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불평·불만 할 줄 몰라요
'저'는 일 현장에 투입될 때, 코로나 치료에 헌신하는 간호사나 의사가 입는 ’방역복‘이나, 화재현장에 뛰어드는 소방수의 방화복 같은 것을 두르지 않습니다.
‘저'는 끼니때만 되면 즉각 알몸으로 뜨거운 국 속으로, 밥솥으로 곧바로 뛰어듭니다. 말 할 줄 모릅니다. “앗! 뜨거워요.“라는 소리는 어림없습니다. 섭씨 100도 넘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제 몸이 미세하게 변형되는 것은 ’나노(nano)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전혀 주목 받지 못해 온 미천한 ’저‘를 지금부터 당당히 알리게 되어 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저’의 족보>
저희 조상은 대략 4, 5세기경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경주 금관총에서 그 시기에 밥솥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저’도 그때쯤 생겨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저의 어원은 1446년 훈민정음 해본에 '쥭'으로 나옵니다. “쥭爲반삽(飯臿)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반은 밥이고 삽은 가래이니 ‘밥주걱’이라고 홍윤표 교수는 네이버에서 풀이합니다.
처음엔 대나무나 참나무로 만들었고 놋쇠로 된 조상이 태어난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목수가 대패로 나무를 수백 번 깎으며 땀 흘리는 수고를 통해 저를 낳았을 겁니다. 놋쇠 재질의 저는 펄펄 끓는 화로 속에서 달구어진 후에, 대장장이의 손기술로 이 세상에 나옵니다.
현대에 와서는 실리콘, 플라스틱. 스테인리스로 만든 새로운 민족들도 나옵니다. 옛날 놋쇠로 된 ‘선조’들은 왕궁에서 주로 살았구요. 사우디 같은 중동 국가의 왕실 주방에 사는 동족도 있습니다. 그들은 금(gold)으로 몸 전체를 두르고 호강한다고 해야 할까요. 온 몸을 금(金)으로 치장한 그들이 부럽냐고요? 아니요! 뭐 하는 일은 다 똑같은데요.
사이즈로 치면 숟가락보다 제가 크니까 언니입니다. 모양이 색다른 젓가락은 동생들이고요. 저는 그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먼 서양의 외가 쪽에선 저를 ‘패들’ 또는 ‘스팻출러’ 라고 부릅니다. 국자, 포크, 나이프도 저의 친척이죠.
<제 운명적인 임무>
저희의 주된 임무는 뜸 들인 밥솥의 밥을 잘 젓거나 다른 그릇에 옮겨 담거나, 국이나 죽이 골고루 익도록 휘젓는 일입니다. 병약한 환자나 아침식사 대용으로 죽(粥)을 마련해야 하는 셰프에게 저는 필수품입니다. 저희 일엔 귀천이 없다고 믿습니다. 가끔 부침개를 다독거리거나 뒤집는 임무에도 동원됩니다.
특별한 일도 합니다. 뭐냐구요? 신발장 근처에 늘 대기하다가 주인님이 외출할 때 발뒤꿈치가 구두에 쏙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임무 말입니다. 양말에서 풍기는 코린내 맡으며 묵묵히 수행하는 ‘언터쳐블 미션’(untouchable mission)인 거죠.
