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 초대석>
이원성 수필가의 삶과 마주하다
대담일/2019년 9월 15일(일). 장소/경산 옥산 더반(The飯) 한정식
대담/ 홍억선(주간) 사진 / 김경(편집위원)
배석 : 김영희(편집장), 이미경(편집위원), 공도현(수필가)
기록 : 엄옥례(수필가)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수필 문단의 원로이신 이원성 선생님을 뵈러 갔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설렘과 눈부신 하늘과 솔솔 불어오는 갈바람이 더해져서 가슴은 더없이 부풀었다. 일행은 성암산 자락 선생님 댁 가까운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께서 30년생이시니까 구순인데도 꼿꼿하셔서 대나무 같은 선비의 기상이 느껴졌다.
홍억선: 연휴인데 이렇게 귀찮게 해드려 폐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명절에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이원성: 나이 많아 어디 갈 데나 있나요. 안동이 고향인데 나이 들어 요즘 못 가고 있지요.
홍: 안동 어느 동네가 고향입니까?
이: 육사 문학관이 있는 원천동, 거기가 내 고향입니다. 육사와 나는 육촌 간이고요.
홍: 육촌이면 제사를 같이 지내는 가까운 집안이신데요?
이: 증조부, 고조부 제사를 같이 지냈습니다.
홍: 진성 이 씨眞城李氏는 다 퇴계 후손들인가요?
이: 그렇지 않습니다. 퇴계 선생 윗대부터 파가 갈렸습니다. 퇴계 선생은 우리 시조의 7세손이고 저는 21세손입니다.
홍: 육사 선생님과는 연배가 삼십 년 정도 차이 나지요?
이: 그 정도 날 겁니다.
홍: 육사의 형제는 몇 분입니까?
이: 6형제인데 막내동생이 일찍 작고해서 족보에는 5형제로 올랐지만 육사의 집에서는 여섯 형제라고 당호를 육우당六友堂으로 지었습니다.
홍: 잃은 자식도 잊지 않으려고 육우당으로 지었다는 말씀이군요. 육사 선생의 자손 중에 문학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 아닙니다. 육사는 딸 하나뿐인데 지금 안동에 살고 있습니다. 육사의 동생 원조源朝 씨가 문학을 했습니다. 내게 원조 씨의 평론집이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교수였던 맏집 조카 동영이 삼촌 원조 씨가 발표한 작품을 모아서 ‘이원조 문학 평론집’을 출간했습니다.
홍: 육사 선생님은 문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형제분들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 첫째가 독립 운동가이고 둘째가 육사, 셋째 서예가, 넷째 원조 씨로 문학 활동을 했고, 다섯째가 언론인이었습니다. 세 형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했지요.
홍: 안동이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산실이잖습니까?
이: 그렇습니다. 청도의 역사학자 박영석 선생은 안동을 빼놓고는 독립 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안동 가운데서도 특히 도산과 예안이 독립운동에 앞장섰지요.
홍: 지금도 고향에 진성 이 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까?
이: 아닙니다. 낙동강 댐으로 수몰되었습니다. 50호쯤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집마다 식솔도 많았고 마을이 융성했습니다. 뒤에는 청량산 줄기가 뻗어 내리고 앞은 낙동강이 흘렀습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지요.
우리 마을에는 학자가 많이 났습니다. 윗대에도 글 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원촌에 학자가 많이 난다고 안동 쪽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마을에 원자源字 항렬이 두 줄기가 내려오는데 대감 후손과 참판 후손이 있습니다. 형조판서를 지냈던 분과 형조참판을 했던 분이 있었는데 한쪽은 대감 후손, 다른 한쪽은 참판 후손이라고 부릅니다.
홍: 대감이라 함은 장관이지요? 형조 대감은 요즘 법무부 장관이고요.
이: 그렇지요. 나는 참판 집 후손이지요. 원촌 마을에는 참판 후손이 백여 명 됩니다.
홍: 선생님 댁은 개화가 되어서인가요? 일찍 대구로 나오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이: 맏이인 제가 젖먹이 때 대구로 나왔습니다. 원촌은 학자는 많이 배출해도 몹시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우리 집은 대구로 나와서 모친이 재봉틀을 가지고 삯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저는 대구초등학교의 전신이었던 덕산德山소학교에 다녔습니다.
