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구간은 밀재부터 광덕산이다. 경각내장추월산 군에서 추월산 군 나머지와 광덕산 군 일부다. 이중 추월산 군인 밀재(380m)를 들머리로 하여 추월산(729m), 710봉(710m), 인산밭재(330m), 391봉(391m), 천치재(290m)를 지나 광덕산 군인 532봉(532m), 용추봉(560m), 508봉(508m), 오정치재(240m), 510봉(510m), 광덕산(584m)이다.
올 월간산 6월호 호남정맥 편에 정맥 전체를 21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별로 고도표와 거리 그리고 주요 특징이 실려 있다. 이 자료로 밀재~천치재 9km, 천치재~광덕산 24km를 알 수 있었고 합하니 33km다. 이번 구간도 지난 구간 못지않게 긴 거리다.
나는 이번 구간을 권영우, 강화 셋이서 마쳤다. 산행일인 23일에 절교하기 전에는 무조건 오라는 죽마고우 아들 결혼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고향 수원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다. 어느덧 은퇴나이도 됐고 대부분 친구들은 여러 해 전부터 직장을 나오기 시작했다. 수구초심이라고 이젠 고향친구가 그리워진다.
사전 이형도 팀장에게 귀띔을 하고 날머리를 물으니 광덕산 우측 도로로 내리라는 답이 왔다. 마침 한문희 총대장과 통화가 되어 뜻을 전하고 구간에 대해 물으며, 거리가 멀지 않냐 하니 충분하다는 말을 한다. 이래서 도상연습에 들어갔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니 추월산, 가마골, 용추봉, 강천산이 지나온 내장산, 백양사 못지않은 명소다.
내가 혼자 산에 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여러모로 생각하다 백두대간을 함께 한 권영우에게 전화를 했다. 둘이는 대간의 반 이상을 걸었었다. 현역이면서 시인이고 이젠 한 발 나아가 소설에 도전하고 있는, 촌음을 아껴 쓰는 후배다. 이 친구의 가장 큰 매력은 색다른 분야에 도전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이 없는 점이다.
이래서 권과 강화 나 셋이 뜻을 모았다. 당연히 권이 계획을 짰다. 우리는 14일 금요일 밤 11시 18분 영등포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올랐다. 그간 단편소설 한 편을 탈고하느라 기가 빠진 모습이 역력했다. 차 안에서도 소설에 대한 평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익산이다. 아차 싶어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역이 정읍이라는 안내방송에 감각적으로 깼다. 짐을 내리는 그에게 내가 요즘 자주 다니는 지역이라 잘 알고 있으니 백양사역에서 내리자고 했다. 사실 백양사역은 지난 산행에서 정상교 회장이 알려줬었다. 이 친구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내 의견을 따랐다. 내 계산에는 밀재가 백양사에서 그리 멀지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양사역에 내려 보니 한적한 시골역이다. 그러니 불빛이라곤 역사와 가로등밖에 없고 사람은 우리 셋과 직원 한 분 그리고 인천에서 와 혼자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가는 등산객이 다다. 이럴 줄 알았다는 권의 실망스런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는 정읍사역 인근에서 해장국도 먹고 물과 개스를 사려고 했다며 투덜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딱히 방법이 없어 역사 밖으로 나가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보다는 괜한 말을 꺼낸 내 자신이 싫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주먹구구식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감각적으로 판단함에 후회가 일기 시작했다.
둘에게는 가만히 앉아 쉬라고 하고 해결에 들어갔다. 먼저 역원에게 물어 개인택시 기사를 깨워보니 밀재라는 지명을 처음 들어 본다며 추월산은 장성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는 답을 한다. 내 상식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산꾼이 아니면 아무리 지역이라도 다니지 않는 고개이름까지 알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식당은 고사하고 차편 하나도 없었다. 인천에서 온 사람은 시간을 보내다 버스로 백양사로 이동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중년 한 분이 표를 예약하고 나간다.
곁에서 보니 겉모습이나 말투에서 친근감이 많이 묻어났다. 그를 따라 나갔다. 트럭에 시동을 거는 그에게 사정을 말하니 이해가 된다는 듯 많은 얘기를 들어주더니 어렵다는 답을 준다. 내 모습이 딱하게 보였는지, 잠시 고민하다 자신도 지역 산악회 회장으로 전국을 다닌다며, 자기 차에 오르란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주문된 새 차를 전국에 배달하는 사람이었다. 오른 차도 비닐을 뜯지 않은 채다. 이번 차 목적지는 영등포 당산동이었다. 내려오는 차를 예매했단다. 친절함에 넉넉함까지 가진 그와 정읍까지 오면서 내내 편안한 대화를 했다. 정읍까지 가는 길 역시 마지막 색채를 뿜어내는 단풍 숲이라 어둠 속의 자태 또한 생전 처음으로 맘껏 보고 느꼈다. 올 가을에 이런 뜻하지 않은 선물이 이어진다.
