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명 |
담임목사 |
세례교인 |
당해세례교인 |
학습교인 |
당해영입교인 |
합계 |
||
산정현교회 |
Berheisel |
103 |
30 |
85 |
43 |
231 |
137명으로 시작한 산정현교회가 불과 9개월 만에 231명으로 성장한 것이다. 평양에서의 산정현교회의 위치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평양지역이 교회들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평양시내 장로교회 교세(1906)
교회 |
담임목사 |
세례교인 |
학습교인 |
한해세례 |
한해영입 |
교회개척 |
합계 |
장대현 |
Moffett & Lee |
914 |
334 |
137 |
167 |
1 |
1415 |
남문외 |
Swallen |
139 |
189 |
33 |
117 |
445 | |
사창골 |
Blair |
127 |
97 |
44 |
55 |
1 |
279 |
산정현 |
Berheisel |
103 |
85 |
30 |
43 |
231 |
위의 도표를 통한 비교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설립된 후 한 해 동안 상당한 틀을 다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한 해 동안 새로 학습교인으로 영입된 교인이 43명이라는 것은 평양의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 비교할 때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3. 평양대부흥운동의 동반자
1906년 1월 26일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서북지역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적각성운동의 영향으로 한 해 동안 놀라운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직도 임명되어 외형적인 성장과 제도적인 틀을 동시에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나타난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을 맞을 채비를 갖춘 셈이다. 그 결과 1907년 1월부터 장대현교회에서 발흥한 평양대부흥운동의 실질적인 동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산정현교회는 부흥운동의 산물이자 부흥운동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1907년 1월 2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는 시작되었고, 1월 6일(주일저녁)부터 저녁전도집회(부흥사경회)가 시작되었다. 낮에 열리는 사경회에는 평양시내 사람들은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고 저녁에만 참석이 허용되었다. 또한 이 기간 장대현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는 남성들만 참석이 허용되었다. 1906년 평양선교사 사경회, 서울선교사사경회, 목포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경험한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 휴가도 반납하고 정오기도회를 가지며 곧 열리게 될 겨울사경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12월 말부터 열었던 정오기도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07년 3월 7일, 번하이젤은 자신의 일기에서 지난 몇 개월을 회고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12월 마지막 주일 이후 우리는 매일 지역 기도회를 가졌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영구적인 제도(doubtless a permanent institution)였다. 그런 준비 가운데서 열린 사경회였기 때문에 이번 겨울남자사경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성령께서 놀랍게 응답하셨던 것이다. 번하이젤은 3월 자신의 일기에서 지난 2, 3개월을 돌이켜 보며 그 성령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번하이젤과 헬렌]는 행복한 성탄절을 함께 보내고 1월 2일에 시작된 겨울[남자]사경회에 몰입했다. 이어 그 다음 주 동안, [1907년] 6일부터 15일까지 영적인 삶을 더욱 깊게 하고 성령 충만을 위해 저녁집회가 열렸는데, 그곳에 우리가 결코 전에는 읽어보거나 보지 못했던 장면을 목도했다. 성령께서 권능으로 청중들에게 임했고 사람들은 대단한 탄식으로 무섭게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였다. 이들 집회들은 이미 기록으로 남겨져 있어 나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놀라운 축복을 받았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가면서 똑 같은 축복을 가지고 그 나라 전체에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서울로부터의 최근의 보고들은 똑 같은 축복 혹은 심지어 더 큰 축복이 그곳에 임했음을 보여준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는가는 1907년 북장로선교회 보고서에 그대로 나타난다. 1907년 1월에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 사경회 동안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와 그후에 진행된 부흥운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겨울에 시작되어 뜨거운 7월의 날씨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그 부흥운동은 평양선교부의 전 사역에 깊이 침투하였다. 성령의 임재의 첫 공적인 현시는 겨울 남자 사경회 마지막 날[14일과 15일] 동안 저녁전도집회 때 남자들이 죄를 고백하면서 임했다. 이들 남자들, 그들 중 몇은 수년 동안 옛 생활에서 돌아서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해왔었다. 그들은 죄에 대한 슬픔을 어느 정도 경험했었으나 결코 그 죄의 공포를 깊숙이 깨닫지는 못했었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무시무시한 죄의 결과, 죄가 무죄하신 그리스도에 가져다준 고통,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의 사랑을 깨닫고 고투하였고, 그들 중 얼마는 거의 죽기까지 고투하였다. 이 시기에 평양시내 교회들, 상급여자학교, 그리고 초등학교 모두 같은 경험을 했다.”
