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아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이름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큰 것을 자꾸만 추구하는 이 시대에 작은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재로 이 시대는 세계화를 추구하고 좀 더 큰 것, 좀더 강한 것, 좀 더 높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다양한 문제는 자신을 낮추지 못하고 작은 것을 무시해서 오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칫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작은 것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작은 것도 작은 데로 그 의미가 있고 소중한데 우리는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가령 해와 달을 비교할 때 해는 해대로의 가치가 있고 달은 달대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즉 그 가치가 동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너지 생산의 차원에서 보면 달은 해에 비해 형편없이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달이 없으면 농사도 못 짖고 바다의 밀물 썰물도 없습니다.
그 가치가 동등한데도 인간은 그 가치를 바꿔 버렸습니다. 왜 인간은 그 가치를 바꾸었을까요? 그 근원은 역시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오라 가봐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생명과와 선악과를 만드셨습니다. 생명과는 생명과 데로 그 의미가 있고 선악과는 선악과 데로 존재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왜 따먹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선악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우리 인간은 자기마음데로 이것저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시대이다 보니 돈으로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큰 자를 크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자를 큰 자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2대 임금을 선택할 때 큰 자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자인 다윗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큰 자에게 잘 보이고 대접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것도 결단코 헛되지 않고 하늘나라의 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모두 위협을 받고있는 환경파괴의 상황에서 한가지 깊게 생각해 볼 것은 작은 것(사소한 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농업에서도 큰 것을 보다가 작은 것을 죽여버려 결국 다 죽게되었습니다. 이제는 화학비료나 농약의 사용으로 더 이상 증수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땅이 죽어 공기도 소통이 안되고 정수기능도 못합니다. 땅을 살려야 두더지가 돌아다닙니다. 두더지를 위해서는 지렁이가 있어야하고 지렁이를 위해서는 부숙물과 미생물이 있어야합니다. 가장 작은 미생물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땅속의 미생물의 가치를 무시한 결과 공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라도 공생해야 됨을 강조하십니다. 소자를 무시한 손과 눈은 차라리 잘라버리고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99마리는 산 속에 그대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세상에서는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지만, 천국에서는 소를 위해서 대가 희생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우리모두 아버지의 심정으로 돌아갈 때 천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