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2위에 해당하는 3,308경기, AL최초의 400홈런-3,000안타달성, 마지막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선수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이룩해 놓았지만, Carl Yastrzemski 는 데뷔초기에는 많은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보스턴이 탄생시킨 최고의 영웅인 Ted Williams의 자리를 이어야 한다는 그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팬웨이 파크를 찾는 팬들의 기대를 흡족시켜줘야 했기 때문이다.
데뷔 첫해 11홈런, 80타점으로 신인치고는 좋은 성적을 올려주었지만, Ted가 20살에 기록한 데뷔성적 31홈런, 145타점과 비교해서는 너무 초라한 성적임은 분명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로 "제 2의 Ted"라는 별명을 떨쳐 버릴 수는 있었지만, Yaz(애칭)는 분명 데뷔초기 다른 신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져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폴란드 이주민 집안이었던 그의 아버지 역시 청년시절 주목받는 야구선수이기도 했지만,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취업전선에 뛰어들며 자신의 아들이 그 못다한 꿈을 실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Yaz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보다는 농구에서 더 크게 두각을 나타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을 갖고 1950년대 중반부터 프로팀에 노크를 하기 시작하였다. 양키스와 여러 팀에서 고등학교 시절 노히트 경기도 펼친 그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추파를 던졌지만, 계약금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그는 대학진학이라는 방법으로 많은 팀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대학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못지 않은 활약을 보인 이후 그는 자신에게 가장 최고의 대우를 보장한 보스턴과 입단계약을 맺게 되었고, 1961년부터는 그린 몬스터앞에 항상 서있던 Ted의 좌익수자리를 승계하게 된다.
팀성적과 관계없이 꾸준히 파워와 정교함에서 향상된 모습을 보인 그는 데뷔 3년째가 되던 1963년부 올스타전에 첫 출전하는 활약을 보인끝에 그해 타율.321의 성적으로 리그 타격왕을 거머쥐어 보스턴팬들의 기대를 마침내 충족시켰으며, 65년에는 20홈런, 첫+5할의 장타율로 타율에서뿐만 아니라 장타력에서도 팀의 리더로서 보여주어야 할 성적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1946년 월드시리즈우승이후 계속 하향세를 그린 보스턴은 1965년에는 무려 100패를 기록하며 잦은 감독교체등 어수선한 팀분위기로 1967년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Dick Williams라는 30대 감독이 부임하여 경험미숙의 감독에게 팀을 맡겼다는 많은 우려도 있었지만, Williams감독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팀을 이끌어 전년도 9위였던 팀을 리그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활약을 보였고, Yaz역시 팀분위기가 상승하자 개인성적에서도 급성장을 한 끝에 44홈런, 121타점, 타율.326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홈런에서 비록 미네소타의 Harmon Killebrew와 타이를 이루긴 했지만, 9월 마지막 12경기에서 44타수 23안타의 타율.523, 5홈런, 14득점, 15타점의 맹위를 떨쳐 시즌 종료까지 한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치열한 우승레이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보스턴의 영웅으로 떠 올랐다. Bob Gibson이 이끄는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4할타율과 3홈런, 5타점으로 팀의 우승과 관계없이 크게 활약했던 그는 그해 리그 MVP를 수상하여 27살이 되었던 1967년을 그 어떤 선수보다 화려하게 마감하였다.
Denny McLain을 필두로 리그에서 1점대 방어율의 투수가 4명이나 나오며 투고타저 극에 달했던 1968년.. NL에서는 Pete Rose를 포함한 5명만이 +3할타율을 기록하였고, AL에서는 오로지 Yaz만이 타율.301을 기록함으로써 리그의 유일한 3할타자라는 감투로 세번째 타격왕을 차지하게 된다. 역대 단일 시즌 최저타율을 기록하고 타격왕에 오르긴 했지만, 그의 타율은 당시 상황이 투수들이 활개쳤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과거의 4할대의 타율이나 다름없는 기록이었다.
69,70년 각각 40홈런과 +100타점의 공격력으로 30대로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한 파워를 과시하였고, 75년 챔피언쉽에서는 3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리그 최강팀 A"s를 상대로 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67년에 이어 8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레즈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3할타율과 4타점으로 팀공격의 핵으로써 활약하였다.
Ted와는 달리 잔부상없이 매시즌 평균 +150경기에 출전했던 그는 수비에서도 정확한 송구력으로 총 6차례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수비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고, 1979년 7월 24일에는 A"s의 Mike Morgan(現 애리조나 투수)으로부터 통산 400홈런을, 9월 12일에는 양키스의 Jim Beattie을 상대로 3,000안타를 기록함으로써 AL에서는 최초로, ML 전체에서는 Stan Musial, Willie Mays에 이어 역대 3번째로 400홈런-3,000안타클럽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았다.
