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 http://www.leeum.org/html/collection/ancient.asp 한국 현대미술 http://www.leeum.org/html/collection/modern_kor.asp?mstate=MGKR91 *회화 1982년 12월 27일자 Time지 1983, 캔버스에 잡지사진 콜라주, 유채 130.3×162.5cm 곽덕준(郭德俊, 1937-)곽덕준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그곳의 미술학교에서 교육받고 줄곧 일본에서 살아왔다. 그는 한국이나 일본 어느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함으로써 지역적 한계에 머무르는 대신, 모호함과 우울, 그리고 블랙 유머가 뒤섞인 개념적인 작업으로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양국에서 이방인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 마티에르와 선이 강조된 1960년대 회화에서 이미 삶의 본질을 유머로써 꿰뚫으려는 듯 원시적이고 만화적인 형상을 도입했던 곽덕준은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은 1970년대 이후 작업에서도 줄곧 사회비판적인 태도와 방관자적인 태도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현대 지식인의 삶의 단면을 표출해 왔다. 일상적인 개념의 무의미함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회화, 사진, 판화,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등 미술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80년대 전반기에 실행했던 주간지《타임(Time)》기록 연작 중의 하나로 1982년 12월 27일자를 작업의 소재로 사용한 것이다. 이때《타임(Time)》지는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보지라는 면에서 선택된 것으로, 당시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되었던 레이건 대통령에 관한 기사와 권투 세계타이틀 매치, 그리고 중동의 유혈 사태 등의 사진자료가 세계사의 편린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기사 부분을 하얗게 지우고 그 위에 다시 부쉬맨의 벽화에서 차용한 원시적 선묘들을 부가함으로써, 세상의 구체적인 정보는 시각적인 그림으로 변모하고 만다. 이 그림을 통해서 작가는 일주일분에 해당하는 일상의 공허한 현실 대신 창조행위인 회화의 충만함을 제시했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002.jpg 작품 86, M.K 1986, 캔버스, 종이에 채색 180×137cm 곽인식(郭仁植, 1919-1989)곽인식은 1937년에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이래 일본 주요 미술전과 도쿄 비엔날레(1965),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 시드니 비엔날레(1976) 등에 참가하며 일본화단의 주류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나 국내에 그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기념전 전후였다. 1960년대 초기 서구 미술사조에 근거한 일본화단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유리판, 돌, 흙 등의 재료를 부수었다가 다시 접합하는 작업을 시도하면서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탐구했던 그는 1970년대를 전후하여 출현한 모노하(物派)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1968년부터 사물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 부드러운 종이는 형태와 구도를 제시하기 위한 단순한 회화작업이 아니라, 재료와 일치된 예술가의 존재가 표면과 공간에 대한 경험을 드러내는 일종의 3차원적인 작업이다. 무수히 겹쳐져 드러난 타원들은 서로 관계를 지니면서도 결코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드러내는데, 이는 종이작업 역시 사물과 인간이 온화한 화해의 과정을 거쳐 동등한 반려자가 되는 초기의 오브제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색채와 광선을 도입한 1980년대의 작품으로 먹 대신 노랑과 보라의 색점을 화면 가득히 분산시켜 배치했다. 이전의 먹 작업이 공간의 깊이와 중첩을 중시하였다면 색채를 사용한 이 작업은 공간의 확산과 돌출의 인상을 강하게 부각시켜, 투시법의 소실점이 관객의 내부에 있는 듯 화면이 보는 사람을 향해 전진하는 공간을 보여준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003.jpg 우화 B 1963, 캔버스에 유채 161×131cm 권옥연(權玉淵, 1923-)권옥연은 1950년대 파리 유학을 통해 앵포르멜 등 유럽미술의 최신 경향들을 직접 체험하고 개성적인 추상양식을 구축하였다. 도불 전 그는 일본 유학(1942~1943)을 통해 체득한 고갱(Paul Gauguin)풍의 양식화되고 평면적인 이미지로 풍경과 인물작업을 하였으나, 파리에서 3년간 체류하는 동안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 살롱 데 레알리떼 누벨(Salon des Réalités Nouvelles) 등 당시 파리의 주요 전시회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차츰 문학성 강한 기존의 사실주의 양식을 버리고 추상실험에 열중하게 된다. 특히 그는 갑골문자 연구를 통해 기호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비정형의 형태와 두터운 마티에르, 청회색으로 제한된 색채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회화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권옥연의 작업은 단순히 형식의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유학을 통해 눈뜨게 된 한국의 토속성 표현에 대한 추구를 포괄하는 것이다. 높은 심미안으로 손꼽히는 민예품 수집가이기도 한 권옥연은 1960년대 우의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토기나 청동기가 지니는 질박한 느낌을 전달하는 토속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우화 B>는 그 전형적인 작품으로, 탈색된 듯 억제된 색조, 단순화된 형태, 색면에 의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토기의 형태는 없지만 작은 구멍들과 균열들은 신라토기에 유추한 모티브들로, 이 시기의 많은 작품에 적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06.jpg 산사(山寺) 1980년대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180.5×120.5cm 김기창(金基昶, 1916-2001)7세에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은 운보(雲甫) 김기창은 17세에 김은호가 운영하던 낙청헌 화숙에 들어가 화업을 닦았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1941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초기에는 김은호의 영향을 받아 정교한 채색화로 시작했으나 이후 활발한 실험정신으로 폭넓은 작업을 전개했다. 산수, 화조, 인물, 영모, 풍속 등에 고루 능한 그는 고식적인 동양화의 관념에서 벗어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며, 활달하고 힘찬 필획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입체파적인 면 분할이 보이는 반추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실험에 몰두했다. 이러한 실험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앵포르멜의 영향이 엿보이는 수묵실험으로 이어져 급진적이고도 역량 있는 변화의 단계를 보여 주었다. 작가의 열정과 회화적 역량을 엿볼 수 는 특유의 생명력 넘치는 호방한 필치는 1970~1980년대의 <바보산수> 연작을 거쳐 마대 걸레를 붓으로 이용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이어졌다. <산사>는 일상생활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김기창의 바보산수화 중 하나이다. 그의 바보산수화는 민화의 자유분방한 화풍을 수용한 독특한 양식으로, 과감한 생략과 대담한 구도를 특징으로 한다. 대각선 구도로 숲이 우거진 산의 모습과 새벽을 맞이하는 산사의 고요한 풍경을 구도와 채색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표현해 화면에 박진감을 더하여 파격적인 문인화를 구현하고 있다. 석탑을 향해 합장하는 노승(老僧), 타종하는 승려, 그리고 외출에서 돌아오는 승려들의 모습과 법당, 산 등을 다시점으로 포착하여 대담한 생략을 기본으로 원근의 구별 없이 화면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간결하게 나열하고 있다. 산뜻한 채색의 멋과 정갈한 먹의 필선이 한 화면 안에서 적당한 여백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 작품은 관념적 산수가 아닌 운보의 소박한 꿈과 순수한 내면을 담고 있다. 전통 산수의 법도와 준법을 따르기보다는 서민풍의 단순하고 호방한 필치를 통해 생활을 반영하는 실천적인 회화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회귀(回歸) 1992, 마포에 먹, 아크릴릭 162.5×130cm 김창열(金昌烈, 1928-)김창열의 극사실적인 물방울 그림은 등장 이후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많은 국내외 미술이론가들에게 철학적, 미학적 논의의 화두가 되어 왔다. 기실 김창열은 1957년 박서보, 정창섭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한국의 급진적인 앵포르멜 추상운동을 이끈 작가이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수학하는 동안 미국의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을 접하면서 형상과 평면에 대한 종합적인 관심을 키웠고, 반복되는 원형을 이용한 기하적이고 견고한 구성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1971년 파리로 이주할 즈음 이 원형들은 흘러내리는 불투명한 회색의 점액 같은 형상으로 풀어져 이후 물방울 그림을 예고한다.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투명한 물방울은 일종의 눈속임(trompe l’oeil)으로서, 가상의 빛과 그림자의 유희로 만들어진 일루전이다. 