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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지(李釋之)
고려(高麗)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호는 남곡(南谷),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 영양군(永陽君) 이대영(李大榮)의 6세손(六世孫)이며, 위위시(衛尉侍) 판사(判事) 송현(松賢) 의 손자이고, 경덕재(經德齋)출신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이던 흡(洽)자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며. 남곡공파(南谷公派) 파조(派祖)이다.
1341년에 목은(牧隱), 이색(李穡)등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고, 다시 134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국 원나라에 사신을 갔다가 금대(金帶)를 하사받고 온일이 있었다.
고려에 돌아와 보니 나라의 형세가 이미 신왕조가 태동하고 있는 정세를 판단하고 누대에 걸친 전왕조의 중신(重臣) 가문 출신으로 취할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여러 동료 상신(相臣)들과 이별을 고하고, 경기도 용인현에 있는 남곡(南谷)이라는 골짜기로 숨어 들어 갔다.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난세를 당하여 충신으로서 취할바 자세를 교육하였다. 이태조가 등극한 뒤 그인품을 아껴서 여러 차례로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남곡선생은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절의 (節義)의 표상인 두문충현(杜門忠賢) 72人중의 한 분이다.
1341년(충혜왕11,辛巳)에 목은(牧隱) 이색(李穡)등과 함께 진사에 급제하시고,
1347년(충목왕3,丁亥)에 문과에 급제하셨다.
1357년(공민왕6년) 할아버지께서 정언(正言)이 되셨을 때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이색(李穡)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에 관하여 논하시다가 재상(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아 밀성(密城:현 密陽)의 외직으로 옮겨졌었고, 고려말에는 보문각 제학(提學:종2품) 판도판서의 벼슬을 지내셨다.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등극한 뒤 할아버지의 인품을 아껴서 여러 차례로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할아버지는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으시고,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절의(節義)의 표상인 두문충현(杜門忠賢) 72人중의 한 분이시다. 따라서, 벼슬에서 물러나 용인남곡(龍仁南谷)에 은둔하시며 충절(忠節)을 지키신 분으로,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영천읍 쌍계동 구인사(求仁祠)에 서파 안유(西坡案柔) 할아버지, 쌍계 영근(雙溪榮根) 할아버지와 함께 배향되셨다
子孫들에게 경계하는 詩 한구절을 써주었는데 그 詩는 다음과 같다. [사관과 대각으로 만석궁을 당기지 말라고 너희에게 경계한다. (史官臺閣連家 世戒爾休 彎萬石弓)] 그 후 조정에서는 先生의 인품을 훌륭히 여겨 여러 차례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고 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응하지 않았고 높은 계급을 더해 주었으나 쓰지 말라고 유언을 하였다. 두문동(杜門洞) 72賢 中의 한 분 으로 史蹟이 부조현록(不朝現錄)과 여지승람(與地勝覽)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南谷記에 실려있다.
※ 墓所 : 京畿 龍仁郡 內四面 古林里(梧里洞) 山38번지 辛坐이다. 封墳은 둘례석이고 비문, 상석, 문관석, 장명등 망주석이 있다. 純祖 乙酉年(순조25, 1825)에 묘비를 세웠는데 龍湖 宋來熙가 비문을 지었다. 英祖 丙戌年(영조42, 1766)에 祀堂을 光州 대치(大峙)에 세웠는데 純祖 戊辰年(순조8, 1808)에 훼철령으로 철거되고 哲宗 庚申年(철종11, 1860)에 그 자리에 유허비(遺虛碑)를 세웠다.
哲宗 壬戌年(철종13, 1862)에 永川의 쌍계동(雙溪洞) 구인사(求仁祠)에 先生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향사(享祀)하고 있다. 남곡재실(南谷齋室)은 丁酉年(1897)에 중건(重建)하고 記文은 金榥이 지었다.
庚子年 10月에 묘비(墓碑)를 다시 세웠는데 오천(烏川) 정화식(鄭華植)이 비문을 지었다.
※ 묘제(墓祭) (음)10月15日
※ 配 는 貞敬夫人 延安李氏로서 아버지 벼슬은 別將이고 휘는 壽昌이며 祖의 벼슬은 侍郞이고 휘는 仁桂이며 曾祖의 벼슬은 감찰시승(監察侍丞)이고 휘는 병이다. 墓所는 건위합봉(乾位合封)
※ 南谷公派
※ 南谷公은 아들이 5兄弟이나 7派로 分派되어 있다.
※ 2001.4.5 경북 군위군 우보면 美城里에 후손 泰英은 南谷書院 孝忠祠를 건립하고 子 5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심.
[사관과 대각으로 만석궁을 당기지 말라고 너희에게 경계한다.
(史官臺閣連家 世戒爾休 彎萬石弓)]
【참고문헌】부조현록(不朝峴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여조충렬록(麗朝忠 烈錄)용인읍지, 광주읍지, 남곡기(南谷記) |
南谷公遺事;世系,
遺詩 1수(誡子孫詩),
南谷記(李穡記),
柳希春日記,
諸賢詩7수(李穡, 成石璘등),
散見文蹟 5편(龍仁縣輿地勝覽, 海東忠義錄, 杜門洞實記日錄, 御製(英廟朝)杜門洞致祭文, 東史),大峙祠丁享祝文,
墓表(宋來熙述).
