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을 밟으며 치즈의 고장을 가다.
금남 호남 정맥 7차(슬치재….염암재)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한파가 몰아치고 전국이 눈 소식이다.
호남지방에 내린 폭설로 비닐 하우스가 무너지고 도로가 얼었다고 방송에서 시끄럽다.
지난 구간 하산 후 식사를 한 슬치재 식당에 전화를 걸어보니 눈길에 차들이 굼벵이 걸음이란다.
걱정도 되고 한번쯤 건너 뛸까…하는 잔 꾀가 슬슬 머리 속을 맴도는 토요일 오후다.
카페를 들어가 보니 신청자가 30명을 웃 돌고 있는데 단장님의 걱정스런 얼굴이 자꾸 왔다 갔다 한다.
아직은 두 다리가 성한 나라도 가야 보탬이 되지 않을까…?
월동 장구에 뜨거운 꿀물까지 보온병에 넣고 집을 나선다.
야탑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춥고 얼굴들은 이미 얼었다.
출발 버스에서 단장님이 새로 오신 두 분을 소개한다.
관악산 번개에 참석하신
단장님 친구분
휴게소에 들러서 맛있는 굴 안주에 반주를 한잔 하고 나니 조금은 안정이 된다.
날씨 탓인지 뜨거운 우동 국물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전주를 지날 즈음 눈이 떠져서 차창밖을 보니 눈은 그리 많이 온 것 같지 않고 하늘의 별도 총총하다.
낮부터 추위가 풀리고 지역에 따라 눈이나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맞을 것 같기도 하다.
낮 익은 슬치 마을, 회관 앞에 버스가 멈추고 하나 둘씩 준비를 한다.
든든하게 입은 복장 탓인지 날씨는 다소 쌀쌀 하여도 이 정도라면 우리 산악회원들 실력이라면
무난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 산행은 치즈의 고장 임실군 북쪽지역 상관면, 신덕면과 완주군 구이면을 지나가는
반원 모양의 산 능선이 될것이다.
전체 거리는 실제로 24km가 될 것이고 눈이 쌓였으나 전반적으로 무난할 것이라는
선두 대장의 설명이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이다. (
골목길 사이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길게 자란 고드름이 눈에 뛴다.
큰 것 작은 것, 짧은 것 길게 자란 것 줄줄이 처마 끝까지 늘어서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사진을 찍고 얼굴도 사진기 앞으로 가져간다.
이동 통신사에서 설치한 안테나 철탑을 지나 평탄한 임도로 접어든다.
우측으로는 슬치재 식당과 주유소 불빛이 밝고 국도 17번을 지나는 차량 소리도 이따금씩 들린다.
임도가 끝나는 오름 길 초입에 묘 7기가 가지런하다.
포근한 힌 눈을 덮고 주무시는데 이른 아침에 지나 가면서 발자국을 남기려니 미안 한 마음이다.
작은 능선을 넘어 인삼 밭을 만난다. 어둠 속에 들여다 봐도 아직은 줄기가 작고 어리다.
길이 좌우로 나 있어서 소나무에 메 달린 표시기는 방향을 가름하기 애매하여 좌우로 갈라져서
등산로를 찾느라 분주하다.
인삼 밭 중간 산 비탈에 있는 좁은 입구를 발견하고 다시 작은 오름을 거쳐서 우측으로 내려선다.
비로소 시야가 트이고 좌우 시골 마을의 불빛이 보인다.
다시 임도를 만나면서 죄측 능선에 우뚝한 묘 3기를 만난다.
뒷 자리 둥근 묘는 큰 둘레 석을 하여 놓았고 바로 앞으로 4각 둘레 석을 한 묘 2기가 나란하다.
비석에는 慶州 金氏와 儒人 全州 柳氏, 南平 文氏가 뚜렷하다.
묘지 옆으로 쇠로 된 난간이 달린 작은 통로가 나 있다.
지방도로(745번)를 개설하면서 절개를 한 후에 양쪽을 이어주는 동물 이동 통로를 나중에 다시 건설한 것이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실치재이다.(
슬치재, 실치재 이름이 비슷 하지만 그 의미는 같다고 한다.
