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개곡리(開谷里)
개곡리(開谷里)는 동대산맥 조항산의 ‘성령(筬嶺 : 바디령)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고도가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는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동쪽에 청정수가 흘러내리는 성지골, 북쪽에 사곡지(낚시터)가 분포해 있어 수원은 풍부한 지역이다. 자연마을로는 ‘개곡’, ‘대성’마을 등이 있다.
그리운 내 고향 개곡리
‘개곡’ 마을은 '오절'이라는 이와 '견천지'라는 이가 약 660년 전에 개척한 마을로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부르다가, 마을에 깊은 골짜기가 있어 '개곡'이라 개칭되어 불린다.
‘개곡’은 동대산맥(東大山脈) ‘바디령’의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동대산맥의 굵은 등성이들이 빚어낸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다. 따라서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데다 넓은 들판까지 안고 있는 천혜의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입실리(入室里)에 맞닿아 있고, 북쪽에는 말방리(末方里), 서쪽에는 연안리(淵安里) 이웃하고 있으며, 동쪽은 동대산을 사이에 두고 양남면(陽南面) 효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바디령
‘개곡(開谷)’은 예로부터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물로 질 좋은 쌀을 생산해 왔다. 2003년부터는 ‘부농쌀작목반’을 결성하여 우렁이농법으로 친환경 쌀 생산에 노력해 왔으며, 30여 가구가 50ha에 ‘친환경 쌀’을 재배하고 있다.
‘바디령’ 자락의 ‘쉿골’과 ‘성지골’의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물을 농업용수(農業用水)로 활용하기 위해 100만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개곡저수지(開谷貯水池)’도 축조되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청정(淸淨)한 이 마을에도 7번 국도에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최근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연안리의 동쪽에 있는 ‘개곡(開谷)’이 개곡1리, ‘개곡’ 서북쪽의 ‘대성’이 개곡2리를 이루고 있다.
개곡리 풍경
개곡리(開谷里)는 보기 드문 충효의 마을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견천지, 오경우, 이눌, 김응하, 오심, 오열, 김흡 등 많은 임란의사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충의의 마을이요, 지극한 효심과 3년간 ‘시묘살이’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효자 오무용으로 유명한 효자의 마을이다.
효자(孝子) 오무용은 강원도 영월에 살다가 어머니가 고향 가자는 말 한마디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고향인 ‘개곡(開谷)’으로 내려와 살았다. 그리고 봄·가을로 어머니를 업고 들 구경을 시키는 효자였으며, 1959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을 꼬박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 나무뿌리처럼 뻣뻣했다고 한다. 효성(孝誠)에 감복한 범이 그를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가 ‘시묘살이’ 했던 곳에 집터가 남아 있다.
그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그의 효성을 기려 표창하고, 이곳을 방문해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대통령(大統領)의 하사금으로 집안이 일어나고 아들 취직도 하고 어렵던 집안이 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시묘살이’란 부모가 죽으면 아들이 3년간 부모의 묘를 돌보고 불효(不孝)를 반성하는 것으로 강제사항은 아니었다.
시묘살이
엄격한 유교국가(儒敎國家)인 조선이었지만, 3년 시묘살이 하는 것은 보통 인내력으로 힘든 것이기 때문에 보통은 3달을 시묘살이 했으며, 3년까지 하는 것은 드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시묘살이’를 할 때는 밥은 자기가 직접 지어 먹었고 식량(食糧)은 집에 남은 식구들이 조달했다. ‘시묘살이’는 3년 동안 하는데,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주로 무덤을 돌봤다. 그리고 가끔 집에 가서 옷가지나 식량을 얻어올 수 있었다.
‘시묘살이’ 하는 동안의 하루 일과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부모님 묘에 공양(供養)을 올리고, 인사들 드리며 무덤을 관리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양(供養)이란 부처 앞에 음식물이나 제물(祭物) 등을 바치는 일을 말하는데, 그 형식이 유교식(儒敎式)의 제사와 비슷하여 조상의 묘소에 음식을 진설(陳設)하는 일도 공양이라 했다.
