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돈오돈수와 돈오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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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무심선원 김태완 정리
1. 머리말
2. 육조혜능의 돈오돈수
3. 선종(禪宗)의 돈오무수(頓悟無修)
4. 대혜종고의 돈오와 비돈제
5. 규봉종밀의 돈오점수
6. 꼬리말
1. 머리말
(죽비를 들고 말한다)
“이것을 죽비라 하면 분별하는 것이고,
죽비가 아니라 해도 역시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이것은 뭐냐?”
퇴옹성철 스님이 돈오돈수가 바른 법이고 돈오점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 이래, 한국에서 선을 수행하는 이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돈오돈수가 옳으냐 돈오점수가 옳으냐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많은 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나타났으며, 그 본래의 취지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선수행자들에게 바른 관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선(禪)의 역사에서 돈오돈수를 처음 언급한 문헌은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법문집인 이고 돈오점수를 처음 언급한 문헌은 육조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의 법을 이었다고 하는 규봉종밀(圭峰宗密)이 배휴(裵休)의 질문에 답하여 저술한 1)(이하 라 약칭)이다. 혜능과 종밀은 모두 깨달음은 돈오(頓悟)라고 말하면서도, 수행에서는 혜능이 점차(漸次)를 부정하고 돈수(頓修)를 주장한 반면 종밀은 점수(漸修)를 바른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왜 이렇게 다른 주장을 했을까? 혜능과 종밀이 말하는 돈오(頓悟), 돈수(頓修), 점수(漸修)의 뜻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라는 이름은 현재 제63책에 들어 있는 문헌의 제목인데, 사실 이 이름은 이 문헌 속에 들어 있는 도판(圖版)을 이르는 이름이다. 고려의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이 문헌의 내용을 요약하고 다시 자신의 견해를 붙인 문헌이 이니, 아마도 이 문헌의 본래 이름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이었을 것이다.
2. 육조혜능의 돈오돈수
(1) 혜능의 돈오(頓悟)
에 의하면 육조혜능은 자신이 경험한 두 번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때 한 손님이 나무를 사고는 여관까지 가져다 달라 하였습니다. 여관에서 손님이 나무를 가져가고, 저는 돈을 받아 문밖으로 나오다가 한 손님이 경(經)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경문(經文)을 한 번 듣자 곧 마음이 열려 깨달았습니다.”2)
“오조(五祖)께서 가사를 가지고 주위를 가로막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시고서 을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는데, 모든 것이 자성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오조께 말씀드렸습니다.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삼라만상을 생산할 수 있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3)
혜능이 경험한 두 번의 깨달음은 모두 에 나오는 구절인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은 것이다. 즉, 혜능이 경험한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닫는다.’라는 뜻으로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하니, 이것이 혜능의 돈오(頓悟)이다. 그리하여 혜능은 자신의 경험에 바탕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진여본성을 문득 보지 않는가? 에 이르기를 ‘나의 본래 자성은 깨끗하다.’고 하였으니, 만약 자기 마음을 알고 자성을 본다면 모두 불도를 이룰 것이다. 에서는 말하기를 ‘즉각 확 열려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한다.’라고 하였다. 여러분, 나는 홍인(弘忍) 스님이 계신 곳에서 한번 듣고서 듣자마자 곧장 깨달아 문득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을 보았다.”4)
“위없는 깨달음은 모름지기 말을 듣자마자 얻으니,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본다.”5)
이처럼 말을 듣고서 곧장 얻는 깨달음을 혜능은 자기 마음의 본성(本性)인 자성(自性)6)을 본다는 뜻에서 견성(見性)이라고 하였다. 본래 깨끗한 자기 마음의 자성(自性)을 문득 보는 견성이 곧 불도(佛道)를 이루는 성불(成佛)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혜능의 돈오(頓悟)는 자기 마음의 진실인 본성을 문득 보는 견성이다.
그러면 자성(自性)은 어떤 것이고 자성을 보는 것은 어떤 것인가? 위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혜능은 두 번째로 깨달은 뒤에 자성이 어떤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자성은 본래 깨끗하다.
②자성은 본래 생멸하지 않는다.
③자성은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다.
④자성은 본래 동요(動搖)가 없다.
⑤자성은 삼라만상을 만들어낸다.
이 밖에 에 나오는 자성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압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입니다.7)
*. 세상 사람의 묘한 본성은 본래 텅 비어서 하나의 법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성(自性)이 진실로 텅 빈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8)
*.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습니다. 만약 얻는 것이 있어서 헛되이 화복(禍福)을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번뇌요, 삿된 견해입니다.9)
*. 진여인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듣고․느끼고․알고 하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성(眞性)은 늘 자재(自在)합니다.10)
*. 만약 어떤 법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성은 본래 허공과 같습니다.11)
*. 선과 악이 나누어져 있지만, 본래 자성은 둘이 없습니다. 둘이 없는 자성을 일러 실성(實性)이라 합니다.12)
*. 만약 자성을 깨닫는다면,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세우지 않고 해탈지견(解脫知見)도 세우지 않습니다. 얻을 수 있는 한 법도 없어야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할 수 있습니다.13)
*.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는 것을 일러 자성(自性)이라 하고, 둘 없는 자성을 일러 실성(實性)이라고 합니다.14)
*. 밝음과 밝지 않음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에 둘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둘 없는 자성이 바로 진실한 자성입니다.15)
자성에 대한 위의 언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이다.
②자성은 텅 빈 공(空)이어서 하나의 법도 얻을 수 없다.
③자성은 경계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다.
둘이 없는 불이법이란 곧 분별할 수 없다는 뜻이고, 분별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텅 빈 공(空)이고, 깨끗하다. 요컨대 자성은 분별하여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니고, 분별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라는 말이다. 즉, 자성은 분별되는 모습인 상(相)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보는 견성(見性)은 무엇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벗어나 불이중도(不二中道)에 통하는 체험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 때문이니,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저절로 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을 분별심(分別心)이라 하니, 분별심을 벗어나면 곧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견성은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체험이고, 불가사의한 체험이다.
견성이 곧 분별을 벗어나 불이법에 통하는 체험이란 사실을 에선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인종(仁宗)이 다시 물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께서는 법을 맡기실 때에 어떻게 가르쳐 주십니까?”
혜능이 말했다.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이 물었다.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불법은 둘 아닌 법입니다.”
인종 법사가 또 물었다.
