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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 신앙관 스크랩 안산 월강사
참마로니에 추천 0 조회 294 07.04.01 1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한불교 천태종 안산 월강사

 

 

21세기를 준비하는 사찰로, 지역 여건과 젊은 층을 포교의 주대상으로 하고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중인 사찰로 대지 550평에 연건평 580평의 지하 1층 지상2층으로 아담하고 마음두고 싶은 곳이다.

 

 

12년전인 87년 봄 안산시 원곡동 북경루라는 음식점에서 18명의 신도들이 모여 신도회를 구성하고 첫법회를 보게 된 것이 월강사의 시초가 된다.

 

그해 7월 23일 원곡동 828번지 상가 4층을 세를 얻어 주정산 감사원장스님을 모시고 관음불상 봉안 및 창립법회를 가진 두달뒤 9월 1일 초대신도회장에 한응식 불자가 임명 되면서 월강사는 안산지역에 천태종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88년 12월 26일 제2대 신도회장에 정구정불자가 임명되면서 천태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안산지회는 지역 불자들에게 그 문을 넓혀나갔다.

 

새로운 수행공동체를 접한 안산지역의 많은 불자들이 천태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시기로 월강사는 늘어나는 신도들을 수용하기위해 91년 4월 9일 원곡동에서 고잔동 유창빌딩 6층으로 사찰을 이전 했다.(이때 이사 동참) 이날 전운덕 총무원장스님을 모시고 관음불상 봉안 및 이전 법회를 봉행하면서 안산지역에 천태신앙이 깊숙히 뿌리내리게 된다.

 

그러나 사찰을 옮기고 나서 기쁨도 잠시 그 이유는 사찰이 들어서 있는 곳이 유흥상권에 속해 있어 신도들이 마음놓고 기도 정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법당에서 기도를 하다보면 다방이나 술집, 여관들이 장사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전화가 자주 왔을 뿐아니라, 이것도 모자라 경찰서에 너무 시끄럽다고 신고가 들어가 간부들이 경찰서를 찾은 것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런 환경을 극복하는 길은 여법한 사찰을 건립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공감한 불자들이 사찰 건립불사의 서원을 세워 ... 92년 3월 22일 제3대 신도회장에 박주형불자가 임명되면서 안산 지역 천태종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어려운 여건속에서 발심을 하여 마련한 정재로 94년 9월 현재 사찰대지로 사용하고 있는 일동 96번지 대지 550평을 매입하고는 사찰 불사를 다시한번 서원하게 된다.

 

세달뒤 도용 종정예하로부터 월강사라는 사찰명을 하명받은 월강사 신도들은 하나가 되어 사찰불사 준비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95년 1월 정구정 신도회장은 다시 4대 신도회장에 임명되고 이어 3월에 초대주지에 최평해 스님이 임명되면서 월강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최평해스님은 월강사가 안산지역에 처음 뿌리를 내린지 10여년동안 어려운 여건을 이겨온 신도회를 주위에서 지켜본 스님 중에 한 분 이었다.

 

평해스님이 먼저 주지로 임명되자 가장 먼저 서둘러 한 사업이 살아있는 신도회 조직 이었다.

짧은 연륜을 이겨내고 안산지역 뿐만이 아니라 경기지역의 중심이 되는 기틀은 신도회 조직에 있다고 보고 가장먼저 시도한 것이 합창단 조직이었다.

월강사 합창단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은중경을 6권을 사경해야 하는 과정을 두어 합창단을 정예화시키고, 95년 4월 젊은 불자들을 중심으로 합창단을 꾸리고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신도회를 하나로 묶는 작업에 들어 갔다.

 

그것이 바로 신도비상조직망 작업이었고, 이를 활용한 조직과 단단한 불심으로 96년 3월 29일 월강사 불사의 첫 삽을 뜬다.

 

그때 월강사가 불사로 준비해둔 정재는 불과 7백여만원이 고작이었다. 불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월강사는 합창단에 이어 산악회(96년4월 28일)와 학생회, 어린이 법회다.

이 96년에 만들어진 산악회와 학생회, 어린이 법회는 월강사의 면모를 일신시키며 새로운 생활불교,대중불교를 안산지역에 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는 사찰불사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신도들이 다짐을 하면서 불사에 임했으나 열악한 조건에 IMF라는 큰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불사를 이루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 98년 1월 18일 꿈에 그리던 불사을 마치고 이전법회을 함으로써....오늘에 이른다.

 

 

법당

 

 


實相은 無相이고 妙法은 無生이며 蓮華는 無染이다.

無相으로 體를 삼고 無生에 安住하여 無染으로 生活하면

그것이 곧 無上菩提요 無碍解脫이며 無限生命의 自體具現이다.

一心이 常 淸淨하면 處處에 蓮華 開니라.