이렇듯 삶에는 극적인 장면이 많다. 권도 이런 반전은 기대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젠 오히려 시간을 잘 보냈다고 한다. 그는 이 상황을 놓고 분명 소설 한 꼭지를 생각해 냈으리라. 영등포역에서 사온 크리스티 도넛 12개 들이 상자로 답례하니 다행히 고맙게 받는다. 1+1 행사를 하던 도넛이었다. 그 하나를 기분 좋게 나눴다.
정읍역 앞에서 감자탕에 막걸리로 속을 달래고 부족한 물품을 보충했다. 등산 채비를 본 주인이 행선지를 듣더니 조금 있다 택시기사 한 분을 모셔왔다. 그 역시 밀재는 생소했다. 콜택시 센터에 한참을 묻더니 미터기 요금으로 가잖다. 권이 조사해 온 택시비는 35,000원이었다.
택시기사도 청정무구 그 자체여서 대화가 편했다. 정읍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 준다. 얼마를 가다보니 추령이다. 이때부터 나도 할 얘깃거리가 생겼다. 거기다 섬진강 마을 얘기며 단풍얘기가 나오더니 밀재에 이르러서는 애기 단풍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요금은 27,000원이 나왔다. 3만 원을 주니 맑게 웃으며 잘 다녀가란다. 상부상조다.
내리고보니 백양사가 그리 멀지않았다. 역시 백양사역이 훨씬 가까웠지만 우리에게 이동수단이 없었던 거다. 그간 전용버스로 이동하다 보니 이런 고마움을 몰랐던 거고 몇 십리 거리는 쉽게 봤던 거다. 이런 걸 뒤늦게나마 알아가는 나도 어찌 보면 아직은 철부지다. 앞으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겠다.
# 밀재에서 추월산까지 2km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은 시작점에서 북진을 한다는 거다. 추월산까지는 낙엽진 부드러운 길을 편하게 걷다 오름이 나오고 다시 평지 비슷하게 걷다 다시 오름이 나오는 구조다. 제법 올랐다 싶었을 때 앞에 유난히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가 서있다. 그게 추월산 정상이었다. 투사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면서 나에게는 괴물로 보였다. 섬뜩했어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바위 능선을 따라 올랐다.
머리 큰 눈사람을 닮은 앙증맞은 정상석이 어둠에 혼자 서있었다. 이정표도 있고 리본도 제법 날리고 있었다. 보리암쪽과 월계리 두 방향으로 길이 있고 이미 지나간 산악회의 바닥지도 양쪽에 놓여있었다. 혹시나 하고 나침반을 꺼내 지도를 정치하고 방향을 잡았다.
여명이 시작되고 시야가 트면서 추월산 연봉이 하나 둘 모습이 드러나자 우리는 탄성을 하며 걸었다. 그 느낌을 잘 표현한 언론사 기사를 옮겨 놓는다. 느낌은 같으나 역시 전문가가 보는 눈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경향신문 기사다.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을 걸쳐 둥지를 튼 추월산(秋月山·731m) 정상에서 바라본 담양호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거기다 단풍을 보는 맛도 좋다.
산세가 급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언뜻 악산처럼 보인다. 등산객들은 그러나 다가가면 어느 명산 못지않게 ‘포근한 산’이라고 입을 모은다. 초보자도 오를 수 있는 높이여서 사시사철 등산객들이 몰린다. 남쪽 담양읍에서 바라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닮아 ‘불심(佛心)’을 키우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추월산은 전체가 전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돼 있다. 추월산은 이름에서부터 가을 냄새가 잔뜩 묻어난다. 가을밤 산꼭대기에 보름달이 걸려 좀체 기울어지지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 추월산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거대한 담양호가 받쳐줘 계절 분위기를 더욱 살려낸다. 낮에는 만산홍엽의 산 그림자가 호수에 빠져 물빛이 원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단풍산’으로 널리 알려진 인근 내장산보다 단풍이 더 곱고 아기자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곳곳에 볼거리도 많다. 해발 650m 지점, 깎아지른 절벽에 제비집이 얹힌 듯 자리한 사찰 보리암(菩提庵·문화재 자료 제19호)은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한 곳이다.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갖춘 가마골 용소는 4단 폭포로 영산강의 발원지다. 이 절에 얽힌 전설은 보리암이 ‘작지만 큰 절’임을 알려준다. 지눌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나무로 만든 매 3마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호남의 대사찰인 송광사(순천)와 백양사(장성)도 인근에 있다. 보리암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왜군에게 쫓기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순절(殉節)한 터가 보존돼 있다.
