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일기 1(黙齋日記一)
평거언행 (平居言行)
○ 선조 8년(1575) 을해년. 조정은 의논이 갈려 당파가 동ㆍ서(東西)로 나뉘었다. 율곡은 매우 걱정하여 중간에서 화해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꺼리하고 미워하였다.
○ 계미년(1583, 선조 16) 겨울에 오랑캐 난리가 있은 후, 대사간 송응개(宋應漑)와 전한(典翰) 허봉(許篈) 등이, ‘교만하여 위를 업신여기고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니 그 뜻이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함이냐?’ 하는 등의 말로써 율곡을 탄핵하자, 율곡은 드디어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가 상소하여 구원하고 해명하자 당시의 의논은 우계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다. 상이 듣고 비로소 의심하자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는데, 공(公 이귀)이 여러 선비와 더불어 상소하여 사실대로 변명하여 선조가 크게 깨달아 이로부터 참소하는 말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 을유년(1585, 선조 18) 가을. 삼사(三司)의 견강부회하는 무리들이 비로소 우계와 율곡 두 어진이를 심의겸(沈義謙)의 당파라고 하여, 당적(黨籍)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공이 두 어진이의 무함을 당한 곡절을 낱낱이 들어서 상소하여 변명하니, 선조는 비답하기를,
“너의 말이 옳다. 대간이 이이와 성혼을 아울러 지적한 것은 다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대저 심의겸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곧 간사한 의논이지만, 이이와 성혼을 그르다고 하는 자 또한 바른 의논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만약 옳다고 한다면 잘못된 자조차 옳다고 주장하고, 만약 그르다고 한다면 옳은 자조차 그르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곧 당에 치우친 간사한 자의 소행이다.’ 하였는데, 나의 뜻은 이 말에 다했다.”
고 하였다.
그후 유영근(柳永謹) 등이 당시의 논의에 아부하고자 하여, 오현(五賢) 종사(從祀)란 명목을 칭탁하여 속셈은 감추고 의논만 세워서 여러 선비를 농락하고 공의 이름을 상소 가운데에 함부로 써넣기까지 하였다. 그 당시 속임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변명하고자 하였으나 시의(時議)가 두려워 상소문을 지어놓고도 올리지 못하였다. 공이 혼자 상소하여 변명하니, 선조는 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공은 또 반궁(泮宮)에 들어가 유영근이 전후 임금을 속이고 유종(儒宗)을 무함한 죄를 낱낱이 들어서 언성을 높여 공격하다가 마침내 손도(損徒)를 당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망사(亡師 죽은 스승. 여기서는 율곡을 가리킴)를 신구(伸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또, 정여립(鄭汝立)이 우계와 율곡의 문하에 출입한 사람으로서 도리어 시론에 아부하여 우계와 율곡을 배반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어 곧 율곡의 종자(從子) 이경진(李景震)과 더불어 정여립이 율곡에게 계미년(1583, 선조 16) 9월과 11월에 보낸 편지와 갑신년(1584, 선조 17) 1월, 율곡이 죽기 사흘 전에 보낸 편지를 모두 찾아내어 상소문에 자세히 써서 봉해 올렸다. 선조는 경연에서 묻기를,
“정여립이 이이에게 준 편지를 지금 경연에 있는 사람으로서 직접 본 자가 있느냐?”
하니, 이덕형(李德馨)이 대답하기를,
“이귀(李貴)는 신과 같은 마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 편지를 신에게 보였습니다.”
하고, 김홍민(金弘敏) 또한 대답하기를,
“이귀가 일찍이 외어 전하는 것을 신도 들었습니다.”
하니, 선조는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邢恕)로군!”
하였다. 그러자 정여립은 물러가 도망쳐버렸다.
이때 조중봉(趙重峯)도 율곡이 무함 당하는 것을 통분하게 여겨 상소하여 그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율곡을 높이는 자는 다 군자라 이르고 율곡을 배척하는 자는 모두 소인이다.’ 하였기 때문에 그 말도 한쪽으로 치우쳐 율곡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언론에는 크게 맞지 않았다.
