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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서 ‘인간’으로
국어교육과 2023190101 이연우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는 매우 오래 전 만들어진 공포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새’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개성을 보인다. 귀신과 악마, 괴물 등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평범한 공포영화와는 다르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평화의 상징인 새를 히치콕은 공포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멜라니를 공격하는 갈매기, 문에 부딪혀 죽는 새, 모이를 먹지 않는 닭 등 이상 징후들은 모두 새들의 집단 공격 사건으로 이어지는 초석이며, 이것들의 축적은 플롯의 긴장과 관객의 몰입감, 공포심을 높인다. 특히 학교 정글짐 앞에 앉아있는 멜라니의 뒤로 새가 하나둘씩 내려앉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새들이 빽빽하게 앉아있는 장면은 소리나 자극적인 장면의 효과 없이도 관객을 서늘한 공포에 맞닥뜨리게 한다. 또한 차 폭발 사건에서 멜라니의 놀라는 모습을 시간이 뚝뚝 끊긴 것처럼 토막내 보여주는 것, 댄의 시체를 시선의 집중처럼 급작스럽게 확대해 보여주는 것도 히치콕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공포&스릴러 장르를 좋아해서 공포영화를 자주 즐겨 보는데, 히치콕의 영화는 이렇게 특별한 효과 없이 단순한 화면 구성으로 서스펜스를 일으키기 때문에 신선하고 스릴 넘친다. 내용적인 면을 보자면, 경험상 공포영화의 종류는 대부분 공포의 대상 즉 다루는 제재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죠스>(1978), <엘리게이터>(1980), <피라냐>(2010)처럼 지엽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단일한 포식자 동물, <링>(1999), <인시디어스 시리즈>(2012-2018), <컨저링 시리즈>(2013-2021)처럼 종교∙엑소시즘과 관련된 귀신과 악마, <미스트>(2007), <언더워터>(2020)처럼 코즈믹 호러를 보여주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크리쳐), 그리고 <버드박스>(2018),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처럼 세계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대재난이 그것이다. 히치콕의 <새>는 이중에서도 미스터리한 재난과 재해의 공포를 다루는 분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가 새로 인해 일어나는 재난을 제재로 하고 이를 기반으로 플롯이 전개됨을 미루어 볼 때 중심 주제인 ‘새의 공격’은 분석될 필요가 있다.
재난 상황을 다루는 공포영화는 거의 항상 재난의 발생 및 이에 대한 인물들의 다양한 반응과 태도를 중심으로 극한 상황을 헤쳐 나가가는 플롯을 이루는 특징을 보인다. <새>는 ‘새의 공격’이라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인물과 그럴리 없다며 흘려 넘기는 인물,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종말론을 주장하는 인물과 조류학과 같은 논리적인 지식으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 인물 등 전형적인 캐릭터와 이들 간 대립구도를 등장시킨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런 재난 공포물에는 언제나 소위 ‘예수쟁이’처럼 성경을 들먹이면서 이 모든 것이 신의 분노이며 우리 인간의 원죄가 죽음으로써 청산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종말론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공포영화라면 이런 식의 종교적 요소는 갈등과 긴장을 조성하는 하나의 장치로서만 사용되겠지만, 이상하게도 <새>는 그 소재의 특이성과 기타 장면들로 인해 종교적 해석의 여지를 보이고 있다.
영화에 등장한 성경 구절 에스겔 6장과 이사야 5장은 우상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과 인간의 악함에 대한 신의 분노로 이루어져 있다.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라는 구절이 대사로 언급되었듯이 새의 습격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에 나온 신의 말과 연결지어 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장에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미치 가족과 멜라니가 새의 무리를 뚫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면과 연결된다. 이사야 5장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는 신의 율법을 버린 인간들에게 새의 습격이라는 벌이 내려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지막 구절인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는 미치가 문을 열었을 때 보였던 어두운 하늘 아래 새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장면과도 연결된다. 검은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휘장처럼 내리쬐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장엄함과 신성함을 느끼도록 의도된 듯하다.
