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산우 여러분 모두의 새해 만사형통을 빌면서 시작해본다.
병신(丙申)년 새 아침이 밝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나고 있다.
오행에서는 병(丙, 천간)과 사(巳, 지지)를 양화(陽火)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올해는 뜨거운 열기와 빛을 발산하는 태양의 해다. 참고로 촛불, 난롯불, 전등불과 같이 약간의 밝음과 온기와 열기가 있어 비교적 가정에서 필요한 불도 있다. 이러한 불을 음화(陰火)라고 하고 정(丁), 오(午)를 음화로 분류한다. 참고로 여자 일주(日柱)가 정(丁)이면 보지도 말고 데려가라는 말이 있다. 가장 여성스럽다 말로 최고의 신부라는 것이다.
신(申, 지지)과 경(庚, 천간)은 금석류 중에서도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면서도 일체의 자연적·인공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즉 제련·가공하지 않고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금석류다. 양금陽金이라고 한다. 이를 볼 때 올해는 큰 불과 원석이 만났다. 둘 다 양(+)이다. 불火은 금金을 극한다.
참고로 내 사주 중 일주가 병신이다. 천간이 병丙으로 태어난 것은 태양과 같이 타오르는 즉 남자로서는 가장 강하게 태어났으나, 지지가 신申 즉 부인이 강한 원석이고 둘 다 양이다. 이러니 평생을 서로 투다닥 거리며 살았다. 만약 같은 쇠나 돌이라도 모래나 자갈 등으로 변화가 일어났거나, 칼이나 보석류 등과 같이 가공된 유酉였다면 비둘기집이었을 거다. 참고로 극을 당하는 대상은 여자도 되고 재물도 된다.
새해가 밝아오고 낙남정맥은 마무리 된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달콤한 휴식 대신 배낭을 지고 격한 걸음을 마다하지 않은 산우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다시 돌이켜봐도 사회인으로서 반 년 이상을 주말 산행으로 인해 가족과 주변인들의 양해를 얻는다는 게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금 더 보면, 현금의 낙남정맥 팀은 자유인 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마친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기에 산행별로 뜻을 하는 이들이 합세했다. 내가 알기로 중심에 선 이들은 백두대간, 한북정맥, 한남금북정맥, 낙동정맥, 호남정맥에 이어 이번에 낙남정맥을 마쳤다. 다음 출정지는 금남정맥이 이미 공지된 상태다.
누군가 내린 백두대간 완주는 체력, 경제력, 시간 등 세 조건이 맞아야한다고 했다. 몇 번을 새겨 봐도 현답이다. 거기에 정상교 회장님이 추가한 “나이, 직업, 이름도 묻지 않는다.”를 더하면 산이라는 단 하나 주제를 놓고 빈도화지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니 매 구간마다 수많은 명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주말을 희생한 환산되지 않는 반대급부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댓가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남한 1대간 9정맥 끝자락에 서는 날을 향해 꿈을 키우고 있을 산우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더 나아가 통일 조국에서 1대간 13정맥을 마치는 날 잔을 부딪칠 날도 그려보니 괜히 흐뭇하고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 낙남을 시작하면서 구간 개략을 살펴본 바 있다. 여기에 다시 그대로 옮기고 새겨본다. 어떤 것이든 반복을 하다보면 할 때마다 조금씩 깊어지고 넓어진다. 전문인들조차도 반복의 정도에 따라 그들끼리의 격이 달라진다. 테니스공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려면 적어도 10만 번 이상을 라켓에 맞춰봐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반복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체화體化라는 단어의 의미이기도 하다.
먼저 개관이다.
낙남정맥은 이 땅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에서 마지막으로 분기되는 산줄기로 총 도상거리는 241km다. 지리산 주능선 상에서 가장 신령스럽다는 영신봉에서 분기한다. 여기서부터 300~800미터의 높고 낮은 등성이로 이어가는 낙남정맥은 북으로 임천강, 경호강, 남강이 흘러드는 낙동강을 받든다. 다시 말하면 낙동강의 남쪽 울타리다. 영신봉에서 옥산에 이르는 짧은 남쪽 능선을 걷는 동안은 서쪽으로 섬진강물을 보내지만 방향을 동쪽으로 정한 이후로는 남쪽 바닷가 개울들만 적신다. 계속해서 마산의 무학산, 김해의 익산을 지난 후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에서 끝난다.
신산경표에서는 남쪽 불모산, 화산을 지나 낙동강의 하구로 뻗는 줄기를 낙남정맥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연유에서 자유인 낙남 2기 종주대는 신 낙남정맥길 34km를 더 걸음으로서 논란을 없앴다. 2회가 더해지는 운영에서 자신감을 봤다. 다른 곳에 비해서 모든 게 한 수 위다.
낙동정맥의 가장 큰 의미는 그것이 남부해안지방의 분계라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생활문화와 식생, 그리고 특이한 기후구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산줄기다. 이 산줄기의 남쪽 해안지방은 연평균기온이 제주도 다음으로 따뜻한 14℃이며, 난온대산림대를 형성한다.
지리산군을 제외하고는 함안 여항산(770m)이 최고봉이 될 정도로 대부분 낮은 산으로 이어지지만 남해바다와 인접한 산줄기인 탓에 시야가 확 트이는 조망이 일품이며 남녘 산 특유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정맥이다.
지나는 주요 도시로는 하동군, 진주시(=자타국), 사천시(=사물국), 고성군(=고자미동국), 함안군, 마산시(=골포국), 창원시(=미오야마국, 탁순국), 김해시(금관국=남가라국) 등에서 볼 수 있둣 이 땅 역사의 뿌리는 가야국이다. 현장을 걸어보니 당시 가야국이 도시국가 형태 연맹체라는 게 눈에 보였다. 그들이 독자적이면서 공존하는 형태로 살아온 이면에는 낙남정맥이라는 산줄기 영향이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생각까지 하게 된다.
주요 산은 옥산(玉山 614m), 무선산(無仙山 278m), 봉대산(鳳臺山 409m), 천황산(天黃山), 대곡산(大谷山 543m), 무량산(無量山 579m), 성지산(聖智山 393m), 깃대봉(521m), 영봉산(靈鳳山 395m), 여항산(餘航山 744m), 서북산(西北山 439m), 광로산(匡盧山 720m), 대산(大山 727m), 대곡산(大谷山 816m), 무학산(舞鶴山 763m), 천주산(天柱山 656m), 구룡산(九龍山 434m), 정병산(精兵山 567m), 대암산(大岩山 655m), 황새봉(393m), 분산(盆山) 등이다.
다음은 직접 지난 정맥길이다.