어둠속에 내려다 보니 절개지는 급경사이고 정맥 2차 구간 서구이재 절개지의 동물 이동 통로와 비슷한 모습이다.
이어지는 임도는 좌우에서 올라오는 작은 임도 사이로 한동안 이어 진다.
길을 찾느라 분주했던 시간이 지나고 평탄한 임도를 만나면서 안정을 찾는다.
우측으로는 상관면 방향 불빛과 전주시내 불빛이 조금씩 빛을 더해 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고 새벽 공기는 다소 차가워도 신선한 느낌은 더 없이 좋다.
뒤돌아 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 반대편 능선을 따라 가로등 같은 불빛이 계속 따라온다.
지역이나 위치로 봐서 00 사단 탄약부대인 것 같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관촌 탄약고라고 부른다고 한다(관촌면 직원설명).
경계 목적으로 능선을 따라 설치한 전등이 길게 늘어져 있다.
저 전등 아래서 경계 근무를 서는 초병들도 우리와 같이 새벽을 열어 갈 것이다.
지루하고 힘들지만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남자들은 저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 사회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부터는 반달 모양의 등산로가 목적지 염암재 까지 이어 갈 것이다.
임도가 끝나고 평탄한 길에서 첫 휴식을 한다.(
눈이 쌓여서 인지 모두들 선채로 휴식이다.
복장을 재 점검하고 따뜻한 음료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니 한결 든든하다.
히말라야 8000m 급 봉우리 9개를 오른 여성 산악인
새겨 들을 필요가 있는 내용이다.
“등반 할 때는 언제가 제일 중요 합니까 ?”
“첫 30분에서 1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 합니다. 워밍업을 해야 하니까 아주 천천히 움직여요.
어느 산을 가드라도 그래요……”
우리 산악회 선두 대장이 꼭 기억하였으면 한다.
작은 오름을 지난후 장재(치)에 도착한다.(
완만한 능선 길, 산비탈을 지나고 군 부대의 경고판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은 폐 포탄을 처리하는 격리된 장소이자 처리 도중에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감안하여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다.
경고판 위치로 봐서 금지 지역은 진행방향 우측 산자락일 것이다.
곧 이어서 눈길에 홀로 서 있는 산불 감시 초소를 만난다.
선두 대장이 펜스 좌측 길을 따라 오라고 무전을 보낸다.
자칫하면 펜스 안쪽 임도가 편안해 보여 거기로 가기 쉬운 곳이어서 무전 내용이 고맙기 그지 없다.
작은 능선을 한 차례 더 지나고 나서 갈미봉(539m)에 오른다.(
먼저 도착한 팀과 합류하여 전원이 같이서 휴식을 한다.
산봉우리의 모양이 비가 오면 갓 위에 쓰는 갈무와 같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역시, 정상 헬기장에 선 체로 휴식을 한다.
밤 하늘의 별이 더욱 총총하다. 그러나 날씨 탓인지 별빛이 시리도록 추워 보인다.
멀리 보이는 탄약고의 불빛도 아직은 졸고 있다..
내려서는 길은 처음으로 만나는 급 경사이다.
눈 아래 쌓인 낙엽이 미끄럽기도 하지만 오히려 발을 편안하게도 하여 주는듯한 느낌이다.
갈미봉을 오르기 전부터 시작한 폐 포탄 처리장 펜스 공사는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 올때까지 이어진다.
안부를 만나서 작은 오름을 오를 때 비로소 치우천왕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고 걸음을 멈춘다.
갈미봉을 오르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쉬고 있던 모습이 힘들어 보였는데 어디서 쉬고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단장님이 “내가 기다렸다가 같이 갈 테니 먼저 가라”고 일행에게 손사래를 친다.
10여분 후에 만나서 같이 가고 있다는 무전이 날라 와서 가벼운 발걸음을 계속한다.
