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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마음은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표출되고 외적인 행위는 내적인 마음에로 지향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적인 행위는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 주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상대편인 '너'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러한 마음에 합당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선생님에게 함부로 행동하고 대한다면, 그 사람이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러한 존경에 합당한 말씨와 행동을 해야한다. 또한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선생님께 대한 나의 존경심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것은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기본관계, 즉 하느님은 창조주, 구원자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면, 그러한 마음가짐에 합당한 예배를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경신례(敬神禮)란 말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인간이 하느님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외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 즉 예배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경신예배의 본질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피조물이고 죄스런 인간이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감사 드리며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예배가 어떤 것이든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가지 측면이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는 계시의 의미이다. 참된 예배는 계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가르침과 신비를 듣고 그 가르침에 순응하겠다고 응답을 해야한다. 둘째는 봉헌의 의미이다. 참된 예배는 봉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모든
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셋째는 친교, 통교의 의미이다. 참된 예배는 하느님과의 친교, 통교를 이루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과 진정으로 만나야 하고 그 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일반적 기도행위나 성사 및 준성사 같은 전례행위는 경신례에
속한다. 특히 이와같은 경신례 중에서도 '기도'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경신례라고 할 수 있다. 참된 경신례는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유지되며 기도로 마무리 되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알고 행하는 것은 중요하다.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 당시 유대인의 기도의 의무와 기도시간을 충실히 지켰으며 병자들과 군중들이 당신 주위에 몰려든 와중에서도 따로 시간을 내시어 기도 하셨다(루가 5,15).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도(루가 6,12), 기쁠 때에도(루가 10,17-22), 괴로울 때에도(루가 22,41-44),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순간까지도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 이것이 그분 생애의 마지막 기도였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행위보다도 그분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분이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임을 깨달았다(루가 9,18-20).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당신 친히 솔선수범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스승이셨다. 우리는 기도자의 완전한 모습을 예수님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명시적이고 정적인 기도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정력적인 활동을 하거나, 피곤할 때 '에이 기도는 뭐 ... 특별히 시간을내서 기도할 필요가 있나?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 하고 말하면서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 조용히 기도할려면 내 마음도 정리를 해야하고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셨다. 그분은 바쁘고 힘든 와중에서도 항상 따로 시간을 내시어 기도하시며 (마르 1,35),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 교회는 기도없이 사는 생활은 '물고기가 물을 떠난 생활과 같다' 전통적으로 가르치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이렇게 교회가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기도가 경신례의 중심이요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란 언제나 말과 형식을 통해서 실천되고 표현되기 때문에 기도없는 신앙표현이란 있을수 없다. 따라서 기도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그렇기에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볼 수 있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고 우리의 그분께 대한 사랑을 더욱 성장시켜 나갈수 있다.
이상적인 기도의 내용을 '주의 기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날 기도하고 계실 때 그분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루가 11,1-4).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것이 '주의 기도'이다. 이 주의 기도가 모든 기도 중에서 첫째가는 이유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로서 가장 완전하고 사심없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주의 기도는 서언과 크게 두 갈래의 청원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하느님의 일에 관계된 내용이고, 후반부는 인간사에 관계된 내용으로서 모두 합하면 일곱개의 청원기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동시에 찬미와 청원, 회개와 용서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실로 모든 기도의 모형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바쳐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기도 바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따라 기도를 바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올바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흠숭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날마다 보호해 주시고 많은 은혜를 주심에 대한 감사이다. 그리고 셋째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이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행복을 구하는간구가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이 모두 포함될 때 비로소 바른 기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기도를 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기도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필요 한 것 만을 달라고 하느님게 요청하는 것은 나의 현세적 이익을 달라는 탐욕스러운 자세로 흐르기 쉽다.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참된 예배일 수가 없고, 따라서 하느님과의 참된 사랑의 교류라 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나만 보면 항상 무엇을 달라고 청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 하겠는가? 그 사람을 귀찮게 생각하게 되고 만나기를 꺼려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사람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은 깨어지게 된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나에게 필요한 것 만을 달라고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말하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올바른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기도 바치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외적인 자세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하겠다.
(1) 마음 자세
기도 바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의 마음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기도자가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기도 바치는 사람은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에 합당한 태도와 자세를 취할수 있게 된다. 둘째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마음이 요구된다.
