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삼면(遠三面)의 유래(由來)
원삼면(遠三面)이라는 지명(地名)은 한자(漢字)에서 그 유래(由來)를 찾을 수 있으며 멀 원(遠) 자를 쓰는 이유가 상급 행정구역인 죽산군(竹山郡)에서 먼 지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죽산군(竹山郡)은 지금의 안성시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그리고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 일대를 관할했다.
목악면과 주서면은 옛 양지현에 속해있었으며 지금의 사암리와 좌찬고개 일원이며 목악면은 학일리, 목악리, 신기리 등을 관할하였고 원일면은 맹동, 좌찬리, 행군리 등을 관할하였다.
현재 용인시의 영역(領域)은 대체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廢合時) 기존의 용인군, 양지군 및 죽산군의 일부 지역이 합쳐져 형성되었다.
원삼면은 이중 본래 죽산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가좌. 창동. 두촌. 분촌. 문촌. 승죽. 능촌. 독촌. 야광 등의 9개 동리, 근삼면 석곡리의 일부 지역, 양지군 목악면의 6개 동리, 양지군 주서면의 광곡리를 합치고, 지역명은 그대로 원삼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원삼면은 고당리(高塘里). 사암리(沙岩里). 좌항리(左恒里). 맹리(孟里). 미평리(彌坪里). 가재월리(加在月里). 두창리(杜倉里). 독성리(篤城里). 죽능리(竹陵里). 목신리(木新里). 학일리(學日里). 문촌리(文村里)의 12개 리(46행정리 79반)를 관할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삼면의 인구는 2022년 8월 말 기준 8,130명(남자:4,251명 / 여자:3,879명)이고 4,029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면적은 60.14㎢이며, 사면(四面)이 400m 이상 산악 능선(山岳稜線)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은 야산 농경지 등으로 평지이며 동쪽으로는 백암면, 서쪽으로는 이동읍, 남쪽으로는 안성시 보개면과 고삼면, 남서쪽으로는 양성면, 북쪽으로는 양지면과 이천시 마장면, 북서쪽으로는 동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17번 일반 국도는 전라남도 여수 신복교차로에서 시작되어 원삼면 맹리. 미평리. 좌항리를 지나 양지 IC 사거리(제일 사거리) 종착점(終着點)에 이르게 되는데 이 17번 국도는 원삼면의 발전을 견인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며 그 외 국지도(國支道) 57번 및 318번 도로가 지난다.
지방하천(地方河川)인 청미천(淸渼川)은 한강의 지류로서, 원삼면 사암리 문수봉 북동계곡에서 발원(發源) 하여 원삼. 백암을 관통하고, 안성시 일죽면, 이천시 장호원읍을 지나 경기. 강원. 충북 3도가 접하는 지점인 여주군 점동면 장안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준용하천(準用河川:지방하천) 한천(閑川)의 발원지(發源地)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1리 쌍령산 북동쪽 골짜기 배내미약수터이다. 안성시 공도읍 한천 합류지점에서 평택시 현덕면 아산만방조제로 흘러든다.
국가하천인 안성천의 발원지(發源地) 역시 쌍령산 북동쪽 골짜기 배내미약수터로 볼 수 있다. 쌍령산은 용인, 안성, 평택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산이라 하겠다.
원삼면(遠三面)의 관할(管轄) 리(里)
1. 고당리(高塘里)
고당리는 349세대 610명(남자 323명, 여자 287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원삼면의 면(面) 소재지로, 원삼면 사무소(행정복지센터:고당리 88-1), 원삼 파출소, 원삼 우체국, 원삼 농업협동조합이 위치해 있다. 원삼면에 속한 리(里) 중의 하나로 본래 죽산군의 원일면 지역의 순당리와 양지군 목악면 고안동의 일부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를 합치고 목악면 고 안동에서의 '고(高)' 자와 순당리 에서의 '당(塘)' 자를 따서 고당리라 하였다.
고당(숯무지):고당 1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18세기 중엽부터 1914년 행정지명을 개편하기 전까지 양지현 목악면의 목악리에서 고안곡으로 별칭 되던 지역과 1894년 죽산부 원일면의 이칭(異稱)인 순당(筍塘)으로 불리던 지역이 1914년 합쳐지면서 목악의 고자와 순당의 당자를 따서 고당이라 칭하였다. 숯묻이는 고당리의 속명(俗名)으로 지명 유래담(由來談)에 해당한다. '숲묻이'였던 곳이 '숯묻이'로 불리게 된 과정을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일설(一說)에는 숲에 묻힌 마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광골:고당 2리에 해당되며, 고당의 서쪽 마을 그리고 동쪽 마을은 도락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앞에는 저무내뜰(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어 불린 마을로 추정된다.