그를 기리는 비문이 바위에 새겨져 전해내려 온다. 동학혁명 때는 세상 바꾸기를 꿈꾸던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처절한 전투를 펼쳤고, 6·25 전후로는 ‘빨치산’의 활동 공간이 되기도 했다.
산림이 잘 보존돼 있는 것도 매력이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솟아 있는 송림·참나무·느릅나무·단풍나무가 지천이다. 등산로를 따라 이들 나무가 울창한 터널을 이뤄 여름철 등산이 한결 수월하다.
봄철 산기슭에 어우러져 활짝 핀 진달래와 벚꽃을 먼 발치에서 보면 꽃마차 행렬을 이룬 듯하다. 곳곳에 산대나무 군락을 볼 수 있고, ‘추월산란’도 자생한다.
추월산에 들어오면 영산강의 시원(始源)인 가마골 용소를 지나칠 수 없다. 용소는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한 4단 폭포다. 암벽에 부딪친 물살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솟구치는 모습이 발길을 잡는다.」
절경이 이어지고 어느 지점부터는 마치 금강산 만물상 한 부분인 양 착각에 빠진다. 길은 전반적으로 암릉에 너덜겅이다. 밧줄이 있을 정도로 급경사가 제법 되는 곳도 있다. 그러나 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기 있는 낙엽 길보다는 덜 위험했다.
낙엽 쌓인 길이 미끄러워 두어 번 주저앉았다. 이 구간에서 조심할 점이다. 일기예보나 날씨를 볼 때 어제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구간이 이어져 신경 쓰며 걷다 아래 담양호를 보다 힌트를 얻었다. 아마도 호수의 습한 기운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가인 연수관은 직진에서 90도 우측 꺾인다. 앞으로 길이 쭉 나있어 그 지점에 있는 이정표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구조다. 아닌게아니라 앞서던 권이 보이지 않아 역시 빠르다고 생각할 무렵 산 저편에서 길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바로 따라왔다.
내리는 길은 생각보다 경사가 심했다. 밧줄도 여러 번 잡고 내렸다. 가끔 만나는 쓰러진 나무도 진행을 방해한다. 우리가 5시 50분에 올라 여기까지 왔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으면 3시 경에 오르는 우리 팀은 이쯤에서 헤드랜턴을 벗을 것이다.
내리다가 담양호 물 대신 물안개를 본다. 영월 동강 한반도 지형을 연상케하는 도로도 선명히 들어온다. 다만 그곳은 아스팔트고 양쪽 대칭이 너무 정확해 인공적인 맛이 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지나온 산과 골짜기 마다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끝 무렵 단풍을 조감도 보는 식으로 감상하기에 알맞은 곳이기도 하다.
내린 연수원에 차가 많이 있었다. 토요일 이른 시간이라 선 지 사람은 보지 못하고 개만 요란하게 짖고 있다. 가인 연수원이니 아마도 법원 쪽 시설이 아닐까 추측만 할 정도로 안내문 하나 보이지 않는다.
