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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IOC)가 4년마다 개최하는 국제 스포츠 경기대회. 본래 올림픽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제전경기(祭典競技)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올림피아제(祭)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올림픽은 BC 776년에 시작하여 AD 393년까지 약 1,000년간 계속되었다. 그 후 약 1,500년간 중단되었던 고대 올림픽 경기는 프랑스의 쿠베르탱에 의하여 유서깊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1896년 제1회 대회를 다시 개최함으로써 부활되었다.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교류를 통한 국제 평화의 증진이라는 올림픽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올림픽 경기의 아이디어는 꿈이 아닌 합리적인 정신의 소산이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이 사업의 실현을 위해서 단지 산파 역할을 한 것이지만, 그의 한결 같은 염원은 이 대회가 영원한 성공을 거두어서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이 세계 어느 곳에나 보급되어 온 세계의 청년들이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며 인생에 대한 존엄성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척도는 그 사람이 승리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노력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올림픽 운동은 세계에 하나의 이상을 심어주는 일이며, 그 이상은 바로 현실생활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 미와 교양,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근로, 이상 3가지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쿠베르탱은 올림픽 경기의 이상을 인간의 완성은 물론 세계의 평화에 두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함에 따라 올림픽 경기의 숭고한 정신은 점차 퇴색하여 그간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3번이나 중단되었고, 최근에는 정치적 문제의 개입으로 테러가 일어나는가 하면 대회를 보이콧하는 사례까지 빚고 있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대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2회의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자유진영 국가들이 불참하는 사태를 빚었으며, 제23회 로스앤젤레스 대회는 그 반작용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불참사태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서 냉전으로 인한 분단의 현장인 서울 대회 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과 쿠바 등 몇 나라를 제외한 동․서가 한 자리에 모이는 대축전이 되었으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올림피아제】 〈기원 및 정신〉 고대 그리스의 제전경기는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규모로 많이 개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성대하고 유명했던 것은 이스트미아(Isthmia)․피티아(Pythia)․네메아(Nemea)․올림피아(Olympia) 등 넷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올림피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BC 776년에 시작하여 4년마다 1번씩 모두 293회에 걸쳐 AD 393년까지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이 올림피아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절대신인 제우스 주신(主神)에게 바치는 일종의 종교행사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서부 연안의 올림피아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국가 형태인 여러 개의 폴리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 올림픽 경기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 열리는 때에는 선수와 참관인의 왕래를 돕기 위해 일체의 전쟁행위를 중단하였다.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상품으로 올리브관을 수여했는데, 오늘날의 아마추어 정신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올림피아제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단련은 물론, 온 국민의 단합과 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 근대 올림픽에서도 여러 민족과 국가가 이 행사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경기내용〉 ⑴ 참가선수의 자격:① 순수한 헬라인(人) 남자일 것(야만인과 노예의 참가 불허). ② 배신자나 범법자가 아닐 것. ③ 10개월 이상 체육관에서 연습을 쌓을 것. ④ 대회 1개월 전에 올림피아제에 참가하여 제우스 신전에 기도를 올리고 자격심사에 합격할 것.
⑵ 대회기간:최초에는 하루였으나 황금시대에는 5일간으로 연장했다.