홍: 혹시 그 재봉틀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이: 막내아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효목동 주택에서 지금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짐을 대부분 막내아들에게 맡겼는데 재봉틀도 가지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수시로 기름으로 닦으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 틀은 내가 다 분해하고 다시 끼울 수 있습니다. 모친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니까요. 손틀인데 하도 오래돼서 핸들에 녹이 슬었습니다.
홍: 일제시대 때 공부하셨잖아요, 그때는 공부하기가 어땠습니까?
이: 그때가 일제 말기였는데 공부를 안 시키고 일을 시켰습니다. 대구비행장 닦을 때도 동원됐습니다. 근로봉사로 풀을 베고 벼도 베러 다녔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요.
홍: 선생님은 평생 교단생활을 하셨습니다. 교직 생활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 내 교직 이야기 참 재미있습니다. 이리저리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경주 강동면에 있는 강동고등공민학교에서 처음으로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6.25때 부산으로 가던 길에 처가인 양동에 들렀다가 그곳에 사는 강동고등공민학교 교장으로부터 학교에서 아이들 좀 가르쳐 달라는 권유가 있어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각 면에 중등학교 과정인 고등공민학교가 있었습니다. 학생 수는 어느 학교든 비슷했는데 국가에서 인가한 중학교는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어서 아이들이 강동고등공민학교에서 인가받은 안강중학교로 대부분 옮겨갔지요. 아이들이 몇 명 남지 않아서 친구 소개로 양남중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옮겨 갔습니다. 거기서 1년 반 근무하다가 대구 오성중고등학교로 옮겼습니다.
4.19가 난 뒤 오성중고등학교를 사임하고 교직을 접으려고 서울에 직장을 찾으러 갔는데 연락이 오는 곳은 학교밖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처남 친구 소개로 마산공고에서 다시 교직을 시작했습니다. 2년 근무하다가 대구상서여중고로 옮겼습니다.
상서여중고에서 하양여중으로 교감 발령받아 갔습니다. 2년 뒤에 그 학교에서 하양여고를 설립했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하양여고는 기독교 재단이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교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양여중에서 청도 모계중고등학교로 옮겨 교장으로 있다가 지금 동부고등학교 전신인 신라여상 교장으로 95년 정년퇴임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영진전문대 교양학부에 강의 나가다가 70세에 사임하면서 교직 생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홍: 사립학교에 근무하셨는데 이동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능력인 것 같습니다.
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쫓겨 다녔습니다. 하하!
홍: 1968년도 ‘영남수필’ 창립멤버이십니다. 처음부터 동인지를 《영남수필》로 지은 것은 아니지요?
이: 창간호를 낼 때 제호를 논의하다가 《수필문학》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김승우라는 분이 문공부에 《수필문학》을 먼저 등록하는 바람에 우리는 쓰지 못했습니다. 《경북수필》 등 이름을 여러 번 바꾸다가 나중에 영남수필로 쓰게 되었습니다.
영남수필 동인지 1집부터 5집까지 내가 편집을 맡았습니다. 20집에 보면 영남수필의 역사가 실렸는데 그것도 내가 썼습니다. 탈퇴 회원, 작고 회원 작품도 실려 있습니다. 문우들의 이름도 거기에 다 있습니다.
홍: 선생님께서 가까이 교류하시던 문우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 정휘창, 김진태, 장인문, 김시헌 선생 등입니다. 장인문 선생만 영남수필 창립회의에 참여했고, 나는 창립회의 후에 연락을 받고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홍: 한흑구 선생님은 그때 계셨습니까? 이쪽 영남수필하고 관련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뒤에 가입은 했지만 포항에 살아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빈남수 선생과 김규련 선생도 뒤에 들어왔습니다. 빈남수 선생은 포항에서 수필 단체 ‘형산수필’을 만들었지요. 초창기 멤버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습니다.
홍: 교직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문단에 이끈 사람은 있는지요?