“불법(佛法)이 둘 아닌 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법사께서 을 강설하시면서 밝게 불성(佛性)을 보시는 것이 곧 불법이 둘 아닌 법입니다. 예를 들면 에서 고귀덕왕보살(高貴德王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16) ‘사중금(四重禁)17)을 범한 자와 오역죄(五逆罪)18)를 지은 자와 일천제(一闡提)19) 등은 마땅히 선근(善根)20)인 불성(佛性)이 끊어진 자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근에는 둘이 있다. 하나는 항상(恒常)함이고, 하나는 무상(無常)함이다. 그러나 불성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니, 이 까닭에 불성은 끊어짐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는 선(善)하고, 하나는 선(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온(五蘊)21)과 십팔계(十八界)22)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압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입니다.”23)
오직 분별을 벗어난 불이법(不二法)인 견성(見性)을 말할 뿐인 것이 곧 선(禪)이고 불법(佛法)임을 천명하고 있다. 둘로 나누어지는 분별을 말하면 불법이 아니다. 따라서 혜능은 불법을 전하려면 사람의 분별심을 막아서 중도(中道)로 이끌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대들이 만약 깨달아 이것에 의지하여 말하고, 이것에 의지하여 사용하고, 이것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것에 의지하여 행동한다면, 우리의 종지(宗旨)를 잃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가 그대들에게 뜻을 묻는다면, ‘있음’을 물으면 ‘없음’으로써 대답하고, ‘없음’을 물으면 ‘있음’으로써 대답하고, ‘범부’를 물으면 ‘성인’으로써 대답하고, ‘성인’을 물으면 범부로써 대답하여, 두 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中道)의 뜻을 내도록 하라.
그대들은 한번 묻고 한번 답하되,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처럼 한다면, 도리(道理)를 잃지 않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무엇을 일러 어둠이라고 하는가?’라고 한다면, 답하기를 ‘밝음이 인(因)이고 어둠이 연(緣)24)이니 밝음이 사라지면 어둡다.’라고 말하여, 밝음으로써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냄으로써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어 중도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나머지 물음도 모두 이와 같다. 그대들은 뒷날 법을 전함에, 이것에 의지하여 번갈아 서로 가르쳐서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하라.”25)
결국 혜능이 말하는 자성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하는 것이 곧 견성이다. 즉, 견성이란 이법(二法)인 분별하는 마음이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不二法)이 되는 것이다. 불이법이 되는 것이란 곧 중도(中道)에 통한다는 말이다. 중도에 통하면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
비유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이쪽과 저쪽으로 분별되는 두 곳만 있다면, 그는 이쪽이나 저쪽으로 넘어질 뿐이고 자전거를 탈 수가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탈 수 있다는 것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곳에서 자전거 패달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은 이쪽과 저쪽을 잘 분별할 수 있지만, 그가 넘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자전거를 탈 때에는 이쪽과 저쪽이라는 분별에서 벗어나 이쪽에도 저쪽에도 머물지 않고 자전거를 탄다.
우리의 마음이 불이중도에 통하는 견성도 이와 같다. 언제나 분별할 줄만 알고 살아온 범부에게 분별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 선지식의 가르침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란 이런 가르침이다. 분별할 수 없는 곳을 지적받은 범부의 마음은 분별하려고 해도 분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장벽에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에 맞닦뜨린 범부는 어느 때가 되면 분별하는 마음이 문득 쉬어지면서 분별을 벗어난 불이중도에 통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견성이란 이렇게 불이중도에 통하는 체험이다. 마음이 이렇게 불이중도에 통하는 것은, 마치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이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능력을 문득 발휘하게 되는 것과 같이,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하는 능력을 문득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돈오(頓悟)이다. 그러므로 돈오한 뒤에는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하니, 머무는 곳이 없고, 분별할 모습이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이 법문(法門)은 원래부터 무념(無念)을 종(宗;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 바탕)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 뿌리)으로 삼습니다. 무상(無相)은 모습 속에서 모습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무주(無住)는 사람의 본성입니다.”26)
견성한 뒤에는 분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당연히 어떤 절차를 거치며 수행해 나아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견성이 곧 불이중도이기 때문에 자연히 절차에 따라 수행해 나아간다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혜능이 돈수(頓修)를 말하게 되는 까닭이 있다.
(2) 혜능의 돈수(頓修)
문득 깨달음과 동시에 문득 수행까지 한다는 의미를 가진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구절이 역사 속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육조혜능(六祖慧能)의 가르침을 기록한 이다. 돈오(頓悟)가 어떤 것인지는 위에서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돈수(頓修)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에는 여러 판본이 있으나, 비교적 초기의 문헌이면서 소략한 내용을 가진 돈황본(敦煌本)과 좀더 후기의 문헌이면서 더욱 완비된 내용을 가진 덕이본(德異本)에 나오는 돈수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겠다.27)
“법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사람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어리석으면 점차 노력하고,28) 깨달은 사람은 문득 닦아서[頓修]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본성(本性)을 본다. 깨달으면 원래 차별이 없다.”29)
“본래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으나, 사람의 성질(性質)에 저절로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점차 계합(契合)30)하고, 깨달은 사람은 문득 닦아서[頓修]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안다. 스스로 본성을 본다면 차별이 없다.”31)
혜능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문득 수행한다는 돈수(頓修)는 깨달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즉, 돈수란 견성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왜 견성한 사람은 돈수일까? 견성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혜능은 밝히고 있다. 견성한 사람은 이미 불가사의한 불이중도에 들어간 사람이니, 이 사람에게는 당연히 어떤 차별도 없는데 어떻게 절차에 따라 점차 수행해 나아가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점에 관해서는 혜능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자성(自性)에는 잘못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으니 순간순간 지혜로써 비추어보고 마땅히 법이라는 분별을 떠난다면, 세울 수 있는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自性)은 돈수(頓修)인데, 점차적인 절차를 세운다면 계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32)
“자성에는 잘못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으니 순간순간 지혜로써 비추어본다면 늘 법이라는 분별을 벗어나 자유자재하여 종횡으로 걸림이 없을 것인데, 세울 수 있는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닦아서[頓悟頓修] 점차적인 절차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고 모든 법이 고요히 사라지는데, 어떤 절차가 있겠느냐?”33)
견성한 사람은 모든 분별을 벗어났으니, 그에게는 어떤 절차도 있을 수 없다. 견성한 사람은 불이중도에 있는 사람이니 어떤 분별도 절차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하여 혜능은 견성한 사람에게는 점차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절차가 없으니, 돈오(頓悟)한 사람은 돈수(頓修)라고 하였다. 그런데 돈수라는 말은 무언가 어색하다. 견성한 사람에게 어떤 절차도 있을 수 없어서 점차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점수(漸修)가 있을 수 없다면 무점수(無漸修) 혹은 무수(無修)라고 해야 할 텐데, 왜 문득 닦는다는 뜻인 돈수라고 했을까?
