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과 순교의 일념으로 살았던
주남선 목사(1888-1951)
일제 강점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일본은 자신들의 민족 말살정책에 순종하지 않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신사참배라는 거침돌을 두었다. 이때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킨 믿음의 거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남선 목사이다. 그는 경남지방의 교계 지도자였고, 이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지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겸손과 순교 일념으로 살았던 목회자였다. 부드럽고 겸손한 목회자였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분명한 표준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기에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되어야 할 목회자로 남아있다.
주남선의 젊은 날 이름은 주남고(南皐)였다. 그런데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형무소에 있을 때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미국에 추방된 조지 맥큔(George S. Mccune, 尹山溫, 1873-1941, 이하 윤산온) 선교사가 꿈에 나타나 “주 목사는 이름이 좋지 않아요. 남고라고 하지 말고 남선이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해서 자신의 이름을 남선으로 고쳐 불렀다.
주남선은 1888년 9월 14일 경남 거창군 읍내면 동동(東洞)에서 한학자 주희현과 최두경 사이에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이었던 남재가 어렸을 때 백부댁에 양자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장자인 셈이었다. 한학자의 아들이었던 주남선은 여섯 살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종일 벽을 바라보고 글을 외우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무척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는한학을 배우면서 유교적 가치를 접하게 되었고, 충과 효와 같은 동양적 가치를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몸에 배인 동양적 예모와 어른에 대한 경모, 조국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충의와 정절도 일정 부분은 이런 유가적 가치에서 영향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로부터 배움의 날들은 길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15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아버지가 병들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언젠가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에 사람의 피를 마시면 얼마간은 살 수 있다”는 이웃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주남선은 부엌에 가서 식칼로 자신의 왼쪽 약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숨이 넘어가려는 아버지의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의식을 잃은 채 아들의 피를 몇 모금 삼키던 아버지는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는 듯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하려다 말고 얼마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효행은 거창읍내까지 회자되었고, 이 일로 거창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이만큼 주남선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 우애가 두터웠으며 말수가 적은 조용한 아이였다.
주남선은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농사일을 도왔으나 이것이 생계를 해결해 주는 최선의 방책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1년 9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안의에 있는 잠업실습소에서 잠업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19살 때 비교적 한학에 능하다는 이유에서 군수의 비서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군수는 부사(府使)로서 지방행정 전체를 도맡아 사법행정까지 관장하고 있었다. 군수가 지방을 순시할 때는 모시고 다니며 안내 역할을 하였고, 관청 안에서는 특별비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진실하고 얌전했으며 성실하였기에 군수의 총애를 받았다.
주남선이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1908년 스무 살 때 거창에 장이 선 어느 날이었다. 주남선이 친구 오형선(吳, 1875-1944), 조재룡(曺在龍)과 함께 장터에 갔더니 한 사람이 사과 궤짝 위에 서서 장바닥에 모인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전도인은 거창 장날이 되면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호감을 가지고 들었던 세 사람은 어느 날 전도인을 찾아가 만났다. "선생님, 수고가 많습니다. 좀 여쭤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 뵈러 왔습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고, 죽으면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지요.”
한참 대화를 나눈 끝에 세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예수를 믿어보기로 작정하여 찬송가도 몇 가지 익혔다. 두 친구는 제법 잘 불렀는데 주남선은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들은 금광을 하는 오형선의 사무실에 모여 찬송을 불렀지만 주남선은 여전히 음정이 잘 맞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부르자.” 조재룡의 말에 세 사람은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뽑아내어 담배를 피웠다. "목이 컬컬한데 한잔할까?" 오형선의 이 말에 이들은 찬송을 부르다 말고 술을 마셨다. 이런 식으로 얼마가 지난 후 주남선은 아무래도 예수를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를 믿으려면 잘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해서 되겠습니까? 담배와 술을 끊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모아 집을 하나 사서 주일마다 모이도록 합시다.“
이것이 좋겠다고 화답한 그들은 우선 금광 사무실에서 주일마다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매 주일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소문을 듣고 오형선과 안면이 있던 웅양교회(熊陽敎會) 안덕보 집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안덕보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건축헌금을 제의하였는데, 모두가 찬성하여 25원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거창읍 하동 죽전(竹田)에 초가삼간 한 채를 18원 10전에 매입하고, 1909년 10월 10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거창읍교회 모체가 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자유업으로 신앙생활에 주력하려고 거창군수 비서관직을 그만두고 낮에는 잠업실습소에 나갔고, 밤이면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리고 가슴 속에 복음에 대한 불씨가 솟고 있었던 청년 주남선은, 주일이면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였다.