이와 같은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북장로교선교회 보고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차분하다. 이것은 아마도 부흥운동이 어느 정도 절정을 지나고 난 뒤 9월 경 그 사실을 돌이켜 보며 기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1월 14일 15일 양 이틀간 장대현교회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이 놀랍게 발흥하던 그 이튿날 선교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국 선교부에 이와 같은 강력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처음 경험한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장대현교회는 성령의 임재의 상징이 되었고, 그 교회에서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평양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일 후 평양시내 집회들과 시골 집회들이 열렸다. 방학에서 돌아온 대학과 중학교 학생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나누었다. 평양시내사경회, 여자성경학교, 여자연합정규사경회가 각기 열렸으며, 각 사경회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한국 전역에서 계속적인 교회 사역을 잠시 중단하고 수업을 받기 위해 모였던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도 학기 개강 주간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신학교 종강에 이어 가진 봄 남자성경학교에서도 그 축복이 계속되었고, 이 보고서를 기록하는 동안 연합정규사경회 저녁집회에 참석한 남자들이 충만을 받아 교회와 연결된 초등학교들 내에서도 풍성한 결실이 맺혀 질 것이다. 본 서문에서 깊은 겸손으로 우리는 경건하게 그 역사를 이루신 그분께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그의 이름에 돌린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평안남도 도 사경회 때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그 후 진행된 일련의 사경회와 집회 가운데서도 나타난 것이다. 1월 14일과 15일에 장대현교회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곧 평양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전에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월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특별했다:
“한국의 신년에 열린 전도집회는 과거와 무엇인가 다른 성령에 의해 특징되었다. 죄의 긴박성과 구원의 완전성을 깨닫고는 불을 경험한 남녀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저녁 전도집회에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해 시내 각 가정을 방문하였고, 많은 경우 기도의 탄성이 잃어버린 죄인을 향한 구주의 사랑을 호소하였다. 수백명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각 교회는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확실히 평양의 교회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미 이전부터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을 경험하면서 교회는 평양전역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고종의 폐위와 연계시켜 평양에서의 영적각성운동을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된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의 폐위까지 이어지자 정치적으로 한국인들이 대단히 동요했을 만한데도 평양은 차분하였다. 민족적 사건 앞에서도 백성들이 질서를 지켰던 것이다. 이것을 비정치화 현상으로 단정할지 모르지만(@영국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엘리 할레비, 우드브리지 ) 당시 이것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정치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이들에게 그와 같은 해석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 교회들이 평양 시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에 몰려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고종황제의 폐위와 관련된 사건의 보고로 인해 거의 폭동이 야기될 상황에서도 최근 평양의 전 도시가 평화와 질서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차분하게 진정되었을 때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대부흥운동의 영향과 결과는 부흥운동이 본산지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남문외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세 교회를 배태시킨 “핵”(the nucleus) 장대현교회는 4년 전 남문외 교회를 처음 분립시켰을 때의 교세보다 더 크고 견실한 교회로 성장했다. 장대현교회는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전도집회 후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이제 공간 부족으로 몰려오는 이들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일 정규예배를 남자들을 위한 시간과 여자들을 위한 시간을 달리해서 분리시켜야 했다. 장대현교회는 1907년 한 해 동안 117명이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1076명이 되었고 235명이 학습문답을 받았고, 385명의 새로 등록해 새 신자를 포함 평균 출석이 3000명이 되었다. 두 명의 조사가 각기 한달 15달러의 사례비를 받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책임을 졌다. 교회 건축을 위해 181.83달러를 사창골교회와 산정현교회 건축비로 지원해주었으며, 50달러는 중국의 기근구호비로 보내졌다. 1907년 장대현교회의 한 해 동안의 헌금이 총 2411.08달러에 달하였다.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외형적으로나 내실에 있어 교회가 얼마나 성장을 이룩했는가를 말해준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장대현교회만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1903년에 분립한 남문외 교회도 성장을 이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대현교회에서 세례 및 학습교인 172명으로 처음 시작한 이 교회는 세례교인 200명과 학습교인 150명을 포함 600명으로 성장했다. 연봉 150달러를 받는 조사의 사례는 교인들이 전적으로 담당했다. 급료를 받지 않는 전도부인이 여인 사역을 지원하고 있다. 남문외교회 1년 헌금도 882.50 달러였고, 이와 같은 재정적 자립으로 남문외 교회는 지교회를 설립 1907년 현재 100명의 등록교인을 갖춘 교회가 되었다. 남문외 교회는 일본이 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점령하면서 많은 가정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였다.
