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사회변동과 진도 동족마을 주민의 대응
- 식민지시기 細嶝里를 중심으로 -
朴 贊 勝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 목 차 >
1. 머리말
2. 진도와 세등리의 사회경제적 변동
3. 일제하 진도의 민족운동과 세등리
4.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의 20세기는 식민지화-해방-분단-전쟁-산업화-민주화 등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격동에 격동을 거듭한 시기였다.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와 같은 격동의 역사, 격렬한 정치사회적 변동 속에서 한반도의 모든 주민들은 엄청난 충격과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땅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생존을 위하여,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위하여 그와 같은 격동의 역사에 대해 나름대로 대응해왔다.
이 연구는 진도의 세등리라는 현풍 곽씨 동족마을을 사례로 하여 한국 근현대의 정치사회적 변동이 이 마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이에 대해 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그 가운데 식민지시기를 대상으로 살피고자 하며,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까지는 별도의 논문에서 살피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세등리 마을의 역사와 현풍 곽씨 문중과 그 소문중인 장파․중파․계파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세등리 곽씨가 조선후기 이래 한말까지 진도 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해왔는가를 검토하겠다. 이어서 한말에서 1945년 사이 세등리에서는 어떤 인구 변화가 있었고, 또 조선인과 일본인의 토지소유 현황은 어떠하였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세등리 곽씨 내부에서 어느 계파, 어느 집안이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도 살피고자 한다. 또 근대적 교육이 진도와 세등리에는 어떻게 들어오고 있었는지도 살피고자 한다.
결국 식민성과 근대성을 이중으로 안고 있었다고 할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대해 세등리 주민들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그 대응은 식민지에 대한 저항과 협조의 이중적 태도로 나타났다. 저항의 주체는 인텔리들이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유학을 하면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귀향하여 비밀결사, 독서회, 적색농민조합 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하였고, 진도 전체의 운동 역량도 미약하여 저항은 좌절로 끝났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협조의 길을 걷는 이들도 있었다. 곽씨들은 문중의 후광을 바탕으로 그들이 거주하던 고군면의 면장직을 사실상 독점하였다. 면장직은 조선시기 면집강과는 달리 공동체의 대표에서 행정의 말단조직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면 위의 민족운동과 면장직에는 곽씨 문중의 어느 계파에서 주로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것들이 곽씨 문중 내에 어떠한 갈등을 가져왔을까.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기에는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이 글은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점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목적을 갖고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분석하였다. 먼저 일제시기부터 현재까지 마을 주민들의 성씨별 호구 변동을 《珍島統計年報》 등 각종 통계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다. 다음에는 현재 진도군청에 남아 있는 1910년대 만들어진 土地臺帳 가운데 세등리의 토지대장을 통해 세등리의 토지소유의 변동을 살펴보았다. 또 곽씨가의 《玄風郭氏參奉公派世譜》, 《門契冊》, 증언 등을 검토하여 문중 내부의 각 소문중 간의 관계, 그리고 다른 동족마을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다. 또 일제하 진도에서 전개된 민족운동, 그리고 특히 1930년대 세등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재판기록, 신문기사 등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 조사에는 세등리와 인근 마을 주민들의 각별한 협조가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그리고 각종 사건 관련자들의 실명을 부분적으로 밝힌 것은 논문의 성격상 부득이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에게는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너그러운 양해를 바란다.
2. 진도와 세등리의 사회경제적 변동
1) 진도의 주요 성씨와 세등리 곽씨 문중의 위상
진도 내에서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살던 세등리 곽씨들은 어떤 사회적 위상을 갖고 있었을까. 이를 살피기 위해 먼저 1920년대와 1970년대 진도의 주요 동족마을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진도의 동족마을 현황
동족마을 |
마을형성 시기 |
1920년대 |
1970년대 |
고군면 五山里 |
1400년경 |
창녕 조씨 133호(54%) 679인(53%), 기타 성씨 115호 593인 |
창녕 조씨 149호(58%), 기타 성씨 106호 |
군내면 細嶝里 |
1500년경 |
현풍 곽씨 76호(80%) 240인(76%), 기타 성씨 19호 78인 |
현풍 곽씨 110호(96%), 기타 성씨 4호 |
의신면 七田里 |
1550년경 |
밀양 박씨 150호(96%) 751인(99%), 기타 성씨 7호 34인 |
밀양 박씨 190호(87%), 기타 성씨 29호 |
진도면 東外里 |
1430년경 |
무안 박씨 38호(47%) 184인(48%), 기타 성씨 43호 200인 |
무안 박씨 최다(호수 미상) |
진도면 浦山里 |
1492년경 |
밀양 박씨 76호(75%) 240인(70%), 기타 성씨 25호 105인 |
밀양 박씨 88호(75%), 기타 성씨 34호 |
고군면 石峴里 |
1300년경 |
김해 김씨 55호(47%) 307인(51%), 기타 성씨 62호 291인 |
김해 김씨 78호(67%), 기타 성씨 38호 |
고군면 道論里 |
1300년경 |
경주 이씨 39호(98%) 169인(98%), 기타 성씨 1호 4인 |
경주 이씨 34호(89%), 기타 성씨 4호 |
군내면 上加里 |
1500년경 |
미상 |
제주 양씨 65호(93%), 기타 5호 |
자료 : 《朝鮮の姓氏》 ; 《珍島郡誌》(1975), 825~855쪽
위의 동족 마을들은 진도 사회에서 대체로 반촌(班村)이라 불리었으며, 다른 민촌(民村)과 구별되었다. 이들 반촌 성씨 가운데 조(曺)․박(朴)․양(梁)씨들은 임진왜란 시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전사함으로써 전란 후 전망공신(戰亡功臣)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보겠지만 이들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사는 성씨 가운데 조선시기에 가장 세력이 있었던 것은 오산리의 창녕 조씨, 칠전리와 포산리의 밀양 박씨, 동외리의 무안 박씨, 석현리의 김해 김씨 등 4 성씨였다.
본고에서 주로 다루게 되는 세등리의 현풍 곽씨는 이름만 반가(班家)일 뿐 이들 세력가의 성씨에는 끼지 못하였다. 여기서 현풍 곽씨 참봉공파의 동족마을 세등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자. 입도조 호례(好禮)가 해남에서 진도에 들어온 것은 선조대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경륜(景侖)이 세등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함으로써 세등리는 곽씨들의 터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경륜은 원형(元亨)․건형(乾亨)․곤형(坤亨)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뒷말 장파(長派)․중파(仲派)․계파(季派)의 소문중을 형성하였다. 세등리 마을이 형성된 것은 1600년경이지만, 동족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경으로 보인다. 이후 장파는 고군면 신리와 군내면 송산리에, 중파는 군내면 세등리에, 계파는 세등리와 사동(寺洞) 등지에 거주하였다. 그외에도 중파 일부는 용장리에, 계파 일부는 용정과 벽파에 살고 있다. 소문중 가운데 세등리 마을을 지켜온 주류는 중파였고, 여기에 계파의 후손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 왔다.
세등리가 대표적인 곽씨 동족마을이고 각 마을 중 곽씨가 최대성씨를 이루고 있는 마을들은 용장리와 고군의 신리, 지산면의 거제리가 있다. 곽씨가 시거씨족(始居氏族)으로 되어 있는 마을은 세등 외에 군내의 한의리, 안농리, 고군의 신리, 평산리 등으로 군내와 고군에 집중되어 있다. 지산면에는 비록 큰 집단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여러 곳에 널리 퍼져 있고, 임회면에는 그 세가 약해 세 개 마을에 약간만 살고 있다. 그런데 밀양 박씨의 주거주지인 의신면에는 현풍 곽씨의 거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의신면 일대는 밀양 박씨가 장악하고, 고군면 일대는 조씨, 군내면 일대는 곽씨가 장악하는 등, 지역별로 주요 성씨가 있고 성씨들간의 상관 관계에 따라 일부 성씨가 서로 섞이게 되고 때로는 배척하게 되는 그런 관계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세등리의 곽씨가는 특히 오산리의 조씨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오산리(현재는 上里와 下里로 구성)는 창녕 조(曺)씨의 동족마을로서 반촌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조씨 외에도 밀양 박씨, 김해 김씨가 섞여서 살았다. 세등리의 곽씨들과 오산리의 조씨들은 서로가 양반 성씨라고 자처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맺었다. 세등리 곽씨가 혼인관계를 맺은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가 창녕 조씨이고, 다음이 밀양 박씨였다.
진도의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사는 성씨 가운데 조선시기 진도에서 가장 세력이 있었던 것은 오산리의 창녕 조씨, 칠전리와 포산리의 밀양 박씨, 동외리의 무안 박씨, 석현리의 김해 김씨 등 네 성씨였다. 이들 네 성씨는 향교를 완전히 장악해왔다. 그러나 한말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 소수의 양반 성씨가 향교를 장악하는 데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 결국 삼익계(三益契)를 만들어 이로써 향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향교 전교직에도 다른 성씨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시기의 향교 전교 명단은 파악할 수 없으나, 해방 이후의 역대 향교 전교는 다음과 같다.
朴國玄(진도 송현), 曺秉寬(진도 교동), 朴哲培(의신 칠전), 朴晉遠(진도 동외), 蘇良三(진도 남동), 金聲瑀(고군 석현), 韓明履(진도 성내), 金昌瑀(고군 석현), 郭丙武(군내 세등), 朴泰洙(의신 칠전), 曺基燁(진도 성내), 朱日文(임회 상만), 朴憲瑀(군내 동산), 朴聖鉉(진도 동외)
위에서 보듯이 해방 이후에는 조․박․김씨 외에도 세등리의 곽씨도 참여하였고, 특히 진도 읍내의 조(曺)․박(朴)․한(韓)씨 등이 전교를 맡은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미 신분제가 해체된 이후 그리고 향교의 전교가 조선시기의 향교장만큼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들 성씨가 전교를 맡았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시기 진도 성안에 거주하던 조(창녕)․김(김해)․2박(밀양․무안)․허(양천)․손(밀양)․한(청주)씨 등은 진도의 향리가 성씨들이었다. 이들 성씨들은 현재도 본래의 진도 성안이었던 진도읍 성동리, 동외리, 남동리 등의 주요 성씨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뒤에 보듯이 동외리의 박씨들은 식민지시기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2) 인구의 변동
1930년, 1943년, 1973년의 진도의 인구와 호수에 대한 통계를 보면 <표 2>와 같다. 이를 보면 1930년경에 5만명대, 1940년경에 6만명대, 1970년대에 10만명대로 계속 증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60년대의 통계와 비교해보면 진도의 인구는 1960년대말 11만명대로 가장 많았다가 70년대 들어 10만명대로 떨어지면서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표 2> 1930년, 1943년, 1973년 진도군의 인구와 호수
연도 |
호수 |
인 구 | ||
남 |
녀 |
계 | ||
1930년 |
10,877 |
27,876 |
27,140 |
54,785 |
1943년 |
12,712 |
32,843 |
34,889 |
67,732 |
1973년 |
17,984 |
51,460 |
52,737 |
104,197 |
자료 : 《全南事情誌》下(1930), 952쪽 ; 《진도군지》(1975), 357쪽
<표 3>은 세등리가 위치한 군내면의 인구와 호구수의 통계이다. 군내면의 호수는 1943년의 1,700여호에서 1973년에 2,500여호로 약 50%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 3> 1943년과 1973년 진도군 군내면의 인구와 호수
연도 |
戶數 |
인구 | ||
남 |
녀 |
계 | ||
1943년 |
1,719 |
4,503 |
4,817 |
9,320 |
1973년 |
2,582 |
7,485 |
7,487 |
14,972 |
자료 : 《진도군지》 (1975), 357쪽
<표 4> 1928년 진도의 인구와 호수
구분 |
조선인 |
일본인 |
외국인 |
합계 |
인구 |
53,749명 |
252명 |
15명 |
54,016명 |
호수 |
10,554호 |
78호 |
4호 |
10,636명 |
자료 : 《매일신보》 1928년 6월 29일 〈진도행(2)〉
<표 4>는 당시 진도군 내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과 외국인을 보인 것이다. 여기서 일본인은 252명으로 0.4% 정도로 극히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인은 주로 읍내에 살고 있었고, 주로 관리나 금융조합 관계자, 혹은 상인들이었다. 세등리에 일본인이 들어와 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서 대상으로 하는 세등리의 인구변동은 어떠하였을까. 1940년대 세등리의 호수는 약 115호 정도였으며 인구는 약 600명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주로 대상으로 하는 시기인 1930년대에는 약 100호에 5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한참 뒤인 1973년 세등리의 호수는 149호, 인구는 765명이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1950년대말 ~ 1960년대초 농촌인구가 가장 많았지만, 세등리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67명에 달하는 많은 희생자가 났기 때문에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가 다시 서서히 증가한 뒤 1960년대 중반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이농에 따라 다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세등리의 호구는 1970년대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80년대에 들어서면 1983년에 84호에 394명, 1993년에는 67호에 239명, 그리고 현재 2000년에는 67세대에 200명으로 나타난다. 세등리의 인구는 1970년 이후 급격한 감소 현상을 보이다가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60년대 이후의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은 90년대 중반 이후 일단 정지상태에 들어갔고, 이제는 자연 감소 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3) 주요 지주와 토지 소유
일제시기 진도의 주된 산업은 물론 농업이었다. 1928년 현재 진도의 토지 현황은 <표 6>과 같았다. 표를 통해 보면 논보다는 밭이 다소 많았다. 하지만 논과 밭은 합하면 3천여만 평으로 전체 3천5백여만 평의 85%에 달하였다. 그만큼 산이 적고 논과 밭이 많았던 곳이 진도였다.