1911년 잠업 실습소를 수료한 그는 1911년 12월에 호주 선교사 존 맥크레이(Frederick John Learmonth Macrae, 盟皓恩, 1884-1973, 이하는 맹호은)로부터 학습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3년 12월 6일에 맹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맹호은 선교사와 톰슨 켈리(James Thompson Kelly, 吉雅各, 1877-1959) 선교사 등이 거창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여 교세가 차츰 커져갔다.
세례를 받은 후 진주로 내려가 만 3개월 만에 잠업 강습을 마치고 거창으로 돌아온 주남선은 본격적으로 양잠을 시작하면서 농민들에게도 양잠업을 가르쳤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가난한 농촌과 교회를 부강하게 하는 길은 특수기술 노동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13년에 권서(書)가 되어 1916년까지 활동한 주남선은 이 기간에 약 6천여 권의 성경을 거창군 일대에 반포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호주 선교사인 길아각은 그의 권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개월 전에 권서 주남선은 그가 방문한 3개 부락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곳은 여기서 20마일 거리에 있는 산골로 각 부락은 3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첫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매우 적대적이라 복음서 한 권도 팔지 못했다. 두 번째 마을에서는 한 사람이 복음서 한 권을 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라고 강권하였고, 그 결과 40권을 팔았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은 권서가 여관에 묵는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날 밤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밤이 되었다.
권서인으로 활동하던 주남선은 1914년 4월 거창교회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0일 합천 가야 사람으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남병현 씨의 딸 술남() 양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한학자로서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자가 된 남병현은 주남선이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음에도 예수를 잘 믿는 총각이라는 이유에서 호감을 가졌다. 주남선은 1917년 1월 8일에 첫아들 경중(璟重)을 낳고, 같은 해 3월에는 성경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효과적으로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했다.
열심히 공부한 그는 1919년에 성경학원을 마치고, 같은 해 2월 28일에 본 교회에서 장로로 선택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런데 그가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하고 장로가 되던 해인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거창에서 만세운동은 3월 20일에 일어났는 데, 그는 오형선, 고운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8월에는 국권회복운동에 관여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이덕생(李德生), 김태연, 오형선 등과 독립군 자금과 의용병을 모집한 일에 관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동생 주남수는 의용병에 가담하여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殉國)하였다.
그는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모집 사건으로 1921년 1월에 검거되어 약 1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29일 부산감옥 진주분감에서 가출옥하였다. 당시 사건의 책임자였던 주남선은 거창경찰서에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취조실 시멘트 바닥은 애국자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조서와 함께 의성경찰서로 압송된 이들은 이곳에서 더욱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주남선은 손가락 사이에 나무토막을 끼우고 짓누르는 바람에 가운데 손가락 뼈가 부러져 출감한 후에도 글을 잘 쓰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는 명필이었으나 그 후로 글씨가 엉망이 되고, 설교 원고를 쓸 때마다 한참씩 손가락을 만지고는 했다. 의성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대구형무소로 넘어가 1년을 사는 동안에도 지독한 고문을 자주 당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신본주의 신앙과 뿌리 깊은 애국사상은 어떤 고문이나 형벌로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이 기간을 기도에 힘쓰는 한편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한편, 복음을 전하다 죽고 싶었던 주남선은 1919년 12월 16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회집된 제8회 경남노회에 신학공부를 시작하려는 청원을 냈다. 오형선, 김준홍, 한익동, 주학수 등과 함께 신학 입학을 위한 면접을 거쳐 허락받은 그는, 1920년 7월 6일 부산 영주동예배당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9회에서 1920년 장로회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고, 같은 해 입학하였다.