⑶ 경기종목:최초에는 단거리경주 종목뿐이었으나 대회의 발전과 더불어 종목이 추가되어 다음과 같은 것이 실시되었다. ① 단거리경주:191.27 m의 직선코스(1 스타디온)로, 돌기둥을 세워 20개 코스로 구획하여 20명이 동시에 출발할 수 있게 했다. ② 중거리경주:왕복 주로를 달렸는데, 되돌아와서 결승선에 세워진 돌기둥을 돌았다(제14회부터). ③ 장거리경주:주로를 7~24회 왕복하였다(제15회부터). ④ 5종경기:멀리뛰기․창던지기․단거리경주․원반던지기․레슬링(제18회부터)으로 구성되었다. ⑤ 레슬링:제18회 때부터 실시하였다. ⑥ 권투:길이 2 m 정도의 끈을 손에다 감고 상대편이 쓰러지거나 또는 손을 들어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⑦ 4두전차경주: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으나 더러 사고가 일어났다. ⑧ 경마:제33회 대회부터 실시되었다. ⑨ 판크라티온:인기 있던 종목으로, 레슬링과 권투를 합친 것 같은 격렬한 격투기였다. ⑩ 소년경주:제37회 대회부터 소년들의 단거리경주와 레슬링이, 제38회 대회부터는 5종경기가, 제41회 대회부터는 권투가 실시되었다. ⑪ 무장경주:완전무장을 하고 스타디온을 왕복하였다(제65회 대회부터). ⑫ 쌍두전차경주:제93회 대회부터 실시되었다. ⑬ 나팔수․전령경주:제96회 대회부터 실시되었다. ⑭ 소년 판크라티온:제145회 대회 때 1번 실시되었다.
⑷ 승리자 표창:승리자에게는 제7회 대회부터 신목이라 불린 올리브 나뭇잎으로 된 관이 주어졌다. 이때는 모두 일어서서 승리를 축하했으며, 올림피아에는 그의 상이 세워졌다.
⑸ 여성의 참관금지:대회의 참가자격 규정은 매우 엄격하였는데, 그 하나로 여성에 대해서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참관조차 할 수 없었다.
⑹ 고대 올림피아제의 종말:고대 올림피아제는 그리스 사회가 도시국가 간의 패권다툼으로 내란상태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점차로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짙어졌으며, 올림피아 경기도 승리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전문 경기자가 출현하였고, 선수와 심판에 대한 매수행위가 성행하게 되면서부터 차차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의 황제 네로는 제221회 대회를 2년간이나 연기시키고 자기 자신이 올림피아 경기에 참가하여 규정을 어기면서 승리를 강점하고 역대 우승자의 상을 부수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올리브관에 무한한 명예와 영광을 느낀 올림피아 경기의 신성성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더욱이 쇠망한 그리스는 인구가 감소되고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망국적 기풍에 젖어 더 이상 올림피아 경기를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왕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이교(異敎)의 제전인 올림피아 경기는 393년 제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근대 올림픽 경기】 〈근대 올림픽 경기 부활의 배경〉 르네상스에서 이룩된 인문주의운동의 전개는 고대 그리스를 재현하려는 운동으로 나타났고, 이런 사상적 배경은 급기야 올림피아 유적지 발굴로 이어졌다. 근대 그리스는 1829년 터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같은 해 프랑스는 고고학 조사반을 그리스에 파견하여 유적의 일부를 발견하였으며, 그리스는 나름대로 선조의 올림피아제를 되살려서 59년에 대회를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 올림픽 운동이 본격적으로 싹튼 것은 그 후 독일의 클루추스가 81년 올림피아 유적 발굴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고대 올림피아의 제전이야말로 그리스 문화의 근원이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발표하였으며, 올림픽의 위인 쿠베르탱을 탄생시켰다. 쿠베르탱은 군인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나약해진 프랑스 청년의 심신을 강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에 유학하여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이튼 교정에서 꽃핀 스포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청소년의 교육으로 스포츠가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스포츠야말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 세계 청년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89년 프랑스 스포츠 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는 이와 더불어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세계의 청년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우정을 나누게 한다면 이는 곧 세계평화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 올림픽 부활을 제창해 오다가 드디어 94년 6월 23일 국제 스포츠 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올림픽 제의는 유럽 각국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었고, 이들은 제1회 대회를 유서깊은 아테네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근대 올림픽 경기의 정신〉 올림픽의 이상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에 있다. 따라서 올림픽의 표어도 보다 빠르게(Citius), 보다 높게(Altius), 보다 강하게(Fortius)라고 하였다. 또한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쿠베르탱의 말이 올림픽의 이상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올림픽 경기는 해를 거듭함에 따라 많은 변모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1․2차 세계대전으로 3번이나 중단되었고, 최근에는 올림픽이 국가 간의 국력 과시의 전시장으로 변하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국제 정치사회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올림픽의 숭고한 이념마저 오염시켜가고 있다.