개곡리 풍경
개곡리(開谷里)는 또 주민숙원사업이 없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다. 다른 마을에서 한 만큼은 다 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민들의 불만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웬만큼 불편한 일도 그냥 참고 넘긴다는 대견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개곡리(開谷里)의 자연부락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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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곡(開谷)
지금의 영천(永川) 신녕에 살던 해주인 견중근(堅重根 신녕현감)이 1492년경 머루와 다래넝쿨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뒤에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모아에 거주하던 대호군(大護軍) 오두원(吳斗元)이 이거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불렀으나, 150여 년 전 해주견씨, 고창오씨, 김해김씨, 청안이씨, 학성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마을이 깊은 골짜기를 끼고 이루어졌다고 ‘개곡(開谷)’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개곡리 풍경
다른 이야기는 마을 동편에 쇠가마가 있어 ‘부동(釜洞)’ ‘개부동(個釜洞)’이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빈자촌(賓者村)’이라 불리다가 일제시대에 ‘개곡(開谷)’으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낙의재실기’, ‘송호실기’등에는 ‘개곡(開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당목(堂木)은 마을 가운데 있는 당집 옆에 선 50년생 느티나무인데, 본래는 이곳에 오래된 회나무가 있었으나, 6.25전쟁 때 미군(美軍)들이 사격연습을 하여 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개곡리 풍경
이 마을에는 지난 1950년대, 필자의 종고모님께서 정미소(精米所)를 운영하면서 거주하고 계셨는데, 언젠가 부산(釜山)으로 이주하셨다가 그곳에서 별세하셨다.
돌아가셨을 때는 문상(問喪)조차 하지 못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필자들은 이 고모님을 항상 ‘개옥고모’라고 불렀다.
‘개곡(開谷)’은 외동읍 상당수 부락에서는 ‘개옥’이라고 칭하고 있다. 필자는 외동중학교 재학 당시 학교에서 너무 늦어 귀가(歸家)가 용이하지 않거나, 혹한(酷寒)으로 귀가가 힘들 경우 이 마을 ‘개옥고모’님댁으로 가서 유숙(留宿)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곡리 풍경
대성(大城)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해 큰 성을 쌓기로 계획한 곳이었다고 ‘대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서 크게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대성(大成)’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이 경우는 한자가 일치하지 못한다. 외동휴게소가 있는 7번국도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재(伽倻齋)
옛날 이곳에는 고창오씨(高敞吳氏) 종중에서 세운 강신재(講新齋)라는 성당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고창오씨(高敞吳氏) 후손들이 1961년도에 새로 재실을 세웠는데, 이를 ‘가야제’라고 한다.
4칸 맞배지붕으로 최근에 덧창을 설치하고, 축담을 시멘트로 새로 단장해 놓았다. 개곡1리 56번지에 있다.
개곡리 풍경
오체정
경주인 이규태(李圭泰)의 5형제가 우애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1958년에 3칸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개곡(開谷)’에 세웠다.
회헌정(悔軒亭)
개곡에 사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1965년에 지은 정자다. 4칸 접집에 팔작지붕을 얻었고 솟을삼문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중 동쪽 문과 담장이 허물어져 있다.
죽계사(竹溪舍)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의 의사(義士)이며 조선조 선종(宣宗) 때 현감(縣監)을 지낸 김흡(金洽 1550~)을 추모하여 2004년 6월 김영김씨 죽계공파 후손들이 개곡에 지은 제사다.
개곡리 풍경
백운암(白雲庵)
‘가라골’에 있던 암자(庵子)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들의 군량미와 병기를 비축하고 ‘누름진평전’에서 결진할 때까지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왜적들의 습격으로 소실(燒失)되었다.
누름진평전
‘가뫼골’의 중심 평원으로, 임진왜란 때 견천지(堅川至), 오경우(吳敬友), 이눌(李訥), 김응하(金應河), 오심, 오열(吳悅) 등 의사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이라 하며, 견천지 의사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기박산성으로 가서 울산 의병들과 합진(合陳)하였다고 한다.
개곡리 위치도
가라골
‘쉿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래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추곡(楸谷)’이라고도 한다. ‘신산등’, ‘시이골(때때골)’, 은행수등, 안산등, 삼시곡, 소암자곡, 독자곡 등의 골짜기가 있다. 견씨(堅氏)의 문중산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병사(兵士)들의 훈련기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암자골
‘백운암’ 절이 있었던 골짜기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량미와 병기 등을 보관하고, 병사들의 훈련기지(訓練基地)로 사용하였다.
개곡리 풍경
불선골
불을 밝히고 치성(致誠)을 드리면 소원 성취된다고 하는 영검한 골짜기로, ‘가라골’ 남쪽에 있다.
성짓골
‘개곡(開谷)’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쉿골
‘개곡(開谷)’에서 가장 큰 골짜기로 ‘가매골’ 북동쪽에 있다.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개곡저수지(開谷貯水池)’가 축조되어 있다.