1905년 12월 마지막 주일 장대현교회에서 세례교인과 학습교인 154명으로 분립한 사창골교회 역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주일예배 평균 출석 45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중 150명이 세례를 받았고 110명이 학습을 받았다. 사창골 교회 역시 몇몇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전혀 외국의 지원 없이 자체 교회 건물을 완성하였다.
사창골 교회보다 꼭 1달 늦게 1906년 1월 평양시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역사적인 건물에서 예배를 시작한 산정현교회 역시 올해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1907년 1월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산정현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06년에 설립되어 상당한 초석을 다진 산정현교회가 설립 1주년을 앞두고 장대현교회에서 열리는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 사경회에 임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사경회에 낮 동안에 열리는 집회에는 평양시내 지역의 사람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1월 6일 저녁부터 열리는 저녁집회에는 참석이 허용된 데다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그 사경회 강사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교우들이 참석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새로 시작된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모교회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저녁집회에 매일 참석하여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산정현교회는 부흥운동의 산물이면서도 동시에 평양대부흥운동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번하이젤이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쓰임받았고, 한국교회사의 한 분기점에 된 그 놀라운 장대현교회의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현장에 산정현교회 교우들이 상당수 참석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번하이젤은 평양대부흥운동 그 현장의 목격자이자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 실제로 1월 부흥운동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목도한 번하이젤은 2월 첫주 동료 선교사이자 선배 선교사인 스왈른과 더불어 차산(Chasan)지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한 주간 동안 사경회를 인도했고, 그곳에서 유사한 성령의 역사를 목도했던 것이다. 그런 후 번하이젤은 다른 스왈른 및 다른 동료선교사들과 평양시내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규 겨울 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수백 명의 새신자들이 교회에 영입되었다. 번하이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월 첫 주 동안 스왈른 선교사가 나를 동반하고 차산으로 가 그곳에서 한 주간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유사한 장면을 목도하였다. 그 후 우리는 시내 사람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를 개최하였으며, 수백 명의 새신자들이 교회에 영입되었다.
장대현교회에서 겨울 사경회 동안에 임했던 유사한 강력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은혜를 힘입는 차원이 아니라 평양시내 전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스왈른과 함께 한 주간의 정규 겨울사경회를 마친 번하이젤은 그레함 리와 함께 해주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장대현교회에서 임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 차산에서 임했던 똑 같은 성령의 역사가 해주에서 열린 사경회에서도 그대로 임했던 것이다:
2월 26일 나[번하이젤]는 그래함 리 선교사와 함께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 황주로 갔다. 대단한 사경회가 열렸고 성령께서 권능으로 임하셨다.
