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섬기는자라는 뜻의 일본 무사를 칭하는 말)
그들은 일본산 중세기사와 같으며 일본 역사 700년의 권력을 쥐고 흔들던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들은 검과 활의 달인이며 그들만의 엄격한 윤리에 입각하여 사납게 싸웠다.
그들은 외국 침입자들에게도 물론이고 땅과 지위와 명예를 놓고 자기들끼리도 전쟁을 치렀다.
그들의 무예와 자기 단련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사무라이다.
사무라이 기원에 관해서는 추측과 신비적 요소가 많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전설과 민담에 근거하고 있어 과대 포장된 것이 많은 듯 하다.
필자는 사무라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헐리우드식 영화, 각종 사무라이 과련 서적, 과련 이미지 상품에서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포장되어 있는 사무라이가 과연 그럴 만한 대상이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싶을 정도이다. 반면 중앙집권적 정치 형태로 운영되었던 한반도의 무사, 즉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의 우리 무사나 선비들의 인품과 실력은 사무라이들과 도저히 견줄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생각하며 일본의 사무라이만큼 한반도의 무사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사무라이들은 1000년 전에 생겨났으며 중세시대의 기사들과 같다는 것이다.
이 무사들은 지역 영주를 섬겼으며 그 댓가로 땅을 하사 받아 살아갔을 만큼 그들이 벌인 전투는 토지 쟁탈전이었다.
지방 영주들은 토지를 뺏고 지키기 위해서 사무라이들을 동원했다.
초창기이 사무라이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쏘며 싸웠다.
시대가 지나면서 싸움방시도 변해 걸으면서 싸웠고 무기도 활에서 칼로 긴나무 막대로 창으로 심지어는 화승총으로까지 바뀌었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불교와 일본의 토속신앙인 신토가 결합된 것이다.
이런 종교적 바탕위에서 신실한 충성, 엄격한 자기 단련, 명예 지키기를 골자로 하는 행동 강령이 생겨났다.
이 행동 강령은 패배 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으로 무시무시한 자살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할복 자살이다.
‘섬기는자’라는 뜻의 사무라이 계급은 얼마 후 지배계급으로 상승하였고 그 후 700년간 사무라이가 일본을 지배했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트렌드는 사무라이의 가치관이 배어있다.
일본의 대략 캘리포니아 정도의
그 국토는 4개의 주요 섬과 나머지 수백 개의 군소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일본 열도에는 기원전 3만년 내지 만2천경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들은 중국과 아시아 대륙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서기 300년 전 일부 주민들이 쌀 재배에 성공하여 일본 본토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혼슈섬 남서부에 위치한 야마토 평야에 정착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로 한반도에서 백제인들이 이주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영구 정착촌은 곧 살로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치집단 즉 국가로 발전했다.야마토 평야의 지배권으로 놓고 씨족들 간에 다툼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군대가 생겼다.
농사꾼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군대였다.
이시기에 역사는 모호하지만 결국은 어느 씨족인가가 다른 씨족을 제압하고 세력을 키워 이 일대의 맹주가 되었는데 야모토 가문이 그들이다.
야마토 가문이 득세한 것은 6세기 무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상속 받는 자를 천왕이라 칭하고 여기에 신화적인 요소를 첨가하였다. 이 신생 제국은 차츰 인근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혀갔다.
야모토 가문에서 가장 알려진 인물은 야마토 다케르노미코도, 즉 야마도 대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야마토 대군의 대담한 행동은 신화건 사실이건 후세 전설의 귀감이 되었다. 정치 개혁을 통해 천황 가문은 오늘날 교토자리에 중앙정부 청사를 짓고 거기에 황족과 귀족, 정부 관리와 보좌진이 한자리에 모여 살았다.
천왕은 귀족에게 수익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토지를 분할하여 나눠 주었다.
경작료가 귀족의 소득이었는데 경작료는 농민이 쌀로 납부하였다.
그 대신 귀족은 토지와 경작 농민을 보호할 책임을 졌다.
경작료는 귀족이 스스로 거두었는데 토지가 멀리 있으면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사병 조직은 제국 변두리에서 살던 전사가문에서 동원되었다.
그들은 대게 몰락한 귀족들의 후손이었다. 교토에 귀족 인구가 늘어나자 새 귀족들은 변방을 개척하여 자신들의 토지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주된 무기였다.
변방 생활은 그들을 사납게 만들었다. 이들은 교토 귀족들의 사병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섬기자들이라는 사무라이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섬기는 댓가로 귀족의 토지를 할당 받았다. 여기서 사무라이 전통이 확립되었다.
10세기 11세기에 이르게 되자 사무라이가문 가운데는 방대한 토지를 가지고 휘하에 거대한 군사조직을 가진 군벌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이들은 서로 패권을 다투기도 했다. 이들 중 누군가가 나서면 얼마든지 교토제국을 쓰러버리고 권력을 쥘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무라이 계층이 권력을 쥐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세기 기사처럼 활과 칼을 피하기 위해서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었다.