즉, 기도 바치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구세사를 통하여 드러내 보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셋째는 하느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무슨 이해 관계로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하는 예배이다. 넷째는 자기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외적인 자세
기도 바치는 사람이 올바른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기도를 바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타의(他意)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루에 몇번이고 가능한 자주 하느님께 기도 바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직후와 저녁에 자리에 눕기 직전이다. 또 유혹을 당할 때나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식사 전후에도 기도하기 좋은 순간들 이다. 온 가족이 일터나 학교로 가기전에, 또는 특별히 저녁에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관상기도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관계와 비교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말할 필요없이 그냥 바라만 보아도 상대방의 사랑을 느끼고 좋은 것처럼 관상기도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말이나 생각도 필요없다. 단지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에 머물러서 그분과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
기도가 예배의 가장 보편적 행위라고 한다면 잘못된 기도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경신례에 위반되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기도에 위배되는 행위를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기도를 정성없이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불경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청원을 드리는 사람이 그에 상응한 태도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는 크게 잘못하는 것이다. 정성없는 기도란 태도나 염경이나 마음가짐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둘째는 기도하지 않는 생활이다. 신앙인이라면 자기의 일상이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산다는 일반적 지향을 가져야 하며 항상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데 이를 등한시 하는 것이다. 즉,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태도로써 아침 저녁기도나 생활반성을 주님 앞에서 하지 않는 생활이다. 셋째는 전례생활을 등한시 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조건으로나 하느님의 계명으로 보아서 전례를 통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이와같이 믿는자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신앙의 불성실이나 불충실함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과 의무축일에 교회에서 거행되는 공식기도에 동참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미소한 피조물인 우리들은 이 경신예배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감사드리며 필요한 은혜를 청하게 된다. 경신례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써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경신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은총과 선물을 주신다. 특히 기도는 경신례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중심이 되는 경신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하느님께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감사, 그리고 우리의 잘못에 대한 통회와 간구로 채워져야 한다.
또한 우리가 참된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을 갖고 그 분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뜻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도란? 단순히 기도문을 외움으로써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단지 기도의 한 결과에 지나지 않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기도문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하느님께 바쳐져야 비로소 우리는 참된기도, 온전한 기도를 바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외면은 좋은데 내면은 좋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행동하는 사람인데도 집안에서는 언제나 까다로움을 피우는 사람을 두고 쓰는 말일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어떤 신자가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 바칠 때에는 더없이 경건하고 평온한데 이웃과 가정생활에서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람 자신이 불화의 원인이 될 때 '그는 신앙에 있어서 표리(表裏)가 있는 사람이고 이중 인격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원인이 어디있든지 그런 사람의 예배와 기도는 거짓이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부터 정신적인 큰 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 전체를 간접적인 기도, 말로 표현하지 않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의 실생활과 기도 사이에 분열은 없어야 한다. 마음속에 남에 대한 미움, 노여움, 거절, 경멸, 불신등을 지니고서도 마치 그런 혼란과 기도는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느님께 예배드린다면 그것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또한 하느님을 속이는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중에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너에게 원한 품은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경건한 신앙행위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를 하는 생활을 체험해야만 진정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화해할 수 있고 따라서 그분께 올바른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결코 논리가 아니라 삶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 불안의 씨앗이 되는 일,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일등을 하느님 앞에서 말씀드리자.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일,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는 질투, 분노, 이기주의, 성욕, 실패, 그리고 우리의 부족하고 떪뜨름한 마음 모두를 기도의 재료로 삼으면 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인격의 상처와 같은 것들로서 이러한 면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하느님께 개방적이면 남에게도 개방적일 것이고 하느님께 폐쇄적이면 남에게도 폐쇄적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개방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러한 자신을 인정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성찰하면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 용기와 힘을 주십사고 기도 드릴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꾸준히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참다운 경신례를 드릴 수 있다. 또한 그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최창무, 윤리신학2, 가톨릭대학 출판부, 1989.
2. 이범주, 성령 세미나를 위한 성서공부와 매일묵상, 크리스챤출판사, 1985.
3. 이기정, 교리 전례 용어해설, 가톨릭출판사, 1984.
4. 교리교육 위원회 편수부, 그리스도교 교리강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0.
5. 믿는 이들의 편지 123호.
[출처] 경신례의 의미와 기도생활 |작성자 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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