 

 

천태종 중창조 上月圓覺 대조사

대조사법어

(1)

http://www.samkwangsa.or.kr/mini_home/language/default.asp

(2)

http://www.sangwol.pe.kr/teaching/teaching.htm

 

 

생애를 통해본 현대 천태종의 重創

 

  조선 초기까지 종파의 세력으로 남아 있는 천태종은 세종 때 종파가 통폐합된 이후 544년간 천태종명이 사라졌다가 1966년 국가에 불교 종단을 등록하였다. 상월조사가 소백산에서 수행을 시작한 이후 사부대중이 형성되면서 세종 때 사라진 天台宗名으로 현대 천태종을 새롭게 중흥(重興)시키고 있다.

  상월조사가 천태종을 중흥시키기까지 생애에 있어 몇 가지 전환점을 중심으로 천태수행에 대하여 고찰해 볼 수 있다. 우선 幼年期와 出家修道期 그리고 遍歷期와 敎化期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조명과 함께 수행상에 나타난 천태관법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上月祖師의 본명은 準東이며 법명은 上月이며 법호가 圓覺이다. 10대 중반 구법수행에 뛰어든 이후 각고의 고행 끝에 천태종을 중창하고 현대 한국불교에 새롭게 등장한 '상월원각대조사'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연대순으로 간략히 나열할 수 있다.

1911년 삼척 상마읍리 출생
1915년( 5세) 한문서당 입학
1919년( 9세) 조부사망으로 인생에 대한 懷疑
1925년(15세) 三台山에 초막을 짓고 백일간 千手陀羅尼  呪 念誦
1926년(16세) 금강산 묘향산을 비롯한 국내 名刹을 찾아 巡禮
1930년(20세) 중국 입국, 五臺山, 普陀洛伽山, 峨嵋山 淸凉山 등 巡歷
1936년(26세) 귀국, 9년간 강원도와 소백산을 오가며 수행
1945년(35세) 현 구인사 터에 소법당을 짓다.
1950년(40세) 공주 마곡사 등지에 피난과 구제활동
1951년(41세)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용맹정진 중 豁然大悟
1974년(64세) 입적<
각주: 상월조사의 생애를 참고할 수 있는 서적이 몇 권에 불과하지만 연도가 약간씩 틀리고 있다. 본 연대는 천태종 2대 종정인 南大忠宗師가 說하고 趙明基博士가 書한 『上月圓覺大祖師悟道記略』을 중심으로 표기하고 있다.>

  비록 9세에 해당하지만 자신을 끔찍하게 아껴주었던 祖父의 사망으로 생에 대한 懷疑와 함께 思索에 잠겼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생애를 통한 상월조사의 불교 수행은 觀世音菩薩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上月祖師의 불교와 혹은 불법수행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15세가 되면서 홀로 인근의 산인 三台山으로 올라가 초막을 짓고 용맹정신을 시작하였다. 精進의 내용은 '千手陀羅尼'  呪를 念誦했던 것으로 100일의 시간을 두고 生死를 건 祈禱였다.

  三台山 계곡위에 통나무를 걸쳐 놓고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 위에 앉아 부엌칼을 앞에 세워놓고 졸음을 참으면서 천수다라니 念誦을 계속했다. 특히 정진도중 여치가 손가락을 파먹어도 참고 진행했으며, 식사는 一日一食, 二日一食, 四日一食으로 줄이다가 이후 죽이나 물로 연명하면서 환골탈태와 함께 신통력을 얻어 자재하게 되었으며 차력이나 축지술을 겸비했음을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山中精進으로부터 歸家한 準東은 이듬해 慈母를 하직하고 名山大刹을 찾아 歷訪을 시작하였다. 小白山을 비롯하여 太白山, 金剛山, 九月山, 妙香山 普賢寺, 法住寺, 松廣寺, 海印寺, 銀海寺, 月精寺 등 5년 동안 국내의 각지를 순례하면서 공부를 쌓아갔다.

  그러나 위와는 다르게 準東은 15세에 金剛山으로 출가하여 토굴아래서 혼자 수도하고 있던 法隱스님을 만나 得度와 受戒를 하고 上月이라는 法名을 받았으며 사미과와 사집과 그리고 사교과를 공부하고 스승을 시봉하면서 頭陀行을 쌓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스승으로부터 『법화경』 제25품인 「觀世音菩薩普門品」에 귀의하여 信心을 통한 行과 교화방편을 일으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각주: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서울: 홍법원, 1990) p.465.> 이 후 상월조사의 생애와 천태종 信行의 중요한 요체가 되었던 것이다.