넓고 평탄한 능선이 나타나고 좌우로 희미한 길이 눈 위에 어렴풋하게 보인다.
비닐봉투에 넣어서 나무 가지에 메 달아 논 표시지가 있는 쑥재에 도착한다.(
쑥이 많아서 이름마져 쑥재라고 부쳐진 곳이다.
좌측은 신덕면으로, 우측은 내애리를 거쳐 관촌면 남관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지명도 특이하다.
내애리는 쑥 애(艾)자, 깊은 산골을 상징하는 내內 자를 합쳐서 쑥이 많이 나는 안골 이라는 의미다.
그 아래 17번 국도상의 남관은 조선시대 역관을 운영하던
일제시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이곳보다 약간 위쪽 전주 방향에다 상관으로 명명하고
지금의 上關면 사무소가 되었다 한다. (상관면사무소 직원)
진행 방향으로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산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오르막이다.
미끄러운 눈길을, 몇 번이나 짧은 쉼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 가던 중, 선두 대장의 반가운 무전이 또 날아온다.
“미끄러운 얼음길이 눈 속에 숨어 있으니 아이젠을 착용하라”고 한다.
오늘따라 그때 그때 무전으로 알려주는 내용이 고맙기 그지없다.
중턱에 오르니 비로소 새벽이 걷히고 사위가 밝아온다.
뒤돌아서 보니 저 멀리서 마이산 한쪽귀가 보인다.
검은 구름아래 붉은 햇살을 받아 조금씩 윤곽이 들어난다.
그 좌측으로 눈을 돌리니 지난번 구간 만복산이 선명하다.
가히, 이 지방에서 우뚝한 산인 것을 여기서 보아도 쉽게 판단이 간다.
우측 골짜기에 뱀 처럼 구불 꾸불한 산촌에 가로등이 무수히 이어져있다.
시골 산촌에 무슨 불빛이 저리도 많이 켜져 있을까….?
잠시 후 새벽을 가르는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아하… 지도를 보니 이곳은 죽림온천이 있는 죽림리 이고 기차역도 죽림역이다.
전라선이 지나가고 있는 지역이며 이곳은 전주역에서 불과 3-4정거장 거리다.
정상에 오르니 옥녀봉 갈림길 표시지가 나무에 걸려있다.(
부지런한 붕어잡이님, 조하사, 뭉클님이 벌써 다녀온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좌우를 살피고 있을 즈음 선두대장의 무전이 또 날아온다.
적절한 장소를 찾고 있으나 마땅치 않으니 전방 봉우리(543m,무명봉)를 지나
아래쪽 능선 안부에서 하자고 한다. 이곳 부터는 능선에 오른 탓인지 좌우 칼바람이 제법 매섭다.
전원이 봉우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사이 비탈길을 지나서 아래쪽 안부에서 아침 준비를 한다.
아리아리님 일행이 식사를 시작하는 사이 바람이 약한 사선을 찾아 전나무 숲 아래로서
천년 사랑님, 솔향님과 함께 버너에 불을 피운다.
천년 사랑님이 가지고 온 사골 국물을 덥혀서 함께 하는 식사가 아니었으면 이 아침에 얼어 죽을 뻔 하였다.
윤님씨의 음식 솜씨는 예전부터 부러워해 오던 터라 오늘 아침의 사골 국물 역시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다.
천년 사랑님은 참으로 복이 많은 남자다.
인간이 추구하는 오욕칠정 중에서 하나는 확실히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솔향님이 준비한 커피로 마무리하니 비로소 등이 펴지고 산세가 또렷히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회원님들 표정을 보니 아침 식사를 하였음에도
애플님은 얼굴이 완전히 얼어버린 상태이고 동반자님은 오늘따라 후미로 계속 처지고 걸음걸이가 무겁다.
눈길 산행, 걸음의 폭이 짧아 제자리 걸음 하듯이 하는 것 같아 평소보다 훨씬 더
힘이 들고 걸음수도 많아진다.
미끄러지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 벌써부터 장딴지가
저려오기 시작한다. 식사는 잘 마쳤으나 걱정이 하나 둘씩 밀려온다.
