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과 한뜻으로. 빌1:27~30.
https://www.youtube.com/watch?v=AbsB8hC1Hhk 고성준
https://cafe.daum.net/rnjstlgur/DLx1/18 권시혁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1:26절까지 바울이 기쁨에 대한 이유, 기쁨 리스트를 쭉 이야기하고, 27절에 넘어오면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권면의 내용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무나 헌신이나 이런 권면이 아니라, 사실은 누리고 있었던 기쁨의 비결입니다.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기쁨을 누리고 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 여기에 대한 권면이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어의 뜻은 시민답게 살라.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백성들을 향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하늘의 복을 다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누리기를 원하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하늘 백성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 시민답게.
그래서 바울은 구체적으로 하늘 시민답게 살라고 권면하시면서 그것을 통해서 신령한 모든 복들, 기쁨과 즐거움과 샬롬과 충만함의 복을 다 누리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늘 시민답게 사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늘 시민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서 뭔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그것이 하늘 시민답게 살아가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딘가 계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고 믿는 것과 조금 다르지요. 그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고 인식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셔. 이걸 인식해야 합니다. 이걸 인식하지 못하면 살지 못할 수밖에 없어요.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데 그대로 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환경에 의해서 움직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복음에 합당하게 하늘 시민답게 살아가는 가장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셔. 이걸 믿고 인식하고 거기에 딸려오는 감정을 믿고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감정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느끼게 되는 임재의 반응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떨고 즐거워하는 것,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게 두 번째인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크시고, 두려우신 분이다. 부담될 뿐이지, 꼭 하나님 앞에 살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로 정말 기쁘게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에요. 448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의 임재가 우리를 움직이고 춤추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되돌아 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으로 나에게 되돌아오는 거예요.
이것이 지난 내용입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삶으로서 복음에 합당한 삶에 구체적인 결과는 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게 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울은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합력하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에요.
길게 이야기했지만, 첫째는 하나 되는 것이고 둘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 이 두 가지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나오게 되는 결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게 되면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의 결과라고 바울이 얘기합니다.
자! 오늘은 그중에서 첫 번째인 하나 되는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한 바울은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27절에 보면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구체적인 첫 번째는 하나 되라는 겁니다. 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 선조들이 믿음의 최고봉은 연합이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영성의 최고봉은 연합이다.
최고봉이라고 함이 뭐냐 하면 그만큼 올라가기 힘들다는 뜻도 있고, 두 번째는 영광되고 위대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성,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가장 높은 경지에 클라이막스는 연합하는 것, 하나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권면에도 보면, 놀랍게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면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봉사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 되라고 표현해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의 가장 정점이 이거라는 거예요. 하나 되는 삶. 연합하는 삶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연합할 때 그만큼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릴 수 있게 되고, 반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의 최고봉은 연합이라고 그랬어요.
그 이야기는 해 보니까 가장 어려운 것이 이거더라.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도 이거더라. 사실 이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수도원에 살던 수도사들입니다. 수도사는 자기의 모든 삶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배와 기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모든 인생을 드렸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거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분들인데 이분들이 마지막에 고백하는 것이 해 보니까 제일 어려운 것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노동하고 이런 게 아니고, 제일 어려운 것은 저놈과 함께 사는 것이구나. 이겁니다. 그만큼 어렵더라는 겁니다. 저놈과 함께 사는 게 그만큼 어렵더라.
이게 고백입니다. 진짜로 영성의 최고봉에 올라간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연합이라는 삶을 이루게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여기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흉내 낼 수 있어요. 기도 많이 하는 것도 흉내 낼 수 있고, 봉사 많이 하는 것도 흉내 낼 수 있는데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것 정말로 영성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 그게 뭐냐 하면 하나 되는 것, 연합하는 것, 그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전도나 기도를 얘기하지 않고 하나 되라고 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인 지향점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에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 얘기는 하나님처럼 살아간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사시는 것처럼 흉내 내고 따라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사랑이시란 겁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늘 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사랑에는 중요한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 되는 삶입니다. 사랑은 하나 되는 거예요. 제가 삼위일체 교리를 몇 번 설명한 적이 있는데 기독교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있습니다. 세분이신데 한 분이시라는 겁니다. 이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지요. 세분이면 세분이고 한 분이면 한 분이시지 세분이시면서 한 분이라는 게 뭐냐?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 이런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공격을 많이 합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세 분 계십니까? 딱 한 분 계십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공격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세분 하나님이시지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그런데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셨다는 거예요. 사랑에는 어떤 속성이 있냐 하면 너와 나의 둘레를 애매하게 하는 그런 속성이 있어요. 너와 나의 바운더리를 허무는 속성이 있어요.