이: 나는 제자들을 문단으로 이끄는데 그렇게 애쓰지 않았어요. 문단에 발을 붙이면 가난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정치계 장기표 씨가 저의 제자입니다. 마산공고 2학년 때 내가 담임을 맡았습니다. 장기표 씨는 제주가 참 비상합니다. 똑똑했어요. 선생님들에게 애를 먹였지요. 수업 시간에 질문해서 내가 답을 못하면 따라다니면서 묻습니다. 교무실까지 와서 대답을 들어야 물러섭니다. 또 기억에 남는 제자로는 김원중 교수와 원성옥 교수가 있습니다.
홍: 김원중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 고등학교 때 가르쳤습니다. 김원중 선생은 포항공대 교수를 역임했는데, 정년퇴임 때 축사를 부탁하더라고요. 가보니까 축사를 하는 사람이 내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를 각별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홍: 선생님은 수필집이 네 권이잖습니까? 특별한 관심 분야가 있었습니까?
이: 나는 집필할 때 특별히 관심을 쏟는 방면은 없고 주제가 정해지는 대로 이야깃거리를 찾아 썼습니다. 정년퇴임기념문집 『시공을 주워 담다』에 있는 여러 사람의 수필론을 보면 내 수필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은 수필 선집 『오후의 산책』을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정년퇴임기념문집 『시공을 주워 담다』를 홍 주간께 건넸다. 기념문집에는 장르별 문인들의 기념 글이 수록되어 있었다.)
홍: 귀한 책 고맙습니다. 여기 발문을 쓰신 분을 보니 문덕수 선생님이시네요. 문덕수 선생님과는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요?
이: 문덕수 선생은 6.25 전쟁 때 대구로 피란을 와서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축시를 써 준 김종길 선생은 안동 사람인데 대구 사범학교를 나왔습니다. 일제시대 때 교사를 하다가 해방되고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본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홍: 여영택 선생님도 축시를 쓰셨네요. 대구문협회장을 하신 분인데 당대의 대단한 인물들이 다 나오는 것 같습니다. 최정석 선생님 기억나세요?
이: 영남수필 초창기에 동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가 대전인가 어디로 가시고 나서는 잘 모릅니다.
홍: 김몽선 선생님, 이성수 선생님 글도 있습니다.
이: 김몽선 선생은 아동문학가이고 연배가 더 아래입니다. 이성수 선생은 저와 동갑입니다. 대륜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습니다. 권오택 선생은 못 본 지 오래됐습니다. 권국명 선생은 내가 하양중학교 교감할 때 교무주임으로 있었습니다. 이분도 똑똑한 분인데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대구 문단에 스타들입니다. 박종해 선생은 아직 울산에 살고 있고 우리 집안 췌객입니다.
홍: 수필가 박연구 선생님도 계시고 그리운 얼굴들이 다 보입니다.
이: 거기 나온 사람들은 내가 교류하던 사람들입니다. 수필 문단에 초창기를 개척한 분들이지요.
홍: 선생님께서는 교직 생활도 문학 활동도 아주 뜨겁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굉장히 정정하십니다. 꾸준히 운동하시지요?
이: 운동은 크게 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은 하고 있습니다. 7시쯤 일어나서 신문, 텔레비전 보다가 8시에 아침으로 잡곡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컵을 마십니다. 오전에 잠깐 산책을 하다가 12시에 대구 사립중고교 교장 퇴임 모임 사영회私英會에 나갑니다. 같이 점심도 먹고 담소도 나누다가 다섯 시쯤 귀가합니다. 씻고 텔레비전 좀 보다가 7시에 저녁을 먹고 신문도 보고 책도 보다가 12시에 취침합니다. 매양 그런 일상입니다.
홍: 자녀들은 몇을 두었습니까?
이: 육 남매를 두었습니다. 맏딸은 교통사고로 일찍 떠났고, 박사가 둘, 남의 회사에 사장이지만 사장도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막내딸 외에는 다 정년퇴임했습니다.
홍: 가난한 집안의 맏이였고, 교원 생활이 넉넉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사셨는지요?
