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친일논란 반박자료
일제시대 동아일보의 창업주이자 물산장려운동을 통해서 성장한 경성방직의 사장이었고 민족지도자 배출의 산실이었던 고려대학교 초대총장을 역임한 인촌 김성수선생에 대한 논쟁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끝난 상태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에서 친일자본가까지 그 평은 너무나 대조적이고 다양했죠.
그런데 인촌의 친일논쟁의 종지부를 찍은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일본에 의해서 결론이 났답니다.>>>
90년대 초반에 일본에서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조선총독부 경시청 비밀자료 중 조선인 주요감시대상 목록이 공개되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중 주요감시대상을 4등급으로 분류했는데,
1등급은 독립군과 그 친족 등 반란세력으로 정하고
2등급은 최대의 요주의 감시대상으로서 독립군에 대
한 지원행위가 의심되고 언제라도 유사시에 일본제국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이었죠.
3등급은 적대세력, 4등급은 의심이가는 정도 등의 분류였습니다.
그 감시대상 등급 중 2등급 요주의 감시대상에 인촌이 올라있었던 겁니다.
친일파가 일제에 반란을 꾀하는 요주의 감시대상?
웃기는 말이 되어 버리죠?
그 이후로 학계에선 인촌의 친일논쟁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만약 인촌이 자신의 안량한 안신을 위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면 왜 돈 안 되는 교육사업을 했겠습니까?
그것도 3.1운동을 주도하고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사건등으로 보전교수200여명 거의전원이 구속되고 독립군군자금조달처인 백산상회를 운영하던 보전법과생의 학교인 보전은 당시 일본의입장에서 본다면 눈에 가시같이 여기던 억센 저항기질의 문제학교였는데도 왜 구태여 인촌이 동학으로부터 인수하려고 했겠습니까?
인촌이 인수한 보성전문은 일제치하 우리민족의 유일한 정통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러시아망명 항일독립운동가로 생을 마감한 대한제국의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선생이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부국자강을 위해 이땅에 최초로 법학과와 이재학과를 만들면서 민족사학 보성전문을 설립한 것입니다.
인촌이 보성전문을 인수 할 당시에는 보성전문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종교 지도자였던 천도교 교령 손병희선생이 교주를 맡고 동학재단에서 운영하고 계셨죠
일제의 탄압으로 동학재단이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을때, 당시 조선인 최대의 민족자본가였던 인촌이 인수하고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민족의 자존심인 보성전문을 반석위에 세웠고(지금 본관이 그때 세운거랍니다.) 지금의 고려대학교가 된 것입니다.
보성전문의 역사적 의의는 실로 엄청나죠.
만약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보성전문이 없어졌다면 그야말로 일제시대에서의 우리민족의 교육의 대가 없어지는 것이죠.
해방후 4년제종합대학으로 개편한 사학들은 오로지 x대 한 곳을 빼고는 일제시대 전문학교의 역사를 자기학교의 교사에 포함하여 그 공과 과를 계승하고 있죠.보성전문=고대,연희전문=연세대,이화여전=이대,혜화전문=동국대,동아공전=한양대,숙명의숙=숙대등등이죠.
일제시대와 관련한 각종 독립군 문헌이나 문학작품들을 보면,유독 보성전문은 민족의 학교로 묘사되고,연희전문과 이화여전은 신문물을 배운 신사나 신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반하여 x학원은 매국노나 앞잡이의 소굴로 인식되고 있습니다.이렇듯 동학의 보성전문이 재정난으로 결국 쓰러지고 만다면, 일제치하 근대화의 교육에 있어서 더이상 우리 민족자신의 자주적인 교육은 없어지고 미션계 외래 교육과 일제의 신민교육및 그 혹세무민의 앞잡이였던 친일유림집단(황도유학)만이 남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인촌이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 보성전문을 살리기 위해 동학재단으로부터 인수한 것이지요. 또한 인촌은 그당시 민족의 가장큰 실력자중 1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일제가 수여하는 그 흔한 작위나 훈장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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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 등 당시 민족계열 신문은 모두 폐간시키고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현 대한매일, 서울신문) 만을 남겨놓고선,
<<<당시 민중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도병 지원 독려를 촉구하는 글을 실었죠.