사람에게는 여기까지가 나라는 바운더리가 boundary 있습니다. 프라이버시라고 그러지요. privacy. 이 이상 침범하지 마. 여기는 내 영역이야. 그래서 공간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돈을 사용할 때도 내 통장에서 지불하면 좋겠고, 하여간 여기까지가 나의 바운더리야 이런 게 있는데 사랑은 이 바운더리를 애매하게 만들고 허물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아기가 아파서 응급실에 찾아온 엄마를 보면 분명히 아픈 건 아이인데 죽어가는 것은 엄마예요. 뭐지요? 사랑 때문에 엄마와 아기의 바운더리가 허물어진 거예요. 애매해진 거예요.
그래서 아픈 건 아긴데 엄마가 죽어가는 거예요. 어디까지가 아기고, 어디까지가 엄마인지 애매합니다. 아기가 기쁘면 엄마도 기쁘고, 아기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고,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은 바운더리를 허물어서 애매하게 만듭니다.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넌지 애매하게 만듭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삼위일체란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분 하나님이 계시는데 바운더리가 있지만, 완전한 사랑 때문에 애매해졌어요. 그래서 어디까지가 성령님이고, 어디까지가 예수님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이신지 애매해진 거예요. 이 애매함 때문에 애매한 교리가 나오는 거예요. 삼위일체. 이게 애매하잖아요. 세분이야? 한 분이야? 애매하지요. 왜 애매하냐 하면 바운더리가 애매해졌기 때문입니다. 1224
어디까지가 성령님이신지 명확했으면 좋겠는데, 어디까지가 예수님이신지 명확했으면 좋겠는데 사랑 때문에 애매모호해졌어요. 그렇지요. 부부가 깊이 사랑하면 아내가 한 얘기가 남편이 한 얘기라 생각하고, 남편이 약속한 것을 아내가 지키라고 요구하잖아요. 왜? 거기 바운더리가 없어서 애매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님은 사랑 가운데 완전히 하나가 되셔서 어디까지가 성령님이시고, 어디까지가 예수님이신지 구분이 잘 안 돼요. 예수님이 기뻐하시면 성령님도 기뻐하시고, 성령님이 슬퍼하시면 하나님도 슬퍼하시고, 이게 완전히 하나로 연합한 삼위일체입니다.
피아를 가르는 바운더리가 무너져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도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과 축복 가운데로 초대하시는 겁니다.
구원을 사랑의 언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시는 완전한 연합 가운데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청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님이 누리시는 완전한 연합을 너희도 누렸으면 좋겠고, 너희끼리도 누렸으면 좋겠고, 이것이 하나님이 누리는 구원 계획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성경 전체를 얘기하는 거예요. 성경 전체의 강령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요.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 되고 서로서로 이웃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이웃과 하나를 누리는 것.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바로 이어지는 것이 한마음과 한뜻으로 하나 돼라.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첫 번째 에프리케이션=응용입니다. 복음의 전부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예요. Application=응용 프로그램.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거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하는 겁니다.
그래서 깊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결국 하나님의 일과 내 일 구분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지 나를 위해 일하는지 경계가 없어져 버려요.
나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데 결국 나를 위한 일이고, 나는 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게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이게 뭐예요?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입니다.
정말 깊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 나와의 경계가 없어져서 그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이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깊게 사랑하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 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하나 가운데 연합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게 뭐예요? 복음에 합당한 삶이에요.
반대로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삶은 뭘까요? 분열되는 거지요. 나누어지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는 삶입니다. 분열은 사랑의 반대말이고, 복음의 반대말이에요.
교회가 분열될 때, 가정이 분열될 때, 또는 나라가 분열될 때, 우리는 하늘 시민권,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복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하늘 시민답게 살지 않는 거라서.
가정이 분열되어 있다. 하늘 시민권을 주시지 않는 거예요. 가정을 통해서 누리고 있는 축복이 있는데 그걸 놓쳐버려요. 교회가 분열된다. 그러면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이 있는데 하늘 시민권을 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복을 놓쳐버리는 거예요.
나라가 분열된다. 그러면 나라를 통해 제공되는 복이 있는데 그걸 놓쳐버립니다. 그렇지요. 나라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라를 통해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고, 법에 안정된 보호를 받게 되는데 치안과 여러 가지 혜택을 보게 되는데 나라가 분열되면 결국 이런 복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때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하나 되고, 빌립보 성도들과 하나가 되었을 때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주셨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하늘 시민답게 살아갈 때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1721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을까? 27절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 됨의 구체적인 내용을 바울이 제시합니다. 후반부를 읽어봅시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기 보면 한마음과 한뜻으로 협력하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번역된 한글로 읽을 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헬라어로 보면 명확한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마음이라고 했을 때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뉴마, 한 뜻으로는 푸시케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헬라어 단어를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본 사람은 익숙한 단어일 겁니다.