바탕을 칠하지 않은 천을 그대로 캔버스로 사용하기 때문에 천 위에 실제로 물방울이 맺힌 듯한 눈속임 효과가 더욱 배가된다. 물방울의 여러 양태와 다양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자칫 단조롭게 보일 물방울 그림에 김창열은 1980년대 전반부터 천자문을 그려넣기 시작하여 작업의 조형적인 변화의 폭을 넓혀주었으며, 아울러 작품에 동양적인 정서를 부여했다. <회귀>는 1980년대 말부터 천자문-물방울 그림에 ‘물방울’이라는 직설적인 명제 대신 사용한 제목으로, 천자문의 사용과 더불어 작품을 사유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15.jpg 무제 1993, 캔버스에 유채 145×112cm 김홍주(金洪疇, 1945-)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김홍주는 1970년대 대표적인 전위그룹 ST그룹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현대미술의 형식실험이 한창이던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유행사조에 경도되기보다 ‘재현’이라는, 회화에서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는데 이를 통해 회화의 기본 전제인 일루저니즘을 역설적으로 비판해 오고 있다. 극사실적인 그림과 오브제 그림틀을 대비하여 재현과 실재 사이에 혼돈을 초래하던 초기 인물화에서부터 서구적 원근법 대신 부감법을 차용한 풍경화, 그리고 풍경의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생략하여 서예작품과 흡사한 조형물을 창출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미한 텍스트 읽기에 안간힘을 쓰게 만드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사실적인 묘사 이면에 비현실적인 풍경을 장치해 둠으로써 시각적 유희를 가능하게 한다. 형태심리학의 연구대상이자 라캉(Jacques Lacan)이 제기한 거울이론의 현상인 이와 같은 변형 투시법(Anamorphic Perspective)은 중세 이후 현실을 인식하는 비판적인 시각으로서 소수 작가에 의해 실험되었으며, 시각의 전도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초현실성의 환영을 제공했다. 산업화를 직면한 농촌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여백을 강조한 상단부와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하단부로 크게 양분되는데, 과거에 지어졌거나 새롭게 축조된 건물들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간략히 표현한 반면, 나무와 논밭, 그리고 저수지는 풀 한 포기를 실제로 심듯이 정밀하게 묘사했다. 특히 하단의 저수지 형상은 극사실적인 자연 묘사 속에 작가의 자화상을 내포하는 이중 이미지로서 극사실성과 초현실성을 한데 묶어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창출하는 작가 특유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활발한 화단 활동과 함께 교단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김환기는 1963년에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 새로운 추상의 세계를 펼친다. 모더니즘 회화가 절정에 달한 당시 뉴욕 화단을 체험하면서 그의 그림에서는 이전에 반복적으로 사용하던 소재들이 사라지고 선과 면, 점을 이용한 화면 구성이 주를 이룬다. 그는 오랫 동안 고집하던 구상과 추상이 복합된 양식을 완전히 포기했을 뿐 아니라 이전의 두터운 마티에르 대신 옅은 물감의 번짐 효과를 이용한 수채화 같은 화면을 구사하며 완전추상으로 전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그의 작업은 점을 이용한 추상 실험의 비중이 높아졌고, 1970년부터는 전적으로 점묘화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아울러 캔버스의 크기가 거대해지고, 주로 청색 한 가지만을 사용하면서 화면 전체를 균일한 크기의 점으로 채우는 전면적인 구성이 자리를 잡는다. 또한 심상이나 주제를 전달하는 제목 대신 제작일과 일련번호로 제목을 삼는 등 뉴욕 시기의 점묘화는 김환기가 화가로서 일생에 걸쳐 추구해 온 모더니즘 회화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19-Ⅷ-72 #229>는 김환기가 1972년을 전후하여 시도한 점묘화의 구성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점묘화 초기의 단조로운 수평 배치를 벗어나 방향을 달리하여 역동성을 주거나 파동을 연상케 하는 동심원 배치를 사용하기도 하고, 물감의 농담을 달리하여 색의 변조를 주는 등, 하나의 점에서 출발하여 화면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이렇듯 김환기에게 점은 새로운 추상을 위한 조형의 출발점이었지만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고 조예가 깊었던 그에게 수많은 점들은 궁극적으로 내면의 표상이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 하나하나를 고향인 한국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이라 여기고 별을 그리듯 화포에 점을 찍어 갔다는 김환기의 회고는 그가 순수한 모더니즘 형식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술을 통한 내면의 시정(詩情)과 나아가 한국적 미감을 표현하는 데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두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18.jpg 작품 19-Ⅷ-72 #229 1972, 캔버스에 유채 264×209cm 박생광(朴生光, 1904-1985)박생광은 한국적 모티프와 단청의 색상을 재현하여 우리 문화에 면면히 지속되어 온 채색화의 전통을 부활시킨 작가이다. 60여 년에 걸친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 단계는 1920년에서 해방까지의 일본 체류기로, 그는 근대 교토파 거장들에게 대상의 사실적 묘사법을 익혀 일본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귀국 후 1970년대 후반까지 비교적 긴 모색의 시기를 거친 그는 1977년의 개인전에서 이전의 일본풍에서 벗어나 한국의 민속적 소재를 사용한 변모된 작품을 선보인다. 1977~1982년은 그가 자신의 한국적 채색화 양식을 정립해 간 시기로 불교와 무속을 소재로 한국 전통의 민화, 탱화의 기법과 단청과 색동옷, 탱화의 색채를 통해 한국적인 미감 추구를 가속화했다. 그의 예술이 절정에 달한 것은 말년의 3년간(1982~1985년)으로, 1982년의 인도 성지순례에서 접한 밀교적 조형과 한국적인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는 깨달음이 계기가 되었다. 1984년 이후에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작업했으나 <명성황후>, <전봉준> 두 작품만을 남기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무녀>는 박생광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절정기의 작품으로 우리의 전통회화처럼 평면성이 강조되고 색동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원색과 특유의 굵은 주황색 윤곽선이 사용되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무녀의 한삼과 부채, 괴면이 어우러져 굿판의 절정에 달한 무녀의 신기(神氣)를 화면 가득히 담아 내며, 오른편 하단의 부처는 불교적 소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무녀(巫女) 1984, 종이에 채색 136×136cm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25.jpg 박서보(朴栖甫, 1931-)박서보는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중요한 시기와 맥을 같이하면서 현대미술을 이끌어 왔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1957년 한국 앵포르멜 미술을 주도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주요 멤버로서 활동했다. 그는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루 비엔날레, 베니스 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전에 참가하여 한국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홍익대학교 교수와 미협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세 시기로 대별되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실존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원형질> 연작을 제작하여 앵포르멜 미술을 한국에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잠시 <유전질> 연작을 통해 기하적인 경향의 구체미술을 시도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서구 미니멀리즘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묘법> 연작을 제작하고 있다. <묘법> 연작 초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는 모노크롬 형식의 드로잉 작업을 했으며,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후기 묘법 시기에는 한지의 물성을 이용한 작업을 하고 있다. <묘법 No.41-78>은 초기 <묘법> 연작 중 하나로 마포에 칠해진 단색조의 유화물감층 위에 연필로 단순한 드로잉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선을 반복해서 긋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행위의 호흡과 캔버스를 이동할 때의 리듬만 남는 상태, 즉 자동기술적인 혹은 무위자연 상태에서 작가가 무명성에 도달하여 진정으로 작품과 합일하려는 의도에서 탄생한 결과이다. 1978, 마포에 유채, 연필 194×300cm 묘법 No.41-78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26.jpg 박수근(朴壽根, 1914-1965)박수근이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서구의 아카데미즘을 답습하던 한국 근대기 화단에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마티에르를 통해 관습적인 회화의 전통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한국인의 서민적인 생활상과 정서를 집약적으로 표현해 낸 데 있다. 