孝友堂遺事;遺詩 1수(豊川縣樓舍詩),
遺歌 1수(兄弟巖歌),
孝友亭記(徐居正記),
雙溪堂訓誡序(徐居正序),
諸賢詩 6수(徐居正, 金安國, 卞季良등),
請五忠存祀兩賢旌褒疏(金鍾眞등),
旌門草啓,
禮曹關文,
孝友堂孤隱兩公實蹟跋,
祠院文字,
墓表(宋來熙述),
榜目.
兄弟岩歌
李氏兩賢實紀(奎11627),
李敬秀(朝鮮)編. 1冊(36張) 木版本 32.1×20.7cm. 四周單邊 半郭:21.3×15.1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跋:奇正鎭. 麗末鮮初의 文臣 李釋之의와 그의 손자 李宗儉의 遺詩歌 약간과 遺事를 모아놓은 것으로 宗儉의 15대손이 수집하고 16대손 敬秀가 1854년(哲宗5) 大峙祠에서 간행했다. 卷首에 目錄과 卷末에 奇正鎭의 跋文(1853년)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李釋之의 號는 南谷, 본관은 永川, 贈版圖判書 洽의 아들. 李穀의 문인. 1341년(忠惠王復位 2)李穡과 함께 進士試에 합격했다. 慶尙道按廉使, 寶文閣大提學, 版圖判書등을 지내고 고려가 쇠운하자 벼슬을 버리고 龍仁의 南谷에 은거했으며 새로 들어선 朝鮮조정으로부터 여러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節義를 지켜 杜門洞忠賢이 라고 일컬어 졌다. 1786년(正祖 10) 손자 宗儉과 함께 光州의 大峙祠에 祭享. 李宗儉의 號는 雙溪·孝友. 1429년(世宗 11) 文科에 급제, 翰林院副提學, 大司諫등을 지냈으며 端宗이 世祖에게 讓位하자 동생 宗謙과 함께 南谷으로 退居하여 자연을 즐기면서 평생을 마쳤다. 孝友의 행실이 알려져 孝友라는 號를 下賜받았다. 1786년 大峙祠에 祭享, 1804년(純祖 4) 安城에 旌間門이 세워졌다.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석지(李釋之)
#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
*대치서원(大峙書院)
영조병술건(英祖丙戌建).
祭享. 이석지(호남곡 고려 대제학 본영천). 이안직(직제학 본영천). 이종검(호쌍계 안직자 직제학 본영천),
제향. 李釋之(號南谷 高麗 大提學 本永川). 李安直(直提學 本永川). 李宗儉(號雙溪 安直子 直提學 本永川),
2. 月汀先生集卷之六 碑銘
■월정선생집권지육 비명
慶州府尹李公墓碣銘
경주부윤이공묘갈명
府尹李公旣卒之明年。長君判書居守松都。將行謂余曰。亡弟葬矣。而墓道未克
부윤이공기졸지명년。장군판서거수송도。장행위여왈。망제장의。이묘도미극
表石具矣。願籍子之一言以重。旣而公之家。又申判書之命。余雖於公後生乎。
표석구의。원적자지일언이중。기이공지가。우신판서지명。여수어공후생호。
獲習伯仲間也久。義有不得終辭者。按狀公諱選。字季膺。其先永川著姓。有
획습백중간야구。의유부득종사자。안상공휘선。자계응。기선영천저성。유
諱釋之。見麗?將訖。以寶文閣提學。棄官退隱于龍仁縣之南谷。遂號之南谷先
휘석지。견려?장흘。이보문각제학。기관퇴은우룡인현지남곡。수호지남곡선
生。牧隱李文靖有詩若序艶稱之。卽公七世祖也。三傳而爲右司諫大夫宗儉。
생。목은이문정유시약서염칭지。즉공칠세조야。삼전이위우사간대부종검。
寔公高祖。曾祖藍浦縣監仲浩。贈承政院左承旨。祖考繕工奉事龜孫。贈戶曹
식공고조。증조람포현감중호。증승정원좌승지。조고선공봉사구손。증호조
參判。顯考順曾。以儀曹郞出守益山郡。後贈吏曹判書。?贈貞夫人善山金氏。
참판。현고순증。이의조랑출수익산군。후증이조판서。?증정부인선산김씨。
孝長之女。以嘉靖壬午歲十一月癸丑生公。公少礪博士業。中己酉生員。遂擢乙
효장지녀。이가정임오세십일월계축생공。공소려박사업。중기유생원。수탁을
卯文科。被揀承文院。薦補藝文檢閱。以銀臺注書。轉春坊說書。陞遷春夏二官
묘문과。피간승문원。천보예문검열。이은대주서。전춘방설서。승천춘하이관