<표 5> 1928년 현재 진도의 토지현황
.
|
논 |
밭 |
대지 |
기타 |
산림 |
합계 |
면적 |
1300만여평 |
1700만여평 |
99만여평 |
4백만여평 |
27000여평 |
3501만7천여평 |
자료 : 《매일신보》 1928년 6월 29일 〈진도행(2)〉
그런데 당시 한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진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자가 약 9,538호였고, 지주는 156호였으며, 나머지는 자작 혹은 자소작농,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즉 큰 지주가 없었으며, 동시에 극빈자도 별로 없는 것이 진도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전남사정지》에 의하면, 1928년 진도의 농가 계층의 비율은 <표 6>과 같았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도의 경우 지주갑(순지주)는 12명, 지주을(지주겸자작)은 139명으로 모두 합하여 전 농가의 1.6%로서 전남 전체의 2.1%보다 작다. 그만큼 지주가 적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자작농은 20.7%로 전남 전체의 12.8%보다 많고, 자소작농은 52.6%로 전남 전체의 38.6%보다 많다. 순 소작농은 25.1%로 전남 전체의 42.6%보다 작다. 이는 당시 진도의 소작농이 타 지역보다 적고, 자작농 혹은 자소작농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표 6> 1928년도 진도의 농가계층 구성 비율 (%)
구분 |
地主甲 |
地主乙 |
자작농 |
자소작농 |
순소작농 |
계 |
진 도 |
12 (0.1) |
139 (1.5) |
1916 (20.7) |
4871 (52.6) |
2331 (25.1) |
9269 (100.0) |
전 남 (제주 제외) |
(0.3) |
(1.8) |
(12.8) |
(38.6) |
(42.6) |
(100.0) |
<표 7> 1928년도 진도 논․밭의 자소작지 내용 단위:정보, ( )은 %
지목 내용 계층
|
논 |
밭 | ||||||||
자작지 |
소작지 |
계 |
자작지 |
소작지 |
계 | |||||
자작농 |
자소작농 |
자소작농 |
소작농 |
자작농 |
자소작농 |
소자작농 |
소작농 | |||
진 도 | ||||||||||
1062.0 (30.6) |
1296.3 (27.1) |
1179.3 (24.7) |
849.5 (17.6) |
4779.1 (100.0) |
1860.8 (32.0) |
1635.2 (28.1) |
1403.2 (24.1) |
924.5 (15.8) |
5823.7 (100.0) | |
전남(제주제외) |
(15.0) |
(21.1) |
(26.2) |
(37.6) |
(100.0) |
(21.6) |
(29.2) |
(21.4) |
(27.8) |
(100.0) |
자료 : 《전남사정지》상권, 117~118쪽
이러한 상황은 진도의 자소작지의 비율을 보여주는 <표 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논의 경우 자작지가 57.7%, 소작지가 42.3%로서 전남 전체의 36.2%, 63.8%와 큰 차이가 있었다. 밭의 경우도 자작지가 60.1%, 소작지가 39.9%로서, 전남 전체의 50.8%, 49.2%와 역시 차이가 있었다.
세등리의 경우 일제시기 자작농과 소작농이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 또 자작지와 소작지의 비율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따라서 세등리의 농가계층 구성 등을 파악할 수는 없다. 만약 진도의 전체적인 상황이 세등리에서도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본다면, 세등리의 경우에도 지주가 1~2% 자작농이 약 20%, 자소작농이 약 50%, 그리고 순소작농이 그 나머지인 25~30%를 차지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세등리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세등리는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촌이었으며 또 소작농의 비율은 작았고 자작농의 비율은 더 높았다고 한다. 또 소작농도 조선인 지주의 소작보다는 뒤에서 보는 조선흥업주식회사 등 일본 농장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이 주류였다고 한다. 진도 전체의 자작지와 소작지의 비율이 논밭을 막론하고 약 6대 4의 비율로 자작지가 더 많았다고 한다면 세등리의 자작 비율은 그보다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또 세등리에는 다른 마을의 지주들은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표 8> 1930년 진도의 조선인 지주와 토지소유면적 (단위:정보)
이름 |
주소 |
답 |
전 |
기타 |
계 |
曺秉洙 |
임회면 |
138 |
55 |
29 |
222 |
孫炳翼 |
진도면 |
120 |
63 |
27 |
210 |
韓承履 |
진도면 |
69 |
35 |
45 |
149 |
許贊五 |
진도면 |
82 |
15 |
50 |
147 |
金聲瑀 |
고군면 |
72 |
30 |
29 |
131 |
蘇鎭春 |
진도면 |
52 |
12 |
29 |
93 |
자료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시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지주 명부》, 209쪽
1930년경 진도의 대표적인 조선인 지주를 보면 <표 8>과 같았다. 위의 조선인 지주 가운데 曺秉洙는 임회면 용호리의 대지주로서 1920년대 龍山水利組合 조합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해운업에도 손을 대 목포-제주간 여객선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강원도 횡성군에서 금광업에도 관여하였다. 그는 도평의원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진도 독촉국민회 위원장, 민주국민당 위원장 등으로 진도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蘇鎭春(1901-?)은 진도 읍내 남동리의 향리 가문 출신으로 1918년 경성 제일고보를 졸업한 뒤 제주도청, 곡성군 등에서 관리로 근무하였고, 귀향하여 진도군 면협의회원, 면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해방 후 그는 1950년대에 민주당 위원장을 지냈다. 孫炳翼은 역시 향리가 출신의 지주로서, 서예가이자 화가였으며 제4,9대 국회의원(무소속, 민주공화당)을 지낸 孫在馨의 조부였다. 한승리․허찬오도 역시 향리가의 지주였다.
이제 세등리 주민들의 토지소유를 살펴보자. 아래 <표 9>에서 <표 11>까지는 현재 진도군청에 남아 있는 세등리 토지대장 (1910년대 처음 작성)에 나타난 개인별 토지소유의 현황을 살핀 것이다(소유자를 조선인으로 한정). 여기서는 1916년, 1931년, 1946년의 15년 간격으로 구분하여 각 시점에서의 개인별 토지소유 현황을 3천 평 단위로 나누어 분포상황을 살펴보았다.
<표 9> 1916년 세등리 주민의 개인별 토지소유
단위(평) |
사람수 |
백분비(%) |
토지면적 합계 |
백분비(%) |
0-1000 |
67 |
48.20 |
33,111 |
12.00 |
1000-2000 |
27 |
19.42 |
38,682 |
14.02 |
2000-3000 |
15 |
10.79 |
37,786 |
13.70 |
3000-4000 |
10 |
7.19 |
35,486 |
12.86 |
4000-5000 |
8 |
5.76 |
35,302 |
12.80 |
5000-6000 |
4 |
2.88 |
22,001 |
7.98 |
6000-7000 |
1 |
0.72 |
6,553 |
2.38 |
7000-8000 |
3 |
2.16 |
23,164 |
8.40 |
8000-9000 |
1 |
0.72 |
8,310 |
3.01 |
9000-10000 |
2 |
1.44 |
18,127 |
6.57 |
10000 이상 |
1 |
0.72 |
17,350 |
6.29 |
합 계 |
139 |
100.00 |
275,872 |
100.00 |
<표 10> 1931년 세등리 주민의 개인별 토지소유
단위(평) |
사람수 |
백분비(%) |
토지면적 합계 |
백분비(%) |
0-1000 |
72 |
45.86 |
46,047 |
16.18 |
1000-2000 |
39 |
24.84 |
55,783 |
19.60 |
2000-3000 |
22 |
14.01 |
53,250 |
18.71 |
3000-4000 |
9 |
5.73 |
32,132 |
11.29 |
4000-5000 |
8 |
5.10 |
36,582 |
12.86 |
5000-6000 |
1 |
0.64 |
5,942 |
2.09 |
6000-7000 |
0 |
0.00 |
0 |
0.00 |
7000-8000 |
4 |
2.55 |
30,558 |
10.74 |
8000-9000 |
1 |
0.64 |
8,061 |
2.83 |
9000-10000 |
0 |
0.00 |
0 |
0.00 |
10000 이상 |
1 |
0.64 |
16,203 |
5.69 |
합 계 |
157 |
100.00 |
284,558 |
100.00 |
<표 11> 1946년 세등리주민의 개인별 토지소유
단위(평) |
사람수 |
백분비(%) |
토지면적 합계 |
백분비(%) |
0-1000 |
123 |
53.95 |
52,941 |
15.53 |
1000-2000 |
55 |
24.12 |
79,586 |
23.34 |
2000-3000 |
27 |
11.84 |
67,415 |
19.77 |
3000-4000 |
10 |
4.39 |
33,374 |
9.79 |
4000-5000 |
3 |
1.32 |
13,100 |
3.84 |
5000-6000 |
5 |
2.19 |
27,498 |
8.07 |
6000-7000 |
0 |
0.00 |
0 |
0.00 |
7000-8000 |
1 |
0.44 |
7,563 |
2.22 |
8000-9000 |
1 |
0.44 |
8,141 |
2.39 |
9000-10000 |
0 |
0.00 |
0 |
0.00 |
10000-20000 |
2 |
0.88 |
27,728 |
8.13 |
20000 이상 |
1 |
0.44 |
23,572 |
6.91 |
합 계 |
228 |
100.00 |
340,918 |
100.00 |
위의 표들에서 보면 각 시기별 토지소유자의 수는 139명, 157명, 228명으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세등리의 인구 증가로 토지소유자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는 세등리 주민이 아닌 다른 마을의 주민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등리 앞 들의 토지는 거의 대부분 세등리 주민들에 의해 소유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세등리 주민들이 둔전리 등 다른 마을에서 소유하고 있던 토지면적은 이 통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위의 통계를 통해 세등리 주민들이 자기 마을앞 들의 농지를 각각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대체로 파악할 수 있다.