프뉴마와 푸시케는 각각 영과 혼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프뉴마는 성경 거의 대부분에서 영, 또는 성령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래 헬라어의 의미는 호흡 바람 생명 이런 뜻인데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영, 또는 성령으로 번역됩니다.
그렇지요. 일반적인 헬라어에서는 성경에 대한 것이 없고, 당연히 성령이라고 사용되지는 않지만, 바람 호흡 생명으로 사용되는데 적어도 성경에서는 거의 영, 또는 성령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푸시케는 혼, 마음, 생각, 이렇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하나 되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명확한 단어를 쓰고 있어요. 프뉴마와 푸시케가 하나 된 것 안에서 연합해서 함께 서라는 겁니다. 프뉴마아 푸시케 안에서 하나로 서라는 겁니다. 영과 혼 안에서 하나 되라는 겁니다.
자, 먼저 한마음, 한 푸시케 안에서 하나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하나 됨에 있어서, 아무 하고나 하나 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아무나 하나 되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영안에서 한 프뉴마 안에서 하나 되라고 말씀합니다. 무조건 아무 하고나 하나 되는 게 복음적인 삶은 아니에요.
불교하고도 하나 되고, 이슬람하고도 하나 되고, 아니,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려고 할 때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왜 이렇게 교회가 배타적이고 하나 되지 못합니까? 이것이 복음이 맞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는데 성경을 잘못 이해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아무 하고나 하나 되는 게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하고도 하나, 이슬람하고도 하나, 이건 종교다원주의지요. 이게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 됨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 됨의 조건은 명확합니다. 한 프뉴마, 한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는 겁니다. 한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믿는 자 안에서 하나 되라는 뜻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지, 아무나 하나 되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성경의 뜻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아무 하고나 싸우는 것이 성경의 뜻이냐? 이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 됨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무조건 하나 돼. 이게 성경의 명령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라 할지라도, 네로 황제와 하나 될 수는 없잖아요. 또 아무리 신실했던 독일 교인들이라도 히틀러와 하나 될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신실했던 본회퍼 같은 목사님은 히틀러 암살단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순교하시잖아요. 아무리 신실했던, 성령 충만했던 성도라도 히틀러와 하나 되는 것을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은 명확한 범주가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거요. 한 프뉴마 안에서 하나 되는 거요? 아멘?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데 지난번에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많이 살펴봤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2:12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 있고 세상의 영이 있다는 겁니다. 이 영의 본질은 뭐냐 하면, 갈망이라고 그랬어요. 영은 우리 안에 갈망을 일으킴으로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거요. 아무 갈망이 없는 인간은 껍데기만 있는 거지요.
갈망이 있을 때 행복이 뭔가 규정이 되지요. 내가 갈망하는 것을 얻는 게 행복이지요. 또 갈망이 있을 때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규정됩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이지요.
갈망이 있어야 인간이, 인간이 돼요. 이게 영이라는 거요. 그런데 이 영에는 세상의 영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있데요. 하나님의 영은 무슨 뜻이겠어요?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것이 성령이 거하시는 인간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성령 받으신 분은 다 알겠지만, 우리 안에 뭐가 올라와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올라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하나님이 너무 좋고, 하나님 얘기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이게 성령 받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잖아요.
왜 그런 거요? 그게 영이에요. 영은 다 설명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어떤 것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해요.
반대로 세상의 영은 뭐예요? 세상에 보이는 어떤 것을 갈망하게 만들어요. 예를 들어 돈을 갈망한다든지 권력을 갈망한다든지, 성공을 갈망한다든지 성적인 만족을 갈망한다든지, 하여간 이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세상의 것들을 갈망하게 돼요. 이것이 영입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한 마음, 한 프뉴마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영이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이 같아야, 갈망하는 것이 다른데 완전한 연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서울로 가고 싶어 하고, 한 사람은 부산으로 가고 싶어 하는데 완전한 동행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목표하는 목적지가 같아야 완전히 동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지, 목적지가 다른데 어떻게 갈망하는 것이 같아요? 목적이 다른데 완전히 연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한 연합에 이르기 위해서는 프뉴마가 같아야 해요. 한영 안에서만 완전한 연합이 가능해요. 같은 것을 추구할 때,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이 목표가 같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연합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이게 갈망이 먼저 같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은 세상의 영을 받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어요. 결국 온전한 연합에는 이를 수 없다는 거요. 가려고 하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온전한 연합이 되겠어요?
한 사람은 서울 가자 하고, 한 사람은 부산 가자 하는데 어떻게 하나 되겠어요? 안 된다는 거요.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 때문에 배타적이라고 얘기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것 때문에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맞아요. 배타적이라면 배타적이 맞아요.
