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민 한정동의 삶과 문학
박상재
Ⅰ. 들어가는 말
백민(白民) 한정동(韓晶東)은 1894년 12월 7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이월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청주이며 한승규(韓升奎)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살 때부터 형들이 다니는 서당에 따라가 천자문을 익히고 여섯 살 때 동문선습을 배운다. 1909년 결혼과 더불어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그의 문학적 소양을 길러준 모친이 별세하자 실의에 빠져 숭실학교를 자퇴한다. 그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12년 평양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916년 졸업한다.
1917년 총독부에서 시행한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진남포 시청 서기로 부임하여 3년동안 근무한다. 민족주의 사상이 깊었던 그는 홍만호와 함께 기독교계 학교의 소년회를 중심으로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소년척후단’ 창단에 관여한다. 이윽고 서기직을 버리고 1920년 삼숭(三崇)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5년동안 교편을 잡는다. 백민은 교직에 있으며 동시를 쓰기 시작한다. 많은 습작 중 <소금쟁이>, <달>, <갈잎배>, <어머니 생각> 등 4편을 골라 1923년 매일신문, 19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낙선한다. 같은 작품들을 1925년 동아일보에 응모하여 당선한 후 동요 창작에 매진한다.
이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진남포 지국장 겸 기자로 있었고, 1937년부터 3년동안에는 <동아일보> 진남포 지국장을 맡아 일했다. 일제 말엽 진남포의 비밀결사 모임인 ‘십인회’ 회원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시국토론을 하는 등 민심과 여론을 유도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한다. 해방 후에는 소련 점령군에 의해 진남포시 인민위원회 시장직에 임명되지만 몰래 도피하여 단 몇 시간 동안의 시장을 경험한다. 이로 인해 요주의 인물로 몰려 부인의 빈대떡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는 조만식이 결성한 조선민주당 진남포 시당 창당 멤버로도 활동하였다. 그 후 6․25전쟁 전까지 진남포 용정국민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근무하기도 한다.
한정동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가 아들이고 나머지는 딸이다. 전쟁이 난 후 1950년 12월 막내딸만을 데리고 피난을 한다. 피난 생활이 오래지 않을 것 같아 원고를 두고 왔기 때문에 많은 작품이 유실된다. 이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국제신보>사 기자로 일하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덕성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1958년에는 작품집『갈잎 피리』를 상재하였고, 1968년에는 동화집『꿈으로 가는 길』을 펴냈다. 1968년 ‘노래동산회’(대표 박병두)와 서울교육대학 아동연구회에서 제정한 ‘고마우신 선생님상’의 상금과 개인 돈을 내어 1969년 ‘한정동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원고료를 저축하여 모은 오십만원이 상의 기금이었으며, 이 이후에도 원고료를 모아 상금을 마련하였다.
한정동은 1976년 6월 23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물왕리 남대문교회 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그의 무덤 가에는 아동문학가 박경종이 글씨를 쓴 ‘따오기 시비’가 자리잡고 있다.
Ⅱ. 백민의 작품 세계
1. 한국 아동문학의 태두
백민은 우리나라 아동문학계 신춘문예 제1호 당선작가이다. 1925년 동아일보는 최초로 신춘문예제를 실시한다. 백민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기 전 1924년 <별나라> 6월호에 동요 ‘일편단심 민들레’와 ‘모종’을 발표한다. 한국 동요의 황금시대를 여는데 기여도가 가장 큰 매체는 1923년 방정환에 의해 창간된 <어린이>지이다. <개벽> 의 자매지인 이 잡지에 윤극영은 ‘반달’(1924년)을 발표하고, 유지영은 <고드름>을 발표한다. 서덕출은 <봄편지>(1925년)를, 이원수는 <고향의 봄>(1926년)을 발표한다. 한정동이 1925년부터 1928년까지 4년 동안에 <어린이>지에 발표한 작품 수는 14편이다. 같은 기간에 활동했던 윤극영 3편, 이원수 3편, 유도순 3편, 손진태 1편, 진장섭 1편, 윤석중 1편을 발표한 것에 비하면 한정동의 왕성한 활동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정동은 한국동요의 황금기를 이끈 트로이카 중에서도 리더인 셈이다.
