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작가가 쓴 노년 이야기, 그 통찰의 세계…"
책 속의 노년(9) : 박완서〈마른 꽃〉〈그리움을 위하여〉
작가가 서문에서 '늙은이들 얘기가 대부분'이라고 밝힌,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실린 첫 번째 단편이〈마른 꽃〉이다.
나는 삼남매를 잘 키워내고 혼자 살고 있는 우아한 60세 할머니. 친정 조카 결혼식에 다녀오던 버스에서 조박사와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다.
조박사는 청남색 아콰마린 반지를 끼고, 카키색 트렌치코트에, 배도 안 나오고 다리도 길고 걸음걸이도 여유있고 늠름한 신사. 호기심으로 시작돼 결국 만남이 시작되고 가슴이 소녀처럼 뛰는 경험도 하게 된다.
나와 조박사의 이런 만남 한편에서는 연줄을 통해 아는 사이인 것으로 밝혀진 조박사의 며느리와 나의 딸이 두 사람의 재혼을 거론하는 것을 알게 되고, 홀시아버지의 재혼을 서두르는 조박사의 며느리를 통해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나는 조박사와의 사이의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있다는 것,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
올해 제정된 황순원 문학상의 첫 수상작인〈그리움을 위하여〉의 나는 대학 공부까지 한 유복한 할머니. 근처에 사는 여덟 살 아래 사촌 여동생을 파출부처럼 쓰며 살고 있다.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공부 잘 하는 아이로 집안일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온 나와 공부에는 취미도 재능도 없이 동생들 뒷바라지와 살림살이만 해온 동생.
공부와 살림살이만큼이나 노년의 생활 역시 다르다. 단열과 통풍이 잘 돼 있어 열대야를 모르고 사는 나와 옥탑방이 너무 더워 러닝셔츠를 물에 담갔다가 대강 짜서 입고 자면 그게 마르는 동안은 그런대로 잘만하다는 동생.
그런 동생이 아는 민박집이 있는 섬 '사량도'에 갔다가 점잖은 뱃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더니 결혼을 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나는 그동안 동생에게 우아하게 베푸는 척하며 속에 가지고 있던 상전의식을 버린다. 그리고는 그들이 꿈처럼 살고 있는 섬을 향한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동생이 부쳐올 분홍빛 도미를 기다린다.
이미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에 의해 이야기된 두 작품의 문학적 성취는 뒤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 나오는 노년의 모습이 흥미진진하다. 특히 노년기의 연애와 결혼을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재이다.
〈마른 꽃〉의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빤히 모든 것이 보인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는 한 번 과부 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과부 될지도 모르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말로 관계를 마무리한다.
반면〈그리움을 위하여〉의 나는 노년에 짝을 잃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문하면서, 상대가 세상 떠난 아내 얘기를 하면 나는 세상 떠난 남편 얘기를 하는 것이 전혀 싫증나지 않아 하고 또 하며 잠든다고 토로한다.
두 작품 모두에는 노인 문제의 가장 민감한 이슈가 들어 있다. 노인들의 연애와 결혼에 늘 따라오는 자녀나 친족들의 동의 여부, 호적 정리, 한 쪽이 먼저 세상을 떠날 경우의 재산 상속, 세상 떠난 후 전 남편 옆에 묻힐 것인지 등등.
현실을 한 번 돌아 보자.
"나이 드신 부모가 연애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고바야시 데루유키, 노년의 성 혁명)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자녀가 몇 명이나 될까. 조금 더 관계가 발전해 결혼을 하시겠다고 했을 때 호적, 재산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녀는 몇 명이나 될까.
작가는 명쾌하게, 그러나 조금은 낭만적으로 결론 짓고 있다.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게 영감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나도 안 중요하더라구.'
노년기의 연애와 결혼은 멀리 '사량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우리 앞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남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기면서 부모님들의 자유 의사를 존중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노년의 삶의 질이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노인복지 이론을 담은 수 십권의 책보다, 짧은 소설 두 편에 작가는 노인 연애와 결혼의 핵심을 담고 있다.
작가의 나이 올해 일흔. 그 나이가 주는 통찰력을 통해 노년의 모습을 또다시 들여다 본 나는 그래서 소설이 좋다. 소설 읽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