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1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서 공사를 시행한다.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 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선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다.
손양원목사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간,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출처--http://blog.daum.net/sunghwa/13094428
손양원 목사,두 아들 죽인 원수를 양아들 삼은 사람
5월 14일 보성에서 여천으로 가는 길에도 봄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흐드러진 아카시아나무 꽃향기가 관광버스 안까지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사이사이로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논들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모습도 정겹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있는 전남 여천시 율촌면 신풍리로 가는 길은 여수 비행장을 빙 둘러가는 길이었습니다. 흡사 펼친 새끼손가락처럼 바다 속으로 뾰족하게 깊숙이 들어간 이곳은 인적이 드문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육지지만 섬 같은 느낌의 이 지역은 그래서 나병환자들의 수용소로 지정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당시로서는 떨쳐버릴 수 없는 죽음의 병이었던 한센병이라고도 불리는 나병 환자들은 흉측한 외모와 전염을 두려워하는 사회적 풍조로 외딴 섬이나 이곳처럼 외진 곳에 격리 수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병환자였던 한하운(본명 한태영) 시인은 남쪽 수용소로 가는 나병환자의 외롭고 슬픈 심정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시를 읽으면 그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냉대를 받으며 서러운 삶을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이곳은 그런 나병환자들을 가족처럼 거침없는 사랑으로 대하며 전설 같은 삶을 살다가 간 한 진실한 목회자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입니다. 애양원을 들어갈 때면 목사를 포함하여 누구나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는 것이 통례였지만 손 목사는 항상 맨손 맨얼굴로 나병환자들을 대하고 손을 마주 잡았다고 전합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젖으며 조금 달리노라니 '애양원 예배당'이라는 예스런 이름을 가진 교회가 언덕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근래에 새로 세운 듯 초라하지 않고 반듯한 모습입니다. 교회 앞 길가에는 붉은 함박꽃 몇 송이가 함초롬히 피어있고 둥글고 하얀 민백당나무 꽃이 소담스럽습니다. 언덕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왼편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을 벗어나 다시 언덕에 올라 소나무 숲 근처에 이르니 손양원 목사 3부자의 묘가 고즈넉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근처 숲에는 아카시아와 함께 하얀 찔레꽃들이 피어나 손 목사의 사랑의 삶처럼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왼 편 바닷가로 내려가니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기념관 뒤편으로는 바로 아래로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를 막아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가난하고 검소하게 오직 사랑으로 살다 간 한 목회자의 삶이 거기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평소에 입던 옷이며 성경책과 각종 성구들, 두드려도 소리가 날 것 같지 않은 풍금과 각종 사진들이 어두운 조명 때문에 더욱 초라한 모습입니다. 산돌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1914년 3월 17일에 학습을 받고 1917년 10월 3일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1914년 4월 1일 13세의 나이로 칠원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이른바 동방 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참배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천황 사진 배례와 요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합병 직후 관공서와 각급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향하여 경례를 하게 함으로써 천황 숭배사상을 심어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그러다가 1912년 7월 30일, 자신들이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의 조선인들에 대한 천황숭배 강요는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학생들에게도 각지에 요배소(遙拜所)를 설치하고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동방요배)를 표함으로써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도 의식이 모든 공휴일마다 개최되고 학생들은 천황 사진에 절을 하도록 강요되었던 것입니다.
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민족의식과 신앙적인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이러한 궁성 요배를 거부함으로서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하여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렵게 칠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중동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이 3·1독립만세에 적극가담함으로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그도 학업을 포기하고 낙향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낙향하여 마음을 추스른 뒤 1921년 다시 중단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 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는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학을 하게 됩니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을 하고 장남 동인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교인 600여명 대부분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나병환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가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첫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손 목사는 감만동교회에서 시무 중이던 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손 목사는 1935년 4월 5일 33세의 나이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는 신학생 시절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고 전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이곳 애양원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한 손 목사는 나병환자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돌봤습니다. 그러나 1940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다가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는데 6년 만에 8·15광복으로 출옥하여 1946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애양원 교회를 지원하여 시무하던 중 1948년 여수·순천사건으로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장남인 동인과, 둘째 동신 두 아들이 서로 상대를 풀어달라고 애원하며 죽기를 자청하다가 모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사태가 진압된 후 가해자들의 구명을 탄원하여 가해자 중 한 명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양자를 삼고, 두 아들을 잃은 후 장례식에서 손목사가 감사한 열 가지는 너무도 유명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한 손 목사야말로 입으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참 설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도 교회도 이기심으로 가득하여 자신과 가족밖에 모르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수많은 종교지도자들과 목회자들 중에 과연 손양원 목사 같은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과 3부자의 묘를 둘러보며 세상의 욕심에 찌든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그들 3부자가 너무너무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2005. 6. 4. 오마이뉴스 / 이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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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kr.blog.yahoo.com/lodemtrees/3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