12말에 시작된 정오기도회는 겨울남자사경회 동안에도 계속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한 선교사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번하이젤의 경우 2월말부터 순회전도에 나섰다. 그가 인도하는 대부분의 집회의 경우, 그 가운데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3월 14일 오후 덕천읍에 도착한 번하이젤은 그날 밤에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대신 문답을 하였다. 이미 개최된 사경회에 약 120명이 참석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은혜가 그 가운데 임했다. 평양에서 있었던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그대로 이곳에서도 임했던 것이다:
3월 15일- 어제 오후 덕천읍에 도착했다. 지난 밤 우리는 집회를 갖지 않고 대신 문답 시간을 가졌다. 약 120명이 여기서 최근에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여 공부하였는데 이때 참석한 이들이 대단한 영적축복을 받았다. 성령이 권능이 평양의 경우처럼 대단한 권능으로 임하셨다. 이곳에는 지금 약 125명이 출석하고 있다. 교회가 너무 작아 그들은 새로운 교회 건물을 곧 계획하고 있다. 17명이 오늘밤 학습문답을 받았고 7명이 세례를 받았다. 책에 대한 요구가 대단한데 이곳은 평양으로부터 거리가 너무 멀어, 공급하기 어렵다. 네 사람이 오늘 저녁 집회 끝에 일어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와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3월 18일 영원골(Yung Wunkol)에서도 계속되었다. 이곳에서도 최근 한 사경회가 열렸는데 “놀라운 축복”(a great blessing)이 임했다. 그들은 지난 1주간 매일 밤 모여 그 마을의 어느 한 사람의 회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던 것이다.
번하이젤이 인도한 사경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지만 이미 그가 가기 전 열린 사경회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강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서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가 얼마나 강했는지, 얼마나 보편적인 성격을 지녔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몇몇 사람의 회심이나 성령충만이 아니라 동시에 집단적으로 같은 성령의 임재, 성령의 강한 능력, 회개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이다. 번하이젤의 일기에 그가 순회하는 동안 그 같은 성령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나타났음을 알리는 기록들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는 사실은 미국에서 사경회 운동과 더불어 널리 저변확대되었던 전천년설이 평양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전형적인 경우가 번하이젤의 경우이다. 그는 한국에 파송받기 전 후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평양대부흥운동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진행되던 1907년 3월 순회전도와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계시록에 관한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천년설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3월 20일-오늘 새 길로 40리가 되는 맹산군의 애창에 왔다. 빠르게 재촉하고 길이 대단히 거칠어 힘든 여행이었다. 나는 새벽 1시가 되서야 도착했고 한 시간 후에 말이 도착했다. 말을 타고 여행하는 동안 책을 읽어 나는 독서를 증진시켰다. 이 때 시스의 묵시록 강의(Seiss's lectures on the Apocalypse)를 다시 읽었다. 그의 묵시록 강의는 대단했다. 집에 있는 동안 아내와 나는 묵시록을 연구해왔다. 나는 내가 이 책들을 진작 읽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전에는 묵시록이 의미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 새롭고 놀라운 책이다. 나는 최근 시스의 묵시록 강의와 부룩스 박사(Dr. Brooks)의 마라나타(Maranatha)를 읽고 전천년설 그리스도 재림론(the Premillenarian view of Christ's Second Advent)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전에는 결코 그 주제를 연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내 자신이 후천년설(the Post Millenial view)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천년설이 성경적이고, 그러므로 정확한 종말론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번하이젤만의 고백이 아니라 대부분의 평양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고백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종말론에 관심이 없었던 선교사들도 현장에 와서는 자신들의 종말론을 전천년설의 입장으로 정리한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종말론이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사경회 운동과 더불어 한국교회 전반으로 저변확대되어 나갔다. 그 후 오랫동안 일제시대 동안에 계시록은 사경회의 중요한 주제 성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종말론은 한국교회 보수신앙을 뿌리 내리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조지 말스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경회, 전천년설, 성경의 무오,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모종의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번하이젤이 거의 1달 동안의 순회전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3월 25일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평양에서는 약 50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여자사경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동안에도 여전히 부흥운동의 역사는 계속되어 성령의 강한 역사가 강력한 회개의 역사와 더불어 나타났다. 평양선교부에 소속된 선교사들에게 4월에 접어들면서 시작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Ross, Sharp, Sidebotham이 4월 1일부터 시작되는 신학교 강의를 위해 3월 31일 주일 저녁에 도착했다. 이날 오후 예배는 평양시내 모든 교회들이 사창골교회 봉헌예배에 함께 참석하여 연합으로 드렸다. 대군중들이 함께 모였다. 비가 내렸는데도 연합봉헌예배는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4월 1일 월요일 전국에서 모인 약 75명의 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업이 시작되었다. 영적인 생명력을 더 깊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1주일 동안 매일 저녁 집회가 열렸다. 강의를 맡았던 번하이젤은 신학교 개강부터 저녁에 열리는 집회에 이르기까지 참석했다. 