그런 와중에 일제 기관지에 실렸던 "학도병에 지원하라!" 는 글들이 나중에 일부 주장자들에 의해 친일로 몰린 이유였답니다.물론 이 점은 인촌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이고 인촌이 친일파라고 몰리고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아직은 논란이 있는 쟁점이기 때문에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차후의 과거사청산작업의 결과를 더 지켜보기로 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슬퍼렇던 일제치하에서 총을 들고 만주로 가는 것만이 민족을 위하는 것 일까요? 일제말기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분루를 삼키면서 민족교육을 지켜내고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장정이란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김준엽 전 고대총장님께서 일제시절 만주에서 독립군으로서 독립운동과 이후의 현대사를 쓰신 책입니다.(최근에 5권이 완간되었죠) 이시대의 마지막 진정한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독립군이자 전 고대총장이셨던 올곧은 그 분이 인촌이 친일파였다면 고대에 남아 있었겠습니까? 또한 성대생들이 주장하는 민족성대라는 생소한 단어의 유일한 근거인 그 꼿꼿하셨던 심산 김창숙선생이 인촌의 서거를 슬퍼하면서 민족사의 큰 별이 지노라면서 만장을 직접 쓰셨겠습니까?
세상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많답니다.
사람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근거에 의한 판단이어야지 떠도는 말을 진실처럼 여긴다면 지성인으로서의 자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만연된 학벌주의 시대에서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보복심리로서 오로지 자기학교의 위상제고만을 위해 유독 서울대나 연세대,이화여대는 놔두고 상대적으로 재정이 약해서 조만간 잡을수 있겠구나 하면서 만만하게 보인다고 오로지 민족사학 고려대만을 물고늘어지는 속보이는 일부 홀리건사립대학의 아귀같은 행태에는 매우 불쾌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읍니다.
그러한 작태는 진정한 역사바로세우기라기 보다는 자기들 학교도 어떻게 소위 스카이급에 포함되어서 자기들도 함께 학벌사회의 병폐적 반대급부인 썩은고기의 맛을 좀 봐야겠다는 매우 불순한 하이에나의 심보일뿐 민족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지성인의 자세라고는 도저히 보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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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학병에 가라 말라 할 수는 없다”
金振雄 (전 고려대 총장서리)
= 고려대 1회 졸업생 (보성전문으로 입학, 해방 후 대학으로 승격한 고려대 1회 졸업생)
인촌(仁村) 선생은 내 선친과 교분이 있어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적이 많아 나는 어릴 때부터 선생을 자주 뵈었다. 그러다 1943년 내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뒤엔 선생을 더욱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인촌 선생을 회고하려니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가지만 나는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춰 고인의 면모를 술회하고자 한다. 바로 최근 유행처럼 떠도는 이른바 ‘친일’이라는 무책임한 말에 대한 것이다.
과거사, 특히 친일행위를 청산하자는 기본 취지에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일을 한 것이 친일이냐는 친일행위의 개념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관계를 똑바로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는 증언자가 다수 생존해 있는 마당에 불명확한 사실을 토대로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촌을 친일파로 몬다면 당시 일제 치하에서 삶을 영위하고 기관에 취직해서 월급 받은 사람은 다 친일파로 귀결되고 만다.
“지원이지, 강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친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고 탄식이 나올 뿐이다. 그 의도는 차치하고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당시를 재단하는 그 협량한 지적 수준이 안타깝다. 지금의 눈으로는 좀체 이해되지 않을 당시 상황을 조금만 묘사해 보겠다.
전차를 타고 남대문 앞을 지난다. 전차의 차장이 “지금 전차가 조선신궁 앞을 통과합니
다” 하면 승객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남산을 향해 절을 한다. 학교에서 조선말로 인사라
도 한마디 하다가는 잡혀 간다. 너도 나도 창씨개명을 한 시기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확실히 알고 나서 친일 여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 엘리트 학생들(경성제대, 보성전문, 연희전문…)이 인촌을 어떻게 평가했느
냐를 보아야 한다. 당시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젊은이에게 인촌은 우상과 같은 존
재였다. 그리고 일제시대 학생들이 인촌과 함께한 장덕수(張德秀) 안호상(安浩相) 같은
분을 얼마만큼 숭앙했는지를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들과 인촌의 말 한마
디가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제 말기 학병제도가 시행된 직후인 어느 날, 보성전문학교(보전) 조회시간에 생긴 일이
다. 대학에는 원래 조회라는 게 없었지만 학병 모집을 위해 조회를 열던 시절이다. 배속
장교인 조선인 군인이 교단에 올라가 “너희들, 왜 학병에 지원하지 않느냐. 지원제라고
하지만, 형식만 지원이지 실은 강제야”라며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만일 너희가 지원
하지 않으면 보성전문은 없어져. 학교가 폐교된단 말이다. 알았어? 학병에 가!”