한국의 풍경에서 추출한 듯한 기름기가 제거된 회갈색 톤의 질감으로 백의를 입은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정경을 마애불과 같은 영속성이 강조된 형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는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근원적인 이미지를 이끌어 낸 것이다. 더구나 작품의 소재나 주제의식은 한국 근대사의 증거라 할 만큼 곤고했던 작가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더욱 친근하고 호소력있게 느껴진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의 초상은 어린 시절 사별한 어머니와 평생 정신적 지주였던 아내의 존재에서 유래하지만 힘든 현실을 지탱하는 대지 같은 모성애나 민족의 개념처럼 추상적인 정신성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앉아있는 여인>은 등을 보이며 앉아 있는 두 여인의 초상인데 이들은 모델의 구체성을 상실한 채, 추상화된 배경 속에서 노동하는 여인의 보편적인 형상을 구현한다. 작가는 전쟁 후의 불안정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인물의 같은 포즈를 반복해서 그린다든지, 앞모습 대신 옆모습이나 뒷모습의 인물상을 즐겨 그림으로써 인물의 개별적인 표정묘사를 제거하고 보편적인 영속성을 확보한다. 여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남성 부재의 시대에 사회 중심부로부터 소외된 채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하루의 생계를 좌판에 의존하는 모습을 통해 전후 한국사회의 비참했던 현실을 전해 준다. 그러나 삶에 뿌리깊은 신뢰를 두고 있는 듯한 여인의 모습은 결코 절망적이거나 비루하지 않으며 오히려 푸근한 정감으로 현실의 각박함을 포용하는 듯한데, 이는 작가가 여인의 모성애를 통해 추구했던 수용의 삶이기도 하다 1958,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앉아있는 여인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29.jpg 변관식(卞寬植, 1899-1976)소정(小亭) 변관식은 구한말의 대가 조석진의 외손자로 그에게서 전통적인 청록산수화와 남종문인화풍을 배웠다. 1925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에 있으면서 운치 있는 일본 남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나 귀국 후 우리 산촌을 근거로 한 실경산수로 전환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적묵법(積默法)과 파선법(破線法)을 이용한 독특한 형식을 창출하여 현대적인 한국 산수화의 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소 강직한 성격인 그는 중심화단을 외면하고 전국 산야를 방랑하면서 특히 금강산을 수차례 방문하고 사생하여 금강산을 소재로 한 명작을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은 금강산의 보덕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보덕굴은 고구려의 고승인 보덕이 수도한 곳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으로, 암벽과 외다리로 된 철기둥이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는 암자의 경관이 기이하여 많은 화가가 그려왔다. 보덕암이 화면 중앙에 배치된 이 작품은 위로는 법기봉을, 아래에는 시원한 물보라가 튀어 오르는 분설담을 배치하고 그 오른편에 거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전체적으로 꽉 찬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날카로운 예각으로 화면을 여백없이 대담하고 탄탄하게 구성하고, 거친 붓놀림으로 짙게 화면을 덮어 가는 적묵법과 둔중한 필선에 점을 가하여 변화를 주는 파선법의 사용은 전성기 소정 산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묵직한 운동감과 더불어 푸근한 향토미를 자아낸다. 또 그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도포 입은 노인들의 흥겨운 모습에서는 한국인 특유의 여유와 해학이 느껴진다. 1960, 종이에 수묵담채 265×121cm 내금강 보덕굴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5.jpg 서세옥(徐世鈺, 1929-)서세옥은 전통으로부터의 절대해방과 절대자유를 주장하며 한국화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광복 후 제1세대 작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과 1회 졸업생으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49)에서 동양화부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53)에서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는데, 이 시기에는 서울대학교 시절의 스승 장우성과 김용준의 영향으로 현실적인 소재를 간결한 선묘와 담채로 그려 냈다. 1959년 박세원, 장운상, 민병갑, 권순일 등과 함께 묵림회(墨林會)를 조직하여 기성 동양화단에 도전하며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했던 그는 1960년대에 발묵에 의한 순수추상의 세계를 펼치다 1970년대 이후에는 사물의 본질을 간결하고 절제된 형상으로 집약하는 작품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인간’은 그가 195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 온 소재로서, 초기에는 객관적 묘사에 중점을 두었으나 1960~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형문자와 같이 기호화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1970년대 후반 이래 계속되는 <군무>, <군상>, <기다리는 사람들> 등 <인간> 연작에서 사람의 머리는 점으로, 몸은 선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붓과 먹으로 종이에 점을 찍고 선을 긋는 행위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작가의 예술관을 반영 하는 것이다. 어깨동무를 한 듯 이어진 사람들의 모습은 얽히고 설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공동체적 운명을 표상하며, 먹의 농담과 필획의 강약으로 춤추게 함으로 이들의 운동감을 전달했다. 단순한 외양에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내포되어 주변의 여백과 더불어 긴장감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1989, 종이에 수묵 162×262cm 군무(群舞)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7.jpg 유영국(劉永國, 1916-2002)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 중 한 사람인 유영국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진보적인 미술교육을 하는 도쿄 분카[文化]학원 유화과에 입학했다. 유영국은 1937년에 창설되어 일본 추상미술 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콜라주한 평면 부조 작품들을 선보였다. 1943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 1947년 신사실파 창립에 가담하여 김환기, 장욱진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64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에는 그룹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개인전을 통한 작품 발표에 주력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는 이전의 기하학적 구성에서 탈피하여 표현적인 색면과 섬광과 같은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주로 제작했던 것과는 달리 유영국의 작품세계의 핵심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다시 엄격한 기하적 색면 구성으로 전환했다. 산, 해, 바다 등의 형태를 암시하는 추상적인 풍경을 통해 자연을 구체적인 대상물로서가 아니라 선, 면, 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서 탐구함으로써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가 아니라 어우러진 서정성을 자아낸다. 유영국은 1957년경부터 산을 즐겨 그리기 시작하면서 1960년대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모든 작품에 ‘산’을 모티프로 사용했다. 커다란 면분할과 파랑을 주조색으로 한 색면대비가 특징적인 <산>은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에 색채에 의한 형태의 공간감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자연의 일부인 ‘산’은 작품의 모티브로 작용할 뿐 산을 통해 얻어진 이미지는 작가가 창조적으로 추상화면의 구성요소로 변형해 작가의 내면세계를 대변한다. 깊은 파랑과 밝은 파랑을 주조로 구성된 화면에 노란색과 녹색을 배치하는 단순한 색면대비를 통해 산의 형태에 입체감과 공감감을 효과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산 정상부의 흰색과 노란색으로 형상화한 빛과 나이프에 의한 획선의 흔적은 비정형의 형상과 함께 화면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단순한 색조와 밀도 있는 구성에 따라 형성된 안정된 화면 공간은 정적인 자연 공간을 반영하여 서정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작가가 느끼는 자연의 충만한 기운을 담아 내고 있다. 1966, 캔버스에 유채 163.2×130cm 산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42.jpg 윤명로(尹明老, 1936-)윤명로는 전후 한국의 전위적인 추상화의 첫 흐름인 1960년대의 앵포르멜(Art Informel)에 참여하여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한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윤명로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경향의 화단에 반기를 들고 1960년에 창립된 ‘60년 미술가 협회’ 회원으로 덕수궁 돌담에서 열린 <벽전>에 참가했다. 