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 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1. 나는 1896.1 조원시 선교사?를 초청, 개척예배를 드림으로 창립된 仁川市 桂陽區 仙住地里 112번지에 위치한 선주지교회를 누대로(4,5대) 지켜온 가문에서 1952년 12월 8일 전주 이씨 완풍대군(이원계, 태조 이성계의 큰 형) 제 20대 후손으로 태어났다. 나의 가문은 하나님이 만세전에 택한 가정으로 주님의 손길이 언제나 같이 한 가정이었다. 나의 조부, 조모는 믿음이 돈독하고 성령충만하여 헌신의 본이 되었고, 은사가 깊어 환자치료와 몸소 유사, 탁사, 속장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 교회의 기둥이었고 진실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조부(이종록권사, 자 은용)는 교회 일을 내 집 일보다 제 1 순위에 두어 물심양면으로 도운 인자한 어른이었으며 3.1 만세운동 시 선주지교회 평신도를 대표하는 청장년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였으며,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며 총괄한 이유로 일본의 체포를 피해 김포로 3년간 피해 살아감으로 환난을 면하기도 하였다.
한 때 장로의 직임 수용을 교회에서 요청했으나, "주 예수께 순종하고 충성만하면 됐지 무거운 직책이 왜 중요하냐?"며 사양했다고 한다. 조모는 주 예수께서 구름타고 속히 오신다고 굳게 믿어 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며 어려운 가정을 찾아가 위로하며 양식을 보태는 일을 주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환상과 영적은사가 많아 성경지식도 깊었다. 생업에 몰두함이 잘못은 아니나 돈을 벌려고 분주하게 나서는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할 것을 늘 종용하셨다. 그리하여 나의 출생 전 특히 조모(김은녀 속장)는 태중에 뛰노는 남아는 하나님이 쓰시고자 선정해 두었으니 태어나도 하나님이 길러주실 것이다. 그러니 염려 말고 농업과 교회 일에 전념할 것을 강조, 병들고 귀신에 눌려있는 가정들을 20-30리가 떨어진 작전동까지 심방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치료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 14:8 참조)
2. 나의 부모(부: 이의석 장로, 모: 전양금 권사) 역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엄청나게 받은 분들이다. 아버지의 신앙좌우명은 "예수님을 잘 믿으라"(마 10:32-33 참조)이다. 항상 "의에 죽고 의에 살라"는 경구를 외쳤으며 인내심이 대단히 강한 부모는 기도와 성경말씀을 통독, 능력 있는 신앙생활과 더불어 생업투신에 박차를 가한 분 들이다. 부친은 새벽 2시에 일어나 신,구약 성경을 소리 내어 한 시간 이상 읽었고 눈물로 간구하는 진심이 언제나 넘쳐흘렀다. 교회재정 부담은 언제나 제1의 자리를 지켰으며, 교회 살림에 부족한 일이 생기면 재정을 언제나 채워 나갔다. 이웃의 어려움에 적극적인 구제의 손길을 수없이 폈으며 불의에 항거하는 의 곧음은 사자와 같았다.
모친은 순진한 성품에 신앙승부가 강하여 19세에 옹진군 북도면 신도리에서 선주지동으로 출가 온 이후 50년 가까이 선주지교회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종을 치는 일과로 시작, 밤늦게까지 억센 농사일 극복해갔고 여름 바쁜 농사철엔 밤늦게 속회담당을 책임 있게 수행한 일이 생생하다. 담임자의 심방 동참을 기쁨으로 여겼고, 외부 손님 대접 전부를 도맡다 하였다. 어머니는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예수와 가장 가까이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한 성심이 하늘에 닿은 분이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상이 크다고 본다. 인생 석양에는 주 예수의 남은 질고를 조금이라도 함께하는 모습 속에 감사의 나날을 이었고 78세에 평안의 안식에 동참하였다. 언제나 아껴두었다가 사용하는 어머니의 인사말은 "평안과 건강을 바라고 묻는 진실한 안부" 이니 바로 축도의 요약을 깊이 알고 계신 분임에 틀림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고후 13:13 참조) 아버지는 92년 생애의 파란곡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가운데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즉각 의지, 의뢰했고 주님의 긍휼이 곧 회개하는 표현을 빠르게 하였기에 자비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로 인하여 부활생명(요 11:25-26 참조)에 같이 하는 마지막 싸움에서 승리, 안착되었다.
