발이 다 시려웠다. 12시 30분쯤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오름이라고 하는데, 구름 때문에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휴게소에서 라면이 1000원밖에 하지 않음에 우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커피도 500원. 역시 진정한 국립공원은 한라산 뿐이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옆사람한테 김밥까지 얻어서 점심 잘 먹었다.
산지기 아저씨가 매우 친절해서 출발할 때 배웅까지 해 주셨다. 비가 계속 와서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등산객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린 계속 땅만 쳐다보고 걸었다. 처음 오는 한라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바닥이 미끄러워 다리에 신경이 더 쓰인 탓인지 조금 통증이 느껴져 당분간 높은 산은 오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내려오는 데 국립공원 관리하는 아저씨께서 우리를 따라 오신다. 한라산에 들개들이 나타나 위험해서 우리와 같이 가신다고 한다. 내려오면서 아저씨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한라산엔 몇 천만원짜리 주목이 있다고 한다. 이를 노린 도벌꾼들을 잡는 게 아저씨 업무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낫을 들고 덤비는 도둑놈들에게 호통을 칠 정도로 용감하고 한라산에 대한 애착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정말 투철한 아저씨였다. 나를 한번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어리목에서 3시 40분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버스타는 곳까지 10분은 걸어야 한다고 한다. 시간이 촉박해서 다리를 절며 뛰는데, 언니가 자가용을 히치해서 시간 안에 정거장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눔의 버스가 벌써 가버린 게 아닌가? 일가족도 차를 놓쳐 다음 버스(5시)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주차장에 세워진 트럭에 아저씨가 타는 것을 유심히 지켜봤던 나는 그 트럭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 뒤에 출발하는 그 차를 언니가 용감하게 히치해서 제주까지 왔다. 다시 버스타고 터미널로 가 화장실에서 옷을 싹 갈아입고 비가 와서 그냥 공항으로 갔다.
기념품 사고 밥을 먹었어도 시간은 많이 남았다. 전광판에 7시 50분 김포 수속이라는 말만 보고 청주는 아직 안하나보다 우린 이렇게 생각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나!!!! 2시간이나 일찍 공항에 오고 하마터면 비행기 못 탈 뻔했다.
여하튼 무사히 비행기 타고 청주에 와서 9시 50분 버스로 대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언젠가부터 막연히 꿈꾸던 제주도 자전거 하이킹! 드디어 내가 해낸 것이다. 소나무 언니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더라면 이번 방학도 아마 집에서 뒹굴거렸을텐데, 모처럼 마음이 맞는 언니를 만난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
궂은 날씨 때문에 좀더 멋진 제주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게 아쉽긴 하지만 비오는 제주도의 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제법 재미있었다. 같은 나라인데도 이국적인 정취가 많이 느껴져서 달리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이 지치고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성취했다는 이 느낌은 경험해 본 자만이 느끼는 값진 선물일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리가 완전히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조금은 무모하게 도전한 이번 여행이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곱씹어 질 것 같다. 생각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젊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