이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기치를 내걸어 기성 화단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1957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대변혁과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 한국 화단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미술의 주류였던 앵포르멜 미술이 6·25전쟁 이후의 사회적 혼돈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더불어 등장했다. 당시 윤명로는 부패한 화단에 대한 저항의식과 앵포르멜 미술의 이념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더욱 심취하여 <원죄>, <문신>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숙명을 어둡고 우울하게 표현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어두운 색조와 두터운 질감을 강조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앵포르멜 미학을 성숙시켜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모색하고 있다. <회화 M 10-1963>은 1963년 제3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1960년대 앵포르멜 경향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굵은 선의 흐름이 느껴지는 독특한 화면처리와 생경하게 빛을 발하는 금속성의 재질감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고대 중국의 청동기에서 직접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석고와 접착제를 사용하여 저부조의 느낌으로 표면을 처리한 뒤 그 위에 은색, 군청색 등을 덧발라 은박을 덧씌운 것 같은 금속의 단단한 표면 질감을 강조하고 있다. 추상적인 화면을 기본으로 거칠고 두터운 재질감을 나타내는 강렬한 효과는 윤명로를 비롯한 당시 작가들의 실존의식과 극한적인 감정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윤명로는 1965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판화작업에 주력하여 한국 현대판화에서 선구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균열> 연작과 1980년대 <얼레짓> 연작을 지나 1990년대에는 전통산수의 수묵과 같은 색채의 힘있는 운필을 표현한 <익명의 땅> 연작 등을 통해 서구의 회화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전통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0년의 <겸재예찬>에 이르러 전통적 산수화의 자유로운 필선과 구성으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그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1963, 캔버스에 혼합재료 162×130cm 회화 M 10-1963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43.jpg 이상범(李象範, 1897-1972)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한국적 산수화의 전형을 마련한 이상범은 흔히 일컫는 현대 산수화 4대가의 한 사람이다. 1914년에 그는 조선 후기 산수화의 명인인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끄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전통적인 화법을 익히며 기초를 다졌다. 그는 1923년경 화우(畵友)인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와 뜻을 모아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이들과 함께 우리 화단의 오랜 전통이던 중국식 관념산수를 극복하고 일본화풍을 탈피하는 한국적 산수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0대에 이상범은 절대준과 부벽준 등 전통 준법에 변화를 가한 그만의 독특한 준법을 개발하고 특징적인 화면구성을 구축하는 등 이른바 청전 양식을 완성했고, 1960년대에 이르면서 원숙의 경지에 올랐다. 이상범의 산수화는 대자연에 순응하며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농부의 모습과 전형적인 우리의 옛 시골 풍경으로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한다. 여름의 한적한 시골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제작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주로 가을과 겨울의 정취를 그려 온 이상범이 노년에 이르러 여름 풍경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과 절정에 달한 수묵미 등의 특징으로 보아 원숙기인 1960년대 중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면은 전경에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고, 중간에 예의 소를 몰고 가는 농부가 보이며, 그 뒤로 산성과 누각과 먼산이 배치되어 있어 원숙기의 전형적인 3단 구성을 이루고 있다. 속필로 처리한 나무들과 잡풀은 청전 특유의 준법을 여실히 보여 주며, 짙은 녹음을 표현한 풍부한 농담과 깊은 먹빛에서 수묵미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1960년대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73×140cm 귀로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49.jpg 이승조(李承祚, 1941-1990)‘파이프의 작가’로 알려진 이승조는 1963년에 창설된 오리진 그룹의 창립 멤버로서 이 그룹을 통해 성장한 작가이다. 이른바 4·19세대를 대변하는 이들은 전 세대의 앵포르멜적, 추상표현주의적 유산에 도전하면서 근본적인 조형질서로의 회귀를 지향했다. 평면과 대결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이승조는 기하학적 조형의 역사적 맥락이 빈약한 국내에서 엄격한 기하주의를 최초로 시도하여 정착시켰으며 더 나아가 시각적 착시효과를 유도하는 옵아트(Op Art)를 제시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전개과정에 독보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했다. 1990년 50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이승조는 금속성의 파이프가 가져다주는 차갑고 기계적이며 질서정연한 형태미를 자신의 회화적 의지로서 20여 년간 일관되게 추구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평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세 시기로 구분되는데, 입체적 공간구성에 치중한 시기(1968~1973)와 단일한 색면적 구성을 추구한 시기(1974~1980)를 거쳐 이 둘의 변증법적 종합의 시기(1981~1990)로 전개된다. 정면에 광원을 배치한 느낌의 작품 <핵 80-07>은 마름모 형태로 절단된 파이프의 형태미를 보여주는데, 광원과의 거리에 따라 변모하는 파이프의 시각적 양태를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관찰자로 하여금 평면의 조건을 넘어서 입체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단색조의 평면적 구성을 청산하고 마름모라는 시각적 요소와 파이프의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것으로 보아 제3기를 여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80, 캔버스에 유채 135.5×230cm 핵(核)80-07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50.jpg 이우환(李禹換, 1936-)유교적 가풍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당대 문인에게서 시, 서, 화를 배우며 자란 이우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동양화를 공부하다가 1956년에 도일, 일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근본 존재론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하여 서구의 인간중심적 주관성의 해체를 명제로 삼았던 교토학파(京都學派)의 철학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우환은 이를 작품창작의 개념에 도입하여 ‘제시’가 ‘창조’보다 진리에 더욱 가깝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무엇을 새로이 창조하는 대신, 존재하는 실재 사물들을 제시함으로써 사물의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더 나아가 이질적인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왕성한 작품활동과 더불어 1969년에는 일본 미술출판사가 공모한 미술평론상에 <사물에서 존재로>라는 평문으로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예술가로서 ‘만남’과 ‘무한’의 미학을 구체화한 그의 예술세계는 서구의 미니멀 또는 개념미술과는 달리 동양정신을 구현한 것으로서, 동양 최초의 자생적인 현대미술운동인 모노하(物派)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1958년경부터 시작한 회화작업은 동양화의 기본 획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일정하게 점이나 선을 반복하고 약화시킴으로써 점과 선의 개념, 선의 자율성 더 나아가 무한한 시공간 개념을 가시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차츰 반복과 함께 자유분방한 획이 시작되고 그 어긋남의 진폭과 함께 여백의 공간이 중시되는데 <선에서>는 자유로운 획을 시작하기 직전에 제작한 것으로서 반복된 선이 무한의 시간개념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회화작업과 더불어 돌과 철판을 이용한 조각작품을 통해 ‘만남’의 철학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1979, 캔버스에 유채 194×260cm 선에서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51.jpg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이인성은 대구화단의 선구자인 서동진으로부터 일찍부터 수채화를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6회 연속 입선과 특선, 최고상을 수상하여 불과 스물 여섯의 나이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천부적인 재질을 인정받은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 체류중에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고 일본 수채화회전에서도 최고상을 수상하여 일제시대에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鬼才)’로 불렸다. 