투구를 제외한 사무라이 갑옷은 유럽과 달리 금속 제품이 아니다.
갑옷은 두꺼운 가죽에 속을 데고 겉은 습기 찬 일본 기후에 대비하여 칠을 했다.
가죽 조각을 코장이라고 하는데 색깔 있는 명주천으로 엮어 입는다. 갑옷 한 벌에 명주천이 225m 가죽이 3천 조각이 들어간다.
가죽으로 만들기 때문에 비교적 가볍고 유연성이 있어 말을 타고 손을 놀리며 상대방과 싸우기에 편하다.
12세기 말 그런 승리의 개선 행진이 유독 미나모토 가문에서만 자주 열렸다.
미나모토 가문은 오랫동안 교토의 천황 가문에 봉사해왔다.
변두리지역에 생겨난 여러 사무라이 가문들 중에는 중앙정부 천황에게 반감을 가진 가문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사무라이 가문들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제국을 따로 세우기까지 했다. 이럴 경우 천황의 궁정은 강자이면서 충성스러운 미나모토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문에서 걸출한 몇몇의 사무라이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미나모토 타메토모이다.
그는 키가 180cm 였고 왼팔이 오른팔보다 15cm 길었는데 화살을 많이 쏴서 길어졌다고 한다.
1156년 천황이 갑자기 죽자 자식들 간에 누가황위를 오르냐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각자 자기편을 동원하다보니 청부 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한창 싸우다 보니 미나모토 가문은 지는 편에 가담해 있었다.
승자는 그를 외딴 섬에 귀향 보냈고 얼마 후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 활을 쏘며 반항하였으나 끝내 적의 손에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는 하라키리(할복)으로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한다.
옆 그리고 위 아래로 배를 갈라 할복을 택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명예를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줌이었다. 미나모토가 첫 할복자는 아니였지만 향후 할복하면 미나모토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고 싸움에서 이런 의식(셋브크)은 사무라이의 상징이 되버렸다.
미나모토 가문의 타메토모가 죽은 후 그의 조카 미나모토 요리토모가(12세기)가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나모토 가문의 뒤를 이었다.
1992년 천왕은 요리토모를 쇼군에 임명했다. 쇼군은 오랑캐를 제국연방 정발했던 사무라이 군대의 우두머리에게 주던 칭호였다. 요리토모는 잠정적인 칭호를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최고의 군지휘자로서 천왕보다는 더 많은 실질적 행정적 권한을 행사했다.
그 결과 그 당시 국가 사정은 오늘날 영국과 비슷했다.
황실은 명목상의 국가 원수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쇼군이 행사했다.
교토의 황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 가마쿠라에 별도의 정부 청사를 지었다. 이렇게 쇼군이 영도하는 정부를 막부라 하는데 그렇다고 황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황실 정치적 권위가 없고 국가의 최고 종교 지도자로서 부각되었다.
유럽의 교황과 유사하다. 왕은 죽일 수 있지만 교황은 죽이지 못했다. 교황은 권력의 원천이자 종교적 권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리더쉽은 종교적 권위가 앞서야 한다. 즉 권력의 정당성의 문제인 것이다.
미나모토의 대 성공에 불구하고 일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승리 후에는 투구끈을 조여메라'는 옛 격언을 안 지켰기 때문이다.
사무라이가 영토를 착복하는 봉건제도가 계속되던 일본에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274년 일본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몽고가 중국대륙과 고려를 정복하고 일본에 눈독을 드린 것이다.
징기스칸은 일본에 조공과 납세를 요구하는 친서를 보냈지만 아무 답신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칸은 일본을 침략한다.
몽골의 침공은 일본이 20세기 이전에 당한 유일한 외침이었다.
몽골군사들은 하카다마에 상륙한다.
이때 사무라이 방어군들은 뼈저린 교훈을 얻는다.
몽골군의 전투 방식은 달랐다. 이시기 사무라이의 전투 방식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종의 의식과 같은 전투였다.
몽골군은 자존심이 강해 일대일로 싸웠다.
그들은 배로 건너왔기 때문에 말이 없이 도보로 걸으며 창과 칼로 싸웠다. 밀집대형으로 무자비하게 몰려온 몽골군은 창으로 사무라이들의 말을 마구 찔렀다. 몽골군은 폭발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폭발음에 말을 놀랐고 결국 사무라이 군은 큐슈의 수도로 퇴각 하게된다.
몽골의 2차 원정실패와 더불어 카마쿠라 막부와 일본 황실은 전 일본 사찰에 기도를 올리도록 했는데 기도의 효험은 몽골군이 카미카제, 즉 바람의 신의 은총으로 침공을 막았다고 여긴 일본 황실은 계속에서 기도를 올리도록 한 것이다. 이때 좀 더 의식이 강조되었는데 이때 부각된 것이 바로 칼이다.