그러자 인촌 선생이 갑자기 교단으로 뛰어올랐다. 평소 교단에 오르는 일이 없던 인촌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인촌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교관 선생이 ‘학병은 겉으로만 지원이지, 사실상 강제다. 너희가 안 가면 보전은 폐
교당한다’고 했는데, 내가 어제 총독부에서 정무총감(총독 다음 서열)을 만났고, 조선군
사령관(일본육군 중장)도 만났다. 그 사람들이 현관에까지 따라 나오면서 ‘어디까지나 지
원이지 절대로 강제가 아니다. 잘 부탁한다’며 내게 거듭 당부했다. 또 지금 교관은 ‘제군
이 지원을 안 하면 학교 문 닫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설혹 제군이 지원을 안 해서 학
교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군대 가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지, 누가 나서서 나는 제군의 부형에게서 제군을 교육해 달라고 맡았지 자네들의 생명을 맡은 적이 없다. 가라 말라 할 수는 없다. 설혹 보전이 폐교당한다고 해도, 내가 자네들 교육을 맡았지 자네들 생명을 맡았나? 자네들이 잘 알아서 결정하소.”
곧이어 장덕수 선생이 교단에 올라가더니 ‘어디까지나 지원이지, 강제가 아니다’는 매일
신보에 난 일본의 발표문을 읽었다. 당시 어떤 학교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학병 동원
총력전이 벌어져 선생들이 학생의 집을 방문하고 일경의 협박이 일상화하면서 지원하는
학생이 차츰 늘어갈 무렵, 매일신보에 ‘普專도 3명’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학병제에
반대하는 최일선에 선 보전에서조차 지원자가 나왔으니 다들 머뭇거리지 말라는 뜻에서
대서특필한 것이었다. 보전의 학병거부 움직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보전학생들이 학병에 지원하지 않자 일본 당국은 “학교측이 협조를 안 하는 것 아니냐.
교수들이 학생들을 붙잡고 설득해서 지원시켜야 할 것 아니냐”며 압력을 넣었다. 마침내
보전도 협조하는 시늉을 했다. 나도 선생들과 분담해 가정방문에 참여하게 됐다. 명륜동
에 살던 나는 집이 가까운 김해균 선생과 한 조가 됐다. 공산주의자인 그는 광복 후 월북
했다.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조선공산당 관련 사무실로 이용한 혜화동 집이 바로 김해균
선생의 집이다.
학병대상자 집으로 학병권유 방문을 가면 학생은 대부분 숨거나 피했는데 간혹 어떤 학
생은 예의상 차마 선생님을 뿌리치지 못하고 만나 주었다.
“아이고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아, 이 사람아 말 마시게. 총독부에서 학생들 학병에 보내라고 닦달해 할 수 없이 오긴
왔는데…, 혹시 일본군이나 순사가 찾아오거든 우리가 자네더러 학병 가라고 몹시 조르
다가 갔다고 이야기 좀 해 주소.”
“선생님, 차라도 한잔 마시고 쉬었다 가시죠.”
“무슨 소린가, 이 사람아. 이 꼴로 온 우리한테….”
지나고 보니 참으로 눈물나는 광경이다. 과연 이것이 학병 가라고 강요한 것인가.
“총독부가 읽으라는 대로 읽겠다”
부민관에서 학병으로 떠날 학생들을 위한 장행회가 열렸다.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을 망라
해 각 학교의 학병대상자가 모였다. 나는 대상자는 아니지만 세 살 위 형이 학병 해당자
여서 함께 참가했다.
사회자가 “다음은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 선생님의 장행사가 있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날 행사의 마지막이었다. 순간, 장내가 숙연해졌다. 한국학생은 물론이고 일본학생까
지 모두 긴장했다. 이런 때 ‘인촌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인촌은 주
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말을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총독부에서 이걸 가져와서 이 자리에 나와 읽으라고 하기에 이제부터 읽겠
습니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그 문건을 읽어 내려갔다. 일본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이것이 친일인
가.
인촌이 학병을 ‘독려’했다고 하면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그리고 매일신보에 인촌 명의로 학병권유 칼럼이 실렸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기억이 분명치 않다. 다만 확언하건대 그 칼럼을 본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인촌의 평소 언행을 가까이서 지켜본 보전학생이라면 더 더욱 그러하다.
연희전문은 교장을 일본사람으로 일찌감치 갈아 치웠다. 보전이고 인촌이니까 뚝심으로
버텨낸 것이다. 그 시절 외압을 견뎌내고 학교를 존립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전부
백이숙제(伯夷叔齊)처럼 세상을 등지고 수양산으로 올라가면 문제가 끝나는 것인가.
