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없는 고향을 떠나 생판 모르는 이국으로 온 지 어언 3년.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 ‘제2의 고향’에서 두번째 풀코스 출전 만에 감격스러운 첫승을 거뒀다.
제5회 경향신문 서울마라톤 남자부 풀코스 1위를 차지한 참가자는 1m76, 55㎏의 깡마른 체구에 새까만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인이었다. 아프리카 중부에 위치한 소국 부룬디공화국 출신의 도나티엔 부징고(27). 기록은 2시간28분17초. 마스터스 상위권 수준이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2003년 8월. 당시 비즈니스 행정학을 전공하는 부룬디 국립대 3년생이던 부징고는 대구유니버시아드 하프 마라톤에 출전예정이던 부룬디 국가대표였다. 다만 축구와 달리기를 좋아했을 뿐. 전문적으로 마라톤을 하지 않은 그는 그저 잘 뛴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대표에 뽑혔다. 그러나 그는 비자발급이 지연돼 한국에 늦게 도착한 탓에 레이스에는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
아쉬움만 남은 유니버시아드대회 직후. 그는 인생 최대 결심을 했다. 한국에 남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그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구호난민신청을 했다. 올해 안으로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질 거라는 게 회사 동료의 예상.
부룬디는 소수파 집권 종족과 다수파 피지배 종족간 내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 부징고도 15세이던 1993년 내전 중에 부모와 동생 등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는 한국에서 카메라 렌즈를 만드는 중소기업 등에서 기능공으로 일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계속 뛰었다. 홀로 있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출구가 달리기였던 셈. 그가 국내마라톤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지난해 5월 열린 경향신문 서울마라톤에서였다.
그는 당시 하프코스 1위를 차지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개인사정으로 불참한 회사 동료의 번호를 달고 뛰었기 때문. 그는 그해 11월 국내 신문사가 주최한 대회에서 첫 풀코스에 출전, 2시간26분8초로 3위를 차지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듯 처음에는 자리를 피하던 부징고는 “우승을 해서 너무 기쁘다. 그냥 뛰는 게 재밌어서 뛸 뿐 프로선수가 되거나 할 생각은 없다”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회사동료들이 인터뷰를 도와주자 비로소 미소를 머금기 시작한 부징고. 그는 “한국이 너무 좋다. 영원히 한국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며 햐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