3. 이곳 계양(桂陽)은 오늘날 인천, 부평, 부천, 오류동, 영등포, 강서, 김포, 강화, 화성, 시흥, 고양의 일부와 파주의 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인 수주(首州)의 중심지다. 인천 최고의 명산인 계양산 기슭에 위치한 계양구는 옛 부평의 중심지로 부평도호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안남산이라고도 불렸던 계양산은 해발 395m 정상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아스라이 북한산이 보이고 왼쪽으론 강화 마리산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마리산 반쪽이 떠내려 와 안남산을 이루어 마리산은 형님 산이 되고 안남산은 아우 산이 되었다고 전한다. 계양산은 북한산, 마리산과 함께 경기 서부의 주산으로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격동지가 되었다. 산 정상에서 200m 쯤에 있는 계양산성은 백제가 남하하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석축둘레가 1,937척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성벽이 허물어지긴 했지만 형태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후 계양 땅은 고려시대에는 개성과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중심지로 조선시대에는 건국 후보지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4. 여기 선주지리(仙住地里)는 총면적 1,352,082㎡(전,답,임야,대지 포함)에 1종일반 주거지역 137,433㎡(41,573평)으로 인천 계양 극북(極北)에 가까이 위치한 도시근접 농촌 전원마을로 인천의 민속촌이라 불리 운다. 사방 10㎞ 안에 김포시와 고양시 일산, 서울시 강서구(김포공항), 부천시, 그리고 인천시 부평구를 관통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부평부 황어면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평군이 폐지되고 당산면, 동면, 황어면을 통합한 부천군이 신설되었을 때에 부천군 계양면의 선주지리가 되었다 한다.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됨에 따라 계양면이 김포군에 편입되었고, 1989년 인천직할시 북구 계양동에 편입되어 선주지동이라 개칭하였다가 1995년 신설된 계양구에 편입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계양 1동에서 관할한다. 옛 지명에 선주지촌, 선주지산, 조산, 개다리들, 오랑캐다리 등이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와 교전하였던 지역으로, 오랑캐다리는 청나라 군사가 도망가면서 가설한 다리라고 전해진다. "선주지리(仙住地里)라는 지명은 황어장터(장기동)에서 동쪽 1㎞의 벌판 섶의 마을로, 옛 황어향 시절 한강 가에 있던 포구로 배가 많이 드나들었고, 지대가 낮아서 큰 장마가 있으면 홍수가 나서 배가 이곳으로 들어와 수재민을 구했으므로 배가 머물렀다고 하여서 선주(船駐)라고 하여 선주지리(仙舟之里)라고 하였다고 한다.(桂陽史, 2001, P.87)
이 마을은 둑실「오룡산」줄기가 언덕으로 변해 동쪽의「천등산」에 이어진 줄기 밑에 있는 마을로 조금 높은 언덕을「선주지산」이라 부르고 인공으로 조산을 모으기도 한 곳이다.역굴(다남동) 일대에서 원출된 모든 물이 이 선주지 마을 앞을 거쳐 벌말(상야동)의 직포에 입류 되고 있다. 이 마을 앞 들판을「선주지 뜰」이라 부르고 굴째(굴현동) 쪽의 오랑캐다리(胡橋)가 있던 들판을「개다리 뜰」이라 부르고 선주지동에는 큰 우물이 있는데, 용마(龍馬)가 나온 우물이라고 해서 용마정(龍馬井)이라고 부르는 전설도 있다.
5. 남으로 부평평야를 횡단하는 한강수리조합이 있고, 남서쪽 1㎞ 지점, 즉 경인 아라뱃길 건너 계양역 뒤 독갑산(獨甲山)을 거치면 한남정맥(漢南正脈)에 속하며 기서(畿西)지방의 주봉(主峰)이요, 한서(漢西)지방 인천의 주산(主山)인 계양산(桂陽山, 395M)이 북동쪽을 향해 새끼를 안는 모습의 평온해진 매가 날개를 정연히 편 자태로 병풍하고 있으며, 북쪽에서 보면 참신한 신자가 관상기도를 하는 상(像)이다. 고운 세 봉우리 산꼭대기에 오르면 거칠 것이 없다. 북서엔 김포 장능(章陵)이 계양산의 안산(安山)으로 북돋고 있다. 정동(正東) 대보천(大輔川)을 넘어 벌판이 마감되는 곳 거북이 형상인 개화산(開花山)이 정북(正北)을 통과하는 민족의 젖줄 한강물을 흡입하고 있다.
