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산 진달래(1), 경남 창원시 북면 * 촬영 올린이 ; 이재익 시인 (2012.04.23)
천주산天柱山 정상은 용지봉이다.
높이 638.8.m
천주산에서 얻은 명구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다.(빅토르 위고)"
천주산 639m
위의 비석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서 적어 봅니다.(학정)
달천정앞에 세우는 문정공(시호) 미수(호) 허목 선생 유적비
허목 선생은 조선 현종 숙종조에 사림의 영수로 도덕과 학문이 백세의 스승이요, 명재상이었고, 인의(仁義)로 왕을 보필하셨다. 1595(선조 28년)~1682(숙종9), 서울에서 태어나고 경기도 연천에서 별세하셨다. 양천 허씨, 고려초 허선문이 시조, 증조는 찬성 허자, 조부는 별제 허단, 부친은 현감 허교. 어머니는 백호 임제의 딸이다.
연세 60이 넘도록 벼슬하지 않고 산수간에 소요하며, 경사에 침잠하고, 경륜을 온축하여 만년에 뜻을 펼친 전형적인 경세유학자이다. 한강 정구 선생의 스승이고, 도산부자(이황 선생)의 학통을 이은 경기 실학의 개창자이다. 잘못된 방례(우리나라 예법)을 바로잡은 예학자. 선진고문의 의법을 체득한 고문의 대가이다.
서예 고전 분야에 독보적 영역을 확립하여, 각처에 선생을 모시는 서원과 사우를 건립하여 숭모한다. 병자호란 직후 1637년부터 1646년까지 10년 동안 의령, 창원 사천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창원에는 선대의 장전(전답)이 있었기 때문에 낙향하여 가난한 선비의 삶을 살면서도 쉬지 않고 경사를 공독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선현들의 유적을 봉심하고 선현들이 남긴 글을 정리하여, 현양하는 등, 교화를 널리 펼쳤다.
대학자로서의 내공으로 만년에 대정치가로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서울로 돌아간 선생은 만년에 숙종 임금의 지우를 입어, 대사헌, 성균관좨주, 이조판서, 우의정 등의 요직에 올라 국가를 일으키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선생의 명망이 경향에 가득하여, 우거했던 달천은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선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동양의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창원의 유림들도 달천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진중이 관리하였고, 계를 모으고, 기금을 마련하여 달천정을 건립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례를 거행해 왔다.
그러나 달천과 관계된 선생의 유적을 정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였다. 지금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후세에도 전해 질 수 있도록 유림 달천정 당장 김기수 총무 김주원 박영창과 선생의 방손 허영회 경회 등 여러분들이 저를 방문하여 비명을 부탁하시므로, 선생의 사적을 서술하고, 명(銘)을 붙여 썼다.
온 나라가 혼탁한데, 구제할 이 그 누굴까? 미수 선생 나셨기에, 선비정신 살아났네. 경사 속에 침잠하여, 깊은 경륜 온축했고, 산 수간을 소요하며 참된 정기 길렀다오. 맑고 밝고 크고 높아, 인간세상 봉황 기린, 도덕학문 문장서법, 위대하신 스승이라. 나라님의 지우 속에, 경세제민 도모하니, 만백성이 흠앙하여, 부모처럼 의지했네. 달천동에 남긴 향기, 세월 속에 또렷하다. 후학들의 전범이니, 정신적인 양식이라. 유적 모아 비석 세워 천추만세 드리우니, 대선생의 가르침이, 우리들을 계도하리.
2008년 무자년 곡우절에 후학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김해 허권수(許捲洙) 근찬
천주산에서 흐르는 달천이라는 계곡수가 있고, 달천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정자 곁에 거북 모양 닮은 우물(구천 龜泉)이 있다.
달천 계곡 물이 참 좋다.
천주산 산신을 모시는 제단
천주산 산기슭의 달천의 야외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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