2. 사암리(沙岩里)
사암리는 637세대 1334명(남자 671명, 여자 663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죽산군 원일면의 용암리(龍岩里), 사전리(沙田里), 천곡리(泉谷里), 내동(內洞) 일부와 양지군 주서면의 광곡리(廣谷里)를 합쳐 사전리의 사(沙) 자와 용암에서의 암(岩) 자를 따서 사암리라 하였다.
내동(內洞, 안골):사암리에 속한 마을 중의 하나. 사암 1리가 됨.
마을이 산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안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할 때 내동이라 하였다.
사전(沙田, 모래실):사암리에 속한 마을 중의 하나. 사암 2리가 됨.
사리(자갈)와 모래가 많아서 토질이 척박함으로 모래실 또는 사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질 토양이므로 밭은 많으나 논이 적어서 사전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용담(龍潭):사암리에 속한 마을 중의 하나. 사암 3리가 됨.
마을의 지형이 못 '지(池)'자 형국이며 또한 앞 내에서 용이 나갔다고 하여 '담(潭)'자를 써서 용담이라 하였다. 지형이 못과 같다던가 용이 나가서 못이라고 했다던가의 지명 유래에 참작되어 1970년 초 이곳에 저수지가 생겼으니 지명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광골(廣谷, 넓실):사암 4리가 됨.
일명 넓실 이라고 하는데, 마을에 4개의 골이 있으나 매우 넓으므로 넓다는 뜻과 마을을 뜻하는 실(室)을 붙여 광골이라 하였다.
용암(龍岩):사암 5리가 됨.
마을에 바위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용암, 또는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서 용바위라 한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용암이 되었다는 등의 속설이 있다. 1970년대 말까지 이곳에서 옹기그릇을 구워 냈으므로 점말, 점촌이라고도 하였다.
천곡(泉谷, 샘골):사암 6리가 됨.
샘골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 사시사철 내내 솟는 샘이 있어서 가뭄이 들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으므로 이를 샘골이라고 하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천곡이라 하였다.
3. 좌항리(左恒里)
좌항리는 668세대 1422명(남자 719명, 여자 703명)이 거주하고 있다.
양지군 좌찬리와 죽산군 원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좌찬리, 항곡리, 행군리의 일부를 합쳐 좌찬리에서의 '좌(左)'와 항곡리에서의 '항(恒)'자를 따서 좌항리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죽산현조(竹山顯朝)에 의하면 좌찬(左贊)역이란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 개국 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대한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조선 전기의 무신)가 회안대군과 결의하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정안대군(태종)에 패하자 박포의 유배지가 현재 지명인 좌찬 이었는데, 다만 유배지 성격상 역참(驛站) 또는 고을<고을:조선 시대에 주(州). 부(府). 군(郡). 현(縣) 등을 두루 이르던 말> 원(員) 근처가 배소(配所:귀양살이하는 곳) 임을 감안한다면 현재 좌찬인근인 것 같다.
박포는 유배 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宬/찬성(贊宬):의정부의 종 1품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좌찬성(左贊宬). 우찬성(右贊宬)이 있었다.>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이후 좌찬역(左贊驛)으로 역참(驛站)의 명칭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좌항(佐恒, 황골):좌항 1리 지역이 됨.
황골, 항골 등의 속명이 있는데 이는 항곡(恒谷)에서 파생된 속명이다.
좌찬(佐贊, 좌전):좌항 2리가 됨.
본래는 좌찬리라 하여 양지현에 속했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일제식으로 좌천이라 고쳤던 것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식 지명을 정비할 때 좌찬으로 되돌렸으나 아직도 좌전으로 표기하고 있다.
4. 맹리(孟里)
맹리는 427세대 816명(남자 424명, 여자 392명)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죽산군 원일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맹동과 행군이의 일부를 합쳐 맹리라 하였다.
행군이(行軍里, 행군):맹 1리가 됨.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력 부대가 이곳을 경유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는데 행군이 토성에서 의병에게 패한 왜군이 행군하여 물러가기도 하고, 또는 한양으로 행군하여 진격해 갔으므로 행군이라 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맹동(孟洞, 맹골):맹 2리가 됨.
맹골이라고도 하며, 예전에 양천허 씨의 세거지(世居地)로서 문관이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추노지향(鄒魯之嚮:공자. 맹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이란 의미를 따서 맹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한편 맹 씨가 처음 살았기 때문에 맹골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뒷산을 건지산이라고 하는데 봉수지(㷨燧地)가 있으며 동북쪽으로 정원사가 있다.
내촌(內村):맹 3리가 됨.
맹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안말이라고 불렸는데 안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내촌이라 하였다. 마을 동남 간에 수정산이 있으며 수성암이 있다.
능내(陵內, 능안):맹 4리가 됨.