‘돈수(頓修)’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 의미를 보면, ‘돈(頓)’은 ‘갑자기’ ‘단번에’ ‘문득’이라는 뜻이고, ‘수(修)’는 ‘닦다’ ‘익히다’ ‘기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닦고 익히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즉, 수행(修行)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익힌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修)’는 ‘갑자기’ ‘단번에’라는 뜻인 ‘돈(頓)’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단번에’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깨달음이지 익힘이 아니다. ‘단번에 익힌다’는 뜻인 ‘돈수(頓修)’라는 말은 사실 의미가 이루어질 수 없는 어색한 말인 것이다. 만약 돈수의 의미를, 장구한 세월 동안 이루어질 일이 어떤 신령스런 능력에 의하여 단번에 압축하여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것은 도리어 선(禪)을 기만하는 억지주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에선 돈수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위에 인용한 혜능의 말에서, 견성한 사람에게는 점차적인 절차가 없다는 말이 돈수라는 말에 이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견성한 사람에게는 점수(漸修)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 점수의 상대어인 돈수(頓修)를 사용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돈수의 실제 의미는 무점수(無漸修) 혹은 무수(無修)인 것이다.
그러면 돈수에 이런 부정적인 뜻만 있고 긍정적인 뜻은 전혀 없을까? 에서 혜능은 사실 수행하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에서 혜능은 여러 번 ‘의법수행(依法修行)’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수행하라고 하고 있다. 의법(依法)이란 ‘법처럼’ ‘법과 같이’ ‘법에 따라’라는 뜻으로서 여법(如法)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의법수행(依法修行)’이란 ‘법과 같이 수행하다’ ‘법에 따라 수행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법은 어떤 법일까? 에 다음의 말이 있다.
“이 법을 깨달으면 반야법(般若法)이고, 이 행(行)을 닦으면 반야행(般若行)입니다. 반야행을 닦지 않으면 범부이고, 한 순간 반야행을 닦으면 자신이 부처와 같습니다.”34)
“깊고 깊은 법계(法界)와 반야삼매(般若三昧)35)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반야행을 닦아야 합니다.”36)
이처럼 따라야 할 법은 반야법이고 닦아야 할 행은 반야행이라고 하였으니, 결국 혜능의 수행은 반야(般若)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실 에서는 혜능이 처음 설법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말하는 법이 반야법임을 밝히고 있다.
그때 대사께서 보림사(寶林寺)37)에 도착하였는데, 소주(韶州)의 위거(韋璩) 자사(刺史)가 관료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와, 대사에게 대범사(大梵寺)38)의 강당에서 대중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密法)을 말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40)
“여러분, 모두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생각하십시오.”
“제가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密法)을 말하여 여러분이 각자 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잘 들으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말하겠습니다.”41)
그러면 마하반야바라밀법 즉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무엇인가? 혜능의 말을 보자.
“무엇을 일러 반야(般若)라고 할까요? 반야(般若)라는 것은 당(唐)나라 말로 지혜(智慧)입니다. 모든 곳과 모든 때에 순간순간 어리석지 아니하고 늘 지혜를 행한다면, 곧 반야행(般若行)입니다. 한 순간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 한 순간 지혜로우면 반야가 생깁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반야를 보지 못합니다.”42)
“무엇을 일러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인도(印度)의 말로서, 당나라 말로는 도피안(到彼岸 : 저 언덕에 도달한다)이고, 그 뜻은 생멸(生滅)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니, 마치 물에 물결이 있는 것과 같은데, 이것을 이름하여 차안(此岸)이라고 합니다. 경계에서 벗어나면 생멸이 없으니, 마치 물이 늘 통하여 흐르는 것과 같은데, 이것을 이름하여 피안(彼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밀(波羅密)이라고 일컫습니다.”43)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을 얻어서 세속을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간 사람에게 있는 지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반야행이란 매순간 세속을 벗어난 지혜를 행하는 것이다. 세속을 벗어났다는 것은 분별되는 경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니, 곧 불가사의한 불이중도(不二中道)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반야경에서 두루 밝히고 있듯이 반야는 곧 공(空)이며, 공은 곧 불이중도이다. 그러므로 반야를 행하는 것은 불이중도에 들어는 것이다. 이렇게 불이중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견성이고 깨달음인 것이다.
반야라는 지혜는 견성하여 불이중도에 들어간 사람, 즉 깨달은 사람에게 있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반야행은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으로 얻은 지혜를 행하는 것이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혜능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만약 마음이 어리석어 자성을 보지 못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한다. 네가 만약 마음을 깨닫는다면, 곧 스스로 자성을 보아서 법에 따라 수행(修行)할 것이다.44)
사실 에서 “스스로 깨달아 수행한다.”45)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수행한다.”46) “깨달은 사람은 문득 수행한다.”47)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니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한다.”48)라고 하고 있음을 보아도 수행은 깨달은 뒤에 행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깨달은 뒤에 문득 수행한다는 돈수(頓修)는 무슨 뜻일까? 다음 말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순간순간49) 저절로 본성이 깨끗함을 보면, 저절로 닦고 저절로 행하여 저절로 불도(佛道)가 이루어집니다.”50)
순간순간 저절로51) 견성하는 것이 저절로 하는 수행이고 저절로 이루는 불도라는 말이다. 순간순간 견성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불이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간순간’은 ‘문득문득’과 통하는 말이니 여기에서 돈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순간순간 본성을 보는 것은 문득문득 본성을 보는 것과 같은 말이므로, 순간순간 본성을 보는 것이 수행이라면 이 수행은 문득문득 닦는 돈수라고 할 수 있다.
