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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호
전통시대 동아시아인의 국가 간 인적교류는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갇혀있던 지식인들에게 있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선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외교사절이 되거나 그 일원이 되어 참여하는 것이 유일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행(使行)이야말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는 기회이자 세계를 보는 창(窓)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호에서 사신단이 공식숙소인 옥하관을 중심으로 공물을 납부하거나 황제의 거둥과 조회에 참여하는 등의 공식외교업무 수행 동선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사행에 참여한 조선 지식인들이 연경에서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던 인문유대(人文紐帶)의 현장과 서학(西學)을 경험했던 천주당(天主堂) 등 새로운 학술경향, 서구문물의 접변 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림 1] 북경도성삼가육시오단팔묘전도[北京都城三街六市五壇八廟全圖](부분)
18세기-19세기의 유럽에서 그랜드투어(대여행)가 성행하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으로 일종의 견문여행을 떠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일종의 수학여행입니다. 특히 선택된 이들만이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도 삼사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해외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행단의 일원이 되면, 공식적으로는 외교업무를 수행하였지만, 사적으로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평소 문헌으로 접했던, 동경의 세계, 즉 대국의 풍정을 유람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행활동에 유람, 관광의 기회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행단의 인적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는데요, 바로 자제군관(子弟軍官)입니다. 자벽군관(自벽軍官)이라고도 하는데요, 이들은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삼사(三使 : 정사, 부사, 서장관)의 자제(子弟)나 친지, 지인, 문사 중에서 견문의 목적으로 참여시켜 삼사를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행단의 정관(正官)이 아니었기에 사행단의 일정과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과 유람의 기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했던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과 같은 이들은 연행에 참여하는 일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생각했고, “장유(壯遊)” 라는 표현으로 사행에 참여하는 심경과 기대감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홍대용은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각기 쓸 곳을 점지하는데, 자신 같은 선비에게는 중국여행이나 시키는 모양이다”고 하면서 연행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하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을 펼쳐 보이면서 은근한 기대감을 갖기도 했습니다.
사행단의 삼사(三使)는 숙소인 회동관에서 외교문서의 처리와 의례참석 등 공식일정 수행과 청측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연경 도처의 명승을 유람을 하거나 문화적 체험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사의 자제군관 인사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습니다. 조선 사행이 북경체류기간동안 경험했던 명소는 명・청대 시기마다 다르지만, 청대의 경우 당대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 유리창(琉璃廠)거리 일대였습니다. 지금도 북경을 찾는 많은 외국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관광코스의 한 곳이듯, 18세기 연경의 명소는 단연코 유리창(琉璃廠)이었습니다.
[그림 2] 유리창 서가 입구
유리창은 본래 원대(元代)부터 궁전과 사찰, 묘우의 건축물에 사용되는 유리기와를 굽는 곳이었습니다. 융복사(隆福寺)와 더불어 장시(場市)가 발달하였는데, 특히 청대 들어서 서적, 골동품, 문방사우, 서화를 파는 점포가 늘어나면서 문화상업 지대가 되었습니다. 18세기 건륭시기의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과 맞물려 더욱 번창하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올라온 거인(擧人)들이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머물기도 했던 곳인데, 이곳을 찾는 조선의 사신들과 지식인들과의 조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로를 알아주는 관계, 유리창은 조선과 중국의 문사들이 가장 활발하게 교유했던 공간이었던셈입니다.
[그림 3] 유리창 동쪽 거리
유리창은 강남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서적들이 쌓이는 곳이었습니다. 서책을 구입하는 일은 사행 길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유득공, 이덕무 등 검서관(규장각 소속 관원)은 정조의 명으로 유리창에서 대량으로 서적을 구매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리창 서점 주인들의 인맥과 도움으로 구하기 어려운 서적들을 구입하기도 하는 등 유리창은 서적의 구매활동과 문인들의 인적교류를 통해 당대의 문화정보를 공유하고 습득하는 중요한 문화교류의 창구역할을 했습니다. 유리창 서점의 주인들은 강남에서 올라오고 있는 서책의 물목을 미리 보여주어 조선인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한다거나, 구입한 서책을 멀리까지 마치에 실어 운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유리창 어느 서가에 정돈된 고서적을 바라보노라면 그 옛 적의 정황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아래 사진의 고서적은 유리창 서쪽거리의 중국서점 2층에 있는 고적서점의 고서적 진열 모습입니다. 중국서점은 바로 1770년 무렵 조선인들이 드나들었던 선월루(先月樓)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옛 공간에서 옛 사람들의 행적을 추체험하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유리창 거리에 옛 서책 방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간간히 남아있는 책방의 간판이나 문방사우 가게(店)들이 옛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유리창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장춘사(長春寺)가 있는데요, 장춘사 행랑에 유리창 서책방의 현판들을 모아놓고 있어서 참고가 됩니다.