자유분방하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는 보나르와 세잔, 고갱 등의 다양한 양식적 편력을 보여 주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의 주된 경향이자 비평적 쟁점이던 ‘조선 향토색’을 대변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목가적인 소재, 강렬한 색채구사 그리고 풍부한 서정성은 광복 이후 현대화단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른바 ‘향토적 서정주의’의 커다란 맥을 형성했다. 이인성은 특히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불투명 수채기법의 활용으로 유화에 비견될 만한 수채화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935년 작인 <경주의 산곡에서>는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인성 예술의 백미이자 일제 강점기를 풍미했던 조선 향토색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첨성대가 바라보이고 붉은 색으로 휘감긴 황량한 벌판에는 아이를 업은 소녀와 윗저고리를 벗은 채 바위에 걸터앉은 소년이 화면 좌우에 대칭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탄력적인 붓질과 화려한 색채 그리고 역동적인 화면구성은 절정기의 완숙함과 최고조에 이른 작가의 역량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몇 개의 깨진 기왓장과 유물들로 폐허가 된 천년 고도 경주의 정경을 묘사한 점이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아이 업은 소녀와 힘없는 어린 소년을 대비시켜 일제 강점기라는 좌절과 희망이 엇갈리는 한 시대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53.jpg 1935, 캔버스에 유채 130×194.7cm 경주의 산곡에서 이종상(李鍾祥, 1938-)일랑(一浪) 이종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의 특선을 계기로 등단하여 196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활동했고 서울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하면서 한국화의 현대적 재건이라는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현대 한국화가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비판없이 수용된 기존의 모든 인습적인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한민족 고유의 원형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재료의 개발과 기법을 일신함으로써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 1960년대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노동의 현장을 소재로 사실적인 인물화를 시도했던 이종상은 1970~1980년대에 벽화와 진경산수화를 전개했고 특히 1980년대 말부터 <원형상>이라는 새로운 조형세계를 개척함으로써 한국화의 가능성을 높였다. 1970년대에 스위스의 미술사가 간트너(Joseph Gantner)와의 만남을 통해 선형상(Prefiguration)의 개념에 공감한 이종상은 이를 동양의 기운생동설과 연관지으면서 회화적 이념을 정립했다. 그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연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원형을 탐구하는 과정에 자연을 묘사하는 대신 원래 상태로 되돌려 보내고 더 나아가 그것을 기호화하는 단계에 도달하는데, 이는 서구에서 통용되는 추상의 의미와는 다른 동양정신의 추구라 할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한지회화를 넘어서서 장판지와 닥종이 부조, 심지어 동(銅) 유화에 이르는 재료 실험은 한국화의 표현 가능성 탐구라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불투과성의 대형 장판지를 이용, 속도감이 내재된 힘찬 필치로 농묵을 구사하여 여백과 함께 자연의 원초적인 형상을 포착한 그림이다. 1990, 장판지에 수묵, 천연채색 170×234cm 원형상(源形象) 90024-대지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54.jpg 이중섭(李仲燮, 1916-1956)대향(大鄕) 이중섭은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서양화가인 임용련에게서 미술지도를 받고, 195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文化]학원 미술학부 양화과에 입학하여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토대로 한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1941년 문학수, 이쾌대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민족적인 미의식 실현을 도모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중 귀국하여 원산에 머물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여 종군화가로 활동했으며, 처참한 피란생활을 하던 그는 1952년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후 고독과 자학 속에 정신분열증세까지 보였다. 그의 화풍은 초기에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를 다루었으나, 차츰 가족과의 사랑과 이별 등 자신의 신변에 관련된 그림을 야수주의적인 기법으로 소화하여 독특한 표현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이중섭은 사후 그의 드라마 같은 생애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박수근과 함께 근대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중섭은 특히 황소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붉은 바탕에 소의 머리 부분만을 클로즈업한 <황소>는 그의 <소>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분출하듯이 고개를 휘저어 올린 순간의 동작을 포착한 이 작품은 통영시절에 제작된 것이다. 대담한 생략과 요약에 의한 탁월한 표현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주제인 ‘소’는 이중섭의 생애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는 대부분 온순하고 묵묵히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분노에 차 울부짖거나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모습이다. 마티에르가 강하고 역동적인 필력의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형상화된 소의 모습은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고 저항하던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선택된 소재였으며,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지내야 했던 시절에는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실존을 반영한 자화상이었다. 1953-1954, 종이에 유채 28.8×40.7cm 황소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55.jpg 장욱진(張旭鎭, 1917-1990)작은 화면에 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를 단순한 선묘로 표현한 장욱진은 소탈한 인간성과 독특한 삶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본 도쿄의 데이고쿠[帝國]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에 김환기, 유영국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활동한 그는 잠시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학교에 재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여 유화, 먹그림, 판화, 매직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는 30호 미만의 작은 화면에 농촌풍경이나 동심의 세계를 단순한 선과 절제된 형태, 그리고 소박하고 간결한 구성으로 그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정신의 자유를 표현했다. <자동차가 있는 풍경>은 작가가 부산 피란 시절 광복동의 인상을 그린 것으로 빨간 벽돌집과 자동차를 중앙에 상하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좌우대칭을 이루게 했다. 원근법이 무시되고 단순한 형태로 묘사하는 방법이나 무작위적인 구성 방식은 아동화 같은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 작가는 당시 남산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어린이박물관학교에 들르곤 했다. 