# 가인 연수관 인근인 순창군 복흥면 하리가 김병로 선생의 생가다. 최근 순창군에서 6.25동란 중 소실된 생가를 복원하였다. 생가 터에 있는 안내문을 본다.
「이곳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생가터이다. 조선 중기 도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 손인 가인은 이곳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지냈으며 변호사 시절에는 6.10만세 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무료 변론 활동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가로서 우리 사법부 역사상 법조 3성(3聖, 전북출신 법조계 3대 성인)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가장 추앙받고 있다.」
사법부 독립을 위한 노력,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노력은 물론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자 ‘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그 내용이 헌법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통령과도 맞서던 대쪽같이 곧은 성격이다 보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 잘 있냐는 식으로 그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인 선생에 대해 전해오는 수많은 일화 모두 결벽에 가까운 청렴이다. 몇 가지를 간단하게 보면, 박봉을 참지 못한 한 판사에겐 ‘나도 죽을 먹고 살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라며 달랬고, 추위에 덜덜 떨던 판사들이 잉크병이 다 얼었다고 하자 ’영하 5도가 되기 전까지는 난방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일축했고, 예산을 돌려보내며 법관의 허리띠를 졸라맨 이유로는 ’공직자에게는 청렴이 우선이다‘는 말 등등이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가인 선생은 현재 북한산둘레길 순국선열묘역이 있는 순례길 구간에서 영면하고 계시다. 내 기억이 맞는 다면 그분 묘지 옆에 시위소찬(尸位素餐)이란 유명한 글귀가 있다. 시위소찬이란 능력이나 공적도 없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서 한갓 관직만 차지하고 녹을 받아먹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어린아이를 조상의 신위에 앉혀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데 이 때 신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시동이라 불렀다. 시위는 그 시동이 앉아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시동이 신위에 앉아하는 일 없이 조상 대접을 받듯이 아무런 능력이나 공적도 없으면서 남이 만들어 놓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시위라고 한다, 소찬은 공짜로 먹는 것을 말한다. 아무런 재능이나 공로도 없이 녹을 타먹는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간회는 민족 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1927년 함께 결성한 민족운동 단체다. 이상재 선생을 회장으로 민족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를 배격하는 등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양 진영 간의 반목으로 인하여 1931년 해산하였다.
# 가인 수련관 뒤편으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리본 하나가 방향을 알리고 있다. 일구는 밭을 지나 작은 임도 앞 능선 길에 리본이 제법 날린다. 능선을 하나 길게 돌고는 다시 임도를 만난다. 길이 이런 구조라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임도를 택했을 것이다.
200여m 경사를 오르니 다시 낙엽이 수북이 덮인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진다. 낙엽 밟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 느낌이 좋았다. 그동안 나는 낙엽 밟는 소리는 바스락 거린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생각한대로 소리가 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적막한 산속에 푸짐한 낙엽 위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밟히는 소리에 따라 노래를 부르니 반주가 된다. 이렇다면 낙엽도 하나의 악기다.
천치재를 얼마 남기고는 등산로를 가로 지르는 감나무 열매와 부딪혔다. 다시 보니 이파리 하나 없는 열매 100% 감나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처져있다. 우리는 다리도 쉴 겸해서 배낭을 내렸다. 잠시 아랫부분을 손댄 정도인데도 금방 배낭 반이 넘었다. 더 욕심 부리다가는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접었다.
산을 점한 나무에 따라 바닥길이 달랐다. 처음에는 참나무 낙엽을 밟았고 어느 쯤에서는 청미래 낙엽을, 천치재를 앞두고는 단풍나무와 솔잎 종류의 낙엽이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애기 단풍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키 작은 단풍도 많이 보고 지났다.
자동차 소리가 앞에서 들림에 조금 더 내려 보니 아스팔트 도로다. 이정표는 추월산을 가리키고 몇 발 더 내리니 천치지다. 이 재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과 전남 담양군 용면을 잇는 29번 국도가 지나간다. 뭔가를 팔고 철수한 도로변 판매대에 자리를 잡았다. 옆엔 무시래기를 빨래 널 듯 가지런히 널어놓았다. 정 회장이 진공청소기라며 부르던 실가리다.
버너에 불을 댕기고 라면을 끓이다 보니 도로 건너편에서 노부부가 배추를 수확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건너가 라면을 드시라고 하니 먹은바와 같다며 천천히 들고 가란다. 그 분 인상도 살아있는 부처님이다. 호남정맥을 통해 온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산수가 좋으니 그 정기를 다 타고 나는 모양이다.
새벽부터 걸어왔다니 이외로 그분은 밀재를 알고 계셨다. 바쁜 와중임에도 물어보는 말에 편히 답을 해 주신다. 할머니도 간간이 답변에 나선다. 그 밭이 전라남북도 경계선이란다. 그 분들은 장성과 담양을 하루에도 수십 번 넘나들고 계셨다.
“이곳이 가마골이라 하던데”
“그렇다. 가마골을 낀 산이 용추봉이다.”
“천치재가 산속에 있는 줄 알았다. 차가 많이 다닌다.”
“버스도 하루에 몇 번 다닌다. 그걸 타고 가라.”
“아니다. 우리는 용추봉을 지나 강천산까지 가는 길이다.”
“거리가 멀다.”
“원래 그런 산행을 하는 중이다.”
라면에 찬밥을 말고 복분자주로 건배를 하는데 할아버지가 손에 무얼 들고 오셨다. 버스시간표와 면내 택시전화 번호다. 우리 힘을 덜어주는 배려에서다. 하긴 대부분 사람들은 등산이라 하면 단일 산행으로 알고 있는 게 일반적이다. 술을 권해도 사양하시기에 튼실한 인삼 두 뿌리를 골라 드리니 고맙다며 받으신다.