佐郞。自是名位日起。四入諫垣爲正言獻納。一秉風憲爲持平。其初陞獻納則特
좌랑。자시명위일기。사입간원위정언헌납。일병풍헌위지평。기초승헌납칙특
命也。於春坊又除司書文學。選入玉堂。三拜修撰。一拜校理。自校理引疾乞外
명야。어춘방우제사서문학。선입옥당。삼배수찬。일배교리。자교리인질걸외
。得博川郡。是後知府者再。昌原, 順天。出牧者再。晉州尙州。其爲尙州也。
。득박천군。시후지부자재。창원, 순천。출목자재。진주상주。기위상주야。
以高第褒加通政階。移牧公州。又尹慶州府。入爲掌?院判決事。訟師得所平亭
이고제포가통정계。이목공주。우윤경주부。입위장?원판결사。송사득소평정
。前後凡五拜是職。遞授僉知中樞。又牧忠州。歷度支參議。以五衛將。萬曆丙
。전후범오배시직。체수첨지중추。우목충주。역도지참의。이오위장。만력병
戌十一月丁巳病?卒。得年六十有五。事聞。賜賻又遣禮官賜祭。卜以丁亥二月
술십일월정사병?졸。득년육십유오。사문。사부우견례관사제。복이정해이월
庚申。葬于楊州神穴里坤坐之原。從先兆也。公不逮事二親。奉先備至。與判書
경신。장우양주신혈리곤좌지원。종선조야。공부체사이친。봉선비지。여판서
公友愛尤篤。被服食飮同之者五十年如一日。毋論里?所起敬。卽薦紳大夫。稔
공우애우독。피복식음동지자오십년여일일。무론리?소기경。즉천신대부。임
聞而樂道之者。此其實行云。?歷多會府。?席其民而植培之。婁以治辦稱。或至
문이악도지자。차기실행운。?역다회부。?석기민이식배지。누이치판칭。혹지
樹碑以揭遺愛云。內子貞夫人李氏。系出完山部將李萱之女。有女操而不育。萬
수비이게유애운。내자정부인이씨。계출완산부장이훤지녀。유녀조이부육。만
曆己卯。先公逝。?酉坐之原。與公兆相望。側室有丈夫子二人。貴榮, 再榮。
역기묘。선공서。?유좌지원。여공조상망。측실유장부자이인。귀영, 재영。
女子三人。長適禹誡臣次適宗室德純令鏡忠。其次在室。判書諱?。方以治行嗣
여자삼인。장적우계신차적종실덕순령경충。기차재실。판서휘?。방이치행사
響。次公少卿云。銘曰。昔在南谷。勇退全名。高風激世。始顯終貞。遙遙華胄
향。차공소경운。명왈。석재남곡。용퇴전명。고풍격세。시현종정。요요화주
。僅傳一經。益山承之。官?德?。公趾其美。?弟竝榮。連枝雙璧。金馬蜚英。
。근전일경。익산승지。관?덕?。공지기미。?제병영。연지쌍벽。김마비영。
靑雲少却。墨綬流聲。?書增秩。嘉乃治平。故都大尹。班視亞卿。預議民部。
청운소각。묵수류성。?서증질。가내치평。고도대윤。반시아경。예의민부。
宦以時成。荊花告?。忽焉九京。屬辭最迹。無或改評。永言勸悌。來者所程。
환이시성。형화고?。홀언구경。속사최적。무혹개평。영언권제。내자소정。
惟楊故里。玄宅是營。樂石?然。勿?勿傾。
유양고리。현댁시영。악석?연。물?물경。
■윤근수 [尹根壽 1537년(중종 32)∼1616년(광해군 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본관은 해평(海平).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고, 그 뒤 승정원주서·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1562년 부수찬으로서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63년 행신(幸臣) 이량(李樑)이 자신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尹斗壽)가 박소립(朴素立) 등과 반대한 사건의 영향을 받아 파직되었다.
3. 牧隱詩稿卷之四 詩 (牧隱藁)
■목은시고권지사 시 (목은고)
寄密城李正言 釋之
기밀성이정언 석지
我愛李髥襟宇曠。見謫今爲密城長。政當?策謀救荒。豈肯吟詩圖避謗。橋下白
아애이염금우광。견적금위밀성장。정당?책모구황。개긍음시도피방。교하백
魚白似銀。纖綸鉤上登錦茵。一樽對客多閑雅。更待秋風玉粒新。
어백사은。섬륜구상등금인。일준대객다한아。갱대추풍옥립신。
4. 圓齋先生文稿卷之上 詩 (圓齋?)
■원재선생문고권지상 시 (원재?)
