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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수표교
장충단 공원 입구에 놓여있는 돌다리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은 연꽃봉오리, 연잎 등을 주제로 설계해 놓았는데 그 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조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동모 부산진구) 동모 시도유형문화재18호(부산진구)
동모는 동검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적을 찌르는데 쓰는 무기이다. 생긴 모양은 검과 비슷하지만 창날과 자루집 2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긴 나무를 꽂아 쓸 수 있도록 끼우는 부분의 속은 비어있다. 제작시기는 세형동검 후기인 BC. 3세기∼AD. 1세기 사이로, 그 출현시기가 검보다 매우 늦고 양도 많지 않아 최초의 유형을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다. 우리나라 동모의 특징은 자루집이 둥글거나, 그대로 몸통까지 연장되어 등대를 이루고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길이는 20㎝에서 60㎝를 넘는 것도 있으며, 중국 전국시대의 연(燕)이나 하남(河南)지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주로 널무덤 계통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세형동검 문화의 한 요소로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특유의 광봉동모를 출현시키기도 하였다.
대구시 유형문화재18호(신무동 마애불좌상 동구) 신무동 마애불좌상 시도유형문화재18호(동구)
부인사계곡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불상은 지상에 노출된 큰 바위 위에 돋을새김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길쭉한 얼굴은 풍만감을 주고 있다. 어깨는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경직된 모습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손은 오른손을 위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위와 아래를 향한 연꽃을 새겼는데, 위를 향한 연꽃 속에는 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선으로 구별하고 있는데, 머리광배에는 고사리 무늬를 새기고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인천시 문화재18호(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동구) 인천 기독교 사회복지관 시도유형문화재18호(동구)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양철(함석)지붕으로 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로 쌓았다. 창호는 조선시대 서원이나 절의 승방 등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빌어, 쓸 용(用)자 모양으로 꾸몄고, 가장자리는 빗살 모양으로 짜 넣었다.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으며, 2층 가로축에 지하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시설하였다
대전시 유형문화재18호(여경암(부) 거업재 산신당 중구) 여경암 산신당 여경암(부) 거업재 산신당 시도유형문화재18호(중구)
여경암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 문신 권이진(1668∼1734)이 교육장소로 쓰기 위하여 숙종 41년(1715)에 지었다. 여경암을 중심으로 앞쪽에 서당건물로 사용했던 거업재, 뒤쪽에 산신당이 자리잡고 있다. 여경암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사마온공이 자제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강당인 ‘여경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인데, 좌우 뒤쪽으로 2칸씩 덧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거업재는 앞면 6칸·옆면 1칸 규모로,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꾸며 여름철 서당으로, 가운데 2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겨울철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머지 2칸은 부엌이다. 산신당은 고종 19년(1882)에 지은 건물로, 앞면·옆면이 1칸 규모이다. 단촐하게 지은 건물로 안쪽에는 불단을 만들어 산신탱화를 걸어 놓았다
광주시 유형문화재18호(취병 조형 유허비 광산구) 취병 조형 유허비 시도유형문화재18호(광산구)
유허비란 옛 선현의 자취를 기념하고자 세우는 비이다. 이 비는 취병 조형(1606∼1679)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놓은 것으로, 선생이 태어난 옛 터에 자리잡고 있다. 조형은 조선 현종 때의 문신으로 40여년간 관리생활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벼슬은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다. 11개월간의 일본여행을 마친 후 기록한『부상일기』는 17세기 한일관계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는 아래에 받침돌을 마련하고, 비몸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그 위에 세웠다. 높이보다 너비가 넓은 특이한 모습이며, 지붕돌의 처마가 위를 떠받들 듯 한껏 들려있다. 조선 고종 10년(1873)에 세운 비로, 형태는 그리 우수하지 않으나 당시 지방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선생의 후손이 없어 그 동안 방치되어 왔던 것을 광주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울산시 유형문화재18호(울산부 선생안 북구) 울산부 선생안 시도유형문화재18호(북구)