영신봉(1651.9m) → 4.0km → 1254봉(1254m) → 3.0km → 삼신봉(1284m) → 1.1km→ 외삼신봉(1288.4m)→ 2.2km → 묵계치(810m) → 1.7km → 고운동치(800m) → 0.7km → 880봉(880m) → 0.7km → 고기재(7908m) → 2.7km→ 790봉(790m)→ 2.0km → 길마재(490m) → 3.7km → 양이터재(510m) → 5.1km → 돌고지재(310m) → 1.1km → 526.7봉(526.7m) → 1.3km → 천왕봉(602m) → 3.3km → 배토재(170m) → 0.6km → 하선암재(190m) → 1.4km → 안남골재(170m) → 3.0km→ 옥정산(244m)→ 2.2km → 밤재(100m) → 1.6km → 원전고개(10m) → 2.0km → 245.5봉(245.5m) → 5.1km → 딱밭골재(120m) → 2.6km→ 선들재(80m)→ 1.1km → 109.5봉(109.5m) → 2.5km → 덕천주유소(60m) → 1.7km → 태봉산(190.2m) → 3.0km → 유수교(35m) → 3.5km → 버드골재(60m) → 2.3km → 실봉산(186.3m) → 0.7km → 말무덤재(130m) → 3.2km → 남해고속도로(60m) → 1.2km→ 모산재(60m)→ 1.1km → 와룡산(93.8m) → 5.4km → 170.1봉(170.1m) → 2.2km → 봉전고개(130m) → 1.3km → 무선산(277.5m) → 3.9km→ 돌장고개(90m)→ 3.9km → 357봉(357m) → 3.9km → 객숙재(340m) → 2.6km → 봉대산(409m) → 1.8km → 양전산(310.9m) → 1.0km → 부련이재(170m) → 0.5km → 문고개(180m) → 1.7km → 백운산(391m) → 0.4km → 426봉(426m) → 3.0km→ 배곡고개(185m)→ 0.6km → 천황산(342.5m) → 추계재(190m) → 404봉(404m) → 대곡산(542.9m) → 화리치(385 m) → 578봉(578m) → 큰재(320m) → 백운산(485m) → 장밭고개(230m) → 덕산(278.3m) → 배치 고개(175m) → 신 고개(175m) → 탕근재(369m) → 386봉(386m) → 새터재(190m) →1.9km→ 필두봉(416m) → 0.9km → 담티재(195m) →0.6m→ 용암산(399.5m) →1.1km→ 남성치(180m) →0.8km→ 385봉(385m) →0.7km→ 벌밭들(418.5m) →1.6km→ 깃대봉(520.6m) →1.9km→ 발산재(150m) →1.0km→ 326봉(326m) →3.6km→ 363봉(363m) →2.5km→ 큰정고개(350m) →0.9km→ 527봉(527m) →1.3km→ 오곡재(385m) →0.7km→ 557봉(557m) →1.1km→ 미산재(550m) → 0.6km → 743.5봉(743.5m) → 0.9km → 여항산(770m) → 2.7km→ 706봉(706m)→ 1.6km → 서북산(738.5m) → 3.5km → 649.2봉(649.2m) → 2.1km → 한티재(190m) → 1.6km → 광려산(720m) → 0.7km→ 752봉(752m)→ 1.1km → 657봉(657m) → 1.5km → 대산(727m) → 3.0km → 쌀재(300m) → 쌀재(300m) →0.7km→ 대곡산(516m) →2.6km → 무학산(761.4m) →1.2km→ 662봉(662m) →3.2km→ 두척교(120m) →0.3km→ 마티고개(130m) →1.0km→ 송정고개(130m) →4.3km→ 516봉(516m) →1.0km→ 천주산(638.8m) →0.4km→ 613봉(613m) →1.2km→ 천주봉(484m) →1.1km→ 굴현고개(175m) →1.6km→ 용강터널(70m) →1.0km→ 신풍고개(90m) →4.3km→ 293.8봉(293.8m) →1.1km → 봉림산(566.7m) →4.2km→ 용주고개(380m) →1.2km→ 510봉(510m) →0.7km→ 517봉(517m) →0.5km→ 남산치(400m) →1.1km→ 607.4봉(607.4m) →0.7km→ 대암산(669m) →1.1km→ 신정산(707m) →1.8km→ 용지봉(743m) →3.1km→ 471.3봉(471.3m) →1.5km→ 냉정고개(90m) →0.7km→ 장고개(80m) →3.3km → 396봉(396m) →1.8km→ 황새봉(392.6m) →2.7km→ 덕운봉(360m) →3.5km→ 낙원고개(90m) →3.5km→ 나밭고개(110m) →1.9km→ 402.9봉(402.9m) →1.6km → 영운리고개(270m) →2.1km→ 신어산서봉(630m) →1.4km→ 신어산(630.4m) →1.5km→ 생명고개(290m) →5.8km→ 동신어산(459.9m) →2.1km→ 매리2교(10m)로 도상거리는 241km다.
그러나 이 숫자는 자료 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문기관에서 나서서 빠른 시일 내에 표준 통계가 만들어져야 될 분야다. 이런 게 하나하나 쌓여야 진정한 문화선진국이 되는 것 아닌가.
# 신년 1월 2일 낙남정맥 마무리를 했다. 김진원과 강화 님이 동행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거절했거나 사정이 있었으면 혼자라도 강행하려고 했던 여정이었다. 이래서 지난 월요일 이형도 팀장의 참석 안내 문자에 할 수 없이 불참을 알리고 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유는 이랬다.
낙남정맥을 시작하면서 가야가 눈에 들어왔다. 현장을 한발 한발 걷다보니 기회가 더욱 좋았다. 기대한 대로 지나는 도시마다 가야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이러면서도 왜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실체인 가야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을까가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하기 보다는 무관심으로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도시 전체에 녹아있는 가야에 대해 왜 아직도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까. 역사학자의 몫이라서 아니면 소규모 지자체라 돈과 힘이 없어서 아니면 먹고 살기가 바빠서 아니면 이래도 저래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고 내 관심 밖이라서 등은 외부인의 눈으로 볼 때 쉽게 떠오르는 지적일거다. 그렇다고 내가 나설 문제는 물론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이런 게 현실이라면 나 혼자라도 만족할 때까지 알아보려는 호기심이 작동했다. 이래서 내 특유의 물고 늘어짐이 시작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대로 지나갈 도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선행학습을 했다. 보이는 자료는 닥치는 대로 읽었고 인터넷과 서점을 뒤지며 양을 늘려갔다. 지역마다 떨어진 파편을 주워 모았다. 한참을 이러다보니 뭔가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급기야 김해 지방으로 들어오면서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김해는 건국 시조 김수로왕릉, 구지봉 등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다. 특히 이 지역에서 가야의 역사 특히 일본사를 다시 써야만 할 유물이 발굴되었음은 차치하고라도 지금도 연구가 가장 활발히 진행되는 곳이니, 그 느낌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도시 김해는
「2015년 말 현재 1읍 6면 12동에 528,955명 남 267,269명 여 261,686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부산광역시 강서구와 경계를 두고 있으며, 북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와 접하며 남서쪽으로 창원시와 접하고 있다. 온대기후지역으로 4계절 구분이 뚜렷하고 남해의 해양성 기후 영향을 많이 받아 전국에서 가장 온화한 편으로 인간 활동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5도 내외이고 평균 강수량은 1,200mm로 우리나라 평균 강수량 1,274mm와 비슷하다.