41살이 되던 1981년, 91경기에만 출전하여 데뷔 첫 100경기 미만의 출장경기수를 기록한 이후 1983년 10홈런, 56타점의 성적을 마지막으로 올스타 18회등의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였다. 선수로서 그라운드를 떠났지만, 매시즌 보스턴의 타격 인스트럭터로서 스프링 캠프에 모습을 나타내 후배선수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타격기량을 하나하나 전수해주고 있는 그는 23년간의 메이저리그 선수시절동안 총 3,308경기, 11,988타수, 1,816득점, 3,419안타, 1,844타점등 많은 공격부문에서 팀 프랜차이즈 기록을 달성하였고, 자신의 스승이나 다름없던 Ted의 곁에 자신의 유니폼번호가 영구결번("8") 되는 영광을 안았으며, 1989년 94.63%의 높은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1967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는 Carl Yastrzemski는 저주의 팀 레드삭스를 자신의 팀으로 선택한 것이 후일 불운의 월드시리즈를 맞이하게 될 운명의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Williams만큼이나 출중한 능력을 보유했던 Yastrzemski이지만 그도 역시 레드삭스의 불운을 넘어 설수는 없었다. Yastrzemski는 1967년과 1975년의 두 번의 월드시리즈 동안 .352라는 높은 타율을 올리며 분투했지만, 결국 레드삭스는 카디널스와 신시내티 레즈에게 똑같이 3승 4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다.
칼 야스트렘스키 (Carl Yastrzemski)
본명 :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Carl Michael Yastrzemski)
1939년 4월 11일 뉴욕 주 사우샘턴에서 출생
1961 ~ 1983년 보스턴 레드삭스
통산 성적 : 타율 .285, 출루율 .379, 장타율 .462, 452홈런, 3419안타, 1844타점
1961시즌을 앞두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폴란드인의 피를 물려받은 22세의 신인 한 명에게 영광스러운 동시에 너무나 부담스러운 임무를 맡겨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레드삭스의 주전 좌익수'라는 위치는, 보스턴 야구의 실로 거대한 '상징'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그를 왜소해 보이게 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고 있었다.
그 둘 중 하나는 '그린 몬스터(The Green Monster)'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테디 볼게임(Teddy Ballgame)'이었다.
테드 윌리엄스의 후계자. 과연 이보다 더 크게 중압감을 주는 칭호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임무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 '신이 야구에 내려 준 선물' 등의 찬사에 너무나 익숙했던 인물의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보스턴 팬들은 그가 훗날 '제 2의 테드 윌리엄스'라 불릴 만한 또 하나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그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 그는 과연 또 하나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수식어는 '제 2의 테드 윌리엄스'가 아니었다. 한때 윌리엄스의 이름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이름인 '칼 야스트렘스키' 자체가 팬들에게 '레드삭스'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야즈(Yaz)'처럼 오랫동안 레드삭스를 지킬 선수가 또다시 출현할 것인가? 그는 피트 로즈를 제외한 역대 메이저리거들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레드삭스 역사상 안타, 득점, 토털베이스(총루타수), 타점 부문 최고기록 보유자라는 타이틀과 3000안타 - 400홈런 클럽 멤버십은 그토록 길었던 커리어의 부산물이다.
그가 아메리칸리그에서 활약하던 중에 이 '주니어서킷'에서 MVP가 된 선수 중에는 미키 맨틀도, 칼 립켄 주니어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빅리그 데뷔전 소식은 유리 가가린이 역사상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는 뉴스와 동시에 신문에 올랐고, 그가 유니폼을 벗었을 때는 마이클 잭슨이 가장 유명한 연예인으로 부상한 뒤였다.
어쩌면 그토록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그에게는 보람이기에 앞서 고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윌리엄스가 '지구상에서 인구당 신문 수가 가장 많을 듯한 곳'이라 불렀던 보스턴에서 빅리그 커리어 전부를 보냈고, 윌리엄스를 항상 괴롭혔던 보스턴 언론은 야스트렘스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리고 극성스러운 보스턴 팬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엄청난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처음에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제 2의 윌리엄스'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 2의 1967시즌'이 새로운 요구사항으로 등장하였다.
실현될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 그것은 레드삭스의 1967시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 시즌은 레드삭스 역사의 일부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신화였다. 그리고 야스트렘스키는 그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1967시즌이라는 이름의 신화를 완성하고 난 뒤의 야스트렘스키는, 마치 너무나 훌륭한 필생의 역작을 발표한 뒤의 예술가처럼 하나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시즌 후에도 그는 분명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였지만, 그러한 '걸작'을 다시 만들어내리라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퇴장이 다가오고 그가 1967시즌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그 시즌은 비로소 그에게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닌 '찬란한 업적'이 되었다. 어쩌면 보스턴 팬들은 그에게 걸었던 크나큰 기대를 버린 뒤에야 그가 보스턴의 영웅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 주니어는 1939년 8월 22일, 뉴욕 주 롱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사우샘턴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폴란드계 이주민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와 어머니 해티도 마찬가지였다.