진리는 어차피 배타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과 싸우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아니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양보하면서 제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한영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고, 만약 이것 때문에 우리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거지요. 물론 우리가 이기적이고, 얌체 짓 하고 이래서 배타적이라고 한다면 이래서 욕먹는 것이지요.
이건 회개해야 되지만 한 영안에서 하나 되는 기본적인 갈망, 영에 의해서 우리가 배타적으로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믿음의 대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과 싸우고 갈라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연합과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여러 단계, 레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요. 모든 연합이 똑같은 수준의 연합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만나면 그 경지가 최고의 경지이고, 그 경지가 아니고, 여러 단계가 있다는 거요. 2630
예를 들면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게 모든 사람과 누릴 수 있는 연합이에요. 연합하라는 거요. 할 수 있는 만큼 잘 지내란 뜻이에요. 이게 세상과 연합할 수 있는 세상 레벨의 연합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잘 지내라는 것입니다. 연합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입니까? 신앙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이런 뜻이지요.
신앙을 타협하지 않는 선에서 너희는 화목하게 지내라. 신앙을 타협하게 되면 화목할 수 없지요. 네로 황제 때 초대교회가 어떻게 화목하게 지냅니까? 히틀러 치하의 독일 교회가 히틀러와 어떻게 화목하게 지냈겠습니까? 할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그러나 할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화목하게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할 수 있는 레벨입니다. 잘 분별하셔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2740
그래서 잘못하면 하나 됨이라는 가치가 절대적이 돼서 신앙의 양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일단은 하나 돼. 이것은 인본적인 생각이지 복음의 내용은 아니에요. 그런데 참 염려되게도 인본주의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을 최고의 절대 가치로 올려버려서 오히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하나 되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데 어떻게 무조건 하나 되겠어요. 네로하고도 하나 되고, 히틀러하고도 하나 되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명령을 분별력 있게 잘 이해합시다.
성령 안에서 하나 됩시다. 한 프뉴마 안에서 하나 됩시다. 이것이 첫 번째 원칙입니다.
두 번째는, 한 뜻 안에서 하나 됩시다. 한 뜻은 푸시케라고 했는데 푸시케는 혼이라고 그랬지요. 마음.
한영 안에 있으면 갈망하는 것이 같다는 뜻인데 그러면 이제 마음도 같아야 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해요. 먼저 한영 안에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은 서울 가자고 하고, 한 사람은 부산 가자고 그러는데 뭘 타고 갈까 의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미가 없지요. 일단 목적지가 같아야 뭘 타고 갈까 의미가 있지요.
먼저 한영 안에서 그다음에 푸시케를 맞춰가야 됩니다. 마음을 맞춰가야 합니다. 마음은 知情意로 맞추어져 있지요. 지정의가 하나로 맞춰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 되어야 합니다.
知라고 하는 것은 생각, 가치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그르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생각들이 같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정-감정, 공감해야 된다는 것이고,
의-의지는 결국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푸시케가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먼저는 지-생각이 하나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이 동의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돼요. 그게 성경이지요. 그렇지요. 생각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동의하는 기준이 있어야 돼요. 이 사람은 이 말을 따른다고 하고 저 사람은 저 말을 따른다고 하면 생각이 통일될 수 없겠지요.
같은 하나의 원천이 있고, 권위가 있고, 이 사람도 그 권위를 맞아. 그게 옳은 거야. 이 사람도 이 권위를 맞아. 옳은 거야. 이게 맞춰져야 동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요. 그게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초가 참 중요합니다. 성경의 기초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의 사람입니다. 성경에 동의하고 성경에 순종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기초적으로 성령을 많이 알아야 돼요. 그러면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 성경의 기초가 약할 때가 참 많아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참 많아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다투고 싸우고 갈라지는 것을 보면 성경에 다 같이 동의했다면 하나 된 결론에 이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분란이 생기는 거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사역하다 보면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분과 대화할 때는 쉬워요. 그냥 몇 마디만 해도 아! 그렇지요. 성경이 이렇게 하라 했으니 당연히 해야지요. 이게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과 대화할 때는, 비록 그분이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성경을 모르는 분과는 얘기가 참 길고 힘들어요. 3142
오래 설명하고 설득하고 그래도 생각이 일치 안 되고, 왜요? 같은 성경의 기초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파운데이션 위에 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을 맞추는 경우가 참 어려워요. (Foundation=예비 교육 과정.)
교회가 갈라질 때도 보면 여기서 갈라집니다. 이게 성경의 명확한 원리를 같이 동의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힘들어도 그렇게 합시다. 그러면 쉬운데 성경의 기초가 같지 않으면 이 사람은 이거 해야 한다고 그러고 저 사람은 저거 해야 한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이게 중요하다고 그러고, 저 사람은 저게 중요하다고 그럽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가 갈라지게 되지요.