칼을 사무라이의 분신이며 영적인 존재로 여긴 것 이다. 그래서 대장장이 들은 행운을 비는 정표로 사찰에 비치할 특별한 칼을 만들었다.
7세기 일본의 칼은 양날이며 일직선이었다. 그후 칼의 모형은 사무라이들이 다루기 쉽도록 지금의 약간 굽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일본도 형태로 최적화 된다.
13세기 몽골의 침공은 일본 정치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 충격으로 인해 일본은 100년간의 내란시대 즉 전국시대(1467 - 1568)가 시작된다. 이 혼란시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집단들이 바로 사무라이 가문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은 어떠한 전투에서도 거저 싸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댓 가를 받았다. 그들은 무기나 갑옷 , 시종들을 댓 가로 받았다. 보상은 노획한 땅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으로 했다.
몽골침입 때는 노획한 땅이나 전리품이 없으니 나눠줄 게 없어 천황이나 쇼군도 이를 보상할 수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분개했다. 천황이나 쇼군을 섬겨봤자 아무 보상이 없자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1400년대 말 국가권력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분산되고 말았다.
이들이 바로다이묘(大名, 지방의 영주)들이다.
그 이전에는 천황이나 쇼군으로부터 이 칭호를 받고 행복해하였으나 그것은 과거라 되 버렸다, 누구나 자신이 다이묘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거느린 사무라이 수만 많으면 다이묘로 칭할 수 있었으며 소규모의 자치 정부를 만들어 이웃과 전쟁을 일삼는다.
이때부터 100년간 내란이 끊이지 않는 혼란 상태로 일본은 빠져든다.
사회엘리트 계층에 싸움이 일어났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이 번번하게 일어났다. 아들이 아버지를 축출하고 조카가 삼촌을 암살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장신의 정치적 야망에 장애가 되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없애는 시대였다. 하급 사무라이들은 전쟁 때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에 붙었다. 다이묘 입장에서는 이런 사무라이들은 기회주의적으로 태도를 바꾸는 반역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농민과 상인들 그리고 여자들까지 다이묘가 출동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전쟁에 나설 수 있도록 무장을 갖춰야 했다.
전투자 수가 늘어나자 전투배치나 전술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기병보다는 보병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겨 난 것이다. 보병들은 야리라는 창을 무기로 사용했다. 말을 탄 사무라이들은 이 창병들을 지휘했다.
잔인한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하면 보상이 뒤따랐다.
그래서 병사들은 자신들의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서운 짓을 했다. 바로 적의 머리를 잘라오는 것이었다.
전투야 어떻게 되든 목을 잘라가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뒤 전에 숨어있다 이미 죽은자들의 목만 베어는 자들도 생겨난다. 그 결과 또 다른 기묘한 관습이 생겨난다. 바로 공식적인 머리 검사가 바로 그것이다.
전투의 규모가 커지자 병참에 대한중요다가 높아진다.
이는 일정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고 신병을 뽑고 대군을 유지하고, 무기를 지급할 수 있는 운영시스템이 필요해진 것이다.
또한 전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의 구조는 적의 침투를 대비하도록 지어져서 성을 모르고 침투했다간 한순간에 기습을 당할 수있는 미로와 같은 것이었다.
다이묘 시대의 무수한 전투를 벌이면서 검술 및 다양한 전쟁 무술이 현저하게 발전하게 된다. 이들 전쟁 기술자들이 쌓아놓은 전쟁 노하우는 수백 년간 일본의 미래를 이끌어간 사무라이들의 지적 재산이 되었다.
검도의 초보적이 형태는 전국 시대에 생겨났다(대략1470-1570년). 다이묘들은 어떻게든 전투에서 이겨야 했으므로 무술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사무라이들을 훈련 시켰다.
그 이전의 무술 훈련은 가족 단위의 자습 정도였다.
1400년대부터 출중한 무술 고수들이 나타난다. 다이묘들은 각종 무기별 고수들을 초빙한다. 그래서 사무라이들 간에 사제지간이 생겨난 게 된 것이다. 다이묘들이 고용한 무술고수들이 문하생을 배출하는 학원이 생겨나다 보니 이때부터 무술 학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 가장 유명한 검술인은 쯔가하라 보쿠덴으로 검술의 달인이었다.
30차례의 전쟁과 15번의 일대일 진검승부로 모두 상대를 죽이고 이겼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그에게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 그는 일일이 그런 요구에 응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불필요한 싸움에 대하여 그 스스로 변화가 생겼다.
무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소 타격으로 충돌을 해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의 검도는 그 당시 사무라이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 검술을 익혔던 것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하기 위한 자기 단련의 수단으로 수련되고 있으며 용구 또한 상대에게 해를 주지 않은 재료와 보호구가 마련되어 스포츠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전국시대에는 쯔가하라 보구텐과 같은 무술의 달인들이 개발한 전투 기술들은 적을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개발되었고 이로 인해 전국시대 막바지에는 일본에는 피비린내가 끊이는 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