[그림 4] 유리창 西街 고적서점(古籍書店)의 古書
[그림 5] 장춘사(長春寺) 행랑에 전시된 유리창 서책방의 현판
유리창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서호수, 유득공 등 조선의 북학파 지식인들이 유리창 일대에서 청 문인들과 필담으로 시문을 나누고 사유를 펼치는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들은 상호 관심사인 학술, 문화, 예술, 철학에 이르는 다방면의 담론들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유리창 서점의 번화한 실상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연암은 양매사가의 육일루에서 황포 유세기 등과 교유했는데요, 양매사가는 유리창 동쪽거리의 끝에서 전문대가에 이르는 약 800m거리를 말합니다.
[그림 6] 유리창 인근 양매죽사가.(옛 양매사가)
유리창에서의 조청문인교류사에서 담헌 홍대용의 교유는 두드러집니다. 홍대용은 유리창인근의 건정호동(乾淨胡同, 현 甘井胡同)에서 중국의 지식인인 엄성, 육비, 반정균과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우정을 나누어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삼대(三代)에 걸쳐 이어진 홍대용과 엄성의 교류는 문인교류의 상징이 되었고, 우정론(友情論)의 모범 격이 되었으며, 이후의 문인교류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바로 숨을 거두던 날 저녁이었다. 나를 불러 침상 옆에 앉게 하고는 이불 속에서 홍대용의 서신을 꺼내 읽어달라고 하였다.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또 `조선의 먹'을 갖다달라고 했다. 그는 그윽한 `묵향'을 맡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일하제금합집>(주문조) 序文에 기록된 엄성의 임종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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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건정호동(현 감정호동)의 야경
지금은 옛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유리창 일대를 도시정비의 일환으로 철거하면서 원형을 상실하였습니다만, 지명이 남아있어 역사의 현장임을 알게 할뿐입니다. 담헌 홍대용이 엄성, 반정균, 육비와 필담(筆談) 교류를 위해 7차례나 드나들었던 건정동 천승점(天勝店) 여관은 찾을 길이 없으나 골목어귀에 작은 표석이나 기념물이라도 세워 ‘한중인문교류의 상징 공간’으로 되살리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림 9] 박제가와 나빙의 교류현장 관음사(외경)
박제가 역시 당대 최고의 문사이자 사고전서 편찬의 책임관인 기효람(紀曉嵐)과 교류하였고, 관음사에 기거하는 양주팔괴 나빙(羅聘)과 교류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리창과 인근 호동(골목)에는 이들의 교유 현장인 관음사 옛 터가 남아 있고, 기효람의 옛 집도 일부 복원하여 관광객을 맞고 있습니다.
[그림 11] 기효람이 썼던 지필묵
건륭시기의 <사고전서> 편찬이 마무리되면서 유리창의 기능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유리창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조청 문인들의 교류양상이 19세기 들면 인근의 사찰, 암자 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유리창 인근에 여전히 남아있는 각 성의 회관(會館)을 비롯하여 주변의 사찰 등이 조선 문인들과 청조문인들 간의 교유공간으로 확장됩니다.
관음사, 보국사, 송균암, 연성공저, 법원사(민충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옹방강, 완원과 같은 석학들과 교류하였고, 조선으로 귀국하는 김정희를 위해 법원사 뒷골목의 사공사(謝公祠) 일대에서는 중국의 문인들이 준비한 전별연(餞別宴)이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림12] 보국사 서쪽 행랑의 고염무 사당
[그림13] 보국사 경내에 펼쳐진 좌판 행상.(사찰에서 묘회나 상설 시장이 이루어졌다)
[그림 15] 추사김정희가 다녀간 법원사(민충사)
유리창 일대의 명소 중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중간 유대의 끈이 닿아 있는 송균암(松筠庵)은 독특한 곳입니다. 송균암 역시 지방의 거인들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북경으로 모여들 때 모이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리창 서가의 끝자락에서 멀지않고, 송균암이 있는 달자교호동의 인근에는 각성의 상무회관들이 많이 개설되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송균암은 양초산사(杨椒山祠)라고도 불리는데, 명 가정시기의 관리였던 양계성(杨继盛, 1516-1555)의 옛 집이자 사당입니다. 양계성의 호가 초산(椒山)입니다. 양계성이 관리로 있을 때 조정의 간신 엄숭(嚴嵩)의 발호를 탄핵하는 상소인 <청주적신소(淸誅賊臣疏)>를 올렸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그가 죽은 후 청 건륭52년에 양계성을 기리는 사당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정당인 경현당(景賢堂)이 있고, 북쪽에는 육각정 암자, 서쪽에는 간초당(諫草堂)이 있습니다. 간초당은 이곳을 찾은 문사들이 시회를 연후 자주 연회를 베풀곤 했던 곳입니다.