권이 차편 있다는 말을 듣더니 그제서야 그간 소설을 쓰느라 기가 빠졌다며 여기까지 억지로 걸어왔다는 말을 한다. 요즘 본의 아닌 생활로 지친 나 역시 솔깃했다. 거기다 독한 술로 담은 복분자술 영향으로 취기까지 오른다, 지도를 보니 10km 정도를 왔다. 앞으로 강천산까지는 9km 정도다.
권은 등반 능력이 출중한 사람 중 하나다. 3년 전인가 불수사도북 소위 서울 북쪽 5개산을 13시간대에 주파한 걸 보았다. 나도 제법 걷던 백두대간 종주 때도 그는 봉우리 두어 개를 먼저 넘고 밥을 해놓고 기다리곤 했었다. 체형도 걷기 딱 알맞고 거기다 학창시절엔 마라톤을 한데다가 대간 때에는 헬스클럽에서 다리 근력운동도 겸했던 그였다. 그러던 사람이 이러는 걸 보면 새로 도전한 소설쓰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게 새삼 떠오른다.
“오늘 종주는 마치고 차로 강천산으로 이동하자.”
“아니다. 가자면 가겠다.”
그러나 내심은 아님을 읽었다. 거기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던 강화마저 갑자기 다리에 쥐가 왔다며 고통스러워한다. 겨우 풀고 나서도 말이 없다. 원래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팀 구성원이 이러면 여기서 접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치재산, 용추봉, 오정자재까지 약 9km는 아래서 걷고 오정자재에서 강천산까지는 그때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배낭을 정리하면서 남은 쑥가래떡과 시루떡, 도너츠 1상자를 길 건너 노부부에게 전하니 배추와 무를 가지고 가란다. 고마움도 표하고 짐도 줄일 겸인데 할머니까지 나서 진심으로 권하니 어쩔 수 없었다. 무게는 차치하고 종아리만한 무 두 개와 커다란 배추 한 포기, 오면서 딴 감이 들어간 배낭 틀이 그럴듯하다. 지리산 종주 첫 배낭 무게와 진배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무게다.
# 우리는 걸은 국도를 낀 산 아래도 시작부터 장난이 아니다. 탐스럽게 잘 자란 적색 홍색 녹색 3그루 단풍나무가 사이좋게 한 군데 모여 있었다. 교통신호등 마냥 어서 오라며 초록나무를 앞에 세웠다. 이 신호를 따라 전라남도에 드니 역시나 야생화며 각양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며 빛과 바람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속으로 이 길을 택하길 잘 했다고 되뇌이기가 여러 번이다.
나무와 풀에 해박한 권이 이 나무 저 나무 설명을 하며 지났어도 지금은 수수꽃다지 외에는 나머지는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무며 야생화는 너무 어렵다. 아무리 책을 들여다봐도 그때뿐이다. 몸으로 익히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로 보인다. 이런 중요한 일을 그냥 지나가며 고개만 끄덕이니 지금까지도 이 모양이다.
산 위에서 보던 U자도로도 지났다. 그렇게 보면 이곳은 산맥이 크게 U자를 돌고 아래 도로는 작은 U자를 그리고 있다. 가마골 입구 얼마라는 이정표도 만나고 느티나무가 곱게 가을빛으로 물든 기와집도 지났다. 사람보기가 힘들어서인 지 갈색톤의 시골마을에 와서는 괜히 마음이 스산했다.
도착한 마을은 오정자재가 아니라 담양군 용치면 3거리다. 그렇다고 누구를 만나 물어볼 수가 없어 길을 건너니 길가에 대봉을 넓게 펼치고 파는 주인은 젊고 건강한 남자가 감속에 파묻혀 앉아있다.
“감이 탐스럽다. 얼마냐.”
“20개에 만 원이다.”
옆에 있던 권이 저 정도면 서울에서 하나에 5천 원을 받는다며 비싸서 손이 나가지 못했다던 그 정도의 상품이란다. 이 말을 들었는지 젊은 사장도 서울에 4만 원을 받고 넘긴단다. 아스팔트를 한 시간 이상 걸어와서인지 다들 지친 표정이다. 사장에게 물었다.
“3만 원어치 살테니 강천산까지 부탁한다. 새벽부터 걸어 이젠 다 지쳤다.”
“점방은 누가 보나.”
