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르프 교육학은 독일에서 기원한 대안교육적 학문입니다.
제가 교육철학사시간에 준비한 자료입니다.
1015089 음악교육전공 김혁
발도르프교육학
Ⅰ.서론
"교육자는 《어느 정도의 진실함과 선함,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내보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로 주도권이 옮겨가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모범, 표준으로써 본질적으로 아이 앞에서 제시되어져야 한다. 그 가르침은 스스로 한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이론적인 내용이 있을 수 없다.》(Der Erzieher mu 《so wirken, da er gewisserma en das Wahre, Gute und Sch ne dem Kind nicht blo darstellt, sondern es ist. Was er ist, geht auf das Kind ber, nicht was er ihm lehrt. Alle Lehre mu wesenhaft, im Vorbilde vor das Kind hingestellt werden. Das Lehren selbst mu ein Kunstwerk, kein theoretischer Inhalt sein.》)" 이것은 루돌프 슈타이너 교육학의 중심적 사고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그의 생애와 발도르프 교육학의 이론 그리고 그 실제, 교육학적 위치를 생각해본다.
Ⅱ.본론
1.슈타이너의 생애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는 1861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에 위치한 크랄예벡에서 철도 공무원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에게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출생 후 몇 년 동안은 아버지의 잦은 전직으로 이주하면서 살았던 기차역들의 기계적이고 무미 건조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학교보다 기차역을 훨씬 더 좋아했다. 처음에는 학교에 대해 심각한 어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그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실제적인 처세술을 발전시켰다. 어린 슈타이너는 카톨릭 교회의 문화에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자유로운 정신적 성향을 지닌 그의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견진 성사를 받게 하지 않았다. 또한 직업적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했기에 그의 학교 교육은 주로 자연 과학적인 것에 집중되었다. 슈타이너는 빈의 신도시 지역에 있는 레알슐레(실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 학교 시절에 그가 처음으로 가장 흥미를 느꼈던 과목은 기하학이었다. 한 목사님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 세계상의 개요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 외에도 그는 이미 14세 때부터 철학서적, 특히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 몰두했다. 실업고등학교(1879)를 마치고 대학입학자격시험(Abitur)을 통과하고 비인 공대(Technische Hochschule)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그밖에 그는 대학에서 철학. 문학, 심리학, 의학도 수강했으며 동시에 실험과 자연관찰에 몰두했는데 그 결과 그는 괴테의 자연과학적 연구방법(Forschungsmethode)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는 괴테의 자연과학적 저서들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썼으며 그로 인해 바이마르의 괴테-쉴러-문서보관소(Goethe-schiller Archiv)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가 21살 때, 퀴르쉬너(Joseph K rschner)는 '독일 민족 문학' 대전집 안에 괴테의 자연과학적 저서들을 출판하고 논평할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래서 그는 바이마르(Weimar)의 괴테-쉴러 문서보건소에서 일하면서 바이마르의 Sophien-Ausgabe의 틀내에서 괴테의 자연과학적 저작들을 발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괴테 연구의 결과로서, 그리고 자신의 철학적-방법론적 노력의 결과로서 근대의 사고(Denken)와 정신적 관조(geiste Anschauung)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해 1886년 그는 '특히 쉴러를 고려한 괴테의 세계관 인식론 초고(Grundlinien einer Erkenntnis- theori e der Goetheschen Welt-anschauung mit besonderer R cksicht auf Schi1ler)'를 썼다. 방대한 5권 짜리 괴테 판(Goethe-(Sophien)-Ausgabe)의 편집과 출판 외에도 그는 1891년에는 박사 학위 논문을 확대 한 인식론적 테마의 '진리 와 학문(Wahrheit und Wissenschaft)'을 그리고 1894년에는 철학적 대작 '자유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Freiheit)'을 출판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현대의 사고하는 인간에게 정신의 세계를 은폐하는 신비주의와 영혼주의의 안개를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슈타이너는 정신과학적 연구를 위해서도 통상적인 자연과학의 방법과 같은 날카롭고 정확한 관찰방법을 요구했다. 슈타이너는 개인적으로 니체와 헤겔을 사귀고 많은 저술들을 통해 그들의 작품과 논쟁했다. 그는 교회 편에 서서 아주 적극적으로 두 철학자를 공격했다. 슈타이너는 이 시기에 분명히 두 위대한 철학자의 '무신론'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자연 법칙부정을 당시 지배적이던 교회의 견해를 이용해 비판했다.