○ 정해년(1587, 선조 20). 공이 조광현(趙光玹)과 더불어 수만 언(言)으로 상소하여 율곡의 본 뜻을 밝히니, 선조께서 두고 보았다. 그러한 지 26일만에 하교하기를,
“너의 상소에, ‘경솔하고 조급하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일어나서 억지로 말을 만들었다. 그때 심의겸의 문에 드나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따라다니고 노비처럼 얼굴을 숙이고 무릎을 꿇는 무리와 하대를 받으면서도 뚫고 들어가는 자가 많았다.’ 하고 또, ‘전일 심의겸에게 아부하던 무리들이 일시에 동인(東人)에게 항복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심의겸을 공격한다.’ 하였으니,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이냐? 임금을 섬기는 데는 숨김이 없는 것이 옛 도리이니, 너는 상세하게 대답하라.”
하고, 이어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이귀를 불러서 물어보라.”
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이귀를 불러서 물어보니, ‘문자로는 상세히 다 할 수 없기에 면대(面對)하여 아뢰고자 한다.’고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네가 만약 창졸간에 할 수 없으면 우선 물러가서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군부(君父)께서 물음이 있는데 집으로 물러가 서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고 여겨, 즉시 정원에서 종이와 붓을 청구하였다. 그때 승지는 모두 시론에 치우친 자이기에, 공이 문자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리고자 일부러 끝이 문드러진 붓을 주었으므로 자못 자획을 정확히 쓰기 어려웠다. 정원의 아전이 공의 뒤에 있다가 남모르게 한 자루 붓을 던져주어 공이 드디어 받아가지고 서계하기를,
“이른바 경솔하고 조급하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좋아한다는 자는 백유양(白惟讓)과 노식(盧植) 등입니다. 만약 다 아뢰고자 한다면 어찌 이 두어 사람뿐이겠습니까. 그중에 드러난 자가 이들입니다. 그리고 전일에 심의겸과 결탁했다가 실세(失勢)한 후에는 도리어 심의겸을 공격한 자는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윤의중(尹毅中) 등 입니다. 이런 무리는 족히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 심의겸과 서로 친한 사이는 이이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산해(李山海)같은 자가 있습니다. 당시 무리들이 만약 심의겸과 친한 것으로 이이의 죄를 삼는다면 먼저 이 사람부터 공격해야 할 것입니다. 한갓 시론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 사람은 공격하지 않고 이이만 허물한다면, 이것이 과연 ‘임금 섬기는 데 속이지 않는다.’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이 이산해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이산해는 이이와 평생 친구인데, 이이의 무함당한 것을 예사로 보고 일찍이 주상의 앞에서 한 마디도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지하에서도 반드시 한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이산해를 불러놓고 심의겸과 서로 친한 관계가 이이와 더불어 누가 얕고 깊은가를 물어보소서. 밝은 태양이 위에 있으니, 이산해가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이산해가 의겸에게 준 시에,
봄이 온 후 서울에서 편지 거듭 받았고 / 洛下春來重見札
깜깜한 산계에서 자주 서로 맞았네 / 山溪月黑慣相迎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심의겸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것이 신이 말한 아침 저녁으로 추종했다는 자입니다. 이른바 종처럼 얼굴을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는 자는 정희적(鄭熙績)입니다.
신이 만약 앞날에 화가 닥칠까 두려워서 바로 아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무리들의 속임을 꾸짖겠습니까? 신은 재주도 모자라고 문필도 졸려하므로, 우선 물러가서 자세히 써서 아뢰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으나, 임금께 고하는 말을 딴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옳지 못할 뿐더러 또 임금의 말씀을 집에 가서 하루를 지체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 까닭에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산해가 이조 판서를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이귀가 써서 바친 시구는 신이 지었던 것이나 읊조리는 가운데는 실정 밖의 말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답하기를,
“그 사람의 뜻으로 생각한다면 그 스승이 당시 무리들에게 모함당함을 통분히 여기어 궐문 밖에서 부르짖으며 상소한 데 불과하니, 또한 해로울 것이 없소. 서로 버티지 말고 빨리 나와서 직무를 행하오.”
하였다. 이발(李潑)이 대사간으로서 자신의 실정을 아뢰고 인피하니, 선조는 답하기를,
“대저 신하는 번복하는 태도가 없어야 한다.”
하였다.
또, 옥당이 차자로 아뢰기를,
“이이의 옳고 그름은 마땅히 백대의 공론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이귀가 매양 입과 혀로써 다툽니다.”
하였다. 선조는 또 이렇게 답하였다.