“그러지 말고 부탁 한 번 하겠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감을 상자에 담기 시작한다. 상자 당 정확히 20개를 세어 넣더니 남은 감은 다시 하나씩 상자에 배분한다. 정확히 29개다. 그리고 어른 주먹보타 큰 단감 하나씩을 더 넣어 30개로 마무리 진 다음 테이프를 힘차게 뜯어 감는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상쾌했다.
시동을 거는 차는 앞 뒤 문이 두 개 있는 트럭이다. 물건을 정리하더니 타란다. 뜻밖의 환대에 배낭에 남은 초코랱과 초코파이를 주니 고맙게 받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천치재에서 할아버지에게 도넛은 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권과 나는 짐칸에 탔다. 달리는 차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훈훈한 인심에 청청 자연 속을 지나는 맛이 너무 좋았다. 올 가을엔 무슨 복이 터져 이럴까 싶었다.
10여 분 달리니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강천산 입구다. 행락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교통순경도 많이 동원되어 있었다. 짐차에 우리를 싣고도 순경 앞을 거리낌 없이 지나는 걸 보니 서로 잘 아는 사이거나 아니면 관광객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싶었다.
우릴 차에 태워준 사람은 ‘문영민’이고 계절 과일을 취급하는 ‘영농원’ 주인이다. 산 입구에서 잠시 생각하더니 내리지 말라더니 순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냥 직진이다. 1분이 채 넘기 전에 차를 세운 곳에 동생이 있었다. 그 역시 감을 팔고 있었다. 그 덕에 배낭과 감 세 상자를 동생에게 맡기고 우리는 맨 몸으로 홀가분하게 강천산을 즐겼다.
# 강천산 역시 언론의 글을 인용한다. 걸어보니 그대로다. 다만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강천산(584m)은 아름답고 편안하고 소박하다. 이웃한 산성산(603m), 광덕산(578m) 등을 묶어 등산을 즐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듯 자박자박 걷는 쪽이 더 나아 보인다. 강천산의 백미는 ‘음이온 산책길’이다. 이에 대한 안내판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강천산엔 폭포가 여러 곳이다. 폭포 주변엔 음이온이 많이 생성되는데, 이를 흡수하며 걸으면 힐링도 되고, 건강도 얻는다는 것이다.
음이온 산책길은 매표소부터 구장군 폭포까지 왕복 5㎞ 남짓 거리다. 매표소~병풍폭포~강천사~현수교~구장군 폭포로 이어진다. 산책로는 잘 닦여 있다. 산길치고 폭도 넓은 편이다. 높낮이도 완만해 왕복 세 시간 남짓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쉴 일이 없다. 길은 구장군 폭포에 이를 때까지 줄곧 계곡과 동행한다. 계곡과 폭포에서 떨어진 물 입자는 음이온을 만든다.
산책로에서 처음 만나는 명소는 병풍폭포다. 2002년에 만들어진 인공폭포다. 병풍처럼 펼쳐진 절벽 위로 크고 작은 두 개의 폭포가 조성돼 있다. 폭포에선 쉼 없이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워낙 가늘어 안개비가 내리는 듯하다. 이 덕에 햇살이 비치는 오후 무렵이면 늘 폭포 아래쪽으로 무지개가 걸린다.
폭포 맞은편은 단풍 숲이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이파리가 붉은빛으로 선연하다. 음이온 산책로 옆으로 목재 데크 길이 나 있다. ‘숲길 산책로’다. 음이온 산책길이 계곡을 따라 걷는 반면 숲길 산책로는 산 중턱을 따라간다. 병풍폭포에서 강천사 앞 삼인대까지 5㎞ 정도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가파른 구간이 많아 난이도는 꽤 높은 편이다.
산책로를 따라 애기단풍 터널이 이어진다. 스물두 그루 메타세쿼이아와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도 빼어나다. 숲을 나서면 곧 강천사다. 신라 진성여왕(887년) 때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집이다. 강천사 초입엔 범상치 않은 자태의 모과나무가 서 있다. 밑동부터 가지까지 깊게 주름이 패였고, 노송처럼 이리저리 휜 모양새에선 신산했던 삶의 궤적이 느껴진다. 모과나무는 300년 묵었다고 한다. 강천사와 더불어 늙은 셈이다.
절집에서 십 여분쯤 걸으면 구장군 폭포다. 이때부터 하늘이 활짝 열린다. 폭포를 품은 절벽은 그야말로 기골이 장대하다.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 이에 견주자니 폭포는 실핏줄처럼 가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군립공원이자, ‘호남의 소금강’이라 상찬받는 강천산의 진수를 여기서 맛본다.