김해시가市歌 1절 역시 다른 인접 도시와 마찬가지로 가야로 시작된다. “가락국 오백년 전통 터전을 잡고, 나날이 새 시대를 꾸며온 고장, 바라보면 구지봉 신비한 근원, 오늘도 우리에게 힘이 솟는다.”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김해에 금관가야를 창건했으니 가락국, 구지봉 등이 자연스레 내용에 녹아들었다. 지나온 다른 도시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김해시는 532년 신라에 합병되어 금관군으로 되고, 756년 통일신라 때 김해소경으로, 971년 고려 때 김해부로 고쳐진다. 그러다 1895년 조선 시대에 김해군이 되고 1981년 시로 승격이 된다.
김해시 노래는 ‘가고파’ 작사·작곡가인 이은상 선생과 김동진 선생의 작품이다. 노산 선생이 1982년 향년 79세로, 김동진 선생이 2009년 향년 96세로 별세한 점을 감안해 보면 만년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렇듯 가야가 없는 김해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번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방문한 김해에 도착하자마자 가야대학이니 구지동이니 구산동 등부터가 눈에 보였다. 그 전에 몇 번 다닐 때는 이러지 않았었다. 낙남정맥 마지막 회 차에 참석했었다면 구간을 생략하고 혼자라도 김해 심장 속으로 들어가 그 현장을 봤을 거다. 그래야만 응어리 진 속이 뻥 뚫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다 때 마쳐 연휴가 있었다.
같은 말 같겠지만 김해에 들기 시작하고 두 어 구간 전부터 이러고는 싶었으나 단체행동 와중에 혼자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함께 걷던 정 회장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봐도 그 역시 아쉬워할 뿐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따로 시간을 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연휴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러고 얻은 것 또 하나는, 수원 친구들 신년 산행에 참석할 수 있는 거다. 몇 년 전부터 정맥과 친구들 산행 일자가 겹쳐 책망을 들어왔다. 이번에 만나면 후래자지삼배 세례를 톡톡히 치를 거지만 그래도 이 한 번의 참석으로 그간 소원함은 없어질거고 이게 고향 친구들과의 사이가 아닌가 한다.
김해 방문 하루는 이랬다.
새벽 3시 모닝콜로 일어나, 서울역에서 새벽 5시 10분 발 KTX산천을 타고 7시 40분 경 진영역에 내려 신어산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재첩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영화 촬영지인 은하사 길을 택해 오른 신어산 630.4m 정상에서 술 한 잔을 따라놓고 낙남정맥 대단원의 종료를 고했다. 내려와서는 김수로 왕릉을 답사하고 밀면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다시 김수로왕비 허황후릉, 구지봉,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 고분군, 봉황동 유적지를 찾은 뒤 김수로 왕릉으로 되돌아와 한 번 더 답사하며 이해를 더했다. 반경 2km이내 정도라 걸어서 했다. 귀경 시 여유가 생겨 봉하마을 독수리 바위를 둘러보고 늦은 식사 후 다시 20시 11분 진영발 KTX신천에 몸을 싣고 서울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23시 30분 경이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정말로 소중하게 사용했다. 기회만 된다면 다시 몇 번이고 찾아볼 계획이다. 유물 발굴이 계속되면서 역사가 다시 쓰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답사한 곳을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본다. 먼저 신어산이다. 몇 번 산행기에 인용했던 김장호 선생님의 글을 옮겨본다. ‘한국백명산기’를 통해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산악문학의 개척자이자 선도자다. 이 책은 대할 때마다 한참 멍하다. 우리 산과 결합한 역사, 종교, 민속, 풍수, 언어학, 문학 등을 아우르는 한국 인문학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그의 신어산에 소감이다.
「산은 우선 높고 봐야 한다. 얕아서는 인간냄새가 풍기기 일쑤요, 그만큼 산기山氣가 덜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고 1,000m에 못 미치는 산에도 그 산 놓임새나 앉음새 또는 품새에 따라 그만한 산격을 지닌 산들이 더러는 있다. 그 중에도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만한 흔적으로 널리 알려져, 국내에서들 그 이름을 칭송해 내려오는 산을 두고 명산이라 이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어산이다. 사실 신어산과 고대 가야문명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어산(630.4m)은 무어니 하더라도, 그 높임새에 까닭이 있다. 낙동강이 흘러 남해로 어울려드는 어구, 그 낙동강이 훑어 내려온 내륙의 비옥한 젖줄과 바다 밖에 문화를 기름진 김해평야에다 빛나는 가야문화로 빚어낸 그 현장을 굽어보고 앉았기 때문이다. 수로왕뿐이었겠는가, 아도간, 여도간, 파도간 등 아홉 부족장도 모두 이 산에 올랐을 것이다. 그들도 오늘 나처럼 이런 생각에 젖었을 것이다.
산에 올라보면 자연이 얼마나 교묘하게 짜여졌는가를 알게 되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산줄기와 강줄기 그 서리(=무엇이 많이 모인 무더기의 가운데)에 터를 잡는 들판이 마치 이와 입술처럼 서로 물리고 빨려들어 거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합당하게 그야말로 편안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 것을 새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이 산끼리 뭉쳐 있는 산 속에서는 시야가 가려 그것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인데, 여기 신어산에 올라보면 참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그 산을 일부러 그렇게 빚어놓은 게 아닌가 여겨질 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산 봉우리에서 정남으로 내다보는 낙동강 하구와 그 너머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며 열려 있는 남해 한바다의 조망은, 그 산이 거기 솟아있지 않았던들 그 강, 그 바다에 뜻이 있을 것 같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눈의 조리개를 가늘게 좁혀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거기 열여섯 살 꽃다운 허비 황옥낭자가 돛에 바람을 가득 담고 이리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뱃머리에 서 있는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수로왕이 유도간을 시켜 마중 나가게 한 망산도란 어드메쯤일까, 저기 녹산 앞에 둔치도, 아니면 명지 앞바다의 장자도일까. 혹은 진우도일까, 명지 삼각주가 지금처럼 크지 않고 을숙도 같은 자그마한 델타였을 때, 그쯤 하구의 어는 작은 강물 속의 섬이었을까. ‘삼국유사’에 전하듯이 금수능라, 금은주옥, 의상필단 갖가지 그릇과 노리개를 가득 싣고 수로왕에게 시집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다 밖에 신기하고 드높은 지혜를 여기로 전하러 오는 것이다.