견성을 체험하여 불이중도에 통하는 것을 앞서 언급한 자전거를 타는 일에 비유하여 말하면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 이쪽이나 저쪽으로 넘어지기만 하던(분별할 줄만 알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면,(이것이 돈오(頓悟)이다) 이렇게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균형감각은 우리 몸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능력(자성은 본래 깨끗하여 분별망상에 오염되지 않는다)이 발휘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매일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줄 아는 그 감각(이것은 자성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이중도인 반야의 지혜이다)을 익혀야(수행이다) 한다. 이렇게 익히는 것은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매 순간순간 넘어지지 않는 그 감각에 의지하여(반야법에 의지하여) 자전거를 탐으로써 그 감각을 익히는(이것이 돈수이다)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매 순간순간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탈 줄 아는 그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음으로서 그 감각을 익히니, 문득문득 수행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 감각을 익히는 것은 우리 몸이 본래 갖추고 있는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므로, 밖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일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고 다만 분별에서 벗어나 불가사의한 그 능력에만 의지하면 저절로 자전거를 넘어지지 않고 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선(禪)을 공부하다가 문득 분별심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하게 되면 모든 분별망상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이 마음이 깨끗해지고 세계가 깨끗해진다. 주관․객관, 나․남, 마음․세계, 안․바깥, 있음․없음 등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고 아무런 경계가 없어서 텅 빈 허공처럼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 불이중도에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득 이렇게 견성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견성의 힘은 약하고 지금까지 익혀진 분별의 힘은 강하다. 즉,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아무 일이 없는 중도에 있는 힘은 아직 약하고, 이전처럼 분별에 끌려다니는 습성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중도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된 사람이 자전거를 매일 타면서 오래도록 익혀야 비로소 잘 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점차적으로 중도에 익숙해지는 것이니 점차로 익힌다는 뜻에서 점수(漸修)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혜능은 왜 돈수(頓修)라고 했을까? 점수라고 하지 않고 돈수라고 한 까닭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견성한 뒤에는 분별을 벗어났기 때문에 어떤 절차를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점수라면 시간을 두고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분별의 의미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점수라는 말을 일부러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견성한 뒤의 공부는 불이중도를 지켜서 불이중도에 익숙해지는 것이지, 더 나은 곳으로 점차 나아가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점수를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반야바라밀은 분별망상에서 벗어나는 불이중도일 뿐이지, 분별망상에서 벗어나 다시 얻어야 할 다른 법은 없다. 공(空),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념(無念), 무원(無願), 무쟁(無諍), 해탈(解脫), 열반(涅槃), 불가사의(不可思議), 불생불멸(不生不滅), 진여자성(眞如自性) 등의 이름들은 모두 불이중도인 반야바라밀을 가리키는 다양한 방편의 이름들일 뿐이지, 다양한 법이 있어서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견성하여 불이중도에 통한 뒤에 다시 점차 나아가서 무슨 새로운 법을 얻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견성한 뒤에는 점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셋째는 견성한 뒤에는 매 순간순간 견성한 자리인 불이중도를 확인하여 불이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부인데, 불이중도에 있느냐 불이중도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것은 매 순간순간의 문제이지, 긴 시간을 들여 점차적으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돈수이지 점수가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견성하여 불이중도에 계합한 뒤의 수행에는 점수보다는 돈수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러나 비록 불이중도에 계합하는 체험을 문득 하였다고 하여도 불이중도에 익숙해지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불이중도를 체험하였다고 하더라도 익숙해지 않았다면 아직 안목이 밝지 못한 것이다.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어도 오랜 시간 동안 타면서 익숙해져야 비로소 두려움 없이 능숙하게 탈 수 있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불이중도에 충분히 익숙해져야 법계의 실상(實相)을 보는 안목도 더욱 밝아지고, 일상의 삶이 늘 불이중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온갖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서도 견성한 뒤에 자성에 의지하여 수행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한 뒤에 견성한 곳에 익숙해지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견성하여도 아직 불이중도에 익숙하지 못하고 아직 안목이 밝아지지 못하여 여전히 망상에 휘둘릴 때에 도리어 더욱 조심하여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분별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분별심에 의지하여 판단할 수 없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아직 불가사의한 지혜의 눈은 충분히 밝지가 못하니, 세간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고 출세간에 들어가긴 했으나 역시 충분히 들어가지 못하여 다시 헤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자칫 경계와 망상에 속아서 다시 삿된 길에 떨어질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견성한 뒤에 방심하지 않고 불이중도의 길을 조심스러이 가면서 익숙해지는 공부를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52)
2) 時有一客買柴, 使令送至客店. 客收去, 能得錢, 却出門外, 見一客誦經. 能一聞經云: ‘應無所住而生其心.’ 心卽開悟.()
3) 祖以袈裟遮圍, 不令人見, 爲說, 至‘應無所住而生其心.’ 能言下大悟, 一切萬法, 不離自性. 遂啓祖言: ‘何期自性, 本自淸淨? 何期自性, 本不生滅? 何期自性, 本自具足? 何期自性, 本無動搖? 何期自性, 能生萬法?’()
4) 何不從自心中, 頓見眞如本性? 云: ‘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云: ‘卽時豁然, 還得本心.’ 善知識,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便悟, 頓見眞如本性.()
5) 無上菩提, 須得言下, 識自本心, 見自本性.()
6) 본성(本性), 자성(自性), 법성(法性), 불성(佛性), 실성(實性) 등은 모두 상(相)에 상대되는 개념인 성(性)을 가리키는 점에서 이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하다. 불교에선 마음과 세계를 설명할 때에 모습으로 분별되는 현상을 상(相)이라 하고 분별되지 않는 본질을 성(性)이라 하여, 상과 성이라는 두 대립 개념을 방편으로 삼아 마음과 세계를 설명한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을 대립시켜 설명하는 방편은 색(色)과 공(空), 사(事)와 이(理), 용(用)과 체(體), 제상(諸相)과 비상(非相) 등도 마찬가지이다.
7) 智者了達其性無二. 無二之性 卽是佛性.()
8) 世人妙性本空, 無有一法可得. 自性眞空 亦復如是.()
9) 自性本無一法可得. 若有所得, 妄說禍福, 卽是塵勞邪見.()
10) 眞如自性起念, 六根雖有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常自在.()
11) 若不思萬法, 性本如空.()
12) 善惡雖殊, 本性無二. 無二之性, 名爲實性.()
13)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14) 無名可名, 名於自性, 無二之性, 是名實性.()
15) 明與無明, 凡夫見二, 智者了達其性無二. 無二之性, 卽是實性.()
16) 이 대화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제20권 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하여 인용한 것이다.
17) 사중금(四重禁) : 사중금계(四重禁戒), 사중(四重)이라고도 함. 4바라이를 말함. 이 계를 범하면 승려의 자격을 잃는데, 다시 비구가 되는 것을 엄금한 계율이므로 중금(重禁)이라 이름. ①대음계(大婬戒)는 온갖 음란한 행위를 금제(禁制)한 것. ②대도계(大盜戒)는 소유주(所有主)가 있는 줄 알면서 훔치는 것을 금제한 것. ③대살계(大殺戒)는 제손으로나 남을 시켜서 죽이는 것을 금제(禁制)한 것. ④대망어계(大妄語戒)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성인이라 하거나 불법을 얻었노라고 속이는 것을 금제한 것.