당시 장로회신학교는 3년 과정이었지만 주남선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계속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는 신학교에 계속 다닐 가정 형편이 되지 못해 권서인으로 성경과 찬송, 그 밖에 종교서적을 팔러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집회를 인도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서는 교인들을 가정집에 모아 예배를 인도하여 교회가 서도록 협력했다.
1922년 10월에 교역자로 시무하던 오형선 장로가 사임하자 주남선이 거창교회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주남선은 신학교에 입학한 지 약 10년이 지난 1930년 3월에 장로회신학교 제25회로 졸업했다. 당시 졸업생으로는 23명이었는데, 후일 한국교회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나귀환, 백남주, 이원영, 장윤선 등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1일 건강이 좋지 못해 교회를 사임하게 된 이홍식(李弘植) 목사 후임으로 다시 거창읍교회 교역자로 부름을 받았다.
1930년 9월, 경남노회에서 목사고시에 합격하여 안수를 받은 주남선은 같은 해 12월 7일 윌리엄 커닝햄(Frank William Cunningham, 權任咸, 1887-1981) 선교사가 사회를 본 공동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거창읍교회 위임목사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1931년 2월 22일, 그는 경남노회가 파송한 위임위원 이자익(1879-1959) 목사 주선으로 거창읍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러나 주남선의 목회 생활은 길지 못했다. 1935년부터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6년부터는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는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를 영구화하기 위해 한국교회에 놓은 거침돌이요, 크나큰 시련이었다. 특별히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한국의 영구적인 식민지화를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화 및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무엇보다 일왕(日王)을 신성불가침 존재로 조작하여 ‘아라히또가미’(現神, 육신을 입은 신)라고 떠들어대면서, 신사참배를 통해 교회와 성도들을 정면으로 탄압하였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교리의 부정 내지 신앙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강요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가 약 20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2,000여명이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신사참배 반대로 50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30여 명이 옥중에서 순교했거나 출옥 후 고문과 후유증으로 많이 순교하였다. 1935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주남선은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강하게 반대하였고, 거창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더구나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일본의 신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민족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평소에 입었던 한복이다. 주남선은 위임식 때 교회에서 양복을 선물로 받았지만 언제나 흰 두루마리 한복을 입었다. 그가 한복을 입었던 이유는 자신이 농촌교회를 담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 지방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한복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민족 사상 때문이었는데, 이 사실에 있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사상 때문이지요. 대구형무소와 진주형무소에서 독립운동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의 일을 잊고 싶지 않아서요. 형무소에서 나라 사랑의 마음을 굳히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한복을 입는 거지요. 하루는 중앙에서 일본인 거물급 인사들이 지방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에게 복종하라는 시국강연을 하기 위해 거창에 내려와 지방 유지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공회당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고위 관리가 일본에 충성하라는 요지의 시국 연설을 마치고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우리 대 일본제국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또한 현재 바라는 것이 무엇이요? 무엇이든지 좋으니 말을 해 보시오.
단상 뒤에는 금테를 두른 모자를 쓴 수십 명의 거물들이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몇 명의 경찰들이 서 있었으며, 공회당 밖에도 띄엄띄엄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들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한참 침묵이 흘렀을 때 주남선이 군중 속에서 일어나서 한마디를 했다.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지요.“
”그게 무엇이오!“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람들이 정치를 하지 말고 물러가 주는 것이오.“
연설을 하던 사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둘러앉은 일본인들의 얼굴도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주남선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한층 목소리를 높여 외치듯이 말을 했다.