1899년에 슈타이너는 다섯 명의 아이가 있는 미망인 안나 오이니케와 결혼했다. 그녀는 슈타이너와 이혼하고 1911년에 죽었다.
괴테-쉴러 문서보건소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슈타이너는 문화 잡지인 '문화지(Magazin f r Literatur)'를 편집하기 위해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897년부터 1900년까지 베를린에서 '문학지'의 편집일을 하면서, 그 잡지에 "시대에 맞지 않는 김나지움의 개혁 (Unzeitgem es zur Gymnasialreform)", "콜레기움 로기쿰(col1egium Logicum)", "대학교와 공적인 생활( Hochschule und ffentlichesLeben)"등을 발표하여, 교육학적인 견해들(Anschauungen)을 또한 제시했다. 이런 이념들을 그는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교육(Die Erziehung des Kindes vom Gesichtspunkte der Geisteswissenschaft)"에서 새로이 정리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슈타이너는 베를린에서 립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에 의해 설립된 노동자 교육학교(Arbeiter-Bildungsschule)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다방면에 걸친 공적인 활동과 더불어 조용히 체계적인 정신 수련을 계속했는데, 정신 수련의 결과를 나중에 그의 저작들 속에 특히 '인간은 어떻게 더 높은 세계(h heren Welten)에 대한 인식을 얻는가?"를 비롯하여 그 외의 많은 강연들에서 다루었다. 그는 동시대인의 유물론적 사고방법에 반대하여 '직관의 방법(Anschauungsart)'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인간 내부에서 생동감있게 활동하는 정신의 표명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1902년 10월 8일 그는 회원으로서 속해 있던 베를린의 학회인 Giordano-Bruno-Bund에서 자신의 장래의 필생의 과업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학문의 기초 위에서 영혼연구(Seelenforschung)의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슈타이너는 神智學者(Theosoph)로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그의 강연 활동도 실제로 1902년 10월 이후 신지학회(theosophische Gese11schaft)의 테두리 안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영적인 연구(spirituelle Forschung)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고유한 연구결과들만 강연했다.
1913년 그는 신지학회와 이별했다, 1902년부터 슈타이너는 그의 정신과학적연구 방법을 시종일관하게 사용하게 될 전문용어로 명명하였다. 이 연구는 인간의 참된 본질(wahren wesen des menschen)을 의식하도록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인지학(Anthroposophie) '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리스어'Anthrops' 즉 인간(Menschen)과 'Sophia' 지혜(Weisheit)를 합성한 말이다. 수많은 저서들과 6000회 이상의 강연으로 그는 인지학을 제시했다.
슈타이너는 경험론적 방법을 통해 획득된 결과들에서 ''인간 영혼의 주관적인 체험의 내부에서 의미(Bedeutung)를 갖는 것''은 모두 배제된다는 확인에서 그 정점에 이르는 당시의 주도적인 경험적 연구방법들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으로 자신의 강연을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의 이유는 사람들이 항상 인식의 경계(Erkenntnisgrenzen)에 대해 말하는 것에 놓여 있다.
협력자와 제자들이 점점 증가했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질문과 요청들에 슈타이너는 의욕적으로 대답해 주었고 이것은 새로운 활동영역에 인지학적 자극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4편의 신비극을 써서 연출했고 소리의 질과 어조의 질이 몸짓을 통해 표현되는 새로운 움직임의 예술(BewegungsKunst), 즉 오이리트미(Eurythmie)를 창조해내었다. 그리고 예술 활동의 다양한 방법을 위한 공간으로서, 그리고 정신과학적인 연구와 인지학 운동을 위한 중심지로서 그는 자신의 건축 설계에 따라 바젤 근교의 도나흐에 두개의 돔이 있는 건물을 세웠는데, 그 건물에 괴테아눔(Goethean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직접 이 건물의 완성을 주도했으며 무엇보다 예술적인 형상화에 몸소 관여했다. 거대하고 대담한 형태의 목조 건물의 대부분은 1차 세계 대전 중 그의 지시를 따라 17개의 다양한 국적의 인지학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조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922/23년 Sylvester에 방화로 인해 파괴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 그가 설계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세워졌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지학 운동내의 사회 영역과 교육 영역에서는 어떤 발의도 있지 않았다. 결국 그가 1907년 독일의 여러 곳에서 행했던 강연인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교육(Die Erziehung des kindes vom Gesichtspunkt der Geisteswissenschaft)"은 하나의 씨앗 처럼 발도르프 교육학(Waldorf-p dagogik)을 배태하고 있었다.