개곡리 풍경
중산
‘쉿골’ 안쪽 등성이로 승려(僧侶)들의 다비식(茶毘式)을 했던 자리로 이곳에는 불에 검게 탄 흙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비식(茶毘式)이란 죽은 이의 시신(屍身)을 불에 태워 그 유골을 거두는 불교(佛敎)의 장례의식을 말한다.
가뫼골
‘개곡(開谷)’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마골’, ‘부곡(釜谷)’이라고도 한다. 이 골짜기에 ‘약물내기골’, ‘놀기미골’, ‘대성골’, ‘절테골’, ‘마시미기’, ‘누름진평원’ 등이 있다.
가뫼골
평풍골
‘소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가 병풍을 두른 형국이다.
한삼밭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지 바른 곳에 집터가 있었다고 ‘집테양달’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달’은 표준어 양지(陽地)의 경주지방 사투리다.
가뫼골재
해발(海拔) 562m의 고개로 개곡리에서 양남면(陽南面) 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가뫼골’ 위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이 베틀의 ‘바디’를 닮았다 하여 ‘성령(筬嶺)’이라고도 하는데, 외동읍에서 양남, 양북, 감포(甘浦)로 통하는 영로(嶺路)이다.
가뫼골재
‘바디령재’라고도 하는데, ‘바디령’의 ‘바디’는 ‘베틀’이나 방직기, 가마니틀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로 대오리, 나무, 쇠 따위로 만들어 베 또는 가마니의 날에 씨를 쳐서 짜는 구실을 한다. 성령(筬嶺)의 ‘筬(성)’자가 대나무로 만든 ‘바디’라는 뜻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는 왜병(倭兵)들은 양남면(陽南面)의 동해안에서 이 고개를 넘어 경주읍성으로 진출하고자 수시로 침범했으나, 그때마다 의병군(義兵軍)에 의해 좌절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전개되었던 최초의 전투인 ‘개곡전투(開谷戰鬪)’가 바로 이때의 전투였다. 얘기가 나온 김에 ‘개곡전투’를 잠시 소개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개곡전투’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 후 경주부 의병군과 왜군 사이에 최초로 벌어진 전투였다. 선조 25년 4월 28일, 지금의 외동읍 개곡리에서 양남면 앞바다인 동해안으로 넘는 ‘바디령재(筬嶺 ; 가뫼골재)’ 아래 위치한 개곡리에서 일어난 전투를 말한다.
양남면(陽南面) 쪽 동해안으로 상륙한 왜군(倭軍) 30~40여명이 ‘가뫼골재’를 넘어 와서 개곡리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면서 시작된 전투였는데, 의병군들은 이 전투에서 왜병 16명을 사살(射殺)하고, 20여 정의 조총(鳥銃)을 노획하였다.
이날 밤 의병군(義兵軍)들은 의병장 김응하의 지휘 아래 정병(精兵) 59명을 ‘가뫼골’ 개천 숲에 잠복시키고, 개곡리(開谷里) 출신 의병장 이눌(李訥)과 김득복의 정병 70여명이 횃불 화살을 쏘며 돌격하자 왜병 40여명이 일시에 뛰쳐나왔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그 선봉(先鋒)이 엄청나게 날쌔었으나, 매복(埋伏)한 아군이 ‘뇌쇠(활)’로 그를 쏘아 넘어뜨리고 계속해서 사격을 가하자 왜병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조총(鳥銃)을 버리고 어지러이 도망하고 말았다. 외동읍(外東邑) 지역 의병군이 왜병과의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조총(鳥銃)은 전근대시대의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화승총을 부른 이름이다. 초창기의 조총은 수렵용으로 쓰인 조잡한 성능의 것이어서 전투용(戰鬪用)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초창기(初創期) 조총(鳥銃)의 성능은 매우 조잡해서, 한 발을 쏘고 난 후 다시 쏘려면 10~15분 정도의 장전 시간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그 화력(火力)도 형편없어서, 당시 장수들이 주로 입던 갑옷으로 충분히 유효 사거리(射距離)에서 발사되는 조총의 탄환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조 총
그러나 일본은 조총(鳥銃)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곧 화력과 연사력(連射力)을 대폭 향상시켰고, 1560년대에는 교차사격(交叉射擊) 전술을 도입하면서 연사력의 문제점을 보완함으로써 16세기 당시 일본의 총포기술(銃砲技術)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놈’들이 무장한 조총(鳥銃)의 상당수는 당시의 태국(泰國 ; 타일랜드)에서 만들어 왜놈들에게 수출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조총(鳥銃)이 생겨났을 때 일본은 에스파니아(스페인)에서 이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자체 생산함으로써 한 때는 전체 유럽국가의 조총(鳥銃) 수보다 일본의 조총수가 더 많았다는 말도 있었다. 개곡전투(開谷戰鬪)와 관련한 사항은 뒤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의병들의 전투
개야골
마을 동쪽 ‘가야산’에 있는 골짜기로, 재실(齋室)인 ‘가야재(伽倻齋)’가 있다.