[그림16] 송균암(양초산사) 산문(정문, 좌)과 육각정 암자(우)
1850년(철종1) 연행의 정사(正使)로 북경에 다녀온 서염순(徐念淳, 1800-1859)을 따라 연행에 참여했던 이희팔(李羲八, 1796-미상)도 송균암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문장과 그림에 능했다는데, 특히 산수화(山水畵)와 인물화(人物畵)에 뛰어났던 모양인지 「소문연수부(蘇文烟樹賦)」와 「산해관 상량문(山海關上樑文)」을 지어 중국 문사들의 조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송균암에서 청나라 문인 왕홍(王鴻, 1806-?) 등과 만나 나눈 필담을 정리한 「소불유묵(小芾遺墨)」이 전하는데, 이 책에는 중국 문인들이 이전에 연경을 다녀간 추사 김정희의 안부를 묻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보아, 연행 길에 연경에서 무시로 교유했던 조・청 문인들의 인문유대(人文紐帶)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17] 송균암 간초당에서 바라본 육각정
이렇듯 조선 지식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의미가 남다른 곳이기도 하지만, 송균암은 중국 근대화를 이끌었던 청년 지사들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청일전쟁(1894년)으로 인해 일본과 불평등한 조건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은 청 조정을 향해 전국의 각 성에서 모여든 젊은 거인들은 양계초(梁啓超, 1873년-1929)와 같은 청년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소위 ‘공거상서(公車上書 : 1895년 연경에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인 전국의 거인들이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의 조인을 거부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주한 상소문)’로 불리는 <만언서(萬言書)>를 통과시켰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송균암은 옛 주인의 의기(義氣)가 면면히 이어지는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양계초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자 <조선망국사략(朝鮮亡國史略)>을 저술하여 조선이 처한 현실을 적시했던 인물이어선지, 아직도 윤곽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육각정과 허물어진 간초당을 둘러보며 송균암이라는 공간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조선의 정치적 이념이야 어찌됐든 그야말로 중국으로의 연행은 실학파들에게는 또 다른 사상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과 열하까지 다녀온 연암 박지원과 같은 이에게는 신세계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유리창 한 귀퉁이에 서서 연행의 목적을 상기하듯 혼자 되 뇌이던 장면을 연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박지원은 북경 연행을 통해 단순히 새로운 견문의 차원을 넘어서서 ‘천하에 자신의 존재를 알아줄 만한 지기를 만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듯합니다. 연암은 유리창 동가의 양매죽사가 육일루라는 주점에서 중국 문인인 황포 유세기 등과 교류하기도 했는데, 이미 유리창일대에는 중국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의기투합되는’ 문사들과의 진정한 교류를 위해 연경의 유리창 거리를 그토록 서성거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사행단이 연경에서 경험하는 놀라운 일중의 하나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목도와 직접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조선후기 연행사신과 지식인들이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주요 통로는 바로 천주당, 관상대, 그리고 서양선교사들을 통해서였습니다. 16세기 무렵 이미 중국에 진출한 선교사들은 황궁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 도서류에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흔적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1605년 무렵 마테오 리치에 의해 남천주당이 세워졌고, 조선에는 이미 그의 <곤여만국전도>가 전래되었습니다. 1653년에는 아담 샬에 의해 동천주당이 세워졌습니다. 명대에 전래된 서양의 학술, 과학의 경향을 가장 먼저 체득한 조선인 역시 사행에 참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림18]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像
1631년에 해로사행을 한 정두원(鄭斗源, 1581∼?)은 산동성 등주(登州)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陸若漢)로부터 화포, 자명종, 망원경을 비롯하여 <천문략>, <건곤체의>와 같은 서양 과학서적들을 유입한바 있습니다만, 좀 더 본격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접한 이는 ‘소현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왕세자인 소현세자(1612~1645, 인조의 맏아들)는 1644년 청의 입관 후 자금성 문연각에서 기거할 때, 선교사 아담 샬과 천주당을 오가며 필담 교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인식하고 있었고, 천주교서적과 천체 관측기구를 조선에 전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림19] 자금성 문연각
[그림20] 북경도성삼가육시오단팔묘전도[北京都城三街六市五壇八廟全圖](부분)
청 입관 후 천주당을 방문한 최초의 기록은 1695년 삼절연공사의 부사인 홍수주의 <연행일록>입니다. 홍수주는 천주당에서 유송령(할레스타인)신부를 만나 벽화와 서양식 기물들을 친견하기도 했는데요, 서양화의 원근법을 본 후, “그림의 기술이 귀신의 경지에 든 것 같다.”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지, 홍대용, 박지원 역시 천주당에서 서양의 악기와 천문과학기술을 목도했는데요, 천주당 방문과 서학접촉에 관한 기록은 1720년에 사행에 참여한 일암(一庵) 이기지(李器之,1690-1722)가 남긴 『일암연기(一庵燕記)』에 좀 더 자세합니다. 사행의 정사(正使)였던 부친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에 참여한 이기지는 천주당을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정도로 서양의 문화에 대한 수용의 자세가 남달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림21] 선무문 남천주당 정문(좌)과 내부(우)