다음 전체 토지면적을 보면 1916년 275,872평, 1931년 284,558평, 1946년 340,918평으로 1946년에 약 6만평이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동안 놀려두었던 마을 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늘어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제 위의 표를 다시 정리하여 각 시기별 토지소유 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 12>와 같다.
<표 12> 세등리 주민들의 각 시기별 토지소유 분포 현황
단 위 (평) |
1916년 |
1931년 |
1946년 | |||
사람수 (%) |
토지면적 (%) |
사람수 (%) |
토지면적 (%) |
사람수 (%) |
토지면적 (%) | |
0-3000 |
78.4 |
39.7 |
84.7 |
54.5 |
89.9 |
58.6 |
3000-6000 |
15.8 |
33.6 |
11.5 |
26.2 |
7.9 |
21.7 |
6000-9000 |
6.5 |
13.8 |
3.2 |
13.6 |
0.9 |
4.6 |
9000이상 |
2.2 |
12.9 |
0.6 |
5.7 |
1.3 |
15.1 |
합계 |
100.0 |
100.0 |
100.0 |
100.0 |
100.0 |
100.0 |
<표 12>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① 3000평 이하의 토지 소유자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8.4% → 84.7% → 89.9%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면적이 전체 면적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도 39.7% → 54.5% →58.6%로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영세농이 그만큼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② 반면에 3000평에서 6000평 사이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은 그 비중이 날로 줄어들었다. 이는 중농 정도의 농민층이 갈수록 엷어져 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도 역시 인구의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③ 6000평 이상의 토지 소유자의 수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의 면적이 차지하는 비중은 1916년에 가장 높고 그 이후에는 다소 줄어들어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6000평에서 9000평 사이의 소유자의 비중이 줄어들고 9000평 이상의 소유자의 비중이 더 커진 것이 눈에 띈다.
이제 1919년, 1931년, 1946년의 각 시기별 상위 토지소유자를 파악해보자.
<표 13> 각 시기별 상위 토지소유자 (전답)
이름 |
소유 면적 (평) |
비고 | ||
1916년 |
1931년 |
1946년 | ||
郭泰昊 |
9,100 |
7,588 |
1,804 |
곽병문,병환,병준,병휘의 부, 곽재필의 조부(중파) |
郭致興 |
9,027 |
7,488 |
2,332 |
|
郭斗煥 |
7,979 |
4,825 |
2,895 |
곽○영의 조부(계파) |
郭致德 |
7,885 |
5,942 |
|
곽병관의 부(중파) |
郭丙文 |
7,300 |
7,546 |
4,766 |
곽재필의 부(중파) |
郭丙贊 |
6,553 |
4,875 |
|
곽순기의 부(계파) |
郭 栢 |
6,241 |
2,390 |
|
곽성환의 부(계파) |
郭丙武 |
5,586 |
3,613 |
2,706 |
곽재익의 부(중파) |
郭丙奇 |
5,572 |
4,177 |
3,704 |
곽재화, 재술, 재헌의 부(중파) |
곽종도 |
5,457 |
4,635 |
|
|
곽봉원 |
5,386 |
3,696 |
|
|
郭丙環 |
4,950 |
4,954 |
|
곽태호의 차남, 재중의 부(중파) |
곽치룡 |
4,674 |
3,794 |
2,561 |
|
郭尙佑 |
4,426 |
3,704 |
3,169 |
곽홍기의 조부(계파) |
곽경표 |
4,387 |
3,689 |
3,212 |
|
곽재승 |
|
8,061 |
|
|
郭尙玉 |
|
4,618 |
2,599 |
곽병섭의 부(계파) |
郭致吉 |
|
4,304 |
2,839 |
곽재운의 조부(중파) |
郭禮煦 |
|
4,194 |
|
곽유배, 용배의 부(계파) |
郭在必 |
|
995 |
13,306 |
곽병문의 장남(중파) |
郭成煥 |
|
|
8,141 |
곽○배의 부(중파) |
郭丙寬 |
|
|
5,843 |
곽치덕의 자(중파) |
곽건정 |
|
|
5,649 |
|
郭丙輝 |
|
|
5,482 |
곽태호의 4남(중파) |
郭洪基 |
|
|
5,268 |
곽상우의 손, 병양의 자(계파) |
郭在仲 |
|
|
5,256 |
곽병환의 장남(중파) |
郭丙峻 |
|
|
4,248 |
곽태호의 3남(중파) |
郭吉城 |
|
|
3,932 |
|
郭國培 |
|
|
3,164 |
곽인환(곽두환의 제)의 2남(계파) |
郭丙涉 |
|
|
3,115 |
곽상옥의 자(계파) |
郭병태 |
|
|
3,115 |
|
郭在喆 |
|
|
2,095 |
곽병로의 자(중파) |
郭在述 |
|
|
2,081 |
곽병기의 차남, 재화의 제(중파) |
<표 13>에서 보는 것처럼 세등리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것은 곽태호가였다. 곽태호는 1916년에 9,100평의 전답을 소유하였다. 그의 아들은 넷이 있었는데, 장남 병문은 1916년 현재 이미 7,300평을 소유하였고, 차남 병환도 1916년 현재 4,950평을 소유하였다. 3남 병준과 4남 병휘는 1916년 당시 아직 어려서 소유토지가 없었으니, 곽태호와 그의 아들들의 토지소유는 모두 21,350평에 달하였다. 해방 직후 1946에는 이미 세상을 뜬 곽태호 명의가 1,804평, 곽병문이 4,766평, 그의 아들인 곽재필이 13,306평, 합계 19,876평으로 단일 가족으로는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곽재필은 다른 마을에도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석군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세등리의 땅은 소작을 주지 않고 직접 머슴들을 데리고 경영하였으며, 다른 마을의 땅만 소작을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를 배경으로 곽재필가는 중파의 중심이 되었으며, 이를 상징하듯 그의 기와집은 마을 한복판에 있었다. 하지만 뒤에 보듯이 곽재필(1911년생)은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에 참여하였고, 해방 이후 진도의 인민위를 주도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후 진도를 떠나 월북하였다고 한다.
곽병환(1892-1936)은 곽태호의 차남으로서 곽치문의 양자가 되었다. 곽병환은 곽태호의 재산 일부를 계승하여 4,950평의 전답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곽병환의 장남은 곽재중인데, 그는 1930년대 곽병관이 주도한 독서회에 참여하였으며, 1950년 가을 입산하여 사망하였다. 곽태호의 3남 곽병준은 4,248평, 4남 곽병휘는 5,482평으로 소유하였다. 이들 형제도 한국전쟁 중에 모두 희생되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계파의 곽성환가이다. 그의 아버지 곽백은 1916년 6,241평, 1931년 2,390평의 토지를 소유하였으나 1946년 현재 곽성환은 8,141평으로 개인으로서는 곽재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계파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장남은 곽○배(1912년생)로서 그는 해방 이후 47년경 경찰에 투신하였다.
중파의 중심인물인 곽재필과 계파의 중심인물인 곽○배는 마을의 중심부에서 바로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각 좌익과 우익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였고, 이것이 한국전쟁기 마을의 비극을 가져오는 씨앗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중파의 곽치덕-곽병관 부자가 5천 내지 7천평, 곽병기-재화․재술가가 5천여평, 곽병무-재익가가 역시 5천여평의 전답을 소유하여 곽재필가의 뒤를 잇고 있었다. 계파에서는 곽두환-○영가가 한때 7천여평, 곽병찬-순기가가 6천여평, 곽홍기가 5천여평을 각각 소유하여 곽성환-○배가의 뒤를 잇고 있었다. 해방 이후 이들 가운데 중파의 곽병관과 곽재화․재술는 좌익으로, 그리고 곽○영은 우익으로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이에서 보는 것처럼 세등리의 곽씨들 가운데 비교적 토지를 많이 소유하던 지주 혹은 부농가의 자손들은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서서 대부분 희생되었는데, 중파의 중심인물들은 좌익으로, 계파의 중심인물들은 우익으로 갈라선 것이 주목된다.
4) 일본인의 토지소유
이제 일본인 지주들이 진도에서 얼마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세등리에서는 얼마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표 14> 1930년경 진도의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 (30정보 이상 소유자)
씨명 (회사명) |
소유 토지 소재지 |
면 적 (정보) |
사무소 주소 |
창립연월 | |||
논 |
밭 |
기타 |
계 | ||||
村上直助 |
해남 영광 진도 무안 제주 |
27 |
15 |
4 |
46 |
목포부 |
1910.5 |
內谷万平 |
함평 나주 진도 |
276 |
98 |
6 |
380 |
목포부 |
1921.7 |
珍島殖産株式會社 |
진도 |
164 |
64 |
97 |
325 |
진도군 군내면 |
1918.4 |
東洋拓植株式會社 |
광주 담양 나주 함평 진도 기타 |
7,143 |
1814 |
174 |
9,131 |
동경시 |
1908 |
朝鮮興業株式會社 |
무안 해남 함평 진도 |
1,048 |
2,076 |
8 |
3,132 |
동경시 |
1904.9 |
林田直人 |
진도 |
108 |
61 |
3 |
172 |
熊本下益城 |
불명 |
藤井直次郞 |
해남 진도 무안 |
27.4 |
43.9 |
- |
71.3 |
목포부 |
1925.3 |
伊藤伴輔 |
나주 무안 해남 진도 |
36.8 |
21.1 |
63.2 |
121.1 |
목포부 |
1925.5 |
山野陽子 |
영암 광주 해남 진도 무안 |
71.1 |
10.9 |
0.4 |
82.4 |
목포부 |
1910.6 |
山本治浪左衛門 |
함평 영암 진도 무안 영광 |
46.5 |
20.1 |
4..3 |
70.9 |
목포부 |
1909.5 |
靑木佐市 |
해남 진도 |
50.4 |
27.3 |
- |
77.7 |
해남군 군내면 |
1911.2 |
자료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지개혁시 피분배지주 및 일제하 대지주 명부》, 190~198쪽, 264~276쪽
비고 : 위의 표 가운데 林田 이상은 1930년, 藤井 이하는 1929년의 통계임.
<표 14>에서 보면 진도에는 동양척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진도식산주식회사 등이 진출해 있었다. 이 표에는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이 가운데 진도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은 아마도 조선흥업주식회사였을 것이다. 개인으로서 진도에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은 대개 목포에 거주하는 이들이었다. 진도군청에 보관되어 있는 세등리 토지대장에 나타난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소유 상황을 살펴보면, 진도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조선흥업주식회사가 세등리에서도 역시 9,599평으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6,934평, 목포의 상인 내곡만평(內谷萬平)이 5,128평, 포부밀삼랑(浦富密三郞)이 3,546평을 소유하였다. 그밖에 22명의 개인이 각각 100여평에서 2천평 사이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그 합계는 19,160평이었다. 결국 일본인 회사와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전체적으로 44,367평이 된다. 하지만 이는 연면적으로서 이들 가운데에는 형제, 부자 등이 서로 증여 혹은 상속한 경우도 있어 이 부분의 면적은 중복되어 계산되어 있다. 따라서 동일 시점에서 일본인들이 소유한 토지의 총 합계는 이 보다 작은 4만여 평 정도가 아닐까 여겨진다. 세등리 토지의 총면적은 1916년에 27만5천여 평, 1931년경에 28만4천여 평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소유한 4만평 정도는 세등리 전체 토지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큰 비중으로 세등리 주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결코 좋을 리가 없었다. 세등리 주민들의 민족운동이 활발하였던 것은 이러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대장을 보면 일본인들이 세등리에서 토지를 사들인 것은 주로 1910년대와 1920년대였다. 조선흥업주식회사는 1904년에 창립되어 이미 1908년 현재 전남, 경남, 황해도 등 전국에서 6천여 정보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가 전남에서 주로 진출한 곳은 나주, 무안, 지도, 해남, 진도, 함평 등이었다. 때문에 조선흥업주식회사는 이 지역 의병들의 공격대상이 되었고, 진도에서도 1909년 1월 4일 의병 50명이 진도에 주재하고 있던 조선흥업주식회사 지배인 오미부작을 사살하고, 그 사무소의 반파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내곡만평은 목포의 미곡상으로서 함평, 나주, 진도 등지에서 약 380정보(1930년 당시)를 소유한 지주이기도 했다.
