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오빠!” 얼떨떨한 남자를 뒤로하고 규휘의 손목을 잡고 대환이 끌고 내려왔다. 그의 손에 잡혀 내려오면서 그녀가 투덜댔지만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말을 섞고 희희낙락거리는 그 모습이 싫었다고 이유를 말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졌다. 대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기회다 싶은지 그녀가 대들 기세로 그를 쏘아보았다. “씨. 누가 오빠 보러 돈 내라고 했어요?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왜 나서서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그래요?” “누가 너더러 옷 사달라고 했어? 쓸데없이 나서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하…깜빡했네. 오빠 변덕스러운 거.” | |
카사노바가 사랑 한 여자[17] 새벽1시가 넘었지만, 이곳 시장은 활발했다. 가지각색의 옷들과 다양한 컬러들의 집합장소인 만큼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패션 또한 주목할 만 했다. 지나가는 잘 빠진 여자들, 소위 모델의 키와 예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에게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따라갔다. “침 떨어지겠다. 저런 건 내가 감상 하는 거라고.” 놀리는 그의 말투에도 그녀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들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내일모레면 벌써 5월 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의 옷차림은 상큼하고 가벼웠다. 벌써부터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여자도 있었고, 짧은 미니스커트나 반바지는 기본 이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나를 드러내는 인형 같은 여자들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늘 그녀는 청바지에 티를 즐겨 입었기에 지금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다가왔다. 움츠려드는 그녀를 느낀 것인지, 대환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꽉 움켜잡았다. “어느 여자가 가장 예쁘니?” 대환이 그녀의 귀 가까이 대고 물어왔다.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쳐다보자 대환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어느 누가 특출 나게 예쁘다고 말 못하겠지? 다들 네 눈엔 예뻐 보이니까. 그렇지?” “웅. 오빠 말대로 정말 그러네. 다들 너무 예쁘고 잘 빠졌어.” “그럼, 저 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너를 예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환을 바라보자 그는 그저 멀겋게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모습이 짓궂은 아이 같으면서도 순간 멋있는 한 남자로 다가왔다. 심장이 경미하게 뛰었다. 또 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을 부여잡다가, 그녀는 참 아이러니한 사실을 한 가지 깨달았다. 이곳 동대문을 오가는 모든 여자들은 다 모델만큼이나 예뻐서 그녀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수많은 남자가 지나쳐 갔음에도 불구하고, 멋있다. 잘 생겼다. 몸 좋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한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모든 남자들은 다 대환에 비해 하찮게 보였다. 대환은 왕이고, 그들은 일개 신하였고, 또 많은 남자들 틈에 섞였어도 그는 군계일학 이었다. 그의 외관이나 품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어이없는 환시에 규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미의 기준은 다 다르지. 네 눈에 아름다운 저 여자, 내 눈엔 성형미인으로 보이고, 네 눈에 몸매 좋은 저 여잔, 내 눈엔 볼품없는 말라깽이로 밖에 안 보인다. 그러고 보니 네가 아직 정말 예쁜 사람을 못 봤어.” 대환의 말에 그녀의 눈이 그 예쁜 여자가 누군지 궁금증으로 반짝 빛이 났지만, 입 밖으로 누구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 예쁜 여자라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여자라고 단정 지었다. 우선 눈에 보여 지는 외관부터 다른 여자들과 틀릴 거라는 생각, 또 연예인 못지않은 완벽하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풍만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다시 한번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서글퍼져 지나가는 뛰어난 패션 감각의 여자들의 감상을 그만 접었다. “오빠 눈에 예쁜 여자도 있어? 