식민지 조국에 남아 고통과 수모를 감내하면서 청년과 민족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조
선민족과 청년들의 존경을 받던 사람이 어떻게 친일파인가. 그때를 평가하려면 그때 상
황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친일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때를
살아 보지 않았다. 무엇을 가지고 이야기하는가.
인촌의 안부 걱정한 북한 요인
인촌을 친일로 몰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에 좌경 운동권 학생들도
그런 적이 있다. 나는 당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교내에서 조선말 쓰면 잡혀 가고 정학처분 받는 시대에 보성전문에 들어가 보니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별천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운동권 학생들 용어를 빌리면 ‘해방
구’였다.”
요시찰 대상자인 안호상 선생은 예비검속 때가 되면 꾀병을 내어 병원에 입원했다가 검
속이 풀리면 학교로 돌아왔다. 인촌은 물론 그를 결근처리 하지 않았다.
안호상 선생은 조선말로 민족혼을 깨우치는 강의를 했고, 학생들은 그 강의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선생과 함께 붙잡혀 가는 게 아닌가 해서 부들
부들 떨었다. 학생들은 몸이 아파도 오늘은 또 무슨 피 끓는 소리를 듣나 해서 결석할 생
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보전의 분위기였다.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교수는 일본놈이 지켜보는 가운데도 조선말로 강의..)
인촌은 좌익, 우익을 가리지 않고 일본에 항거하고 민족혼을 세우려는 사람이라면 다 선
생으로 데려왔다. 교련 교관마저 우리 나라 사람이었으니 일본인의 눈에는 보전이 ‘불령
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교장으로서 편하게 지내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겠는가.
광복 직후 여운형(呂運亨)이 주석, 허헌(許憲)이 국무총리를 맡은 인민공화국에서도 각
료명단에 인촌을 문교부 장관으로 올려놓았다. 좌익도 인촌을 포섭해야 할 인사로 본 것
이다. 좌익진영이 토착 부르주아지, 반동이라고 부르면서도 인촌을 영입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 신망이 높고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광복 후 월북한 보전교수 윤행중(尹行重) 선생을 6·25전쟁 중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의 신분은 북한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 북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총지휘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는 참 얌전한 분으로서, 나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가까
웠고 집안 어른과도 교분이 있었다.
북한 정부의 요인이 된 그는 날 보자마자 “인촌 선생께서는 남하하셨을까?”라고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남하하시지 않았을까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남하하셔야지.
내가 공적으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야. 꼭 남하하셨어야
지”라며 인촌의 안위를 걱정했다.
단편적 자료로 단정 말아야
인촌은 일제하 암흑시대,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서 숭앙받던 분이다. 당대에 그런 평가를
받은 인물에 대해 일면식도 없는 후대 사람들이 지금 와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상식적으
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인촌은 좋은 조건과 재력을 갖추고도 뜻을 세워 고려대학,
동아일보,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민족을 위해 가시밭길을 매진하였으니 지금 그와 같은
이가 또 있겠는가.
나는 역사학자들에게 역사는 현실을 그대로 기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본의 아니게 허위로
빠질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곤 한다. 당시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때를 살
아본 사람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역동적인 과거 사회현실의 한 귀퉁이일 뿐인 글 한 조
각, 삐라 하나를 금과옥조인 양 여기고 그에 기대어 역사를 재조립하려는 습성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 위험성에 대해 학자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살았고 아는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학생시절에 나도 이
런저런 삐라를 많이 써봤지만, 후세 사가들이 남은 자료가 그것밖에 없다고 해서 ‘~에 의
하면’ 하고 사실의 전부인 것처럼 써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러이러한 기사가 남아 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그게 진실의 전부인 양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 상황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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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은 우익만의 지도자인가?
역사학도 | 2005·03·30 10:02 | HIT : 58 | VOTE : 0 |
인촌이 해방 후 한민당을 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냈고, 대한민국 정
부 수립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인촌은 좌파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당했다. 좌파들
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인촌을 ‘친일파’라고 공격한다. 좌우 대립 속에서 가장 큰 무기는
친일파라는 낙인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 내내 동안 인촌을 ‘친일파’라고 생각한 동포들
은 국내에서도, 상해에서도, 만주에서도, 하와이에서도 없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하
는 선각자였다.