5) 근대 교육의 출발
진도의 개화가 시작된 것은 1900년경부터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이 해 읍내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光新學校를 세웠다고 보도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로는 소학교 교원을 지낸 朴晉遠이 초빙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학교가 얼마나 유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개화의 물결은 서서히 읍내에 퍼져 1904년에는 유지로 꼽히던 安天江, 朴鳳○, 蘇文○, 朴永培, 崔基元 등 20여명이 新學연구와 풍속개량을 내걸고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성안에 거주하던 향리가의 사람들로 추정된다. 친목회는 취지문을 통해 “시국이 새로 열려 동서가 교통하니 옛 것으로는 새 것을 당해낼 수 없다. 따라서 維新이 필요하니 유식한 지사는 新學의 연구와 풍속 개량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9년 3월 진도읍 동외리 가마골에 진도보통학교가 세워졌다. 이후에도 임회면에 1920년 석교공립보통학교, 고군면에 1923년 고성공립보통학교, 의신면에 1923년 의신공립보통학교, 조도면에 1925년 조도공립보통학교가 각각 세워졌다. 이로써 1920년대 중반까지 5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군내면과 지산면 등에 보통학교가 세워진 것은 각각 1931년, 1932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진도군내에는 39개소의 서당이 있었으며, 이 가운데 개량서당은 12개소에 달하였다. 하지만 중등학교로는 1937년에야 진도농업실습학교가 세워졌다. 1930년대 중반까지 진도에는 완도 소안도와 같은 사립학교나 완도중학원과 같은 중등학교 상당의 학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이는 진도의 교육수준을 타 군에 비해 그만큼 떨어뜨렸고, 민족주의 성향도 그만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20년대 이후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타 지역에 비해 그만큼 미약하게 나타나게 된다.
세등리의 곽씨들은 1923년에 세워진 고성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세등리에는 靑雲齋라는 서당이 있었다. 이 서당은 200년 이상 된 서당으로 郭義孝(영조대 1769년생, 1833년졸, 호 隱圃), 河致圖(호 牖菴, 정조대 인물), 郭允杓(의효의 손, 호 文菴, 철종 1859년생, 1898년졸) 등이 서당의 틀을 닦은 이들이다. 이들의 뜻에 따라 1841년에 學契가 만들어져 운영되어 서당이 존속하는 동안 운영되어 왔다. 일제시기 청운재는 개량서당이 되어 일본어와 한글을 주로 가르쳤다. 20세기 초 곽진권(1863년생), 김복만, 곽병준(1901년생), 곽익배(1910년생) 등이 서당교사로서 아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청운재는 해방 이후 헐려서 없어졌다. 하지만 제각은 남아 있어 세등리에서는 요즘도 위의 세 사람을 기리는 청운제를 지낸다.
한편 일제시기 세등리에는 조선시기 노비였다가 해방된 5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노비에서 해방된 뒤에는 마을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뒤에 서당 청운재를 위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작은 땅뙈기들을 내놓아 이후 서당에서 제를 올릴 때에 이들을 위해 金處士, 宋閑良 부부, 吳義淳, 宋義德 등의 신위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3. 일제하 진도의 민족운동과 세등리
1)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1) 3․1운동
진도에서의 3․1운동은 그리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1919년 3월 25일 읍내에서 군민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도 배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위는 규모가 작았던지 별다른 일없이 해산되었다. 4월 1일에도 읍내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4월 16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의신, 지산, 고군 등 각 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읍내의 서당 생도들의 시위 계획이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 생도로 지목되는 7명이 검속되고 시위는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다. 그 주동자는 鄭景玉(진도면 교동리 거주, 당 17세)이었고, 나머지 참여자로서 기소된 3명은 朴鍾浹(당 18세, 동리 거주), 朴錫鉉(당 18세, 동리 거주), 金仁洙(15세, 진도면 남동리 거주) 등이었다. 정경옥은 1917년 경성고보에 입학하였다가 학자금이 없어 1919년 10월 중퇴, 귀향하여 서당에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당 동료 3명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하고 12월 10일경 진도면 성내리 韓遠敎의 집 안에 있던 서당에 모여 모의한 끝에 동 서당 생도들로써 補鄕團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들은 타지에서 들어온 독립신문을 모방하여 전단을 만들기로 하고, 정경옥이 이를 작성하여 백 수십매를 베낀 끝에 서당 생도 10명이 12월 30일 오후 7시경 진도읍내에서 이를 배포하였다. 전단에서 이들은 다음 날인 1월 1일 독립만세를 고창하자고 촉구하였다. 진도경찰서는 이 전단을 발견하고 곧 수사에 착수하여 7명을 검속하고 4명을 기소하였다. 이들은 〈학부형제위〉와 〈沃州同胞諸位〉라는 2종의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전자의 내용은 “오늘날 학당에서 일본어만을 배우면서 소년시절을 허송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諺文을 열심히 공부하고, 小學을 배워 孝悌忠信을 익히고, 문명의 서양 신학문을 연구하여 장래 우리 조선에서 필요한, 지식있고 인격있는 청년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단의 끝에는 ‘대한 원년 1월 일’이라고 쓰고 있다. 후자는 총독정치가 2천만 동포의 문명발달을 늦추고 있으며, 교육이나 산업 등 모든 측면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대우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끝으로 ‘만세만세 太皇의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1930년대에 진도적색농민조합에 참여한 朴鍾浹(진도면 東外里 출신, 밀양 박씨로 추정됨)의 신문기록을 보면 그는 1919년 당시 진도의 민족주의자 鄭景玉 등으로부터 민족의식을 주입받아 3․1운동에 참여하여 형을 받고 복역하였으며, 출소 뒤 진도의 기독교청년회 총무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정경옥은 당시 이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경옥은 진도면 서외리 출신으로, 뒤에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대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광주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했으며, 일제 말기 친미파라 하여 누차 투옥되었고, 1945년 해방을 앞두고 옥고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3․1운동 시기 세등리가 속한 군내면에서는 이렇다할 만세 시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내면이나 이웃한 고군면에는 아직 보통학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세등리 주변에는 교회도 없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나 신학문을 공부한 이들이 주동한 만세운동에 세등리 주민들은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 청년운동
3․1운동 이후 1920년대초 진도에서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청년회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진도청년회가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25년 5월 《시대일보》에 진도청년회가 10일 동 회관에서 임원회를 열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진도에서도 1920년대 초반 진도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기사에 의하면, 임원회에서는 1) 회관 소재지인 진도읍에서 연 4회의 정기 강연과 연 1회의 각 면 순회 강연, 그리고 임시강연회를 개최하여 계급적 의식을 대중에게 철저히 알려 줄 것, 2) 노동야학을 계속하여 1년 동안 국문과 간단한 계산법을 가르칠 것, 3) 매월 월례회를 개최하여 토론을 속행하며, 문예를 장려키 위해 회원은 작문이나 시 혹은 서화를 하나씩 회에 투고하여 회에서는 이를 책으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돌릴 것, 4) 간간이 운동회, 원족회 등을 실행하며, 축구회를 개최하여 회원의 신체를 건전케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계급적 의식을 대중에게 가르쳐 줄 것” 등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진도청년회는 부르주아적 청년단체에서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서서히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바로 이 즈음인 1925년 11월 진도에서도 진도필연단(珍島必然團)이라는 사회주의 사상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사상단체의 조직을 누가 주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뒤에 보게 될 진도소작쟁의를 주도한 소진호․박종협․박순직 등이 이를 주도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들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부상조의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2년쯤 뒤인 1927년 12월 진도신흥청년회가 만들어졌다. 신흥청년회에 어떤 이들이 참여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박종협에 관한 기록 가운데 그가 1927년 12월 진도신흥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부분이 있다. 신흥청년회는 기존의 부르주아적 청년회를 탈피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청년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28년 3월에는 진도청년동맹이 결성되어, 신흥청년회는 해산되었을 것이다.
진도청년동맹은 박두재, 박종협 등의 지도에 의해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집행위원장은 박종협이었으며, 그는 선전부장도 겸하였다. 진도청년동맹의 또 다른 중요 인물은 朴斗在였다. 그는 박종협이 일본으로 떠나간 1929년 이후 진도청년동맹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30년 5월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오산리의 조규선도 진도청년동맹에 참여시켜 집행위원과 교육부장을 맡게 하였다. 박두재는 1930년 11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이때 개편된 당시 간부진에는 1933년 자각회를 결성하는 조규선(曺圭先), 곽재필(郭在必), 곽병휘(郭丙輝:재정부장), 박동인(朴東仁:운동부장) 등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청년동맹도 다른 군의 청년동맹과 마찬가지로 각 면에 지부를 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조규선은 1930년 고군면 지부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1920년대 진도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는 박종협이었다. 진도면 교동리 출신으로 진도면 동외리에 거주하고 있던 박종협은 이미 3․1운동 단계부터 진도 민족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활동하였고 한때 진도기독교청년회 총무를 맡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진도소작회 총무, 진도필연단 멤버, 진도신흥청년회 대표위원, 진도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약함으로써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1927년에는 신흥청년회 활동으로 작부취체운동에 관계하였다가 출판법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금고 6개월을 언도받기도 했다. 또 1929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적화당(赤化黨)에 관계하여 그해 10월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고 한다.
(3) 진도소작쟁의
1920년대 진도에서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1924년의 진도소작쟁의였다. 진도소작인회는 1924년 7월 15일 결성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진도소작인회가 창립총회에서 소작료 납입은 4할에 준하여 실행하겠다고 결의한 것이었다. 이는 1924년 전남 각지의 소작인회가 대부분 채택하고 있던 방침이었고, 암태도에서는 이미 한해전 실행에 옮겨져 쟁의가 진행 중이었다. 진도소작인회의 이같은 방침은 창립총회가 있은지 한 달 뒤 열린 제1회 정기총회에서도 확인되었다. 이후 진도의 일부 지주(임회면 용호리 曺秉洙, 진도면 성내리 韓致敎, 고군면 석현리 金聲瑞)들은 소작인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또 이날 정기총회에서 진도소작인회는 조선노농총동맹에 가입하기로 결의하였고, 순회강연 계획도 세웠다. 창립 당시 회장은 알 수 없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임원들은 부회장 姜奉圭, 재무부 車承萬, 업무부 許行福, 조사부 朴錫洪, 교무부 金伯淵 등이었다.