18) 오역죄(五逆罪) : 오역(五逆), 5무간업(無間業)이라고도 함. 불교에 대한 5종의 역적중죄. ①살부(殺父). ②살모(殺母). ③살아라한(殺阿羅漢). ④파화합승(破和合僧). ⑤출불신혈(出佛身血). ①탑(塔)․사(寺)를 파괴하고 경상(經像)을 불사르고, 3보의 재물을 훔침. ②삼승법(三乘法)을 비방하고 성교(聖敎)를 가볍고 천하게 여김. ③스님들을 욕하고 부려먹음. ④소승의 5역죄를 범함. ⑤인과(因果)의 도리를 믿지 않고, 악구(惡口)․사음(邪淫) 등의 10불선업(不善業)을 짓는 것.
19) 일천제(一闡提) : icchantika 단선근(斷善根)·신불구족(信不具足)이라 번역. 성불(成佛)할 성품이 없는 이를 가리킴.
20) 선근(善根) : 깨달음을 가져오는 좋은 원인. ①좋은 결과를 가져올 좋은 원인이란 뜻. 선행(善行)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한 것. 착한 행업의 공덕 선근을 심으면 반드시 선과(善果)를 맺는다 함. ②온갖 선을 내는 근본이란 뜻.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를 3선근이라 일컬음과 같은 것.
21) 오온(五蘊) : 온(蘊)은 모아 쌓은 것. 곧 화합하여 모인 것. 무릇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을 종류대로 모아서 5종으로 구별. 경험세계를 5가지로 분류한 것. ①색온(色蘊); 스스로 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 ②수온(受蘊); 고(苦)락(樂)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 ③상온(想蘊); 외계(外界)의 사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해 보는 마음의 작용. ④행온(行蘊); 의지에 따라 실행하는 것. ⑤식온(識蘊); 의식(意識)하고 분별하는 것.
22) 십팔계(十八界) : 십팔계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이름. 지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과 각 지각기관의 지각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각각의 지각기관과 지각대상의 접촉에 의하여 생기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육근이라는 지각기관과 육경이라는 지각대상의 접촉에 의하여 육식이 생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육식이라는 지각작용이 있으므로 육근과 육경이라는 경계가 나타난다고 해야 타당하다. 즉, 육식이라는 지각작용이 바탕이 되어 육근과 육경이라는 경계가 만들어진다.
23) 宗復問曰: “黃梅付囑, 如何指授” 能曰: “指授卽無. 唯論見性, 不論禪定解脫.” 宗曰: “何不論禪定解脫?” 能曰: “爲是二法, 不是佛法. 佛法是不二之法.” 宗又問: “如何是佛法不二之法?” 能曰: “法師講涅槃經, 明見佛性, 是佛法不二之法. 如, 高貴德王菩薩, 白佛言: ‘犯四重禁, 作五逆罪, 及一闡提等, 當斷善根佛性否?’ 佛言: ‘善根有二. 一者常, 二者無常. 佛性非常非無常, 是故不斷.’ 名爲不二. 一者善, 二者不善. 佛性非善非不善, 是名不二. 蘊之與界, 凡夫見二, 智者了達其性無二. 無二之性 卽是佛性.”()
24) 인(因)과 연(緣) : 결과를 내는 직접 원인은 인(因), 결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는 간접 원인은 연(緣). 쌀과 보리는 그 종자를 인으로 하고, 노력(勞力)우로(雨露)비료(肥料) 등을 연으로 하여 생긴다. 인연이란 일이 이루어짐에 개별적 실재성은 없고 상호 관계되어 나타나는 상대적인 것들을 가리킴. 연기(緣起)는 인연에 의하여 나타남.
25) 汝等若悟, 依此說, 依此用, 依此行, 依此作, 卽不失本宗. 若有人問汝義, 問有將無對, 問無將有對, 問凡以聖對, 問聖以凡對, 二道相因, 生中道義. 汝一問一對, 餘問一依此作, 卽不失理也. 設有人問: ‘何名爲暗?’ 答云: ‘明是因, 暗是緣, 明沒卽暗.’ 以明顯暗, 以暗顯明, 來去相因, 成中道義. 餘問悉皆如此. 汝等於後傳法, 依此迭相敎授, 勿失宗旨.()
26) 我此法門, 從上以來, 先立無念爲宗, 無相爲體, 無住爲本.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無念. 無住者, 人之本性.()
27) 새로 발견된 돈황신본(敦煌新本)은 돈황본과 내용이 같고, 여타 판본들의 관련 내용은 모두 덕이본과 동일하다.
28) 권(勸) : ①힘쓰도록 권하다. 권장하다. ②타이르다. 가르치다. ③힘쓰다. 노력하다. ④돕다. 도와주다. ⑤빌다. 축원하다. ⑥보다. 관(觀)과 통용.
29)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卽漸勸, 悟人頓修, 識自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돈황본 )
30) 계합(契合) : ①당체와 꼭 들어맞음. 진리에 부합함. ②뜻이 통하다. 마음이 통하다. 일치하다. 통하다.
31) 本來正敎, 無有頓漸, 人性自有利鈍. 迷人漸契, 悟人頓修, 自識本心. 自見本性, 卽無差別.(덕이본 )
32) 自性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當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次, 契以不立.(돈황본 )
33) 自性無非無癡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덕이본 )
34) 悟此法者, 是般若法, 修此行者, 是般若行. 不修卽凡, 一念修行, 自身等佛.()
35) 반야삼매(般若三昧) : 반야(般若)는 지혜, 삼매(三昧)는 정(定). 지혜의 자리에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깨달음과 같은 말.
36) 若欲入甚深法界, 及般若三昧者, 須修般若行.()
37) 보림(寶林) : 보림사(寶林寺). 광동성(廣東省) 소주(韶州) 곡강현(曲江縣) 조계(曹溪)에 있는 사찰.
38) 대범사(大梵寺) : 광동성(廣東省) 소주(韶州)에 있는 사찰인 것 같으나,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여기의 문맥으로 보아 보림사(寶林寺)와 같은 사찰로 보인다. 그런 뜻에서 어떤 이는 대범사(大梵寺)는 특정한 사찰의 이름이 아니라 대사원(大寺院)이라는 뜻인 대범찰(大梵刹)로 보기도 한다. 즉 대사원(大寺院)인 보림사(寶林寺)라는 뜻이다.