재탯골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절탯골’이라고도 부르며, ‘불선골’ 북쪽에 있다.
고지골산
지금은 공장지대가 된 산으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주거한 흔적이 있으며, 돌도끼,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개곡리 풍경
낙뫼골
‘솔선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마을 동산(洞山)이다.
방아선골
‘낙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놀기미기
‘큰모밭’ 남쪽에 있는 고개로,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한다.
두북골
마을의 뒤쪽에서 ‘순못’ 밑에 걸쳐 있는 들판을 말한다.
개곡리 원경
(아래쪽은 연안리)
뒤깔밭
‘개곡(開谷)’의 뒤쪽에 있는 갈밭으로 본래 ‘띠풀’이 무성한 황무지 야산(野山)으로 일부는 개간하였다. 7개 문중이 참여한 계중산(契中山)이었으나 지금은 분할했다.
여기에서의 ‘띠풀’은 ‘삘기’의 방언(方言)으로 ‘띠’의 새로 나는 어린싹을 말한다. ‘띠’는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5~6월에 이삭 모양의 꽃이 피며, 들이나 길가에 무더기로 난다.
띠 풀
마시미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곳에서 군마(軍馬)를 먹였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멎절들
‘개곡(開谷)’ 북쪽에 있는 들로, 원사평(遠寺坪)이라고도 한다. 절이 있던 곳으로 탑개석(塔蓋石)이 마을 앞까지 떠내려 온 것을 한 때 마을 표시(4H) 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밸못
배 모양으로 생긴 못으로 ‘배못’이라고 불리다가 ‘밸못’이 되었다. ‘대성들’ 일부와 ‘장구시미들’에 농업용수(農業用水)를 공급했으나, 경주 보문단지의 보문저수지(普門貯水池) 위쪽에 있는 ‘덕동댐’ 물이 도수로를 통해 공급되면서 이 못은 없어졌다. 현재는 경지정리로 논이 되어 있다.
경주 덕동댐
개못
‘개곡(開谷)’ 북쪽에 있는 못으로, 2001년 농지정리(農地整理) 때 없어졌다. 지금은 ‘덕동댐’ 물을 쓴다.
보름이
‘개곡(開谷)’ 동남쪽 언덕 위에 있는 들로 지금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숯못
‘개못’ 북쪽 ‘뒤깔밭’ 앞에 있는 못으로 1991년 태풍(颱風) ‘글래디스’ 때 터져버렸다.
개곡리 노인정
장구시미
장구소리가 났다는 들판으로 조선시대(朝鮮時代) 때 이 마을 ‘김순(金筍)’이라는 장사가 죽어 ‘장구시미’ 뒷산에 묻었는데, 이때 들판에서 장구소리가 나서 가보니 용천수(湧泉水)가 솟았다고 한다.
이 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사시사철을 그침이 없었다고 한다. ‘김순’은 말방리(末方里)에 ‘동창(東倉)’을 지을 때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혼자서 하루 만에 그 많은 건축자재를 다 옮겼다고 한다.
개곡리 공단
여기에서 말하는 ‘동창(東倉)’이란 조선조 중종(中宗) 때 대동미(大同米) 수집 창고가 당시의 영남좌로(嶺南左路) 동쪽인 말방리(末方里)에 위치한데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대동미(大同米)란 조선 중기 이후 대동법(大同法)에 따라 거두던 쌀을 말한다.
그 당시 외동읍 동북부지역에서 거둬들여 매년 정기적으로 경주관아로 수송하던 세곡(稅穀)을 집결 시켰던 창고가 말방리(末方里)에 있었다는 얘기다.
개곡리 마을회관
용천(湧泉)
‘중마을’ ‘대보둑’ 밑에 있는 샘으로, 깨끗한 찬물이 늘 솟아난다. 옛날에는 이물을 식수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빨래터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천(湧泉)’이란 지하에서 물이 흐르는 층을 따라 이동하던 지하수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을 통해 지표면으로 솟아나오는 샘을 말한다. 우리 고향 사투리 ‘지랄용천’의 ‘용천’과는 다른 말이다.