그 구두(龜頭) 곁 한강수를 헤엄쳐 행주산(幸州山) 먹이를 채워 그 뒷켠을 좌시해가면 수도 서울의 안산(鞍山)과 금화산(金華山), 인왕산(仁旺山) 그리고 남산(南山)이 이끌고, 東北의 웅비찬 북한산(北漢山)으로 모아 호연(浩然)이 가득 한 북악산(北岳山)에 숨겨져 간다. 이에 견주어 동남쪽 김포공항을 질러 멀리 관악산(冠岳山)이 버텨 뿜어주는 의연한 기세가 당겨오고 있고, 동서의 소래산(蘇萊山)이 연결해주고 있다. 서울 근처에서 계양산을 바라다보면 해지는 곳을 미리 가리우나 황혼이 수놓아주는 노을은 한 폭의 자하(紫霞)를 이루게 한다. 김포공항 서편 반경 5㎞ 선주지 뜰은 연마의 큰 마당이 되며 여기 노루 형국 터 높은 민첩한 반석에 동리명 한자 그대로 신선(神仙)이 머물러 사는 곳이라 적합하니 이렇게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선주지야말로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하겠다. 이곳 정경을 간략하게 그려준 옛 어른의 대략을 옮겨본다.
“한수동래옥록야”, “경인지간 선주교회”, “계산서흘강신령”. “비인간지화복”.
* 선주지(仙住地)란 지명은 신선(神仙)이 살아서 선주(仙住)가 아니라 배가 머물러 선주지(船住地)라는 주장이 우세.
6. 나는 모태로부터 선주지교회를 출입하였다. 유아 시 선주지교회당 건축(1955년 8월 완공)이라는 중대사에 미쳐 깨지 않은 잠자리에서 이끌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등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을 엎여 새벽기도회 출석을 하였는데 여동생은 어머니 가슴에 앉힌 채 진한 기도를 드렸는데 1954년 겨울부터 1955년 추운 정초의 어느 날엔 다 날근 돗자리를 이불 삼아 한 모퉁이에서 잠을 자다 덜덜 추워 떨면서 깨어나면 기도가 끝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 번 투정도 하지 않고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특히 내가 1957년 6세 때 아버지가 정치에 뛰어들어 주님의 일을 멀리하여 위장병으로 백약이 무효라 생사를 오 가 오직 주님께 매어달릴 때, 용문산 기도원에 가서 결단하였는데 나는 안방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십자가 예수님의 피로 나의 아버지를 병고에서 고쳐 주세요"라고 간절히 날마다 기도하여 마침내 병 고침을 받았다는 증거를 나도 어릴 때 보았다.(그 후 아버지는 2005.11까지 48년을 더 사셨다)
7. 유아시절 부모로부터 남다른 기대와 총아의 각인은 조부, 조모로 인한 기도의 양분과 특히 언제나 창공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줄 곧 보며 나도 넓은 세계를 발판하여야 한다는 이상과 기독정신 항양이 언제나 배양되는 여건이었다. 그래서 어릴적 부터 유아발달에 도움이 되는 고급 세 발 자전거며 그네 그리고 체육활동에 유익되는 공 종류 등은 근방에서 가장 먼저 소지 했다. 대농을 주축으로 폭넓은 생업경영에 경지에 오른 아버님께 어느 날, 나는 장차 "저에게 하늘을 장악하고 날아가는 큰 비행기를 하나 사 주세요?"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초등하교 시절 학업에 열중하였고 학급에서 반장 또는 회장을 심부름을 즐겨 도맡아 활동하곤 하였다. 이렇게 12세까지 나는 요셉의 꿈에 취했고 다윗의 용맹을 노래했다. 그때의 성구 좌우명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와 “인간 혁명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였다.
