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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
저자 : 조용현 원광대 교수 출판사 : 푸른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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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동기 |
조용현( 원광대 교수)님의 한국의 15개 고가의 답사기로 푸른역사 출판입니다 |
서문의 요약 |
이책은 역사성, 도덕성, 인물, 풍수와 지리적 관점에서 선별한 15개 집안의 답사기입니다. |
인물관 |
인물이 되는 요건은 천(天),지(地),인(人)의 삼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
양 의 정 |
미국은 프론티어(개척정신), 일본의 사무라이(무인정신)가 있고 한국에는 선비정신이 있는데, |
저의 생각으로 현대의 양반은 |
종교 |
불교는 집을 떠나 사찰에 들어가 무아를 깨닫고자 하는 시스템 사찰중심의 구조이며 |
부자 |
지역부자는 1천석이며 큰 부자는 3천석 정도였는데 산이 많은 경상도는 큰 부자가 드물었고, |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경북 봉화에서 청량산을 끼고 20여분 들어감) |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원칙을 370년간 지키면서 박사만 14명을 배출한 가문으로 세간에서 마지막 선비로 부르는 조지훈(1920~1968)선생은 지조론으로도 유명하다 마을은 60여가구에 200명이 거주하는데 조지훈 생가 문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의 비석이 있다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40명의 박사가 나온 기록이 있지만 이 집안은 조그만 마을에서 박사를 14명 배출했다니 신기하기만 한데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교수(한국문학통사저자), 국민대 대학원장 조동걸교수(한국근세사의 석학). 성균관대 부총장 조동원(한국금석문학대계)씨는 인문학의 대가들인데 조지훈이 동탁이니 같은 동자 항렬들이다.영자항렬중에도 조근영(국립도서관장) 조헌영(한학자, 조지훈 부친), 조준영(초대민선대구시장) 조애영((여류시조시인)등이 있고 지훈의 조부인 조인석씨로 호은종택에 영진의숙을 설치하고 초경독본이란 청소년 교육용 책자를 만든 게몽자인데 3남 준영(경북도경국장)을 찾아내라는 좌익청년들의 모욕에 투신 자살을하셨는데 자존심과 목숨중 자존심을 택한 것이다. |
경주최씨(慶州崔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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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교동( 본채외에는 요석궁 음식점으로 변함) |
9대 진사를 하고 12대 만석을 한 집안은 조선에는 최부자 뿐일 것이바 그 가훈과 원칙은 육연(六然 : 수신의 가훈)은 온갖 다양성을 넉넉하게 수용하는 관용과 용인의 수신인 바 최부자집이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에서 200여년을 살다가 요석궁 터에 들어다 집을 짓은 시기는 최염씨의 7대조인 최언경(1743~1804)로 약 200년 전인데 부지 2,000평에 99칸에 노비가 100여명이었으나 1961년에는 47칸으로 줄어있었고 1970년의 화재로 사랑채도 불타 주춧돌만 남고 안채와 문간채 창고만 남아있는데 사랑채의 화강암주줏돌은 전성기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만석꾼에서 빚쟁이로 변한 마지막 부자 최준 |
행주기씨(幸州奇氏) -기대승 후손 기세훈씨 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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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너부실) |