그리고 인촌은 우익의 지도자 만이 아니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독립을 위한 길이라
면 아낌없이 돈을 썼다. 고려대는 좌익교수들이 넘쳐났다. 해방 후 윤행중, 최용달, 박극
채 등 상과교수들은 대부분 월북,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인촌은 그런 좌익교수
들도 모두 감쌌다. 고려대가 ‘일본인 교장’(가와시마)이 설쳤던 연희전문과 달리 민족고
대인 이유다. 인촌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기에 고대에서는 한국말로 수업이 가능했고, 좌
익교수들도 떳떳이 강의를 했다.
인촌은 무엇보다 교육자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언론인도, 기업인도 아니다. 동아일보
에 한 줄의 기사도 직접 쓴 일이 없으며, 경성방직에는 초창기 설립 때만 관여하고 손을
뗐다. 인촌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교육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중앙학교를 인수했을 때
나, 보성전문을 인수했을 때나 보성전문 교장으로서 해방을 맞기까지 인촌은 교육자로
시작했고, 교육자로 끝을 냈다. 자나깨나 하고 싶은 일은 교육자였다.
그리고 수많은 보성전문, 중앙학교 학생들을 계동 집에서 공짜로 하숙시키며 살게했고,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아무 말 안하고 돈
을 내주었다. 그것은 우익, 좌익을 가리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민족의 실력을 키울 수 있
는 인재면 무조건 돈을 내주었다. ‘살아 있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였던 자운 김철수를 일
본에 유학시킨 것은 어느날 말을 타고 나타난 고향선배 김성수였다.(한겨레신문) 국내에
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더 못견디고 시베리아로 도피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공산주의 청년들이 찾는 집도 김성수의 계동 집이었다. (팔봉 김기진-사상계)
단순히 돈이 많았던 지주 계급이라고 '부르조아 타도' 차원에서 김성수를 매도해선 안
된다. 그 당시 전국에 지주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돈으로 기생집에서 술마시면서
자기 배 채우면서 살았지, 총독부로부터 갖은 탄압과 감시를 당해 오히려 패가망신할 수
밖에 없는 학교, 신문사에 돈을 쏟았던 지주는 거의 없다. 요즘의 경제적 관점에서보면
인촌은 '돈 안되는 일'에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다.
고려대 설립자인 이용익 선생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학교가 경제적, 정치
적으로 어려울 때 방패막이가 돼 주고 100년의 역사를 맞게 기틀을 마련한 김성수 선생
의 공로는 고대생이라면 헤아려야한다.
◆한겨레신문, 1989년 11월24일자
전북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 수성부락 근처 야트막한 구릉 아래에는 키 큰 소나무와 잘 자란 대숲이 우거진 가운데 초라한 흙집이 한 채 자리잡고 있다. 방문 위에는 ‘지운당’(芝雲堂)이라고 새겨진 크지 않은 나무간판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누추한 집이 일제시대 좌익운동과 관련된 크고작은 사건에 관여했으며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내기도 해 ‘살아있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였던 지운 김철수(金綴洙)가 1986년 3월16일 93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살던 곳이다.
그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을 도모하던 중 47년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함께 당시 운동의 분파주의에 환멸을 느껴 모든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고 낙향, 생가가 있는 백사면 원천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 60년대 중반 선산이 있는 이곳에 손수 흙집을 지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일제하 민족운동을 평가하거나 그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김철수만큼 비중과 역할에 비해 정당한 평가와 주목을 받지 못해온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일찍이 1920년(그의 나이 27살)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 사회주의 사상 처음으로 ‘당’의 명칭이 붙은 비밀결사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고 이를 토대로 이동휘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으로 결합, 1921년부터 23년초까지의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고려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곧이어 26년에는 일제의 혹독한 검거선풍을 뚫고 조선공산당을 재건, 3차 책임비서를 맡기도 했다.
지운 김철수는 1893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고향 선배인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다니다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죽기 1년전쯤 끝내 공개되지 못했던 한 인터뷰에서 “하루는 두 살 위인 인촌 김성수씨가 말을 타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우리 아버지께 ‘철수를 일본에 데리고 가 공부시킬테니 맡겨달라’고 했지. 결국 아버지가 승낙해 곧바로 현해탄을 건거게 된거야”라고 술회했다.
김철수는 그뒤 상하이 만주 모스크바 등지를 누비며 비합법 지하활동을 계속했다.
1928년 12월 제6차 코민테른대회의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해체돼 29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된다. 그해말 조국으로 잠입, 전국을 돌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0년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시작했다.
지운이 생전에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으며 죽기 전 후세의 정확한 평가를 위해 남겨
둔 자필유고와 육성녹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보관하고 있는 정진석(69세=2004년 현재 생
존했다면 84세) 백산고등학교 전 교장은 그를 “사상과 이념문제에 있어선 한치의 양보도
없는 원칙주의자였지만 인본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였다”고 회상한다.