멀리 들려오는 것은 뱃전에서 울리는 북소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묘음관세음의 소리요, 세간의 어두운 소리들을 물리칠 만큼 아름다운 소리였던 것이다. 그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목소리요, 나중에 범패의 또 다른 이름, 어산魚山이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신령스런 어산의 그 현장인 신어산은 멀리 인도양에서부터 발원하여 동지나해를 거쳐 북상하면서 동북아시아를 두루 기름지워주는 그 흑조黑潮(= 북적도 해류의 연장에 있는 난류이며, 투명하고 진한 남색을 띤다.)를 맞아들이기 위한 가장 합당한 자세로 거기 그렇게 솟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조를 타고 오는 물고기로 상징되는 문화유산은 비단 불교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가까이 김수로왕의 왕릉 홍살문에, 또는 이 산기슭 서림사의 수미단에 새겨져 있었다는 쌍어문雙魚紋은 몽고 박물관 돌솥에도 새겨져 있고, 또 힌두교에도 그 흔적은 있으니, 그것은 멀리 바빌로니아문명에 이어진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물론 그 문양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수로왕 왕릉의 것만 두고 보더라도, 홍살문에 새겨진 쌍어는 X자로 두 마리가 서로 교차된 문양이었으나, 지금 납릉정문의 문틀 위에 그려진 것은 탑을 사이하여 서로 마주보고 있다.
허왕비의 출신지라는 아유타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개는 지금 갠지즈강의 유역, 그 옛날 마우리아제국시대에 코살라왕국의 수도였다는 아요디아라는 설에 기울고 있지만, 어쨌거나 흑조에 실려 오는 물고기는 그대로 허왕비의 가야 입국으로 상징되면서, 또 가야문명 그 자체의 표상이기도 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그랬을까, 녹산 쪽이나 명지 쪽에서 쳐다보는 신어산은 흡사 고기 한 마리가 하늘바다를 헤엄쳐가는 시늉을 하고 있다. 그것은 동서로 치닫는 이 산 주능선이 평면을 유지하며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사실 물고기는 한 자리에만 머무는 법이 없는 것이다.
영원히 수평운동을 일삼는 문화의 본성이 그렇듯이, 그래서 이 산 배후로 장장 525km를 흘러 낙동강은 그 유역에 23,860㎢에 걸쳐 젖줄을 물려주고, 여기 이르러 바다와 합세하여 가야문화를 꽃피운 끝에, 다시 일본을 비롯한 바다 밖으로 그때 벌써 가야의 주요 산물이었던 철과 더불어 그 문화를 실어내었던 것이다.
그 높임새로 하여 신령스런 이 산 내력은 남쪽 기슭에 호젓이 자리 잡고 앉은 서림사와 동림사의 앉음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온전히 불타버리고, 지금 사우는 두 절 다 그 이후에야 재건되었으니 물론, 거기서 어떤 유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 위치로 하여 김해평야의 풍요와 지금부터 1,500년은 실히 되는 서기 2세기에서부터 5세기에 걸치는 금관 가야문명의 번성을 그려보는 것이다.
동림사는 최근에 꾸며졌으니 더구나 그렇다 치고, 서림사는 얼마 전까지 은하사란 이름으로 다분히 속화되어 있었으나, 본디는 수로왕 때 기우국 출신의 장유 화상이 창건한 절로서 수로왕 또는 가락국과 깊이 관련한 듯, 문헌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이다. 그러나 그 수미단에 새겨져 있었다는 쌍어문은 지금 흔적이 없고, 또 석축을 쌓다가 발굴했다는 신어동천이라 새겨진 빗돌은 문외한의 눈에도 그 석질이나 글씨가 전혀 예스럽지가 않다.
산줄기는 낙동강을 등지고 앉아 좌우로 날개를 펴드는 폼으로, 김해평야와 그 앞바다를 온전히 감싸 안는 형국을 하고 있다. 정상에서 동으로 생명고개로 뻗은 줄기는 까치산으로 꺾어 내리거나, 그 어중간에 안동절 쪽으로 내성을 둘러치고 있지만, 서쪽으로 흐르는 줄기는 630m봉에서도 내쳐 지금 가야골프장이 들어앉은 영운이고개 영마루까지 뻗었다가, 거기서 쭉 남쪽으로 치내리면서 분성산을 일구고, 그 끝머리에 수로왕 탄생지로 알려진 아담한 구지봉을 앉혀놓고 있다.」
이후 전개되는 자료는 여러 자료를 참고해 대부분 그대로 옮겼다. 내 자신의 기록으로 남기는 입장이고, 또 이럴 수밖에 없는 가야에 대한 일천한 내 지식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읽는 이가 있다면 이 점 양해 바란다.
구지봉龜旨峰을 시작으로 가야 유적을 추적해 본다.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해발 20m에 불과한 낮은 분지다. 비록 한눈에 보기에도 작고 초라한 동산에 불과하지만 가야 문명의 발상지이며, 가야국이 성지다. 원래 거북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구수봉龜首峰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탄강지로, 이곳 주민들은 이곳을 ‘개라봉’이라고 부르며 신산으로 받들어왔다. 개라봉은 바로 ‘가락봉’의 변형된 이름이다.
구지봉 근처에는 그 어떠한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정상 부근에서 약간 비껴난 자리에 고인돌 하나가 놓여있다. 김수로왕이 출현하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이 고인돌만이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한 채 비밀의 땅 가야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이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상석의 규모는 240x210x100cm로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도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 덮개돌 위에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고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시대 최고 명필 ‘한석봉’이다.
가야 탄생의 신화를 『삼국유사』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으로 한 재편성을 보고, 뒤이어 평가를 보자.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년 3월. 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부터 북쪽에 위치한 구지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인기척이 들렸다. 무리 200~300명이 그곳에 모여드니 형체는 없고 사람 소리만 내어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구간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내가 있는 곳을 무엇이라 하느냐.”
구간들이 대답하였다. “구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내게 명하기를 임금이 되어 이곳을 다스려 나라를 새롭게 하라 하셨도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런 연유로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마땅히 흙을 뿌리며 이렇게 노래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노래를 부르면서 뛰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기뻐서 뛰게 되리라.“
구간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잠시 후 머리를 들어보니 자줏빛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 있었다. 끈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보였다. 열어서 보니 해와 같은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무리들이 모두 놀라 기뻐하며 백 번 절을 하였다.
얼마 후 다시 알을 싸서 안고 아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무리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열이틀이 지나고 난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무리들이 다시 함께 모여 상자를 열자 알 여섯 개가 변하여 사내아이로 되어 있었으며, 용모 또한 매우 출증하였다. 이윽고 평상 위에 앉으니 무리들이 하례의 절을 올리고 극진하게 공경하였다.