약물내기
약물이 났다고 하는 골짜기로, ‘큰모밭골’ 남쪽에 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늘 같은 양의 물이 나오고 있다.
용 천
택구바댓들
‘개곡(開谷)’ 서쪽에 있는 들로, 마치 토끼처럼 생겼다고 하여 ‘토끼평’이라고도 한다. 마을 뒷들이다.
황새밭
마을 밑에 있는 들로, 황새가 많이 날아온다. ‘용천’ 아랫들이다.
개곡쉼터
이 마을은 마을회관 일대에 800여 평의 넓은 마을공원을 1987년에 조성하여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개곡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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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곡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의사(義士)와 의병장(義兵長)을 배출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도 두드러진 인물로는 ‘개곡’ 출신 의병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견천지(堅川至)공과 이눌(李訥)공을 손꼽을 수 있다.
다른 파일에서 소개한바와 같이 견천지(堅川至)공은 외동읍(外東邑) 개곡리(開谷里) 출신으로 호는 송고이며, 명종 19년(1564)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의젓하여 보통 애들과 달랐고, 자라서는 집에 들어앉아 학문에 힘쓰고 명리를 바라지 않았다. 또 성력(星歷)과 병서(兵書)에도 통달했지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개곡리 견천지공 묘소
견천지(堅川至)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득복(金得福)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경주의 문천(汶川)에서 각처의 의병(義兵)들과 합세하여 '문천회맹'을 결의하였다.
이후 울산(蔚山)에 있는 반구동에서 외동읍(外東邑) 입실리(入室里) 출신 이응춘(李應春)이 주재 한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결사동맹을 한 후, 김득복의 인솔 하에 같은 개곡리(開谷里) 출신인 이눌(李訥)공 등과 대왕암(大王巖 ; 지금의 문무대왕 수중릉)에 가서 구국을 위한 제사를 올렸다.
대왕암에서 제사를 마친 견천지(堅川至)공은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 전쟁 후 경주부윤이 되었음)의 휘하에서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북상하는 왜적(倭敵) 4백여 명을 참수하고, 다시 양산으로 진격하는 왜적 70여명을 참수(斬首)하였다.
이후 1595년 10월에는 다시 울산(蔚山)으로 가서 안시명, 윤홍명, 서충인, 장희춘, 권사악, 최계종, 박춘무, 안국보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대왕암(문무대왕릉)
이때 20여만 명의 왜군은 부산포(釜山浦)와 다대포(多大浦),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에 상륙하여 15일에 동래성(東萊城)을 함몰 시킨 후 17일에는 울산읍성(蔚山邑城)과 병영성(兵營城)을 함락하였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北上)하면서 서생(西生)에는 후방기지를 설치하고 많은 군사(軍士)를 주둔시켰는데, 이때 주둔 왜병(倭兵)들은 무리를 지어 촌락을 덮쳐 방화하고, 인명살상(人命殺傷)과 약탈을 감행했다.
천인공노 할 이들 왜병(倭兵)들의 만행을 본 백성들은 분연히 의거(義擧)하여 1596년 4월 23일 외동읍(外東邑) 모화리(毛火里) 소재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박봉수(朴鳳壽)를 대장(隊長)으로 삼고 수천 명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눈덮인 기박산성
이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경주의장(慶州義長) 견천지(堅川至)공은 류백춘(柳伯春)등과 함께 의병(義兵) 5백여명을 인솔하여 동년 5월 5일 기박산성에 도착하여 박대장에게 격문(檄文)을 전달하고 합진(合陣)했는데, 그때의 의군(義軍)의 수는 1,500여명에 달했다.
박봉수(朴鳳壽) 대장의 지휘 하에 각 의병장(義兵長)들은 첫 공격지를 경상좌병성을 목표로 선정하였다.
견천지(堅川至) 의장(義將)과 이경연(李景淵), 장포춘(蔣佈春), 이한남(李翰南), 고처겸(高處謙), 박진남(朴震男), 박응정(朴應楨), 심환(沈換), 김응방(金應邦), 이봉춘(李逢春 ; 입실리 출신 이응춘 의병장의 동생), 서몽호(徐夢虎), 전응충(全應忠), 전영방(田永芳), 백춘(伯春) 등은 전군을 4대(四隊)로 편대하여 7일밤 삼경에 병영성(兵營城) 4대문 밖에 매복케 하고 북소리를 신호로 쳐들어갔다.