워낙 까탈스러워서 어느 여자든 만족 못 할줄 알았는데…” “나도 남자야. 각선미 좋은 여자들 보면 눈 돌아가는 거 당연한 거야.” 그는 말을 내 뱉고 나서도 ‘이게 아닌데’ 하고 속으로 자신의 혀를 원망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규휘 만큼 예쁜 여자는 없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단순히 그녀의 기분을 업 시켜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신감을 키워주긴 위한 빈 말도 아니었다. 그건 대환의 진심 이었다.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솔직한 그의 마음 이었다. 그의 눈에 정말 예쁜 여자는 규휘였다. 물론, 그녀 말대로 모델 뺨치는 얼굴과 몸매의 여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예쁜 여자들 틈에서도 유독 규휘많이 빛이 나고, 그의 시야를 점령했다. 그는 찬찬히 그녀를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 눈두덩이에 지방이 있긴 했지만 부어 오른 그 눈조차 그에게는 귀엽게 보였다. 몽똑한 코, 둥글면서 예리 한 것 이 역시 귀여웠다. 도톰한 입술, 아래보다 윗입술이 더 두터운 그녀의 입술은 볼 때 마다 키스를 도발 시켰다. 지나가는 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를 껴안고 격한 키스를 퍼붓고 싶은 욕망이 치 솟아 올랐다. 대환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안아버릴 것 같아 그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의 눈앞으로 지나가는 많은 남자들 대부분이 그보다 많이 어리고 젊었다. 그들의 젊은 패기 때문일까? 그녀의 눈이 그들을 쫒을까봐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두 눈이 놀란 토끼마냥 더욱 동그래졌다. “사람 감상 그만하고, 쇼핑해야지.” “오빠.” 그녀가 그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 옷자락 끝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세살 바기 아이처럼 고갯짓과 함께 손끝으로 무언가 가리켰다. 자연스레 대환의 눈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의 눈에 펼쳐진 건 리어카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 이었다. 대환의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불량식품이야. 먼지 잔뜩 묻어난 걸 왜 먹어. 배탈 난다. 더 좋은 음식 사줄게.” 그쪽으로 그를 끌고 가려는 규휘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아무리 비싸도 저거 보다는 맛도 못하단 말이야. 난 저거 먹고 싶어요. 내가 살게요? 응?” 간절한 그녀의 눈빛에 동요돼 대환은 더 이상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그 비좁은 리어카 앞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규휘는 김밥과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하고 멀뚱히 서 있는 그를 자리에 앉혔다. 나무젓가락을 짜개어 대환 앞에 수저와 함께 놓아주고 어서 먹어 보라고 채근 하였다. 젓가락으로 우동 면발을 휘 젓는 그에게 규휘가 대뜸 김밥 하나를 입 안에 넣으려 했다. 놀란 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 으응. 어서 아 해요. 얼마나 맛있는데. 아, 맛있다. 꿀맛이야. 꿀 맛.” 세살 먹은 떼쟁이 아기에서 이제는 사력을 다해 편식하는 세 살짜리 아기를 꼬이려는 엄마 같았다. 그녀가 냠냠 쩝쩝 김밥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 맛있게 그의 귓가를 두드리자 대환의 입이 스스로 열렸다. 규휘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하며 김밥 하나를 그의 입 안에 골인 시켰다. “오빠, 우동 국물도 같이 먹으면 맛 환상이야. 자, 어서!” 이젠 숟가락에 국물도 떠서 먹여줬다.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아기자기한 면도 있구나. 하면서 그녀의 새로운 모습에 흡족한 미소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리고 규휘 말대로 맛은 환상 이었다. 늘 접하는 격식 있는 음식들 보다 훨씬 더 그의 입맛을 돋우었다. 대환은 이제 스스로 김밥과 우동을 건져 먹었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먹는 음식이 참 별미였다. 태어나서 오늘만큼 음식을 맛있게 먹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한 그릇 더 먹자.” “거봐. 맛있잖아. 후훗.”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아줌마, 한 그릇 더요.’ 