'울산부 선생안(蔚山府 先生案)'은 조선중.후기인 1596년부터 1910년까지의 울산지역 사회상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고, 역대 울산 부사의 이름과 주요 치적, 향리 명단, 좌수.별감 이름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안(先生案)은 조선왕조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서나 해당 관원의 성명·직명·지위와 부임 및 이임일자 등을 기록한 책을 뜻한다. 본래 책으로 묶여 있었지만, 현재는 낱장으로 떨어져 있다. 이 책의 분량은 표지를 포함하여 총 246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책의 크기는 가로 37cm, 세로 50cm로 파손이 심하여 제목을 알 수 없으며, 일부는 읽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 책에는 1599년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로 부임한 김응서(金應瑞)로 부터 1906년 군수로 부임한 김덕한(金德漢)에 이르기까지 관장(官長)의 취임과 이임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울산에 전승되어 온 건치(建置) 연혁과 치소(治所)의 이동, 아울러 임진왜란 때의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다. 이 선생안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부터 1906년의 대한제국 말기까지 울산에 부임한 지방관료 명단과 재직기간 동안의 당면과제 및 해결책을 같이 기록하여 당시의 정치·사회에 대한 주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특히 사족(士族 : 지방 양반)으로 분류되는 좌수·별감과 호장 등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후기의 울산 지방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문화재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18호(수타사 월인석보 평창군) 월인석보(권17) 월인석보(권18) 수타사 월인석보 시도유형문화재18호(평창군)
이 책은 세조조(世祖朝)의 초간본(初刊本)이다. 본시 수타사(壽陀寺)의 인왕문(仁王門)에 있는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의 배 속에서 꺼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17은 전부가 완전하며, 권18은 제87장 하반(下半)부터가 떨어져 없어졌으나 전체의 보존상태는 좋다. 권17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제311장에서 제317장까지의 내용이며, 권18은 제318장에서 제324장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권18 제87장 아랫면에서 표지 뒷면까지에 걸쳐「이오삼삼팔칠이합일백사십육야(二五三三八七二合一百四十六也)…… 천계오년팔월초사일(天啓五年八月初四日) 유학최(幼學崔)…」운운(云云)의 24행(行)으로 쓴 묵서지기(墨書識記)가 있다. 천계오년(天啓五年)은 인조(仁祖) 3년(1625)에 해당된다. 보물 745-5호 월인석보<권17,18>로 명칭변경 및 승격지정됨에 따라 1983년5월7일 해지.
경기도 유형문화재18호(수원행궁 수원시) 수원행궁 시도유형문화재18호(수원시)
이 행궁(行宮)은 조선(朝鮮) 정조(正祖) 20년(1796) 수원성곽(水原城郭)을 축성(築城)하고 이곳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건립한 것이다. 정조는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부왕(父王) 장조(莊祖)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參拜)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어 갔다.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 경룡관(景龍館), 복내당(福內堂), 유여택(維與宅), 노래당(老來堂), 신풍루(新豊樓), 남·북군영(南·北軍營), 강무당(講武堂), 무고(武庫), 수성고(修城庫), 집사청(執事廳), 서사청(書史廳), 비장청(婢將廳), 우화관(于華館), 득중정(得中亭)과 행각(行閣)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낙남헌(洛南軒)만 남아 있다. 낙남헌(洛南軒)은 봉수당 북쪽에 있던 건물인데 곱은자형으로 배치된 초익공양식(初翼公樣式)의 팔작집이다. 봉수당 좌측 행각에 붙어 있던 부분은 없어졌고, 벽체(壁體) 및 내부(內部)는 개조(改造)되었다. 시도기념물 제65호 화성행궁지로 재지정됨에 따라 1984년11월9일 해지.
경북 유형문화재18호(마애약사여래좌상 대구시) 마애약사여래좌상 시도유형문화재18호(대구시)
대구 팔공산 중앙봉의 정상 가까운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크기의 마애약사불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며, 탄력있고 우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세련되고 단아하다. 둥근 어깨는 탄력있어 보이며, 허리는 잘록하게 표현되었다. 무릎에서 밖으로 내려뜨린 오른손과 무릎 위에 얹어 약 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의 세련성 등은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편인데 옷주름은 자연스럽고도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히는 등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표현되어 있으며 연꽃무늬와 덩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대좌(臺座)는 위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새겼으며, 이들을 받치고 있는 용 두 마리가 표현되어 있어 화려한 모습이다. 병고에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들의 돈독한 믿음을 받았던 이 약사불은 우아하고 화려한 사실주의 양식의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1981년7월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경상북도에서 분리되어 대구광역시 시유형문화재3호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으로 재지정됨에따라 1982년3월4일 해지.