【올림픽 헌장】 올림픽 경기대회의 개최에 관한 규정을 정한 것으로서, 1914년 파리의 올림픽 위원회에서 대강(大綱)이 결정되고 21년 로잔의 올림픽위원회에서 제정, 공포되었으며, 그 후 25년과 30년에 일부가 수정되었다. 제1장 근본원칙, 제2장 국제 올림픽위원회, 제3장 국내 올림픽위원회, 제4장 올림픽경기대회, 제5장 올림픽경기대회 부칙의 5장 60조로 되어 있다. 올림픽의 근본원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올림픽경기대회는 4년마다 개최한다. 대회는 모든 나라의 아마추어를 공정․평등하게 경기에 참가시킨다. 대회는 어느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서도 인종․종교 또는 정치상의 이유로 차별대우해서는 안된다(제1조). ② 올림픽경기대회는 1올림피아드, 즉 계속된 4개년으로 일컬어지는 1기(期)를 위한 제전이다. 근대의 제1올림피아드 제전은 1896년 아테네에서 개최되었다. 만약 경기대회를 개최할 수 없었더라도 올림피아드와 경기대회는 96년부터 기산(起算)하여 순번을 정한다(제2조). ③ 올림픽운동의 목적은 청년들에게 아마추어 스포츠의 기조를 이루는 육체적 노력과 도덕적 자질을 일깨워주고, 동시에 4년마다 행해지는 이해관계를 떠난 우호적인 경기대회에 세계의 경기자를 모이게 함으로써 인류평화의 유지와 인류애에 공헌하는 데 있다(제3조). ④ 올림픽경기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은 하나의 도시에 주어지는 것이지, 하나의 국가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경기대회가 개최되는 도시의 선정은 IOC의 전권(專權)에 속한다(제4조). 그러나 1977년 IOC 총회에서 올림픽대회 개최의 영예는 개최되는 하나의 도시에 주어진다라는 근본원칙의 조항을 고쳐 개최의 영예는 국가에 주어진다라고 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88년 대회부터 적용하도록 조문을 개정하였다. 따라서 88년 이후부터는 한 국가의 복수의 도시에서 개최할 수도 있게 되었다. ⑤ 올림픽 동계대회는 올림픽 경기대회와 같은 해에 개최한다. 제1회 올림픽 동계대회는 제8올림피아드에 속하는 24년에 개최되었다. 올림픽 동계대회는 이 해부터 기산하여 개최순으로 순번을 정하며, 올림피아드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제5조). ⑥ 제26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아마추어만이 올림픽경기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제6조). ⑦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국민만이 나라를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다. 대회는 개인간의 경기이며 국가간의 경기는 아니다(제7조). ⑧ 올림픽 경기대회의 개최로 얻은 모든 이익은 IOC에 귀속한다. 따라서 이 이익은 반드시 올림픽 운동의 진흥과 아마추어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제8조). 제26조의 아마추어 규정은 다음과 같다. 올림픽 대회에 선수로 선발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취미와 기호로 스포츠에 전념하고, 그로 인해 물질적 이익을 얻거나 보상을 받거나 요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경우 아마추어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① 현재 및 장래의 생활을 보증하는 기반이 될 수입원을 가지고 있을 경우, ② 스포츠에 참가함으로써 그 조건으로 보수를 받은 일이 없거나 현재도 이를 받지 않고 있는 경우, ③ 각 국제경기연맹의 제규정 및 본조(제26조)의 공식 해석에 따르고 있을 경우이다. 그러나 IOC는 74년의 총회에서 규정의 근본원칙에 대폭적인 수정을 가해 참가자격에서의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올림픽 경기자로 바꾸었다. 동시에 그 자격규정도 아마추어보다 완화되었는데, 참가선수는 그가 소속된 국내 또는 국제경기연맹의 승인 아래 일정한 경제적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올림픽대회의 시기와 기간】 올림픽 정관(定款) 제5장 제52조에 올림픽대회는 그 올림피아드의 최초의 해에 연다(이를테면 제2올림피아드에서는 1900년, 제18올림피아드에서는 64년, 제24올림피아드에서는 88년)고 하였다. 대회는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다른 해로 넘길 수 없다. 제1연도에 열지 않을 때는 그 올림피아드는 대회가 없는 올림피아드가 되며, IOC의 승인 없이는 그 개최도시의 권리도 없어진다. 어느 달에 대회를 개최하느냐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으며, 올림픽조직위원회(Olympic Organizing Committee:OOC)의 제안에 의해서 IOC가 결정한다. 대회의 기간은 개회식을 포함해서 16일 이내로 한다. 만약 일요일에 경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기간을 그 일수만큼 연장할 수 있다. 동계대회는 12일간으로 한다.