이와 같이 진도소작인회가 결성되어 소작료 4할이 아니면 납입하지 않겠다는 ‘소작료불납동맹’을 결의하자, 지주들도 이에 맞서기 위해 곧 진도 지주인회를 열었다. 지주회는 청년회간부와 연락하여 “불납동맹의 결과는 동척소작이민의 침입을 가져오게 되어 본군 주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일시의 감정에 사로잡혀 장래에 후회할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어서는 큰 일이기 때문에 소작인은 차제에 지주의 제안에 응하여 소작료를 납입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내용의 선전비라를 소작인에게 배포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지주회의 적립금으로 가차압처분 수속을 밟을 것, 또 진흥회라는 지주의 집행기관을 조직할 것, 소작인회원이 아닌 자와 소작인회를 탈퇴하여 직접 지주와 협조하는 자는 옹호할 것, 소작인에 소작료 불납을 교사하고 소작인회를 탈퇴하지 않는 자는 억압하고 소작료 납입을 방해하는 자는 고소할 것, 지주는 소작인에게 자기의 태도를 성명함과 함께 관청에도 본회의 취지 태도를 명백히 상신하여 양해를 구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지주측은 이 결의에 따라 성명서, 선전비라 등을 인쇄하여 사무원을 각지에 파견하여 소작료 납입의 강연회를 열고 인쇄문을 배포하였다. 지주회 측은 11월 28일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소작인들을 모아놓고 선전작업을 폈는데, 이 때 군중 가운데 10여명의 소작인들이 소작인회를 탈퇴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이들은 총독부와 도 당국에 소작료 납입이 확실치 않으므로 공과금 납부를 연기해줄 것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소작인측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비라를 살포하고 “지주의 선전은 소작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으로서 이에 미혹해서는 안된다. 일본의 소작료는 어느 곳을 가도 3할 정도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지주측은 12월 1일 결의사항대로 공동징수를 개시하였다. 지주 스스로 진두에 서서 징수원을 독려하고, 소작료의 납입, 혹은 소작료의 불납의 힐문과 위력에 호소하여 소작료를 징수하려 하였다. 여기에는 경찰도 협력하였다. 예를 들어 12월 6일 아침 지주단 20여명과 인부 40여명, 경찰 8명이 군내면 덕병리를 포위하고 경찰은 호구 조사부를 들도 집집마다 들어가 낱낱이 불러내어 한 마당에 모아놓고 이시바시(石橋)서장이 단에 올라 “소작인이 4할제를 주장하는 것은 도적이다. 금일부터 5할제로 지불하라”고 명령한 뒤 소작인들에게 5할제를 승낙하는 자는 오른 쪽으로 서고, 4할제를 고집하는 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하였다. 이에 몇 사람이 경찰에 위압되어 오른 쪽으로 가려 하자, 소작회 간부 이유근이 나서서 “우리는 소작회 규칙을 무시할 수 없으니 오른 쪽으로 가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자 이시바시서장은 형사에게 그를 조처하라고 지시하여 형사는 이유근을 붙잡아 현장에서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등 구타를 서슴치 않았다. 이에 놀란 소작인들이 해산하자 지주측은 인부들을 사서 소작인들에게 매를 때리고 위협을 가하며 소작료를 강제로 거두어 갔고, 이에 분개한 한 청년이 식도를 들고 나와서 매를 맞아 죽거나 굶어죽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위협하자 경찰과 지주측이 놀라 철수하였다고 한다.
소작인과 지주간의 갈등이 가장 고조되었던 이 시기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하여 동척과 조선흥업주식회사가 관권과 공모하여 소작인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즉 이들이 관권의 양해를 빌미로 소작인들에게 고발과 차압을 무기로 삼고, 교제단절과 벌금 등으로 지주들 내부를 단속시키고, 소작인들에게는 탈회를 강제 혹은 유혹하고,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농작물의 강제징수를 꾀하고, 쟁의조건으로 항의하는 소작인들을 난타하여 자못 약탈과 살육을 겸하는 그 행동은 소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다고 비난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진도소작쟁의는 그 핵심에 동척과 조선흥업회사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즈음 조선인 지주의 한 사람인 孫炳翼이 자기 소작인들이 소작료를 불납한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의신면 침계리 사는 조용근, 조용술 외 8명이 1월 22일 경찰에 호출되었다. 소작인들은 서장 이하 경찰들의 협박과 구타를 당하고 강제로 소작료를 납부하겠다는 승낙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월 28일 경찰은 진도군 고군내면 소작간부 崔在汶과 郭文煥을 구금하였다. 그 이유는 이들이 소작회원들에 대해 지주들의 요구대로 소작료를 6,7할을 내고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 4할이 아니면 절대 내지 말라고 하였고 이를 위반한 회원들에게 벌금을 받았는데, 경찰은 이에 대해 공갈취재니 소요선동이니 하고 붙잡아다가 즉결심판으로 29일의 구금을 언도한 것이다.
지주측은 또 소작인들의 재산 차압을 단행하여 2월 6일 집달리 3명, 경관 3명, 지주단 일동 등이 의신면 침계리에 들러 소작인들의 가산 집기에 차압표를 붙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 2월 8일 소작회에서는 제2회 정기총회를 열었으나 돌연 경찰이 해산을 명하고 박순직(朴淳稷) 외 2명을 검속하였으며, 회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경찰이 규칙 수정위원 소진호(蘇鎭浩)에게 규칙 수정 중에 소작료를 4할로 한 것을 5할로 하라고 명하자 소진호가 이를 끝내 거부하여 일어났다.
이같은 지주와 소작인간의 갈등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지주들은 1924년 12월초에 이미 공동징수의 기도를 포기하였다. 대신 지주들은 12월 17일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소작료 불납자에 대해서는 차압수속을 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지주회에 위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차압을 위해서는 차압적립금 6만원과 그 외의 여러 경비가 필요하였다. 이에 대지주들은 자신들의 경비 부담이 많아질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당시 대지주들은 비교적 소작인들에게 양보적인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중소지주에 비해 소작인들의 지주에 대한 반발은 강도가 약했다. 따라서 대지주들은 중소지주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기가 보다 큰 경비를 부담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지주회에서 탈퇴를 희망하고, 또는 지주회의 해산을 주장하는 자까지 나오게 되어 지주회는 스스로 붕괴되는 형세가 되었다.
소작회는 2월 24일 다시 회의를 속개하여 경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회칙 수정안 등을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1) 회장제도를 위원 제도로 변경하여 박인배(朴仁培) 외 19인을 선정함, 2) 논의 소작료는 5할로 하던 것을 4할 이내로 할 것, 다만 경작지 1평에 대해 총 수확고가 1되5홉 이상 되는 논은 소작료를 5할, 1되 5홉 이하 1되까지는 4할, 1되 이하 5홉까지는 3할, 5홉 이하는 2할씩을 지주에 납부할 것 등이었다. 진도 경찰이 이날 총회의 결의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 소작회의 이같은 안은 아마도 지주측과의 일정한 타협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경찰과 군(郡)이 개입하여 지주에게는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소작인의 계급의식만을 치열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하고, 소작인에게는 투쟁을 계속한다면 장래 소작인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여 소작료는 5할로 할 것, 다만 관습 또는 사정에 의해 그 이하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조정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소작쟁의는 지주측과 소작인측이 어느 쪽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타협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소작쟁의를 지도한 이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소진호, 박종협, 박순직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진호는 진도소작쟁의를 1925년 1월에 개최된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임시총회에 보고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진도필연단의 조직을 주도하며, ML파로서 이후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여하였다가 제3․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또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에 관여한 박종협(朴鍾浹)의 신문기록을 보면 박종협은 1924년 7월 진도소작인회를 조직하여 그 총무가 되었고,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박종협도 이 쟁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이 쟁의와 관련하여 경찰에 의해 구속된 朴淳稷도 주요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1920년대 진도의 민족운동을 개관해 보았다. 1920년대 진도에서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청년회, 사상단체, 소작인회, 진보적인 청년회 등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다른 군에 비해 매우 미약한 것이었으며, 신간회 지부 등은 결성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같은 도서지방인 완도 등지와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도의 민족운동은 당시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것은 1920년대 진도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지국이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의 첫 신문 지국은 1934년 박종협에 의해 중앙일보 지국이 설치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진도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세력이 얼마만큼 미약했는가를 보여준다.
진도의 민족운동, 특히 사회운동이 미약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 지방보다 지주가 적고, 소작농보다는 자작농이 많았다는 것, 즉 계급간의 갈등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이 주요한 배경이 될 것이다. 또 신교육 기관이 취약했던 것도 그 배경의 하나가 될 것이다.
2) 세등리 곽씨들의 민족운동 참여
1930년대 이후 진도의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는 마을은 세등리와 인근의 고군면 오산리였다. 오산리(上里와 下里로 구성)는 창녕 조(曺)씨의 동족마을로서 반촌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조씨(75% 정도 차지) 외에도 밀양 박씨, 김해 김씨가 섞여서 살았다. 세등리의 곽씨들과 오산리의 조씨들은 서로가 양반 성씨라고 자처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맺었다. 세등리 곽씨가 혼인관계를 맺은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가 창녕 조씨이고, 다음이 밀양 박씨였다.
(1) 1933년 자각회의 결성과 해산
세등리와 오산리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진도의 민족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오산 상리의 조규선이었다. 曺圭先은 1910년 조계환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고보 3학년 재학시인 1929년 6월 중퇴하고 도일하여 제강회사 직공으로 있다가 1930년 1월 귀향하여 진도청년동맹의 교육부장이 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다시 도일하여 히로시마의 관서자동차학교에 입학, 1931년 전협계(全協系)의 노동운동에 참여하였고, 1932년 1월 다시 귀향하였다.
조규선은 귀향하여 세등리의 곽재필과 협의, 1933년 1월 비밀결사 자각회(自覺會)를 조직하게 된다. 곽재필은 곽씨 중파의 인물로서, 곽병문의 아들이며, 앞서 본 것처럼 당시 500석 가량의 지주였다. 토지대장에서 보면 1931년 곽병문은 7,500여평의 전답을 소유한 세등리의 가장 큰 부농이었다. 그의 집은 세등리의 중앙에 있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그는 1911년에 태어나 12세 때인 1923년 부친과 사별하고 2만원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곽재필은 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4월 경성고등예비학교 중학과에 입학, 1년 수료한 뒤 퇴학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해 여름 방학시 귀향하여 진도청년동맹 간부인 박두재 등의 지도에 의해 좌익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학교를 퇴학한 뒤에 귀향하여 10여 권의 좌익서적을 입수 탐독하였다고 경찰기록은 쓰고 있다.
조규선과 곽재필은 1932년 9월 초순 세등리 곽재필의 집 거실에서 비밀결사 과학연구 서클을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동지를 획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들은 광주학생사건시 목포상업학교 학생으로 이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른 송산리 출신 박종식(朴鍾殖)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박종식은 그같은 조직을 결성하는 데 반대했다. 이들은 다시 박종협과 박동인, 임재옥, 이재석과 접촉하여 그들의 동의를 얻게 된다. 朴東仁은 진도면 동외리의 중류의 농가에서 태어나 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4월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월 광주학생사건 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연좌되어 1930년 10월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경력이 있었다. 그는 귀향한 뒤 1931년 8월 진도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운동부장을 맡았었다. 그는 박두재와 조규선 등의 지도에 의해 민족의식 및 공산주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李在石은 고군면 도평리의 하류 농가에서 태어나 하등 학력이 없고, 1930년 10월경 일본에 도항하여 오사카에서 노동생활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갖게 되었고, 1933년 4월 초순 귀향하여 자각회에 잠시 참여한 뒤 다시 6월에 일본에 건너갔다.