씩씩하게 외치면서 그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하나로 질끈 동여맨 그녀의 머리 사이로 삐져나온 잔 머리가 봄바람에 흩날려 예쁜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대환의 손이 바람에 흩날리는 잔 머리를 사뿐히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묶은 머리도 예쁘지만, 길게 풀어놓은 머리가 여성적이고 더 예쁘다. 이렇게.” 갑작스레 그가 그녀의 머리끈을 잡아 풀었다. 건강하고 숯 많은 머리가 그녀의 어깨 바로 밑으로 내려왔다. 규휘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져왔다. 대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예쁘다는 그 한마디에 심장도 뛰기 시작하였다. ‘내가 왜 이러지?’ 자신에게 물으면서도 막무가내로 빨개지는 얼굴과 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을 제어할 수 없었다. “흠흠, 덥다. 오빠 그만 가자.” 대환의 얼굴을 외면하고 헛기침과 함께 규휘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몇 대의 차가 그 좁은 길을 ‘쌩’하니 지나치면서 더운 바람을 일으키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멋대로 춤을 추었다. 하늘거리며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에 또 한번 대환의 손이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반쯤 올라가던 손을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잡아 내리고,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쇼핑몰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의 발길이 투톤의 보라색 원피스 앞에서 멈추었다. 위는 연한 보라색으로 시작되었고, 진한 보라색으로 밑은 끝을 맺었다. 또 같은 톤의 머플러까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 번 쳐다보고, 만지작거렸다. 대환의 눈에도 그것은 괜찮았고, 그는 규휘가 입으면 더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 줘요. 얼마예요?” “6만8천원 인데, 현금으로 하시면 6만5천원까지 해 드릴게요. 니트 소재지만 일반 니트와는 차원이 틀려요. 안나 수이 풍이라 반응도 아주 좋아요. 여자 친구 분께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가격을 묻는 대환에게 옷을 파는 여자가 쉬지 않고 떠들어대자, 그는 듣기 싫은지 지갑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그때였다. 돈을 막 지불하려던 그의 팔을 규휘가 가로막았다. “언니, 이거 저쪽 가게에선 5만원에 해 준다던데…보니까 저기랑 똑같은 것 같은데, 오빠 우리 저쪽으로 가서 사요. 똑 같은 거사는 거 이왕이면 싸게 사는 게 좋지요.” 규휘가 막 그의 지갑에 돈을 집어넣으려는데, 그 여자 그녀의 팔목을 잡고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머, 그래도 5만원은 너무한다. 좋다. 5만5천원!” “다음에 올게요. 많이 파세요. 가요. 오빠.” “언니, 알았어. 알았어. 5만원. 아니 천원 더 빼준다. 4만9천원!” 대환의 등을 밀치는데, 그 여자 포기했는지 천원 더 빼준다며 그녀를 잡았다. 규휘는 대환만 보이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이고, 마지못해 팔아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웃음을 참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 여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둘은 한층 더 올라갔다. 그곳은 남성복 코너였다. 대환이 자기는 됐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규휘가 우겨서 끝내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가 골라주는 티랑 청바지 입는 거 어때요?” “내 나이가 몇인데, 청바지야? 됐어. 난 옷 필요 없어.” “피. 매일 이렇게 차려만 입으니까 성격도 딱딱 한거지.”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대환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다. 요즘 계속 그녀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냥 외면해 버리자니 그의 가슴이 허락하질 않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먼저 진열대 앞으로 갔다. 필요 없다던 그가 먼저 나서자 규휘는 자신을 얻어 껑충 뛰어 그의 뒤를 따랐다. 편안한 차림의 티부터 고르던 그녀의 눈에 붉은 계열의 칼라 티가 눈에 띄었다. 무턱대고 그의 상체에 대고 보았다. 얼핏 대 보았지만 대환에게 잘 맞는 색 이었다. 그가 놀라서 싫다고 했지만 규휘는 그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그 티를 골랐다. 