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받지 못한 예수님
누가복음 4:14-30)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40일간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려 오신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마귀의 시험에 넘어 갔던 것을 대신 이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시니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나 승리하신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 또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오신 주님께서 여러 회당에 다니시며 가르치시니 모든 사람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나사렛에 이르렀습니다.
1.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시작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4:14-15)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14절). 누가는 철저하게 성령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시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바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합니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 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 반응들(22,28,32,36,42절) 중에서 우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마 4:12; 막 1:14).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15절). 누가는 여기서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31,32절; 마 7:28,29).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28,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 9:35; 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33; 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21; 마 21:31) 등으로 요약됩니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 등을 위시한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4:16-21)
예수님께서 그 자라신 곳 나사렛에 이르시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16절).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합니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합니다. 그 다음 '쉐마'(신 6:4-9; 11:13-21)를 고백하고 열여덟 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합니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습니다. 성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됩니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습니다(W.Schrage, TDNT VII, 798-841).
예수님은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납니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율법의 자귀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입니다.
회당의 맡은 자는 예수님께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었습니다(17절). 누가는 예수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님이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합니다.
예수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18절) 예수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신 18:15,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합니다(6:20,21; 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입니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킵니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19절) 레 25:8-55에 나타나는 '희년'(year of j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합니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입니다.
읽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습니다(20절).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합니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됩니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입니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오늘날'을(21절)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의 반응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4:22-27)
그들이 그를 증거하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합니다(22절).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서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님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납니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갑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말은(23절) 본래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기간 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습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레고 휘민)라는 말은(24절)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 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습니다(12:37; 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 엡 3:21; 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처럼 예수님이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25절)라는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줍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Lenski).
엘리야가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보냄받은 이야기는(26절)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습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 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합니다(막 7:26-30).
엘리사 때에 나병에서 치유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는(27절) 왕하 5:14의 내용입니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만이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님은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마 8:11; 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습니다(사 43:5,6; 49:12; 59:19; 말 1:11; 미 4:1,2; 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합니다(7:1-10).
4. 예수님을 배척한 청중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4:28-30)
회당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화가 났습니다(28절). 예수님의 말씀이 선민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합니다.
화가 난 청중들은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29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됩니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30절). 아직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합니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합니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됩니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님이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적용: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환영했지만, 오히려 회당에서 예수님이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통해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뜨리려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정작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시며 그 말씀이 실현된다고 할 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했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배척한 나사렛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도 귀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삶은 일상 속에서 작은 순종을 통해 가능합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하루 종일 품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쓸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새로워지며 주님의 말씀에 더 깊이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날마다 성경을 더 깊이 묵상하고, 성령께 의지하며 묵상한 말씀들을 하나씩 순종해 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님(롬 8:26)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