산정현교회의 사역으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그는 강의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번하이젤은 결혼 후에도 제대로 신혼여행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선교 사역으로 분주하게 보내야 했다. 이것은 평양선교부 선교사들 대부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07년 1월 놀라운 성령의 역사,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이길함 선교사는 그 후 3월까지 전국적으로 다니며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함께 나누었다. 쉴 겨를도 없이, 자신의 체력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강행군으로 3월말에 이르러 그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이길함은 1907년 여름을 미국에서 보내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4월 3일 아침 미국을 향해 평양을 출발했다. “대단한 한 무리의 군중들”이 미국으로 떠나는 이길함을 아쉬워하며 평양역까지 배웅나왔다. 이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으로 때문에 선교사 직을 사임한 건즈(Kearns)와 그의 아내도 미국으로 향했다. 3월 4일 컨즈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그것은 동료 선교사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결국 컨즈는 이 일로 사임해야 했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4월 1일부터 신학수업을 시작했던 평양신학교 학생들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임했던 것이다. 신학생들을 위한 집회는 매주 능력 가운데 계속되었고, 신학생 거의 모두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4월 13일 - 신학생들을 위한 집회가 한 주간 내내 권능가운데 계속되었으며, 거의 그들 모두가 대단한 영혼의 고뇌 가운데 죄를 고백했다.” 이날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조지 래드가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 신학생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를 친히 목도하였다. 4월 14일 주일 오후 조지 래드는 외국인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와서 자료를 수집 친일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썼던 미국 학자였다. 조지 래드는 바로 이듬해인 1908년에 출판된 자신의 작품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을 군중심리에 의한 병리현상이라고 폄하했다.
1907년 4월, 교회가 설립된지 1년 3개월이 되면서 산정현교회 교회 건축 계획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지 래드가 평양 주재 외국인들에게 강연을 하는 바로 그날, 산정현교회에서는 헌금을 해 약 800엔의 헌금이 모아졌다. 이미 지난 가을 700엔의 헌금을 모았기 때문에 1500엔이 소요되는 교회 건축을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금액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였다. 창립예배를 드린 지 불과 1년 3개월이 지난 신생교회였지만 이와 같은 헌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산정현교회가 대부흥운동 기간을 지나면서 상당한 발전과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4일 번하이젤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른 교회들이 지원하는 헌금을 합하면 올 봄에 교회 건축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4월 참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번하이젤은 교회 건축을 늦추기를 원치 않았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놀랍게 저변확대되던 1907년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정성을 모아 헌금한 건축헌금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그동안 예배공간으로 사용하던 East Gate 교회가 산정현교회 분립 당시 할당된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코너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의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서도 새로운 위치에서의 교회 설립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우려는 1906년 북장로교선교회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예배는 옛 장대현교회에서 가졌으나 이 교회가 할당된 구역의 극단적인 코너에 위치하고 있어 구역 중앙 가까이에 이미 부분적으로 확보한 한 멋진 장소에 가능한 속히 건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고,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확보한 상태였다. 교인이 300여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교회 건축이 필요했고, 또한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200달러 기부로 평양시 용흥면 삼계동 서쪽 산정현(山亭峴) 위에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자립을 원칙으로 세웠던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헌신과 헌금이 교회 건축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교회 건축은 번하이젤이 예상했던 것보다 약간 늦은 6월에 시작되어 9월 600석 규모의 교회를 준공했다. 56평 건축에 1000여원의 예산을 세우고 진행된 교회 건축은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김문준(金文俊), 김용흥(金龍興) 두 사람이 간역하였다. 그 뜨거운 여름 3개월 동안 교회 건축이 진행되어 완공을 본 것은 교우들의 헌신적인 협력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산정현교회의 설립은 시의적절했고, 담임목사 번하이젤 역시 능력 있는 선교사이자 목회자였으며, 그곳에 참석한 교인들도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받아 산정현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탄탄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닭골 산정현에 교회가 완공함에 따라 처음에 평양성 제 4교회라고 불렀던 교회 명칭도 산정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906년 1월 26일 편하설(C. F. Bernheisel; 片夏薛) 선교사를 담임목사로 하여 분립한 산정현교회는 1907년에 이르러 영수 계택선(桂澤善), 집사 최정서(崔鼎瑞), 김용흥(金龍興), 정이도(鄭利道), 최효식(崔孝植), 김동원(金東元), 변흥삼(邊興三), 박정익(朴禎翊) 등을 피택하여 틀을 다졌다. 산정현교회는 1907년 여름 번하이젤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잠시 귀국한 뒤에도 교회는 여전히 성장하고 틀을 더해나갔다. “교우들은 새 힘을 얻었고 교회는 날로 흥왕하였다.”