그리고 그 티에 걸 맞는 진한 청바지도 골랐다. 물건을 파는 남자와 규휘가 합동으로 고른 그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라고 했다. 대환은 귀찮아하면서도, 투덜거리면서도 그녀가 손에 쥐어주는 바지와 티를 들고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오는데, 그녀가 물건값을 주인과 흥정하고 있었다. “9 만원에서 내가 만원이나 빼 준다는데 만원을 더 빼달라니 누구 장사 말아 먹을 일 있어요?” “에잇, 오빠 잘생겨가지고 너무 융통성 없다. 나도 이런 장사 해봐서 뻔히 아는데, 솔직히 너무 비싸. 만원만 더 빼줘요. 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하하.” “정말 안돼요. 밑진단 말이야. 그냥 기분 좋게 8 만원에 가져가요. 그래 딱 5 천원 더 빼줄게. 됐죠?” “나야말로 정말 안돼요. 우리 멀리서 왔단 말이에요. 이건 비밀인데, 우리 오빠 백수란 말이에요. 저 나이 먹도록 돈 하나 못 버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겠어요? 자기보다 어린 동생한테 옷 얻어 입는 기분 좋기만 하겠어요? 불우이웃 돕는 샘 치고 만원 만 더 깎아줘요.” “이야, 이 언니 진자 강적이네. 졌다 내가.”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다른 남자와 오래 말을 섞고 가끔 웃음까지 흘리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화가 날 정도로 보기 싫었다. 그의 핏줄이 꿈틀거리며 수면위로 튀어 올랐다. “이규휘!” 큼직한 그의 음성에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환을 향했다. 규휘는 자신을 부르는 낯 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펄쩍펄쩍 뛰며 그에게 달려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와, 오빠. 너무 잘 어울려. 멋있다. 역시 내 눈이 정확해. 양복 입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멋있어요. 거울 봤어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멋있다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귀여운 그녀에게 화를 내기란 역부족 이었다. 대환은 그녀가 자신에게 먼저 안겼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그 의미가 컸다. “여자친구 하나는 정말 잘 두셨어요. 이런 분 몇 분만 더 오시면 우리가게 거덜 나는 건 시간 문제일거에요. 다음부터는 애인 두고 혼자만 오세요. 내가 저렇게 억척스런 손님 처음 봐요.” 그 말에 대환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는 들고 있는 양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수표 한 장을 남자에게 던졌다. 가격을 깎아내린 그동안의 수고를 모조리 말살시키는 행위였다. 그녀의 눈이 커지며 뭐 하는 짓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잔돈은 이 애랑 실랑이 해준 대가야. 그만 가자.” “오빠!” 얼떨떨한 남자를 뒤로하고 규휘의 손목을 잡고 대환이 끌고 내려왔다. 그의 손에 잡혀 내려오면서 그녀가 투덜댔지만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말을 섞고 희희낙락거리는 그 모습이 싫었다고 이유를 말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졌다. 대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기회다 싶은지 그녀가 대들 기세로 그를 쏘아보았다. “씨. 누가 오빠 보러 돈 내라고 했어요?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왜 나서서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그래요?” “누가 너더러 옷 사달라고 했어? 쓸데없이 나서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하…깜빡했네. 오빠 변덕스러운 거.” 더 이상 어떤 말도 없이 그녀는 돌아서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가 따라오든 말든,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아채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쭉 내달렸다. 요 며칠 부드럽다 했다. 요 며칠 그녀에게 잘 해주고 명령이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지 않아 좋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착각 이었다. 지금의 그는 다시 예전의 명령만 일삼던 딱딱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떠한 성격이 그의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에 동대문 가자는 그녀의 말을 흔쾌히 들어주던 그때의 모습으로만 일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그와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데, 그녀를 뒤 따라 왔는지 대환의 손이 어깨에 올려졌다. “네가…꼴 보기 싫은 게 아니라, 그 녀석이…그러니까, 그 상황이 싫었다는 거야. 