  20세 되던 1930년 상월스님은 국내 불교 성지의 순례에 이어 중국의 명승지를 순방하기 위해 만주를 통해 입국하였다. 上月스님은 五台山 文殊道場, 普陀洛伽山 觀音靈場, 峨嵋山 普賢道場, 淸凉山 華嚴聖地 등 각지의 명소를 순방하고 다시 新彊과 몽골지방을 돌면서 여행을 통해 크게 안목을 넓혔다.

  26세 되던 1936년에 귀국하여 布施行을 통하여 중생구제를 서원하고 빈궁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보시하거나 민간요법을 이용한 봉사활동을 하였으나 이내 그 한계를 느꼈다. 上月스님은 法을 통한 중생제도를 표방하고 소백산과 강원도를 오가면서 도량을 삼고 9년간 수행정진만 매진하였다. 자신의 道가 충만하다면 곧 중생구제가 이루어진다고 서원하였던 것이이다. 이후 삼척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閔元洪, 閔敬德 대학출신 2人을 대동하고 現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小白山 九峰八門下에 道場을 일구기로 결정하고 산너머 民家에서 다시 修道에 들어갔다.

  上月스님은 閔氏 형제와 더불어 鼎坐하고 철야로 千手陀羅尼經을 高聲으로 合誦하면서 精進에 전념하였다. 수일 후 근처에 살던 南益淳(2代 宗正)과 洪承元 등이 참여하면서 승단으로 출발하였다. 45년 (음)3월에 소법당의 상량식과 함께 그 해 단오일에 소수의 신도를 맞이하면서 四部衆이 형성되었으며, 시간을 정하고 철야로 정진에 들어갔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충남 麻谷寺를 중심으로 피난민들을 위하여 구제활동을 펼쳤으며 그 온정으로 인하여 많은 信者가 귀의하였다. 피난민 구제활동 6개월 만에 다시 귀사하여 초토가 된 법당 자리에 다시 三間茅屋을 엮고 禪定과 呪力을 계속하였다.

  上月스님 세수 41세가 되던 51년 겨울 음력 12월 21일부터

  "우리의 공부가 가장 깊게 되고 있으니 대중은 엄숙하라 발소리도 기침소리도 내지 마라. 그리고 나를 보라"<각주: 南大忠說·趙明基書 『上月圓覺大祖師 悟道略記』(서울: 신유문화사, 1987), p.22.>

라고 하니 그 때부터 모든 대중은 더욱 열심히 정진에 임하니 7일이 경과하면서 28일 子正에 千手陀羅尼를 呪誦하던 소리가 달라지면서 새벽 3시에 벼락치는 소리처럼 상월스님은 크게 외쳤다.

  "東天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日月이 머리 위에 있으니 天地가 크게 밝도다"<각주: 위의 책 p.23.>

라고 하였다. 그리고 寺內에 서광이 비치고 있었으며, 모든 대중들을 모아놓고 깨달음을 설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월스님은 깨달음을 선포한 이후 여러 날을 지속적으로 많은 說法을 이어갔음을 당시 참여했던 많은 대중들이 후일에 그 목격담을 내놓고 있다.

  悟道 이후 신통력으로 병이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제하자 그 소식과 함께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운집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확장되었다. 많은 불사와 함께 救仁寺 도량이 세워지고 전국에 많은 천태종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후 '上月圓覺祖師'는 1974년 4월 27일 입적하였으며 佛祖慧命이은 天台智者大師와 義天大覺國師를 잇는 한국 천태종의 重創祖로서 거듭나고 있다.

  제자로서 초기 小白山 蓮花地에 법당 터를 지정하면서 함께 고락을 했던 현대 천태종의 2대 종정인 南大忠 宗師(1993년 입적)와 많은 제자가 있다. 大忠宗師의 열반과 함께 새로이 제3대 종정인 道勇禪師가 추대되어 그 맥을 잇고 있다.

 

 

상월원각대조사 오도송

 

연화 극락 다시오니
내 하나가 제일이다
삼천 대천 세계조화
어느 누가 제도하랴
내 하나가 제일이다.

 

삼세간이 득리(得利)하나
어느 누가 제도할고
광명 천지 밝은 날에
내 하나가 제일이다.

 

무상 법계 제도하니
어느 중생 안 따르리
삼강삼세(三綱三世) 일성(一成) 하니
원형(圓形)만이 제일이다.

 

하나되고 셋이 되니
불운천지(佛運天地) 보배로다.

 

묘법 세계 수희(隨喜)하니
어느 강산 안 굽히리.

장엄법계 실상이니
도덕문이 풍류로다.


청정계행 성운하니
보패락(寶貝樂)을 어찌하리.

무개침상(無蓋寢床)
진귀(珍貴)하니
계절 광풍 다 받아서
용인(龍人)승부 누가 알리

천상 천하 하나 되니
그 걱정을 누가 하리
험한 산천 저버리고
중생 제도 다해 보자.