소년 칼은 감자 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농장 일만을 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니어'가 일찍부터 야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의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는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선수였으며,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대공황 시대였기 때문에 좀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던 그는, 결국 농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과 처가 쪽 사람들을 모아 '화이트이글스(White Eagles)'라는 아마추어 팀을 만들었고, 그 팀에서 직접 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소년 칼은 어릴 때부터 이 화이트이글스에서 배트보이 역할을 하며, 자연스럽게 야구라는 스포츠에 익숙해졌다. 또한 좀더 성장한 뒤에는 리틀리그의 브리지햄턴 라이언스에서 유격수와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주니어'가 성인들과 함께 경기에 나설 만큼 성장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화이트이글스에 입단시켰다. 그러나 당시 그의 친척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든 상태였기 때문에, 이 팀은 곧 해체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지역 세미프로 팀에 데려가 함께 입단하였다. 세미프로리그에서 이 부자(父子)는 내야수로서 뛰어난 수비력을 과시하여 이목을 끌었다.
소년 칼은 브리지햄턴고교에 입학한 직후에는 미식축구와 농구 등을 야구와 병행하기도 했으나, 부상을 우려한 그의 아버지는 미식축구만큼은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은 농구에서는 계속 두각을 나타냈고, 군(County)내 고교농구 시즌 득점 기록 보유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장래가 걸린 종목은 역시 야구였다. 그는 투수로서 명성을 날렸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그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졸업 직전 열린 1957년 군내 고교 토너먼트에서는, 준결승에서 벨퍼트 팀을 상대로 16탈삼진을 뽑아낸 데에 이어 결승에서 센터 모리치스 팀을 맞이하여 노히트게임을 기록하였다.
물론 그는 타자로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졸업반 시절 .650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스윙 스피드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1957년, 야스트렘스키는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팀인 뉴욕 양키스의 트라이아웃에 임하기 위하여 아버지와 함께 양키 스타디움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트라이아웃에서 그는 경이적인 장타력을 선보여 팀 관계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양키스의 단장 래리 맥페일은 그 자리에서 4만 달러의 입단 보너스를 제시하였다. 당시까지 양키스는 어느 고졸 선수에게도 그러한 액수의 보너스를 지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려면 10만 달러 이상을 내놓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며칠 뒤, 양키스의 스카우트 레이 갈런드가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를 설득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시니어'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6만 달러라는 제시액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결국 갈런드는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교섭이 결렬되자, '주니어'는 일단 대학에 입학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는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 쪽에서도 여러 대학으로부터 장학생으로 입학하라는 제의를 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두 종목을 병행하는 조건으로 노트러데임대학에 몸담게 되었다.
1958년 초, 이 해부터 캘리포니아 주를 연고지로 삼게 된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야스트렘스키 부자(父子)에게 다시 접근해 왔다. 그러나 '시니어'는 아들이 지나치게 집에서 먼 곳에서 활동하는 것은 원하치 않았다.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더욱 적극적이었고 트라이아웃 뒤 '이 선수를 오늘 바로 빅리그 경기에 투입하겠다.' 라며 9만 5천 달러를 제시하기까지 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1958년 가을이 되자, 선택 대상이 될 수 있는 구단은 3개로 압축되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신시내티 레즈,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결국 부자(父子)는 레드삭스를 선택하였다. 보스턴이 상대적으로 집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레드삭스의 구단주 탐 요키는 자기 팀 선수들을 아끼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레드삭스는 10만 8천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칼 야스트렘스키 주니어를 영입하였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1959년부터 레드삭스 산하의 마이너리그 팀인 롤리 캡스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1959년 캡스 소속으로 캐롤라이나 리그에서 타율·안타 1위에 오르며 기대에 부응했지만, 2루수와 유격수로서 총 45개의 실책을 범하여 이 부문에서도 수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수비 불안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야스트렘스키는 빅리그 팀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범경기 기간 도중, 그는 레드삭스 팜의 최상위 팀인 미니애폴리스 밀러스로 가야 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사실을 통보받게 되었다. 밀러스의 감독이 그를 좌익수로 기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좌익수를 맡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포지션 이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전년도에 비하여 수비시 훨씬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안타 부문에서 193개로 리그 1위에 오르는 등 타격에서도 계속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1960시즌 뒤 테드 윌리엄스가 은퇴를 발표하였다. 그 자리를 야스트렘스키가 꿰찰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2루수 척 실링과 투수 돈 슈월 등의 유망주들이 레드삭스 빅리그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처음으로 맞이한 것은 을씨년스러운 팀 분위기였다. 팀의 기존 선수들은 야스트렘스키와 그의 룸메이트 실링 모두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야스트렘스키가 받은 입단 보너스 액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 위화감 비슷한 것을 자아내었다.
더구나, 윌리엄스의 빈 자리를 메우기를 바라는 팬들의 염원이 그에게 실로 큰 부담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보스턴의 대표적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는 윌리엄스와 야스트렘스키를 비교하는 기사를 시리즈로 싣기도 하였다.