대부분은 부엌 싱크대 서랍 속의 어둡고 좁은 귀퉁이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게 저희들 아닙니까? 평소엔 쉬다가 식사 때마다 출동합니다. 서랍이 열리는 그 순간이 저희가 일하러 나가는 시간인 거죠. 식사 후엔 주인님이 저희를 목욕시켜서 다시 서랍에 ‘감금’합니다. 이때 “수고했어요.”라고 위로하는 분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필자의 집에는 하얀 플라스틱과 기다란 나무로 된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가끔 아내가 장모님 간호하러 처갓집에 가는 경우, 저는 이들을 사용합니다. 쓰고 난 뒤엔 '이들'에 키스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쳐다보며 ‘땡큐’라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가볍고 둥글고 넓적한 끝에 자루가 달린 ‘저’는 성(姓)으로 치면 여성이 맞는 거 같습니다. 허리가 날씬한 몸매를 지닌 디자인으로 태어나니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도로변 리어카나 편의점, 백화점에서 팔리든 어느 가정으로 시집가더라도, 대개 주부를 돕게 됩니다. ‘부모 결손 가정. 고군분투하는 직장맘, 홀애비 등 어느 가족에 팔려가든, 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들의 식탁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옛날 옛적에 너무나 가난해서 배고픈 흥부가 놀부 형네 집에 갔습니다. 때마침 저녁식사 무렵이라 ”형수님, 밥 한 끼만 도와주세요!“ 했더니, '저'로 밥을 푸던 놀부 아내가 흥부 뺨을 내리치자, 얼굴에 쌀밥 알들이 달라붙으니, 그걸 떼어 먹으며 "형수님! 왼쪽 뺨도 때려주세요!” 했답니다. 고스톱에서 ‘1타 2매’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자, 부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합니다.” 공정하게 일한다고 믿으니 스스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희 생명이 위험할 때>
과거 군대 취사장에서 일했던 ‘저’는 졸병 엉덩이 때리는 군기 잡는 기합용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폭력을 멈추세요!” 라고 했지만 고참사병은 제 호소를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저는 뜻하지 않게 악역을 했습니다. 어느 소설에는 부부싸움 도중 밥을 푸다가 저를 내팽개치며 화풀이용으로 쓰인 적도 있습니다. 물론 던진 사람은 아내 아닐까요? 반토막 나거나 찌그러질 때 저희는 위험합니다. 만일 그 가정이 가난하면 저희를 내버리진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희 생명은 거기서 끝입니다. 바로 쓰레기 분리장으로 직행하게 되겠지요. 이럴땐 “삶의 진정한 기쁨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것이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기 전에 완전히 소진되는 것이다”고 설파한 것은 조지버나드 쇼입니다. 저를 엉뚱하고 부적절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 저희는 단명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제 이름이 이런 데 쓰이니 마음이 아픕니다>
입 아래가 제 모양을 띠신 분의 감정을 잘 압니다. 지구상 70억 명 인구 중에서 인간의 얼굴은 모두 다릅니다. 쌍둥이도 다릅니다. “하느님이 각자의 얼굴을 길쭉하게 하셨든 동그랗게 하셨든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고 신부(神父)한테 들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외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속 내면에서 나옵니다.”라고요. 최근에는 모 개그맨이 성형외과에 가서 ‘턱이 저를 닮았다’며 양악 수술을 했다고 하네요. 그 개그맨은 엔돌핀을 주는 웃음턱으로 바꾸기를 원한 거 같습니다.
끈끈한 액을 분비해서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 중에 ‘끈끈이주걱’이 있는데, 여기도 제 이름이 들어가네요. 식충식물 중에 ‘파리지옥’ 같은 이름이 있는 걸보면 제이름은 양반입니다. ‘끈끈이주걱지옥’이라 안 붙인 게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역할에 불만은 없습니다. “불평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바보들은 그렇게 한다.”는 과학자이자 외교가인 벤자민 플랭클린의 말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도 쓰입니다>
기독교, 불교를 믿으시든 이슬람이나 카톨릭 신자이시든 기도할 때엔 누구나 ‘저’를 이용합니다. 인간의 몸에는 두 개의 주걱이 있습니다. 한 살을 갓 넘긴 손녀가 숟가락 대신 밥을 움켜 먹는 데 쓰는 ‘두 손’이 내겐 ‘밥주걱’으로 보였습니다. “인류의 삶을 인도하시고 기쁨으로 채우시는 창조주여! 언제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게 주신 두 개의 ‘밥주걱’을 가지런히 모아 매일매일 베풀어주시는 감사함에 기도드립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밥그릇, 국그릇, 진수성찬 요리들이 셰프의 손을 거쳐 식탁에 오르기까지 숨은 역할을 해 온 주걱!...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주걱>의 의미를 새로이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주걱’이란 두 글자를 눈에서 가슴으로 옮기는 데, 필자는 60여 년이 걸렸습니다.(끝)
첫댓글 주걱을 의인화해서 작성하셨군요. 흥미진진해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난생 처음으로 주걱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게 기회를 주신 장호병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은샘 이예경님의 칭찬을 받으니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는 귀절이 떠오릅니다.
장호병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머리 속 생각을 짜내서 썼는데요...
내용에 뭔가 감동적인 부분은 없어서 더욱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