조규선과 곽재필은 1932년 12월 22일 저녁 곽재필의 집에서 만나 비밀결사 조직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한 끝에 결사의 명칭을 ‘자각회’로 하고, 박종협․박동인․곽병휘․이재석 등을 멤버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33년 1월 15일 곽재필의 집에서 모여 비밀결사 자각회의 발회식을 가졌다. 이날 발회식에서는 조규선이 만든 규약, 자각회 선언 등을 검토하였다. 규약은 가입, 제명, 책임부서, 대회, 월례회, 회계 등 12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회비는 월 20전으로 결정하였다. 선언은 국제관계의 위기로부터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용기있는 청년은 자각회에 모여 현 사회에 감연히 투쟁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운동방침으로서는 《프로과학》 《아등(我等)의 과학》 《대중의 벗》 《신계단》 기타 코프 출판물 등을 교양부가 구입하여 이를 책임지고 윤독시키며, 이들 텍스트는 조규선의 집에 보관하고, 조선일보는 교양부장 집에 설치하며, 주요 기사는 월례회에서 설명할 것 등으로 결정하였다. 각 부서와 그 책임자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책임 : 조규선
교양부장 : 朴東仁, 부원 조규선
조직․재정부장 : 곽재필, 부원 : 李在石
조사부장 : 박종협, 부원 郭丙輝
위와 같은 운동방침에 따라 그들은 1933년 2월 1일 곽재필의 집에 모여 제1회 정례회의를 갖고 회비를 징수하고, 동지 획득 및 텍스트 구입 등에 관해 협의하였다. 2월 중순경에는 다시 진도면 교동리 박종영의 집에서 제2회 정례회를 열어 이재석의 제의로 동아통항조합의 진도지부를 조직하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3월 중순에는 조규선의 집에서 제3회 정례회를 열어 조규선이 소지한 《비판(批判)》 및 회비로써 구입한 《신계단(新階段)》 1933년 2월호를 윤독하였다. 곽재필은 추가 회원모집을 위해 군내면 둔전리 이승창(李承昌)을 접촉하였으나 가능성이 없어 이를 포기하였고, 4월 상순 같은 동리의 곽병관을 접촉하였으나 그가 침착하지 않은 인물로서 비밀누설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대신 독서회를 조직하도록 권유하였다. 곽병관(1918년생)은 중류의 농가에서 태어나 9세에 부친과 사별하고 1932년 13세때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곽재필의 영향을 받아 《今の世の中》 등 8권의 좌익서적을 받아 읽기 시작하여 공산주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곽병관은 중파 곽치덕의 아들로서 곽재필과는 15촌간이 되는 사이였다.
이같은 활동을 펴던 자각회는 1933년 4월 21일 갑작스럽게 해산하였다. 조규선은 이즈음 광주에 나가 허영석(許永錫:姜永錫의 오기인 듯하다)을 만나 “현하의 실천운동에서 조직체를 유지하는 것은 단결로부터 파괴로 빠져 헛되이 희생자를 낼 우려가 있다. 각자가 잠행적 활동으로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조규선은 강영석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4월 21일 곽재필의 집에서 그와 만나 자각회원들의 열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각자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로 협의, 결정하고 그 뜻을 회원들에게 통고하였다. 자각회는 회원 전체가 모인 자리가 아닌 조규선과 곽재필의 뜻에 의해 해산되었던 것이다.
한편 곽재필이 곽병관을 시켜 만들려 한 독서회는 그해 7월 상순 곽병관과 곽재헌(郭在憲)의 회합에서 결성에 합의를 보고, 9월 중순 서당에서 곽재중(郭在仲)․곽재인(郭在仁)․곽재의(郭在義)․곽종언(郭鍾彦) 등이 회합하여 독서회 조직을 결의하고, 《今の世の中》라는 책자를 놓고 토론 중 다른 사람(곽유배)이 들어와 독서회 조직의 절차를 밟지 못하고 말았다. 곽재헌(1917년생)은 뒤에 보는 곽재술의 동생으로서 4세때 실부와 사별하고 1932년 3월 15세때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곽재중은 세등리의 곽병환의 장남이었다. 곽병환의 생부는 세등리의 제일부자였던 곽태호였으며, 따라서 곽재중은은 곽재필의 사촌동생이 된다. 곽재의는 곽재필의 친동생이었다. 또 곽재인은 곽병문(곽재필의 부)의 동생 곽병준의 아들로서 곽재필의 사촌동생이 된다. 결국 독서회의 주 멤버는 곽병관이 곽재필의 동생 곽재의, 사촌동생 곽재중․곽재인, 그리고 같은 중파로서 뒤에 적색농민조합에 참여하는 곽재술의 동생 곽재헌 등을 데리고 만들려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중파였으며, 계파에서는 유일하게 곽종언이 참여하였다.
<표 15> 자각회 및 독서회 참여자
성명 |
생년(1933년 당시 나이) |
참여내용 |
거주지 |
경제 형편 |
학력 |
비고 (경력, 관계) |
조규선 |
1910년생 (23세) |
자각회 책임 |
고군면 오산리 |
|
광주고보 중퇴 |
일본서 노동운동 |
박동인 |
|
자각회 교양부장 |
진도면 동외리 |
중농 |
광주농업중퇴 |
광주학생사건시 구속 |
곽재필 |
1911년생 (22세) |
자각회 조직,재정부장 |
세등리 |
지주(부농)의 아들 |
경성고등예비학교 중학과 1년 수료 |
중파(곽병문의 아들) |
박종협 |
1901년생 (32세) |
자각회 조사부장 |
진도면 동외리 |
|
서당 |
보향단 만세운동 참여 |
이재석 |
|
자각회 조직, 재정부원 |
고군면 도평리 |
빈농 |
무학 |
일본서 노동 |
곽병휘 |
1904년생 (29세) |
자각회 조사부원 |
세등 |
중농 |
진도보통학교부설 육영학교졸 |
중파(곽재필의 숙부) |
곽병관 |
1918년생 (15세) |
독서회 |
세등 |
중농 |
고성보통학교 졸 |
중파(곽치덕의 아들) |
곽재헌 |
1917년생 (16세) |
독서회 |
세등 |
중농 |
고성보통학교 졸 |
중파(곽재술의 동생) |
곽재중 |
1917년생 (16세) |
독서회 |
세등 |
중농 |
고성보통학교 졸 |
중파(곽재필 사촌동생) |
곽재인 |
1920년생(13세) |
독서회 |
세등 |
중농 |
고성보통학교 재학중 |
중파(곽재필 사촌동생) |
곽재의 |
1920년생(13세) |
독서회 |
세등 |
부농 |
고성보통학교 재학중 |
중파(곽재필의 친동생) |
곽종언 |
1920년생(13세) |
독서회 |
세등 |
중농 |
고성보통학교 재학중 |
계파 |
자각회와 독서회 참여자를 표로 정리한 것이 <표 15>이다. 여기서 보듯이 참여자는 대부분 세등리, 동외리, 오산리의 청년 혹은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세등리 곽씨들 가운데 참여자는 주로 중파였으며, 계파의 청소년도 1명이 끼어 있었다. 중파의 청소년들은 대개 중심인물인 곽재필과 가까운 인척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표에서 보듯 참여자들 가운데에는 지주(부농)의 아들이나, 중농․빈농의 아들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중농의 자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학력상으로 보통학교 졸업자 및 재학생, 그리고 고등보통학교 중퇴자들이 많고, 기타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자각회는 사상 학습에 그 주된 목적을 둔 일종의 독서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여자는 주로 인텔리 청년들이었으며, 그들을 따르던 청소년들이 그 주변에 따로 독서회를 구성하려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고 정리할 수 있다.
(2) 진도적색농민조합의 결성
자각회가 해산된 뒤 세등리와 오산리를 중심으로 다시 결성된 조직이 진도적색농민조합이다. 이를 처음 발의한 것은 곽재술(郭在述)이었다. 곽재술은 1910년생으로 곽씨 문중의 중파에 속한다. 그는 1929년 3월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사립중동학교에 진학하여 1933년 3월 졸업한 뒤 그해 4월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14일 곽재술은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귀향하게 된다. 그는 중동학교 재학 중에 사회과학에 뜻을 두고 《今の世の中》 《유물사관》 《맬더스자본론》 공산주의 서적을 읽기 시작하여 이에 공명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한 뒤 그해 4월 동교생 조규영(趙圭英)과 공모하여 경성부 원정(京城府 元町)에 있는 세창고무공장 여공 김수부(金水夫)․김유순(金柔順) 등에게 독서회를 결성하도록 시도하던 중에 4월 하순 이 고무공장에서 임금인하를 발표하자 김수부로 하여금 동맹파업을 감행하도록 하여 그 선동․사주의 혐의를 받고 경성 서대문경찰서에서 구류 25일의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귀향 직후인 10월 17일 곽재필․조규선과 함께 진도공립보통학교 운동회에서 돌아오는 도중 고성리의 노상에서 사회운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던 중 조규선으로부터 자각회 해산의 경위를 듣고 새로운 농민운동의 조직체를 결성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조규선과 곽재필도 찬성하여 이들은 1934년 1월 17일과 2월 6일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진도군의 농민운동 지도기관의 결성을 준비하였다. 2월 중순의 모임에서 투쟁기관의 명칭을 놓고 조규선이 ‘진도전위동맹’으로 할 것을 제안한 데 대해 곽재술은 실천적 의미의 ‘진도적색농민조합’으로 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장하여 곽재술의 의견대로 결정되었다. 이후 이들은 동지의 획득, 선언과 행동강령의 준비 등에 착수하였다.
이들 3인 외에 진도적색농민조합의 멤버로서는 박종협․박종춘 등이 참가하기로 결정되었다. 박종춘은 오산리의 하류 농가에서 태어나 1930년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에 종사하였으며, 1932년 7월에는 오사카에 건너가 노동에 종사하였고, 1933년 귀향하여 조규선과 교유하면서 그로부터 사상적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3월에는 박종협이 중앙일보 진도지국장이 되어 지국을 개설하고, 곽재술을 기자로 채용하였다. 당시 이들은 중앙일보 진도지국을 농민대중을 지도 계몽하기 위한 기관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마침내 1934년 4월 17일 고군면 고성리 남방의 첨찰산 송림 중에서 이들 5인은 모임을 갖고 “진도군에서의 무산대중 혁명운동기관으로서 진도농민조합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규약(가입․제명․책임부서․대회․예회․세포조직․회계 등 23개조의 내용)이 축조 심의 끝에 가결되었고, 선언과 행동강령도 가결되었다.
〈진도적색농민조합선언〉은 곽재술이 기초한 것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객관적 정세
(국제정세)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명확하다. 가) 군비확장, 나) 경제공황 심각화, 다)관세장벽 공고화, 라)파시즘정치 대두. 이상과 같이 자본주의 국가의 위기는 일층 첨예화되고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은 의연 존속․확대되고 있다.
(각국정세) 경제적으로 금본위제의 정지, 인플레정책 등은 이미 금융공황을 야기하고 도시․농촌은 실업문제․농업공황으로 실로 비참한 지경이 되었다. (하략)
(조선정세) 전 인구의 8할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데, 그 생활상태는 소지주․자작농은 해마다 몰락하여 자소작농이 되고 나아가서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소작농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파탄에 직면해 있다.
(진도상황) 조선의 한 지방으로 조선의 경제상황과 동일하지만 특수적 지위에 있음도 적지 않은데, 이는 경제적으로 보면 일반 타 지방보다 여유가 있음은 명백하지만, 소수 어업자를 제외하고 거의 전 군민이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고, 그 반수 이상이 소작농인 상태에서 전 수확의 7․8할을 소작료로 착취당하는 실정이다.
2. 주관적 정세
(각국정세)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은 불안한 생활에서 일탈하고자 맹렬히 투쟁하고 있으니 동맹파업․실업자데모․소작쟁의의 건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조선상황) 조선은 농업국으로 수 개의 공업도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농업지방이다. 공업도시 및 농업지방에서는 노농계급의 悲哀怨聲의 결정체인 동맹파업․소작쟁의가 폭발하고 있다. 양적으로 해마다 증가를 보이고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 요구가 관철되는 바 거의 없고, 비참하게도 패배와 타협으로 끝나고 있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참혹한 착취를 받게 되는 상황이 되고 있다.
(진도상황) 진도는 유사 이래 아직도 일찍이 소작쟁의다운 대중적 궐기는 볼 수 없었다. 다만 십수년 전에 소작인회라는 타협적 단체가 있었지만, 자멸하고 말았다.
3. 우리의 운동방침
이렇듯 살핀대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지주계급이 농민계급의 생활을 여하히 빈궁케 하며 나아가서 농민생활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에 사유재산제도 부인을 전제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농민생활을 안정하게 보장하기 위해 진도에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대중적 결의하에 일상농민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제 문제를 본 조합의 행동강령으로 하고 활동할 것을 맹세한다.