한편, 기자들은 그의 성(姓)의 철자(Yastrzemski)를 정확히 표기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의 성이 길기도 했지만, 미국 기자들은 'r'다음에 'z'가 오는 경우(폴란드어에서는 흔한 경우임)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칼럼니스트 딕 영은 그의 성을 'Yas'로 줄여 불렀고, 보스턴 기자들은 그것을 다시 'Yaz'로 바꾸었다. 팬들이 그를 이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레드삭스는 4월 11일 홈에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와 시즌 개막전을 갖게 되어 있었고, 이 경기가 야스트렘스키의 데뷔전이었다. 그는 빅리그에서 맞이한 첫 타석에서 레이 허버트를 상대로 안타를 뽑았고, 경기 중엔 홈으로 쇄도하는 주자를 아웃시켰다.
그러나, 야스트렘스키는 이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시즌 초반 내내 그는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결국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훗날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에서 이 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한 사나이가 뉴브런즈윅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고, 그는 당장 보스턴으로 와 주었다. 그는 사흘 동안 나의 훈련을 도우면서,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정신적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에 나머지 경기들을 통틀어 .300의 타율을 기록하였다. 테드 윌리엄스에게 진정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또한 감독 마이크 히긴스도 야스트렘스키의 심리적 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어느 날 야스트렘스키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고, "또 하나의 테드 윌리엄스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질 필요가 없다. 설사 네 타율이 2할에 머무르더라도, 나는 너를 계속 좌익수로 기용할 것이니까." 라고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야스트렘스키는 압박감을 어느 정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결국 야스트렘스키는 .266의 타율과 11홈런, 80타점으로 1961시즌을 마감하였다. 신인으로서는 괜찮은 성적을 올린 셈이었으나, 테드 윌리엄스가 빅리그 첫 시즌에 역사상 신인 최다타점 기록을 세우며 이 부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보스턴 팬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불급이었다.
사실 야스트렘스키는 이 해에 팀 내에서도 최고의 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칭호는 15승을 올리며 리그 신인왕 자리를 차지한 슈월의 것이었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아메리칸리그 10개 팀 중 6위에 그쳤다.
1962년 스프링캠프에서 야스트렘스키는 마지막 한 주 동안 폭발적인 기세를 보이며 좀더 좋은 활약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이 해 6월 23일, 그는 팀 동료가 야구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레드삭스는 이 날 로스엔젤레스 에인절스와 대결하였는데, 야스트렘스키는 5회에 상대 유격수 조 카피가 날린 처리하기 극히 어려운 타구를 '그린 몬스터' 바로 앞에서 잡아내었다. 결국 이 날 선발로 나선 얼 윌슨은 아메리칸리그 흑인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노히트게임을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다.
야스트렘스키는 이 시즌을 .296의 타율과 19홈런, 94타점으로 마감하였다. 이는 전년도에 비하여 좀더 향상된 성적이었지만, 팬들로 하여금 테드 윌리엄스를 잊게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1962시즌이 끝난 뒤, 히긴스는 과거 레드삭스의 유격수로 홀약하였던 자니 페스키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히긴스가 로만 메히아스를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야스트렘스키의 포지션 이동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페스키 감독은 메히아스를 좌익수로 기용하고 야스트렘스키에게는 중견수를 맡기는 문제를 검토해야 했다.
결국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야스트렘스키와 게리 가이거는 1963년에도 각각 좌익수와 중견수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다만, 전년도에 캐럴 하디와 우익수 역할을 분담하였던 루 클린턴이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 외야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였다. 야스트렘스키가 3년만에 또다시 포지션을 옮기는 부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야스트렘스키에게 1963년은 완전히 스타로서 입지를 굳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해였다. 그는 이 해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321의 타율을 기록하여 리그 타격왕이 되었다. 또한 안타와 2루타 부문에서도 수위에 올랐으며, 외야수 부문 골드글러브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그러나 팀은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리고 1964년, 레드삭스는 심각한 내분을 겪기 시작하였다. 감독 페스키는 1루수 딕 스튜어트의 노골적인 도전에 직면하였고, 야스트렘스키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시즌 막판에 페스키는 해임되었고, 빌리 허먼이 새 감독이 되었다.
허먼 역시 레드삭스의 구세주는 되지 못했다. 1965시즌에 레드삭스는 33년만에 처음으로 100패를 당하였으며, 5번째 시즌을 치른 두 익스팬션 팀에게도 뒤져 리그 9위에 그쳤다. 그러나 그 책임이 야스트렘스키에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 해에 출루율과 장타율에서 리그 선두에 올랐으며, 트윈스의 토니 올리바에 이어 타율 2위에 올랐다. 또한 전년도에 놓쳤던 올스타 자리와 골드글러브도 되찾았다.
1966시즌을 앞두고, 야스트렘스키는 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는 팀 고위층(특히 구단주 탐 요키)와 선수들 간의 의사 소통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수들은 야스트렘스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정신적으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66시즌을 그리 대단하지 않은 성적으로 마감하였다. 팀 역시 하위권 탈출에 실패하였다. 허먼 감독은 시즌 막판에 코치 피트 러널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당시의 야스트렘스키는 타격의 정확성이라는 면에서는 뛰어났으나, 장타력으로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그는 그다지 만족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 레드삭스의 스카우트였던 에디 캐스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야스트렘스키는 좋은 팀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실력을 드러낼 것이다."