【프로그램】 공식 프로그램으로는 육상․조정․농구․복싱․카누․사이클․펜싱․축구․체조․역도․핸드볼․필드하키․유도․레슬링․수영․다이빙․수구(水球)․근대5종․승마․사격․양궁․배구․요트가 있으며, 그 밖에 예술전시(건축․문학․음악․회화․스포츠우표․사진)가 이루어진다. 대회기간 중이나 대회 전 또는 대회가 끝나고 1주일간은 대회 개최지나 그 주변에서 다른 국제경기대회를 열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3대륙 및 40개국에서 남자에 의해 실시되고 있는 경기에 한하여 올림픽 대회의 프로그램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여자는 2대륙 25개국). OOC는 그 나라의 독특한 경기와 외래경기 하나씩을 데몬스트레이션(시범경기)으로서 추가할 수 있다. 단, 이들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올림픽 메달을 수여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경기는 대회를 초치하는 단계에서 IOC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그 후에는 변경할 수 없다. IOC는 국제경기연맹(ISF)과 협의하여 각 경기의 실시종목을 결정한다. 단체경기에서는 그 참가 신청국을 6개국 이상 16개국 이하로 한다. 또한 경기는 1위부터 6위까지가 결정되었을 때 끝난다. ISF는 필요할 경우 대회가 열리기 전에 신청팀 수를 16개 팀으로 줄이지 않으면 안된다. IOC는 어떤 경기 어떤 종목이라도 프로그램에서 제외할 수 있다. IOC는 국제적으로 부적당한 경기, 또는 독자적 판단으로 올림픽 규정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지 않은 경기는 제외시킬 수 있다.
【성화 릴레이와 선서】 그리스 올림피아의 성스러운 의식에서 점화된 횃불을 릴레이하여 개회식장으로 옮겨오는 것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횃불을 올림픽 성화라고 부른다. 비둘기가 날고 3발의 축포가 울린 직후 최종 주자가 성화를 들고 대회장에 도착하여 트랙을 일주한 다음 성화대에 점화한다. 이어 개최국의 선수 1명이 자기 나라의 기수와 함께 단상에 올라 왼손으로 기의 한 끝을 쥐고 오른손을 들어 선서를 한다. 이 때 참가 각국의 기수는 단 주위에 반원을 그려 선다. 성화는 올림픽이 펼쳐지는 대회기간 중 타오르게 된다.
【하계대회】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는 IOC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연령 제한이 없으며 여성도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요건이고, 흥분제 복용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올림픽 경기자는 IOC 의무분과위원회의 규칙에 따라 의무통제 및 검사를 받아야 한다.
〈제1회 대회〉 ① 개최년:1896년 ② 장소:아테네(그리스) ③ 참가국:13개국 ④ 경기:10개 종목 ⑤ 참가인원:311명. 경기는 100 m 예선부터 시작되었다. 옛 그리스의 영광을 찬양하여 종목으로 채택된 마라톤에서 그리스의 루이스가 우승하여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루이스의 승리로 상기된 그리스 국민들이 올림픽이야말로 선조의 유업이기 때문에 계속 그리스에서 개최되어야 한다고 여러 번 IOC에 제안하였으나 쿠베르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6년 특별대회를 1번 개최하였다.