담헌 홍대용 역시 남천주당에 들러 서양선교사이자 흠천감 감정이던 유송령(할레르슈타인), 포우관 등과 교류했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홍대용은 풍금을 보고 직접 연주까지 해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림22] 왕부정가 동천주당
북경에는 남천주당과 동천주당을 비롯하여, 서당, 북당까지 모두 네 곳에 천주당이 있어 사행들이 반드시 들렀던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한동안 천주당 방문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모처럼의 해외 견문과정에서 시천주당과 선교사들을 통한 서학 접변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자극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림23] 관상대 원경
연경에서 새로운 학술경향을 체험하고 서학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관상대(觀象臺)를 방문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던 활동이었습니다. 관상대는 국가 천문기구로서 관상대에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천문관측기구들이 즐비했습니다. 황제의 명이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엄격히 통제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상대를 관람하고자 했습니다만,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림 25] 관상대 옥상의 천문관측기구
홍대용 일행의 경우만 해도 관상대를 견학하기 위해서 관리들에게 인정(일종의 뒷돈)을 줘 보기도 했지만, 출입통제가 엄격하여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다던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천문관측기기는 흠천감(欽天監)에서 관장하는 관상대(觀象臺)에 있었는데, 흠천감의 최고 책임자인 흠천감정(欽天監正)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관상대는 서양과학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사신들이 그토록 관상대를 방문하고자 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마음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관상대 유적은 현재 북경시 동쪽 북경 기차역 인근에 옛 모습대로 남아 있습니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당시 사행들이 관상대 문을 지키는 관원들과 실랑이 하던 장면이 떠오르는 듯도 해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조선 사행단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18세기를 기준으로 조・청 문인들간의 교류공간인 유리창과 그 주변의 교유 공간, 그리고 천주당, 관상대와 같은 서학접변의 공간을 살펴봤습니다. 깊은 사연들이야 좀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여 살펴볼 일입니다만, 여기서는 그 대략의 동선과 공간의 현재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청나라가 무섭게 번창할 만큼 종교적인 측면이나 문화 방면에서 자유롭게 개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를 이어오면서 몽골-티벳 등 주변국과 삼번의 난(三藩之亂)을 평정하고, 내치(內治)를 다지면서 천하를 안정시킨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가 생각해 봅니다.
강희제는 대만, 몽골‧티벳 등을 복속시키고 국경을 확장하는 동시에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내치를 다지는 등 안정을 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미 명대 만력시기부터 利瑪竇(마테오리치)가 북경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서양과의 통교가 시작되었고, 청초(淸初)인 17세기 중엽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장하고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당시 천문관측기구인 관상대의 최고 수장인 흠천감정에 서양 선교사를 임명하여 서구의 천문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하기도 하였던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지식인들이 만나고자 했던 많은 선교사들도 흠천감에 소속된 선교사였고, 이들은 천주교당을 통해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옥하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남천주당은 사신들이 상시적으로 드나들었던 곳이었고, 동당, 서당, 북당 역시 활동 동선 안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림26] 전문대가
사행(使行), 혹은 연행(燕行)은 조선시대 관료사회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해외 체험과 국제정세 인식의 창구로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신단에 동행한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인들이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자각(自覺)의 기회로 작용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며, 이후 조선의 정신사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다음호에서는 연경에서 자주 들렀던 유람공간인 공묘, 국자감, 천단, 오룡정, 역대제왕묘, 사찰 등과 연희, 잡기, 마술 등 중국의 풍속을 경험한 일 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