통도사 삼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18호(양산시)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이룬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기단(下層基壇) 면석(面石)에는 안상(眼象)이 장식되고 상층(上層)기단은 면석에 양우주(兩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모각(模刻)되었으며 갑석에는 얕은 부연(副椽)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기 하나의 돌로 되었으며 옥개받침은 각층 4단씩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위에 몇개의 부재가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양식 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례석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연화문(蓮華紋)을 조식하였는데 이 부재에 음각(陰刻)된 명문(銘文)에 의하면 고려 선종(宣宗) 2년(108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471호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6년6월1일 해지.
중원 원평리 미륵석불 시도유형문화재18호(충주시)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8각형의 넓은 갓을 쓰고 서 있는 거대한 석불이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묶음이 있으며,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풍만한 얼굴이다. 양감 넘치는 어깨와 당당한 하체,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묵중한 옷은 불상의 격을 높여 주고 있다. 고려시대 경기·충청 일대에서 유행하던 석불입상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는 이 불상은 조각수법이 뛰어나서 당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추정된다.
유형 장군 유물<교지.호패> 시도유형문화재18호(공주시)
이 유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유형(柳珩,1566∼1615) 장군의 유물로,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알리는 나라의 교지와, 당상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가 사용했던 상아에 음각한 호패이다. 유형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을 따라 강화에서 큰 공을 세웠고, 선조 28년(1595) 무과에 급제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노량대전을 통해 공을 세웠다. 노량해전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승진하게 된다. 또한 선조 34년(1601)에는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문화재는 교지 1매와 호패 1개 모두 2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인물사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금당사 목불좌상 시도유형문화재18호(진안군)
중국의 승려 혜감(慧鑑)이 814년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금당사에 있는 불상으로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상이다. 본존불은 사각형의 평판화된 얼굴에 비교적 당당한 체구이며, 양 손을 들어서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둥글게 움추리고 있는 어깨와, 도식화된 옷자락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좌·우 보살은 복잡한 보관(寶冠)이나 가슴의 구슬장식, 두 손에 잡은 연꽃가지 등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면 본존불과 흡사하다.
자정국사 사리함 시도유형문화재18호(송광사)
자정국사의 사리를 담았던 그릇으로,지름 15.2㎝, 높이 7.7㎝, 뚜껑 높이 3.1㎝, 몸체 높이 5.3㎝인 청자상감국화문 항아리이다. 자정국사는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하나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 충렬왕 19년(1293)∼27년(1301)까지 주지승으로 있었다. 뚜껑은 윗면에 백상감으로 큰 원을 돌리고, 주변에 4개의 작은 원을 새겼다. 원 안에는 흑백상감으로 국화무늬를 새겼고, 원 사이에는 구름과 학무늬를 조각하였다. 옆면은 백상감으로 번개무늬와 연속된 작은점을 돌렸다. 몸체는 중앙에 위아래가 구분되는 면이 있으며, 아가리 부분에는 백상감으로 번개무늬와 연속된 작은 점을 돌렸다. 그릇 아랫부분은 흑백상감으로 연꽃잎을 돌렸다. 유약 색깔은 고려 후기의 시대상을 반영하 듯 불투명한 비색이다.
보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시도유형문화재18호(제주시)
제주시 보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꽃 문양과 불꽃 문양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이다. 얼굴은 원만하며, 눈·입·코 등이 단정하고, 양쪽 귀는 짧은 편이나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어 인자하면서도 근엄함을 느낄 수 있다. 손 모양은 왼쪽 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놓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엄지와 중지를 잡고 보병(寶甁)을 받들고 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화려한 보관과 균형 잡힌 몸체, 두텁고 아름다운 옷주름 등의 표현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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