 

묘상(妙相) 각지(覺智) 득세하니
만민 중생 부모되어
불쌍하게 다시 보며
회삼귀일(會三歸一) 그아닌가.

 

면면(面面) 진상(眞相) 보배되나
받을자가 망망(茫茫) 하니
다시 보니 한심(寒心)하다.

 

철따라서 오는정을
막을 자가 누구인고
내 하나가 제일이다.

삼세 천지 불운(佛運)되니
막을 자가 누구이며
동서양이 일문(一門)되니
제도함이 꼭이로다.

 

무개일문(無蓋一門) 진행하니
병기성(兵機成)이 무동(無動)이요,
진화 성지 고금(古今)하니
부처님이 제일이다.

 

상하문(上下門)새 재양(再揚)하니
금강문이 천세로다
하하선(船)이 대채하니
마하선(摩訶船)이 불문이요.

 

진성호가 금강되니
부처님의 힘이로다.

삼세구품(三世九品) 조화하니
무량겁이 가이없다.

 

춘화 춘풍 끝 없으니
부처님이 제일이다.

 

 

 

연등공양의 유래의 의미

 

 

지금부터 약 2,500여 년 전
인도의 아사세 왕이 부처님을궁중으로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또 부처님이 다시 기원정사로
돌아가시는 길에 수많은 연등을 공양으로 밝혀 도시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와 광명을
상징하는 등불 공양을 올리고 신심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이면 연등공양을 올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남에게 선물(공양)을 하려면 애써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서 선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복(자비 광명)과 지혜(진리 광명)가 구족하신 참생명
그 자체이신 부처님은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등불은 마치 태양과 같아서 어두운 미혹과 착각을 깨뜨리고
자비광명의 따사로운 햇살로 만물을 성장시키는 것이 보살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등불을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촛불을 밝히며 소원성취를 발원하고, 부처님께 가깝게 인도되기를
바라는 인등(引燈) 또는 장명등(長明燈), 연꽃 모양의 연등,
원만하다는 뜻의 만월등,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들을 찬탄하는
수복등,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원통등, 불교의 진리를 하나로

상징해서 표현한 만다라등, 팔정도를 의미하는 팔모등, 6바라밀을
뜻하는 육모등 기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서 많은 종류의 등을
만들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10가지 다른 이름 중에는 ‘명행족(明行足)’이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명(明)은 진리의 등불을 뜻하고
행족(行足)은진리의 등불을 달고 있는 모습(그릇)으로서
그 그릇의 모습이 원만구족하고 무한능력자요,
거룩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 연등을 공양하는 것은

내 마음의 부처님을 연등에다모셔서 부처님께 올리는 것이며,
내 마음 속에 참생명을 밖으로 드러내서 형상화시킨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월간 佛光

........    ..........    ............    ........     .........

법당에 밝히는 등불(인등)은 지혜의 광명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자비를 비롯한 수많은 덕목보다 우선하는 불교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정과 애착일 뿐입니다.
자비도 깨달음의 지혜가 있는 뒤에야 자비다운
자비를 배풀수 있습니다.

지혜와 광명, 불교에서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법당에는 전기불이 켜져 있어도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하는 촛불도 키고 인등을 밝힙니다.

부처님 오신날 그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형형색색
수많은 등불을 켭니다.
지혜의 상징인 등불을 밝힘으로써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되살아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래서 또한 지혜의 광명으로 무명에서 벗어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소망에서 등을 밝힙니다.

 

 

 

 1053존불

 

 

 

 

 

 

 

 

천수관음도

 

 

 

 

http://www.cheontae.org/board/news/2005/imgnews/1222_9th_art/9th_song.htm

 

 

 

목탁을 치는 역사적 유래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물고기로 태어나 고통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수륙 천도재(水陸薦度齋)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해하며 다음 생에는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기 등에 자라난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의 목어(木漁)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목어와 목탁

처음엔 목어라는 것이 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목어는 지금도 절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길 다란 물고기 모양의 나무를 깎아서 속을 파낸 모양이며 절에서는 이 목어의 배속에 막대기를 넣어서 두드리기도 합니다. 이 목어를 간단히 디자인 것이 목탁입니다. 즉 목탁과 목어는 같은 목적의 것이며 목어가 크고 번거로우므로 목탁처럼 변형한 것이지요.

 

목탁(목어)을 치는 이유

불교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가진 미물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짐승이 알아듣는 소리로 중생을 제도할 필요가 있죠. 절에서 목어를 치는 이유는, 수중생물이 듣고 제도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즉 수중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물이라고 하여 큰절에 가면 범종, 법고, 운판, 목어가 있습니다.

 

 

창건공덕비

 

 

 

대한불교 천태종  http://www.cheontae.org/03_malsa/mals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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