寄密城李使君 釋之
기밀성이사군 석지
極目望南州。西風意轉悠。相違?數月。不見抵三秋。葉脫山新瘦。沙寒水急流
극목망남주。서풍의전유。상위?수월。부견저삼추。엽탈산신수。사한수급류
。故人何處笛。長嘯坐江樓。
。고인하처적。장소좌강루。
■정공권【鄭公權:1333년(충숙왕 복위 2)∼1382년(우왕 8)】
고려 말기 문신.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 본관은 청주(淸州).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에 좌간의대부·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고, 그 뒤 정당문학을 제수받고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다. 학자로서의 재질과 인품을 갖추었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저서로《원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 ■騎牛先生文集卷之二 附錄
■기우선생문집권지이 부록
杜門洞七十二賢錄麗未。忠臣立節死義者多。其餘則杜門屛迹於當世。或不仕自
두문동칠십이현록려미。충신립절사의자다。기여칙두문병적어당세。혹불사자
靖者。通稱杜門洞七十二人。同其義理。而不但屛居於松京之謂也。
정자。통칭두문동칠십이인。동기의리。이불단병거어송경지위야。
李繹之。號南谷。永川人。官寶文提學。見國將亡。棄官歸居龍仁南谷。
이석지。호남곡。영천인。관보문제학。견국장망。기관귀거용인남곡。
■기우집 (騎牛集)
고려 말기 유학자 이행(李行)의 시문집. 후손 지운(之運)이 편집하고,
1872년(고종 9) 후손 동우(東佑)가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허전(許傳)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 강난형(姜蘭馨)의 발문이 있다. 시(詩)·소(疏)·묘지(墓誌)·부록 등을 실었다. 3권 1책. 인본. 규장각도서,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이행【李行:1352년(공민왕 1)∼1432년(세종 4)】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 본관은 여주(驪州).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한림수찬(翰林修撰)이 되었다.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사전(私田)의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 뒤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하였으며,
1393년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성계(李成桂)를 무서(誣書)했다 하여 가산을 빼앗기고 울진(蔚珍)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저서로《기우자집》이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
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 京畿 [5] 용인현(龍仁縣)
이색(李穡)이 지은 >〈남곡기(南谷記)〉에, "용구 동쪽에 남곡이 있는데, 나와 같은 과방(科榜)에 오른 이 선생이 산다.
어떤 사람이, '선생은 숨어 사는 것인가.' 하고 묻기에, 나는 '숨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벼슬 하는 것인가.' '벼슬 하는 것도 아니다.' 하니, 그 사람은 매우 의혹하여서 또, '벼슬하는 것도 아니고, 숨은 것도 아니라면 무슨 생활인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숨어 사는 자는 그 몸만 숨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름도 숨긴다. 홀로 이름만 숨길 뿐 아니라, 또 반드시 그 마음마저 숨긴다.'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여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벼슬하는 자는 이 반대여서, 몸은 반드시 조정에 서서 헌상(軒裳 고관이 타는 수레와 관복)과 규조(圭組 고관이 가지는 홀)로 빛나게 하며, 이름이 반드시 해내(海內)에 소문나고, 문장과 도덕으로써 충실하게 한다. 그런 즉, 그리하여 그 마음에 존양(存養)한 것이 정사에 나타나서, 백성의 노래와 시에 나타나고, 사방에 빛날 것이니, 마음을 숨길 수 있으랴.
나는 이것으로써 남곡은 숨을 땅이 아님을 안다.
지금 선생이 남곡에 살면서 밭도 있고 집고 있어, 관혼상제에 쓰임이 족하니, 세상의 이로움에 무심한 지가 오래이다. 그러나 숨었다는 것으로써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마다 서울에 와서 옛 친구를 방문하고 한껏 마시면서 담소한다. 왕래하는 도중에는 파리한 아이 종과 여윈 말로써 채찍을 세워 잡고 시를 읊조리는데, 흰 수염은 눈 같으며, 붉은 뺨에는 광채가 넘친다. 그림 잘 그리는 자를 시켜 그의 신색을 그리면, 반드시 삼봉 연엽도(三峯蓮葉圖)에 양보하지 않으리라.
남곡은 산에 나무할 만하고, 물에 고기 낚을 만하여, 세상에 요구할 것 없이 자족하다.
산이 명랑하고 물이 푸르러, 지경이 그윽하고 사람이 고요하여, 눈을 들면 심경이 유연하여 진다. 비록 정신으로 팔극(八極)의 끝에 가 논다 하는 것도, 이보다 지나지 않을 것이니, 선생이 여기에서 스스로 즐김이 마땅하다.
내 쇠하고 병든 지 오래이나, 매양 시골에 돌아가고자 하여도 실행하지 못한다.
밭이 있으나 바다에 가깝고, 집이 있으나 밭이 너무 토박하므로, 두 가지가 완전한 것을 얻어서 나의 몸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망이나, 어찌 쉽게 될 수 있으랴.
선생이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에 나는 간의 대부(諫議大夫) 자리를 더럽혀서 함께 정사를 말하다가 재상에게 미움 받았다. 그리하여 제공(諸公)은 모두 외직으로 옮겨졌으나, 나는 홀로 특별한 발탁을 입었고, 지금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선생이 여러 번 조정에 왔으나, 지위는 겨우 3품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러나 끼친 사랑은 백성의 마음에 남았고, 빛난 명성은 물망에 합당하여서, 이씨에게 구하여도 아름다움을 짝할 자가 드물다.