하나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뭡니까? 같은 성경의 기초 위에 있어야 해요. 특별히 우리 마음,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그 부분이 일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성경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우리는 더 깊게 연합됩니다.
두 번째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감정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요, 이게 제일 어려워요. 이게 가장 어려워요. 성경 지성, 성경적인 가치관을 공유하고 감정만 하나 되면 감정은 그냥 따라옵니다.
생각이 같고 감정이 공유되면 같은 결정을 내리지, 다른 결정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의지가 하나 되는 것은 이 두 개가 일치하면 그냥 따라오는 결과예요.
그런데 의지가 일치하지 못하는 다른 결정을 내리고 분열하게 되는 다른 이유를 보면 이 두 개 중 하나가 일치하지 않는 거요. 두 개 다 일치하지 않든지, 그중에서도 감정이 참 어려워요. 감정이 참 어려워요.
한 뜻에 하나 됨을 방해하는 제일 큰 어떤 것이 있다면 감정이라고 믿습니다. 한영이 되는 것도 좋고, 성경이 같다는 것도 다 좋은데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 이게 우리 현실 아닙니까? 성경도 좋고 성령도 좋고 다 좋은데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 그냥 서운해. 얄미워. 그냥 싫어.
이게 감정이 하나 되지 못함입니다. 그러면 연합이 깨지는 거지요. 사실 여러분, 정말 성령 충만한, 성경을 잘 알고 계신 그런 사람조차 하나 됨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감정이 하나 되지 못함에 있어요. 이런 것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잖아요. 목사님과 선교사님들. 이런 분들은 성령 충만한 분들이고 성경도 잘 아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러면 정말 하나가 되어 다 잘 일 할까요? 안 그런 경우도 많거든요. 보면 두 분 다 성령 충만한 분들이고, 성경도 정말 많이 아시는 분들이에요. 그래도 서로 싸우고 다른 일 하는 경우를 많이 보거든요.
왜 그럴까요? 감정이 하나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거예요. 성령도 좋고 성경도 좋고 다 좋은데 저놈은 안 되겠다는 거예요. 이게 사실 우리의 현실 아니에요? 다 좋은데 김 집사는 안 되겠다는 거예요. 이걸. 감정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겁니다.
딴 것은 다 하나 되었는데. 저놈과 일하는 것은 못 해. 현실적인 어려움이지요. 딴 것은 다 해요. 금식도, 40일 하라면 하겠어요. 그런데 김집사 그거는 용서가 안 돼. 이거는 도저히 안 되겠어.
우리의 신앙생활, 복음에 합당한 삶에 있어서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이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런 것 보신 적 있지요. 정말 기도도 많이 하고 열심이 있고 봉사도 굉장히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가? 할 때는 뭔가 좀. 불편한 그런 경우를 본 적 있으세요?
저는 어렸을 때 상처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많이 봤나 봐요. 정말 기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정말 열정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의 사람인가 했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거든요.
영성의 최고봉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 됨이라고 그랬어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은 많이 기도하고 많이 헌신하는 길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하나 되는 거라고 얘기했어요.
그랬을 때 아! 정말 하나님의 사람 같아. 이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 되는 삶을 바라보면 정말 하나님의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 많이 하고, 이것도 중요합니다. 안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 되는 삶을 계속 깨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 되는 게 안되면, 말씀도 알고 성령충만한데 하나가 안되는 것은 감정 때문에 그럴 텐데, 이 감정 때문에 하나 되는 것을 계속 깨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냄새가 나는 거예요. 종교와 복음은 다른 거거든요. 복음에 합당한 사람은 그 냄새가 나요. 향기가 나요. 그런데 종교의 사람은 다른 냄새가 나요.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요. 어! 아닌데 이상한 냄새가 나지.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이 중요합니다. 감정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겁니다. 하트,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있을 때 연합의 진짜 영광과 비밀이 뭔지를 체험하게 돼요.
그렇지 않고 신학적으로 고백적으로 온 우주의 교회는 다 하나야. 이렇게 얘기하는 것, 물론 말은 맞는 말이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잖습니까? 그냥 차가운 연합이지요.