쌓인 눈은 발목을 덮는 수준이라서 큰 장애는 되지 않을것 같다.
전원이 출발하고(
이 길로 선두대장이 지나 갔느냐 ? 우리가 봉우리 사선 길을 통해 제일 먼저 내려 왔는데 우리 앞에는 없었다고 하니….. 봉우리에서 서쪽 방향으로 진행하여야 하는데 라고 독백을 한다.
단장님이 교신을 해 보니 아뿔사… 우측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543m봉우리가 추워서 식사장소를 찾아 급히 안부를 찾아 내려 가다가 착각을 한 것일까…?
공주님과 등산 조아님과 함께….
그러나 봉우리에서 식사를 한 그룹에 확인해 보니 대답이 불 분명 하다.
헤어진 시간을 가름하니 약 1시간이 지났다. 정면에 보이는 경관을 확인하니 호수, 경각산 같은 모습등…
우리가 가는 방향과 비슷하다.
단장님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적절히 탈출하여 불재에서 합류하라고 무전을 보낸다.
불재까지 오는 방법을 상의하니, 도로가 계속 연결되니 오히려 우리보다 빨리 도착 할 것이라고
단장님이 판단을 한다. 이후 교신을 중단하고 진행을 한다.
아기 자기한 능선 바윗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진행을 한다.
우측 멀리 전주시가 윤곽을 들어내고 모악산도 자태를 보인다.
좌측 아래로 전형적인 시골 산촌 마을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제법 높아 보이는 안부에 이르니 비닐 봉투에 효간치孝澗峙라고 표시지가 달려있다.(
우측 아래 동내 이름이 효관 인 것으로 볼 때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이 마을이 자연부락으로 지정이 되어 도회인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다시금 이어지는 급경사 바윗 길이다. 몇 차례 쉬어 가면서정상에 올라서니 넓은 바위가
멋진 남쪽 방향 조망을 선사한다.(전망바위
눈 덥힌 산야가 이리도 곱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다.
손바닥 만한 산촌 학교도 보이고, 교회의 첨탑도 자그만 하게 눈에 들어 온다.
새끼 손가락 끝 매듭으로도 가리워지는 작은 시골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눈을 들어 멀리 남원 방향을 보니 크고 작은 산 자락 사이로 숨어있는 호수가 지천이다.
파도는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높고 낮은 산 마루가 파도를 이루고
그 사이 사이에 들어 앉아있는 산촌이 돛 배 같기도 하다.
시야가 닿지 않는 먼 산 봉우리, 그 정상은 구름인지 눈인지 同色이다
초록 잎에 숨어있는 산자락을 볼 때는 화장을 잘 한 여인 같았으나,
잎을 떨군 겨울 산은 여인의 나체상을 보는 듯 그 느낌도 짜릿하다.
착시 현상이래도 좋고 사실이라면 더욱 좋다.
겨울 산행의 묘미와 조망의 즐거움을 오늘에야 느낀다.
동반자님이 떨썩 주저 앉아 먹을 것을 꺼 낸다.
오늘은 도무지 기운이 없다. 함께 한 도라지님이 없어서 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앓고 누워 있다가 산행에 참여 한 것이라고 솔향님이 일러준다.
출발 전에는 그도 나와 같은 심정 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니 너무 안스럽다 .
그래도 백두대간을 완주 하였는데 이 정도야,,라는 생각에 갈 길을 재촉한다.
한번 더 오름을 이겨내고 경각산鯨角산(659m) 정상에 도착한다(
산 아래 구이면 소재지, 전주에서 보면 고래가 모악산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는 형상으로
고래 머리(등)에 난 뿔을 연상 시킨다 하여 (고래 鯨, 뿔角 )부쳐진 이름이다.
지역 주민들은 이 산을 아버지 산, 모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철조망 울타리 안에 있고 옥외용 스피커와 감시 카메라가 설치 되어있다.
무슨 여유인지 스테인레스 이정표는 철망 안에 자리하고 있다.