”이 사실은 나도 원하고 우리 2천만 동포가 다 같이 원하는 바요.“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주남선은 민족의식이 분명했다. 따라서 당시 거창지방에서 덕망 있는 인물이자 교회 지도자였고,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었다. 거창경찰서는 1938년 4월부터 공식적으로 거창읍교회와 주남선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거절하였다. 그해 6월경 그는 거창 가조리(加祚里) 기도실에서 2일간 금식 기도하면서 성경 요한계시록을 수십 차례 읽는 가운데, 신사참배는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거창지역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거창경찰서는 주남선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른바 요주의 인물이었다.
1938년 9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강제로 신사참배 안이 가결되자 경찰서장이 주남선을 불러 말했다. “이제 총회에서도 신사에 참배하도록 정식으로 결의했으니 당신도 거절하지 못하겠지요?” “총회 결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 그럼, 총회의 결의에 따르지 않겠다는 거요!” “총회가 불법으로 결의한 일에 따를 수는 없어요.” 주남선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 이 말이오?” “그렇소.” 서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 거창서장의 명령이오. 오늘부터 당신은 집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오.”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감시 대상이 되었던 그는 일체의 자유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경남노회에서는 주남선에 대하여 거창교회 위임 목사 해제를 통보했다. 그리하여 그는 1938년 9월 당회에 시무 사면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주남선의 시무 사면과 관련하여 1938년 9월 12일에 회집한 거창읍교회 제223회 당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회장이 부득이한 사정에 의지하야 본 교회 시무 사면을 제출한 고로 회중회에서 처결하는 되로 하기로 가결하다.
노회로부터 압력을 받은 거창읍교회에서 사택을 옮길 것을 통보해 옴에 따라 주남선은 말없이 죽전(竹田)에 있는 자택으로 짐을 옮겼으며, 이웃에 사는 조재룡 장로가 틈틈이 얼마간의 양식을 그의 집에 대어 주었다. 주남선의 집 문밖에는 언제나 형사들이 배회하고 있었으며,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경찰서에서는 심심하면 호출하여 주남선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몽둥이 찜질을 하여 피가 취조실 시멘트 바닥을 물들이면 물을 부어 씻어 내리고 또 때리고는 했다. 원래 말이 없었던 주남선은 그래서 더욱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주남선은 거창, 합천, 함양지방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벌였다.
신사참배는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39년 12월 6일 다시 거창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주남선은 1940년 7월 16일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의해 체포되었고, 7월 17일에는 진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압송되었다. 1941년 3월 13일 부산경찰서로, 1941년 7월 11일에는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맹호은 선교사는 1939년 1월 19일자로 호주장로교 선교부 총무인 매튜(Matthew)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사참배 건에 대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한 후, "주남선 목사야말로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이지만 유일하게 일제에 대항하여 싸운다"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라고 하였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시멘트의 어두컴컴한 긴 복도를 지나 36호 방에 인도되었다. 옆방인 37호 방에는 주기철 목사가 갇혀 있었으며, 최권능 목사는 조금 떨어진 33호 방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상동 목사도 이곳에 수감되었다. 주남선의 가족들은 경찰 당국에 의해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동네에서 쫓겨났다. 간단한 짐짝을 짊어지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으로 나와 동네에서 얼마간 떨어진 한채의 흉가 앞에 발을 멈췄다. 이 집은 전날 강주선 목사 부인의 친정으로 집을 비우고 떠나면서 들어가 살아도 된다고 허락해 준 집이었다.
주남선의 부인 남술남 사모는 광주리에 비누와 실, 성냥 따위를 담아 머리에 이고 딸 경은이를 들쳐 업고, 낯선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리와 좁쌀 등의 곡식과 바꿔 식구들의 입을 겨우 풀칠하기에 바빴다. 때문에 산에 올라가 나물도 뜯고 송피(松皮,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나무와 두꺼운 껍질 사이의 연한 속껍질)도 벗겨다가 식량에 보태야만 했다. 송피는 당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최후의 양식이었다.