그런데 마음과 마음이 딱 연합할 때, 우리는 가슴 안에 뜨거움과 감사함과 감격과 울컥함이 있어요. 아!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구나. 아, 이게 영광의 하나님이시구나. 느끼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 저는 연합의 가장 클라이막스, 가장 꽃은 결국 감정의 연합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이 하나 될 때 그때 우리는 그 안에서 연합의 진짜 맛을 알게 되는 거예요. 아! 이래서 하나님이 하나 되라고 하셨구나.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구나. 이게 세상과 다른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체험하고 맛보게 돼요. 그게 뭐요? 감정이 하나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성경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온 우주의 교회가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말은 다 맞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모든 이 땅에 우주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컨택스가 있어서 그런 얘기를 할 때는 다르지만 일반 얘기를 할 때는 뭔가 좀 허전해요. 왜?
어떻게 하나 되었지, 그래서 뭐지? 왜냐하면 감정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하나 됨을 딱 경험하고 나면 신학적으로 온 우주가 어떻고 이건 모르겠지만 우리 안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고 깨달아져요.
그래서 저는 감정이 연합되는 것이 연합의 클라이막스라고 믿습니다. 아멘. 3926
그렇다면 어떻게 감정이 하나 될 수 있을까?
저는 이거는 정말 성령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성령님의 은혜에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비로소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긍휼히 여기게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이 태도가 있어야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하나 됨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상대방을 낫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실 때까지는 손 놓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령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거요.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법은 없어요. 적어도 사람에게 일하실 때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성령님이 함께 일하시는 방향을 택하세요.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는데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다 하셨다. 이런 일은 없어요. 또 성령께서는 아무 일도 안 하시는데, 나의 힘을 가지고 뭔가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다. 이런 것은 없어요.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공통적으로 합작품이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그런 마음을 주셔야 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파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파트가 뭡니까? 사실은 에베소서의 주제인데 그게 바로 케노시스라는 거요. 이것은 우리가 빌립보서 강의할 때 잠깐 언급했지만 결국 빌립보서는 케노시스로 연결됩니다.
2장에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케노시스가 뭐냐 하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낮아지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거. 이게 케노시스라고 부르는데 자기 비움 혹은 겸손,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하여간 케노시스의 영성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하나 될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우고 낮아지는 영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로 서로를 존중하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게 하시고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십니다.
케노시스에 대한 깊은 내용은 2장에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하여간 비움과 케노시스, 그것이 감정이 하나 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거예요. 케노시스의 단어적인 정의가 뭐냐고 하면 딱 두 단어로 정리됩니다.
핵심은 겸손과 희생이에요. 그렇지요. 하나님의 본체신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길 것을 취하지 않으세요. 겸손하신 거예요. 희생 자기의 권리를 다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세요. 이 두 가지가 케노시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겸손과 희생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겸손과 희생이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어요.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하나 됨은 그냥 거듭나고 성경에 동의하면 OK. 그러나 감정이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 안에 이 태도가 있어야 해요. 겸손과 희생, 케노시스의 태도가 있어야 감정이 하나 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어요.
많은 경우가 이론적으로 하나 되는데 멈추고 실제적인 하나 됨을 누리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여기서 실패하는 거요. 겸손과 희생의 태도를 취하지 못해요. 머리로는 다 동의해요. 성경 말씀 다 맞아. 거듭난 경험도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열심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함은 우리 안에 겸손과 희생이라고 하는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함은 케노시스의 태도가 없는 거요.
겸손과 희생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완전한 연합 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케노시스의 영성이 있어야만 연합을 이룰 수 있느냐 함은 그것이 연약함이기 때문에 그래요.
타락한 인간은 연약할 때만 연합해요. 어쩔 수 없어요. 강한 자는 연합하지 않잖아요. 정치만 봐도 그래요. 우리가 대선 때문에 많이 연합하게 되는데 혼자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굳이 연합하지 않아요. 혼자 선거에 이길 수 있다. 그냥 이기지요. 혼자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는 절대 연합하려고 하지 않고 군림하려고 하지요.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람. 내 힘과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은 굳이 연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할 수 없을 때 내 힘이 부족함을 느낄 때 그때는 연합하려고 합니다. 이게 타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에요. 하나님은 다르세요. 4454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전능하시고 강하신 분이시지만 연합하세요. 하지만 인간은 아니에요. 타락한 인간은 강하고 자신감 있을 때는 연합을 안 해요. 사람의 마음입니다. 강한 사람. 나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굳이 연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이 교만이라고 부르는 것에요.
성경이 얘기하는 교만의 정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도 연합하지 않고, 사람하고도 연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연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연합에 대한 당위성도 알겠고 성경이 연합하라고 하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말로 연합하자고 그래요. 말로 연합하려고 할 수는 있지만,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요. 굳이 내가 연합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데 감정이 따라올 필요가 없지요. 굳이 하나님이 하셔야 할 게 없는데 감정이 따라올 게 없지요. 4601
그러나 연약한 사람은 달라요.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감정이 따라와요. 필요를 느껴요. 연합하는 자리로 나와요.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상대의 필요함을 압니다.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연합의 자리로 나옵니다.