이: 70년에 효목동에 100평짜리 주택을 샀습니다. 교직 생활에서 그 정도의 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옛날에는 현직 선생도 과외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때 야간부 교무과장으로 발령받고부터 여유 시간이 생겨 영수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지금 아파트로 이사 올 때 효목동 집을 몇 배 오른 값에 팔았습니다.
홍: 선생님께서는 근면하셨고 운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이: 지금 그 밑천으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홍: 문학 하시면서 후배들이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절이나 글 쓰는 자세 같은 것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이: 당연히 기본 예의는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기본이 안 된 사람이 문학을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은 좀 나쁘게 말하면 제 맘대로 살아야 하지 이것저것 다 챙기면 문학 못합니다.
(선비 가풍을 지니고 연세 지긋한 선생님의 말씀에 한 참석자가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 그 말씀 정말 맘에 듭니다.”)
홍: 연세에 비해 굉장히 정정하십니다. 기억력도 좋으시고요.
이: 기억력은 뭐, 내가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본 건데요.
홍: 정휘창 선생님하고 가까이 지내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인연이 된 건지요?
이: 그분하고는 60년 가까운 인연이 있어요. 1955년도에 오성학교에 근무할 때 내가 신문사에 기고를 많이 했지요. 영남수필이 창립되기 이전에는 주로 신문에 글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어요. 달리 발표할 데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시인이자, 나중에 정치가가 된 김윤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한두 살 많았지만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런 관계로 영남일보와 오성고등학교가 공동 주최로 한글날 백일장을 열게 되었어요. 정휘창 선생이 학생들 인솔 교사로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홍: 정휘창 선생님과는 자주 연락하고 계시죠?
이: 이군사령부 앞에 사는데 걷지 못해서 만나지를 못해요. 마음 상할까 봐 부러 전화를 안 해요. 산에 같이 다니는 최춘해 선생께 연락해서 소식을 간접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홍: 최춘해 선생님은 아동문학을 하시는데 어떻게 알고 지내십니까?
이: ‘산절로’라는 산행팀이 있어요. 회원으로 김진태, 장인문, 최춘해, 정휘창, 문학 하지 않는 한 사람과 여섯 명이 했는데 거의 해산 단계입니다. 요즘 산에 못 가니 며칠 뒤에 만나서 점심이라도 같이하자고 했습니다.
홍: 선생님, 오늘 직접 차를 몰고 오셨는데 대단하십니다.
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포항까지 운전해서 회를 먹으러 갔었지요. 지금은 기운이 달려서 장거리는 못 하고 시내만 다니고 있습니다. 사고 날까 봐 웬만하면 차선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쭉 갑니다.
정오에 만나 점심을 들면서 좌담을 한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식사도 마쳤고, 커피를 즐긴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까운 찻집으로 가서 소소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대쪽 같은 선비의 모습이었고, 살아오신 길에 대하여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 온 반증이 아니겠는가. 선생님의 과거와 현재,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행은 각자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원성 선생님 연보
1930년 경북 안동 도산면 원촌리 출생. 아호 지운芝云
<학력 및 경력>
1964 국학대학 국문학과 졸업
1953 43년간 대구, 경북에서 중고등학교 교직생활 시작
1959 항공대학 강사
1968 동인 활동으로 문단 등단(경북수필문학회, 현 영남수필문학회)
1975 하양중학교 교감
1975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1978 한국문인협회 경북지부 부지부장
1979 한국문인협회 회원
1980 하양여자중고등학교 교감
1983 청도모계중고등학교 교장
1984 중등문예교육원연구회 회장
1985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1986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1988 대구동부고등학교 교장
1989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1995 대구동부고등학교 교장 퇴임
1995 구미도서관 주부문학강좌 강사
1995 대구 영진전문대학 강사
<수상>
1982 한국사립중고등학교장회 회장상
1992 교육부 장관상
1994 한국교원단체연합회장상
1995 대구광역시 교원단체연합회장상
1995 국민훈장 목련장
1999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1987 『뜻을 잃은 言語들』
1995 『허공에 흩날린 메아리』
1995 『時空을 주워담다』(정년퇴임 기념문집)
2001 『오후의 산책』(대표작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