* 잠정적 행동강령
1) 소작료 반감
2) 무조건 소작권 이동 반대
3) 소작계약에 따른 5인제 및 연대보증인제 폐지
4) 고용자 월급제도 실시
5) 소작쟁의단의 설립 자유
6) 전매제도(담배․술) 반대
7) 세금 반감
8) 立稻差押반대
9) 農地令 실시 철저화
10) 노동자와 농민이 제휴
11) 농민교양을 위한 농민야학 설립 자유
12) 농민조합과 노동조합의 제휴
13) 조합원 획득
위의 강령 13개조를 보면 다른 적색농민조합들과 같이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에 깊이 개입하려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 다른 지역에서 등장하던 정치적 성격의 강령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함남 정평지역 정평농조재건위원회는 1933년 8월에 채택한 강령에서 ‘제국주의 전쟁 반대’ ‘제국주의 타도’ ‘일선프롤레타리아 제휴’ ‘중국혁명의 적극적 원조’ ‘소비에트 사수’ ‘조선공산당 재건촉진’ 등을 넣었다. 하지만 진도적농의 경우에는 이같은 정치적 강령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소작농민들의 일상적인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강령과 농민조합의 활동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일상농민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제 문제를 본 조합의 행동강령으로 하고 활동할 것을 맹세한다”고 할 정도로 이에 대한 원칙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도 적농도 궁극적으로는 사유재산제도의 폐지와 지주계급의 타파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동시에 확인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진도 적농의 조직을 살펴보자. 농민조합의 조직과 그 책임은 다음과 같았다.
책임 : 曺圭先
교양부장 : 郭在述, 부원 : 朴鍾浹
조직․재정부장 : 郭在必, 부원 : 朴鍾春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서로서 교양부와 조직부, 재정부만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적농들이 갖추고 있던 선전부나 쟁의부 등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진도 적농이 아직은 실질적인 행동의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우선은 조직과 교양에 중점을 두는 데 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진도적농은 각 개인별 활동 구역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진도면 방면 : 박종협․조규선
고군면 방면 : 곽재술․박종춘
군내면 방면 : 곽재필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신면과 임회면 등에 진출할 계획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인맥이나 영향력은 위의 지역, 즉 진도면 이북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도군 내에서는 진도면을 경계로 그 북쪽의 고군면․군내면을 북촌으로, 남쪽의 의신면․임회면․지산면을 남촌으로 부른다. 당시 의신면의 면소재지는 돈지리였고, 임회면의 면소재지는 심일시, 지산면의 면소재지는 인지리였다. 그리고 의신면 칠전리에는 밀양 박씨들의 동족마을이 있었고, 임회면 침계리에 창녕 조씨, 임회면 삼막리에 진주 하씨, 호구리에 창녕 조씨와 진주 하씨, 남동리에 김해 김씨의 동족마을이 있었다. 또 지산면에는 인천리에 순창 설씨, 상보리에 김해 김씨 등의 동족마을이 있었다. 농민조합은 이들 남촌에는 조직을 침투시킬 엄두를 못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남촌과 북촌이 생활권이 분리되어 평소에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던 것, 그리고 남촌 출신으로 이 운동에 참여할만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 등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들은 운동방침으로서는 동지획득에 전념할 것, 서기국 예회는 매월 2회(5, 20일 전후)에 책임자의 소집에 의해 열며, 텍스트는 각자 소지한 서적을 윤독하고 교양부에서 추가로 코프 출판물을 구입하여 윤독할 것, 회비는 30전으로 매월 20일까지 징수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고군면 오산리에서 조병하(曺秉河)․조규린(曺圭麟)과 접촉하여 이들을 조합에 가입시켰다.
조규린은 1914년 오산리의 중류의 농가에서 조하섭(曺夏燮)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1934년초부터 조규선으로부터 사상적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조병하는 1912년 역시 오산리의 중류 농가에서 태어나 1929년 역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에 종사하다가 그해 6월 다시 귀향하여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1934년 4월경부터 조규린과 함께 조규선과 박종춘으로부터 사상적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5월 이후 7월까지 매월 2차례의 월례회를 가졌다. 장소는 회원의 집 또는 사찰 등지였다. 하지만 5월 20일 회의는 회합자가 적어 유회되었고, 6월 5일 회합도 역시 참석자가 없어 유회되었다. 6월 20일 회의 조규선․곽재술․곽재필․조규린 등 4명이 참석하여 회의가 열렸으나, 조규선은 곽재술과 곽재필이 2회 연속 병을 이유로 결석한 데 대해 힐문하였고, 양인은 이에 사과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규약 10조에 따라 조병하․조규린을 멤버로 한 오산리지구위원회의 결성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7월 5일의 모임에도 곽재술․고가재필은 참석하지 않았고, 조병하․조규린만 참석하였다. 당시 박종협은 부친의 중병과 사망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여기서 진도적색농조는 위기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8월 1일 오산리 조씨 문중이 제각에서 열린 제6회 서기국 정례회에는 박종협 외에 모든 이들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곽재술은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교양부장을 사임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회를 탈퇴하겠다고 나왔다. 이에 조규선과 곽재술 사이에 쟁론이 벌어졌고, 결국 한 사람의 사임은 해체와 같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아 조합의 해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곽재술의 반전데이의 의의 설명이 있은 뒤 모임은 해산하였고, 이로써 진도적색농민조합은 결성 4개월만에 해체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이 진도적농이 창립 이후 이른 시일 내에 해체에 이른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창립 당시 명칭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보이듯 조규선은 전위동맹과 같은 지역전위 정치조직의 노선을 선호하였고, 곽재술은 농민조합과 같은 실천운동을 위주로 한 결사의 노선을 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규선의 노선은 당시 이미 낡은 노선으로 평가되고, 아래로부터 농민을 조직하는 적색농민조합 노선이 일반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곽재술의 노선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곽재술의 경우, 진도에서 그는 실천운동의 경험이 전혀 없었고, 또 진도의 객관적 여건은 적농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갈만한 운동 역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적색농민조합 결성을 제의했던 곽재술은 주객관적 조건이 자신이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 소극적인 태도로 전환하여 결국 조합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비슷한 시기 완도․해남․강진 등에서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 산하의 각 군별 적색농조의 경우, 각 마을에 농민반과 청년반 등을 조직한 바 있었다. 그러나 진도적농의 경우에는 반조직 대신에 지구위원회 식의 세포조직을 결성하려 하였다. 함남 정평농조 재건위원회의 경우, 각 마을에 반을 구성하고 면의 지부위원회와 마을의 반을 연결하는 조직으로서 지구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진도 적농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각 마을의 반 조직을 그렇게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오산리에는 세포조직이 여럿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진도 적농의 조직 사업이 그만큼 미약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진도의 적색농조 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 매우 미숙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20년대 이후 진도의 민족운동 세력이 전반적으로 취약했던 사정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표 16> 진도 적색농민조합 운동 참여자
성명 |
생년(1934년 당시 나이) |
참여 내용 |
거주지 |
경제형편 |
학력 |
비고 |
조규선 |
1910년생(24세) |
책임 |
오산리 |
|
광주고보 중퇴 |
자각회참여 |
곽재술 |
1910년생(234) |
교양부장 |
세등리 |
중농의 아들 |
보성전문학교 중퇴 |
서울서 노동운동 |
곽재필 |
1911년생(23세) |
조직․재정부장 |
세등리 |
지주(부농)의아들 |
경성고보 예비학교 중학과 1년수료 |
자각회 참여 |
박종협 |
1901년생(33세) |
교양부원 |
진도면 동외리 |
|
서당 |
자각회 참여 |
박종춘 |
1914년생(?) |
조직․재정부원 |
오산리 |
빈농의 아들 |
고성보통학교 졸 |
일본에서 노동 |
조병하 |
1914년생(20세) |
오산리지구위원 |
오산리 |
중농의 아들 |
고성보통학교 졸 |
일본에서 노동 |
조규린 |
1912년생(22세) |
오산리지구위원 |
오산리 |
중농의 아들 |
고성보통학교 졸 |
|
이제 진도 적농에 참여한 이들의 성격을 분석해보자. <표 1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의 다수는 자각회에 참여한 이들이었거나 외지에서 노동운동에 참여 혹은 경험을 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거주지는 대부분 오산리와 세등리였고 지주(부농)의 아들부터 중농, 빈농의 아들까지 다양한 성분을 보였다. 대체로 중농이 더 우세한 경향을 보였다.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 수준이 가장 많고, 전문학교를 중퇴한 곽재술 같은 이도 있었다. 당시 보통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농 이상은 되어야 했다고 한다. 결국 진도 적농은 곽재술이라는 노동운동을 경험한 인텔리가 귀향하여 기존의 자각회 회원과 외지의 노동운동 경험자들과 함께 조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농을 지향하던 곽재술과, 일종의 전위조직을 지향하던 조규선 간의 지향점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진도는 사회운동 역량이 매우 취약하여 곽재술이 지향하는 적색농조의 구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진도적농은 조기에 해산되고 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도 적농은 그것이 존속했던 기간, 그리고 해산 이후에도 특히 세등리의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본 것처럼 1933년 9월 곽병관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 결성 움직임이 있다가 실패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듬해 1934년 3월 서당 교사로 있던 곽병관은 곽정배(郭正培)로부터 세등리에서 한 때 조직되었다가 유명무실해진 유년구락부를 다시 부활하고 서당에 야학을 개설해줄 것을 부탁받게 된다. 곽정배는 세등리 하류의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1933년 곽병관으로부터 《今の世の中》를 받아 읽고 그로부터 사상적 지도를 받았다. 곽정배의 부탁을 받은 곽병관은 4월 중순경 서당에서 유년구락부원 12,3명을 불러 유년구락부를 부활시켰다. 또 곽병관은 낮에 아동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밤에 야학을 개설하여 남학생 12명, 여학생 5명을 모아 《노동독본》을 교재로 토론식 수업을 진행하였다.
1934년 8월 15일 곽병관은 곽재술에게 소인극(素人劇)을 하나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곽재술은 〈지도원의 강연〉이라는 연극 대본을 만들고 직접 서당의 아동들인 곽정배․곽병운(郭丙雲)․곽재근(郭在根)․곽재림(郭在林)․곽종언(郭鍾彦) 등을 지도하여 8월 23일 밤 마을의 곽병환의 집에서 마을 주민 2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연극을 열었다. 이 연극은 24일 밤 둔전리 김남원의 집에서도 주민 15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연되었다.
연극의 내용은 농촌은 몰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부담은 늘어나고, 농사개량이라는 것도 사실은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 자본주의의 착취 수단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농사지도원이 부르짖는 농사개량의 근검 저축이라는 것도 실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조선민중을 더욱 기아상태로 몰아넣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도원의 강연중 군중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강연을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강연의 허구성을 폭로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신을 출장보낸 농회는 마땅히 농민을 지도하지 않고 기만적 책동을 드러내고 있다. (중략) 농사개량이라고는 하지만 농민생활에서 하등의 이익도 되지 않고 단순히 납게 독려에 편리하게 하고자 할뿐이니 힘써 일해도 7․8할은 소작료․비료대 등으로 가져가 버리니 죽 끓일 식량도 없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일제의 조선농촌진흥운동을 비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야학과 소인극은 당시 다른 지역의 적색농조들이 흔히 하고 있던 프로문화운동의 하나였다. 비록 진도적색농조는 해산되었지만, 이후에 그 영향으로 이같은 프로문화운동이 진행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소인극 공연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군내면장이던 곽두인(郭斗仁)은 농촌진흥실행조합에 저축맥(貯蓄麥)의 납부를 미루던 곽재술의 어머니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곽재술은 곽두인을 구타하였고, 중앙일보에 이를 기사화하였다. 식민지 경찰은 이때부터 야학을 조사하고, 곽재술을 구금한 가운데 진도농민조합의 조직을 밝혀내, 관련자들을 모두 검거 조사하였다. 결국 조규선․박종협․곽재술․곽재필 등 4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각각 2년 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곽두인은 신리에 거주하던 장파의 중심인물이었고, 곽재술은 세등에 거주하던 중파의 중심 인물 중의 하나였다. 곽두인과 곽재술의 싸움은 두 집안의 갈등을 불러오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곽두인은 1942년 세상을 떴지만 해방 이후 그의 아들 곽채문과 곽재술은 각각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3) 식민지 지배에 대한 협조 - 면장직 참여
조선시기 일종의 자치 공동체였던 각 면에는 면집강이 있었다. 그러나 통감부 시기 들어 조선면제가 실시되면서 공식적인 행정말단기관으로서 면이 설치되고 면장이 임명되었다. 일제시기 이후 진도에서는 각 면별로 유력 성씨들은 대개 면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들 성씨들을 표로 보면 <표 17>과 같다.