김철수는 오랫동안 학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공산주의 운동사의 산 증인으로
서 도쿄 유학시절부터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통합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계했던 크고작은 사건 및 인물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자필 유고를 남겼다.
해방전후로 나뉘어 ‘본 대로 들은 대로, 생각난 대로’‘해방후 동작개요’라는 제목이 각각
붙여진 이 유고들은 대학노트 70여쪽에 촘촘히 기록되어 있는데 유고 첫부분의 내용으로
미루어 70년대 중반쯤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유고의 진본은 서울에 살고 있는 그의 맏
손자 김소중씨가, 사본은 정진석씨가 각각 소장하고 있다).
이 유고에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오랫동안 의혹으로 남아있던 ‘코민테른 자금사
건’과 해방직후 조선노동당의 결성 및 사회노동당의 창당과 해체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
돼 있다. 1982년 김철수와 인터뷰를 하고도 상황 때문에 발표하지 못했던 이병석(정치학
박사·고려대강사)씨는 일제하 그의 행적, 특히 해방이후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노력에서
보이는 다분히 낭만적인 태도로 미루어 투철하고 과학적인 정통공산주의였다기 보다 꼿
꼿한 선비정신과 당시 지식인의 진보의식이 결합된 ‘포괄적 의미의 사회주의자’로 그를
규정한다.
부안군 계화면 돈지라는 구석진 촌마을에서 홀몸으로 약방을 경영하고 있는 3남2녀 중
둘째딸 김용화(70)씨는 이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란 열마나 끔직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글 김영철 기자
◆사상계 1961년 2월호 p.327-328
金八峰(경향신문주필) = 팔봉 김기진
1923년부터 1945년까지 나는 사적유물론을 믿는 사회주의 사상의 대표자였던 까닭으로, 일제때의 나의 가까운 친구는 모두가 사회주의자-계급혁명의 선도자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러시아로 망명시킨 공산당 간부도 있었지만, 그들을 통해서 들은 이야
기로서는 러시아로 망명한 사람들의 거개가 모두 인촌선생으로부터 노잣돈을 얻어가지
고 망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당시 서울로부터 울라디보스토크으로 밀항해 가지고 모스크바까지 달아날려면 일본
돈으로 3백원 내지 오백원만 가지면 족하였다. 그래 사회혁명을 획책하다가 일본경찰에
붙들렸다든지, 혹은 미행을 따버리고서 피신하고 있다가 로령으로 고비원주(高飛遠走)하
게 된 혁명투사들이 돈이 없어서 쩔쩔 매다가 그들과 사상은 다르지만 그들한테 동정해
줄만한 사람으로는 인촌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서 그들은 계동 인촌택으로 밤에 남몰래 찾
아가든지, 혹은 믿을만한 친구를 대신 보내든지 해가지고서 노잣돈을 청구할라치면, 인
촌선생은 아낌없이 3백원, 때로는 5백원돈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제의 철
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준 일이 비일비재였다. 공산당원이거나 민족사상운동, 혹은 직
접 행동을 음모하다가 붙들려 갔든지, 서대문감옥에 들어가게 된 사람, 혹은 감옥에 들어
가 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있는 사람으로서 만주나 로령으로 망명하고 싶었을 때 인촌선
생한테서 돈을 얻어가지 아니한 사람은 거의 한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 추상
하고 있다.
1923년의 제1차 공산당사건이후 1931년 제3차 공산당(속칭 ML당)사건까지 10년동안, 일제에 대한 공산투사 가운데서 인촌선생으로부터 3백원~5백원의 돈을 얻어간 사람은 십지를 꼽을 수 있건만, 지금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ML당의 이성태라는 이름 뿐이다.
대관절 민족주의 사상가이었던 인촌선생으로서 공산당이나 무정부주의 운동자에게 아무 차별없이 3백원, 5백원씩 손만 벌리면 선뜻 내준다는 일이 용이한 일이냐? 신봉하는 사상과 주장하는 주의가 상이하면, 보통이 이런때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십중팔구이다. 그렇건만, 인촌선생은 아무 차별없이 민족독립운동자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를 대우하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의와 사상은 자기와 다르지만, 일제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려는 목표에는 일치하는 까닭에 인촌선생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촌선생은 자기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일신의 영예와 안일을 탐하지 않고, 오직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봉사하였는데 그 봉사하는 방법이 가장 민주적, 철인적 방법이었다. 지금 4·19 이후 젊은 친구들 가운데는, 묵은 세대는 물러가라, 고 외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그들의 눈앞에는 과거에 선배들이 해놓은게 뭐냐? 고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대들의 선배-그대들이 말하는 낡은 세대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인촌샌생같이 큰 발자욱을 남겨놓고서 길이길이 우리 민족을 가르치시는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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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김중순 著 유석춘 譯 일조각 刊-13,000원) 에서 발췌--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전선에 보내지고 있을 때 총독은 한국인 저명인사들에게 학도병 동원을 촉구하는 논설을 매일 신보에 쓰도록 했다.