화면 상단 끝부분에 조밀하게 모여 있는 집들의 밀도 있는 구성은 성긴 하단과 대비되어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으며, 작은 화면에 밀도를 주기 위해 날카로운 도구로 긋거나 문질러 다양한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클레(Paul Klee)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간결하면서도 서툴러 보이는 개념적인 선묘와 형태는 장욱진 예술의 특질로서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서 만나는 우화적(寓話的)이고 해학적인 정신이 느껴진다 1953, 캔버스에 유채 39.3×30.2cm 자동차가 있는 풍경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61.jpg 정창섭(井昌燮, 1927-)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작가로서 화단을 주도해 온 정창섭은 서울대학교 졸업(1951) 직후인 1953년과 1955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등단했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비롯한 여러 국제전에 참가했고 1993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을 가진 바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1950년대 후반에는 당시 미술계에 불어닥친 앵포르멜 미학의 영향으로 주로 비정형의 형상 위주의 추상작업에 몰두하다가 차츰 동양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앵포르멜 경향을 탈피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한지나 화선지를 붙이고 그 위에 먹을 사용하는 1970년대의 작업을 거쳐 1980년대 이후 우리 나라 고유의 한지 재료인 닥을 사용하여 이른바 종이를 이용한 독특한 조형세계를 전개해 오고 있다. <닥 No.86022>은 8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물에 흠뻑 적신 닥을 캔버스 위에 고르게 풀어 얹은 다음, 손바닥으로 두드리거나 롤러질을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작가와 닥의 물아합일(物我合一)의 경지를 반영하며 닥이 마르면서 자연스레 화면에 드러나는 닥 고유의 물성과 표정이 돋보인다. 물질과 행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물질과 비물질의 간격은 사라지고 물질화된 정신은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또한 흔히 ‘문’으로 비견되기도 하는 이 시기의 작업은, 안과 밖의 이중적 세계를 공유하고 종이를 통해 걸러지고 투사되는 은유적 세계를 담고 있다 1986, 캔버스에 닥종이 240×140cm 닥 No.86022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62.jpg 하종현(河鍾賢, 1935-)홍익대학교 미술대학를 졸업한 하종현은 1960년대부터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작가로, 특히 1970년대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전개와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 말 실험적 작업을 펼치던 젊은 작가들의 모임인 AG그룹에 가담하면서 그는 철사, 스프링, 나무, 마대 등 오브제를 이용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고,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물감과 마대천이 이루어 내는 재료의 물질적 특성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한 <접합> 연작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올이 굵고 성긴 마대천 뒤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이 물감을 천의 앞면 쪽으로 밀어낸 후 올 사이로 비어져 나온 물감을 다시 앞면에서 나이프나 흙손, 또는 손가락으로 누르거나 긁어 낸다. 마대와 물감, 그리고 밀어내는 물리적인 힘이 자아내는 우연적인 효과와 여기에 가해지는 작가의 조형적인 마무리로 완성되는 그의 <접합> 작품은 그리거나 묘사하는 전통적인 회화이기보다는 물감과 마대천이 결합된 ‘오브제’의 느낌을 강하게 드러낸다. <접합 75-1>은 <접합> 연작 중 초기작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힘의 차이로 만들어진 얼룩과, 표면을 전면적으로 스치듯이 긁어 내린 흔적이 매우 독특한 질감을 준다. 또한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세 개의 마대천을 나란히 잇댐으로써 시각적인 반복의 효과를 더하고 있다.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71.jpg 접합 75-1 1975, 마포에 유채 170×245cm *조각설치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07.jpg 권진규(權鎭圭, 1922-1973)권진규는 도쿄 무사시노[武臧野]미술학교에서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를 사사했고, 그에게서 건축물을 구축하는 듯한 표현법을 전수받았다. 1959년에 귀국하여 당시로는 드문 재료인 테라코타 작업에 몰두한 그는 1965년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주로 여인의 초상을 많이 제작하였으며, 1970년대 초에는 십자가상이나 불상 등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각계의 냉대와 생활고 등으로 고뇌하다가 1973년 붉은 법의를 걸친 자소상(自塑像)을 제작한 후 자신의 작업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극적인 생애로 인해 그는 이중섭과 함께 비운의 예술가로 알려졌다. 권진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인물조각을 상당수 제작하는데, 자소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지원의 얼굴>은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로 홍익대학교 강사 시절 장지원이라는 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권진규는 로댕이나 부르델 같은 근대적 양식의 영향을 이어받으면서 자기의 실존적 체험을 기반으로 명상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비구니>나 <여인흉상> 등 그의 다른 초상작품과 마찬가지로 목을 길게 늘여 약간 기울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특히 테라코타의 독특한 질감이나 장식이 배제된 단순한 의상은 금욕적이며,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여인의 시선에서는 고요한 침묵과 동양적 관조를 느낄 수 있다. 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48.5×34.9×29cm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13.jpg 김종영(金鍾瑛, 1915-1982)한국 추상조각의 도입과 정착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한 김종영은 1931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입학하여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과 함께 조각을 공부했다. 이미 휘문학교에서 이쾌대, 윤승욱 등과 함께 미술 선생이던 장발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던 김종영은 동료 작가들과는 달리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지 않았고, 졸업 후에도 연구과에 머물면서 작품 제작에만 몰두했다. 1943년 귀국한 후 창원에서 은둔하던 그는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조소과가 창설되자 198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 한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조각부를 창설하는 등 한국 조각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주의적인 인체조각에서 출발한 김종영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초기의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구성적이면서 공간적이고, 유기적인 생명감을 추구하는 추상조각을 시도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당시로는 드물게 철조를 이용하여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곡선의 조화를 중시하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1960년대 중반부터는 차츰 세부 묘사에 치우치지 않고 환원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생명의 내재율을 형상화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로댕 이후 현대조각을 발전시킨 브랑쿠지나 아르프의 문맥을 견지하면서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로 회귀하려는 동양 특유의 사유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작품 67-2>는 단순한 둥근 얼굴과 고요한 표정을 특징으로 하는 반추상 인체 조소작업을 해오던 김종영이 목조, 석조, 철조 등 다양한 재료를 다루면서 독자적인 미학이론을 바탕으로 추상작업을 하던 196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무를 자연스럽게 다듬어 명상에 잠긴 듯한 고요한 표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인간의 얼굴을 소재로 최소한의 형태를 제시함으로써 순수조형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앞뒤 좌우에서의 얼굴 이미지가 요약되고 단순한 선과 면에 유기적인 흐름을 담아 내고, 나무가 지닌 생명력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균형감과 단아함을 구현하고 있다. 깔끔한 표면처리와 서술적이지 않은 반추상의 얼굴로 동양적 미의식을 조화롭게 보여 주는 이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창조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한 그의 감수성과 조형감각을 엿볼 수 있다. 1967, 나무 43×22×11cm 작품 67-2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1.jpg 존 배(1937-)목사이자 항일운동가인 부친을 따라 1949년 미국으로 이주한 존 배는 28세에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가 된 이래 뉴욕에서 교육자이자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민자로서 문화적 차이와 소통의 문제에 직면한 존 배는 문화의 이질성을 수용하고 삶에 내재한 보편성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이를 추상작업을 통해 조형적으로 구현했다. 그러므로 길이 1인치 미만의 짧고 가는 철심을 무수히 반복적으로 용접하여 정교한 입체를 구성하는 그의 작업에는 우주의 원리에 순응하는 한 인간의 헌신적인 노력이 깃들어 있으며 그로 인해 작품은 재료의 물성을 극복하고 유기체와 같은 생명력을 얻는다. 1960~1970년대의 작업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조형물로서 투과성과 볼륨감의 상관관계, 그리고 빛의 투영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우주의 혼돈과 무한한 생명력을 내포한 유기적인 추상작업으로 변모한다. 