거리상으로 지난 온 쑥재는 5km, 앞으로 갈 불재는 1.8km, 구이 저수지 아래쪽 경각사는 1.1km이다.
정상은 헬기장을 겸한 산불 감시 기능이 집중 되어있다.
다시 사위를 둘러보니 이번에는 마이산, 만복산 조망을 한꺼번에 안겨준다.
눈발이 간간히 날려서 먼 거리 조망은 흐려도 가까이 있는 구이면 구이 저수지와 모악산,
그리고 전주 시가지가 선명하다.
전주시는 남쪽 구이면 방향으로 계속 확장되어 이어질 것 같고, 넓디 넓은 서쪽 방향은
신 시가지라고 채송화님이 설명을 한다.
전주시가 이렇게 넓고 평탄한 곳에 자리 한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전주, 이씨 조선을 건국한 태조
호족으로 살았다 한다. 양무는 태조
삶의 거처를 옮기다가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강행하여 조선을 건국한(1392년) 사실은 역사가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전주 이씨 이한의 묘의 지석誌石이 이씨 조선 말기 1899년 전주 건지산 근처에서 발견되어서
비로소 선원璿源을 찾은 것이다. 선원은 임금의 조상을 일 컫는 경어 표현이다.
기린봉에 있는 경기전은
모악산은 정상아래 자리 잡고 있는 쉰길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 같아서 모악산이라 불린다.
사방 팔방으로 뻗어 내린 산 줄기가 마치 어머니의 포근한 품속 같은 모악산은 호남평야의
젓 줄인 동진강, 만경강 사이에 우뚝 솟아 호남평야의 전망대라 할 만하다.
이 산에 있는 전주 김씨의 시조묘는
풍수지리가 손 석우의 책에 의하면 “ 이 묘는 지기가 발목하여 후손이 장기 집권을 하게 되며,
그 운이 49년만인 1994년 9월에 끝난다”고 내용이 예언 되어있다.(실제 사망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사후에 예언된 날짜와 근소한 차이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내리막 길이 이어 지다가 능선에서 멋진 소나무를 만난다.
그 모습이 관상수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 모두들 정기를 받으려는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 구간에서 처음으로 소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 지역이다.
여담을 하는 사이 또다시 기가 막힌 조망을 안겨주는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11;05)
발 아래 구이 저수지가 더욱 선명하고 모악산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먼저 지나간 일행들도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 걸로 봐서 사진을 많이 찍었나 보다.
진행방향 아래로 완만한 소나무 능선과 계곡, 불재에 자리잡은 숯 공장/숯가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소나무 위에 얹혀있는 힌 눈과 초록 소나무 잎이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다.
원근의 즐거움을 안기던 이전의 조망에 비해, 이곳은 아늑한 산 골짜기 평화로운 산촌이다.
크리스마스 노래라도 저절로 울려 퍼질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오늘의 피로가 한 순간에 사라 지는 듯, 아늑한 동화의 나라로 빨려 가는 듯 정겹기 짝이 없는 곳이다.
머물고 싶은 곳이다. 내 마음도 두둥실 저수지와 계곡을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한 걸음에 내려서는 불재는 749번 지방 도로가 관통한다. (
숯가마 건물을 들어 서는데 곱게 늙으신 할머니와 검둥개가 맞이한다.
숯가마 개라서 그런지 털이 온통 거무 튀튀 한 것이 늑대 같다.
뒷 산을 올라 서는데 동반자님의 발걸음이 힘 겹게 옮겨진다.
숯 삼겹살 먹고 쉬었다 갈까…하고 한마디 한다.
그러나 우매한 내가 그걸 깨 닫지 못하고 남은 길을 재촉한다.
활공 장에 오르니 다시금 시야가 깨끝해 진다.(
1차 구간 밀목재 이후에 만나는 활공장(416m), 어쩌면 그곳과 이리도 비슷 할까 ?
활공장 아래 장수읍이 있었고 건너편에는 팔공산이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은 완주군 구이면 소재지가 있고 건너편에는 모악산이 있고…
자그만한 활공장 터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두 그루가 반겨주고 있다.