“새와 짐승이 모두 잠들 때 중관(中官)이 방울을 흔들기에, 생각에 ‘변방의 경보가 아니면 반드시 급한 일일 것이다.’고 여겨, 이불을 두르고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보니, 한 장의 허랑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너희가 비록 이같이 한다 하여도 바른 말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하나하나 막아내겠는가.”
○ 기축년(1589, 선조 22) 겨울. 정승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역변을 듣고 고양(高陽)에서 도성으로 들어왔다. 공이 신경진(辛慶晋)과 함께 그의 집에 가서 공평하게 진정시킬 뜻을 낱낱이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신 스승께서 평소에 대감을 마음에 잊지 못하셨습니다. 오늘의 거조가 만약 선비들에게 신망을 잃는다면 반드시 돌아가신 스승께 누(累)가 미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이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니, 송강은 답하기를,
“그대들 말이 참으로 옳소. 내 마땅히 힘껏 행하겠소.……”
하였다. 공과 신경진은 하직을 고하며 말하기를,
“대감께서 저희들의 말을 믿으시어 인심에 맞도록 처리하신다면, 저희들의 발자국이 다시 대감의 문에 이르겠지만, 그렇게 못하시면 저희들의 발자국은 대감의 문에서 영원히 끊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정언신(鄭彦信)이 우상(右相)에서 갈리고 송강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인심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니, 이로부터 두어 달 동안이나 공이 찾아가지 않았다. 송강은 마침 노상에서 공을 만나니, 하리(下吏)를 시켜 한번 만나기를 굳이 요청했다. 그리하여 공은 성문준(成文濬)과 함께 가서 시국에 관련된 일을 극도로 말하고 이어 말하기를,
“대감께서 저희들의 말을 쓰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스승께 누(累)를 끼친 것만이 한스럽습니다.”
하니, 송강도 공의 말에 깊이 탄복하였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때에 공은 양천경(梁千頃)ㆍ강해(姜海) 등과 더불어 송이창(宋爾昌)의 집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양천경이 영남 유생 정대성(鄭大成)의 말을 듣고, 최영경(崔永慶)을 길삼봉(吉三峯)이라고 하여 공공연하게 말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공이 강해와 더불어 극력 말하여 꺾으니, 양천경은 크게 노하여 도리어 공더러 역적을 옹호한다고 하자, 공은 즉시 교분을 끊고 자리를 걷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대간에서 최영경을 모함하였다고 하여 양천경 형제 및 강해 세 사람을 논계하여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어 말의 근거를 힐문당하게 되었다. 양천경은 형장(刑杖)을 견뎌내지 못하여, 송강과 당시 친구들을 많이 거짓으로 끌어대었다. 그리고 제 몸만 벗어날 계획에서 선으로 권면하던 강해까지 끌어넣어서 말의 근거를 삼았다. 그러나 공은 그때 교분을 끊은 까닭에 감히 끌어넣지 못했다. 그때에 시론이 극히 준엄하므로 화를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양천경과 더불어 교유하던 사람들은 모두 제 몸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혹은 시골로 피해 나가고 혹은 문을 닫고 자취를 끊기도 하였다. 공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붕우도 오륜(五倫)에 있는 것인데, 어찌 환란에 임해서 배반할 수 있겠는가. 양천경은 내가 벌써 교분을 끊었지만, 강해는 나와 함께 양천경을 나무랐는데, 또한 구금을 당했으니, 돌봐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의금부 문밖에 가서 강해의 동생 강항(姜沆)과 함께 옥(獄)에 공급하는 일을 했다. 그러자 남들은 모두 공을 위해서 위태하게 여겼다. 강해도 양천경이 자신을 판 것을 분하게 여겨 서로 미루고 핑계하는 것이었다. 공이 항에게 말하기를,
“내가 위태로운 화도 피하지 않고 이 옥을 돌보는 것은 한갓 붕우간의 의리 때문이다. 지금 양천경이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그대의 형이 순조롭게 받아 죽지 못하고 도리어 양천경의 하는 짓을 본받으니, 그대의 형도 양천경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의리에 끊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고, 드디어 다시 가지 않았다. 그후에 강해 등 세 사람이 모두 형장 밑에서 죽었는데, 공은 끝내 조문을 가지 않았다.