명단에는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이광수, 장덕수, 유진오등이 있었다. 유진오는 김성수가 그런 글을 쓰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김병규는 자신이 대신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다.유진오는 "내가 김성수의 이름으로 게재된 글의 저자를 밝히는 이유는 그 글로 인하여 해방후 인촌이 부당한 비판과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훗날 김병규는 좌익으로 진로를 바꿔...
학도병 출신의 보전 학생들은 신문에 어떻게 쓰여졌건 그것은 실제 김성수가 생각했던 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 내가 학도병 동원에 간여 하겠는가? 나는 한국 젊은이들의 교육에 헌신하였지 그들을 동원하도록 주선한 것이 아니다" 김성수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일본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학생을 동원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쟁에서 거의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 하겠는가?"
이철승은 그 말을 가능하다면 징집문제를 기피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일부 보전 교수들 역시 학생들에게 징집을 기피하라고 권고 하였다. 일례로 보전교수였던 안호상은 입원중에 찾아온 이철승에게 "일본의 패망은 분명하니 징집을 기피하라"고 귀엣말을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89년 7월 15일자)에 실린 이철승의 글은 김성수가 그에게 학도병 반대 지하
운동을 조직하도록 지시 했다고 한다.....김성수는 전쟁은 곧 끝날것이고 그에 따라 매일
신보에 실린 그의 글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1943년 어느 날 춘천에서 열린 한 학도병 강연회에 그를 강제로 참석하게 하였다.....
"본인은 대중앞에서 강연을 잘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음연사의 강연을 경청해 주시고 그의 강연내용이 제생각과 같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 연사 역시 김성수와 각본을 짠 인사가 나와 또 말을 돌리고...
독립선언운동은 처음에 해외의 독립투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윌슨
의 민족자결원칙을 먼저 접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1월 상하이의 애국지사들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 평화회담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또 신한청년당은 물 밑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투사들을 찾아 한국, 일본,
만주, 시베리아 등의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장덕수와 선우혁은 한국으로 파견되었
다 장덕수는 인천에서 일본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선우혁은 평안북도에서 이승훈을 포함
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18년 12월과 1919년 1월사이에 독립운동이 조직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김성수, 송진
우, 현상윤을 주축으로 한 중앙학교 인사와 손병희 , 권동진, 오세창,최린이 활동한 천도
교 인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의 이승만과 중국의 김규식이 1919년 1월 파리평화회담에 참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김성수,송진우, 현상윤은 숙직실에서 거의 매일 숙의를 했으며,한국에서 독립운동
을 위한 자신의계획을 점차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천도교가 지하조직을 가지고 있
었기 때문에 그들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중앙학교 팀은 구한말 고위관료들을 운동의 대표자로 추대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
서 그들은 기독교의 지도자들 , 특히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생각하였다.
최남선은 이승훈에게 편지를 썼고....편지를 받자마자 이승훈은 곧 서울의 김성수에게 왔
으며 모든 진행상황을 들은 후 그는 즉시 운동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연결됨에 따라 운동은 두단계로 접어들었다. 김성수는 여러 가지
활동을 조직화하는데 쓰이는 비용으로 수천엔을 지원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액수는 알려
지지 않고 있다.
한편 이승훈은 함태영, 이갑성과 같은 동료 기독교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갔
다.1919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연합전선의 구축을 위해 이들과 천도교 측 최린의 만남
을 주선하였고 2월 24일에는 이승훈, 함태영, 최린이 손병희와 만나 운동의 연합전선에
합류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것이 운동의 최종단계이다.....
3.1운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중앙학교팀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수,
현상윤, 송진우등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현상윤, 송진우는 운
동을 계획하는데 참여한 함태영 및 다른핵심인물들과 마찬가지로 48인 명단에는 포함되
어 있었다. 그래서 현상윤과 송진우는 일본당국에 체포 되었고 증거부족으로 풀려날 때
까지 1년간의 옥고를 치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종교단체가 주된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앙학교
팀은 33인의 대표자 명단에서 빠졌다고 한다. 최형련은 또한 운동이 계속되려면 핵심성
원들이 모두 투옥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었다고도 설명하다.