백민은 고향인 강서 초리면 이리섬(일명 남포답)의 자연과 정서를 동시로 표현 하였다. 그의 고향 이리섬은 대동강에서 갈라져 나온 봉상강의 지류라 물이 풍부하고 갈대밭과 버드나무가 많았다.
갈밭 안쪽에는 큰 둑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 둑들 위에는 높고 낮고 한 검푸른 참버들 나무가 심어진 데가 많고 실개울을 따라 가노라면 군데군데 일부러 만든 봇동(물웅덩이)이 있는데 이 봇동에는 푸른 기름이 철철 흐르는 듯한 장풍(창포)이 옆으로 죽 늘어서 있어서 초여름에는 그 봇동 물면을 불어오는 간드러진 바람이 장풍꽃 냄새를 가끔 싣고 와 선사해주기도 한다./ 이맘때면 갈잎을 따서 피리를 만들어 불곤하는데, 그것을 더욱 흥겹게 도와주기 위하여서인지 아니면 갈새는 갈새들대로 제 흥에 겨워서인지 파란 갈대밭 속 여기저기서 ‘갈갈갈…’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다.
2. 영예와 시련의 소금쟁이
백민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창포못의 소금쟁이를 노래하였고 갈대밭의 갈잎피리를 연주하였다. 그의 시심의 고향은 17세에 여읜 어머니이고 그가 불던 갈잎피리는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이다. 그가 시에 입문하던 때에 쓴 초기 시가 소금쟁이이다. 이 시는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어 영예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표절시비에 휘말려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창포밭 못 가운데/ 소금쟁이는/ 1234567/ 쓰며 노누나//
쓰기는 쓰지만도/ 바람이 불어/ 지워지긴 하지만/ 소금쟁이는//
싫다고도 안하고/ 뺑뺑 돌면서/ 1234567/ 쓰며 노누나
소금쟁이 전문 <동아일보> 1925. 3.9
이 작품은 이듬해 9월 23일 홍파(虹波)에 의해 표절 시비를 받게 된다. 보통학교 6학년 여름방학 학습장에 있는 일문시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백민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시의 원작과 함께 창작과정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 유사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2년 첫여름 6월이다. 나는 고향을 찾았다. -중략- 마침 그 수문턱에는 소금쟁이 네다섯 놈이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물에 밀려서 내려오고 또 올라갓다 내려오곤 하였다. 숱하게도 재미스러워서 “야 은섭아(여섯살 된 조카) 저 소금쟁이가 무엇하고 있니?”하고 물었더니 그 애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삼촌 그것 소금쟁이가 글 쓰는 구나!” 하였다. 나는 생각도 못하였던 의외의 대답에 놀랐을 뿐 아니라 꼭 그 때의 실경을 그려서 시 한편을 써 보았다. -중략-
장포밭에/ 소금쟁이/ 글씨글씨/ 쓰며 논다//
글씨글씨/ 쓰지만도/ 물을 너서 지워진다//
지워져도/ 소금쟁이/ 글씨글씨/ 또 써낸다
그 시의 원작은 이러하다. 그런데 나는 어떤 까닭인지 4․4조나 8․8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까닭에 이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7․5조로 고쳤으면 혹 어떨까?‘하고 여러번 생각도 하였고, 또 동시에서는 쉽고도 재미로운 것이 좋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글씨글씨’ 란 것을 좀더 재미롭게 하기 위하여 숫자 1 2 3 4 5 6 7을 넣은 것이요, 또 지워진다는 말을 형용할 수가 없어서 바람은 불어도 안 오는 것을 억지로 잡아넣었던 것이다. -중략- 나는 보통학교 학습장에서 그런 글을 본 적도 없으려니와 내가 이 동시를 처음 발표한 것이 1923년 12월임에야 어찌합니까.-하략-
3. 갈대잎과 수양버들
백민의 초기 시에는 그가 나서 자란 강서 초리면 이리섬의 정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 곳은 논벌로 이어져 있는 강성평야이다. 백민은 고향 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 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리섬을 별칭 ‘남포답’이라고 부르며 평양 부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이 섬은 앞에는 넓은 대동강을 거느리고 삼면은 소룽개(작은 냇가)로 둘러싸여 갈밭과 버들의 푸르름 속에 숨어 자는 듯 아늑한 노을을 머리에 인 만절의 논틀이다.”