아이들은 나날이 성장하여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이 9자나 되었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왔음으로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을 대가락 혹은 가야국이라 일컬었으니, 육가야 중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오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화는 전승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이루어지는데, 당대인의 역사 인식에 따라 가공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한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이 건국되었다거나 또는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그 시대의 역사 사실로 볼 수는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수로왕 탄강 설화는 연구 분야에 따라서 천손강림 설화, 농경 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고대인들의 사상과 역사적 배경 등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내용 가운데 수로설화의 성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붉은 폭에 둘러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왔다.’ 라고 하는 천손강림天孫降臨과 난생설화의 요소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단군 신화 이래 대부분 천손강림사상이 들어 있다. 수로왕 설화 역시 높은 산봉우리인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등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배자는 이러한 관념을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하고, 일반민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한 새로 변신하는 능력이라든지 허왕후와의 결혼담은 지배자로서의 위용과 건국시조로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천강신화는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로왕은 단순히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김해지역 또는 가야지역으로 이주한 선진집단인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김해지역에는 토착집단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각각 대표하였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을 것이다.
9간 세력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고, 새로 도래해온 수로왕 집단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이었을 거다. 따라서 서기 42년이라는 가락국의 성립연대는 역사사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나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를 통해 볼 때는 타당하지 않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난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로왕이 천손이라는 관념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로서,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피지배층에게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 합법화, 신성화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수로왕 외에 5명의 왕이 난생하여 6가야를 이루었다고 하는 ‘6란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의하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는 12개의 국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가야지역에 선진철기문화를 소유한 집단이 나타날 무렵의 고고학적 현상 역시 『삼국유사』 '오가야 조' 에 보이는 가락국을 제외한 5개의 나라에 비정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6란설’은 후대의 ‘가야연맹체’ 관념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수로왕 탄강 설화에서는 이외에도 해양문화적인 요소도 담겨 있다. 천강설화의 요소인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북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 바다동물인 거북 역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수로왕의 성인 김씨와 관련된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큰 성씨가 김해 김씨이다. 그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왕력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거등왕은 아버지가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개황력에는 성이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임인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란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니 개황력에 실려 있다. 이 두 글에서는 수로가 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보인다. 이로 보아 두 가지 기원설 모두 가야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왕족과 마찬가지로 김씨성金氏姓이 칭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수로왕릉을 간략하게 요약해 본다.
「수로왕릉은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AD 42~532년) 시조대왕의 왕릉이다.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이며 가락국을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침이다.
왕릉 앞의 납릉정문 위에는 신어상神漁像이라 불리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잇는 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문양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어,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것과 연결시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고대의 낭만적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좋은 자료이다.
신어문양의 납릉정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원형봉토분 외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 숙이게 하는 위엄을 느끼게 한다. 봉분의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정도이고, 봉분 앞에는 능비·상석·장명등·망주가 있으며, 왕릉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하여 부속건물 및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숭신각(신도비각)은 가락국 역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의 빈궁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전한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공개되어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 대부분 그대로 인용했다.
나 역시 가야는 오래전 역사책에서 배운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도 시험을 치르기 위해 억지로 외웠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단순 지식 정도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가야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서 주변에 있는 10여 명과 대화를 나눠봤다. 이럴 즈음 가야에 대한 내 지식은 몇 번 업그레이드 된 상태였다.
우선 경상남도(가야 지방)에서 나고 자라 현재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떠나기 전 가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거나 알고 있었나.”다. 사전에 내가 알고 있는 가야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한 뒤다.
“관심을 가질만한 여력이 없었다. 다른 공부가 우선이었다.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 60대 초반 교육자.
“박물관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솔직히 자세히는 모른다.”, 40대 후반 연구사.
“85년도 결혼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학창시절 신어산과 구지봉으로 소풍을 다녔으나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인지는 몰랐다. 가야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 50대 주부.
그 외 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가야금, 금관가야, 철기문화 등 단어를 연결하는 정도였고, 그나마 좀 관심 있는 사람은 광개토왕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임나’라는 단어까지는 알고 있었다. 나를 포함 국민 모두가 이제는 역사에 대해 관심을 넓혀갈 때다. 나라에서 역사교과서로 논란이 되는 지금, 그 여론의 방향을 틀어 살아있는 역사 교육 기회로 만들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간 다녀봤던 외국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에 자긍심이 대단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역사와 연관이 되면 기념관을 만들고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없는 것까지도 인위적으로 만들 정도로 과히 병적이었다. 특히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면서 가장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인들이 꼼짝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부분은 그들의 일천한 역사다.
내가 이번에 답사한 곳은 신어산을 제외하고는 걸어서 다닐 정도로 일정 거리 안에 모두 있었다. 초·중·고등학교와 교육청 등 여러 개 교육기관이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가지고 간 자료까지 비교해가며 아주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다음 일정인 대성동 고분을 갈 때였다. 참고로 대성동 고분에서는 1990년대 초 일본의 역사책을 다시 써야할 정도로 엄청남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박물관을 나오고 제일 먼저 초소가 보이기에 가는 길을 물었다. 제복을 착용한 비교적 젊은이가 안내를 맡고 있었다.
“대성동 고분을 가려고 하는데...”
“잘 모른다.”
할 수 없이 오던 길을 돌려 다시 안으로 들어가 안내자에게 물었다. 지도를 주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대성동 고분을 가려고 하는데...”
“길 건너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와 보니 박물관 옆 야트막한 언덕길에 사람들이 왕래가 많았다. 고분이라 생각하기 쉬운 높이이나 다니는 이들은 마치 공원을 산책하듯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역시 그곳은 고분이 아니었다. 안내인이 알려준 대로 길을 건넜다. 유물 모형 문향의 조형물이 길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좌우로 오갔다. 이정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40대 초반 부부가 지나가기에 물었다.
“대성동 고분을 가려고 하는데...”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농고 옆이라고 하던데.”
“학교도 모른다.”
옆을 지나던 사람이 뭔가 알려줄 듯 자신 있게 다가왔다. 가벼운 옷차림새로 볼 땐 동네 사람이다.
“대성동 고분을 가려고 하는데...”
“이 근처에 그런 건 없다.”
할 수 없이 지도를 보고 찾아 가기로 했다. 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 바로 도는 게 여러 개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길을 몇 번 왕복하다 보니 피곤하기도 했다. 이러길 반복하다 관광안내소를 만났다. 우선 김해 안내 책자를 챙기고 물었다.
“대성동 고분이 이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바로 길 건너다.”
그 고분군을 근처에 두고 20분 정도 벌어진 장면이다. 어이가 없기보다는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바로 눈앞에 사는 현지인들 의식조차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역사를 바라보는 현주소가 이렇다면 곤란하다. 김해시에서도 그 흔한 도로 표시판이나 이정표 하나 만들어 놓지 않았다. 발굴 당시부터 콩밭 주인과 시비가 많았던 곳이다. 이렇게 방치된 곳에서 일본인들에 충격을 줄 정도의 엄청난 유물이 나왔을 거라는 역설은 문법에 맞지 않는다.
