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출간물을 정리하며
허 정
어제 작성했던 수필 한 편을 다시 읽어보니 문장 구조나 표현 내용들이 미흡한 부분들이 많이 느껴져 문장 구조를 바꾸고 표현 방식을 대수술 하고나니 흡족한 마음이 들어 내친김에 이 글을 쓴다.
‘69년 내 나이 30대 초 처음으로 ’수험 세계사‘란 250p 분량의 대입 수험서를 겁 없이 만들어 필경사의 필경본으로 1000권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72년 서울의 중견 출판사인 백영사에서 대입 수험용 국사 수험서 계약을 원해 왔기에 기꺼이 응하여 인세 5%로로 계약하여, 3개월간의 기간 내에 322p의 ‘국사 엘리트’를 출간 시키고, ‘77년 450p의 국사정수(國史精髓)를 대입 전문 참고서 출판사인 세운 출판사와 인세 7%로 계약하여 계약 기간 3개월 내에 탈고하기 위해,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수면을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을 쏟아 계약 기간 하루 전에 원고를 보냈다. 그 당시엔 백지에 쓴 초안을 원고지에 옮겨야하므로 일단 원고지에 옮긴 글들은 고쳐 쓰기가 어려웠다. 한 page에 1860자 조판이었기에 출판사에서 주는 원고지도 1860자 원고지였으므로 원고지 1매 정서(精書)하는데도 한 시간이 넘게 소요되는 형편이니, 내가 쓴 원고를 필경사 한분이 고용되어 나와 함께 정서를 해야 했다. 또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경향의 수정 증보판을 내야 하는데, 처음 수정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재수정은 조판공들께 미안하여 수정 전의 글자 수와 비슷하게 맞추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 수정 증보를 하면 줄은 물론 page가 전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 수정 때는 줄과 page가 전부 달라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당연지사이지만, 재수정은 힘들여 해놓은 판본을 다시 짜야했으므로 조판공들을 생각하며 수정하느라 내 의도하는 수정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84년엔 부산일보 ’살롱‘난의 컬럼을 쓰면서 어저다 원고 작성이 늦어지거나 다른 집필자의 원고가 안되면 대체 원고를 요청해 오기도 하는데 초년병인 내가 거절할 형편이 못되어 밤새워 작성해 놓고 보면 글자 수가 차이가 많으면 편집이 불가하기에 글자 분량을 맞추는데 신경을 ㅅ따보면 내 의도와 다른 글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다.
computer 자판을 이리 저리 두드리며 마음대로 글을 쓰는 오늘에 서서 그 옛날 원고지에 글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든가 틀리면 애써 작성한 원고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작성하던 악몽이 오히려 아련하다.
‘5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최빈국으로,’60년의 일인당 GDP가 겨우 78불에 불과했으나,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10대 무역량을 자랑하고 IT,철강, 자동차 조선 등 세계1위의 자리에 선 오늘의 자리에서 보면 감회가 깊다.
20년 전에 일본이 한국의 삼성, LG, 포스코, 현대가 우리를 쫓아온다고 경계하다가 이제는 아주 멀리 뒤처지고 말았다. 작년엔 SONY를 포함한 세계적인 회사로 자만하던 일본 유력 10개사가 낸 흑자를 합한 거보다 삼성전자 한 회사가 낸 흑자 규모가 더 많았다고 한다. 세계 유명 백화점 진열대에 단연 한국 제품이 맨 앞줄에 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명품으로 제일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영국의 세계적 명문 축구단 첼시의 후원회사가 삼성이고, 그 팀의 유니폼에 새겨진 SAMSUNG 마크를 세계인은 쳐다보고 있다.
세계는 지금 새마을 운동, 산림녹화, 한국기술,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기구를 만들어 박사급 인사 수천수만 명이 열을 올리고 있다. 또 GS 그룹은 석유 정제 찌꺼기인 아스팔트를 다시 재탕해서 휘발유, 경유, 등유 등으로 다시 생산해내는 놀라운 기술을 2004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에 개발 완성하여 하루에27만 배럴의 아스팔트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이로써 우리는 세계 최초 지상유전의 산유국이 됐다.
‘50년대 말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취기어린 폭력배들과의 충돌로 내 오른 손 주멱의 관절뼈가 밀려들어가 손 등이 풍선처럼 부었으나 병원 갈 엄두도 내지 않고 참고 견뎌 지금도 오른 손이 너무 커서 손 내밀기가 부끄럽다. 돈 없어서 부모님 보내고 가족 보낸 우리세대, 후회의 눈물 흘리는 친구들 많이 본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았다. 지금 청소년들이 들으면 전설처럼 들리리라. ’77년까지만해도 우린 건강보험이 없었기에 웬만한 병은 조약(造藥)을 쓰고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은 약방을 이용하는 정도였는데, 일반 서민들은 웬만한 경우엔 병원에 갈 엄두도 못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40년도 채지나지 않은 지금은 고뿔만 걸려도 의원보다 시설이 더 갖춰진 병원을 찾기 때문에 1차 진료기과을 거치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의 규제안도 마련해야 했다. 우리의 건강보험 제도는 세계가 배우고 있고 미국도 부러워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