<표 17> 진도군 각 면의 역대 면장 (일제시기 ~ 해방 이후)
면 명 |
면장 성명 |
珍島面(읍) |
金永驥 朴吉培 許粲 李達性 蘇鎭春 許桓 朴玉在 許橓 許粲 朴泰洙 福島二郞 李達性 朴熺洙 許貞敦 許桓 朴載澈 李芳鎭 朴琴準 朴厚仁 |
郡內面 |
郭炳武 郭震權 郭斗仁 郭宇春 郭丙俊 許粲 郭昌魯 郭南極 朴鍾南 金周煥 崔在君 梁聖安 崔在烋 梁興林 朴孝春 朴月起 郭奇煥 郭淳培 朴厚仁 郭國煥 郭宗武 |
古郡面 |
曺秉采 曺秉斗 朴吉培 金昌瑀 郭宇春 金泰圭 曺秉贊 朴鍾寬 郭聖斗 曺永煥 郭聖斗 曺孟圭 朴翊浚 金龍瑀 朴漢守 曺圭容 韓炳七 朴永俊 朴山洙 朴錫峯 |
義新面 |
朴鍾元 李雲道 李南洙 朴鍾元 朴晉遠 李南洙 朴泰洙 許允述 金鳳勳 朴杓培 李桂淳 朴蓬洙 朴甲洙 李南元 許中洛 梁禹烈 朴甲洙 朴鍾學 許南仙 任香 許良茂 郭國煥 朴厚仁 朴孟洙 |
臨淮面 |
朴亨俊 李時芳 郭鎭彦 河承準 河弼洙 河錫喆 曺寅煥 李承述 朴秉和 河三洪 金秉靖 河權의 朴鍾聲 鄭宗培 張成天 |
智山面 |
曺秉井 朴胤奎 金日鉉 許樸 蘇鎭建 金智峯 朴根培 薛有根 薛在義 張琓圭 李用先 朴銀扶 朴基采 具成奎 金町宣 |
鳥島面 |
姜良吉 朴德俠 朴永奎 金鏞柱 韓樂賢 李吉良 朴銅柱 張旺奎 朴鍾瑀 朴在林 張旺奎 朴性重 李炳連 金萬錄 曺圭容 金鍾奎 張成天 朴鍾國 |
자료 : 《진도군지》(1975)
진도면의 경우 김․박․허․소․이씨 등이, 군내면의 경우는 곽씨들이 독점하다가 박․김․양․이씨들이 맡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군면의 경우는 조․박․곽․씨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신면의 경우, 박․이․허․김씨 들이 맡았고, 임회면의 경우 박․하․이․씨들이 맡았고, 지산면의 경우 조․박․허․소․설씨 등이 골고루 맡았고, 조도면의 경우 박․김․이․조씨등이 골고루 맡았다. 진도면의 경우 구래의 향리가 성씨들이 주로 맡았고, 고군면․군내면․의신면 등의 경우 유력 성씨들이, 그리고 유력 성씨들이 없었던 임회면․지산면․조도면의 경우 여러 성씨들이 면장을 골고루 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시기 군내면과 고군면에서 면장을 지낸 이들을 좀 더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재임 기간과 거주지).
군내면 : 郭丙武(1914-18, 세등), 郭震權(1918-19.2, 송산), 郭丙武(1919.2-32.9, 세등), 郭斗仁(1932.10-39.1, 신리), 郭宇春(1939.1-43.4, 신리), 郭丙峻(43.5-44.6, 세등), 許燦(1944.6 - 45.8)
고군면 : 曺秉采(지막), 曺秉斗(오산), 朴吉培(진도읍), 金昌瑀(석현), 郭宇春(고성), 金泰圭(오산), 曺秉贊(오산), 朴鍾寬(오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식민지시기 군내면의 면장은 마지막 면장 허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곽씨들이 도맡았다. 앞서도 본 것처럼 세등리는 반촌으로서 자처했지만 조선시기에는 진도사회에서 큰 세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곽씨들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교육 등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곽씨들 가운데에는 앞서 본 것처럼 민족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조하여 면장을 맡는 이도 있었던 것이다.
면장을 지낸 곽씨 가운데 곽병무와 곽병준은 중파이며, 곽진권․곽두인․곽우춘은 모두 장파에 속하였다. 곽병무는 중파의 중심인물로서 두 차례,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면장을 역임하였다. 곽병준은 앞서본 적색농조에 참여한 곽재필의 숙부였다.
미군정 시기 ~ 한국전쟁 발발 사이에 면장을 지낸 이로는 곽창로․곽성두․곽남극 등이 있는데, 곽창로․곽성두는 장파에, 곽남극은 중파에 속한다. 한편 해방 전 면장을 지낸 곽우춘은 해방 이후 독립촉성회 고문을 맡아 진도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한편 계파에서는 식민지 시기 면장을 역임한 인물이 없었다. 그만큼 계파는 곽씨 문중에서 세력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파에도 곽두환, 곽성환 등 일정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자제들은 해방 이후 우익청년단, 경찰 등에 투신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고, 마침내 1950년대 이후에는 계파 집안에서도 곽종무․곽순배․곽기환․곽국환 등의 면장을 배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장파와 중파에서는 195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면장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이들 집안에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뒤에 보듯이 일제시기 면장을 지낸 이들 가운데 곽두인․곽우춘․곽병무․곽병준, 그리고 해방 직후 면장을 지낸 곽성두․곽남극 등은 한국전쟁기에 그 자신이나 혹은 그의 가족들이 큰 화를 입게 된다.
4. 맺음말
진도의 현풍 곽씨들은 세등리라는 동족 마을을 중심으로 인근에 흩어져 살았다. 현풍 곽씨들은 임진왜란 시에 공을 세워 전망공신으로서 이후 반촌(班村)으로 자처하였다. 세등리의 현풍 곽씨는 오산리의 조씨, 석현리의 밀양 박씨들과 혼인 관계를 주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진도성 남쪽의 포산리나 칠전리를 근거지로 한 밀양 박씨, 성밖 동외리의 무안 박씨, 그리고 오산리의 창녕 조씨, 석현리의 밀양 박씨들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현풍 곽씨들은 크게 장파, 중파, 계파로 나뉘어진다. 장파는 주로 신리와 송산을 중심으로 거주하였고, 중파는 세등에, 계파는 세등과 사동 등지에 거주하였다. 이 가운데 곽씨의 최대 동족마을은 세등이었고, 따라서 현풍 곽씨의 중심 마을은 세등이었으며, 중심 계파는 중파였다.
일제시기 진도의 계층분화 현황을 보면 지주는 타 지방보다 작고, 자작농․자소작농은 많고, 소작농은 적었다. 따라서 계급 대립의 양상은 다른 지방보다는 적게 나타났다. 하지만 1931년 당시 세등리의 주민 85% 정도가 3천평 미만의 토지를 소유하면서 세등리 전체 28만여평의 55%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1명이 전체 토지의 5.7%에 해당하는 1만6천평 이상을 소유하는 등 세등리 주민 내부에서도 토지소유 상의 분화는 현저하였다. 그리고 인구의 증가에 따라 3천평 미만의 토지를 소유하는 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세등리 곽씨 가운데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은 중파의 곽태호-곽재필가였다. 한편 세등리 전체 토지의 약 7분의 1정도를 일본인 지주 혹은 회사들이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세등리 주민들의 식민지적 현실에 대한 저항감도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세등리 곽씨의 아동들은 1923년에 설립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거나 아니면 마을 뒤의 청운재라는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진도에는 사립학교나 중등학교가 없었다. 곽씨가 가운데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지주가에서는 보통학교를 나온 자제들을 외지로 유학보냈다. 세등리의 손꼽히는 천석군 지주가의 자제 곽재필과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곽재술은 모두 경성으로 유학하였다. 하지만 곽재필은 중등학교를 중퇴하고 귀향하고 말았고, 곽재술은 중동학교를 거쳐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그도 이미 사회주의서적 등을 탐독하고 노동운동에 관계하고 있었으며, 겨우 한 학기를 마치고 중퇴, 귀향하여 적색농민조합에 뛰어들었다.
세등리 곽씨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1933년 자각회와 1934년 적색농민조합의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곽재필은 1933년 1월 오산리의 조규선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산리의 박종협, 세등리의 곽병휘 등과 함께 자각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이는 일종의 사상교양을 위한 독서회와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불과 3개월만에 조규선이 생각을 바꾸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3년 10월 귀향한 곽재술은 조규선과 곽재필에게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할 것을 제의하여 이듬해 4월 오산리의 박종협․박종춘 등을 끌어들여 적색농민조합 결성식을 갖게 된다. 진도적색농민조합은 이전의 자각회보다는 실천성을 띠면서 농민들의 일상적 이해관계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문제들에 개입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단 동지의 획득과 서적의 윤독 등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처음 조합 결성을 제의한 곽재술은 주객관적 조건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 그리고 조합의 책임을 맡은 조규선과 노선 차이가 있다는 것 등을 깨닫고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진도적농은 설립 4개월만에 해체되고 만다.
곽재술은 진도적농 해체 이후에도 세등리 청소년들에게 곽병관을 통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서당에는 야학이 개설되고, 유년구락부가 부활되었다. 그리고 〈지도원의 강연〉이라는 연극을 서당 아동들로 하여금 공연하게 함으로써 아동들뿐만 아니라 세등리 주민들의 의식까지도 일깨우기도 하였다. 이 연극은 당시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극 공연 얼마 뒤 군내면장 곽두인이 곽재술을 구타하고, 곽재술이 이에 격분하여 곽두인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 경찰이 야학을 조사함으로써 진도적농의 관련자도 모두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적농 관계가 가운데 조규선․박종협․곽재술․곽재필 4인은 기소되어 이들은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위의 자각회와 진도적농에 참여한 이들은 대체로 외지에 유학한 인텔리층, 외지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독서회와 소인극 등에 참여한 이들은 보통학교 졸업자, 혹은 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중파의 인물들, 특히 곽재필과 곽재술의 가족 또는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중농에 속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한편 곽씨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들 외에도 일제하에서 식민지 지배에 협조하는 면장직을 지낸 이들도 여럿 있었다. 식민지 시기 군내면의 면장은 현풍 곽씨들이 거의 독점하였다. 면장직은 곽씨 내부에서도 주로 장파와 중파가 맡고 있었고, 계파는 일제시기 면장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곽씨 내에서 계파는 항상 장파나 중파보다 열세에 있었고, 중파와 계파가 같이 사는 세등리 마을 안에서도 중파와 계파 사이에는 중파 우세 - 계파 열세의 역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러하였다. 따라서 중파는 계파에 대해 우월감을, 계파는 중파에 대해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소문중간의 우월감과 경쟁의식은 사소한 문제로도 갈등으로 이어질 소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시기까지는 그러한 갈등은 잠복상태에 있었다. 그러한 갈등 관계가 더욱 심화되고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좌우익의 분화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