39)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 대지도(大智度)대혜도(大慧度)라 번역되며, 모든 법이 다 공(空)이라는 가르침.
40) 時大師至寶林, 韶州韋刺史(名璩), 與官僚入山, 請師於大梵寺講堂, 爲衆開緣, 說摩訶般若波羅密法.()
41) 吾今爲說摩訶般若波羅密法, 使汝等各得智慧. 志心諦聽. 吾爲汝說.()
42) 何名般若? 般若者, 唐言智慧也. 一切處所, 一切時中, 念念不愚, 常行智慧, 卽是般若行. 一念愚卽般若絶, 一念智卽般若生. 世人愚迷, 不見般若.()
43) 何名波羅密? 此西國語, 唐言到彼岸, 解義離生滅. 著境生滅起, 如水有波浪, 卽名爲此岸. 離境無生滅, 如水常通流, 卽名爲彼岸. 故號波羅密.()
44) 汝若心迷不見, 問善知識覓路. 汝若心悟, 卽自見性, 依法修行.()
45) 自悟修行.()
46) 自悟自修.()
47) 悟人頓修.()
48) 自性自悟, 頓悟頓修.()
49) 염(念) : 순간. 극히 짧은 시간. 머리카락 한 올을 세로로 열 등분 내지는 백 등분, 천 등분으로 가른다. 그리고 그 가른 것 하나를 옥판(玉板) 위에 놓고, 날카로운 칼날을 갖다 대어 자른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옥판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이 일념(一念)이다.(竪析一髮爲十分乃至白分千分. 以其一分置玉板上, 擧利刃斷. 約其利刃至板時爲一念也.)()
50) 於念念中, 自見本性淸淨, 自修自行, 自成佛道.()
51) ‘자(自)’에는 ‘스스로’ ‘저절로’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에선 ‘저절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에 알맞다. 자성이 스스로 행하는 것은 분별심에 의한 의도가 개입하지 않은 자성의 자연스런 행이니 저절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알맞다.
52) 견성한 뒤에 반야에 익숙해지는 공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의할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말이 참고할 만하다.
3. 선종(禪宗)의 돈오무수(頓悟無修)
육조혜능의 법을 계승하여 중국 선종(禪宗)의 황금시대를 펼친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석두희천(石頭希遷) 문하의 법은 다만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중도(不二中道)를 말할 뿐, 어떤 수행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중국 선종은 돈오무수(頓悟無修)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선 마조 문하인 홍주종(洪州宗)을 대표하는 마조․백장․황벽․임제의 말을 통하여 그들이 깨달음과 수행을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자.
(1) 마조도일
①돈오(頓悟)
“만약 재질이 뛰어난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53)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달아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불이법(不二法)인 본성을 본다.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통하는 돈오(頓悟)이다.
②무수(無修)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를 닦는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이룬다고 하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聲聞)54)과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하면, 곧 범부(凡夫)55)와 같을 것이다.”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견해(見解)를 내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三界)를 헤아리는 마음56)이 없도록만 하여라.”57)
도는 수행에 속하지 않는다. 다만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에 통할 뿐이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면 이것은 분별하여 조작하는 것이니 중생의 망상이다. 분별망상에 오염되지 않으면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2) 백장회해
①돈오(頓悟)
물었다.
“어떤 것이 대승(大乘)에서 도(道)에 들어가 문득 깨닫는 법[돈오법(頓悟法)]입니까?”
백장이 답했다.
“그대는 먼저 모든 인연을 버리고 온갖 일을 쉬어라.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세간의 온갖 것들을 전부 내려놓아라.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58) 말고, 몸과 마음을 내버리고 자재(自在)하게 되어라.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으면, 입은 말이 없고 마음은 행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허공과 같으면 지혜의 태양이 저절로 나타나니, 마치 구름이 열리고 해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모든 얽매임59)을 모두 쉬어서 탐냄․성냄․좋아함․집착함․더러움․깨끗함 등의 분별심60)이 사라지고, 오욕(五欲)61)과 팔풍(八風)62)을 만나도 보고․듣고․느끼고․알고에 묶이지 않고, 온갖 경계에 정신을 빼앗기지63) 않는 신통묘용(神通妙用)64)이 저절로 갖추어지니, 곧 해탈한 사람이다.”65)
대승불교에서 도(道)에 들어가는 돈오법(頓悟法)이란,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법(不二法)에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돈오법은 곧 모든 분별에서 벗어난 불이법이고 공(空)임을 밝히고 있다.
②무수(無修)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 “닦음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지금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불료의교(不了義敎)의 말씀이고, 차어(遮語)가 아니고, 총어(總語)이고, 한 되를 짊어지는 말이고, 더러운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순유(順喩)이고,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닦아서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요의교(了義敎)의 말이고, 차어(遮語)이고, 별어(別語)이고, 백 섬을 짊어지는 말이고, 삼승(三乘)66)의 가르침 밖의 말이고, 역유(逆喩)의 말이고, 깨끗한 법 쪽을 선택한 말이고, 살아 있는 말이고, 공부의 지위(地位)67)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68)
“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분별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게 알맞은 죽은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하는 살아 있는 참된 말이다. “수행하여 깨닫는다.”거나 “수행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는 말이고, “수행하여 깨닫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거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란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인정하지 않는 말일 뿐만 아니라, 어떤 분별도 절차도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이것이 견성(見性)이고 불이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다만 모든 소리와 색깔을 벗어나고 또 벗어남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으면, 이것이 수행이다.69)
이렇게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한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 것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의 깨달음이다. 결국 참된 수행이란 다만 불이중도의 깨달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니, 깨달음 밖에 따로 수행은 없다.
(3) 황벽희운
①돈오(頓悟)
“다만 곧장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문득 깨달아, 얻을 법이 하나도 없고 닦을 수행이 하나도 없으면, 이것이 위없는 깨달음이고 참되고 변함 없는 부처이다.”70)
“즉각 마음이 없으면 곧장 본래의 법이다. 마치 힘센 역사(力士)가 이마에 박힌 구슬을 잃어버리고 밖에서 찾아다니며 온 세계를 두루 다녔으나 마침내 찾지 못했는데, 지혜로운 사람이 가리켜 주니 그 순간 본래의 구슬이 그대로 있음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71)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하여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72)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데, 마음은 본래부터 언제나 완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즉각 깨달을 수 있고 단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자기 머리를 찾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마음 스스로를 깨닫는 것이므로 깨달음은 언제나 돈오(頓悟)이다. 언제나 분별이 망상이므로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찾을 마음이 따로 없다면 즉각 깨달음이다.