이때에 역적의 화는 정언신 일가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공은 정협(鄭協)과 소년 때부터 친구이고, 또 평소에 그 집에 적(賊)과 더불어 비록 같은 일가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서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던 터이므로, 공은 힘껏 구원하고 심지어 파산(坡山 지금의 파주인데 성혼이 살았음)으로 달려가 송강에게로 편지해 달라는 요청까지 하면서 계속 신구(伸救)하였다. 그러나 그때 주론(主論)한 대간이, ‘주상을 속였다.’고 논죄했기 때문에 공이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주선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에 공은 강릉 참봉으로 있었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제기(祭器)를 묻고 능침에 곡하여 하직한 다음,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산중으로 피난하였다. 따라서 의리에 격동되어 병정을 모집하여,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하는 일이 규율에 어긋남을 보고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여겨 드디어 물러나왔다.
이때 대가가 평양에 멈추었다는 소문을 듣고 대부인을 울면서 하직하고 5월에 행재소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종묘의 관원은 종묘에 죽고 능침의 관원은 능침에 죽는 것이 옛날의 의리이다.’ 하는데, 신은 능침에 죽지 못했으니, 신의 머리를 먼저 베어서 신하들이 절조에 힘쓰도록 하옵소서.”
하니, 상은 특명으로 관직을 승진시켰다. 공은 또 상소하여 면대를 청하니, 선조는 답하기를,
“너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내가 길에 시달린 나머지 기력이 다하였다. 어찌 반드시 면대해야 하겠는가? 생각한 것을 서계(書啓)하라.”
하였다. 공은 곧 대소 신료가 모두 임진(臨津)ㆍ대탄(大灘) 등지를 힘껏 지켜야 한다는 것과 혹은 왕자를 보내되 중신으로 보필하여 원수의 책임을 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말로써 힘껏 아뢰고, 또 친정(親征)해야 한다는 일까지 청하였다. 선조는 답하기를,
“비변사는 이귀를 불러 계책을 상의하라.”
하였다.
이때에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가 빈청(賓廳)에 앉았다가 준절하게 꾸짖기를,
“이때가 어느 때인데, 친히 정벌하시게 하려고 하느냐?”
하니, 공은 답하기를,
“여기에 온 재신(宰臣)들은 속수무책으로 코를 골며 낮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망함을 기다리기보다는 친히 정벌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또 체찰사를 보내라고 청하였으나, 윤상(尹相 윤두수)이 막아버리고 심지어 노하여 꾸짖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롭고 망할지라도 조정에 체면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네가 감히 조정에서 대신에게 욕하느냐.”
하니, 공은 답하기를,
“오늘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이귀가 아니고 곧 대감들이 망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나의 말까지 듣기를 싫어하니, 다시 평양조차 망치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공은 또 재차 상소하여 돌아가 늙은 어머니를 뵙도록 해달라고 청하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이덕형(李德馨)ㆍ이항복(李恒福)ㆍ김응남(金應南) 등 여러 재신이 계청하여, 공을 삼도 소모관(三道召募官)으로 삼고 또 사면문을 받들어 조정의 덕의(德義)를 선포하도록 하였다.
이때 호소사 황정욱은 대탄(大灘)이 함락된 후에, 도망간 군사 10여 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각 고을에 공문을 띄워 도망친 군사의 부모를 잡아가두고 도망병의 자수를 독촉하였다. 공은 사면문의 뜻대로 갇혀 있던 도망친 군사들의 부모를 다 놓아주었다. 그러자 곧 도망친 군사들이 돌아와 자수한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해 군사의 형세가 점점 성해지므로 공은 장정 70여 명을 뽑아 양양 부사 김수연(金秀淵)에게 주어 요새를 지키게 하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일(李鎰)의 군대에 붙였다. 이때 양궁(兩宮 선조와 광해군)이 서쪽으로 파천하는데, 이리와 승냥이가 길을 막았다. 그리고 어리석은 산골 백성들이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하여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관청을 위협하고 약탈하여 장차 반역을 도모하려 했으며, 심지어 선전관을 묶어 가두고 그 표신과 역마까지 빼앗아 길이 통하지 못하였는데, 이천(伊川)이 더욱 심하였다.
공은 계책을 세워 군사를 출동하였다. 그 선문(先文)에 이르기를,
“삼도 소모관 이귀는 철원(鐵原)ㆍ평강(平康)ㆍ안협(安峽) 등의 의병과 관군을 거느리고 아무 달 아무 날 이천에 당도하여 왜적을 추격할 터이니, 이천현(伊川縣)에서도 군사를 점고하여 대령하라.”
