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제1부 폭풍전야
제2장 신군부부상
4. 전두환과 합수부(하)
도청에 검열관배치 '조직적 언론탄압'
합수부, 군.경.정보부 완전거머 쥐어
보안대 연일심야회의 광주상황 점검
전국언론이 7백17명 강제해직...광주지역 언론사 [자유실천]속속 결의문 채택
10.26으로 자연스럽게 부상한 정치현안은 개헌문제다. 79년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유신헌법폐지, 새헌법제정을 약속한다.
이어 10.26직전인 총재제명으로 등원을 거부해온 신민당의원들이 개선장군처럼 여의도의사당에 등원 , 11월 15일 제10대국회는 103회정기회개원(9월 20일) 56일만에 여야가 함께 참석한 본회의를 갖고 개헌논의를 본격화시킨다.
과도기정부와 정치권이 개헌논의를 가속화 시키면서 국내외정세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정상을 회복해간다.
이즈음 군부내에서는 두그룹간에 심각한 불화가 벌어져 보이지않는 암투가 계속되면서 국내정세에 일말의 불안감을 던져준다.
12월 9일 정승화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은 노재현국방장관을 만나 중대한(?)건의를 한다.
정씨의 지난 88년 11월 30일 국회 광주특위 제13차 회의 청문회증언.
[전두환합수부장이 너무 월권을 많이 해서...몇 번 주의를 해도 안되겠으니 바꾸어야 겠습니다.]
노국방작관은 [그 사람이 김재규수사를 맡고 있으니만큼 보직이동을 시키더라도 1심공판이 마무리되는 12월 15일 이후에 하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나 반발을 없앨 수 있지않을까요]하고 시기를 늦추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두사람은 이날 전사령관의 경질을 기정사실화하는데 있어서만큼은 합의한다.
이에앞서 정총장은 유신체제 폐기를 전제로 권력주변에서 각종 수혜를 받은 정치장교들을 배제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성이 적은 장성들을 수도권주요부대에 배치하는 지휘체계개편을 단행한다.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중장(3군단장)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육본교육참모부장) 특전사령관 정병인소장(유임) 그리고 수경사령관 김성 소장의 3군단장 임명등이 이때 단행된다.
하나회 주축의 권력장교들은 이로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되는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방안은 두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총장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의 체제속에서 제한된 기득권을 보장받거나 정총장의 공식지휘체계를 힘으로 뒤엎어 스스로 군분의 주인이 돼 새로운 정치권를 무력으로 창출하는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안전하지만 불만족스러웠고 후자는 위험하지만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나 전합수부장은 결국 후자를 선택한다.
정총장이 노국방을 만나 경질을 건의하기 하루전인 12월 8일 전합수부장은 육사11기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멤버인 9사단장 노태우소장을 보안사로 초청한다. 허화평비서실장(대령. 육사11기)을 시켜 김재규수사 상황을 브리핑시킨 그는 정총장의 체포불가피를 역설하고 협조를 구한다.
12.12직전 정총장과 전사령관이 서로를 제거하기위해 국방부장관과 동기생을 각각 끌어들인 내막은 무엇일까.
국군보안사령부는 국방부 직속기관으로 평시에는 육군본부의 지휘권밖에 놓여있는 정보기관이다.
그러나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사령관은 평소와 달리 정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처지에 놓인다.
보안사령관으로서는 육본의 지휘를 받지않지만 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음으로써 정승화대장의 휘하에 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업무성격상 중앙 정보부와 함께 국내외의 고급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또한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기관이다.
이 때문에 보안사령관은 육본의 공식지휘 계통을 벗어나 독자적인 권한 및 활동영역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비상정치상황하에서 정총장은 따라서 가능한 전소장을 자기의 지도력으로 커버하거나 최소한 육군의 공식지휘계통을 맞설 수 없도록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의 노력은 결국 이같은 파워게임에 종지부를 찍는 12.12사태로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군부의 두 그룹간에 벌어진 파워게임에서 승리해 군권을 잡고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한 신군부의 음모는 이듬해 5.17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로 마침내 노골화된다.
이무렵 전남지구합동수단이 설치된 광주 505보안대에는 난데없이 육본제3CID(범죄수사단)소속 수사요원들이 내려와 계엄하 시국사범 수사를 전담하기 시작한다.
광주에서 대학살참극에 대한 사전시나리오설과 관련, 육본에서 파견나온 범죄 수사단 요원들의 파견시점과 그들의 역할은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져준다.
그들은 광주에 언제, 왜 내려왔으며 보안대에서 어떠한 일들을 한것일까?
5.17직전 이른바 [예비검속]에 걸려 자택에서 보안대로 연행된 정동년씨(당시 37. 전남대복학생협의회의장)의 증언.
[육본제3CID소속이라고 신분을 밝힌 준위1명 상사2명이 보안대 지하실에서 전문적으로 나를 고문했습니다. 그들은 505보안대 서인환대공과장(중령)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듯 했으나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고문만을 전담한 것으로 보아 뭔가 큰일을 저지르려고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짐작은 적중해 연행 다음날부터 5.18광주민중항재이 터지고 사태가 마무리될 때 까지 육본범죄수사단요원들은 지역합수단에서 상주하며 전문적인 고문기술자로서 맹활약을 한다.