슈타이너는 항상 반복해서 근대의 사회유기체는 세 가지 구조(Dreigliederung)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사회유기체의 세 가지 구조란 한편으로는 교육 제도(Erziehungswesen)를 포함하는 문화생활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가 국가의 절대적 지배권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것이다. 15회의 연속강연(1919-1924)에서 그는 자유로운 학교의 교육학을 다루었다. 일차세계대전 후 슈타이너의 지도 하에서 실시 되었던 '사회적 세가지 구조화운동(Bewegung f r soziale Dreigliederung)'을 통해 뿌려진 씨앗에서 참으로 진지한 뿌리가 내렸다. 그것은 강한 생명력을 입증했는데, 최초의 발도르프 학교였다. 발도르프-아스토리아담배 공장의 사장이었던 몰트(Emi1 Molt)는 사원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학교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교육적인 지도를 떠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1919년 9월 7일 그 학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문을 열었다.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8학급과 약3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 학교는 처음에 대부분의 학부모가 취업하고 있었던 공장의 이름을 따서 '자유 발도르프 학교'라고 명명되었다.
인지학의 인식론과 작업방식에 영향을 받아 수많은 운동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정신과학으로 확장된 의학, 치료 오이리트미, 치유 교육학('영혼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교육학)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카롤리네 폰 하이데브란트에 의해 발도르프 학교 운동으로부터 발도르프 유치원과 유치원 교사 양성 기관이 생겨났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학적 단초가 "종교적 혁신 운동(프리드리히 리텔마이어의 주도하에 있는 베를린의 젊은 신학자들의 모임"으로 하여금 '기독교인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자극했다. 슈타이너의 자연 과학적 작업으로부터는 일종의 리드미컬하고 우주적인 과정을 고려한 자연 순응적 농경 형태인 생물학적유기농법에 관한 저서들이 생겨났고 오늘날에는 특히 '데메터(농업의 여신)' 작물로 알려져 있다. 슈타이너는 독일의 많은 도시들에서 강연을 했는데 매번 표가 매진되곤 했다. 외국, 특히 영국의 교육자 회의에서도 그의 이념들은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관념들이 번거롭고. 많은 동시대인들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대감의 물결은 1922년 1월 31일에 절정에 달했다.
17개국의 사람들이 협력하여 건설한 첫 번째 괴테아눔이 화재로 인해 모두 불탔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포기하지 않았다. 1알3년에 일반 인지학 협회가 창립되었고 정신 과학 대학이 그 작업을 시작했다. 1925년에 도르나흐에서 괴테아눔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슈타이너는 이미 중병 상태였다. 병상에서도 그는 매일 방문자들에게 조언했고 자신의 자서전 "내 삶의 발자취"와 "인지학적 원칙들"을 썼다. 1925년 3월 30일 루돌프 슈타이너는 도르나흐에서 죽었다.
호주부터 브라질까지 전 세계적으로 700여 개가 넘는 발도르프 학교가 있고 독일에서만 162곳이 되며 매년 그 수를 더하여간다. 또한 많은 관련분야의 치료교육시설(Heilp dagogik), 특수교육시설, 양로원, 복지시설, 병원시설, 교육/사범대학들, 자유 자연과학대학, 예술대학, 생명농학(Biodynamik 농학)대학, 연구소, 농장, 청소년 교육시설, 교육사회 센터, 공동체은행, 출판사 등등이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Anthroposophie Rudolf Steiners)의 이름을 빌리고 있으며 슈타이너의 사상이 크게 미치고 있다.
슈타이너는 그의 이론과 교수법을 계속 발전시켰다. 그의 문필가적이고 학문적이며, 수사학적인 350권의 책들은 도르나흐의 Rudolf-Steiner-Verlag에서 출판되었다.