방심하고 있던 왜병(倭兵)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가 의병(義兵)들이 급습하자 잠이 제대로 깨지도 않은 채 황급하게 4대문 밖으로 도망가다가 격살됨으로써 의병들은 수백 명을 죽이고, 많은 군장비(軍裝備)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견천지(堅川至)공은 정유재란(丁酉再亂) 중이던 선조 30년(1597년) 12월 22일 ‘도산성(島山城 : 지금의 울산시 鶴城)’ 전투에서 34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울산 도산성(지금의 학성) 전투
(이 그림은 당시의 침략군인 왜군의 장수 ‘나메시가’가 그린 그림이다)
그가 전사하자 원군(援軍)으로 참전한 명(明)나라 장수가 칼을 빼어 땅을 치면서 "이 나라가 이러한 간성을 잃는구나" 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대왕(宣祖大王)은 그의 전공을 인정하여 중직(죽은 뒤에 내리는 직)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의 유택(幽宅)은 외동읍(外東邑) 개곡리(開谷里) 동추산록 기슭에 모셔져 있다.
견천지(堅川至)공은 적탄에 맞고도 그의 휘하 군교에게 “내가 죽으면 전열 앞 말위에 나를 태워 왜병(倭兵)에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게 하라”고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울산 도산성(지금의 학성) 전투
(이 그림은 당시의 침략군인 왜군의 장수 ‘나메시가’가 그린 그림이다)
군교(軍校)들이 그의 말대로 죽은 그를 말위에 태워 북을 울리며 적진(敵陣)으로 쳐들어가는 것같이 했더니, 왜군(倭軍)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모조리 도주하여 ‘도산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견천지(堅川至)공은 또 그가 모집한 의병(義兵)들을 주로 자신의 향리인 외동읍 개곡리 동대산맥 기슭에서 훈련을 시키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지금의 개곡리(開谷里) ‘누름진평전’, ‘가라골’, ‘암자골’, ‘마시미기’ 등지가 그곳들이다. 이들 지역을 차례로 소개한다.
울산 도산성(지금의 학성) 전투
(이 그림은 당시의 침략군인 왜군의 장수 ‘나메시가’가 그린 그림이다)
‘누름진평전’은 가뫼골의 중심 평원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견천지(堅川至), 오경우(吳敬友), 이눌(李訥), 김응하(金應河), 오심, 오열(吳悅) 등 의사(義士)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으로, 견천지 의장(義將)은 여기에서 훈련받은 의병(義兵) 500여 명을 이끌고 ‘기박산성’으로 가서 울산 의병들과 합진(合陣)하였다.
가라골은 ‘쉿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래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추곡(楸谷)’이라고도 한다. ‘신산등’, ‘시이골(때때골)’, ‘은행수등’, ‘안산등’, ‘삼시곡’, ‘소암자곡’, ‘독자곡’ 등의 골짜기가 있다.
임진왜란 전투
(이 그림은 당시의 침략군인 왜군의 장수 ‘나메시가’가 그린 그림이다)
이들 지역은 견천지(堅川至) 의장(義將)의 후손인 견씨(堅氏)의 문중산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병사들의 훈련기지였다고 한다.
‘암자골’은 백운암(白雲庵)이 있었던 골짜기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량미(軍糧米)와 병기 등을 보관했던 장소이며, 아울러 병사들의 훈련기지(訓練基地)로 사용하였다. ‘마시미기’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군마(軍馬)를 먹였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임진왜란 전투
(이 그림은 당시의 침략군인 왜군의 장수 ‘나메시가’가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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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눌(李訥)공의 자는 약우(若愚), 호는 낙의재(樂義齋)이며 본관은 청안(淸安)이다. 고려조(高麗朝) 청안군 충원공 양길의 후손이다.
장기현(長鬐縣 ;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 현감 '이 기'의 현손이며, 훈련원첨정 '이신정'의 아들로 선조 2년(1569)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개곡리(開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지혜와 용명이 있고 무예가 뛰어났다. 입실리 출신 이응춘(李應春) 의병장의 종질(從姪)이 된다. 이눌(李訥)공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효경' '논어'를 배워 효제(孝悌)를 행하였다.
이눌공의 유허비가 소재하는 삼명서원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에는 이눌공의 유허비가 있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삼명서원(三明書院)이 소재한다.