절벽 여기저기엔 마한시대 아홉 장수가 죽기를 결의하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구장군폭포는 원래 마른 폭포다. 장마철에만 폭포수가 쏟아진다. 한데 물을 끌어올린 뒤 흘려보내면서 이제는 늘 폭포수가 쏟아지는 모습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구장군폭포에서 온 길을 되짚어 내려온다. 만나는 이들마다 표정이 밝다. 웃음소리도 맑게 느껴진다. 음이온을 한껏 들이켠 덕이지 싶다. 그중 몇몇은 맨발이다. 발에 닿는 흙의 느낌이 좋았던 게다. 등산화 벗은 아저씨는 흔하고, 운동화 벗은 여고생도 간혹 눈에 띈다. 두 손으로 신발 들고 산길 걷는 모습이 꽤 평화롭다. 음이온 산책길은 일부 구간을 빼고는 바닥이 잘 다져진 흙길이다. 매표소 가까운 곳에 발을 씻는 세족대가 마련돼 있으니, 흙 묻을 걱정일랑 접어두고 맨발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좋겠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바위들도 하산 길에서야 눈에 든다.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에서처럼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다. 단풍에 가려져 있었을 뿐, 바위는 우직한 생김새 그대로 서 있다. 붉은빛 구름다리도 오른다. 강천산의 명물이다. 계단을 따라 급한 산비탈을 올라야 하지만, 품은 그리 들지 않는다.
구름다리는 현수교다. 지상 50m 높이에 폭 1m, 길이 76m다. 빨간 구름다리 위에서 굽어보는 풍경이 멋들어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위아래로 출렁이는데,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짜릿함도 맛본다. 날머리는 신선교다. 음이온 산책길 한번 돌아봤다고 선계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마음만은 신선이다.」
왕복 10km 산책로에 숲길을 지나고 구름다리까지 다녀왔으니 이번에 어찌되었던 우리가 걸을 길은 25km 남짓이다. 산도 걷고 아래지방도 즐기고 따스한 인심도 느꼈다. 당초 계획한 광덕산은 말 그대로 계획이었다. 현재 내 몸 상태나 함께한 권이나 강화 모두 거기까지 가기는 한계가 있었다.
일정을 마치고, 권이 포기상태에서 만난 형제의 고마움을 느꼈는지 서울로 가면 한 번 도와준단다. 형 못지않은 겸손과 이해심이 깊었던 동생에게도 배낭을 탈탈 털어 나온 인삼 세 뿌리를 답례로 주었다. 옆에서 장사하던 분들이 오늘 밤에 잠 어떻게 자려하냐며 웃는다.
동생이 불러준 콜택시를 타고 순창읍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다리가 풀린다. 마침 서울로 가는 버스가 30분 뒤에 있었다. 중국음식점은 정기휴일이고 터미널 인근에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배낭을 매고 감 한 상자씩 들고 다니는 일행을 보던 이들이 슈퍼마켓 가면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단다. 들어가 보니 구석에 몇 명 앉는 자리가 있고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잔과 바로 담근 김치를 준다. 어묵과 햄을 데우고 소주를 잔에 따라 수고했다며 조용히 잔을 부딪쳤다. 어느 늦 가을날 순창과 담양의 하루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 호남정맥을 하면서 여러 이유로 아랫길을 여러 번 걸었다. 물론 정통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든 아니든 그랬다. 하지만 내장산부터 이곳까지는 산 아래 선택을 잘 했다는 생각이 지금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어제 저녁 무렵 한문희 대장 전화를 받았다. 숲길체험지도사 교육이 벌써 5기가 진행된단다. 통화를 하면서 나침반 강사인 한 대장이 교육생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라는 느낌이 왔다. 관악산이 교육장이니 분명 신림역 주변일거다. 거기서 내 얘기가 나와서 전화를 했단다.
“잘 다녀왔냐. 말해준 대로 갈만하지 않았나.”
“덕분에 겁 없이 나섰다. 좋은 경험을 또 했다.”
“그곳은 산 아래도 빼어나다.”
“맞다. 최고다. 이번 주말에 전화하겠다.”
# 지난 번 백양사에서 나와 일행과 간단한 뒤풀이가 있었다. 단풍과 지천인 감나무에서 붉은 빛을 내뿜는 가운데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외롭게 노란빛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들을 담장삼고 커튼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을 커튼 삼아 자리해 닭고기 회라는 별미를 맛보았다. 그러다 맛에 취하고 정취에 취했었다. 그때 정 회장이 중용(中庸)을 말했다.