1940년 7월 일제 검거에서 체포된 주남선은 해방이 된 이틀째인 1945년 8월 17일까지 약 5년 동안 진주, 부산, 평양 등에서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1945년 8월 17일 밤 11시, 일본이 패망을 선언한 지 이틀 후에 주남선은 옥중의 신앙 동지 열네 명과 함께 안이숙 선생의 어머니 댁에서 융숭한 식사 대접을 받고 이튿날 산정현교회에서 이기선 목사의 인도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거창읍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그해 9월에 거창으로 돌아와 거창읍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였다. 7년 만에 처음으로 강단에 선 주남선은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나라 없는 슬픔이 그런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평안하고 형통해지는 길만이 아닙니다. 모딘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 책망도 없이 시작된 그의 설교는 교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주남선의 목회생활은 이렇게 다시 거창읍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이 한국에서의 모든 교파를 해산하고 교단을 통합하는 정책에 따라 1943년 5월 26일에 해산된 경남노회가 해방과 함께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서 경남노회를 재건하는 노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3일 부산진교회에서 개최된 제47회 경남노회에서 주남선이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노회장에 추대된 그는 단위에서 다음과 같이 취임 인사를 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 사람은 형무소 안에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주님만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세월이 지나간 줄도 모르게 살아왔습니다만 여러분은 직접 일본 사람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자니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저같이 말주변이 없고 정치도 모르는 사람에게 옥중성도라는 것 하나 때문에 회장의 중대한 자리를 맡기시니 너무 가슴이 무겁습니다.
출옥 성도 위치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들고 나와 호되게 책망할 줄 알았는데, 위와같은 주남선의 겸손한 인사는 회원들과 방청객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노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무너진 도내의 교회를 재건하는 데 정성과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감격스러운 3.1절 기념행사에서 준비위원들이, 독립유공자 표창을 하기로 했음에도 사양하고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948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창 유지들이 국회의원 후보로 추대하기로 한 요청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게는 주님의 양 떼를 위해 교회를 지키는 것 외에 그 어떤 명예와 영광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 주남선은 노회 일에 주력하는 한편 산정현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다가 모친의 죽음으로 가족과 함께 월남한 한상동 목사와 힘을 합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고려고등학교와 거창성경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특별히 1950년 6.25가 발발했을 때 거창지방 인민위원회가 50명의 살인명부를 작성했는데 첫 번째가 주남선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피난하지 않고, 혼란한 시기에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돌보았다. 그는 공산군들의 총부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교우들을 독려하면서 예배를 계속하였다. 박손혁 목사는 주남선의 장례식에서 행한 약력 소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발생되자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드린 후 피난을 단념하시고 동역자들을 역방(歷訪)하시면서 교회와 양 떼를 사수하기를 권장하시고, 폭탄과 총탄이 비오듯하는 때라도 아직도 남아 있는 교인이 있지 않나 하여 집집이 찾아다니셨고 1951년 새해로 접어들자 주남선의 몸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같은 해 2월 2일에 부산 복음병원에 들러 진찰받은 주남선은 간암으로 판정받은 후 마산에 있는 딸 주경순 집사의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딸의 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난 후 주남선은 거창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양원 목사는 순교를 했는데, 나같은 사람은 순교도 되지 않았어. 순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되지. 나는 원하고 원해도 허락지 않으시니 안 되더군. 결국 내가 원치도 않은 약사발을 들고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니 섭섭하다면 이보다 더 섭섭한 일이 어디 있을까?
주남선은 자동차를 타고 마산에서 거창까지 오는 길에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교인들을 만나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기도하며 격려하였다. 1951년 3월 23일 오전, 주남선은 장로들을 불러 교회를 위한 마지막 부탁을 하고, 오후에는 가족들에게 신앙을 격려한 후 천국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고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평생 소원이 순교였던 그는 순교 직전의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다가 그의 나이 63세에 자택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보는 가운데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거창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동산에 묻힌 그의 무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