삼명서원은 지방 유림의 공의로 1553년(명종 8)에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1569∼159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
었다.1854년(철종 5)에 중수하였으며,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
의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의 하나로 1968년에 보수함)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하인들과 이웃 주민, 승려(僧侶)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천사장(天使將)이라는 기를 앞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인들이란 당시로서는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종'이나, '백정'들을 말하며, 승려들은 불국사 소속 승려들을 말한다. 이들 의병 승려들 때문에 왜군들은 보복으로 불국사에 방화하여 목조건물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왜군이 불태워버린 불국사
선조 25년(1592) 4월 왜구(倭寇)의 침공설로 시국이 어수선할 때 '이눌'공은 황룡언덕에 훈련장(訓鍊場)을 마련하고 마을 장정들을 모아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또한 남천위의 '무정'에서 김석견, 권사악, 황희안 등 뜻을 같이하는 향리의 유생들과 강무회(講武會)를 갖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이러한 대비 끝에 동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일만에 경주성(慶州城)이 함락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이눌(李訥)공은 종숙(從叔) 이응춘 의병장과 재종 이승금, 이삼한 등과 더불어 지체 없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결성하자말자 같은 달 24일 경주성(慶州城) 탈환을 위해 제일 먼저 항왜결의(抗倭結義)를 맹약하고, 남천과 계림(鷄林) 등지에서 진을 치고 적을 방어하였다. 이때 적의 대병이 동해안으로 침투한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의병을 이끌고 수영포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고, 동년 6월 9일에는 문천회맹(汶川會盟)에 참가하였다.
이후 이눌(李訥)공은 선조 25년(1592) 7월 영천성(永川城) 탈환에 참전하여 적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우고, 동년 8월과 9월 경주성(慶州城) 탈환에 두 번이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눌공의 위패를 모신 '상의사'
(이눌 의병장의 추모시설이 출생지인 외동읍 개곡리가 아닌 이
곳에 있는 것은 이눌의 현조부(5대 조부) ‘이 기’가 당시 장기현
(長鬐縣 ;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 포함하는 지역)의 현감이었기 때문이다)
선조 26년 2월에는 울산의 태화강 전투에 참전하고, 동년 10월에는 입실리 출신 종숙인 이응춘 의병장이 주도한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에도 서명하였다.
선조 29년 9월에는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7월 21일 방어사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여 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년 9월 22일, 다시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채몽석, 박충윤, 손처약, 이이잠, 손시 등 의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전술한바와 같이 이눌(李訥)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의 문천(汶川)에서 각처의 의병들과 개회한 문천회맹, 그리고 울산에 있는 반구동에서 종숙 이응춘의 주도로 개회한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왜적을 타도하기 위한 결사동맹(決死同盟)을 맺었다.
옛 장기현(포항시)에 소재하는 이눌공의 유허비
이후 이눌(李訥)공은 김득복(金得福), 황희안과 함께 대왕암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왜적 4백여명과 양산으로 진격하는 왜적 70여명을 참수하였으며, 10월에는 울산(蔚山)으로 가서 같은 개곡리 출신인 견천지 의병장과 안시명, 윤홍명, 서충인, 장희춘, 권사악, 최계종 , 박춘무, 안국보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1592년 6월에는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금오산(金鰲山)에서 적 4백여 명을 참살하고 도창(刀鎗)·조총(鳥銃) 27병을 노획하였으며, 7월에는 영천에서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의병장 권응수(權應銖) 등과 합세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이눌(李訥)공이 참전한 금오산전투의 금오산
이듬해인 1593년 1월에는 적의 대선단(大船團)이 태화강으로 침입하자 박손(朴孫), 이우춘(李遇春 ; 입실리 출신 의장) 등 의사들과 전선 10여척을 준비하고, 수전(水戰)계획을 세워 마침 불어오는 강풍을 이용하여 화공(火攻)과 모래를 퍼 날리는 전법으로 적을 격파 대승을 거두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합세하여 적을 공략하였고, 대구(大邱)의 팔공산싸움에서 적탄을 맞았으나 승리를 거두었다. 난이 끝난 뒤 재산을 모두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낙의재’에 모아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전투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 1등에 녹훈(錄勳)되었다. 그 후 공의 사적은 1858년 후손들에 의해 '낙의재 유집'으로 간행되었다.