2.슈타이너의 발달이론(Die Entwicklungstheorie Steiners)
인지학적 인간정의의 "나"는 영원한 엔텔레케이아(Entelechie)이다. 이러한 인간의 "나"는 가변성을 지닌, 모든 인간적 발전 과정을 규정한다. 이 규정은 특히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서의 교환관계를 표명한다. 그 "나"는 첫 번째 7년기 물리적 신체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유아는 빨아들이는 존재이자 모방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임신 10개월 동안 물리적 신체가 어머니라는 보호막 속에서 보호되는 것처럼 이 단계에서는 에테르체( therleib, 영기체)가 아직 보호막에 싸여 보호된다. 이갈이 후에 에터르체가 자유롭게 되는 두 번째 7년기에서는 아이가 교육자의 권위를 체험하고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집중적인 "교육적 관계(P dagogischen Bezug)"는 꼭 필요한 시기이다. 아이는 자신의 생명체 내에 습관과 리듬을 받아들이는데 이것들이 나중에 아이에게 힘과 독립성을 가능하게 한다. 아스트랄체(Astralleib, 영체, 인체내의 정령)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능하도록 변하여진다. 세 번째 7년기는 사춘기로 규정된다. 사춘기에 소녀들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첫 월경이 나타나고 소년들의 경우에는 성대 변화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아스트랄체가 '탄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을 날 듯이 기쁘거나 죽을 듯이 슬픈 것에서 성 불능에 대한 상상과 자신 및 세상에 대한 만족사이에서 이리저리 시달리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제는 아이가 자신의 모범들(주위사람들이나 역사 속의 인물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자신의 판단과 자의식적인 행동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네 번째 7년기로 진입되었을때 비로소 '자아'가 탄생한다. 젊은이는 신체와 영혼이 성숙했고, 상상력과 판단을 발전시켰으며 ,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숙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제 비로소 발달과업에 따라 획득된 완전한 성숙에 이른다. 그리고 교육이 성공하면 그것은 단순히 외적 직업적 성공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고난 인생 계획과의 하나 됨에서 그리고 인간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아주 편안히 느끼는 것에서 증명된다.
그 다음의 성인으로서의 삶도 슈타이너는 7년 주기 안에 편입시킨다. 자아의 인도 하에서 정신적 본질체(정신 자체, 삶의 정신, 정신 인간)는 다음 단계에서도 계속해서 인간의 완성을 위해 일하는데, 7년 주기들은 삶의 중반 이후에 자신을 반영한다. 즉, 처음의 7년 주기들에서 유래하는 능력과 손상이 건설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이 7년 주기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 커다란 무게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추상적 학습을 일찍 시작하면 나중에는 조기에 경화되는 현상을 가져온다.
3.발도르프 교육학의 실제(Die Praxis der Waldorfp dagogik)
각각의 발도르프학교는 그들만의 프로필을 가지고 있으며, 공통적인 요소들과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학부모, 교사, 학생의 공동 작업으로 조직된다. 1794년 제정된 프로이센 법 1조 12항처럼 학교는 국가의 모임이 아니라 자유롭게 배우는 사람들의 통합된 모임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교사진의 자치를 통해 스스로 관리된다. 교장 선생님도 없고 교사사이에서 주도적인 교사와 보조 교사가 구분되지 않는다. 서열 없이 모두에게 같은 급여 규정이 적용된다. 그와 더불어 교사는 "교육의 예술가(Erziehungsk nstler)"로서 어린 사람을 돕고 현실에서 그들의 잠재력을 확인한다.
▷발도르프 학교는 인간학적으로 짜여진 교육을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막 싹트는 젊은 사람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수업 내용, 시간표 등을 맞춘다. 어린이가 수업 교재를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재를 통해서 그들이 발전하도록, 자신만의 경험을 분명히 하고 인지가 발전되도록 한다.
▷발도르프 학교는1, 2학년부터 외국어 수업을 시작한다. 이 나이의 어린이는 아주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배우며 억양과 발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강화된 예술 수업뿐 아니라 수예나 상급학년에서는 기술을 통해 보충되는 수공업 수업에 정통해 있다. 그래서 어린이가 실제로 작업하는 수업이 마련된다.