하였다. 이천의 여러 도적들이 선문을 보고 과연 차츰 흩어져 버렸다. 공은 곧 향병(鄕兵) 70여 명을 모집하여 이천으로 달려가니, 여러 도적들이 모두 숲속에 숨어 있으므로, 꾀로써 불러모아 죄를 용서해 주고 충성하기를 권하여 모두 의병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장수 40명을 선정해서 각각 열 사람씩 모집하도록 하였으며, 선전관 홍윤필(洪胤弼)이 빼앗겼던 표신과 역마도 되찾고 그 연유를 갖추어 장계하였다.
이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공의 모집한 의병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일을 같이 하자고 하여 토산(兎山)으로 찾아왔다. 공은 이때 안협에 있었는데, 이천(伊川) 사또 유대정(兪大禎)이 급히 보내온 편지를 보니, 어떤 사람이 말을 전하기를, 대빈(大賓)의 행차가 곡산(谷山)에서 나온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세자께서 나오는 것이다.’ 하고, 밤새워 토산으로 달려가 바로 이일의 숙소에 들어가서 연유를 고한 다음 모병(募兵)을 거느리고 함께 중로에 나가 영접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이일은 크게 노하여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대조(大朝)는 요동으로 건너갔고, 세자도 벌써 강계(江界)로 향했는데, 어찌 산골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하고, 끝내 가서 영접할 뜻이 없었다.
공은 어찌할 수 없어 드디어 안협으로 되돌아와서 강홍립(姜弘立)과 더불어 함께 이천으로 가서 모집한 군사를 인솔하고 앞길에 나가 영접했는데, 과연 세자가 곡산(谷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공은 곧 모군(募軍)과 더불어 엄한 약속을 한 다음 뒤를 따라왔다. 이천현에 이르자, 세자는 공을 불러 위로하고 또 퇴선(退饍 임금 또는 세자가 물린 음식)을 하사하므로 공은 퇴선을 받아 모군에게 나눠주었다.
이 소문을 듣고 감탄하여 의병에 소속하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여 인에 이르렀다. 세자는 공을 상서직장(尙瑞直長)으로 특진시키고 또 대조에 아뢰어 등급을 뛰어 공조 좌랑을 제수하였다. 이때 팔도가 모두 ‘대가가 이미 요동으로 건너갔다.’ 하여, 인심이 술렁거렸는데, 이 통보를 힘입어서 조정의 명령이 비로소 행해졌다.
이로부터 세자는 날마다 공에게 퇴선을 하사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소인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있사오나, 본디 궁마(弓馬)에 대한 재주가 없기에 급한 일이 있을 적에 먼저 앞장설 수 없으니 청컨대 모군을 이시언(李時言)에게 주시옵소서.”
하니, 세자는 허락하였다.
이때 우계선생이 세자의 소명(召命)을 받고 성천(成川)으로 가던 중 길에서 공을 만나 이르기를,
“그대는 난리 초기부터 국사에 진력하여 계획을 세우고 인심을 진정시킨 것이 남이 미치지 못할 일이다. 듣건대 북도(北道) 사람 국경인(鞠慶仁) 등이 왜적과 모의하여 국가의 깊은 걱정을 만든다고 하니, 내가 만약 대조에 들어가면 반드시 계청하여 그 도의 선유관(宣諭官)으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후에 대조가 교지로 공을 불러 숙천(肅川)에 이르니 선조는 인견하였다. 공이 회복할 계책을 힘껏 아뢰고 이어서 규율을 잃은 모든 장수의 죄와 일행 종관(從官)들이 폐단을 행한 일까지 진달하였다. 상은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별도로 명주 두 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대신에게 명하여 공의 진달한 계책을 상의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공은 또 복수 교서를 각 고을에 선포하자고 청한 다음 군량 6백 석과 면포 수백 필, 소 10여 두를 모아서 명 나라 군사를 개성부에서 먹이고 대조에 복명하였다. 이때에 명 나라 군사가 평양의 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동조(東朝 세자)는 또 공을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삼아 명나라 군사의 말먹이와 양식을 독려하도록 하였는데, 유 제독(劉提督)의 접반사 이덕형이 또 계청하여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천병이 또 전진해서 경성(京城)의 적을 치고자 했으나 선봉이 벽제(碧蹄)에서 실패했다. 그리하여 파주(坡州)로 후퇴하였는데 군량의 길이 끊기자, 명 나라 장수가 군량을 떨어지게 한 법률로써 장차 체찰(體察) 등 관원을 죄주려 하므로, 군수품의 조도(調度)에 관한 모든 일을 어찌할 줄 몰랐다. 공은 여러 재신(宰臣)에게 자천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계책을 쓴다면 수일 안에 말먹이 콩 천여 섬 및 군량을 운반하는 군사 천여 명과 마소 수백 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체찰사 유성룡이 묻기를,
“무슨 계획으로써 할 것인가?”
