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世 형부원외랑공의 묘소 역시 오래동안 실전되였었다.
순조 三十一년(1831) 겨울 장단 반룡산 아래에 사는 尹진사가 파주에 사는 二十六世 鎭聃(진담)공(守夢공의 六대 장손) 을 찾아와 잡담 끝에 海平 尹씨가 점거하고 있는 반룡산에서 지석함이 나왔는데 고려시대에는 반룡산이 鄭씨의 선산이었던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이튿날 鎭聃공이 그곳에 가서 석함의 묘지문을 보니 三世 福公공의 지석이 분명하므로 각처에 사는 종인에게 통지하여 이듬해 二월초에 모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