이렇듯 그의 동시에는 푸른 갈잎(갈대잎)과 수양버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이러한 소재는 시각적 이미지를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갈잎과 버드나무는 그가 나서 자란 이리섬의 상징이요 그의 정서적 고향인 것이다.
외대박이 두대박이/ 청갈잎 배야//
새빨간 아이들의/ 꿈을 태우고//
달아나라 갈잎배야/ 얼른 가거라//
아이들의 단꿈이/ 깨기나 전에/
한껏한껏 달아나라/ 어디까지든//
꿈나라의 복판까지/얼른 가거라
갈잎 배 전문 <동아일보> 1925. 3.9
‘갈잎배’는 ‘소금쟁이’와 더불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외대박이’와 ‘두대박이’는 외돛대와 쌍돛대를 뜻한다. 청색의 보색은 적색이다. 아이들을 새빨갛게 표현한 것은 청갈잎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꿈이 많고, 밝고 예쁜 아이들을 ‘새빨간 아이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푸른 청갈잎과의 보색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화자는 사랑하는 아이들의 꿈을 태운 청갈잎배가 무사히 달아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백민이 염원하는 꿈나라의 복판은 일제에 강점된 조국의 해방인 것이다.
혼자서 놀을라니/ 갑갑하여서/ 갈잎으로 피리를/ 불어보았소//
보이얀 하늘가엔/ 종달새들이/ 봄날이 좋아라고/ 노래 불러요//
내가 부는 피리는/ 갈잎의 피리/ 어디어디까지나/ 들리울까요//
어머님 가신 나라/ 멀고 먼 나라/ 거기까지 들리우면/ 좋을 텐데요
갈잎 피리 <동아일보> 1925. 4.9
백민은 어린 시절 혼자 놀기 심심하여 갈잎 피리를 즐겨 불었다. 갈대가 무성한 하늘에는 종달새들이 봄노래를 부른다. 피리를 불던 시절에는 어머니가 생존했지만 시인이 되어서는 어머니가 작고한 후이다. 시인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 ‘어머님 가신 나라’ 까지 들리라고 갈잎 피리를 분다. 갈잎 피리 소리는 작고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상적인 사모곡이다.
못가에 수양버들/ 한가도 하다/ 바람에 흥겨워서/ 흐은작흔작//
못가에 수양버들/ 곱기도 하다/ 실실이 늘어져서/ 바안짝 반짝//
저편 가지 난 꽃에/ 그네를 메고/ 수양버들과 같이/ 놀고 싶어요
수양버들 <어린이> 1926. 6
백민의 고향 작은 못가에는 갈대와 함께 수양버드나무가 늘어져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실가지는 봄의 흥취를 더한다. 그는 7․5조의 음율을 좋아하여 동요마다 음수율을 맞추려 노력한다. 고운 수양버들은 곱기도 한 어머니의 자태이다. 시인은 수양버들 고운 가지에 그네를 메어 함께 놀고 싶어한다. 그네를 뛰며 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동요이다.
4. 시각 이미지와 청각이미지의 교합
청산포 어귀/ 살구꽃 복숭아꽃 피는 동리에
오막살이 초가 한 채/ 고향 집이 그리워요/ 참 그리워요.//
서늘한 달밤/ 우거진 갈밭 사이/ 창포 못가에
어미 오리, 새끼 오리/ 머리 머리 마주대고/ 꿈만 꾸지요.//
차알삭 찰삭/ 찰삭이는 물결에/ 반짝이나니
금가룬 듯, 은가룬 듯/ 오리 오리 머리들을 달이 비춰요.//
청산포 어귀/ 메찰벼 고개 숙인/ 황금 벌판에
오막살이 초가 한 채/ 고향 집이 그리워요/ 참 그리워요.
고향 생각 <어린이> 가을 특별호 1925.10
청산포는 백민의 고향 마을에서 가까이에 있는 작은 포구이다. 그가 살던 초가 마을에는 살구꽃이 피고, 복숭아꽃도 핀다.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개나리, 진달래와 더불어 한국의 봄을 대표하는 꽃이다. ‘북숭아꽃 살구꽃’을 연상하면 동원 이원수의 ‘고향의 봄’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떠오르기 십상이다. 동원은 이 작품을 1926년 <어린이>지 4월호에 발표한다. 백민이 <어린이>지 특별호에 발표한 ‘고향생각’보다 6개월 뒤의 일이다.