그래서 유년시절 나는 종종 아침 일찍 일어나 대문 앞마당을 돌며 “임마누엘”과 “인간 혁명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를 크게 외치며 심상(心象)을 그려 나갔다. 1963년 1월초 심령부흥회 개최 시 낮 공부시간에 참석하여 현성초 목사의 성경강해 질문에 답하는 주역으로 돋보여 강사목사가 보기에 명철한 모습이 보여 강의 중 나의 부모를 세우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집요한 제안에 어렵게 승낙한 일이 있다. 쉽게 응낙하지 않은 부모의 심중엔 "목사의 길이 힘들고 철저해야 존경받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그 해 여름 서울에서 내려온 박윤재(고대법대 졸업)라는 동리 선배로부터 "큰 고기를 잡으려면 바다로 가야한다. 주익이는 기독교 정신이 튼튼하고 재물이 풍부한 가정배경이 좋으며 너 또한 총기와 그릇이 깨끗하니 서울에 가야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권고를 수차 선물로 받은 바 있다.
8. 나에게 연단의 장(場)이 된 1965년 중학시절부터 감신대에 이르는 서울에서의 10년 여정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였다. 나는 이 성구를 잠시도 잊지 않고 꼭 붙잡았다. 주의 종으로 선정해 두신 여호와 하나님은 부족한 나를 미션계통 환일중학교(구 균명)에 순적히 입학토록 하시어 경천, 애국, 애인의 삶이 실천되도록 뿌리를 내리게 하였으며, 동시에 복음의 생활화가 가능하도록 북아현동에 자리한 인우학사(仁友學舍)에 기거케 하여 새벽기도회 참석과 선후배를 대하는 식별력, 신의로 협동하는 훈련에 1년 반 동안 가담시키셨다. 또 주님은 상경 초부터 머문 이곳에서 좋은 신앙을 겸전한 형(현재 미 뉴저지연회 박정찬 감독)의 안내로 북아현 1동에 위치한 애오개의 아현교회에 등록, 성경적인 믿음의 분량을 차근차근 쌓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생명이 되심을 세워갈 수 있었다. 이 기초 위에 “인간혁명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신념을 놓쳐본 일이 없었다. 1968년 여름, 1.21 사태 이후 혼란한 국내외 정세의 위기 속에서 얻은 성구 좌우명은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 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사 45:2,3)였고, 그 성구가 내 심령을 강타했다.
동시에 그 즈음 고생 많이 하는 우리 민족숙원인 “平和統一” 이라는 명제가 내 마음을 언제나 눌리게 하여 이어져갔다. 특히, 남북 군사 긴장고조와 월남전 참전이 주는 군사정권의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몸부림친 고등학교 당시 대양(大洋) 넘어 하나님 섭리의 손길이 있음을 볼 수 있게 한 “예수신앙”은 나에게 확고한 자본이 되었다. 이 때 1969년(고2 재학) 겨울 주님이 큰 음성으로 미약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성음과 "너를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은 줄 곧 내 소망의 중심에 섰고 그 즈음의 성구 좌우명은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싸우실 것이며”(신 1:30)였다.
이렇게 청청한 가지의 뻗어남은 주님의 이끄심 속에 1971년 감신대(監神大) 입학을 가능케 했고 침묵과 호연의 경건도야의 계수는 10월 유신의 격동에도 흔들림 없이 성서신학의 토대구축과 체력단련 기회로 병행, 값진 신학대졸업의 기쁨을 지녀 나갈 수 있었다. 나의 감신대 4년 세류(細流)의 중앙에 세워진 표어는 “항상 기도”와 “성령 충만”이었다. 졸업 시 이상현 선생으로부터 받은 을묘원단 氣山 휘호 전민족의 숙원 “平和統一”은 나의 진지한 표상이다.
9. 자비로운 하나님은 1975년 감신대 졸업 후 5월 20일 군입대전까지 고향교회 강단을 잠시 맡게 하여 더 귀한 사랑의 말씀을 주셨다. 5월18일(주일) 새벽엔 주께서 “군(君)은 하나님 나라 건설(천국건설)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선명한 음성과 연이은 다음 날 미명에 “너의 군 입대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연단의 기회인 것이다”는 선약의 사인을 통해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셨다. 사실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서 6월 4일 4주간 훈련을 위해 26연대로 배치할 때까지 주로 내무반에서 대기하며 간단한 청소만을 하는 며칠 간 주일 낮 예배 참석을 못하도록 막은 내무반장의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거의 끝날 시 힘차게 교회로 달려가 군종 주특기 희망자 25,6명의 신학 졸업자 가운데 2명을 선정하는 경선에서 장로교단 출신 군인교회 군목(중위)의 신의와 하나님의 강권에 따라 사병 주특기인 78을 얻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함성과 주의 도우심이었다.