이눌(李訥)공은 외동읍 내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여러 번 세웠다. 선조 25년 4월 28일 자신의 향리인 개곡리(開谷里)에서 전개된 전투에서는 동해안에서 동대산맥(東大山脈)의 ‘바디령재’를 넘어 온 30~40명의 왜병들을 절반이나 살육하고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는 경주부(慶州府)의 의병과 왜군(倭軍)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바디령재’가 있는 동대산맥
(왼쪽 산록에 ‘바디령재’가 있다)
이눌(李訥)공은 또 1595년 2월 28일, 또 다른 의병장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지금의 괘릉리(掛陵里) 소재 영지(影池)저수지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한밤중에 저수지를 무너트려 수공(水攻)으로 격파함으로써 '영지전투(影池戰鬪)'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왜군에게 시달리던 방어리(防禦里) 백성들을 구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영지전투는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들이 경상좌도(慶尙左道 ; 영남좌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지금의 괘릉리(掛陵里) 소재 영지저수지 둑 아래인 ‘영호’마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 정보를 입수한 천사장(天使將) 이눌(李訥), 격의장(激義將) 이여양, 분격장(奮擊將) 이언춘(李彦春) 등이 김득복군(金得福軍)과 합세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입실리에 소재하는 이눌공 등 청안이씨 12인 공적비
(이눌 공 등의 추모비(追慕碑)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이들 창의 의사
(創意義士)들이 활동한 주무대가 ‘한강못’ 배면(背面)에 위치한 동대
산맥의 ‘바디령’이었고, 입실리(入室里)에 입향한 청안이씨의 입향조
이자 장기현(長鬐縣 : 지금의 포항시 동남부)의 현감(縣監)을 지낸바
있는 신제(愼齊) 이기(李基 : 이눌공 현조부)의 인연을 감안한 것임)
불국사(佛國寺)에 유진(留陣)하면서 왜군의 격퇴를 숙의하던 김득복(金得福)과 이눌(李訥), 이언춘 등은 우선 김득상과 황희안 등을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한 후 그날 밤 모든 의군(義軍)을 불국사에서 ‘영호’마을 뒤 소나무 숲에 잠입시키고 그곳에서 3대로 나누어 매복하였다.
황희안을 분대장으로 하는 62명의 궁수(弓手)들은 마을 건너 편 숲에 매복시키고, 삽을 든 40여명은 김득복(金得福)이 인솔하여 영지저수지 둑 안쪽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이눌(李訥)공의 군대 100여명과 이언춘의 군대는 공격조로 편성하여 대기했다.
영남좌로(경상좌도)
의병군(義兵軍)은 5경쯤(새벽3시경) 되자 행동을 개시하여 남쪽(영지초등학교 통학로가 있던 쪽)과 북쪽(밀개가 있는 쪽으로 옛적 영못안과 신계리에 거주하던 영지초등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던 길)에서 못둑을 끊었다.
지금은 견고한 제방(堤防)이지만, 당시에는 20여명의 장정(壯丁)이 삽으로 끊을 정도로 허술한 제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지저수지 제방 밑 ‘영호’부락(못밑)
(전면의 하천이 저수지 왼쪽에 있는 '밀개'의 물이 흐르는 하천이다)
삽시간에 못둑이 터져 홍수(洪水)가 덮치자 잠을 자던 왜병(倭兵)들은 급류에 휘말려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사살자도 30여명에 달했다. ‘낙의재실기(樂義齋實紀)’ 등에 의하면 죽은 왜병이 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나, 증명이 되지는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의 승리(勝利)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이 된다. 그러나 이 전투로 불국사의 목조건물들이 왜병들의 보복으로 전소되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소탕한 의병들의 본부가 불국사에 있었고, 불국사의 승려들이 의병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개곡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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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많기로 단연 돋보여 예부터 충신과 효자가 많았던 이 마을은 요즘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오도필(전 천북초등 교장), 오병학(부산 계림화학), 오민필(전 울산정보고 교장), 오보필(전 감포읍장), 견학필(전 경성대 대학원장), 오상필(부산 동광목재), 최병훈(전 신라고 교장), 이수일(전 구로구의원), 오용문(전 계림초등 교장), 오진필(전 대구광역시의원), 김치행(경북도의회 사무처장), 오용찬(경주시농업기술센타 소장), 김문조(예비역 육군준장, 전 제3군수지원사령관), 견종필(인천지법 판사), 오선희(서울고법 판사), 최호식(포항지원 판사), 이상조(경북보건환경연구원) 씨 등이 모두 이 마을 출신이다.
이들 외에도 재경 외동향우회의 사무국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홍두표 사장이 '대성마을' 출신이고, 향우회 임원을 역임하였거나, 역임 중인 허철구씨, 이병락씨 등도 개곡리 출신이다.
개곡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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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은 다른 동리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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