이곳뿐이 아니었다. 수로왕릉 주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왕릉 주변은 한때 도시 중심부였다가 도시 팽창으로 지금은 구舊도시로 밀려나 있으나 왕년의 중심부답게 도로 구조나 상가가 지방 소도시 규모로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릉을 관람하고 나서 우리가 마주친 것은 허름한 차림새의 외국인들과 그들의 향신료였다. 상가도 거의가 그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난립해있었다. 아직 철거하지 않은 네온 장식물에는 ‘세계인의 크리스마스’라는 글씨가 유난히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이국을 여행하는 것으로 착각될 정도다.
택시기사에게 물었다. 외국국가 수가 많은 걸 은근히 자랑하는 투다.
“외국인이 많다. 유적지 주변에 조금 심한 것 같다.”
“외국인만 5만 명 가까이 된다. 아시아에 없는 나라가 없다. 그들이 있어 우리 수입이 좋다. 내가 김해 토박이인데 그 전에는 전체 인구가 5만이 되지 않았었다.”
내 물음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동문서답이다. 이런 답이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요즘 경기가 바닥을 치고 먹고 살기가 어렵더라도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여기까지는 삶의 현장이니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보더라도, 700년의 역사의 문을 연 왕의 무덤 주변을 이런 식으로 방치하는 김해시청은 과연 이런 사정을 알고 있으며, 무슨 이유에서 이런 식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비유가 적정한지는 몰라도 요즘은 짜장면만 잘 만들어도 그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런 시대에 이와 같은 엄청난 문화유산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김해시에서 조금의 관심만 가지고 그들 수준의 머리 한계가 있다면 다른 것은 그만두고 관광 분야 단 하나 만으로 홍보하고 정비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가 흘리는 몇 푼에 비하겠는가. 김해시 재정이 열악해서 그렇다면 중앙정부나 국민에게 호소라도 해야 한다. 세수도 중요하지만 나라 역사문화의 자존심도 지켰으면 한다.
아무리 열이 나도 혼자만 끌탕할 일이다. 괜히 속이 끓는다. 이래서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워물었다.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기러기가 날아간 자리를 참새 떼가 대신하고 있다. 담배 한 대를 더 물고서야 들어왔다. 이번 후기와 벌써 일주일째 씨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근에 살면서도 산책로 정도로 알고 있는 많은 수의 김해시민들과 일본의 역사를 바꿔야 할 정도로 귀중한 유물이 나온 대성동 고분은 어떤 곳인가. 최인호 선생의 글을 중심으로 요약해 본다.
김해는 본래 가락국 문화 중심지였으며, 가락국의 맹주국이었던 금관가야의 왕도였다. ‘에가미’ 교수를 비롯 주로 가야사를 연구하고 있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가야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유물이 김해에서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 예측하고들 있었다. 그중에서도 고고학자들이 대성동의 구릉을 주목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대성동 고분군은 높이 2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낮은 구릉이지만 그곳에서 북쪽으로 600미터 떨어진 곳에는 가야의 건국신화가 깃들어진 구지봉이 있었으며, 동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는 김수로왕릉이 있었다. 또 남쪽으로는 500미터 되는 거리에 옛 가야인들의 취락지구인 봉황대 유적이 있었으며, 그 곁에는 고대인득이 조개를 먹고 버린 조가비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는 조개무지로 유명한 회현리패총이 자리 잡고 있어 그야말로 비밀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성동 고분은 김해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런 지리적 여건 못지않게 고고학자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계기는 김해 사람들이 이 구릉을 특이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부터였다.
‘애꼬(꾸)지’
김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낮은 구릉을 이런 수수께기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경성대학교 박물관팀이 이 명칭에 특히 주안점을 두고 연구한 결과 애꼬(구)지란 명칭은 ‘왜구지(倭龜旨)’ 혹은 ‘애(아이)구지’를 이 지방 특유의 발음으로 경음화시켜 부른 것으로 단정 짓고, 따라서 ‘작은 구지봉’, 혹은 ‘제2의 구지봉’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해석했던 것이다. 만약 이곳이 ‘제2의 구지봉’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 확실하다면 이 지역 일대에 가야의 중요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물론 이곳은 오래 전부터 인근 주민들에 의해 밭으로 개간되어온 농토였다. 간혹 이곳에서 깨진 토기 같은 것이 나온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워낙 도굴과 파괴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므로 경상대학교에서 시험 삼아 표본 발굴을 할 때가지만 해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더구나 능선을 따라 경작된 콩밭을 파헤치는 일은 주변의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갈등의 원이이 되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고분군에서 3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본다.
제1호 고분에서 통형동기 8점과 다섯 사람의 뼈와 소의 아래턱뼈가 함께 출토되었다.
주목할 것은 순장殉葬. 순장은 고대 국가에서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종들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의 농경사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다.
두 번째는 통형동기의 출토다. 제1호 고분에서 8점, 제2호 고분에서 2점 모두 합해서 10점이 나왔나는 사실이다. 통형동기는 지금까지 일본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만 알려졌던(일본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왜계倭系 유물로 그 속에 방울을 넣어 긴 막대기에 꽂아 사용하는 일종의 물미였다. 물미란 땅에 꽂기 위해서 깃대나 창대 끝에 끼워 맞추는 끝이 뾰족한 쇠로, 이는 주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신성한 제구의 일종이다. 더구나 제1호 고분 하나에서만 통형동기가 8점이나 출토됐는데, 일본에서는 하나의 고분에서 그렇게 많은 통형동기가 출토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통형동기는 왜계 유물이 아니라 금관가야 고유의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것이 일본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인 셈이다.
세 번째는 파형동기巴形銅器다. 파형이란 이름이 의미하고 있듯 마치 바람개비의 모습을 닮았다. 파형동기는 통형동기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일본 고유의 유물로 알려져 왔었다. 즉 파형동기는 일본에서 농경문화가 시작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대략 600년 정도를 가리키는 야요이 시대의 유물로서 일본 전역에서 발굴되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에서만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 세계에서 일본만의 고유 유물이라고 인정해 왔던 것이다.
이밖에 철도자, 철창, 철부, 삼지창, 철정, 철로 만든 화살 등 수많은 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가야가 예로부터 ‘철의 왕국’으로 유명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이었다. 이러한 철기류와 함께 말 재갈과 말을 탈 때 발을 딛는 등자, 말 위에 씌우는 갑옷인 마주, 말안장과 같은 마구들이 쏟어져 나왔던 것이다.
이로써 북방과 일본을 연결하는 스테핑 스톤, 즉 디딤돌을 애타게 찾고 있던 ‘에가미’로서는 가야야말로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한 줄기 햇살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서 에가미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 교수다. 동경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아시아 고대사 연구의 일인자로 불린다. 일본의 황국사관에 대해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이란 신 학설을 들고 나와 일본 사학계에 파문을 던진 사람이다.