이것은 반드시 추우(騶虞 상서로운 짐승)가 남곡에 든 것이리라.
다른 날에 큰 계책을 세우고 큰 논의를 결단하여 위로 임금의 다스리는 교화를 돕는 것이 제갈공(諸葛公)이 남양(南陽)에서 일어남과 같이 할 것을 기필할 수 있을까. 아니면 기필할 수 없을까. 모두 하늘에 달렸다.
선생의 이름은 석지(釋之)이고, 선군 가정공(先君稼亭公)의 문생 급제이다. 일찍이 나와 함께 신사년(1341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했다.
○우거고려 이석지(李釋之) : 위에 있는 남곡 편에 보라. 본조 이종검(李宗儉)·이종겸(李宗謙) : 모두 석지의 손자이다. 두 사람이 일찍부터 벼슬에서 물러나, 남곡에 살면서 효우당(孝友堂)을 짓고, 산수 풍경을 즐기었다.
고려 후기 이색이 용인의 남곡으로 떠나는 이석지를 송별하며 지은 한시.
남곡선생노익장 (南谷先生老益壯: 남곡선생은 나이 들어도 건장하여)
백발홍안조인광 (白髮紅顔照人光: 흰머리털 붉은 뺨에 광채를 띠었고)
난유무석명우중 (爛游舞席名尤重: 난만히 노는 좌석에선 더욱 뛰어나)
독립사림취자장 (獨立詞林趣自長: 문단에서도 우뚝하여 자취 절로 빼어났네)
당일우붕삼가수 (當日友朋森可數: 떠나는 당일에는 친구들 얼마 남지 않았고)
만년아녀홀성행 (晩年兒女忽成行: 늙마에 자녀들만 줄을 지어 있는데)
무유도사평생포 (無由倒瀉平生抱: 아무런 까닭없이 평생 회포 쏟아놓건만)
행시전가주이향 (幸是田家酒已香: 다행히도 시골집엔 술 익어 냄새 가득하네)
7. 牧隱詩稿卷之三十一 詩 (牧隱藁)
■목은시고권지삼십일 시 (목은고)
三月十二日。六友金敬之,陶隱李子安。邀與韓淸城賞花于鄭陶隱山亭。圃隱以
삼월십이일。육우김경지,도은이자안。요여한청성상화우정도은산정。포은이
使事出。於是至奉先寺松岡。旣而圃隱回。權判事鑄,閔判事霽,李判事浩然,
사사출。어시지봉선사송강。기이포은회。권판사주,민판사제,이판사호연,
李判事士潁又至。此皆與敬之有約者也。僕馳豚犬種學。邀同年鄭圓齋。而同年
이판사사영우지。차개여경지유약자야。복치돈견종학。요동년정원재。이동년
朴判書晉祿,李判事釋之,契友崔判書元儒,李右尹舒原。皆以敬之之招而集
박판서진녹,이판사석지,계우최판서원유,이우윤서원。개이경지지초이집
。松下風多?以避。聯句飛?日將夕。李判事設?食。醉飽乘月而歸。天下分離?二
。송하풍다?이피。연구비?일장석。이판사설?식。취포승월이귀。천하분리?이
毛。小康胡不共逍遙。良辰每與諸公會。老物先承六友招。松樹來風如特立。林
모。소강호불공소요。양진매여제공회。노물선승육우초。송수래풍여특립。임
花映日未全飄。後生可畏吾將去。只把新詩美聖朝。
화영일미전표。후생가외오장거。지파신시미성조。
8. 牧隱詩稿卷之三十 詩 (牧隱藁)
■목은시고권지삼십 시 (목은고)
同年李判書釋之。將歸龍駒別墅。來告別。且徵贈言。走筆塞責。
동년이판서석지。장귀용구별서。내고별。차징증언。주필새책。
南谷先生老益?。白鬚紅頰照人光。爛游舞席名尤重。孤立詞林趣自長。當日友
남곡선생노익?。백수홍협조인광。난유무석명우중。고립사림취자장。당일우
朋森可數。?年兒女忽成行。無由倒瀉平生抱。幸是田家酒已香。
붕삼가수。?연아여홀성행。무유도사평생포。행시전가주이향。
9. 牧隱詩稿卷之十七 詩 (牧隱藁)
■목은시고권지십칠 시 (목은고)
賀李南谷拜判事知部釋之
하이남곡배판사지부석지
白鬚紅頰照儒林。風采眞如玉樹臨。遇興題詩無俗氣。分憂到處慰民心。東門風