내 말은…” 자신이 마음먹은 말은 안에서 겉돌고, 정작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변명을 하는 지금의 순간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화가 난 것 같던 그녀의 얼굴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 했다. “…그냥, 에잇. 이유는 묻지 마.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녀의 입 모양새가 ‘왜요?’ 라고 오므려 지려고 하자 그가 먼저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대환은 그녀가 더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재빠르게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그 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5시가 다 되가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오전 6시37분에 골프 라운딩이 잡혀 있었다. 바로 옷 갈아입고 외곽의 골프장으로 나가야 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규휘를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도 못자고 동대문에서 쇼핑까지 한 그녀가 피곤해 할 건 자명한 일 이었다. 아니, 그냥 혼자가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를 동반하고 싶었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그의 마음이 확고해졌다. “골프장 갈 거야.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와.”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어젖히는 그녀의 뒤에 대고 대환이 소리쳤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두드려가며 하품을 마치고 그를 돌아봤다. “캐디휘 10만원이야!” “초보주제에 욕심만 많네.” 말은 그렇게 내 뱉으면서도 대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녀가 피곤하다고 가지 않겠다고 할까봐 불안한 마음이 짧은 시간에 엄습했었기 때문이다. 그와 규휘는 다시 대환의 차에 올라 골프장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라 그녀는 잠시 눈을 부쳤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펴올랐다. 그저 그녀와 함께인 것만으로 좋았고, 경기도 지역의 골프장에 도착해서 그는 규휘를 깨워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처음인 그녀에게 라커룸 사용법을 알려주고 골프웨어 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그도 남자라커로 들어갔다. 그의 일행인 세진과 성근은 이미 옷을 갈아입고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아침을 들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과는 코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대환은 로비로 나와 규휘를 찾았다. 저만치 그녀가 편안한 차림으로 다가왔다. 대환은 그녀를 데리고 코스로 나갔다. 티업 시간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그는 간단한 준비체조를 그녀에게 가르치며 자신도 따라 하고 있었다. “어이, 카사노바 양반. 오랜만에 뵙는구려.” 성근이 삐딱한 자세로 그들에게 다가오며 빈정거리자, 카사노바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대환의 이마가 좁혀졌다. 성근일 노려보는 그의 눈이 은연중에 규휘를 의식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규휘 아니야?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니?” 호들갑 떠는 세진의 말에 성근이도 규휘를 보고 놀랐는지 입을 벌리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세진오빠, 성근이 오빠! 잘 들 지내셨죠? 정말 반가워요.” 그들 셋은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그간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셋 모두는 대환을 향해 왜 서로 이 자리에 나오는 걸 알려주지 않았냐고 타박을 했다. 규하의 장례식을 치르고 꼬박 5년 만에 보는 규휘가 세진과 성근은 더 없이 반가웠고, 꼭 규하를 보는 것만 같아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규휘도 골프 배웠어?” “얘는 내 전문도우미야. 오늘 그 첫 수업 받으러 동반 한거고.” 그녀에게 묻는 성근의 질문에 대환이 대신 대답을 했다. “그래, 오늘은 따라 다니면서 실전을 좀 익히고, 내일부터 당장 연습장 등록해. 이 오빠가 가르쳐줄게. 