②무수(無修)
“견해의 장애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조사께선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로서 닦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밝음도 어둠도 아님을 곧장 가리키셨다.”73)
“오직 이 한 개 마음 뿐, 얻을 수 있는 법은 티끌만큼도 없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바탕을 깨닫지는 못하고 곧장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니,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고 모습을 붙잡고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악법(惡法)이고 깨달음이 아니다.”74)
“이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니, 모든 모습을 벗어나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마음이 없기만 하면 곧장 마지막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 마음이 없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修行)하더라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75)의 수행76)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77)
“설사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78)
수행은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므로 깨달음이 아니다. 수행하면 깨달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장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분별조차도 없으면 깨달음이니, 마음조차 없어진 깨달음에서 다시 수행할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 임제의현
①돈오
“그대가 한순간 마음에서 의심하는 곳이 곧 부처와 마귀이다. 그대가 만약 온갖 법은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이 환상처럼 조화를 부린다는 것을 밝게 깨달으면, 다시는 하나의 경계도 없고 하나의 법도 없어서 곳곳이 모두 깨끗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와 마귀는 더럽거나 깨끗한 두 가지 경계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다. 깨닫는 자는 곧장 깨달을 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고, 언제든 또 다른 법이 없다. 설사 이것을 넘어서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말한다.”79)
곧장 깨달으면 모든 분별경계는 사라지니, 깨달음도 없고 수행도 없고, 부처도 없고 마귀도 없다.
②무수
“그대들은 곳곳에서 ‘도(道)에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삶과 죽음을 떠돌아다닐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바라밀을 고루 닦는다.’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 없는 사람이다.”80)
“어떤 부류의 눈먼 중들81)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82)을 하며, 흘러나오는 생각을 꽉 붙잡고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나83),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祖師)가 말했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살펴보고,
마음을 들어 밖으로 비추어보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모아서 정(定)에 든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짓이다.’84)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이 사람을 어떻게85) 닦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깨닫겠으며, 이 사람을 어떻게 꾸미겠는가? 이 사람86)은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87)
“스님들이여! 여러 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道)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法)이 있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엇이 부족하길래,88)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인가? … 그러므로 말한다.
‘만약 사람이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만가지 삿된 경계가 다투어 나타난다.
지혜의 칼을 빼면 한 물건도 없으니,
밝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어둠이 밝아진다.’89)
그러므로 옛 사람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90)라고 말했던 것이다.”91)
수행이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는 것이니 헛된 망상이고 엉터리 조작일 뿐이다. 오직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에 통달하여 한 물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을 뿐이다.
53) 若是上根衆生, 忽爾遇善知識指示, 言下領會, 更不歷於階級地位, 頓悟本性.()
54) 성문(聲聞) : 소승의 수행자. 성문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데, 이러한 수행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이룬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사라진다.
55) 범부(凡夫) : 범부는 애초에 깨달음과 공부에 대하여 아무 관심 없이 습관적으로 분별의 세계를 살아간다.
56) 심량(心量) : 중생이 마음에 미혹을 일으켜 갖가지 외계의 대상을 생각하는 것.
57) 僧問: “如何是脩道?” 曰: “道不屬脩. 若言脩得, 脩成還壞, 卽同聲聞. 若言不脩, 卽同凡夫.” 又問: “作何見解, 卽得達道?” 祖曰: “自性本來具足. 但於善惡事中不滯, 喚作脩道人. 居善捨惡, 觀空入定, 卽屬造作. 更若向外馳求, 轉疏轉遠. 但盡三界心量.()
58) 연념(緣念) : 대상을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 대상을 인식하는 것.
59) 반연(攀緣) : ①(물건을) 타고 기어오르다. 붙잡고 기어오르다. ②얽매이다. 집착하다. 관계하다. 매달리다.
60) 정(情) : 식정(識情). 정식(情識). 분별의식. 분별심.
61) 오욕(五欲) : 색욕(色欲)․성욕(聲欲)․향욕(香欲)․미욕(味欲)․촉욕(觸欲) 등 다섯 가지 욕망을 가리키거나, 재욕(財欲)․색욕(色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 등의 다섯을 가리킨다.
62) 팔풍(八風) :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8가지 장애. 이(利)․쇠(衰)․훼(毁)․예(譽)․칭(稱)․기(譏)․고(苦)․낙(樂)을 합쳐 8풍이라 한다. 이(利)는 뜻에 맞는 것, 쇠(衰)는 뜻에 거스르는 것, 훼(毁)는 뒤에서 비방하는 것, 예(譽)는 뒤에서 칭찬하는 것, 칭(稱)은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 기(譏)는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 고(苦)는 신심(身心)을 괴롭히는 것, 낙(樂)은 신심(身心)을 즐겁게 하는 것.
63) 혹(惑) : 현혹(眩惑)시키다. 정신을 빼앗기다. 갈팡질팡하다.
64) 신통묘용(神通妙用) : 신령스러이 통하고 묘하게 작용한다. 걸림없이 자재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말.
65) 問: “如何是大乘入道頓悟法?” 師荅曰: “汝先歇諸緣, 休息万事. 善与不善, 世間一切諸法, 並皆放却. 莫記憶, 莫緣念, 放捨身心, 令其自在. 心如木石, 口無所辯, 心無所行. 心地若空, 慧日自現, 猶如雲開日出相似. 俱歇一切攀緣, 貪嗔愛取垢淨情盡, 對五欲八風, 不被見聞覺知所縛, 不被諸境惑, 自然具足神通妙用, 是解脫人.( 제14권 ‘백장화상(百丈和尙)’)
66) 삼승(三乘) : 세 가지 탈것, 세 가지 입장, 3가지 길을 걷는 자 또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세 가지 실천법을 일컫는다. 승(乘)은 사람을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에 각각 상응하는 가르침 또는 입장으로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라는 3가지 실천 방법을 말한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小乘), 불승(佛乘)으로도 불리는 보살승은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불도를 닦는 모든 사람 또는 입장을 총괄하는 말이기도 하다.
67) 지위(地位) : ①삼현(三賢)과 십성(十聖) 등의 계급. ②보살의 52위 가운데, 제41위에서 50위까지의 십지(十地)를 말함.