1907년 평양시내 교회 세례 및 학습교인
교회 |
담임 |
세례교인 |
학습교인 |
세례&학습 |
한해세례 |
한해학습 |
조사 |
장대현 |
Moffett & Lee |
1076 |
385 |
1461 |
117 |
235 |
2 |
남문외 |
Swallen |
200 |
150 |
350 |
46 |
80 |
1 |
사창골 |
Blair |
150 |
110 |
260 |
50 |
97 |
1 |
산정현 |
Bernheisel |
150 |
89 |
239 |
56 |
59 |
1 |
Annual Report, PCUSA, 1907
1906년에 설립되어 채 2년도 되지 않아 산정현교회는 제도적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설립되면서 일기 시작한 영적인 움직임이 교회에 생명력을 더해주었고, 교회는 외형적인 성장만 아니라 600석이나 되는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인수의 증가, 교회 직원의 선출, 예배 공간 확보, 재정의 자립이라는 측면에서 산정현교회는 설립당시부터 평양의 여느 교회 못지않게 든든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물론 평양의 모든 교회들이 이처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이라는 지역적 특성, 부흥운동의 시기, 헌신적인 교인들, 그리고 부흥운동과 복음의 열정을 지닌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에 처음 교회를 시작한 마펫, 스왈른, 블레어, 번하이젤 모두 맥코믹신학교 출신으로 복음의 열정이 남달랐다. 처음부터 평양 전역의 복음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개교회 성장이 목표가 아니라 평양의 복음화가 제일 우선되는 과제였다. 때문에 지역에 따라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분립하여 처음부터 자립의 틀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교회의 대지와 건축은 분립한 교회와 교인들이 감당하도록 처음부터 원칙을 세워나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7년 한 해 동안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산정현교회는 1908년에 접어들면서 당회 조직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1908년 1월 19일 영수 계택선, 조사 한승곤 두 사람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한승곤은 장로지만 조사를 겸직하였다. 1907년 여름 안식년을 떠난 번하이젤 선교사가 1908년 가을 안식년을 마치고 선교지 평양 산정현교회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 영문보고서에 East Gate 교회(옛 장대현교회)로 기록되던 산정현교회는 1908년부터 Fourth Church로 보고 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면서 명칭상의 혼동을 줄이고 역사의 순서를 명확히 하기 위한 의도에서라고 보아진다. 번하이젤은 돌아와 주일성경학교를 책임지고 화요성경반을 책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평양산정현교회사기가 1908년을 언급하면서 “1908년 교회는 점점 성장하면서”라고 시작한 것을 보아도 1907년의 성장이 1908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2명의 장로교 선출되고 영수가 새로 임명되어 교회 직원도 늘어났다. 그래서 담임목사 편하설, 장로 계택선, 한승곤, 영수 변흥삼(邊興三), 집사 김동원(金東元), 김상은(김상은), 집사 최정서(崔鼎瑞), 김용흥(金龍興), 박정익(朴禎翊), 양성춘(揚性春), 김찬두(金燦斗), 김봉순(金鳳淳), 장석주(張錫周) 등이 산정현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훙미로운 사실은 어찌된 일인지 1907년 집사로 봉직했던 정이도(鄭利道)와 최효식(崔孝植)이 교회 직원에서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집사로 임명했어도 엄격한 기준을 정해 그 기준에 미흡하면 직원에서 탈락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에 접어들어서도 평양의 교회들은 놀라운 성장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는 발을 들일 틈조차 없을 정도로 교인들이 몰려들어 서문외 교회(the West Gate)를 분립시켜야 했다. 