이 골프란 것이 얼마나 매력 있는 운동인지 오늘 18홀 돌고 나면 너도 느끼게 될 거야.” 대답은 대환이 했지만, 세진은 그녀를 향해 당장 골프를 배우라고 말했다. 규휘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웃는데, 복장을 갖춘 보조원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회원님.” “은주씨, 오랜만 입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대환이 은주라고 부른 그 여자는 세진과 성근에게도 인사를 하고, 규휘에게도 인사를 하자 그녀는 ‘아, 네’ 라고 받아치며 어리둥절해 했다. “은주씨, 이 아이한테 전문적인 지식 좀 많이 가르쳐줘요. 어차피 오늘은 갤러리로 따라 나선 거니까.” “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입시켜 드릴게요.” 대환이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고 은주에게 부탁을 하자 은주는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손에 잡혀있던 규휘는 은주와 눈을 맞추고 서로 인사를 했다. 모자로 가려져 잘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은주가 예쁘다고 생각을 하면서 대환이 말한 정말 예쁜 여자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키도 크고 몸도 늘씬했다. 말도 나긋나긋 상냥하면서도 기분 좋게 밝게 말했다. 은주가 채를 세 개 들고 와 대환과 세진 성근에게 각각 하나씩 들려주고는 그에게 준비하라는 한 마디를 했다. 대환은 기다란 골프채를 들고 티샷을 하기위해 간단한 스윙을 했다. “첫 번째, 즉 1번 홀인데, 롱홀 또는 파 Five 홀 이라고도 하지. 저기 깃발이 꽂힌 곳에 이 공을 집어넣는 것이야. 다섯 번 만에 넣어야 점수가 잘 나와.” 스윙을 하는 대환의 뒤에서 세진이 알기 쉽게 설명을 했다. 그때 ‘챙’ 소리와 함께 대환의 드라이브 샷이 허공을 가르며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굿 샷.” “나이 샷.” “와우, 원 온!” 구경하던 세진과 성근이 그리고 은주의 입에서 탄성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공이 한번에 그린위로 뚝 떨어지는 광경에 뒤의 팀들도 탄성을 자아냈다. 못 모르는 그녀의 입도 벌어졌다. 그의 기다란 팔과 다리가 유연하게 돌아간 그의 드라이브 샷은 참 멋있었다. “잘하면 앨버트로스 나오겠는데!” “카사노바가 완전 프로로 전략하는 순간이네 쿡.” 신들린 듯한 그의 장타에 모두들 수군대느라 바빴다. 규휘와 눈이 마주친 대환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윙크를 보내왔다. 가슴이 또 뛰었다. 평소와 다른 땀에 젖은 그의 복장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지색 면바지 위에 하얀 티를 입었고, 짧은 머리 위에 눌러 쓴 하얀 썬 캡도 참 잘 어울렸다. 장타를 날린 대환의 뒤를 이어 세진과 성근이도 드라이브샷을 날렸다. 두 번째 샷과 세 번째 샷을 마친 세진과 성근이의 볼도 그린위로 올라왔다. 가장 거리가 먼 세진부터 퍼터를 하고, 다음은 성근이었다. 성근이의 퍼터가 끝이 나자 대환은 자신의 볼 쪽으로 그녀를 이끌며 볼 마크와 볼을 바꿔 내려놓았다. “퍼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라이(Lie)야. 그린이 높은지 낮은지 그걸 캐치를 잘 해내야 돼. 라이를 잘 봐야 퍼터가 한번에 컵 인 하거든. 2번 홀부터는 네가 라이를 직접 봐봐.” 대환은 말을 하면서도 퍼터로 홀 컵과 볼 사이의 거리를 재며 그가 말한 라이도 함께 보았다. 그가 쳐낸 볼이 오른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홀 컵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앨버트로스!” “홀인원 보다 더 어렵다는 더블이글. 장대환 축하한다. 오늘 거하게 쏴라.” 이미 그들이 예상한 스코어가 나왔지만, 그래도 그들은 놀라운지 연속 감탄사만 내 뱉었다. 은주도 좋아하며 함께 축하를 해 주었고 덩달아 규휘도 기뻤다. 그렇게 순조로운 1홀을 시작으로 경기는 중간 9홀에 들어섰다. 진행이 밀리는지 앞에 두 팀이나 대기를 하고 있어 그들 일행은 기다려야 했다. 세진과 성근은 연습그린에서 퍼팅 연습을 했고, 대환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가치 물었다. 규휘는 은주가 스코어 적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녀의 외모도 뜯어보는데 별안간 뒤에서 남자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젊은 남자 넷으로 구성된 그들은 대환 일행의 바로 뒤 팀 들 이었다. 모두 그녀의 또래이거나 아니면 그녀보다 한 두 살 더 많아 보였다. 그들 중 규휘와 눈이 마주친 한 남자가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신입생?” “네?” 다짜고짜 신입생이냐고 묻는 남자의 말에 그녀가 반문 했다. 하지만 남잔 그녀의 대답에 관심 없는지 규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분 나쁠 정도로 훑어보았다. 