백수홍협조유림。풍채진여옥수림。우흥제시무속기。분우도처위민심。동문풍
雨衣巾濕。南谷琴書歲月深。一起莫嫌知?部。須敎善斷更光今。
우의건습。남곡금서세월심。일기막혐지?부。수교선단갱광금。
10. 牧隱詩稿卷之二十二 詩 (牧隱藁)
■목은시고권지이십이 시 (목은고)
遊名山。送老景。古之達士猶難之。況吾 小人乎。綿蠻黃鳥止于丘隅。夫子
유명산。송노경。고지달사유난지。황오제소인호。면만황조지우구우。부자
釋之曰。可以人而不如鳥乎。吾今也欲遊金剛山。俯瞰東海而不之果。不如鳥
석지왈。가이인이불여조호。오금야욕유금강산。부감동해이불지과。불여조
也甚矣。功成名遂。而身則不退。果得止其止乎。予之游山。非獨訪古迹開塵襟
야심의。공성명수。이신칙불퇴。과득지기지호。여지유산。비독방고적개진금
。亦將以止吾止耳。東坡詩曰。願言畢婚嫁。携手游名山。此老猶待婚嫁之畢。
。역장이지오지이。동파시왈。원언필혼가。휴수유명산。차노유대혼가지필。
非決然欲去者也。予志決矣。而低回如此。自悲之甚。嘯之爲歌。亦將自止於今
비결연욕거자야。여지결의。이저회여차。자비지심。소지위가。역장자지어금
所止耳。同志幸恕之。士生於世當少時。焦頭爛額猶不辭。女爲悅已適爲容。色
소지이。동지행서지。사생어세당소시。초두난액유불사。여위열이적위용。색
之衰兮愛亦衰。理勢自然無復怪。苦樂相倚非難知。四時之序迭相代。成功者去
지쇠혜애역쇠。이세자연무복괴。고악상의비난지。사시지서질상대。성공자거
夫何疑。去將何去非楚秦。在我境兮無風塵。名山勝地可屈指。超跨空?神仙爲
부하의。거장하거비초진。재아경혜무풍진。명산승지가굴지。초과공?신선위
隣。崖崩澗絶煙霞是深處。凌虛往往逢異人。就之肯交語。追之便輕擧。我今自
인。애붕간절연하시심처。능허왕왕봉이인。취지긍교어。추지편경거。아금자
度危得仙。所以靑壁將寅緣。如其顧我?不歡。我又何恨兮游人間。人間何處可
도위득선。소이청벽장인연。여기고아?부환。아우하한혜유인간。인간하처가
避地。詩書之 寬仍閑。欲心不動境自寂。單瓢陋巷當希?。
피지。시서지유관잉한。욕심불동경자적。단표루항당희?。
11.동문선 제1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제 南谷선생 시권(題南谷先生詩卷)
나라 위한 높은 뜻이 북두 남쪽에 비치건만(주D-001) / 許國孤標映斗南
돌아와 골짜기에 세 길을 열었구나 / 歸來谷口逕開三
만년의 신세는 날기에 지친 새처럼 / 晩年身世鳥飛倦
젊은 시절 공명은 개미 싸움(주D-002)이 부산했네 / 少日功名蟻戰
봄바람에 거닐면서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 步?春風觀物化
달 밝은 밤 풀 깔고 농사얘기 주고 받네 / 班荊月夕聽農談
강호에서나 조정에서나 마음이야 다르리만 / 江湖廊廟心何異
내 집을 사랑하여(주D-003) 조는 맛이 달겠네 / 爲愛吾廬睡味甘
[주 D-001] 북두 남쪽에 비치건만 : 북두성(北斗星)은 하늘의 북쪽에 있으므로 북두의 남쪽이란 천하를 말하는 것이다.
[주 D-002] 개미 싸움 :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과거(科擧)의 시관이 되었을 때에 시를 짓기를,“1만 개미 다툴 때에 봄날이 따뜻하다[萬蟻爭時春日暖].”하였다. 여러 선비가 과거보는 것을 개미의 싸움에 비유한 것이다.
[주 D-003] 내 집을 사랑하여 : 도연명(陶淵明)의〈독산해경(讀山海經)〉에 “뭇 새는 의탁할 곳 있음을 기뻐하거니, 나도 또 내 집을 사랑하노라.”