능안이라 하는데 능내는 능안의 한자 표기이다. 조선조 인조 때 허적이 나라에 공을 세운 뒤 양릉부원군(陽陵府院君)이 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묘를 썼다고 하여 능인이라 하였으며, 허적미평리의 묘는 천장(遷葬) 하였으나 사묘(四廟: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등 4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가 아직 남아있다.
5. 미평리(彌坪里)
미평리는 177세대 348명(남자 192명, 여자 156명)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죽산군의 원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미평리와 내동의 일부를 합쳐서 미평리라 하였다. 마을 가운데에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육존불을 미륵불로 생각하고, 미륵불이라는 뜻에서 '미(彌)' 자를 따고 들 '평(坪)' 자를 합쳐서 미평리라 하였다. 미륵 들이라는 이름도 함께 쓰인다.
미륵들:미평 1리가 됨.
마을 가운데 약사여래로 지칭되는 불상을 미륵불로 생각하고 미륵들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생안(生雁):미평 2리가 됨.
옛날에 어떤 감여가<堪輿家:음양설에 의하여 집터나 묏자리를 잡는 사람, 또는 풍수지리에 관한 학문을 연구한 사람, 지관(地官)>가 지나다가 멈춰 서서 "마을 뒷산이 마치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상이로구나"라고 하였다 하여 그 뒤로부터는 이 마을을 생안이라 하였다고 한다.
6. 가재월리(加在月里)
가재월리는 117세대 236명(남자 126명, 여자 110명)이 거주하고 있다.
가재월리:원삼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청미천(淸渼川)의 최상류이고 가재가 많이 산다고 하여 가재울. 가재월이라 불렀다 한다.
본래 죽산군 원삼면 지역으로 가재울. 가재월. 가좌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근삼면 석곡리 일부와 원일면 미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좌리라 해서 용인군 원삼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외사면(外四面)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에 일부를 떼어 다시 원삼면에 편입해 가재월리가 되었다.
7. 두창리(杜倉里)
두창리는 608세대 1360명(남자 711명, 여자 649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죽산군 원삼면의 가좌리, 창동의 일부 지역과 두촌, 분촌을 합쳐 두동(杜洞)에서의 '두(杜)' 자와 창동에서의 '창(倉)'자를 따서 두창리라 하였다.
황토현(黃土峴):두창 1리 지역이 됨.
황토재라고도 한다. 황톳길에 있는 재(언덕, 고개)란 뜻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황토현이라 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돌살촉(돌살钃:돌로 만든 화살촉. 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사용)이 발견된 바 있다.
평대(坪垈):두창 2리 지역으로 벌터, 벌말 등으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표기할 때 벌은 들(坪)로 터를 대(垈)로 하여 평대가 되었다.
분촌(粉村, 분잿말):두창 3리에 해당되며, 닥나무가 많이 있어서 닥촌이라고도 하였으며, 분잿말이라고도 하였다. 분촌은 분잿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읍지(邑誌) 등의 기록에도 분촌으로 쓰여있다.
주내(골안):두창 4리 지역으로 예전에 고을(員)이 있었다는 일설(一說)이 있으며, 현재 두창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율곡(밤듸):두창 5리에 해당되며 일반적으로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골짜기를 율곡 또는 밤듸라고 하는데, 이러한 지명이 산재하고 있다.
용수(龍水):두창 6리가 됨.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서 5~6척(尺:한 치의 열 배로 약 30.3cm)이나 되는 물 줄기가 솟아올랐으므로 이를 용천(湧泉)이라 하였는데, 어느 사람이 그 근처에 묘를 쓴 후로 용천수가 끊어졌으나 용천수가 나던 곳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용수(湧水)라 하던 것이 용수(龍水)로 바뀌었다고 한다.
복촌(福村):두창 7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본래 보구재, 또는 복우재라는 속지명이 있었는데, 이를 복촌으로 표기하였다.
8. 독성리(篤城里)
독성리는 248세대 531명(남자 284명, 여자 247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죽산군 원삼면의 독촌, 야광의 일부와 양지군 목악면의 성리 일부를 합쳐 독촌에서의 첫 자와 성리의 '성'자를 따서 독성리라 하였다.
하사(何寺, 중터):현 독성 1리 지역이 됨.
예전에 이 마을에 절터가 있었으므로 이 부근을 지칭할 때 옛 절이라 하였던 것이 으쩔이, 엇저리 등으로 변음 되면서 "어째서 절이냐"라는 뜻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하사가 되었다.
성리(城里, 잿말):현 독성 2리 지역으로 마을 앞에 고개 하나가 있어 잿말이라고 하였다.
고어(古語)로 성(城)은 '잣', '잿'이라 하는데 잿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성(城)'과 음이 같아 고개의 뜻이 아닌 성(城)의 뜻으로 훈역된 것 같다. 근처에 성곽이나 축성 흔적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과는 무관하다.