그 남자 뒤를 다른 일행 한명이 따라 붙어 그는 은주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규휘의 발걸음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느닷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얼마주고 했어?” “네? 뭘요?” “쿡쿡. 다 알아. 왜 숨겨?”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부담을 느낀 그녀가 뒤로 목을 빼내고 잡힌 손목도 빼내어 뒤로 돌아가려 했다. “언니, 얼마 주고 했냐고?” 이번엔 다른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뭘 얼마 주고 했냐고 묻는지 궁금해진 그녀는 “대체 뭘요?” 큰소리고 물었다. “쌍꺼풀 말이야. 아주 자연스럽게 잘 되었는데? 얼마 주고 했어?”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쌍꺼풀이 없는 눈인데 얼마 주고 했냐고 물으면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한 참 말없이 서 있는 그녀를 그들이 깔깔거리고 비웃는 행동에 기분이 나빠진 규휘는 그들 앞으로 다가가 눈을 밑으로 내리 깔았다. “보시다시피 저 쌍꺼풀 없거든요? 제대로 보고 좀 다니시지요!” 정말 쌍꺼풀이 없는 걸 확인한 그들은 서로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한방 먹인 시원한 기분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생겼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스코어를 적고 있던 은주에게 달라붙은 한 남자가 계속해서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은주는 그들이 돈을 내고 골프를 치는 손님이라 그런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당하고만 있었다. “언니, 누구 닮았다는 얘기 안 들어봤어?” 은주 쪽으로 바빠지는 그녀의 발걸음 뒤로 또 다시 그들이 말을 걸어왔다. 한 명이 말을 걸면 나머지 둘은 웃기 바빴다. “네, 안 들어봤어요.” 단호하고 짧게 대답한 그녀가 발걸음을 한 발짝 떼었다. “닮았는데, 정말 많이 닮았는데.”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웃음 가득한 그 소리에 규휘의 인상이 구겨지며 이번엔 대체 뭐냐는 눈빛으로 그 남잘 쏘아봤다. “언니, 연예인 닮았는데 정말 못 들어봤어?” 팔짱을 한 채로 그렇다는 대답을 고갯짓으로 대신하고는 대체 누굴 말하는지 들어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셋은 또 웃기 시작했다. “언니 저기 닮았어. 마이클잭슨! 쿡쿡. 아악.” “아악.” 그녀를 마이클잭슨 닮았다고 놀려대며 웃던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일행의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뒤를 돌아본 규휘는 골프채로 골프공을 그들에게 휘두르는 대환으로 인해 숨이 멎을 뻔 했다. 성난 황소 마냥 씩씩거리던 그가 강압적인 목소리로 명령을 했다. “여보, 이리와!” 대환의 그 한 마디에 그녀를 놀리던 네 명의 남자 일행 얼굴이 사색이 되고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 con. 떠나고 나서야 사랑이라고 느낀 한 남자가 있습니다. 동대문 새벽시장을 떠돌면서 김밥이며 우동을 맛있게 함께 먹었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쌍꺼풀 얼마 주고 했냐고 짓궂게 물었던 뭇 남성들에게 골프채를 휘둘렀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를 마이클잭슨 닮았다고 놀려대는 뭇 남성들에게 불 같이 화를 내며 그들을 혼내줬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예쁘다고 나를 칭송해 주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나를 '여보' 라고 불러주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많이 그리워하는 그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유난히 그가 보고 싶은 밤 입니다. 나를 보면 늘 미소 짓던 그가 너무도 그리워집니다. 늘 빛이 나던 그의 눈웃음도 몹시 그리워집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눈물만 짓고 맙니다. 이제 서야 내가 '여보'라고 부르고 싶은 그 사람이 멀어져가 안타까울 뿐 입니다. 비록 늦게 깨달은 사랑이지만, 비록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사랑이지만,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많이 사랑하기에 늘 꿈을 꿉니다. 나에게 다시 되 돌아오는 헛된 꿈을 오늘도 꿉니다. 그 허황된 큰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손 내밀지 않는 것이 결코 알량한 내 자존심은 아닙니다. 내 손을 잡아주지 않을까봐 두려워서입니다. 난, 그만한 용기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당신을 기다립니다. 참으로 멍청하게 말입니다……. by-크레이지쑥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