이렇게 종교와 관련지어 해석한다면 ‘새의 습격’이라는 공포의 활용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멜라니를 ‘악마’라고 욕하는 여자와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새들이 떼를 지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을 볼 때 새는 인간에 대한 신(절대자)의 분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분노는 인간의 악함과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다. 이 잘못부터는 굳이 기독교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구상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인간이 벌이는 전쟁, 파괴, 환경 오염 등등의 과오로 생각되어진다. 번디 부인이 말하듯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며 ‘새는 외려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볼 때, 새들은 절대자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떼를 지어 전략적으로 파괴자인 인간을 공격하면서 지구를 재건하려 하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새들의 습격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신의 분노이자 자연의 반란으로 느끼게 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이유를 찾고 인간이란 종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공포영화의 주 기능은 교훈과 성찰에 있지 않지만, 떼지어 모인 새들에게 쪼이는 인간의 구도는 관객이 자신도 모르게 새에게 쪼이는 인간에 이입하게 하면서 이런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정리하자면 <새>는 새들의 습격이라는 특이한 공포 소재를 활용해 화려한 기법이나 긴박한 배경음 없이도 새들의 울음소리와 같은 연출로 서스펜스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때 관객은 영화를 보며 새와 성경처럼 작품에 등장한 소재들의 의미를 분석해볼 수 있고, 핵심 주제인 새의 습격을 신의 분노이자 종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습격의 이유를 찾으며 자연스럽게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새’로부터 시작한 영화가 마지막에는 ‘인간’에서 끝나는 것이다. 공격자인 새와 피공격자인 인간의 구도를 보면 이런 흐름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거대한 자연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생각하고 이유를 찾는 것부터 시작한다. 공포의 대상은 그 실체와 원인을 아는 순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사고의 흐름 속에서 신과 종말과 악마에 대해 생각하지만, 종국에는 종교적인 숙고를 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로 진입하게 된다. <새>는 개별적 동물인 새가 군집을 이루며 인간을 공격하는 모순적 상황의 공포를 통해 전자의 ‘새’를 보여주고, 관객에게 후자의 ‘인간’을 넘겼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논제1: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대상과 인간을 공격하는 대상은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ex. 잉꼬와 구관조-인간-야생 새들)
논제2: 공포는 잘 아는 것에서 오는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가?
주워 들고 나온 한 조각으로
국어교육과 2023190101 이연우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신의 은퇴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지브리 작품인데도 난해하다는 평과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섞였다는 의견이 많다. 평소에 지브리 스튜디오만의 영화 감성을 좋아하고 하야오 감독 특유의 반전주의와 자연주의적 메시지 표현이 매력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정말 인상깊게 본 작품 중 하나다. 은퇴작인 만큼 이 영화에서는 그가 주로 다루던 주제보다 세상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감독의 고찰이 잘 드러난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내세웠던 영화 속 메시지들이 전부 집약되어 전작의 오마주 형태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들어있고, 유사한 캐릭터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것이 스크린 너머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므로 영화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관객 자신만의 답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거칠게 말해 마히토라는 소년이 이상한 왜가리를 따라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사는 세계로 들어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오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화재로 잃었고 그의 아버지는 전쟁 중인 현재 군수공장을 운영하며 어머니의 여동생인 나츠코를 새엄마로 들였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 저택으로 가 괴상한 왜가리를 만나게 되는데, 사라진 나츠코를 찾으러 늙은 하인 키리코와 함께 ‘탑’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탑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지브리 특유의 환상과 괴상함이 섞여 있는 아름다우면서 잔인한 공간이다. 마히토는 그곳에서 젊은 키리코, 불을 뿜는 소녀 히미와 이 세계의 주재자인 증조할아버지를 만나 세계의 블록을 재건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런 와중 앵무 대왕이 세계의 질서와도 같은 그 블록을 쪼개 버리고, 세계는 무너지며 마히토는 키리코와 함께 원래의 현실로 돌아간다.