과학에서 무속과 제의로 관심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9년과 1988년의 고국방문에서 합리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굽이치는 면의 형태가 돋보이는 작품 <발데모사>는 수많은 철심이 모여 예기치 못한 하나의 생명체를 탄생시킨 형상이다. 작은 못 크기의 철심을 중앙에서부터 하나씩 용접해 나갈 때, 매 순간 내려지는 작가의 작은 결정과 더불어 개입된 우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스스로 만곡한 유기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1990, 철심 용접 220×117×98 cm 발데모사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3.jpg 백남준(白南準, 1932-)일본과 독일에서 미학, 미술사를 비롯, 현대음악과 작곡을 공부한 백남준은 1957년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만난 존 케이지(John Cage), 그리고 1961년 제로 그룹 전시회에서 만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일생동안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개념과 영역을 확장하는 데 헌신해 왔다. 그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면서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전개, 엘리트주의에 물든 미술의 전통을 비판하고 음향과 이미지, 더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새로운 예술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앞장섰다. 1963년에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TV 모니터 작품을 발표하고 1965년에 새로운 매체인 비디오를 최초로 활용한 그는 비디오의 표현영역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함으로써 명실공히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자리매김했다. 현대미술과 대중 사이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백남준의 믿음은 1984년과 1986년 인공위성을 이용해 전세계가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TV 프로젝트를 실현함으로써 완성되었고 2000년 이후에는 레이저 아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나의 파우스트-자서전>은 환경, 농업, 경제학, 인구, 민족주의, 영혼, 건강, 예술, 교육, 교통, 통신, 연구와 개발, 자서전 등 현대사회의 제반 문제를 다룬 총 13점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중 한 점이다. 중세 교회의 제단처럼 건축적으로 구성된 틀 속에 12인치 모니터 26대를 설치한 이 작품은 영혼을 공유 가능한 비디오 이미지로 치환해 버린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시각화한다. 이는 파우스트로 대변되는 현대적 인간상인 동시에 작가의 매우 사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1989-1991, 혼합재료 390×192×108cm 나의 파우스트-자서전 서도호(徐道濩, 1962-)서울대학교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국제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도호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명료한 주제의식과 장인의 기교를 연상시키는 탁월한 조형감각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다. 집단주의 속에서의 자아상실과 이를 회복하기 위한 인식의 과정에 몰두하면서도 작가는 회화와 사진, 조각, 공예, 디자인, 건축을 넘나들면서 정교한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 1990년대 초부터 설문지를 통해 수집된 인상착의에 관한 정보를 컴퓨터로 조합해서 모호한 자화상을 구성한 적이 있는 작가는 1995년부터 초상사진의 범주를 익명의 집단으로 확장한 바 있다.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는 최소의 크기로 축소된 3만 7000개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으로 점무늬 벽지를 만든 뒤 <나/우리는 누구인가?>(1997)라고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3차원의 작은 전신상으로 세상을 떠받치는 발판 밑의 군중을 재현하면서 집단의 획일성에 함몰된 개인의 의미를 재고한 것이다. 제복을 통해 의복이 어떻게 정체성을 구축하는지를 탐구하던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문화적 공간을 솔기를 이용해 천으로 떠내는 작업을 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도모한다. 자신이 거주했던 집안 내부를 맞춤옷을 짓는 방식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후 다른 장소에서 전시하는 작업을 통해 그는 경계를 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고유한 문화적 공간이 얼마만큼 개인의 경험과 동행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을 위시해서 세계 유수 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작가가 10년 이상 지속해 온 <제복> 연작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5줄의 개인정보가 실린 군번표를 이어붙여 만든 의복은 군인의 신체, 그것도 수천의 신체를 상기시킨다. 반면 어둡고 텅 빈 내부는 신체의 부재를 의미하며 군번표가 기록하는 죽은 병사의 정체성과 대조를 이루어 사회제도의 모순을 드러낸다. 2001, 군번표, 혼합재료 높이 205cm, 크기 가변 Some/One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6.jpg 송영수(宋榮洙, 1930-1970)철조(鐵彫)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송영수는 1950년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여 김종영으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조각가로 입문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에 석고를 이용한 인체 소조작업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두 차례의 특선을 차지한 그는, 1956년에 당시 주변에 즐비하던 드럼통을 작두로 자르고 펴서 만든 금속판을 이용하여 철조를 최초로 제작하여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작품 <향>이 무감사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철조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1958년 바로크 조각의 종교적 열정에 감화받은 그는 ‘바로크 조각의 조류’라는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서울대학교 조각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로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환영적 주제들을 철판 용접을 이용하여 유기적 형태로 형상화함으로써 한국 철조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테라코타 작업에 몰두하는 한편,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기념비 조각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병으로 일찍 작고했다. 퍼덕이는 두 마리의 어린 새와 무섭게 생긴 공상의 새가 긴장감 있게 대립하는 장면을 동판 용접을 통해 형상화한 <대립>은 기괴한 형상과 거친 표면처리에서 생존의 긴장과 공포, 처절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처럼 실존적 고뇌를 통해 초월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의지는 작가가 이 무렵 깊이 심취한 실존적 상황의식의 발로로 여겨지며 이런 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현주의 조각예술에 접근했다. 1967, 동판 용접 114×60×34cm 대립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38.jpg 이 불(李불, 1964-)‘현대미술계의 도발적인 여전사’로 불리는 이불의 작업은 사회적, 정치적 권력구조가 어떻게 남근 중심의 시각문화를 구축하는지를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1980년대 후반에 미술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자신의 신체와 괴물 형태의 역겹고 우스꽝스런 조형물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한 작가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왜곡되고 억압되는지를 폭로하면서 모더니즘과 민중계열로 양분된 1980년대 말의 경직된 미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썩어가는 물고기나 시퀸, 풍선과 실리콘 등 과도한 장식성과 냄새, 촉감처럼 미술계에서는 생경한 재료를 활용하면서 그는 몸의 정치학과 대중문화, 테크놀로지와 미래사회, 더 나아가 엘리트 문화와 미술사 등 현대미술이 직면한 여러 이슈를 섬세하고도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이후 지속한 비디오 작업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 놀이문화로 자리잡은 노래방의 메커니즘을 도입한 것으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현대문화에 대한 작가의 비평적 시각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1997년부터 전개하는 <사이보그> 연작의 여섯 번째 번안작인 <사이보그 W6>는 완전함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인공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결합한 미래적 신체에 대한 예견이다. 환상적인 비례감을 자랑하면서도 기계처럼 절단된 신체는 일본이나 한국 만화에 등장하는 기계인간인 사이보그를 참조한 것인데, 그것은 예외없이 소녀적인 청순함과 성숙한 여인의 성적 매력, 전사로서의 강인함까지 갖춘 남성적 시선의 산물이다. 