이 시도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며 그리움을 자아내게 한다. 1,2연은 봄, 3,4연은 가을의 정취이다. 갈대가 자라나는 서늘한 봄밤 갈대밭 사이에 창포꽃이 피어있는 못이 있다. 밤이 되자 달이 뜨고 못에는 어미오리와 새끼 오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요히 잠들어 있다. 노란 창포꽃 핀 봄밤, 하늘에는 달이 훤히 떠있고, 못에는 오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는 장면은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하다. 가을이 되자 논벌은 벼가 익어 황금벌판으로 변한다. 가을 밤 바람이 살랑 불자 연못물은 찰싹거리며 금가루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인다. 달은 못에 잠든 오리 떼들을 비추고 있다. 가을 달밤, 못물이 찰삭찰삭 소리를 내는 삽화는 청각적 이미지를 생성시키게 한다.
그의 초기 시에 나오는 또 한편의 ‘복숭아꽃’을 살펴보자.
산막집 늦은 볕에 복숭아꽃은/ 쓸쓸한 토방가로 떨어집니다.//
가는 봄 긴 하루를 물레질 소리/ 졸음 오게 붕-붕 늙은 할머니//
뻐꾹새 외마디로 울고 가니까/ 또 한잎 복숭아가 떨어집니다.
산막의 늦봄 <별나라> 1928.7
늦은 봄 농촌 산골집의 정경이 떠오르는 이 시 또한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가 교합을 이루고 있다. 늙은 할머니 혼자 물레질을 하는 산막집 흙마루(토방)에는 복숭아꽃이 떨어지고 있다. 한폭의 수채화처럼 시각적 이미지가 선명한 장면이다. 할머니는 진종일 붕붕 물레 소리를 내고 있고, 뻐꾸기는 뻐꾹 외마디로 울고간다. 외마디 울음에 맞춰 복숭아꽃도 한 잎만 떨어지는 것이다. 물레 소리와 뻐꾸기 울음소리는 청각적 이미지를 자아내게 한다.
5. 국민동요가 된 애절한 사모곡
백민은 그가 열일곱살 때 여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상적인 사모곡을 많이 썼다. 그 대표적인 시가 국민동요가 된 <따오기>이다. 그런데 이 시의 원 제목은 “두루미”(당옥이)였다. 이 시가 널리 회자될 수 있었던 것은 시각이라는 씨줄과 청각이라는 날줄이 직조해내는 환상성과 함께 8․5조의 음수율로 되풀이되는 반복어의 유희성 때문이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당옥당옥 당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당옥당옥 당옥 소리/ 구슬픈 소리
날아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달 돋는 나라
약한 듯이 강한 듯이/ 또 연한 듯이/ 당옥당옥 당옥 소리/ 적막한 소리
흘러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드뇨?/ 내 어머님 가신 나라/ 별 돋는 나라//
나도 나도 소리 소리/ 너 같을진대/ 달나라로 해나라로/ 또 별나라로/
훨훨 활활 떠다니며/ 꿈에만 보고/ 말 못하던 어머님의/ 귀나 울릴걸
두루미 <어린이> 1925. 5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고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은 동어 반복으로 애상을 자극하고 시각적 감각을 자극한다. ‘당옥당옥 당옥 소리’는 ‘처량한 소리’이고 ‘구슬픈 소리’이기 때문에 청각을 자극한다. 게다가 동일어 반복으로 애상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당옥이가 가는 곳은 ‘내 어머님 가신 나라’인 ‘해 돋는 나라’이고, ‘달 돋는 나라’이며 ‘별돋는 나라’인 것이다.