4주간의 기본훈련을 즐겁게 잘 마치고 남한산성 서남쪽에 위치한 육군종합행정학교로 배치 받는 축복도 받았다. 용산 용사의 집에 도착하여 나를 데려갈 전령을 기다리고 잇을 시 북아현동에 살고 있는 귀분 누나가 와서 반가움을 나눴고 맛 있는 음식도 같이 했다. 오후 3시 경 병장 계급의 행정학교 전령이 나를 데리로 와 정문에서 신고하니 위병을 맡은 병사가 "너의 형이 소령이냐" 이쪽으로 오라며 안내를 잘 해 주었다. 평소에도 간간이 교제가 좋았고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기도로 나의 큰 형이 군 안내에 큰 몫을 한 것이다. 이 즈음에 교육 차 행정학교에 미리 와서 나를 인도케 된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절차 없이 소원 한 군종병 780 주특기와 함께 행정처 군종실에 명을 받아 2명의 선임 군종병의 따뜻함을 맛보며 신묘하고도 강력한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 군 생활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신묘하고 뿌듯했든지 국가가 나를 다시 입영하라고 통지하더라도 달려간다고 자청할 것 같다. 1976년 가을 남한산성 기슭, 남성대 군인교회에서 주님이 힘주시어 아침금식을 하며 100일 철야기도에 들어가 성경통독과 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묵상 속에 군무에 정진하였다. 기도를 시작한 지 90일 되는 정숙한 삼경에 “주익아, 내가 너의 길을 예비해주지 않고 누구의 길을 예비해 주겠느냐?” 는 영음(靈音)이 왔다. 이때부터 나는 이 음성을 생활의 무기로 삼고 슬기롭게 기다리며 극복해갔다. 1977년 초 새벽 군인교회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관상기도에 임하였는데 "한국에 너 밖에 없다" "하루에 성경 40장을 읽으라, 천하를 얻으리라" "너의 군제대가 2,3일 남았다"는 말씀이 왔다. 실은 10개월 이상 남은 상황에서 일러준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 이후 제대 날까지의 군 생활은 더욱 즐겁고 빠르게 흘러 예언대로 잘 감당해 갔다.
특별히 더운 6월엔 군인교회 예배실 바닥 도끼다시 공사와 장의자로 교체하는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기도 중 남은 기간 병장 봉급 전부(한 달 봉급이 2,970원) 즉 3만원을 건축헌금으로 작정 외박 중 아버지께 의논하여 대불하여 헌납한 후 찬찬히 봉급을 받는 대로 갚았으나 말미엔 아버지가 탕감해 주었다. 감사한 것은 1975년 7월 하순 행정학교 전입 얼마 후인 12월부터 주일 저녁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문제득 군목과 후임 정헌홍 목사의 신임에 감사가 된다. 군 생활 시 4번의 신, 구약성경 통독은 특기 할 사항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자 하여 말씀 중심의 기도와 성전에서의 친밀함이 차곡차곡 쌓여 가면 언제나 승리와 평안함으로 보상해주시는 원리를 나는 군 사병생활에서 터득한 경험이 너무나 많다. 차분히 정리한다면 마 페이지가 넘을 것이다.
11. 이러한 섭리의 공식은 1977년 12월 말 군 전역 직후 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북도면 신염교회 부임(1977.12.30)과 그곳에서의 “은사충만”에 비장한 결의가 묶인 첫 목회출발로부터 인천 대광교회와 숭일중앙교회 그리고 서울 용산교회와 서울연회본부 총무, 반석교회를 거쳐 서대문교회에 이르기까지 나그네와 행인, 전투하는 목양지에서 변함없이 펼쳐나가신다. 위의 성구 좌우명들은 일생 최대의 기회요, 중대사인 결혼이 성사될 때(1978년 7월)에도 준용되었다. 여기서 목회 첫 임지에서의 사연 몇 가지를 남기고 싶다. 1978.1.1 부터 나는 몹시 추운 밤늦게 강단에서 두터운 잠바를 입고 지새우길 100일 하였다. 주요 기도 제목은 성령과 진리 충만으로 교회부흥과 순적한 결혼성사였다. 어느 추운 밤 깊은 날 "담임전도사님이 강단에서 철야하시며 기도하며 고생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따뜻한 방안에서 잘 수 있습니까?" 하고 눈물이 글성거리며 찾아 온 조용기 권사 와 김경찬 권사 외 여러 성도가 있었다(꼭 1년 후 조권사의 아내 김정자 집사가 오래 전부터 귀신에 잡혀 소란을 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부족한 종의 강권에 자유 함을 받은 기적도 있었다).
