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투수가 많은 이닝을 던지지 않는 현대 야구에서 불펜의 비중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ESPN의 한 칼럼니스트는 불펜을 “전 세계적인 불경기 속에서 가장 성장하고 있는 사업”으로 묘사하며 “잘 발달한 산업처럼 야구의 전문화는 가속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날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중간 계투 요원의 대표적인 보직 몇 가지를 살펴본다.
롱 릴리프(long relief): 선발 투수가 일찍 마운드에서 내려왔을 때 긴 이닝을 책임지는 투수. 과거에는 ‘패전 처리’라는 부정적인 명칭으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필요성과 기여도를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짧게는 2이닝, 길게는 4~5이닝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수가 기용된다. 더블헤더나 선발 투수의 부상 등이 있을 때는 대체 선발로 투입되기도 한다. 롱릴리프 가운데에는 몸이 늦게 풀리는 유형의 투수가 많다.
미들 릴리프(middle relief): 경기 중반 1~2이닝 정도를 책임진다. 보통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는다는 목표를 갖고 마운드에 오른다. 때로는 셋업맨의 임무를 겸하기도 한다.
쇼트 릴리프(short relief): 한두 명의 타자를 상대하기 위해 기용된다. 좌타자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좌완 스페셜리스트 또는 우타자에 강점을 보이는 잠수함 투수가 대부분이다. 아웃카운트 1개, 많아야 2개가 목표인 이들은 공 하나하나를 전력을 다해 던져야 한다. 이광환 전 LG 감독은 민원기, 강봉수 등 그리 뛰어나지 않은 좌투수들을 쇼트 릴리프로 기용해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 번트를 저지하기 위해 번트 수비가 뛰어난 투수를 기용하는 감독도 있다.
셋업맨(set-up man): 앞서고 있는 상황이나 동점에서 주로 8회에 투입된다. 팀이 리드한 상태에서 마무리 투수에게 연결하는 일을 한다.마무리 투수가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는 대체 마무리로 기용될 때도 있다. 국내에서는 LG 차동철을 셋업맨의 효시로 보고 있다.
마무리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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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그 라쿠텐의 노무라 가쓰야 명예 감독은 ‘우승팀의 10가지 조건’을 꼽으면서 ‘절대적인 마무리 투수의 존재’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이광환 서울대 감독(2011년)도 LG 시절 우승 팀의 5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로 뛰어난 마무리를 언급한 바 있다.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의 역량이 팀 성적에 그만큼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국내 프로야구를 살펴보면 우승 팀에는 늘 리그 최정상급 마무리가 버티고 있었다. 2010년에도 4강 가운데 가장 마무리가 강한 팀이 우승 팀 SK였다.
마무리는 중요한 만큼 가장 힘든 보직이기도 하다. 여기서 힘들다는 것은 신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신체적으로 보면 마무리는 중간 계투에 비해 나은 편이다. 적어도 마무리는 자신이 언제쯤 등판하게 될지는 알고 있으며 보통의 감독 밑에서라면 1이닝 이상 던질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으로 초점을 옮기면 얘기는 달라진다. 마무리에게는 ‘다음’이 없다. 자신이 얻어맞을 때 뒤에 나와서 막아 줄 투수도 없다. 단 하나의 실투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날 경기 내내 역투한 선발 투수와 팀의 승리와 감독의 심기, 귀가할 때 관중들의 기분이 모두 마무리 투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