야광(夜光):현 독성 3리 지역으로 야광이 등으로 호칭되기도 한다.
예전에 무학대사가 천도지상을 보러 다니던 중 이곳에 이르러 야광주(夜光珠)가 묻힌 지상이라 해서 야광으로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9. 죽능리(竹陵里)
죽능리는 321세대 556명(남자 288명, 여자 268명)이 거주하고 있다.
원삼면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국지도 57호선이 남북으로 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승죽리(勝竹里)와 어현(於峴). 능촌(陵村). 후평리. 야광리 일부를 합치면서 승죽에서의 '죽' 자와 능촌에서의 '능'자를 따서 죽능리라 하였다.
청룡(靑龍):죽능 1리인데, 마을 뒷산을 청룡산이라 하며 그 산 아래 마을이라 하여 청룡말로 불린다.
어현(於峴):죽능 2리가 된다.
본래 고개가 늘어져 우마차가 다니기 힘들다 하여 느리재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어현이라 했다.
이 고장 출신 오인수 의병장, 오광선 장군, 오희영, 오희옥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문을 기념하는 '3대 독립항쟁기적비'가 청룡말과 능말 사이에 세워져 있다.
후평(뒷벌):죽능 3리가 된다.
승죽(勝竹):죽능 4리가 된다.
마을 뒷산에 조릿대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예전에 난리가 났을 때 죽창을 만들어 적을 무찔렀기 때문에 승죽골이라 하였다는 속설이 전한다.
능말:죽능 5리가 된다.
마을 뒷산에 능과 같은 커다란 분묘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SK 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산업단지 건립이 예정되어 있는 지역이다.
둥지골:죽능 6리가 된다.
전원형 빌라와 주택 등 신주거 공간과 박물관. 미술관 등의 문화 공간이 어우러져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10. 목신리(木新里)
목신리는 174세대 347명(남자 195명, 여자 152명)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양지군 목악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목악리, 신기리와 후동을 합쳐 목악에서의 첫 자와 신기리에서의 '신' 자를 따서 목신리라 하였다.
진수(陣水):목신 1리가 됨.
안성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이 마을 앞을 감돌아 나가므로 마치 물로 진을 친 것 같다 하여 진수라고 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후동(後洞):목신 2리가 됨.
목신리 4개 마을 중 가장 뒤늦게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신촌(新村):목신 3리가 됨.
무애기, 무액이 등의 속명이 있는데 무애기(액이) 등은 고지명인 목악(木岳)의 변음이다. 구봉마을 앞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샛말, 새말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신촌이라 하였다.
구봉(九峰):목신 4리가 됨.
구봉말이라고 하는데 마을이 구봉산(461m)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산 명칭을 따서 구봉이라 하였다.
11. 학일리(學日里)
학일리는 126세대 224명(남자 126명, 여자 98명)이 거주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죽산군 원삼면의 문촌리 일부와 양지군 목악면 학일리 지역을 합쳐 으뜸 되는 마을의 명칭대로 학일리라 부르게 되었다.
학일(學日):학일 1리가 됨.
본래는 학(鶴)과 백로 등이 서식하여 학일(鶴日)이라 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3학사 중 한 사람인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1609.7.8~1637.5.13)가 태어난 후 학일(學日)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달제 선생의 부인 남 씨의 묘비(墓碑)에는 선생이 한양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에 다소 의심이 간다.
고초(枯草):학일 2리가 됨.
일명 고추골이라고도 하는데 고초골(枯草谷)의 변음이다. 추담 오달제가 이곳에서 출생할 때 3일간 풀이 말랐기 때문에 고초동이라고 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마을 뒷산의 조중회(趙重晦:1711~1782) 묘표에 따르면 이곳은 고치동(高峙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세종-포천 간 고속도로 나들목이 위치해 있다.
12. 문촌리(文村里)
문촌리는 177세대 346명(남자 192명, 여자 154명)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죽산군 원삼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문시랑촌과 석화지를 합쳐 문촌리라 하였다.
문촌(文村, 문시랭이):문촌 1리가 됨.
본래 죽산군의 문시랑촌(文侍郞村) 이라는 기록(<죽산군 읍지>)이 있으며 후에 용인으로 편입되었는데 속칭 문시랭이라고 불리는 것은 문시랑의 변음이며 마을 명칭을 한자로 표기할 때 문촌리라 하였다.
석화지(石花池):문촌 2리가 됨.
속칭 돌곶이, 돌고지 등으로 불렸는데 중세에 '곶'은 '곳'에서 '꽃'으로 바뀐 말로 한자로 표기하여 석화지라 하였다.
[출처] 원삼면(遠三面)의 유래(由來) 어제와 오늘|작성자 땅박사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