무르익은 기도 날이 차가고 추위가 걷어진 90일째 되는 이른 새벽에 다음과 겉은 음성이 들려졌다. "주익아,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배필을 주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택에서 오전 11시경 도착되는 뱃 터를 주시하며 나를 찾아오는 귀인이 있을 것을 기대했고, 쌍안경으로 뱃 터를 직시해본 일도 있다. 이 예언은 100째 되는 4월 10일 교역자회의 참석차 인천에 나온 그날 밤 성사의 문이 열렸다. 즉, 전동교회 전양철 목사(외삼촌)의 중매로 7월 14일 결혼식을 올림으로 성취가 된 것이다.
12.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든지 하나님의 정한 때를 기다리며 감사하면서 감당해가는 30여년 목회현장에서 만군의 하나님은 연약한 내 곁에서 친히 넉넉한 꼴로 먹여주셨고 도와주셨고 날마다 이기게 하셨다. 그 풍성한 지족의 열매는 언제나 선(善)을 이루어내셨고 이웃의 담을 넘게 하신다. 야훼께서는 만사에 완벽하시어 실언치 않으셨고 항상 나보다 앞서 장막 칠 곳을 선취해두셨다. 그리고 대적의 문을 통과해 평정해주셨다. 인천 대광교회 목회는 조절 모르는 열성 속에 목사안수에 이르게 한 통로가 되었고, 영력을 힘차게 발설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어 양육목회 실천의 장(場)이 된 1988년 숭일중앙교회 목회 시 성전지킴과 기도, 말씀연구의 전념은 주께서 나에게 나라사랑의 시야를 넓게 해 주셨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1-5)
13. 서울을 잠시 떠난 인천에서의 활동 16년 만에 제 1한강교를 건너 안착한 1993년 5월부터의 용산교회 4년은 “廣慈和合”이라는 표어가 심연을 중화시켜 성경말씀의 원뜻에 근접되는 학구와 성령운동에 최선을 다했다. 1995년 최정순 장로로부터 두 차례에 받은 “천국건설”과 “淸廉博愛”는 길이 보존되어 무기 삼을 요약이다. 급기야 자취를 바꾸게 된 1997년 서울연회본부 총무 취임 시 나는 위의 좌표에 맞추어 연회원이 합하여 힘쓴 정진의 몸부림 4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 모든 배후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이 있었다. 2001년 여름 인애와 절제의 보화를 싣고 달린 반석교회에서의 6년 “서로 사랑하라”는 선도목회의 힘씀은 짐짓 성별된 과실을 알차게 거두게 할 자양분이었다. 특히, 2007. 6. 3 냉천동에 위치한 서대문교회(1945. 11. 16 창립) 부임과 함께 기울인 새 성전건축수행의 고비 때 주께서 나에게 주신 “내가(하나님) 성전을 짓고 있단다”라는 마광한 음성은 진실로 생수였고, 흡족한 만나였다.
이 약속은 말씀 그대로 주께서 이루어주셨다. 금년 8월 말 성전건축 준공필증(사용허가서)을 서대문구청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언제나 앞길을 면밀히 조사하고 살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싸움 역시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을 예증한 언약과 같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장소와 여건을 정하여 그곳으로 가는 길을 미리 보여주시고 반드시 유익을 도모하신다. 아울러 승리의 개가를 내세에까지 부르도록 상기시키신다.
14. 국가가 기울어가고 뒤숭숭한데다가 감리교단에 재앙이 쏟아진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최근엔 1993년부터 매년 6,7월을 묶어 4년 가까이 미국 P.U.B.(필라텔피아 성경대학교)대학원에서 땀 흘린 본 대학 설립정신을 대변하는 성구인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렘애 3:22,23)는 말씀을 내 심령 깊숙이 담아 되새기며 삶의 지표로 인내에 활용해 나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아니 메시야 대망이 끊어지는 사태가 오고 시대적 어두움이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은 이 동포의 남은 거룩한 씨앗이 되도록 가족과 목양행적의 달려감에 지금도 계속 앞서 행하시며 이끄신다. 할렐루야!
2010. 2. 27(토)
인강 이 주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