〈제2회 대회〉 ① 개최년:1900년 ② 장소:파리(프랑스) ③ 참가국:21개국 ④ 경기:14개 종목(그 중 2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1,088명.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때마침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정신이 집중되어 쿠베르탱이 대회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대회는 엉망이 되었다. 심지어 박람회 주최자들은 올림픽대회를 박람회에 흡수하여 만국박람회 국제경기대회라며 쇼처럼 선전하기까지 하였다. 대회 개막 직전 박람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겨우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메달도 훗날에 우송하였다.
<제3회 대회> ① 개최년:1904년 ② 장소:세인트루이스(미국) ③ 참가국:21개국 ④ 경기:12개 종목(그 중 2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496명. 이 대회도 박람회의 부수적인 행사가 되었는데, 거리와 파견비용 관계로 참가자의 수가 극히 적어서 마치 미국의 국내대회와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참가선수 496명 중 독일 20명, 그리스 13명, 헝가리 11명 등 외국선수는 모두 65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미국선수였다. 특기할 것은 이때만 해도 흑인이나 미개인의 올림픽 출전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체육회에서는 연구자료로서 인디언과 미개인종을 테스트하는 인류학의 날을 2일간에 걸쳐 열었는데, 이는 곧 후일에 유색인종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제4회 대회〉 ① 개최년:1908년 ② 장소:런던(영국) ③ 참가국:22개국 ④ 경기:20개 종목(그 중 6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2,070명. 지금까지의 대회와는 다르게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경기운영을 한 대회였다. 종래에는 개인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이 대회부터는 국가를 대표해서 국기를 앞세우고 참가했다. IOC의 기초가 확립된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대회경비 관계로 만국박람회와 함께 열었으나 종전처럼 박람회의 영향은 받지 않았다.
〈제5회 대회〉 ① 개최년:1912년 ② 장소:스톡홀름(스웨덴) ③ 참가국:28개국 ④ 경기:14개 종목(그 중 1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2,561명.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IOC의 권위와 운영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근대 올림픽대회가 충실기(充實期)인 제2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개최국의 정부와 개최도시가 대회경비를 부담하였고 찬조금도 공식화되었다. 1914년 6월 23일이 근대 올림픽 부활 2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파리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고, 이 자리에서 쿠베르탱이 고안한 5개의 링을 이은 오륜기를 올림픽의 심벌로 채택하였다.
〈제6회 대회〉 16년 베를린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
〈제7회 대회〉 ① 개최년:1920년 ② 장소:안트베르펜(벨기에) ③ 참가국:29개국 ④ 경기:19개 종목(그 중 2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2,655명. IOC는 전쟁 피해를 입은 벨기에의 청년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선물하는 뜻에서 제7회 대회를 벨기에에서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대회에서 처음 흰 바탕에 청․황․흑․녹․적색의 원을 고리 모양으로 그린 5륜기가 대회장에 나부끼게 되었다.
〈제8회 대회〉 ① 개최년:1924년 ② 장소:파리(프랑스) ③ 참가국:44개국 ④ 경기:19개 종목(그 중 3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3,211명. 파리 교외에 신설된 7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에서 거행되었는데, 독일은 초대하지 않았다. 이 대회부터 동계대회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고 제1회 동계대회를 샤모니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의 명물은 확성기였고, 소규모의 선수촌이 생겼다.
〈제9회 대회〉 ① 개최년:1928년 ② 장소:암스테르담(네덜란드) ③ 참가국:46개국 ④ 경기:16개 종목(그 중 1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3,234명. 처음에는 국민들의 반대로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했으나 언론의 힘으로 차차 여론이 좋아져 대회를 치르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특히 경기장의 마라톤탑에 확성기를 달아놓고 탑 위에는 커다란 돌접시를 얹어, 이 돌접시에 불을 피워 대회기간 동안 계속 타게 하였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 성화의 기원이 되었다.