▷발도르프 학교는 내용 면에서 강조된 에포크 수업을 통해 수업을 경제적으로 하는데, 어린이들은 주제를 더 깊이 있게 다루거나 그에 집중할 수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엘리트를 모른다. 그것은 낙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성적표도 없고 성적표와 관련된 심리적 압박감도 모른다.
▷발도르프 학교는 실적주의에 따르지 않고 그 안에서 다양한 사회 계층과 능력이 합쳐진 학생 그룹이 공동으로 이끌어 가는 통합 학교이다. 상급 학년에서는 학년 연계가 와해되지 않으면서, 학생의 사회적인 정체성이 소멸되지 않으면서 내적인 세분화가 일어난다.
▷주마다 열리는 교육 심리학에 대한 회의에서는 교사의 재교육이 제도화되어 있다. 여기서의 연구는 학교에서의 실습과 관련된다.
▷학교 의사는 교사진에 속해 있다. 그들은 회의에 참가하며, 수업을 참관하고 어린이들을 돌본다. 그래서 순전히 위생학적인 방법으로 수업의 건강 의학적 면을 고려하여, 상급학년에서는 학교의사가 수업하기도 한다.
4.교육학적 의미
전반적인 교육학학문에 있어서 발도르프 교육학의 실제적인 의미는 독일의 대안학교운동(Alternativschulbewegung)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무관심, 경멸, 상호간의 흥분이 우세했던 공교육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써 "대안적 발도르프 교육학(Alternative Waldorfp dagogik)"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Winkel은 그 오류와 사실에 대하여 부각시키고 있는데, 초월적인 관점을 가지고 정신적 본질체(정신 자체, 삶의 정신, 정신 인간)를 부각시키고 신화적인 에테르체( therleib, 영기체), 아스트랄체(Astralleib, 영체, 인체내의 정령)에 체계를 세우고 근본으로 삼는 등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개방적이며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관계성(Verh ltnisse)의 간주관적인, 실감할 수 있는 개선점은 교육학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Ⅲ.결론
교육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지니도록 개별적 인간을 이끌어주고, 그가 가진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활성화하며, 자신을 스스로의 사람됨에서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조처와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할 때 "사람됨"을 일깨워 준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놀(Hermann Nohl,1879-1960)은 교육적 인간관계의 현상을 처음 체계적으로 논의한 사람으로 "교육적 관계(p dagogischer Bezug)"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교육의 기반은 교육의지를 가진 교육자와 학생의 교육관계(공동체)이다." 그리고: "교육적 작용은 유효한 가치 체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근원적인 자아, 즉 하나의 고착된 의지를 가진 실질적 사람에서이다."…"교육의 기반은 바로 되어질 사람으로의 성숙한 사람의 열정적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이 그가 그의 삶과 자신의 형상으로 오는 자아의지이다."("Die Grundlage der Erziehung ist die Bildungsgemeinschaft zwischen dem Erzieher und Z gling mit seinem Bildungswillen" und: "Die p dagogische Wirkung geht nicht aus von einem System von geltenden Werten, sondern immer nur von einem urspr nglichen Selbst, einem wirklichen Menschen mit einem festen Willen"…"Die Grundlage der Erzeihung ist also das leidenschaftliche Verh ltnis eines reifen Menschen zu einem werdendenMenschen, und zwar um seiner Form komme"). 교육 공동체(Bildungsgemeinschaft)는 놀에 의해서 항상 강조되어 지고 있으며, 그러한 공동체(Gemeinschaft)는 시간과 공간적인 연속 속에서 증명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학교는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곳이며 자신을 정립하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 각자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바꿀 수 없는 개성을 사회, 문화 속에서 소생시키며, 끄집어내져야 한다. 발도르프 교육학은 그러한 놀의 주장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러한 여러가지 장점들에 불구하고 교육학의 주류가 되지 못함은 '교육학적 의미'에서 언급됐듯이 구체적인 증거가 될 수 없고 경험적이지 않는 이론들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 한국의 교육학이 지닌 문제점들을 발도르프 교육학으로 모두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경험주의 위주의 대화가 없는 학교, 개인이 존중되어지지 못하는 학교, 대학 입시를 향한 콘베이어밸트 위의 학생들을 만드는 우리의 학교를 발도르프 교육학을 통해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