68) 說道: “修行得佛.” “有修有證.” “是心是佛.” “卽心卽佛.” 是佛說, 是不了義敎語, 是不遮語, 是總語, 是升合擔語, 是揀穢法邊語, 是順喩語, 是死語, 是凡夫前語. “不許修行得佛.” “無修無證.” “非心非佛.” 亦是佛說, 是了義敎語, 是遮語, 是別語, 是百石擔語, 是三乘敎外語, 是逆喩語, 是揀淨法邊語, 是生語, 是地位人前語.( 제9권 )
69) 但離一切聲色, 亦不住於離, 亦不住於知解, 是修行.( 제9권 )
70) 唯直下頓了自心本來是佛, 無一法可得, 無一行可修, 此是無上道, 此是眞如佛.()
71) 역사액주유(力士額珠喩) : 40권 제7권에 나오는 비유. 본심이 비록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나 여전히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내용. 경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왕가(王家)에 힘센 장사가 있었는데, 그의 미간에는 금강주(金剛珠)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장사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서로 치고받다가 그 장사가 머리로 이 장사의 이마를 받았다. 그 바람에 이 장사의 이마에 있던 구슬이 살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부스럼이 생겼기 때문에 의사를 불러 치료하고자 했다. 그때 처방과 약을 잘 아는 뛰어난 의사는 곧 이 부스럼이 구슬이 몸에 들어간 때문인 줄을 알았다. 이 구슬이 피부를 파고 들어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의사가 장사에게 물었다. ‘당신 이마 위의 구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사가 놀라서 답했다. ‘의사 선생님, 제 이마 위에 구슬이 없습니까? 구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장사는 이것이 꿈이 아니었으므로 근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의사가 장사를 위로하며 일러 주었다. ‘당신은 지금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싸울 때에 구슬이 몸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지금은 피부 속에서 그림자만 밖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신들이 싸울 때에 화가 가득 나 있었기 때문에 구슬이 몸에 박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장사는 의사를 믿지 않고서 말했다. ‘피부 속에 있다면, 더러운 고름이 생겼을 터인데 왜 밖으로 고름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근육 속에 있다면,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찌하여 나를 속이십니까?’ 그때 의사는 거울을 가져와 장사의 얼굴을 비추었다. 구슬이 거울 속에 분명히 나타났다. 장사는 그것을 보고서야 마음에 놀랍고 이상함을 품고서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선남자여, 모든 중생들 역시 이와 같다. 선지식을 직접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불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72) 當下無心, 便是本法. 如力士, 迷額內珠, 向外求覓, 周行十方, 終不能得, 智者指之, 當時自見本珠如故. 故學道人迷自本心, 不認爲佛, 遂向外求覓, 起功用行, 依次第證, 歷劫勤求, 永不成道, 不如當下無心.()
73) 被見障故, 祖師直指一切衆生本心本體本來是佛, 不假修成, 不屬漸次, 不是明暗.()
74) 唯此一心, 更無微塵許法可得. 卽心是佛. 如今學道人, 不悟此心體, 便於心上生心, 向外求佛, 着相修行, 皆是惡法, 非菩提道.()
75) 삼승(三乘) : 세 가지 탈 것. 깨달음을 성취하는 세 가지 길. 수레[승(乘)]은 사람을 태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비유한 말이다.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이라는 3가지 실천 방법을 말한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小乘), 불승(佛乘)으로도 불리는 보살승은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76) 공행(功行) : 공(功)은 수행으로 나타나는 효과. 공행(功行)은 공을 동반하는 행위이니 곧 수행(修行)과 같다.
77) 此心卽無心之心, 離一切相, 衆生諸佛, 更無差別. 但能無心, 便是究竟. 學道人, 若不直下無心, 累劫修行, 終不成道, 被三乘功行拘繫, 不得解脫.()
78) 縱使三祇精進修行, 歷諸地位, 及一念證時, 祇證元來自佛, 向上更不添得一物. 卻觀歷劫功用, 總是夢中妄爲.()
79) 汝一念心疑處是佛魔. 汝若達得萬法無生, 心如幻化, 更無一塵一法, 處處淸淨是佛. 然佛與魔是染淨二境. 約山僧見處, 無佛無衆生, 無古無今. 得者便得, 不歷時節. 無修無證, 無得無失, 一切時中, 更無別法. 設有一法過此者, 我說如夢如化.( 제11권 )
80) 汝諸方言: ‘道有修有證.’ 莫錯. 設有修得者, 皆是生死業. 汝言: ‘六度萬行齊修.’ 我見皆是造業. 求佛求法卽是造地獄業, 求菩薩亦是造業, 看經看敎亦是造業. 佛與祖師是無事人.( 제11권 )
81) 할독자(瞎禿子) : 할자(瞎子)는 장님, 소경. 독자(禿子)는 대머리인 사람, 까까머리 사람. 할독자(瞎禿子)는 눈먼 대머리라는 뜻으로서, 법에 대한 안목이 없는 어리석은 승려를 가리킴.
82) 좌선관행(坐禪觀行) :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아서 정신을 한 곳에 모아 관법(觀法)을 행하는 것.
83) 보지공(寶誌公) 화상(和尙)의 의 「정란불이(靜亂不二)」에서는 “성문(聲聞)은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만을 구하니 마치 밀가루를 버리고 떡을 찾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84) 이 구절은 , 등에 나오는 구절로서,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가 북종선(北宗禪)의 특징을 요약하여 비판한 유명한 말이다.
85) 작마생(作麽生) : 어째서? 왜? 어떻게? 어떠하냐? 무엇하러? =작마(作麽), 즉마(則麽), 자심마(子甚麽), 자마(子麽).
86) 거(渠) : (3인칭 대명사) 그. 그이. 그 사람. =타(他).
87) 有一般瞎禿子, 飽喫飯了, 便坐禪觀行, 把捉念漏, 不令放起, 厭喧求靜, 是外道法. 祖師云: ‘汝若住心看靜, 擧心外照, 攝心內澄, 凝心入定, 如是之流, 皆是造作.’ 是汝如今與麽聽法底人,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 渠且不是修底物, 不具莊嚴得底物.( 제11권 )
88) 흠소(欠少) : 모자라다. 부족하다. 결핍하다.
89) 누구의 게송인지, 임제 자신의 게송인지 알 수 없다.
90) 마조도일(馬祖道一)도 이 말을 하였고(제28권, ), 마조의 제자인 남전보원(南泉普願)도 조주(趙州)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제10권).
91) 道流! 諸方說: ‘有道可修, 有法可證.’ 汝說證何法修何道? 汝令用處, 欠少什麽物, 修補何處? … 所以言: ‘若人修道道不行, 萬般邪境競頭生. 智劍出來無一物, 明頭未顯暗頭明.’ 所以古人云: ‘平常心是道.’( 제11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