1966시즌이 끝난 뒤, 그는 진 버드를 만나며 변신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헝가리 출신인 버드는 본래 복싱 트레이너였으나, 미국에 이주한 뒤 야스트렘스키의 집 근처에 위치한 호텔의 피트니스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야스트렘스키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였다. "이봐, 자네는 자기 자신의 몸이 운동하기에 적합한 상태라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선수도 아니야. 내가 자네를 제대로 된 선수로 만들어 주지."
야스트렘스키는 버드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표시하였고, 그와 함께 1주일에 6일씩 강훈련에 임하였다. 그 훈련은 달리기와 역기 들어올리기를 비롯한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스트렘스키는 점차 근력을 길러 나갔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버드는 야스트렘스키에게 예언자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올해는 자네 생애 최고의 시즌이 될 걸세."
한편 레드삭스는 1967시즌을 앞두고 딕 윌리엄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전임자 러널스와 마찬가지로 한때 야스트렘스키의 팀 동료였으며, 인터내셔널리그의 레드삭스 팜 팀인 토론토의 감독으로 좋은 성적을 올린 뒤 처음으로 빅 리그에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말할 것도 없이 경험부족이었다. 그는 사실 이 때에 아직 30대였으며, 당시 양키스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던 화이티 포드보다도 젊었다. 레드삭스에는 윌리엄스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없었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는 명백히 '애송이'였다.
그러나, 그는 팀을 철저하게 자기 방식대로 이끌어 갈 것임을 천명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는 팀 개혁의 일환으로, 야스트렘스키가 맡고 있던 주장 자리를 없앴다. 그 일차적인 목적은 물론 자신 외에는 '보스'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지만, 야스트렘스키에게도 이 조치는 도움이 되었다. 심리적 부담을 한결 덜게 된 그는 경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레드삭스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레드삭스는 화이트삭스, 트윈스 등과 함께 선두권을 형성하였고, 야스트렘스키도 크게 향상된 장타력을 과시하였다. 시즌 개막 후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야스트렘스키는 이미 10홈런을 기록한 상태였다.
두 '삭스'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6월, 화이트삭스 감독 에디 스탱키는 한 기자에게서 야스트렘스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박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녀석은 목 밑만 본다면 올스타감이지." 이 말의 의미는 물론 야스트렘스키를 '머리에 든 것은 별로 없는’ 선수로 비하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야스트렘스키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리고 그 발언이 보도된 직후, 레드삭스와 화이트삭스 간의 더블헤더에서 야스트렘스키는 9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스탱키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 특히 이 날 시즌 15호 홈런을 친 뒤에는, 베이스를 돌다가 스탱키을 응시하며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스탱키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고, 야스트렘스키가 올스타전에 주전 좌익수로 나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7월 11일 열린 올스타전에서, 비록 아메리칸리그는 2 대 1로 패하였지만 야스트렘스키는 3안타를 뽑고 2개의 포볼을 얻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메리칸리그 1루 코치로 나선 스탱키는, 야스트렘스키가 출루할 때마다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레드삭스가 한창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던 8월 18일, 팀에 큰 악재가 등장하였다.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팀 타선을 이끌어 가던 외야수 토니 코닐리아로가 에인절스의 투수 잭 해밀턴의 빈볼성 투구에 얼굴을 맞고 부상을 당한 것이다. 레드삭스는 애슬레틱스에서 방출된 켄 해럴슨을 영입하여 타선을 보강하였지만, 아무래도 야스트렘스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드삭스는 낙오되지 않았고, 야스트렘스키는 리더 역할을 계속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9월 초순 한때 슬럼프를 보였으나, 레드삭스가 오리올스에 3연패를 당한 뒤 다시 폭발하였다. 레드삭스는 시즌 종료를 앞두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볼티모어를 차례로 방문하였고, 야스트렘스키는 그 기간 동안 계속 놀라운 페이스를 보였다.
레드삭스는 볼티모어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홈에서 인디언스에게 2연패를 당하였고, 이어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절묘하게도 상대는 당시까지 91승 69패를 올려 레드삭스를 한 경기 차이로 제치고 단독선두에 올라 있던 트윈스였다. 더구나 트윈스에는 43홈런으로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이 부문 공동선두에 올라 있던 하먼 킬러브루가 속해 있었다. 보스턴 2연전에 전 미국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타이거스는 89승 69패를 거둔 상태에서 에인절스와 연속으로 더블헤더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막판까지 경합을 벌이던 화이트삭스가 탈락함으로써, 아메리칸리그 패권은 트윈스와 레드삭스, 타이거스 중 한 팀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9월 30일 벌어진 보스턴 2연전 첫 경기에서, 야스트렘스키는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그는 팀이 2 대 1로 박빙의 리드를 지키던 7회에, 짐 메리트를 상대로 결정적인 홈런을 날렸다. 킬러브루도 9회에 시즌 44호 홈런을 쳤지만, 경기는 레드삭스의 승리로 끝났고, 양팀은 공동선두가 되었다.
