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가 맞춰 놓았다는 웨딩드레스는 우아한
느낌을 주는 순백색이었다. 유럽풍의 퍼지는 드레스가 아닌 그리스 여신처럼 흘러내리는
듯한 드레스로 신부를 아주 청순하게 보이도록 했다.
이 드레스의 디자이너는 그녀의 긴 생머리에 영감을 받아 만든 드레스라며 붉은빛
도는 그녀의 웨이브진 머리를 보며 신음을 연발했지만 이내 한가닥으로 굵게 땋아 내려
꽃으로 장식해 청순함 보다는 섹쉬한 신부로 바꾸어 놓았다.
"네 어머니를 무척이나 닮았구나."
신부입장을 기다리며 서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며 이사장이 말했다.
무언가 그리움이 깃든 목소리였기에 세화는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 때 신부입장을 알리는 음악이 들렸고 이사장은 세화의 팔을 자신의 팔에 끼우고
그녀를 신랑에게 인도했다.
저만큼 형진이 보인다. 까만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의 눈빛이 그녀에게서
떨어질줄을 몰랐다.
자기를 사랑한다고...하는 사내였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내라고 한다.
곧 그녀를 건네받은 그의 손이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굳은 결의를 보이고 있었다.
세화는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을 주시하고 있었다.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가지자는 그의
주장에 따라 신혼여행은 그의 별장으로 왔다.
전체가 통나무로 되어있어 집 안 구석구석 풍기는 나무향이 좋았다.
거실 한 켠에 있는 벽난로 또한 따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전에도 와 봤던 곳이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누가 가르켜 준것도
아닌데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인다.
언제나 완벽하게 흐트러짐이 없던 그의 모습이 금방 샤워한 탓인지 조금 느슨해져 있는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는 흐트러져 이마를 살짝 가리고, 하얀 셔츠는 단추가 서너개 풀어져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의 반짝임이 보인다.
그녀를 향해 다가올수록 상큼한 비누냄새가 풍겨와 그녀를 자극했다.
"뭐 먹을래? 너 닭요리 좋아하쟎아...닭요리 할까? 닭도리탕 하자! 그럴까? 닭도리탕 해서
밥 비벼먹자."
"아무거나...당신이 해요. 난 할 줄 아는거 없으니까."
그녀의 관심없다는 듯한 말에 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부엌으로 끌었다.
그리고는 식당의자에 그녀를 앚히고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거기 앞치마좀 줄래?"
세화는 뻥한 표정으로 식탁위에 있는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내밀었다.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앞치마를 걸치고 재료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당신...요리나 할 줄 아는거예요?"
그녀의 못미더워 하는 말투에 형진은 세화에게 다가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전혀 할 줄 몰라."
그리고는 황당해 하는 그녀의 이마에 소리나게 입을 맞추며 다시 조리대로 향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보면서 코치하라니까."
"난..요리할줄 모른다니까...형진씨!"
조각난 닭을 솥에 담으려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그녀가 새된 소리를 냈다.
"도대체 씻지도 않고 솥에 넣어서 뭘 어쩌자구...제대로 할 줄 아는것도 없으면서
집적대긴 왜 집적대."
세화가 투덜대면서 물을 틀어 닭을 씻기 시작했다.
이마는 잔뜩 찌푸린체...
자신이 그녀를 도운답시고 부엌으로 갔을때마다 어김없이 벌어지곤 하던 익숙한
풍경에 형진은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예전처럼 형진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오늘은 내가 한다니까..니가 하는것 많이 봐서 할 수 있다니까."
"보는거랑 하는거랑 어디 같아요? 나도 파주댁 아줌마한테 핀잔 먹으면서 배운건데.."
쫑알거리던 그녀의 음성이 낮아지며 온몸이 딱딱이 굳어졌다.
형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위에 자신의 턱을 올렸다.
"파주댁이 누구예요?"
"일주일에 두번씩 오는 가정부...네 요리선생이기도 하구."
"내가 요리를 배웠어요?"
"...응..너..요리 하는거 좋아했어."
"믿을수가 없군..."
그녀는 딱딱하게 몸을 틀어 그의 포옹을 풀었다. 그는 거부당한 허탈함에 그녀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내가 할까?"
"당신 맡겼다간 굶을것 같은데요. 할 수 있을것 같으니까 당신은 앉아 계세요."
세화는 그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요리에만 열중했고, 형진은 할 일없이 그런 세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어색함이 답답해 질 쯤 그녀가 요리를 끝내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다.
"...참...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데 손이 제멋대로 가는 기분 알아요?"
자신이 하고도 신기하다는 듯 세화는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형진은
그런 그녀를 식탁에 앚히며 수저를 앞에다 놓아 주었다.