요약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고구려에 패한 100만 가야 유민이 건너가기 전까지는 ‘왜’라 불렀다. 가야나 신라에서 일본을 볼 때 해가 뜬다. 이후 일본이라 불리고 25대 일본 천황부터 몇 대를 백제와 가야인들이 열어 갔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유물발굴을 통해 북방기마민족 즉 부여인들이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자리를 잡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학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내게는 이런 대성동 고분군이었고, 이런 김해였고, 이런 낙남정맥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회를 준 산우들과 자유인 산악회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 길게 왔다. 가야사 전반에 대한 자료를 요약해 옮긴다.
우리 역사가 삼국을 위주로 쓰여진 탓에 풍부한 청 생산력을 바탕으로 선진문화를 꽃피웠던 가야는 그동안 우리에게 잊혀진 나라로 또는 신비의 고대왕국으로 인식되어 왔다. 1970년대 이후 활발하게 진행된 경남지역의 유적발굴을 계기로 가야가 우리 고대사의 한 축을 당당히 떠받치고 있는 문화국가임이 새롭게 밝혀졌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료를 통해 본 전기 가야사의 개략이다.
「낙동강 유역을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에는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철기문화 및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그들의 선진기술은 서서히 토착농경문화에 파급되어, 늦어도 기원후 2세기 전반 무렵에는 각지에 와질토기와 철기를 제작할 수 있는 정치 세력, 즉 소국들이 나타났다. 수로왕 신화는 김해지역 소국의 성립을 표방하는 정치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2~3세기에 걸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13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소국연맹, 즉 전기 가야연맹체를 이루고, 발전된 철기 생산능력과 양호한 해운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낙랑군, 대방군의 중국 군현 및 한, 예, 왜 등과 교역하며 발전해 나갔다. 한 마디로 가야국의 발전기반은 선진적인 제철 기술과 활발한 해운 교역에 있었던 것이다.
전기 가야연맹이 3세기 경에 김해의 가락국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해상 교통 입지 조건이다. 3세기 당시의 『삼국지』 '위서 왜인전' 과 조선 후기 『택리지』의 기록으로 보아, 김해는 물결이 완만한 남해 및 서해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와 교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입구로부터 거의 평형에 가까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내륙 각지와 연결할 수 있었으며,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의 쓰시마 및 북부 규슈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김해의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 소국들의 관문(Gateway)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로 보더라도, 김해 지방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청동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五銖錢) 등이 발견되며, 일본에서 가져온 토기인 하지키와 벽옥제 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즉,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의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한반도 각지 및 왜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한편 가야 지역 발전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이 지역에 철산지가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김해 감물야촌과 창원 불모산의 사철 생산과 합천 야로의 철광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도 변한의 철이 한, 예, 왜, 및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할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가야연맹은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통합되어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불리면서 안정적인 교역체계를 형성하게 된 듯하다. 즉 광개토왕릉비문의 임나가라는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의 4세기 후반 당시의 이름이며 존재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창 왕성함을 보이던 가야연맹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신라를 구원하러 남하한 고구려 군대에게 참해하였으니, 그에 대한 전말은 광개토왕릉비문에 적혀있다. 즉, 4세기 말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이후 대방 고지를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패권다툼은 고구려의 승리로 결말이 났고, 그 여파로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내려와 임나가라를 급습하였다. 이로서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이는 가야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것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파생되는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결과다. 가야 소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들이 초토화되었다.
둘째로는 백제가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5세기 들어 영산강 유역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인다.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된다.
셋째로는 가야연맹 내의 후진 지역이었던 경상 내륙 지방과 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야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 지방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제조 기술, 도질토기 제조기술 등이 전수되었다고 보인다. 혹자는 가락국의 지배 세력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한 것을 가야의 쇠퇴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5세기에 가야의 선진 기술이 외부로 파급되어, 고령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는 토대를 이루고, 일본 열도에 천황제 정권의 토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 천손이 하늘로부터 규슈(九州)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 즉 구지봉에 하강한다는 내용은, 김해 세력의 파급과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기 가야연맹 해체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의 고대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어서 후기 가야사의 개략이다.
「5세기 전반에 들어 가야제국은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그 기간 동안에 거의 신라 세력에 동조하게 되어 가야의 영역은 크게 축소되고 그나마 가야연맹을 영도할 세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 가야의 문화는 다시 부흥되었으니, 그 진원지는 경상 내륙산간지방에서부터였다.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는 본래 큰 세력이 없고 안정된 농업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5세기에 들어 야로(冶爐) 철광을 개발하면서 크게 성장한다. 고령 지방에 4세기 이전의 고분 유적이 거의 없다가 5세기 이후에 지산동 고분군과 같은 대형 고분군이 나타나는 것은 그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령의 반파국은 5세기 후반에 대가야를 칭하며 대두하여, 13개 소국을 거느린 맹주국이 되어 후기 가야연맹을 형성시킨다. 대가야는 479년에 가라왕 ‘하지’의 이름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의 칭호를 받기도 하고, 481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의 군대를 백제와 함께 가서 막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가야는 6세기 초에 기문(己汶=남원,임실)과 대사(帶沙=하동) 지방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하여, 기문을 빼앗기고 대사를 지켜낸다. 대가야 ‘이뇌왕’은 522년에 신라 왕녀를 받아들여 결혼동맹을 맺었으나, 신라 법흥왕은 이를 이용하여 분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530년대에 가야 남부의 일부 지역이 신라와 백제에게 병합되거나 그 영향 아래 들게 되었다.
신라는 점령지를 군현으로 편입시킨데 비하여, 백제는 가야소국의 독립성을 그대로 둔 채 간섭만 하게 된 점이 다르다. 6세기 중엽에 후기 가야연맹은 고령의 대가야국과 함안의 안라국을 중심으로 남국 이원체제로 분열된 채 백제와 신라 양측의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은 백제에게 반(半) 복속된다. 그러자 대가야의 악사인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가야연맹은 백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관산성 전투에 나섰다가 신라에게 대패하였으며,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 군대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가야연맹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가야 멸망 직전 상황을 소설가 ‘김훈’이 장편으로 그려냈다. 제목은 ‘현絃의 노래’다. 가야를 추적한 또 한 명의 소설가는 ‘최인호’ 선생이다.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다 가야를 제4국이라 칭하고, 일본을 제5국이라 단정한다. 제목은 ‘제4의 제국’이다. 가야가 고구려에 패망 후 일본으로 이주하여 일본 개국에 한 축을 담당했음을 사료와 유물과 현장을 추적하면서 풀어낸 소설이다.
이 후기의 뼈대도 다른 자료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을 반복해 몇 번 읽은 뒤였다. 전까지 일본국은 ‘왜’였다. 역사학자 백 명이 하지 못 한 일을 그 혼자서 해냈다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말할 수 있다.
700년 이상 지속되었고 풍부한 고분 문화를 남긴 가야가 왜 멸망하였는가?