두꺼비님이 복분자를 꺼내고 안주를 준비하는 동안 눈솔과 공주, 등산조아님이 나타난다.
단장님이 진로 변경하여 불재에서 만나자고 하였는데 되 돌아와서 등산로대로 따라 왔다고 한다.
그 먼 거리를 따라 왔다고…?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더구나 등산 조아님은 금.토 무박 백두 대간을 마치고 바로 정맥에 합류 하였다 한다.
만나서 반가운 마음보다 그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에 할말이 없다.
그러나 선두 대장으로서 책임감이 더욱 발길을 재촉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복장은 정말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눈솔은 시골 약장수 형상이고
등산 조아님은 천상 만주 봉천에서 마적단 하던 모자(수건) 같아 웃음을 머금는다.
오랜만에(?) 만나서 사진 찍고 원기 회복주 마시고 분위기가 살아난다.
분주한 가운데 소나무 아래 비탈에 세운 자그마한 추모비를 읽어보고 머리를 숙인다.
바람내음 맡으며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과 더불어 살다간
1999.5. 전라북도 페러 동우회 일동
활공장 아래를 굽어보니 들판위로는 고압선이 지나가고 좌측은 저수지이다.
날아가는 방향으로 봐서 둘 다 장애물이 될 수도 있겠다.
동반자님도 심호흡을 하고 베낭끈을 조여 맨다.
작은 능선을 두번 오르고 나니 눈이 녹아서 아이젠에 눈이 달라 붙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전원이 아이젠을 벗고 능선 길을 오른다.
눈 앞에 연 이어서 보이는 봉우리 3개에 기가 질린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회원들이 갈 짓자로 걷고, 가다가 서기를 몇 차례나 한다.
장딴지가 쥐가 날 지경이다. 보폭 하나가 겨우 20cm 나 될까….?
눈솔님이 옆길로 빠져서 눈을 감고 서 있는다.
졸려서 진행이 어려우니 눈 좀 부치고 가겠다 한다. 오히려 공주님이 진행이 빠르다.
간식도 음료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끄러운 눈길을 어렵게 치고 올라 능선 3거리에 오른다.(
등산 조아님이 채송화님과 먼저 출발하고 나서도 일행은 더 쉬어 가자고 한다.
뒤 쳐진 눈솔과 공주님에게 소리를 쳐 보니 먼저 가라고 대답한다.
능선에 올라서니 다소 수월하다.
돌담을 쌓은듯한 흔적이 있는 곳을 지나 가면서 선등자의 산행기를 떠 올린다.
이곳이 봉화대 터라고 한다.
1차 구간 사두산 정상에 비껴 서있던 봉화대 터와 비슷한 흔적만 남아 있다.
우측 방향 정상에 오르니 치마산 가는 갈림길이다.(
다시 지도를 꺼내 보니 이것을 지나면 내리막이고, 그 다음이 작은 불재다.
거기서 다시 2-3번의 오름이 있고 지금부터 약 2시간이면 충분 할 것 같다.
그러나 일행에게는 이제 더 이상 오르막은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게으른 여자는 삼 가래(가닥)만 세고
공부하기 싫은 놈은 책장만 센다고 하더니… 남은 길이 얼마냐고 자꾸 묻는 우리도 이와 같다.
헬기장을 지나니 급경사 내리막 길이다. 차라리 미끄러져 내려 가는 표현이 옳은 것 같다.
덕분에 빨리 내려와서 안부를 지나 작은 능선에 도착한다.
이번에는 내가 소리친다. 10분간 휴식. (
출발할 때 휴게소에서 구입한 계란빵과 쵸코렛 한 통을 나눠 먹는다.
그사이 불안한 눈솔님의 무전이 도치에게 날아온다.
공주님도 못 만나고 방향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헷갈리게 한다.
산 그늘 쪽에 있어서 인지 날씨가 어두워 지고 추위를 느낀다.
동반자님과 애플님은 먼저 출발하게 하고 4명이 남아서 연락을 취해본다.