〈제10회 대회〉 ① 개최년:1932년 ② 장소:로스앤젤레스(미국) ⑧ 참가국:38개국 ④ 경기:16개 종목(그 중 2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1,366명. 우선 시설면에서 사상 최대였으며, 로스앤젤레스 도심에 설치된 올림픽 파크가 미국의 국력을 과시하였다. 비록 일장기를 단 채였으나 한국 선수가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이기도 하다. 3명의 선수가 출전하였는데, 마라톤에서 김은배(金恩培) 선수가 6위,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9위를 하였고, 복싱의 황을수(黃乙洙) 선수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선전하였다.
〈제11회 대회〉 ① 개최년:1936년 ② 장소:베를린(독일) ③ 참가국:49개국 ④ 경기:21개 종목(그 중 4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4,308명. 독일의 나치스는 처음에는 올림픽대회를 배격하였으나 후에 히틀러 자신이 대회 총재가 되고부터는 나치스 독일의 우월성을 세계에 자랑하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여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에서 비록 일장기를 달았을 망정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1위를 하고, 남승룡(南昇龍) 선수가 3위를 하여 한국 스포츠를 세계에 과시하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미국의 오언스 선수는 100 m․200 m․400 m 릴레이․멀리뛰기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하여 4관왕이 되었다.
〈제12회 대회〉 1940년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제13회 대회〉 1944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제14회 대회〉 ① 개최년:1948년 ② 장소:런던(영국) ③ 참가국:58개국 ④ 경기:18개 종목(그 중 1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4,447명.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으나 영국은 전쟁의 피해로 인해 올림픽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대회에 한국은 역사상 최초로 태극기를 들고 참가하였다. 68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58개국 중 24위를 차지하였는데, 복싱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韓水安) 선수와 역도 미들급에 출전한 김성집(金晟集)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제15회 대회〉 개최년:1952년 ② 장소:헬싱키(핀란드) ③ 참가국:69개국 ④ 경기:18개 종목(그 중 1개는 시범경기) ⑤ 참가인원:6,358명.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전국이 된 핀란드였으나 매우 조직적인 올림픽을 개최하여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특히 이 대회에는 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련이 381명의 선수단으로 출전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여 선전분투한 결과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체육문화상을 받았다. 또한 복싱 밴텀급의 강준호(姜俊鎬) 선수와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金晟集) 선수가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대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토펙 선수가 별명인 인간기관차답게 5,000 m․1만 m․마라톤에서 우승함으로써 장거리경기에 혁신을 가져다 주었다.
〈제16회 대회〉 ① 개최년:1956년 ② 장소:멜버른(호주) ⑧ 참가국:67개국 ④ 경기:17개 종목 ⑤ 참가인원:3,555명.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성화가 남반구에서 타오른 대회로, 11만 명을 수용하는 원형 경기장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67개국이나 되는 많은 나라가 참가했으나 경기는 미국과 소련의 각축전이었다. 한국 선수단 중 복싱 밴텀급의 송순천(宋順天)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광복 후 처음으로 얻은 개가였다. 역도 라이트급의 김창희(金昌熙)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제17회 대회〉 ① 개최년:1960년 ② 장소:로마(이탈리아) ③ 참가국:84개국 ④ 경기:17개 종목 ⑤ 참가인원:5,933명. 로마 대회는 모든 올림픽 관계자들이 그리스 대회에 이어 열리기를 바랐던 대회였다. 이 대회의 특기할 만한 것은 에티오피아의 맨발의 주자 아베베의 마라톤 우승이다.
〈제18회 대회〉 ① 개최년:1964년 ② 장소:도쿄(일본) ③ 참가국:94개국 ④ 경기:19개 종목 ⑤ 참가인원:6,318명.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대회로, 비(非)백인이 개최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인접국가인 관계로 사상 최대의 인원인 224명을 파견하였으나 선수단 규모에 비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복싱 밴텀급의 정신조(鄭申朝) 선수와 레슬링 플라이급의 장창선(張昌善) 선수가 은메달을, 유도의 김의태(金義泰) 선수가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국의 헤이스가 100 m에서 10초의 벽을 깨고 9.9초로 우승하였고, 아베베가 마라톤에서 2연패하였다. 배구가 처음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는데, 여자배구는 일본이 소련을 제치고 세계를 제패하였다.