12. 四佳文集卷之一 記 孝友亭記
■사가문집권지일 기 효우정기
吾聞龍駒之東。有南谷。高麗季。有李先生諱釋之 者。休官歸隱。種德遺後。
오문룡구지동。유남곡。고려계。유이선생휘석지 자。휴관귀은。종덕유후。
有二孫。長曰宗儉。僉知中樞。季曰宗謙。軍資判事。兩先生皆年未衰耗。謝簪
유이손。장왈종검。첨지중추。계왈종겸。군자판사。양선생개년미쇠모。사잠
笏。偕徠家焉。僉樞扁其軒曰雙溪。判事亦號以?谷。伯仲氏分居谷之東西。一
홀。해래가언。첨추편기헌왈쌍계。판사역호이?곡。백중씨분거곡지동서。일
丘一壑。淡如也。吾同年金孟子進。亦居南谷。嘗語居正曰。南谷別墅。李氏靑氈。有山窈然。有水冷然。有宅一區。有田百頃。桑麻?稻之多獲也。魚鼈茹蔬之足用也。至如泉石花鳥。風雨雪月。凡可以娛心悅目者。不可一二言也。伯仲氏自適其適。無慕乎外。嘗於雙溪之傍。?亭曰孝友。伯仲氏山冠野服。白鬚紅頰。日杖?於其中。吟?談笑。其樂??然。時率親戚子弟。講讀詩禮。吾伊燈火。其樂油油然。至如歲時伏臘。會鄕黨父老。壺樽棋博。扶携酩酊。其樂亦無窮矣。兩先生風流高致。一鄕慕之。求之於古。當不減漢之兩疏矣。子進之爲人。識見高明。一言可信。居正聞子進之言。尤慕兩先生之高風焉。間者。雙溪已逝。
?谷獨存。雙溪之子仲浩氏。壽?谷于斯亭。鄕黨宗族皆會。?谷有詩。諸君多和之者。駕浴許子述氏。略序其事。今仲浩氏使人求予文。予曰。天之生人。皆具五德。而仁爲首。仁之道。孝友爲首。是孝友者。百行之源。萬善之端也。是以成周以德行取人。而孝友居先。先儒釋孝友之意曰。善事父母爲孝。善於兄弟爲友。雙溪之取孝友名亭。夫豈徒哉。李氏世居南谷。伯仲氏承先人之詩禮。念先人之田廬。急流勇退。同賦歸徠。見花樹曰。某花某樹。吾先人之種藝也。見山水曰。某山某水。吾先人之登眺也。見宗族曰。某兄某弟。吾先人之支派也。見鄕黨則曰。某老某丈。吾先人之耆舊也。一言一行。皆念及先人。其孝也至矣。伯仲氏金昆玉友。塤唱?和。雖軾,轍。機,雲。亦莫過之。其友也至矣。今雙溪雖逝。而仲浩氏能盡誠敬於先壟。又盡猶子之孝於?谷。退與諸從兄弟。怡怡愉愉。囊觴?樂。歌常?而詠??。李氏之孝友。其有旣乎。將善繼善述。移孝爲忠者。胥於南谷焉出矣。嗚呼。成王命君陳。而首稱孝友之美。吉甫讚張仲。而先歌孝友之德。蓋孝友者。非功名爵祿之比。皆人之實德實行。何可以虛譽爲哉。居正旣信子進之言。兼採駕洛之序。作孝友亭記。戊戌。
13.月汀先生集卷之六 碑銘 慶州府尹李公墓碣銘
■월정선생집권지육 비명 경주부윤이공묘갈명
府尹李公旣卒之明年。長君判書居守松都。將行謂余曰。亡弟葬矣。而墓道未克
부윤이공기졸지명년。장군판서거수송도。장행위여왈。망제장의。이묘도미극
表石具矣。願籍子之一言以重。旣而公之家。又申判書之命。余雖於公後生乎。
표석구의。원적자지일언이중。기이공지가。우신판서지명。여수어공후생호。
獲習伯仲間也久。義有不得終辭者。按狀公諱選。字季膺。其先永川著姓。有諱
획습백중간야구。의유부득종사자。안상공휘선。자계응。기선영천저성。유휘
釋之。見麗?將訖。以寶文閣提學。棄官退隱于龍仁縣之南谷。遂號之南谷先生
석지。견려?장흘。이보문각제학。기관퇴은우룡인현지남곡。수호지남곡선생
。牧隱李文靖有詩若序艶稱之。卽公七世祖也。三傳而爲右司諫大夫宗儉。寔公
。목은이문정유시약서염칭지。즉공칠세조야。삼전이위우사간대부종검。식공
高祖。曾祖藍浦縣監仲浩。贈承政院左承旨。祖考繕工奉事龜孫。贈戶曹參判。顯考順曾。以儀曹郞出守益山郡。後贈吏曹判書。?贈貞夫人善山金氏。孝長之女。以嘉靖壬午歲十一月癸丑生公。公少礪博士業。中己酉生員。遂擢乙卯文科。被揀承文院。薦補藝文檢閱。以銀臺注書。轉春坊說書。陞遷春夏二官佐郞。自是名位日起。四入諫垣爲正言獻納。一秉風憲爲持平。其初陞獻納則特命也。於春坊又除司書文學。選入玉堂。三拜修撰。一拜校理。自校理引疾乞外。得博川郡。是後知府者再。昌原, 順天。出牧者再。晉州尙州。其爲尙州也。以高第褒加通政階。移牧公州。又尹慶州府。入爲掌?院判決事。訟師得所平亭。前後凡五拜是職。遞授僉知中樞。又牧忠州。歷度支參議。以五衛將。萬曆丙戌十一月丁巳病?卒。得年六十有五。事聞。賜賻又遣禮官賜祭。卜以丁亥二月庚申。葬于楊州神穴里坤坐之原。從先兆也。公不逮事二親。奉先備至。與判書公友愛尤篤。被服食飮同之者五十年如一日。毋論里?所起敬。卽薦紳大夫。稔聞而樂道之者。此其實行云。?歷多會府。?席其民而植培之。婁以治辦稱。或至樹碑以揭遺愛云。內子貞夫人李氏。系出完山部將李萱之女。有女操而不育。萬曆己卯。先公逝。?酉坐之原。與公兆相望。側室有丈夫子二人。貴榮, 再榮。女子三人。長適禹誡臣次適宗室德純令鏡忠。其次在室。判書諱?。方以治行嗣響。次公少卿云。銘曰。昔在南谷。勇退全名。高風激世。始顯終貞。遙遙華胄。僅傳一經。益山承之。官?德?。公趾其美。?弟竝榮。連枝雙璧。金馬蜚英。靑雲少却。墨綬流聲。?書增秩。嘉乃治平。故都大尹。班視亞卿。預議民部。宦以時成。荊花告?。忽焉九京。屬辭最迹。無或改評。永言勸悌。來者所程。惟楊故里。玄宅是營。樂石?然。勿?勿傾。