한편 타이거스는 이 날 1승 1패에 그쳤다. 따라서 타이거스가 10월 1일 더블헤더에서 모두 이기지 못하는 한, 남은 보스턴 경기의 승자가 리그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레드삭스의 우승뿐만 아니라 야스트렘스키의 트리플 크라운 달성도 마지막 한 경기에서 실현 여부가 판가름나게 되었다. 야스트렘스키는 타율과 타점 부문에서는 여유있게 리그 선두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킬러브루가 남은 한 경기를 통하여 야스트렘스키를 홈런 랭킹에서 앞서지 못하는 한 트리플 크라우너가 될 수 있었다.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보스턴 시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해럴드 케이즈가 쓴 보스턴 글로브 칼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 우리에게 헤라클레스의 힘과, 다윗의 용기와. 페리클레스의 지혜를 주소서."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트윈스는 간단하게 선취점을 올렸고, 3회에는 야스트렘스키의 실책이 빌미가 되어 스코어가 2 대 0으로 벌어졌다. 보스턴 팬들의 꿈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6회말, 레드삭스가 만루를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야스트렘스키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딘 챈스의 공을 받아쳐 안타를 날렸고, 스코어는 순식간에 동점이 되었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계속 득점을 올렸고, 팬들의 함성도 계속 이어졌다. 이닝이 끝났을 때 레드삭스는 5 대 2로 앞서고 있었다.
8회에 트윈스는 연속된 두 개의 안타로 다시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어 타석에 들어선 밥 앨러슨 역시 안타를 날렸고, 이 타구는 충분히 2루타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스트렘스키가 멋진 2루 송구로 앨러슨을 아웃시켰고, 트윈스는 결국 이 이닝에 한 점을 뽑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9회초, 투아웃 상황에서 트윈스의 리치 롤린스가 날린 타구는 외야플라이에 그쳤고 이로써 경기는 레드삭스의 승리로 끝났다. 팬들은 그라운드 내로 몰려들어와 선수들과 함께 환호하였다. 펜웨이파크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야스트렘스키와 킬러브루가 모두 홈런을 추가하지 못함으로써, 이 부문 타이틀은 두 선수가 공유하게 되었다. 야스트렘스키가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 성공한 것이다. 그의 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326와 44홈런, 121타점이었다. 특히 시즌 마지막 두 주 동안의 야스트렘스키의 페이스는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 5홈런과 .523의 타율, 그리고 16타점을 올렸다.
하지만 타이거스가 마지막 더블헤더 중 첫 경기를 이겨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레드삭스의 우승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타이거스가 남은 한 경기에서도 에인절스를 누른다면, 레드삭스는 타이거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대결해야 했다.
그러나 에인절스가 9회에 8 대 5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타이거스 2루수 딕 매콜리프가 병살타를 날림으로써 경기는 끝났다. 레드삭스의 리그 우승은 결국 실현되었다. 라디오로 타이거스 경기 중계를 듣고 있던 보스턴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시즌 전, 도박사들은 레드삭스의 리그 우승 확률을 100 대 1 정도로 잡고 있었다. 실현 가능성이 1%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레드삭스의 우승이 야스트렘스키의 활약으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스턴 팬들은 테드 윌리엄스의 은퇴 직후 자신들이 야스트렘스키에게 걸었던 기대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이 해에 드디어 깨달았다.
한편 내셔널리그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3년 전에 이어 다시 패권을 잡으며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와 대결하게 되었다. 시리즈에서 야스트렘스키는 3개의 홈런을 날리는 등 정규시즌 때의 맹활약을 이어 갔지만, 레드삭스는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을 무너뜨리는 데에 실패하여 패권을 양보해야 했다.
비록 야스트렘스키가 월드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압도적인 지지로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되었으며 세 번째로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였다. 또한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그를 '올해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함으로써, 그는 1954년에 제정된 이 상을 야구선수로서는 자니 파드리스와 스탠 뮤지얼, 샌디 코팩스에 이어 네 번째로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야스트렘스키는 1968시즌을 앞두고, 자신의 근력 향상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버드와 다시 함께 훈련을 하지 않았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시즌이 개막되자, 야스트렘스키의 장타력이 전년도와 같지 않음은 확연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배트 컨트롤 능력은 여전하여, 그는 이 해에 또다시 타격왕에 올랐으며 출루율에서도 리그 수위를 지켰다. 이 해에 아메리칸리그에 3할 타자는 그뿐이었으며, 그가 기록한 타율(.301)은 리그 타격왕의 기록으로는 역사상 최저기록이었다. (1968년은 투고타저 현상의 절정기였다.) 또한 그는 골드글러브를 지키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의 팀은 전년도의 화려한 성적을 재현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레드삭스는 1968년 아메리칸리그에서 4위에 그쳤다.