아이고 내 연약함 때문에 저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렇지요. 내가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해 보세요. 민폐를 끼쳤어요. 다 같이 모이는데 내가 연약해서 한 시간이나 늦게 갔어요. 어떤 마음이 들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잖아요. 나의 연약함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힘들었을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여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또 연약함을 알기에 상대가 조금만 환대해 줘도 고마움을 압니다. 한 시간 늦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온 것만 해도 좋아. 너무 감사하잖아요. 별것 안 해 줬는데 너무 감사하잖아요. 아이고 나 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해주시나? 미안한 마음이 들지요.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상대가 존경스러워 보입니다. 와, 저런 걸 다 해주시나?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연약하지 않은 사람은 어때요? 그까짓 걸 가지고 누구나 다 하는 거지 뭐. 별로 감사함도 미안함도 없어요. 미안함이 있을 때 상대에 대한 고마움, 긍휼, 감사. 존경. 이 마음이 나오거든요. 이 마음이 있어야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연합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강한 자는 절대로 연합이 안 돼요.
교만한 자는 절대로 하나 되지 않아요. 부부가 하나 될 때도 언제 하나 되는지 아십니까? 연약해야 하나 되는 거예요. 아이고 나 같은 사람과 살아주다니 내 남편은 천사야 천사. 이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내가 너하고 살아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라. 그 부부는 계속해서 싸우는 겁니다. 이게 뭐요? 강한 영, 교만한 영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찮고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 줄 모르니까 내가 너하고 살아준 것을 고맙게 여겨라. 이러고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고 정말 케노시스의 영성이 있으면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줄 알면, 아이고, 우리 남편이 나 같은 것 하고 살아줬을까?
남편도, 우리 아내는 정말로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나 같은 것을 아직까지 거둬주고 있을까? 이 마음이 있으면요, 어쨌거나 하나가 돼요. 그런데 약한 마음이 없고 강한 마음이 있어서 서로 잘났어요.
내가 살아준 게 얼만데, 너 때문에 살아준 게 얼만데 이렇게 구박받고도 살아준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야 해. 이러고 있으면 부부는 소망이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해요.
사실 객관적으로 봐서 미안하지 않으세요? 여러분, 여러분 아니었으면 배우자가 얼마나 잘나갔을 텐데, 미안한 마음 없으세요? 내가 아니었으면 훨씬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이 고생하는 것. 미안한 마음이 있지 않으세요? 없으세요? 이게 있어야 연합되는 거예요. 이게 케노시스, 겸손,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거예요.
또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 다 쥐고 있으면 절대 연합할 수 없습니다. 연합하기 위해서는 포기하고 희생하는 게 있어야 해요. 연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해야만 내가 연합이 되지. 내가 누리는 것 다 가지고는 절대로 연합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우리가 봤잖아요. 두 사람이 연합한다. 후보 단일화를 한다. 포기하는 게 있어야 단일화가 되지.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면 결국 연합이 안 되지요.
영적으로도 원리가 똑같습니다. 뭔가를 포기해야 하나 돼요. 이게 캐노시스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놓으셨어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로 완전한 연합이 가능하게 된 거예요. 사실 여러분, 연합은 내가 희생하고 포기한 만큼 깊이가 더해집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영적인 원리에요. 내가 희생하고 포기한 것만큼, 연합의 깊이가 더해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는 연합의 깊이가 빵입니다. 영이라는 겁니다. 아주 피상적인 관계 이상은 내려가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이 관계를 위해서 뭔가를 놓고 포기했다. 그러면 그 안에 깊은 연합이 일어납니다. 가정도 그렇고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해요. 겸손과 희생 그래서 우리는 이 마음이 있을 때 형제와 자매와 마음과 마음이 연합되는 감정이 연합됩니다.
아내를 향한 미안함, 남편을 향한 존경함, 아내가 나만 아니었으면 훨씬 좋은 사람 만나 떵떵거리고 살았을 텐데. 미안함이 있어야 해요. 또 남편을 향한 존경과 존중. 우리 남편이 우리 가족 부양하고 먹여 살리느라 얼마나 애썼냐? 참 훌륭하다. 이런 마음. 그럴 때 부부는 온전한 감정적인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냥 이론적인 연합 말고 부부는 하나지, 이런 것 말고 감정적 연합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에서도 구역장이 구역을 향해서 미안함이 있을 때 그 구역이 잘 돼요. 구역원도 구역장이 나를 품어주느라 얼마나 고생했지? 참 미안하다. 이 마음이 있는 구역은 잘 되는데
반대로 구역장이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것 아니야? 이 마음이 있는 구역. 이것은 망해요. 그러니까 제가 20여 년간 구역을 인도해 보니까 알아요. 서로서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해요.
