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 : 9 - 13절
“비교할 수 없는 표적과 능력”
지난주에 살짝 말씀을 드렸지만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에 임한 큰 핍박을 피해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간 곳은 사마리아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을 정도로 영적으로 타락했던 곳이 사마리아 성인데 그 성에 가서 말씀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큰 표적이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7절을 보면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이런 일들을 보면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에 가서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한 사람을 제가 빌립 집사라고 확정을 해서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빌립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빌립일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아닌 집사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다음 주에 우리가 보게 될 말씀에 보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내려와서 사실을 확인을 하고 또 성령의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빌립이 사도였다면 사도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굳이 내려와서 확인을 하고 점검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 말씀 속에 등장을 하고 있는 빌립은 집사였을 가능성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서 큰 표적과 함께 복음을 증거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사마리아 성에서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를 보면 오늘 말씀 속에 등장을 하고 있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과 전혀 무관하지를 않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왔던 시몬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이런 호평을 들으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마술사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마술을 통해 어느 정도의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시몬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빙자해서 마술의 능력을 보여주니까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그 말에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귀를 기우리고 다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한다고 하면 목사도 필수적으로 마술을 배워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술사 이은결씨의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술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꾸어주고, 소망과 바람을 이루어 주는 그야말로 꿈같은 세계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마술은 무대 위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는 종합 예술이라면서 마술을 한 번 공연하려면 의상에서부터 음악, 조명, 특수효과, 시나리오, 안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기획하고 연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연구하고 창조해야 한다는 점에서 창작 예술이기도 하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술사 세계에는 '같은 자리에서는 같은 마술을 두 번 이상 보여주지 마라'는 불문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만 가지 마술을 구사하는 마술사도 늘 새로운 비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뛰어난 마술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받는 마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놀 때 놀고 잘 때 자면 안 된다는 각오로 연습을 했고 특별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깨어 있는 하루를 모두 연습시간으로 할애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한 밤중에도 매일매일 마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특히 손에 익지 않아 잘 되지 않는 마술은 굳은살이 생길 만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고 합니다. 수백 번의 연습을 거쳐 만들어진 노력의 산물이 마술인 것이고 마술을 매우 과학적인 공연이라고 말을 하면서 1초만 놓쳐도 실수로 연결되고 8분 동안의 레퍼토리를 준비하는 데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한 가지 마술을 위해 7년 이상을 준비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눈은 손보다 빠릅니다. 타짜들이 손이 눈보다 빠르다고 말을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눈이 손보다 빠릅니다. 그런 과학적 사실을 이기려면 마술사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 하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마술을 신비롭게 생각을 하고 보면서 놀라는 것이지 마술이 속임수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후광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들어내면 다른 것도 잘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좀 더 높고 뛰어난 사람이 말을 하면 더 신뢰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건 때문에 경찰서에 갔다면 당연히 경찰이 하는 말에 더 신뢰를 해야 하지만 지난 주 봤던 드라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경찰관이 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보다 더 신뢰하는 것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전혀 모르는 길을 걷다가 길을 묻는데 그곳에서 오랜 동안 장사를 하고 있는 노점상 주인보다 좋은 차를 타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우리는 것도 결코 올바른 행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후광효과라는 것이 그런 오류를 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심리적인 영향 때문에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마술사 시몬에게 사로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시몬이라는 사람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와서 더 큰 표적과 능력을 보여 주면서 복음을 증거 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 집사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하면서 세례까지 받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단을 쫓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을 고치는 역사도 일어나고 예언의 능력도 나타나기도 하고 꼭 그런 능력이 아니더라도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싸매주고 회복시켜 주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단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지 능력이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런 헛된 종교에 마음을 빼앗길 리가 없습니다.
악한 영도 분명히 능력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그들만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이지 능력이 없다면 불교도, 이슬람교도, 통일교도, 신천지도 지금과 같은 엄청난 교세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몬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던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런 능력에 비해 하나님의 능력은 전지전능한 능력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능력입니까? “능치 못함이 없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 보여 주신 일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시지 못한 일, 하실 수 없었던 일을 찾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능력의 하나님과 다른 신을 비교하고 다른 우상을 비교하는 것은 그 비교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가운데서 우리가 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만드신 우주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견줄 수도 없는 그런 능력을 보여 줬다고 해서 그 말에 귀를 기우리고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과 빌립이 보여준 능력의 차이가 얼마나 컸던지 13절 말씀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13절을 보십시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시몬이라는 사람은 사마리아 성에서 오랫동안 낮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신뢰를 얻고 추앙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몬도 빌립이 며칠 동안 보여 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는 빌립이 증거 하는 말씀을 믿고 세례까지 받고 빌립 집사를 졸졸 따라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더라고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줘서 가난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데 이단들이 하는 사랑을 겁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을 못하니까 두려워하는 것이지 빌립처럼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 능력과 사랑이 빌립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더라고 그런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하고 사랑을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을 때마다 놀랄 정도의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그런 능력과 사랑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고 승천 하신 이유는 우리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의 완성을 위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사랑을 해야 그런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세례를 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는 사도들처럼 복음서에 자주 등장했던 사람도 아니고 사도행전에 와서 겨우 한 차례 등장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세상 사람들이 놀랄만한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다면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도 빌립이 아닌 빌립 집사를 통해 이런 일들이 나타나도록 허락을 하셨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음을 도전 주시기 위해서 빌립 집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보다 더 크고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권세와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놀라운 일을 행하던 시몬이 놀라서 빌립을 따라 다녔던 것처럼 우리를 따라 다니다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도 하고 그보다 큰일도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구장창 명령하고 있는 것처럼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