대표자 명단에서 김성수의 이름이 없었던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김성수가 운동
에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면 감옥밖에서 조직을 강화하고 지원하며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
무엇보다 김성수가 운동에 관여했던 것이 알려졌더라면 중앙학교의 강제 폐교를 면키 어
려웠을 것이다...안창호가 105인 사건으로 체포 되었을 때 일본당국은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의 대성학교를 폐교 시킨 바 있다.
중앙학교의 폐교 가능성을 염려한 송진우와 현상윤은 운동을 준비하는 동안 김성수가 서
울을 떠나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김성수는 2월말 줄포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김성
수가 투옥을 두려워 도피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주장을 따르면 김성수로 하여금 운동기간 동안 떠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중앙학교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3.1운동의 취지가 총독부의 정책을 반대하며 한국
인들에게 장차의 독립에 대비하도록 하는 상징적인 운동으로 보았다. 만약 운동만으로
일본의 통치를 즉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장래를 위해 김성수를 도피시
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타 급진주의자들과 달리 중앙학교 인사들은 운동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김성수가 투옥되도
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김성수는 기본적으로 행동지향적인 혁명가라기보다 조직가이고
재정적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이기백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9년에 건설된 경성방직 회사는 한국자본으로 세워진 순수
한 한국의 기업이었고,...경성방직은 한국인만을 고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 했으며, 이
방침은 회사의 역사를 통해 토착 한국기업으로의 특징적인 면모로 유지되었다.합명회사
로서 1919년에 건립된 경성직뉴는 1911년18명의 주주를 가진 합자회사로 전환하였으며
그것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주식자본에 의해 세워진 방직회사였다.
김성수는 한국의 근대화에 필수적이며 고용을 증가시킬 수 있는 제조업을 선택하였다.
만약 이윤창출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김성수는 몇몇 부유한한국인 기업가가 그랬
던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은행이나 높은 이윤이 보장되는 다른 분야에 투자했을 것이다.
고등경찰의 비밀기록을 분석한 정진식에 따르면 총독부 산하의 고등 경찰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동아일보를 325번이나 압류했다고 한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당시 압류가 가장 빈번했던 시기는 김성수가 사장으로 있던 시기이며 특히 1924년 10월 24일부터 1927년 10월 21일 사이였다. 이 4년간에 190회의 압수가 자행되었다..
한국의 부르조아를 절대 찬양하지 않는 북한의 정통 사학자들조차 김성수와 같은 기업가
가 적어도 초기에는 노골적인 매판자본가나 '종속적' 자본가라기 보다 "민족적 개혁가"라
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지주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김성수는 지주계급의 대변자가 아니었
다.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하고 있던 유진오는 농지개혁에 관한 조
항을 포함시키면서, 지주인 김성수가 농지개혁안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김성수는 기본계획을 흔쾌히 지지했다. 실제로 김성수는 소작인에게로
토지를 이양하는데 있어 정부가 중재역할을 하도록 하는 1949년 6월의 농지개혁법을 지
지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민족주의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하기로.결정하였다. 미쓰바
시는 동아일보의 백관수와 송진우 그리고 조선일보의 사장이었던 방응모를 자신의 관저
로 불러 자발적으로 신문사를 그만 둘 것을 설득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총독부가 종업
원의 1년치 급여를 모두 지불할 것이며 윤전기를 비롯한 모든 설비를 구입할 것이라 하였
다.그들은 즉시 미쓰바시의 제안을 거부했다.....
총독부가 자발적 폐쇄를 권유하다 불법회계의 죄목을 날조하여....송진우는 귀국하는 길
에 부산에서 구속되었고, 백관수와 김승문도 구속...임정엽은 심한 고문을 당해 거의 죽
기 직전...
일본은 폐쇄신고서를 받아내기 위해 병과 고문으로 의식불명된 임정엽을 발행인 및 주간
으로 승격... 당시 동아일보는 거의 모든 중역들이 투옥.. 동아일보가 영구폐쇄된 뒤 풀려
날 수가 있게 되었다.
1940년 내선일체운동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시행...
공표된지 넉달만에 87%가 창씨.. 김성수와 그의 동료들인 송진우, 현상윤, 장덕수, 백관
수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연희전문의 경우 5명을 제외한 전 교수진이 창씨개명을
하였음에 비해 보성전문은 5명만이 창씨개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