하므로, 공은 답하기를,
“만약 체찰 군관(體察軍官) 5명을 다섯 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또 안협 군수 홍윤장(洪胤張)을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삼아 명령을 내리되, ‘보군(步軍) 한 명에 콩 다섯 말씩 운반하는데, 열흘을 기한해서 개성까지 이른다면, 그 죄를 놓아준다. 그리고 콩은 관가의 저축한 것으로써 나눠주는데, 자기의 콩으로 운반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 운반이 끝난 다음 관가에서 그 콩을 보상한다.’ 한다면사람마다 기꺼이 따르고 군법 또한 점차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유상(柳相)이 이를 옳게 여겨 즉시 연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고, 한결같이 공의 말대로 따랐다.
공은 안협 등 고을에 이르러 도망친 군사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날을 약속하고 출발하여 마소 3백 마리와 군사 6백여 명이 밤낮없이 콩 7백 섬을 개성부에 운반하였다. 체신(體臣) 유공(柳公)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공을 도총검찰관(都摠檢察官)으로 삼고 막부(幕府)와 송도의 군량 운반에 대한 일을 모두 예속시켰다.
○ 계사년(1593, 선조 26). 공은 장성 현감(長城縣監)으로 있었다. 마침 차사원(差使員)으로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친정(親征)을 행하라고 청한 다음 군민(軍民)의 폐단과 군량을 조달하는 것을 조목별로 아뢰었는데, 무릇 10책(策)이었다. 선조는 답하기를,
“이귀의 말이 극히 아름답다. 내가 친히 물어보고 싶으나 병으로 볼 수 없으니, 본사(本司)에서 그 말을 채용하여 시행하라.”
하고, 또 군사 훈련시키는 일을 권장하였다. 그때 공은 마침 전염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선조는 내의원에 명하여 약을 지어주게 하고, 또 의관에게 명하여 떠나지 말고 병을 돌보라고 하였다. 병이 나은 후에 공은 상소하여 은혜를 사례하니, 선조는 답하기를,
“상소문으로 아뢴 정성이 지극히 아름답다.……”
하였다.
○ 병신년(1596, 선조 29) 봄.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갔다.
○ 정유년(1597, 선조 30).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하자, 조정은 또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논의가 있어 광해군이 선조의 명을 받아 사직(社稷)을 받들고 먼저 떠나 삭녕(朔寧)에 이르렀다. 공은 듣고 생각에, ‘대조가 서울에 있는데 세자가 먼저 떠나는 것은 미안한 듯하다.’고 여겨 삭녕으로 달려가서 보덕(輔德) 민몽룡(閔夢龍)을 대해 책망하고 또한 면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토산에 이르러 대신 최흥원(崔興源)과 정탁(鄭琢)을 면대해서 책망하고 또 시강원 여러 관원에게 준절히 꾸짖었으나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공은 또 상소하여 면대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정창연(鄭昌衍)이 대조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장군이 세자가 먼저 떠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삼사(三司)에서 논계하니, 세자께서 지금 멀리 떠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그 의논이 공과 더불어 서로 부합되었으나 그때 종관(從官)이 즉시 진달하지 않아서, 그대로 우봉(牛峯) 지경까지 이르렀다. 공은 부득이 길가에서 통곡하고 말을 끌어 잡으면서 간언하였다. 그리고 여러 신하의 진작 전달하지 못한 잘못을 힘껏 아뢰었다.
이때에 명 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하여 경비가 다 고갈되었다. 조정은 어찌할 줄 몰라서 영의정 유성룡과 호조 판서 김수(金睟)는 공을 비국(備局)으로 불러 군량을 판출할 계책을 물었다. 공은 즉시 10여 조목으로 진술하니, 모든 재신은 옳다고 하고 즉시 계청하여 공을 경기ㆍ황해ㆍ강원 3도의 선유관으로 삼았다.