1970년대 이후로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많은 가야 고분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풍부한 문화 유물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가야 문화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이 나타났고, 3-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번성하였으며, 5-6세기에는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이 이어졌다.
이처럼 700년 이상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대등하게 발전하던 가야가 어째서 멸망하였을까? 가야의 멸망 원인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입지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있어서, 소국 간에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어떤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4세기의 국제정세 변동을 거치면서, 4세기 말에 고구려의 군대가 낙동강 유역까지 쳐내려왔는데, 이는 가야가 발전하는 맥을 한동안 끊어놓았다.
셋째로, 가야는 주변의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다. 그래서 대외관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넷째로,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으나, 5세기 이후에는 왜국이 철광산 개발에 성공하고 백제가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이 약해졌다.」
위에 말한 주요 네 가지 요인은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가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야연맹제국은 멸망 후 그들의 힘을 신라와 합쳐서 삼국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이 신라 왕실의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이다. 신라의 발전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가야의 문화와 인물들을 흡수하면서 그들과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즉, 가야는 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를 통하여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 이제 나의 가야 탐방은 일단 이것으로 접는다. 가야에 지식을 더 쌓아가면서 아마추어의 범위까지만 접근하면서 행복에 젖을 것이다. 금남정맥을 걸으면서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와의 관계 등도 같은 맥락에서 도전할 생각이다.
후기 교정을 보다 정상교 회장님의 문자를 받았다. 새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다섯 명의 레전드가 힘차게 팔을 뻗고 있는 모습이다. 힘차고 장엄한 승전고를 울리는 그들의 모습에 피로가 싹 가셨다.
“이 동지 새해 365일 내내 밝고 건강하길 기원해요. 요번 낙남구간 끝 구간 낙동강에서 이르지만 탁족을 해보면 좋겠네요.”
이런 사정이라고 답을 보낼 자신이 없어 문자를 보냈다.
“후기 읽어 꼭 읽어 보시고 가세요.”
낙남 구간 마지막과 신낙남 구간은 참석하지 못한다. 그간 미뤄둔 일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산우들이 얼굴이 하나 둘 떠올라 쉽게 맺어지지가 않는다.
“그간 낙남정맥을 함께해 고마웠습니다. 3월 금남정맥에서 뵙겠습니다. 안전산행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
겨레의 어머니여, 낙동강이여
유치환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 꽃잎이
흘러 흘러 삼랑三浪의 여울목을 떠 내릴 적은
기름진 옛 가락駕洛 백리 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나일」이여,「유프라테스」여, 「간지스」여, 「황하」여,
그리고 동방의 조그만한 어머니 낙동이여
저 천지 개안開眼의 아득한 비로 삼날부터
하늘과 땅을 갈라 흘러 멎음 없는 너희는
진실로 인류의 거룩한 예지의 젖줄
여기는 아시아 노 대륙!
일찍 북방의 암울한 삼림과 야성을 미워하던 한 젊은 족속이
검은 산맥을 넘어 햇빛 바른 복된 땅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헤메이다가
마침내 창망滄茫한 대해로 환히 열려 트인 작은
반도도 남쪽 자락,
물 맑고 줄기 순한, 여기 너의 가슴을 터잡고 깃든 그날로
낙동의 어진 흐름이여, 차라리 너는
순탄하고 가난한 계레와 더불어 그 애달픈 삶을 바닥하고
저 이름도 없는 외로운 부족에서
변진弁辰으로, 가락駕洛으로, 신라로, 고려로, 또 조선으로
만년을 세로 용용히 오늘토록 흐르거니,
흘러 흘러 쉬임없는 가람이여,
너의 줄기찬 흐름 곳
슬고 일던 뭇 왕조의 흥망과 교체사
너 위에 생겼다 사라지는 속절없는 소용돌이 물거품!
그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질탕한 연월烟月의 침부沈浮에도
애달픈 족속은 오직 너를 젖줄하고 면면히 목숨 하여 왔거니
짐짓 가는 자 밤과 낮을 가리잖아
이같이 어제 물이 오늘 물 아니요
오늘 사람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로되
너와 더불어 이뤄진 허구한 영욕榮辱의 사모친 기억인즉
너만이 길이길이 간직하고 전하리라.
너그럽고도 복된 낙동의 가람이여.
연연 칠백리 그리운 너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무수한
사랑인 노래들
眉川, 胃川, 甘川, 會川, 春陽川, 乃城川, 潁江, 黃江, 南江, 琴湖江, 密陽江
다시 그들에로 달려오는 작고 큰 뭇 개울이며 하천은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따라 명암하는 강산의 저 골짝,
이 들녘, 그 언덕
아침 안개 저녁 놀에 펼쳐지는 죄 없는 삶들의 변죽을
굽이굽이 씻어 흘러
가난하고도 후덕하고 숫되고도 완고하고 슬기롭고도
무지하고 어질하고도 비굴하고 대범하고도 용렬하고
질기고도 인종忍從하므로
무수히 빚어나는 웃음과 울음과 한숨과 노염과 그
가지가지의 애락을 어루만지고
달래고 또한 깡그리 거두어
저 망각과 귀일歸一의 지역, 창망蒼茫한 대해로
너는 흘러 보내거니
그러나 끝내 어질지만 않았다 노여운 강물이여,
물을 다스리는 자 천하를 다스린 다거니
네가 가긍하여 젖 주는 이 겨레의
두고두고 가난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
마침내 도도히 부풀은 탁류濁流의 분노로써
그 애달픈 전지田地며 가재며 불쌍한 생령마저
몇 번이나 너는 하루 아침 여지없이 헐벗겨 앗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보다 큰 인자한 다스림의 한 소치所致!
그러기에 노염에서 돌이킨 하나 뉘우침조차 없는
다시금 유유히 포옹하여 변함없이 흘러 있는 모습이여,
아아, 너는 진실로 겨레의 크낙한 어머니
낙동洛東의 가람이요, 영원한 겨레의 젖줄이여,
사랑이여! 노래여!
첫댓글 고요함과 부드러움, 넓은여백이 동행하는 행님의 정적인 흐름에 경의를 표합니다. 병신년 새해 복만땅~, 여유로운 시간 되시고~, 건강하세요 ^^ ^^
낙남의 끝자락을 정초에 함께 하지못해 미안합니다.
느낌을 함께 하며
걸어온 정맥 길들이 아름답게 뒤로 보입니다.
새해 丙申年
영호 동지한테 의미가 클수 있다고 생각되네요
해야하는 일 보다
이제
하고 싶은 일에 푹 빠지시길 바랍니다.
선답하신 낙남 끝자락을
후기를 보고 가게되어 요번산행 길이 설레임도 있고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을것 같네요.....
역사적 존재만을 알고 있던 차에
산행후기를 보고 가야의 많은 역사를 알게되었고
그 느낌을 무임승차한 기분입니다.
산라통일의 근간이되었고 日本歷史의 주류가 되는 가야의 흔적을 밟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