높은 달아 저 달아/ 기러기도 왔는데/ 새 가을도 왔는데/ 어머니도 안 오니//
가을 밤에 귀뚜라미/ 고운 노래 부를 때/ 기럭 함께 오시마/ 약속하신 어머님//
밝은 달아 저 달아/ 우리 엄만 왜 안 와/ 앞집 곤네 읍하고/ 정성들여 묻는다
달 <동아일보> 1925. 3. 9
‘달’ 또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중의 한 편이다. 7․7조의 음수율로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이다. 조동일은 “아동문학이 불우한 어린이들의 슬픔을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야 한다는 방정환의 지론을 받아들여 한정동이 어머니 없는 고아의식을 환기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작고한 어머니를 그리는 애상적인 정서라고 해서 고아의식을 환기시켰다고 한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고아의식은 곤궁과 결핍과 슬픔과 동정의 이미지를 수반하므로 애상적 정서와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백민의 어머니는 그가 열일곱 되던 해 여름에 작고했다. 시인은 앞집 친구 곤네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 곤네는 예를 갖춰 읍하고, 기러기와 함께 온다고 약속한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기러기도 왔는데 왜 안 오느냐고 묻는다. 이 시에도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정서가 가득 배어 있다.
집 떠나 십 년 만에/ 물레질 소리/ 부웅붕 지금 듣고/ 나는 울었소!//
고향의 초가지붕/ 능짓불 아래/ 주름진 엄마 얼굴/ 눈에 어려서….//
지금은 안 계시는/어머니기에/ 부웅붕 물레 소리/ 나는 울었소.
물레 소리 <별나라> 1927. 5
백민의 어머니는 물레질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레란 솜을 자아서 실을 뽑는 재래식 기구이고, 능짓불은 송진가루로 만든 등잔불이다. 초가집에서 능짓불 아래 주름진 얼굴로 부웅붕 물레질을 하던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 화자는 고향을 떠난지 십년 만에 물레질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운다. 이 동요시 역시 회고적이고 애상적인 정서로 가득차 있다.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것만은/ 누른 잎 뜰가로/ 다투어든다//
『헐벗은 나무에는/ 저녁 엷은 빛/ 뎅그런 아치 둥지/ 춥지 않을까』//
잊었노라 생각도/ 안 하것만은/ 햇조밥의 땅콩알/ 보기만 하면//
『어머님 계실 때엔/ 골라 스무 알/ 오히려 적을세라/ 좀더 달라늬』
가을이 되면 -어머님을 생각하며- <어린이> 1930. 9
낙엽지는 가을의 정경이 눈에 선한 동요이다. 가을이 깊어지자 떨어진 누런 낙엽이 뜰가로 모여든다. 해가 뉘엿하자 빈 나뭇가지에 있는 뎅그런 둥지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다. 헐벗은 나무위에 있는 뎅그른 둥지는 화자인 백민의 자화상이다. 춥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은 어머니 마음이다. 가을이 되어 햇조밥에 섞인 땅콩알을 보며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간절하다.
6.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백민은 <따오기>를 지을 1914년 평양고보 편입 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말을 잘못하여 수업에 지장이 많았다. 마침 일본에 유학한 친구가 <도오와>(동요)라는 일본의 아동잡지 한 권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책 내용 중 우리 민족을 폄하하는 만화가 실려 있었다. 백민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에 대한 저항감을 키우게 되었다.
외어깨로 엿 고리/ 둘러메고서/ 엿사시오 외치는/ 엿장사 영감/
금년은 어디 가고/ 아니 오실까//
앞마당/ 너른 마당/ 널뛰는 마당/ 내년도 널을 뛰는 정월 보름엔/
기어코 또 온다고 약속했건만//
엿장사 영감님은 잊어버렸나/ 아니면 늙어늙어 꼬부라졌나/
오늘도 정월보름 널은 뛰건만
엿장사 영감 <별나라>, 1928.3
정월대보름은 설날 못지 않은 우리의 명절이다.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가지만 대보름엔 우리의 민속놀이인 널을 뛰고 연을 날렸다. 그 정월 보름이 돌아왔는데, 오겠다고 약속한 엿장수 영감이 오지 않자 화자는 걱정을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엿장수나 방물장수로 가장하여 전국을 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적지않았다. 엿장사 영감을 기다리는 화자의 속내는 빼앗긴 조국의 해방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다.
곱지도 않다는데/ 왜 왔던 말가/ 제 집이 있는데도/ 남의 뜰에를/
소꼽을 놀자고는/ 다 가져가는/ 고놈의 땅땅보는/ 밉상 중 밉상!