공은 한번 순행하여 쌀과 콩 1만 5천여 석을 마련하고, 또 철원ㆍ삭녕 등 고을에서 마련한 쌀과 콩 4백여 석은 바로 양주(楊洲)에 운반시켜 그때 봉급받는 여러 신하에게 직접 실어 오도록 했다. 그 너머지 바닷가 각 고을에서 마련한 쌀은 경성으로 먼저 운반시키려 했는데, 공은 대론(臺論)으로 파직당했다. 비국에서 다시 계청하여 보내고자 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 신축년(1601, 선조 34). 공은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소모관으로서 순행하여 영남에 이르렀다. 공은 정인홍(鄭仁弘)이 합천(陜川)에 살며 무단으로 그 도당을 거느리고, 감사의 사명(使命)까지 위협으로 억누르는 등 제멋대로 기세 부리는 상황을 익히 듣고 마음에 항상 미워했다. 가까이 안음(安陰)에 이르니, 고을 사또가 정 참의(鄭參議 정인홍)를 나가서 기다린다는 이유로 영접하지 않았다. 공은 크게 노하여.
“나를 영접하는 것은 공적인 일이요, 정인홍을 영접하는 것은 사적인 일이다. 정인홍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수령을 위협으로 억누르는가.”
하고, 먼저 합천군에 이문하기를,
“군공 첨지(軍功僉知) 정인홍이 젊을 때부터 유림에 몸을 의탁하여 헛된 이름을 얻었다. 그리하여 의리가 아닌 짓을 많이 하였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소위 유자(儒者)란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조용히 수양할 뿐, 조정의 옳고 그름과 대부의 어질고 간사함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이 나라에 살면서 대부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정인홍은 그렇지 않다. 그의 평생 행실을 공평하게 상고하면, 기세를 떠벌리고 안팎으로 결탁하여 사명과 수령을 위협으로 억누르면서 제 욕심만 멋대로 채운 데 불과할 뿐이다.”
하고, 이어 정인홍이 사납게 위협하여 폐단을 지은 죄 10여 가지를 열거하여 수죄하였으며,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그의 종을 잡아 가둔 다음 첩보(牒報)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정인홍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공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전일 이문 중에 열거한 죄목을 낱낱이 들어서 상소로 항쟁하였다. 선조는 공의 상소문을 보고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인홍은 이로 하여 혐의를 피해 물러났으나, 공 또한 이로써 파직당했다.
○ 정미년(1607, 선조 40). 공은 함흥 판관이 되었다. 공은 ‘조정에서 변방의 일은 방비하지 않고 도리어 토목 공사만 일으키니, 폐해가 백성에게 미친다.’는 등을 낱낱이 들어 상소하여 힘껏 말했으나 상소가 들어간 후 답이 없었다.
○무신년(1608, 선조 41). 차사원으로 서울에 들어오니, 선조는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박건(朴楗)이 외척으로서 맨 먼저 대사헌이 되니, 사람들은 모두 놀랍게 여겼다. 공은 상소하여 정사는 요체를 힘껏 아뢰고 또,
“박건은 인망이 부족한 자인데, 갑자기 대각(臺閣)에서 제일가는 청망(淸望)을 차지하였으니, 눈을 씻고 새로운 교화를 바라보는 이때에 사사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박건이 이 때문에 피혐하니, 사람들은 공을 위태롭게 여겼다. 광해군이 답하기를,
“말은 비록 미친 듯이 경직되었지만, 마땅히 아름답게 여기고 권장하여 언로(言路)를 열어야 하겠다.”
하고, 마침내 죄주지 않았다.
[주D-001]손도(損徒) : 오륜(五倫)에서 벗어난 행동이 있는 사람을 그 지방 또는 유림(儒林)에서 쫓아내는 것.
[주D-002]형서(邢恕) : 송(宋) 나라 때 사람. 그는 본래 정자(程子)를 사사(師事)하다가 배반하고, 그 후 사마광(司馬光)의 문객이 되었다가 사마광을 무함하고, 장돈(章惇)에 붙었다가 또 장돈을 배반하였다.
[주D-003]선문(先文) : 벼슬아치가 지방에 출장할 때에 가는 목적과 도착 일시를 그곳에 미리 통지하던 공문.
[주D-004]대조(大朝) : 왕세자(王世子)가 섭정을 하고 있을 때 임금을 지칭하던 말.
첫댓글 훌륭한 스승아래 큰 제자 난다더니 우산 선조님의 스승 모시는 뜻이 깊음을 이해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