이길함과 마포삼열이 맡고 있는 서문외교회는 1909년 9월 현재 600명 이상이 참석하고 있다. 600명이 분립하여 나갔는데도 장대현교회는 아직도 1200명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1907년부터 길선주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장대현교회는 더욱 활기차고 역동적인 교회로 바뀌어졌다. 제도적으로는 더욱 건실해졌고 영적으로는 더욱 깊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산정현교회의 1908년의 교회 성장은 1909년에도 이어졌다. 그것은 산정현교회사기가 1909년을 언급하면서 “1909년 교회가 발전됨에 따라서 남녀 권찰을 두고 각 구역을 分任看護하고 매 달 초에 모여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권찰회의 시작이었다”라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09년 교회 직원들은 여전했지만 그동안 산정현교회를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영수 김상은(金相殷)이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산정현교회는 사창골교회와 더불어 평균 주일예배 추석이 300명에서 350명이 되었다. 1909년 평양시내 교회들의 교세는 아래와 같다:
1909년 평양시내교회 세례 및 학습 교인
교회 |
세례교인 |
학습교인 |
세례&학습 |
한해세례 |
한해학습 |
1년헌금 |
설립연도 |
장대현 |
615 |
150 |
765 |
75 |
87 |
$1719.15 |
1893 |
남문외 |
237 |
207 |
444 |
12 |
74 |
$ 275.44 |
1903 |
사창골 |
244 |
94 |
338 |
34 |
52 |
$ 410.30 |
1905 |
산정현 |
185 |
104 |
289 |
29 |
43 |
$ 368.38 |
1906 |
서문외 |
547 |
82 |
629 |
12 |
$ 62.55 |
1909 |
Annual Report, PCUSA, 1909
장대현교회 교세가 세례교인과 학습교인 합 765명으로 줄어든 것은 서문외교회가 분립해 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평양에 최초로 세워진 장대현교회가 1909년까지 평양성에 네 교회를 설립를 분립시켰다는 사실, 하나의 대형교회로서가 아닌 평양 전역의 복음의 확장을 위해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분립하여 교회가 스르로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교회 개척이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 분립의 형식을 취함으로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수년이 걸리는 일반 개척과 달리 처음부터 역동적인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평양의 복음화는 이와 같은 장대현교회의 결단과 용단 그리고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흥운동을 통해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지만 이와 같은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면 부흥운동의 결실은 반감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1909년 서문외 교회가 분립 된 후에도 장대현교회는 여전히 가장 큰 교세를 유지하며, 평양성 복음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본산지인데 오랜 역사를 통해 안정을 구축해 왔고, 또한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의 리더쉽으로 꾸준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누어 주는 교회가 결코 교세 침체를 맞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세포조직을 생겨나는 식물처럼 강한 번식력을 가지고 건강하고 생명력 있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게다가 타이밍도 잘 맞았다.