80년 7월 5일부터 15일간 전남대.조선대 교수들 기타 수많은 항쟁참여자들과 함께 합수단에 끌려가 이들을 대면한 김동원교수(전남대 사학)와 이상 교수의 얘기.
[그들의 고문은 솔직한 (?) 폭력이었다. 지하실 독방에서 옷을 벗긴채 몽둥이로 두들겨 패대가 싫증나면 두발과 두손을 한꺼번에 묶어 테이블사이에 걸어놓는 속칭 통닭말이를 해놓고 온갖 욕설과 함께 발길질.몽둥이질이 반복됐다. 그러고 나면 경찰관이 들어와 조서작성을 시작했다.]
합수단이 설치된 보안대를 나치의 게슈타포에 비견하는 김교수는 [전시에 포로수용소의 포로들도 그같은 대접을 받진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계속되는 김교수의 증언.
[서중령 방에 가면 광주사태에 대한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다. 김대중의 내란음모하에 이를 실행에 옮긴 교수.학생.재야인사들의 이름이 도표로 정리돼 있었던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의 각본에다 잡아들인 인사들을 거기에 일방적으로 꿰맞추는식의 수사가 진행된 것이다.
보안대에서는 또 매일밤 심야회의(합수단회의 지칭)가 2층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연행자들의 군법회의 기소여부등이 즉석에서 결정된 것으로 안다.]
당시 합수단심야회의 참석자들은 505부안부대장겸 전남지구합수단장 이재우대령, 군검찰관 서모씨, 광주경찰서 및 서광주(현 광주서부)경찰서장, 그리고 수사지원을 위해 광주지검에서 파견나온 몇몇 검사들.
권력의 공백기에 합수부의 파워를 등에 업은 신군부의 전위부대 보안사는 이처럼 지역에서도 정부 조직법상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합지휘, 무소불위의 권부로 둔갑한다. 애초에 대통령시해사건 수사를 위해 발족한 합수부는 지역보안대에까지 합수단을 조직, 이처럼 모든 시국사범수사에도 관여한 것은 물론 언론장악에서도 그 괴력을 발휘한다.
전사령관은 80년초 4월 정식발족한 보안사 언론대책반은 이해 7월중순부터 8월초에 걸쳐 중앙과 지방언론인 7백 17명을 강제로 해직하고 모두 1백 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하는 미증유의 현대판 분서갱유를 주도한다.
대책반은 80년 3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대령)의 지시로 정보2과의 언론담당 업무를 이관받아 이상 준위를 팀장에 앉히면서 본격가동된다.
대책반 가동당시점은 이미 10.26직후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포고령 제1호의 내용에 [보도검열]지침이 포함돼 사전검열이 6개월째 행해져왔기 때문에 언론대탄압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
이에 맞서 언론계내부에서는 중앙에서 뿐만아니라 지방에서도 만만치 않은 반발움직이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80년 5월 13일 오전 9시 광주시 동구 광산동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2층 편집국에서는 언론검열에 맞서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결의 대회가 치러진다.
이날 편집국에서는 양창렬차장(전매언론투쟁위원장) 박화강기자(투쟁위간사) 등 40여명의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주의와 언론수호를 부르짖으며 4개항의 결의문을 낭독한다.
이어 전남일보.전일방송에서도 15일 역시 전일방송소속의 윤효춘투쟁위원장과 나의갑기자를 투쟁위간사로 내세우고 비상계엄해제요구 등 5개항의 [자유언론 실천을 위한 우리의 자세]를 결의한다.
KBS.MBC.CBS등 방송기자 30여명도 16일 가톨릭센터에서 결의대회를 갖는등 신군부와 일전불사 채비를 갖춘다.
지역언론계에서 잇따른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일어난 계엄하 언론검열의 실상을 보자.
광주의 경우 전남도청 2층에 언론검열관실이 10.26직후부터 설치된다.
검열관실에는 국군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속칭 상무대)와 31사단에에서 정훈장교 4-5명이 상주하며 지방신문의 모든 기사와 방송의 로컬뉴스에 대해 사전검열을 실시한다. 이같은 사전검열은 보안사의 언론대책반이 가동되는 80년 4월부터 505보안대 박기정상사가 팀장을 맡으면서 강화돼 갖가지 웃지못할 희.비극을 연출한다.
한 중견언론인의 얘기.
[당시 언론검열하에서 개헌논의.시국사범석방과 같은 정치용어들이 [정치의제]라는 희한한 용어로만 표현됐는가 하면 김대중씨의 경우 네모사진을 쓰지못도록 통제했다.
한번은 전남일보에서 김대중씨 사진의 네모퉁이를 둥글게 잘라 검열관에게 제출, 검열지침을 피해나가려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원형사진, 즉 얼굴사진은 써도 되지만 네모사진은 통제함으로써 그의 정치활동 내용을 막고자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수준의 언론통제가 계속됐다.]
검열거부 및 자유언론실천결의 등의 저항의지는 그러나 5.18에 이은 강제해직, 언론통폐합조치등 군부의 무력앞에 속수무책으로 비상계엄이 해제될때까지 시국사건처리, 고문, 언론탄압등 온갖 악역을 도맡아 처리하며, 5공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된다.
<홍지영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