눈솔님의 진행 내용(방향)은 다른 길로 갈 수가 없는 또렷한 길인데,
왜 기다리는 공주님을 만나지 못 하였는지 ?
등산로의 진행 방향을 산세와 주변 경관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데,
왜 꼬리표에 부착된 글귀를 되 뇌이는지… 듣는 우리도 판단이 잘 안 된다. ?
졸린다고 잠시 서 있었는데 아직도 졸리운지...?
계속 송신을 하였으나 지형이 골짜기라서 그런지 송수신이 잘 안된다.
휴대폰은 011을 제외 하고는 잘 터지지 않는다.
두꺼비는 공주님과 교신을 계속 시도 하고 있고 도치님은 무전을 계속 보내지만 한 동안 연락이 안된다.
추운 산속에서 불안한 마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책감도 밀려온다.
기다리던 사이 다시 무전이 개방된다.
지나온 길을 하나 둘씩 복기, 확인 한다.
치마산 갈림길은 지나온 것이 확실하다. 공주님과 둘이서 통화는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공주님은 눈솔과 우리 사이 지점에 있을 것이다.
눈솔님은 산 아래 안부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두꺼비님이 단장님과 송신하고 나서 현 위치에서 탈출을 권한다.
10여분 후에 공주님과 휴대폰으로 통화하고(안부에 내려오니 휴대폰이 터진 것이다)
위치 확인을 위해 호루라기를 불고 응답을 기다린다.
반가운 음성으로 올라서는 공주님은 씩씩하다.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지금이 그런 형국이다.
이유 불문, 안도와 함께 긴장이 싹 가신다.
짧은 시간 이지만 느낀 점이 너무 많았고 실수를 한 것도 후회된다.
피로에, 잠에 지친 사람을 왜 뒤에 혼자 두고 왔는가 ?
두 사람이 왜 만나지 못하였을까…?
10시간이나 지난 시점에, 체력과 간식이 많이 소진된 시점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올것을 왜 생각 못 하였을까 ?
뒤 쳐진 사람들이 통신 수단이 연결이 안 되었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 후미는 반드시 통신수단을 겸한 책임자가 동행하여야 한다.
. 개인은 산행 전에 산행지를 숙지하고 큰 흐름을 알아야 한다.
. 혼자 떨어진 경우 개인별 통신 수단은 반드시 개방(휴대폰을 켜 놓아야) 하여야 한다.
. 교신 시 송수신 요령을 어느 정도 익혀야 할 필요성이 있다.
. 현 위치를 알릴 때 표시기가 없을 경우 지도를 보고 설명 할 수 있거나
주변 지형 지물을 보고 알리는 요령을 익혀야 한다.
. 겨울 산행 시 방한복, 비상 식량을 산행 이후에도 남을 정도로 준비 하여야 한다.
. 무리한 완주 보다는 적절한 탈출이 현명하고 슬기롭다.(탈출을 부끄러워 말자)
-본인의 판단도 중요 하지만, 동행자들이 상황 판단을 하고 건의,확인도 하여야 한다.
출발 준비를 하고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공주님과 함께 작은 불재 뒤편 언덕에서 동반자, 애플님에게 기다리라고 연락을 한다.
후미 중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한 등산조아, 채송화님의 도착을 확인하고,
우리그룹이 너무 늦을 것 같아 상의를 한다.
진행방향 수정을 위해 단장님께 연락을 하고 동성리로 하산을 서두른다.
버스 문을 열고 마주 대하는 단장님, 천년 사랑님과 회원님들 얼굴이 너무도 반갑다.
예약된 식당에 전원이 도착하여 호수가 마당에서 지나온 능선을 올려다 본다.
경각산 자락이 고도를 낮추면서 전망대를 안고 있고
불재를 가로 넘는 국도가 아스라히 산 허리를 감아 돈다.
그 중간에 있는 정각사는 이곳에서는 어렴풋하게 보일 뿐이다.