1969시즌에 야스트렘스키의 장타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이 해에 40홈런을 날려 팀 동료 리코 페트로첼리와 함께 이 부문 리그 4위에 올랐으며 111타점을 올렸다. 그리고 아메리칸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글러버 명단에서 그의 이름은 또다시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야스트렘스키는 이 시즌에 결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해야 했다. 8월 1일, 야스트렘스키는 경기 중 타구를 날린 뒤 제대로 1루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윌리엄스 감독의 분노를 샀다. 윌리엄스는 야스트렘스키를 공개적으로 질타하였고, 그에게 5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야스트렘스키를 특별히 총애하였던 구단주 탐 요키는, 이 소식을 접한 뒤 윌리엄스를 제거하는 문제를 고려하게 되었다. 레드삭스에서는 요키가 구단주인 한 어느 감독도 '야즈'와 불화를 일으키면서 자리를 지킬 수는 없었다. 자니 페스키도, 딕 윌리엄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요키는 시즌 마지막 9경기가 남은 상태에서 윌리엄스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1970년부터 에디 캐스코가 감독 자리에 올랐다.
야스트렘스키는 1970년, 또다시 화려한 시즌을 보냈다. 토니 코닐리아로의 동생 빌리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1루를 주로 맡게 된 그는, 이 해에 출루율과 장타율, 토털베이스(총루타수)와 득점에서 리그 수위에 올랐다. 특히 그의 이 시즌 타율과 출루율은 자신의 생애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에인절스의 앨릭스 존슨에게 극히 근소한 차이로 타격왕 타이틀을 양보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그는 이 해에 올스타전에서 4개의 안타를 날려 MVP로 선정되었으며, 시즌 후 실시된 리그 MVP 투표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팀 선수들 최고인 4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에도 레드삭스가 그다지 대단한 성적을 올리지 못하자, 팬들은 점차 실망감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양키스 팬들이 조 디마지오와 미키 맨틀을 가장 우선적으로 야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펜웨이파크의 관중들은 야스트렘스키에게 '아낌없이' 야유르 보냈다.
게다가 선수단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토니 코닐리아로와 야스트렘스키가 반목을 일으킨 것이다. 요키가 그 문제에 대하여 내놓은 해결책은, 요키와 야스트렘스키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코닐리아로를 에인절스로 트레이드시킨 것이다.
그리고 1971년, 좌익수 자리로 복귀한 야스트렘스키는 처음으로 심각한 부상에 직면하였다. 시즌 중반에 손목 인대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결국 그는 이 해에 15홈런에 그쳤다. 다만 전년도에 놓쳤던 골드글러브를 되찾은 것을 위안거리로 삼아야 했다.
1972년에도 불운은 계속 그를 붙잡았다. 그는 5월 초 한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여, 한 달 이상 쉬어야 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이 되자, 그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상승세를 보이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하였다. 야스트렘스키와 신인 포수 칼튼 피스크의 활약에 힘입은 레드삭스는 디트로이트 3연전만을 남긴 상태에서, 2위 타이거스를 반 게임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3연전 첫 게임에서, 야스트렘스키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1 대 0으로 뒤진 상태에서 3회에 타석에 들어섰고, 큼지막한 3루타성 타구를 날렸다. 그러나 1루 주자였던 루이스 아파리시오는 3루를 돌다가 베이스에 걸려 쓰러졌고, 이를 보지 못한 야스트렘스키는 3루로 돌진하다가 뒤늦게 아파리시오가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야스트렘스키는 2루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는 늦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레드삭스는 이 경기를 내 주어야 했다.
다음날 레드삭스가 또다시 패함으로써, 마지막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1972시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챔피언은 타이거스로 결정되었다. 이 해에는 시즌 초의 파업 때문에 몇 경기가 취소되었는데, 이 때문에 레드삭스는 타이거스보다 한 경기를 덜 치른 상태에서 반 게임 뒤진 채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야스트렘스키는 1973년부터 다시 1루수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이 해에는 부상의 악몽을 떨쳐 버리는 데에 성공하였고, 대부분의 타격 부문에서 팀 내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리그에서 득점 부문 수위와 출루율 2위에 오르는 등 팀의 간판스타다운 면모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1975년, 레드삭스는 다시 강자로 부상하며 지구 챔피언 자리에 강력히 도전하였다. 프레드 린과 짐 라이스, 드와이트 에번스 등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외야진이 팀의 타격을 이끌었고, 루이스 티안트와 릭 와이즈 등이 투수진을 지탱해 주었다. 야스는 8년 전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던 것과는 달리, 이 해에는 팀의 구심점 역할에 머물렀다. 그의 이 해 성적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9월 중순에 라이스가 투구를 손에 맞고 부상을 당하여, 좌익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결국 대럴 존슨 감독은 야스에게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레드삭스는 오리올스를 따돌리고 동부지구 정상에 섰지만, 시즌 내내 1루수로만 활약했던 야스를 좌익수 자리에 둔 채 포스트시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은 보스턴 팬들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더구나 서부지구 챔피언 애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4연패에 도전하는 당대 최강팀이었다.