땅달보 「문단 데뷔와 작품 활동」,『한정동선집』402쪽
백민은 삼숭학교 재직시 위의 시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일경 고등계에 불려간다. 글 중의 ‘왜’는 왜(倭)로 일본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 ‘땅달보’는 키가 작은 왜인을 뜻한 것이 아니냐? ‘소꼽을 다 가져간다’는 것은 물건들을 빼앗아간다는 뜻이 아니냐며 취조를 받는다. 이에 백민은 “당신은 아동문학을 이해 못하고 있다. 어린이에게는 거짓이나 왜곡은 가르칠 수도 없고 통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말은 억측이니 내 주변을 조사해보고 다시 따져주기를 바란다”고 당당히 맞선다. 다시 조사를 해보니 과연 ‘땅딸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장난감을 가끔 가져간 일이 있어 종결되었다. 백민은 이 작품이 실제의 사실을 읊은 것이지만 왜를 풍자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아 널리 퍼뜨리려 했다고 회고 한다.
살진 풀도 싫소 싫소/ 늘 먹는걸요/ 외양간도 싫소 싫소/ 늘 있는데요/
멧부리에 닫고 뛰는/ 굴레벗은 말//
산에 가면 높아 좋다/ 껑충 뛰고요/ 들에 가면 넓어 좋다/ 달아납니다/
멋있게도 뛰며 닫는/ 굴레 벗은 말//
벌거숭이 나도 나도/ 굴레 벗은 말/ 백두 금강 태백 한라/ 모두 내 차지/
거침없이 뛰며 놀을/ 내 땅이라네
굴레 벗은 말 <어린이>, 1930.9
‘굴레 벗은 말’은 우리민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정신이 들어있는 동요이다. 속박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굴레 벗은 말에 비유한 것이다. 화자인 자신을 굴레 벗은 말이라고 명시하고 백두 금강 태백 한라 온나라 산천이 우리의 땅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한시바삐 강탈당한 국토를 되찾고 독립해야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이다.
Ⅲ. 나오는 말
백민 한정동은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 당선 아동문학가이자 1920년대 한국동요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끈 트로이카 중에서도 중심리더였다. 그런 그가 문학사적 업적에 비해 크게 조명 받지 못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신춘문예 당선작의 한편인 ‘소금쟁이’에 대한 표절시비로 인한 손상된 이미지 때문이다. 표절시비는 유사성은 있지만 표절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고 당시에 이미 판가름 났고, 여타 많은 작품들이 문학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재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둘째 정형율을 중시한 동요시 창작에만 치중하고 내재율을 중시하는 자유동시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점이다. 그의 동요시는 개화기 창가형식에 영향을 받아 7․5조의 동요시가 대부분이다. 셋째 6․25 전쟁 중 남한 정착시 안정되지 못한 생활환경과 고령으로 인하여 창작 여건이 여의치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57세의 고령에 막내딸만 데리고 월남하느라 미발표된 많은 작품이 유실되었고, 건강도 좋지 못하였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평생을 외로움 속에 살다간 백민이 사회 활동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까닭은 겸손한 성격에 과묵하고 목소리도 작아 진취적이지 못해서이다. 월남 후에는 자유동시와 동화(아동소설)도 다수 창작했지만 그 성과는 동요시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정동은 그가 개척한 아동문학적 위상이나 문학적 성과로 보아도 한국 아동문학의 태두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배로나 문단 경력으로도 미급한 윤석중, 이원수, 강소천 등의 문단활약의 위상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백민의 문학세계를 바르게 조명하고 그의 위상을 바로 세워 한국아동문학사의 어긋난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다.
참고문헌
성기조 편저,『한국대표수필선』, 금자당, 1985
장영미 엮음『한정동선집』, 현대문학, 2009
조동일, 『한국문학통사』5권, 지식산업사, 1989,
한정동『갈잎 피리』,청우출판, 1958
한정동『꿈으로 가는 길』,문예출판사, 1968
한정동『따오기』(박경종 엮음), 서문당, 1986
『사상계』, 1965. 8월호
『아동문학』7집, 배영사, 1963.12
『현대아동문학』창간호, 현대아동문학회, 19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