경각산도 산경표에 의하면 정각산으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산 서쪽에 있는 절도 정각사이다.
불재 오른쪽으로 활공장의 이마가 시원스런 모습이고
경각산의 산 자락은 완만하게 이어 지다가 중간 부분에서 급경사로 치 닫는다.
호수 건너편 작은 능선이 그 이름도 유명한 태봉이다.
조선시대 예종의 胎室태실을 묻은 곳이며 이곳은 좌측 모악산과 전면의 경각산 사이에 자리하여
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소문난 산이다.
구이면은 그 태봉의 정기를 받았다는 구암 마을과 사연이 있다.
태실 앞에서 알을 낳던 거북이가 떨어져서 거북 바위가 되었으며
그 아래 마을 이름은 거북의 형상에 따라 귀동龜洞골 귀암龜岩으로 불렸다한다.
강제로 을사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제에 의해 부르기 쉽게 九岩구암으로 변경 되었고,
귀동골은 구이九耳로 전혀 뜻이 다르게 변경되어 현재까지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의연한 자태의 산세와 그 사이에 자리한 구이면이
더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금수강산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다.
메기 매운탕을 앞에 두고 오늘의 산행을 마친다.
메기 보다는 수재비가 많은 서울 음식보다 진한 맛이 더하다.
좋은 식당을 찾아 준비해 준 운영진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전라도 음식이 맛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제사 본격적으로 그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식당 주인이 서비스하는 황주(?), 복분자(?)의 달찌근한 맛을 느끼면서 많은 가르침을 준
오늘 산행을 복기해 본다.
산행은 경외심을 가지고 임하라는 선배 산악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후기;
. 지명이나 그 유래를 알려준 임실군,구이면,신덕면 관계자에게 감사 드린다.
. 후미 그룹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산행에 대해서 함께 한 회원님들께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보다 재미있고 안전한 산행이 이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첫댓글 상세한 산행기 즐감하고 갑니다..고생들 많으셧군요...
넘 산행기를 자세히 해주신 온누리 부회장님에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따스한 봄날만 있을것 같은 호남지방에도 영하로 떨어진 무박정맥산행이었습니다..... 매서운 칼바람이 볼을 스치는것도 참을수 있었지만 어여쁜공주님이 산속에서 눈솔님과 헤어져서 혼자 헤맬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쭈우욱 끼쳤답니다...함께하신 산우님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년사랑님 아침에 대접받은 곰탕국 건더기도 잘게 찢은것 울엄마가 해준것같은 따스한 음식에 감동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쉽게 들어내지 않은 백금의 가치처럼 온누리님의 산행기는 내면적 기품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써내려 가셨는데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 또 한번의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펴며 이 바위암이 죤님과함께 산행을 하여봅니다
아 맞슴다 서울매기매운탕은 매기보단 수제비가 더 많은걸요^^* 이제야 깨았슴다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너무나 자상하게 잘 정리되어 한편의 소설처럼...파노라마가 쭉 이어 집니다...산행하기도 힘들텐데.....
산행 하시기도 힘드실땐데 정갈하고 실감나는 한편의 소설을 보는것처럼 감명깊은 산행기감하고 갑니다
이렇게 많은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는 온누리님의 산행글을 보면서함께 할수 있음에 .,..축복이고,행복입니다.지리산을 출발하여 지금껏 많은 산행을 함께 하였지만 이번엔 정말 많은것을 배우고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온누리님의 산행기를 읽으며....내 눈은 있으나 마나 라는걸 알게 됩니다. 두눈 똑바로 뜨고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봤으면서도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리도 많은지......섬세하고 해박하고 쫄깃쫄깃한 산행기에 아주 푹~~~ 빠졌습니다.^^
뭉클님의 엮어단~굴비댓글솜씨도 만만치 않아요^^*ㅋㅋ
제눈도 있으나마나였네요... 참으로 정갈하고 지적인 산행기입니다.. 산에 가기전 들떴던 맘처럼 산에 다녀오면 가슴 두근거리며 부회장님 후기 올라오기를 기다리게 됩니다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실감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