그러나 리그챔피언십시리즈가 개막되자, 팬들의 걱정은 기우로 드러났다. 야스트렘스키는 시리즈 1차전에서 빌리 윌리엄스의 결정적인 타구를 잡아냈으며, 2차전에서는 샐 반도가 '그린 몬스터'를 맞추는 큰 타구를 날린 상황에서 3루로 쇄도하던 버트 캄파네리스를 정확한 송구로 아웃시켰다. 또한 3차전에서도 잘 맞은 레지 잭슨의 타구 두 개를 멋지게 처리했다. 또한 시리즈를 통틀어 11타수 5안타를 기록하였으며 2차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렸다.
결국 레드삭스는 애슬레틱스를 누르고 8년만에 다시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월드시리즈에서 당대 최강의 타선을 자랑하던 신시내티의 '빅레드머신(Big Red Machine)'과 접전을 벌인 끝에 패퇴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야스트렘스키는 1976년과 1977년에도, 연속으로 100타점을 돌파하는 등 30대 후반의 나의를 무색하게 하는 활약을 펼쳤다. 또한 1977년에는 통산 일곱 번째로 리그 외야수 중 어시스트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 해에 마지막으로 골드글러버가 되었다.
1977년에 안정된 전력에도 불구하고 양키스에 지구 우승을 양보했던 레드삭스는, 1978시즌 초반 짐 라이스와 데니스 에커즐리 등을 앞세워 폭발적인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한때 레드삭스에 14.5 경기나 뒤져 있던 양키스는 후반에 대추격전을 전개하였고, 결국 양팀은 예정된 162경기를 모두 99승 63패로 마감하였다. 그리하여 펜웨이파크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는 40대의 문턱에 다다른 보스턴 야구의 영웅에게 지울 수 없는 뼈아픈 기억을 남겨 주었다.
레드삭스는 경기 초반에 야스트렘스키의 홈런 등으로 2점을 선취하였다. 7회 초에 양키스가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지만, 다음 타자는 양키스 주전 선수 중 가장 타력이 부실한 유격수 버키 덴트였다. 그가 파울타구로 자기 다리를 맞추자, 부상을 우려한 양키스의 밥 레먼 감독은 그를 교체하려는 생각을 했으나 마땅한 유격수감이 없어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이크 토레스가 다음 투구를 한 순간, 덴트의 배트가 돌아갔다. 공은 야스트렘스키의 머리 위로 날아가, '그린 몬스터'를 훌쩍 넘어갔다.
3 대 2로 앞서게 된 양키스는, 레지 잭슨의 홈런 등으로 2점을 더 뽑았다. 레드삭스는 8회에 야스트렘스키의 안타 등으로 간신히 2점을 만회하여 스코어를 5대 4로 만들었고, 9회말에 주자 두 명을 내보내어 역전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야스트렘스키는 2사 1-3루의 절박한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야스트렘스키가 양키스의 에이스 구스 가시지의 공에 배트를 댄 순간, 그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배트는 가시지의 강속구에 여지없이 밀렸던 것이다. 공은 힘없이 솟아올라, 양키스의 3루수 그레익 네틀스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그것이 레드삭스의 1978시즌의 마지막이었다.
뼈아픈 패배를 맛본 야스트렘스키는, 1979년에 두 개의 대기록을 수립하여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7월 24일에 애슬레틱스의 마이크 모건을 희생양으로 하여 통산 400호 홈런을 뽑은 데에 이어, 9월 12일에는 양키스의 짐 비티를 상대로 통산 3,000호 안타를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의 3,000안타 클럽 가입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해 친지들을 며칠 동안 보스턴에 머물게 했을 정도로 이 영예로운 업적에 대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까지 400홈런과 3,000안타를 모두 돌파한 선수는 스탠 뮤지얼과 행크 에런, 윌리 메이스뿐이었다. (후에 에디 머리와 데이브 윈필드, 칼 립켄 주니어가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특히 아메리칸리그에서 이 업적을 남긴 선수는 야스트렘스키가 처음이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기록 수립 직후 펜웨이파크로 직접 전화를 걸었고, 시즌 후에는 야스트렘스키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축하 행사를 갖기도 했다.
야스트렘스키는 40대에 들어선 뒤에도 레드삭스의 정신적 지주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83년까지도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고, 팬들은 그의 퇴장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팀이 자신에게 떠날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1983년 10월 1일, 레드삭스는 이 날을 '야즈 데이(Yaz Day)'로 지정하여 이 위대한 선수의 업적을 기렸다. 그리고 정규시즌 마지막 날인 다음날, 시즌 들어 처음으로 야스트렘스키는 선발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이 경기가 끝나면 그의 커리어는 역사 속에 파묻히게 되어 있었다.
팬들은 이 노쇠한 영웅의 마지막 경기 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경기 후, 펜웨이파크를 한 바퀴 돌며 눈물을 흘리는 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이 선수 야스트렘스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야스트렘스키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을 얻은 1989년, 예상대로 자니 벤치와 함께 쿠퍼스타운에 입성했다. 그는 헌액 기념 연설에서, 자신이 전당 멤버가 된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나는 신에게서 훌륭한 자질을 선물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그리고 두 배는 더 많이 노력했다."
그보다 더 훌륭한 설명은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