14. 貞齋先生逸稿卷之三 ?遺 海東忠義錄
■정재선생일고권지삼 ?유 해동충의록
麗朝忠臣不死自靖之人。鄭夢周,吉再,李穡,金澍,趙胤,韓喆仲,羅天瑞,
여조충신부사자정지인。정몽주,길재,이색,김주,조윤,한철중,나천서,
金若時,鄭溫,金自粹,徐甄,崔文漢,許徵,趙?,李思敬,成溥,趙承肅,
김약시,정온,김자수,서견,최문한,허징,조?,이사경,성부,조승숙,
李明誠,閔安富,金明理,鄭地,李瀁中,金震陽,安省,金若恒,河自宗,
이명성,민안부,김명리,정지,이양중,김진양,안성,김약항,하자종,
裵尙志,李釋之,崔瀁,?信忠,車原?,金士廉,李行,邊肅,孟希道,
배상지,이석지,최양,?신충,차원?,김사염,이행,변숙,맹희도,
申德隣,申包翅,金沖漢,金光致,李涓,李種學,李陽昭,朴宜中,閔愉,
신덕린,신포시,김충한,김광치,이연,이종학,이양소,박의중,민유,
元天錫,文益漸,林先味,曹義生,孟姓人,朴門壽,林貴緣,蔡貴河,成汝完
원천석,문익점,임선미,조의생,맹성인,박문수,임귀연,채귀하,성여완
,崔淸,郭樞,趙鐵山,尹忠輔,柳珣,蔡王澤,宋皎,南乙珍,趙瑜,李集,
,최청,곽추,조철산,윤충보,유순,채왕택,송교,남을진,조유,이집,
姜撲。楊根有洗耳亭歸農浦。廣州有望主峴。若盧侍中,白尙書,趙舍人,漁隱
강박。양근유세이정귀농포。광주유망주현。약로시중,백상서,조사인,어은
,歸隱之流。未得傳名。良可悲夫。 府使金椿撰
,귀은지류。미득전명。양가비부。 부사김춘찬
15.訥齋先生集卷第六 排律 五言
■눌재선생집권제륙 배율 오언
○弟六峯編
○제육봉편
朴司藝以寬。承調赴闕。昌世在潭州。病風不出。書十韻。附李生枝榮。時學中
박사예이관。승조부궐。창세재담주。병풍부출。서십운。부이생지영。시학중
。公碩同知。釋之司成。再命趨東學。菁我挽有肩。緇?公碩在。漢道釋之傳。
。공석동지。석지사성。재명추동학。청아만유견。치?공석재。한도석지전。
首善源林?。臨雍實最賢。風流徵晉日。禮樂爽周天。識者寒心處。吾儒用力專
수선원림?。임옹실최현。풍류징진일。예악상주천。식자한심처。오유용력전
。兩岐留美頌。行李贈靑錢。萱閣晨昏曠。?原夢寐懸。屢廻遲去?。催召授征鞭
。양기류미송。행이증청전。훤각신혼광。?원몽매현。누회지거?。최소수정편
。十月山城雨。三秋病客氈。携壺孤遠席。面目付詩篇。
。십월산성우。삼추병객전。휴호고원석。면목부시편。
16.?仰集卷之三 詩
■?앙집권지삼 시
黃耳 公家有狗。爲人所窘。將死。公再見竝釋之。狗隨公暫不離。 有狗今能
황이 공가유구。위인소군。장사。공재견병석지。구수공잠불리。 유구금능
感至仁。無情衛鶴?乘軒。物微取服猶如此。?在吾人爲解?。
감지인。무정위학?승헌。물미취복유여차。?재오인위해?。
남곡재,묘소,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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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공 묘소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고림리 38번지 (오리동 축좌)
*남곡공 이석지(釋자 之자)는 고려충신 두문동 72현의 한 분이며 보문각 대제학
판도판서를 지내시고 시호는 충정(忠貞)공이며 남곡공파의 파조이시다.
남곡공 묘향:매년 음력 10월 15일
남곡재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내서면 주북리 93.(수내)
건치연혁: 1975년(정유년)에 남곡공 묘향을 받드는 재실로 건립되었다.
군위군 우보면 미성리(제학공파 경진제약회장 이태영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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