〈제19회 대회〉 ① 개최년:1968년 ② 장소:멕시코 ③ 참가국:125개국 ④ 경기:18개 종목 ⑤ 참가인원:7,470명. 멕시코가 해발 2,240 m의 고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회장소의 변경설까지 나돌았으나 예정대로 실시하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각국은 스포츠과학에서 고지훈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흑인선수들은 인종차별에 항의하여 검은 장갑을 끼는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포스버리가 높이뛰기에서 배면도(背面跳)를 시도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 선수단 중에서는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의 지용주(池龍珠) 선수가 은메달을, 복싱 밴텀급의 장순길(張淳吉)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제20회 대회〉 ① 개최년:1972년 ② 장소:뮌헨(서독) ③ 참가국:123개국 ④ 경기:21개 종목 ⑤ 참가인원:1만 88명. 사상 최대규모의 대회로, 64개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알찬 대회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이스라엘 선수단 유혈 인질사건으로 대회가 24시간 동안 중단되는 등 올림픽 사상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 미국의 스피츠가 수영에서 올림픽 사상 첫 7관왕이 되었다. 한국 선수단은 성적이 부진하여 유도 미들급의 오승립(吳勝立)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제21회 대회〉 ① 개최년:1976년 ② 장소:몬트리올(캐나다) ③ 참가국:94개국 ④ 경기:21개 종목 ⑤ 참가인원:7,814명. 캐나다 정부는 타이완이 명칭을 타이완으로 하지 않는다고 입국을 거부하였고, 아프리카 지역 26개국이 인종문제로 보이콧하여 5륜이 아닌 4륜대회가 되고 말았으며, 시설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루마니아의 신예 코마네치(14세)가 금 3개, 은 1개, 동 1개를 얻어 여자체조계의 새로운 요정으로 나타났고, 소련의 한국인 2세 넬리 김(19세)이 도마와 마루운동에서 올림픽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하여 코마네치와 쌍벽을 이루었다. 특히 한국의 양정모(梁正模) 선수는 레슬링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다. 한편 유도 라이트급의 장은경(張銀景) 선수가 은메달을, 유도 무제한급의 조재기(趙在基), 유도 미들급의 박영철(朴英哲),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의 전해섭(全海燮)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여자 배구팀도 구기종목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땄다.
〈제22회 대회〉 ① 개최년:1980년 ② 장소:모스크바(소련) ③ 참가국:81개국 ④ 경기:21개 종목 ⑤ 참가인원:5,923명. 처음으로 공산권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였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하여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방국가가 불참하여 올림픽 사상 가장 위기를 맞은 대회였다. 한국에서는 선수단 대신 대회기간 중에 열리는 각종 국제스포츠회의에 소수의 회의대표와 개인자격으로 초청받은 국제심판 및 심판원만이 참가하였다.
〈제23회 대회〉 ① 개최년:1984년 ② 장소:로스앤젤레스(미국) ⑧ 참가국:140개국 ④ 경기:21개 종목 ⑤ 참가인원:7,575명.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권 국가와 북한․쿠바 등 11개국의 불참(루마니아만 참가)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다의 140개국이 참가하여 580만 명의 관중을 모아, 2억 1500만 달러의 흑자를 낸 민간 주도의 대회였다는 점 등으로 역사적인 대회가 되었다.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8개, 동메달 7개(메달순위 10위)라는, 참가 역대 올림픽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어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국으로서의 체면을 세웠다. 육상 남자의 C.루이스(미국)의 4관왕(100 m․200 m․400 m․멀리뛰기) 수립과 여자 3,000 m 결승에서의 M.데커와 Z.버드의 접촉사고가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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