우리 고전이던 중국 고전이던 요즘은 찾는 이가 예전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옛날을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아주 일천한 실력과 생각이나마 고전을 논해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서양문명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빠르게 변화를 가져왔다. 급기야 근세에 들어서 동양의 정신문명은 그들에게 한마디로 참패를 했다. 연유로 뒤늦게나마 서구를 따라 잡으러 아니 일단 돈이 되는 학문에 오늘까지도 전념할 수밖에 없는 슬픈 시절을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차치하고, 그러면 지금 소위 선진국이라는 대부분의 서양을 보자. 그들은 뿌리 없는 나무만 키웠다. 마치 꽃꽂이처럼 일단 보기 좋은 꽃만 키웠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사는 사람들이다.
자 그러면 다시 심심찮게 들리는 해외 뉴스를 보자. 학생이 학교에 총기를 난사하고, 자기 어머니 머리를 들고 다니면서도 하나 거리낌이 없다. 그러고도 그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조차 모른다. 무수한 예가 많지만 입에 담기가 부끄러워 여기까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었다.
다른 예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건 온 국민의 박수를 받을 만한 이유다. 그는 주심이 플레이볼을 선언하면 먼저 모자를 벗고 깍듯이 인사를 하고 시작을 했다. 여기에 미국인들은 놀랬다. 아니 저들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저러나. 이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과 물질이 보인다.
최근 미국을 위시하여 뜻있는 서구인들은 동양의 정신을 배우고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여기까지면 힌트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이래서 수박의 겉핥기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욕은 아무리 먹어도 감수하겠다.
요즘 인문학 열풍이 부는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벼슬을 하던 농투성이로 살던 뜻있는 분들은 경전에 도통했다. 지금 말하면 인문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위에 이순신 장군은 무예를, 추사 선생을 글씨를, 황희 정승은 정치를, 정도전의 답전보에 나오는 노인은 농사를 하셨다. 말 그대로 4서 5경이 공통과목이었던 셈이다.
흔히 4서 하면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율곡 선생은 대학을 먼저 읽어 큰 틀을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근본을 세우고 다음에 맹자를 읽고 그 정신이 고양되는 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 유교의 심오함을 깨우치라고 하셨다.
이왕 무례를 저지른 김에 내용의 분량이나 선택도 마음대로 정했다. 성균관에 계신 이기동 선생의 역주를 따랐다. 맹자와 한문 원본은 생략하나 가급적 한 번은 집었으면 한다. 몇 번 읽으면 깊은 가을밤을 느끼는 맛이 분명 다를 거라고 확신한다.
먼저 대학이다. 경일장(經一章)을 옮긴다.
「큰 학문의 길은 밝았던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과 하나가 되는데 있으며, 지극히 좋은 상태에 머무는 데 있다.
가서 머물러야 할 목적지를 안 후에 (방향의) 결정됨이 있고, 방향이 결정된 후에 고요할 수 있으며, 고요해진 후에 평온할 수 있고, 평온해진 후에 잘 사려할 수 있으며, 사려가 잘 된 후에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구조에 뿌리와 지엽이 있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는 시작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이 있으니,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알아서 하면 진리에 가까워진다.
옛날에, 밝았던 덕을 천하에 다시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안락하게 하며, 그 집을 안락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 그 뜻을 정성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혜를 이룬다. 지혜를 이루는 것은 사물에 접하여 사물을 연구하는 데 있다. 사물이 연구된 후에 지혜가 이루어지고, 지혜가 이루어진 후에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뜻이 정성스러워진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몸이 닦이며, 몸이 닦인 후에 집이 안락해지고, 집이 안락해진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화평이 된다.
천자에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이 모두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도 말단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니며 그 두텁게 여겨져야 될 것이 엷게 여겨지고, 그 엷게 여겨져야 될 것이 두텁게 여겨지는 경우는 (아직) 있지 아니하다.」
다음은 논어다. 학이편 제1장이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지방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마지막으로 중용이다. 제1장이다.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라는 것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알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중이라 천하의 큰 뿌리이고 화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첫댓글 미리 다녀 오셨군요
부지런도 하시네~
호남정맥에 대한 애정 멋집니다
월말산행때 봅시다
ㅎ 그렇게 몰래 사알짝 다녀 오셨군요
산행기속 내용에 공감백배 ,저도 함께 길동무로 있군요
답사기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역시 아래로 가겠노라는 ㅎㅎㅎ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