평양시내교회의 세례 및 학습교인 성장비교(1906-1909)
교회이름 |
설립 |
1906 |
1907 |
1909 |
비고 | ||||||
세례 |
학습 |
합계 |
세례 |
학습 |
합계 |
세례 |
학습 |
합계 |
|||
장대현교회 |
1893 |
914 |
334 |
1248 |
1076 |
385 |
1461 |
615 |
150 |
765 |
서문외교회 분립 |
남문외교회 |
1903 |
139 |
189 |
328 |
200 |
150 |
350 |
237 |
207 |
444 |
|
사창골교회 |
1905 |
127 |
97 |
224 |
150 |
110 |
260 |
244 |
94 |
338 |
|
산정현교회 |
1906 |
103 |
85 |
188 |
150 |
89 |
239 |
185 |
104 |
289 |
|
서문외교회 |
1909 |
547 |
82 |
629 |
장대현교회로부터 |
Annual Report, PCUSA, 1906-1909
1909년에 이르러 100만인 구령운동이 전국적으로 발흥하면서 평양성의 복음화는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별히 100만인 구령운동은 산정현교회에도 대단한 자극과 도전을 주어 교회 성장의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평양산정현교회 사기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一九一0年 이 해에 八月 二八日에 領袖 金東元 씨를 長老로 將立하고 가을에 百萬名 復興會가 全域에 파급됨에 따라서 교우가 더욱 증가되었다. 이해에 직원은 선교사 片夏薛, 長老 桂澤宣, 金東元, 韓承坤(兼助事), 領袖 邊興三, 朴楨翊, 金燦斗, 執事 崔鼎瑞, 金龍興, 楊性春, 金鳳淳, 張錫周 등 諸氏이었다.
1909년에 시작된 100만인 구령운동은 서울과 평양은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중요한 한국교회부흥운동이었다. 일제의 한일합병의 치욕 속에서도 한국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역적 동인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百萬名 復興會가 全域에 파급됨에 따라서 교우가 더욱 증가되었다”는 간단한 기록을 통해서 백만명 구령운동이 한반도 전역에 저변확대 됨에 따라 평양의 교회들이 그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산정현교회는 부흥운동의 산물이면서도 동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이어 다시 100인 구령운동에 있어서도 한국교회 부흥운동 발흥의 동반자로서의 자리를 굳게 한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산정현교회의 설립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한다. 첫째, 산정현교회는 기포드가 말한 바 서북지역, 특히 평양의 놀라운 전진운동과 깊은 연계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일전쟁 후 서북지역에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기 시작했고, 평양에서는 장대현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장대현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평양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분립되어 설립되었다. 산정현교회는 평양시내 교회들처럼 장대현교회에서 분립되어 나왔다.
둘째,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는 장대현교회, 남문외교회, 사창골교회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되었고, 자료를 종합 할 때 설립일은 1906년 1월 26일(금요일)이었다. 처음 장대현교회의 옛 교회 건물(East Gate교회)를 사용하여 예배를 시작했기 때문에 산정현교회는 영어로 East Gate Church로 표기되다 1908년부터 Fourth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평양성제4교회로 알려지던 것이 1907년 교회가 건축되면서 산정현교회로 정착되었다.
셋째, 장대현교회에서 분립된 남문외교회와 사창골 교회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교우들과 함께 분립되어 설립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말하는 교회 개척과는 차이가 많다. 오늘날 대형교회들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는 이때 장대현교회의 계속적인 교회 분립은 상당히 의미 있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넷째, 산정현교회가 설립 초부터 놀랍게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담임목사 번하이젤의 복음의 열정, 당시 일고 있던 영적대각성운동, 그리고 한국인들의 헌신 이 세 가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산정현교회 설립은 영적대각성운동, 평양대부흥운동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평양에 부흥운동이 무르익기 시작한 1906년에 설립되어 1907년 평양대흥운동의 그 역사적 현장을 목도하고 그리고 그 부흥운동의 결실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산정현교회의 설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부흥운동의 그 역사적 현장 1907년 1월 14일과 15일 저녁의 놀라운 저녁전도집회 때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면에서 산정현교회는 부흥운동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평양의 부흥운동의 동반자였다. 번하이젤은 물론 산정현교회 교인 모두는 부흥운동의 역사와 은혜와 결과를 처음부터 공유하는 특권을 가졌던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만 아니라 1909년에 발흥한 100만인 구령운동의 은혜도 공유하는 특권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100만명 부흥회가 전성에 파급됨에 따라서 교우가 더욱 증가하였다”에서 정확히 읽을 수 있다. 그 결과 1906년 설립된 이래 1910년까지 꾸준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