"맛은 내가 보증하지...많이 먹어."
형진의 말에 어이없어 하며 세화는 픽 웃음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형진이 뒷정리를 하며 그녀를 거실로 내몰았다.
그녀의 손에 커피잔을 쥐어주고...
세화는 벽난로 앞 쇼파에 몸을 묻으며, 아주 오래만에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그가 자신을 위해 해주는 행동들에 차츰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녀를 배려하는 모든 행동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모든 감정이 두려웠다.
특히, 그와 스킨쉽이 반복될때 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예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기억들이 신기루 처럼 지나쳐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다.
벽난로 안에서 따뜻함을 풍기며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 옆에 형진이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품안으로 끌어 당겼지만 세화는 온몸에 힘을 잔뜩 넣은체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형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릿결을 손으로 빗어내렸다.
단지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일 뿐인데 그녀는 손끝, 발끝까지 짜릿한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신경이 그의 손가락 끝으로 몰리는 느낌이었다.
"제 기억의 끝은 제가 오토바이를 타다 구른거예요. 당신이 구해 주신건가요?"
형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요. 생명의 은인이니..."
"아니...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당신을 만나게 될 계기가 됐으니까"
"....."
그녀는 고집스럽게 벽난로만 주시하고 있었다. 형진은 언제쯤이면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만 바라볼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렸다.
영원히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어떡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토바이는 언제부터 탄거야?"
"고등학교때부터...속도를 느낄수 있는게 좋아서요."
"그래도 빗길에 속력을 내는건 위험하쟎아."
그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마를 찌푸렸다.
"옆에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제 차선으로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위험하지 않았어요."
"오토바이는 위험한 물건이야. 앞으론 타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의 걱정하는 말투에 묘한 만족감을 느끼는 그녀 자신이 싫어 세화는 더 딱딱한
표정으로 불꽃만 바라보았다.
"3년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은지 가르켜 주실래요? 세화가 아닌 미연이란 여자가
어땠는지요..."
"넌...."
형진은 세화의 머리결을 만지던 손을 걷어 들이며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벽난로를
쳐다보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웃는 네 얼굴이 있었어. 아무말 없이 잠들어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지..... 아니면 키스로 날 깨우곤 했지. 그리고는 실험용
음식으로 아침상을 거하게 차려놓고는 다먹지 않으면 출근 시키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고는 했어. 내가 그 음식 먹고 배탈이 났던 적도 있었다는거 알어?"
형진의 눈빛에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나자 세화는 그가 말하는 여자가 괜히 부러워 졌다.
남자로 하여금 저런 눈빛을 지을수 있게 하는 여자가.....
그녀는 지금 그녀 자신으에게 샘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자기 자신은 너무 생소했다. 인정되지가 않았다.
"음...대단한 독서광이었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 나랑 등산도 몇 번 갔었는데...
전혀 뒤쳐지지도 내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어."
"학교 다닐때....산악클럽에 있었어요."
그가 세화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그녀를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었다.
이번에는 세화도 거부없이 그의 품에 자신의 등을 대고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밤이 늦었다...그만 자자.."
형진의 낮게 잠긴듯한 목소리에 세화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힐끔 내려보는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형진은 자신과의 잠자리를 무슨 전투라도 되는듯 생각하는 그녀의 표정에 상처를 받았다.
그가 그녀를 따라 일어나자 그녀가 이를 악 무는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침실로 향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방 한쪽을 다 차지하고 있는 넓은 더블침대를 바라보던 세화는 그에게 등을 돌린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벌써 삼년동안이나 매일 해오던 짓이라지 않는가....
특이할것도 특별할것도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된다...라고 생각했지만 단추를
푸는 그녀의 손이 자꾸 떨려오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내가 할께."
그가 그녀를 돌려세우고 언제나 해오던 일인것 처럼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그녀의
바지 버클까지 풀어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옷장서랍을 열어 잠옷을 꺼내 입히기 시작했다.
"이거 다시 벗을건데 굳이 입을 필요가 있나요?"
그가 부지런히 단추를 채우고 있는 잠옷을 보며 그녀가 빤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빛이 씁쓸함을 띄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네가 의무감에 나에게 안기길 원하지 않아....언젠가 준비가 되면.. 진심으로 나에게
안길수 있을때...그 때 말해 주겠니?"
혼란스러운듯 자신을 쳐다보는 세화를 살며시 안아들고 침대에 누이고 자신도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잠옷이라고 해봤자 엉덩이 골반위에 걸친 파자마 바지가 전부였지만....
그리고 그녀 옆에 누워 이불을 올렸다.
"잘자라..."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볼에 살짝 입술을 대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