백색 대리석의 고전조각을 연상시키는 이불의 새로운 인체조각은 포스트휴먼 신체에 대한 새로운 제안인 동시에, 미래의 이상형마저도 테크놀로지를 장악한 권력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우울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2001, 알루미늄 보강제 위에 수공 폴리우레탄 패널, 폴리우레탄 코팅 232×67×67cm 사이보그 W6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48.jpg 최만린(崔滿麟, 1935-)전후 한국조각 1세대 작가인 최만린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1963년 졸업하고 1967년부터 2001년까지 모교인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해 왔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는 <이브> 연작 등 인체를 추상화한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을 거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는 상형문자인 한자의 획이라든가, 남녀 장승의 이미지, 음양의 원리 등 동양정신의 추구에 관심을 갖고 <천지>, <음양>, <일월>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2년간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연수 이후에는 한동안 철조작업 <아(雅)> 연작을 지속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는 <태>와 <0> 연작으로 순환하는 생명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동양적 사유방식으로 표현해왔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조형물>(1982)과 독립기념관의 <통일염원의 탑>(1990-1995) 등 주목할 만한 대형 환경조각, 기념조형물을 제작하여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 미술 행정에도 참여하여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이브 65-8>은 196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앵포르멜 미술경향을 대변하는 몇 안 되는 조각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머리와 팔, 다리가 생략된 채 산화한 듯 깊게 파인 몸통의 표면과 거친 마티에르에서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불안과 절망의 흔적이 강하게 엿보인다. 하지만 잘린 목 부분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상승하는 동세로 인하여 비장함과 동시에 끈질긴 원초적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1960년대 전후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듯이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딛고 좌절하지 않고 삶의 희망과 역동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 원초적인 생명의 의지는 자연과 우주의 끊임없는 생성변화와 음양의 조화 그리고 그것을 운행하는 끊임없는 순환에너지를 표현함으로써 그의 후기 작품에도 일관되게 표출되고 있다. 1965, 청동 80×35×35cm 이브 65-8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66.jpg 최종태(崔鍾泰, 1932-)최종태는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1954년에 뒤늦게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만학으로 조각을 공부했다. 1960년에 <서 있는 여인>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이후 추천작가로 작품을 출품하여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 재직했다. 주로 인체를 모티프로 삼는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은 종교적 감성의 조형적 구현과 단순한 형태미의 추구이다. 형태는 그에게 조각에 생명을 주기 위한 구도의 산물로, 고대 이집트의 벽화, 중세의 이콘, 삼국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의 영향을 찾을 수 있는 단순한 형태미에서는 단순성, 정면성, 정지성이 드러난다. 단순성은 형태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요소를 최소화하는, 즉 제거하는 방법으로 나타나며 또한 입체성을 거부하고 단순한 평면성을 강조한다. 정면성은 종교미술에서 종종 존엄성을 나타내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며, 정지성은 무표정한 얼굴에 드러난 영속의 미를 표현한 것이다. 대표작인 소녀상 연작에서는 티없이 맑고 천진한 혹은 인공과 인위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절대성을 모색하고 있다. 청동, 목재, 화강암, 대리석 등 다양한 재료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파스텔화전도 가진 바 있다. 그의 인체 모티프는 전신상, 반신상, 부분상으로 표현되는데 <얼굴>은 부분을 확대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3차원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특히 평면적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직선이 강조되었으며 세부묘사와 중간시각을 배제하는 엄격성을 유지하고 있다. 1987, 오석 112×107×20cm 얼굴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69.jpg *한국사진영상 구본창(具本昌, 1953-)구본창은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작품활동으로 한국 사진계의 변화와 논쟁을 주도한 사진가이다. 1980년대 중반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에서 사진을 수학하고 돌아온 구본창은 <사진 새시좌전>(1989, 워커힐미술관)을 기획하고, 이 전시를 통해 새로운 경향의 사진을 선보였다. 사진에 스크래치를 내거나 화학적인 작용을 가하고, 오리고, 붙이고, 실로 꿰매는 등 전통적인 사진 형식을 파괴한 구본창의 파격성은 스트레이트 사진이 주도하던 한국 사진계에 논쟁을 촉발했다. 이는 현대 사진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술과 사진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삶과 죽음, 내면의 번민과 욕망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긴 오후의 미행>, <태초에>, <굿바이 파라다이스>, <숨>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1994년 제작된 구본창의 <태초에> 연작 중 6번 작품이다. <태초에> 연작은 작은 흑백 인화지 여러 장을 재봉틀로 박고 이어붙여 그 위에 인화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작가는 삶과 죽음, 욕망에 대해 숙고 함으로써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태초'로 거슬러 올라갔다. 불규칙적으로 붙여지고 겹쳐진 인화지들은 삶의 무게를 암시하며, 신체를 가로지르는 바늘자국은 삶의 상처를 은유한다. 또한 작품 위에 어지럽게 놓인 실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삶의 순환과 인연을 연상케 한다.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담은 <태초에> 연작은 한국 현대 사진의 표현영역을 확장하였다고 평가된다. 1994, 젤라틴 실버 프린트, 면사 137×93 태초에 6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05.jpg 김수자(金守子, 1957-)1990년대 중반이후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김수자는 전통적으로 여인의 일상적인 매체와 행위로 간주되는 천과 바느질을 삶과 사회를 포용하는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이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1980년대 초반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다가 천을 새로운 매체로 자각하면서 천에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바느질 행위에서 당시 미술계가 천착한 ‘평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후 10여 년간 천을 이용한 콜라주 작업과 전통적인 일상기물과 천을 결합한 <연역적 오브제> 연작을 거쳐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보따리 작업에 착수한다. 천으로 헌 옷을 단순히 묶는 행위를 통해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전환되는 보따리는 재료가 내포하는 수많은 연금술적인 의미-삶 또는 죽음을 상기시키는 헌 옷과 기원 또는 욕망과 연결되는 이불 천의 문양-외에도 그것이 위치하는 맥락에 따라 신체, 성정체성, 일상의 신화, 유목주의 등의 갈래로 확장되는 유연한 개념체로서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다양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1997년 트럭에 보따리를 가득 싣고 11일간 전국을 일주한 퍼포먼스 비디오 <떠도는 도시-2727km 보따리 트럭>을 기점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베니스 비엔날레 등 세계무대에 진출하면서 이동과 유목이라는 세기말적 정서를 독특한 형식으로 구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늘여인>은 낯선 이국의 거리 한 가운데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선 작가가 행인들의 다양한 반응을 그대로 수용한 비디오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보이지 않는 바늘로 상정하면서 파편화된 인간세상을 잇고 감싸 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을 ‘무’의 상태로 소거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1999-2000, 4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크기 가변 http://www.leeum.org/upload/museum/Ms009.jpg Yuhki Kuramoto - Emerald La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