아이고 나 같은 것 품어주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이 사람이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 같은 것 품어주느라. 정말 고생이 많다. 그러니 고맙다는 편지라도 한 장 쓰시고, 정말 고맙다고 여기시면 홍삼이라도 한 봉지 주고, 이래야 거기 온전한 연합이 일어나지요.
그렇지 않고 자기는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은 이거 해야 하는데 저 사람은 저거 해야 하는데 이러고 있으면 구역이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될 때 거기서 연합이 나옵니다.
미안한 마음, 감사한 마음. 고마운 마음이 나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향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되고요. 성도는 목사님을 향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잘 되는 교회입니다. 목사도 좀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나 말고 훌륭한 목사님이 있으면 훨씬 더 좋은 말씀 먹고 잘 되었을 텐데 나 같은 것을 담임 목사로 부르니 참 감사하다. 이 마음이 있어야 정상이지.
성도들도 우리 목사님을 조금 더 존중하고 존경하고 해 드려야 하는데 미안하다. 이 마음이 있어야 서로 잘 되는 것이지. 서로 교만해서 너희는 내 말 안 듣냐? 목사가 이것도 못 하냐? 이러고 있으면 깨지는 거예요.
항상 감정적인 연합을 위해서 뭐가 있어야 되느냐? 케노시스의 영성이 있어야 돼요. 겸손. 희생. 이게 있어야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 됨의 크라이막스는 정말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이 하나 되는 것을 경험했을 때, 그냥 뭐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우리는 다 하나야. 이거는 아주 차갑고 감정-마음과 마음이 일치되는 하나 됨을 경험할 때는 그 안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이걸 딱 느끼는 순간 우와! 이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구나. 이게 하나님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구나. 이게 감격이 올라오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모두가 다 이걸 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팀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렇다면 케노시스 연약함과 희생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 앞에 서는 거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 앞에 서는 거요. 하나님 시민답게 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그 결과로 하나 되고, 담대함이 나온다는 거지요. 왜 하나님 앞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딱 서게 될 때, 비로소 주제 파악이 되는 거요. 완전하신 분, 크고 위대하신 분, 흠이 없으신 분, 그분 앞에 딱 설 때 아이코 나는 죄인이구나. 아이코 나는 부족한 자이구나. 나는 연약한 자고 벌레만도 못한 자고 나는 먼지만도 못한 자구나. 이게 있을 때 우리는 내 위치가 파악되는 거요. 연약해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설명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주제 파악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딱 섰을 때 내가 누군지가 파악되는 겁니다. 아이코 하나님 앞에 나는 죽을 자이구나. 나는 정말 타락하고 정말로 먼지만도 못한 자이구나. 이게 그냥 파악되는 것을 겸손이라고 해요.
그래서 겸손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 오는 거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 나타나는 현상이요.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이 뭐냐 하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거요. 그래서 도울 수 있어요.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내게 주시는 거고, 내가 움켜쥘지라도 하나님이 NO라고 하시면 안 되는 거고.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신뢰할 때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놓게 돼요.
그렇지! 하나님이 어차피 나에게 주시는 거라면 놓더라도 돌아오는 거고, 주시는 게 아니라면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그래서 놓게 됩니다. 내 생명이라도 내가 놓게 될 때 부활하게 하시는 거지요. 이게 케노시스예요.
완전하신 하나님 상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게 케노시스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분의 완전하심 앞에 내 존재를 깨닫게 되고, 그분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게 될 때 우리가 케노시스의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로 온전히 하나 됨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산 결과예요. 복음에는 시대 정신이 있다고 그랬지요. 그 시대를 덮고 있는 어둠을 저항하고 거스리는 정신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복음의 시대정신 중 하나는 연합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만큼 분열되어 있잖아요. 가정도 분열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도 분열되어 있고, 동과 서로 분열되어 있고,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어 있고, 사방이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때 복음의 힘과 능력과 영광은 하나 됨에서 나타납니다. 가정이 하나 될 때 부부가 하나 될 때 세상이 그 안에서 소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될 때 세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강함과 크기와 영향력을 계속 세상에 강요하게 될 때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게 됩니다.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강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게 더 희생하면서 케노시스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 됨을 힘쓸 때 그것이 이 땅에 하나 됨의 통치와 하나 됨의 영광을 가져오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자리에서 일어나서 같이 기도합시다. 함께 기도하실 때 오늘 우리 가운데 성령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겸손과 희생의 자리를 취하셨던 예수님처럼 나에게도 그 은혜를 주셔서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희생하는 그 마음을 가지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가정이 교회가 구역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나라가 하나 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기도하실 때 주여, 한번 크게 부르짖고 이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주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