이렇게 서술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영화에서는 글로 표현하기 힘든 난해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마히토가 탑의 세계에서 젊은 키리코를 만나 그녀의 집에 묵으며 말하는 펠리컨들과 와라와라라는 이상한 생명체를 보는 것, 거짓말쟁이 왜가리와 친구가 되어 나츠코를 구하러 할아버지의 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왕국의 주인인 앵무새들을 피하는 것 등 그의 경험은 모두 괴상하고 아름답게,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래서 영화가 전개될 수록,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할수록 관객들은 이것이 마치 꿈같이 두서없는 전개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목해야 할 두가지는 이 세계가 어떤 세상인지, 마히토의 전후 변화와 ‘돌아가겠다’는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감상을 넘어 해석을 시작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탑 속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상한 세계다. ‘와라와라’라는 태어나기 전 생명과 그들을 잡아먹고 사는 펠리컨이 공존하고, 히미는 불을 뿜어 펠리컨을 막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때 펠리컨만 불타는 것이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대상인 와라와라도 일부 불탄다는 것이다. 또한 마히토의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성은 앵무들로 가득차 있는데, 이들은 종족 수를 불리는 것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몰아내고 탑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귀엽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 뒤로 칼을 숨겨 마히토를 잡아먹으려 하는 앵무는 고풍스럽지만 천장에 뾰족한 창과 가시가 박혀 있는 성의 모습과 닮았다. 이 세계는 모순덩어리다. 마냥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속에 감춰진 적대와 죽음을 딛고 사는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세상인 것이다. 이 세상은 단지 신기한 동물들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더 많을 뿐이지 사실은 마히토가 떠나온 현실 세계, 그 혼란하고 잔인한 세계와 닮아 있다.
이런 탑 속의 세계를 마법사 할아버지는 마히토가 벽돌 쌓기로 재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적의가 깃들지 않은 순수한 블록만을 골라 균형 있는 탑을 쌓는다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기회와 의무를 마히토에게 부과한다. 마히토는 이제 전쟁 중이며 어머니가 없는 현실 세계와,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무결점의 아름다운 이상 세계 중 어디에 존재할 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한다. 그리고 순수하고 적의 없는 블록이 아닌,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작은 돌조각을 주워 들고 문을 열어 현실로 나온다. 왜일까? 그가 아름다운 이 세계에 남지 않고 다시 전쟁과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탑의 세계에 있다. 마히토가 이 세계를 모험하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모험 전 마히토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끔찍해진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것은 돌로 자신의 머리를 치는 자해와 새엄마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입은 소년이었던 마히토는 새엄마를 찾으러 탑의 세계를 모험하는 과정에서 점점 달라진다. 왜가리와 히미라는 친구가 생겼으며 나츠코를 찾는 모험의 과정에서 겪은 탑 세계의 어떤 것들이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나츠코를 ‘엄마’라 부르며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웃으며 함께 돌아가게 된다. ‘돌아가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마히토는 ‘친구를 만들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마히토가 들고 나온 작은 돌조각은 탑의 일부이자 미약하지만 ‘아직 무언가가 남아있는’ 돌이다. 마히토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 이전의 세계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나왔다. 그 세계의 조각은 희망, 사랑, 기쁨, 친구 등 어떤 좋은 것도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가 ‘주워 들고 나온 한 조각’이라는 것이다. 마히토는 최소한 이 조각으로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거나 자해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 조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세계와 마히토의 행동을 이해했다면 남은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뿐이다. 나는 ‘그대들’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나의 삶과 나의 입장에서 아주 개인적인 답변을 해 보겠다. 사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삶에 대한 주장과도 같다. ‘죽는다’는 선택지를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건 네가 이미 살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질문이다. 하야오 감독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엿보이고, 삶은 잘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이에 동의한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뻔했으나, 그는 늘 그렇듯 은퇴를 번복하고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언가가 남은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사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마히토의 돌조각처럼 내게 의미있는 한 조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고유한 것을 끊임없이 만들고 그리고 꾸며 나가는 것이 사는 것, 삶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 때문에 괴롭고 덧없고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와 동시에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다.
논제1: 인간을 살아있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때에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논제2: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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