기,고, 박이란 말은 광주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성씨를 말한다 원래 나주, 광주, 장, 창평 이었던 말이 광나장창으로 변한 것은 광주에서 기대승이 태어났기 때문에 광주와 나주의 서열이 바뀌었다고 기씨들의 후손들은 주장한다. 고봉과 퇴계의 인간적 관계는 사칠논변이 일어날 당시 퇴계는 58세로 성균관 대사성이고 고봉은 32세로 대과에 급제한 신예였는데 퇴계는 고봉의 주장을 경청하고 토론상대로 인정했으며 무려 8년간 논쟁을 계속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인품과 지성이 상보적 만남이었다. 퇴계가 서울을 떠나 안동으로 돌아갈 때 고봉은 한강가에서 유숙하다 봉은사까지 배웅하고 석별의 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고 후에도 조정의 흐름에 대한 편지를 계속 전했으며 퇴계는 부친의 묘갈명(두덤앞에 세우는 묘표에 새기는 글)을 고봉에게 부탁하고 퇴계의 별세후 고봉이 바친 묘갈명이 오늘도 퇴계의 묘비로 남아있다. |
경남 함양군 강동마을(거창에서 수승대 쪽으로 15분 진행하다 좌측으로 들어감) |
경남의 손꼽을 수 있는 집안이 선조, 광해 인조 세 대왕을 걸쳐 활동한 동계 정온(1569~1641)으로 경상도는 퇴계학풍을 계승하고 전라도는 남명학풍을 계승하였지만 경상도이면서도 남명의 학풍은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6년 동계는 화의를 반대했으나 삼전도의 항복이 있자 임금을 욕보인 신하는 죽어야 한다면서 활복을 하였으나 죽지 않자 덕유산 자락의 모라리에 은거하면서 백이 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던 은거지는 채미헌으로 전해지며 동계의 제사에는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린다고 한다 현재 동계고택은 15대 종손인 정완수(60세)씨와 종부 유성규(55세 안동의 전주유씨 후손)인데 직장이 영주에 있어 종택에 거주하지 못하나 정리되면 종가로 돌아올 계획인데 500평 대지에 70칸의 건물의 청소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며 봉제사 접빈객 등으로 월 유지비가 500만원 정도가 있어야 기본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동계고택에서는 종손의 어머니 최희(75세 경주 죄부자 종손 최염씨의 누나 )씨는 한국 상류층의 요리에 능하여 요리잡지나 여성지에서 자주 취제를 온다 |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 |
서울의 명가는 정치인 이종찬씨 집안은 백사 이항복의 직계 후손으로 8대를 내리 판서를 배출하여 삼한갑족이란 칭호를 들엇고 임시정부의 이시형, 독립운동가인 이희영 등의 인물을 배출했으나 고택이 남아있지 않고 방문한 곳은 한국 인명사전에 50여명이 들어가 있는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인데 현재 안채에 생활을 하고 있어 언론매체서도 주인의 촬영허가를 받지 못하여 접근하지 못한 곳이다 |
전남 남원시 수지면 호음실 |
조선 후기 지리산 로드의 베이스캠프인 몽심제는 연당 박동식(1763~1830)씨 고택으로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유명했다. 몽심제는 연당의 14대조 송암 박문수(두문동 72현의 영수)가 지은 시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 하는 시의 끝줄의 한자씩을 딴 것이다. |
해남윤씨(海南尹氏) -윤선도 고택 녹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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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
영남은 산이 많고 들판이 좁아서 3천석이 넘기 힘들고 오밀조밀한 짜임새는 있어도 호방하지 못하나 평야가 많은 호남은 짜임새는 작으나 1만석이 넘은 부자들도 많아 호쾌한 땅에 자리 잡은 집이 많다 |
이 글을 읽고 녹우당을 방문하였을 때 종택은 수리 중이었고 다음해 보길도를 갔는데 윤선도의 유적은 거의 관리가 되지 못하여 무너졌으나 세연정의 정자는 운치가 있었으며 동천석실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충남 서산 외암마을(천안에서 온양온천을 지나 승용차로 15분 정도 들어감) |
65 가구중 50여가구가 초가집인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예안이씨 종가이고 마을에서 참판댁을 물어도 된다. 하마석에서 차를 세우고 솟을 대문을 지나니 희성당(希聖堂-성인이 되기를 희망한다) 편액이 걸린 사랑채가 나온다 |
전남 진도군 |
1대 소치 허련(1808~1823) 2대 미산 허형(1861~1938) 3대 남농 허건(1908~1987)과 동생 임윈, 허림(1917~1942) 4대는 임전 허문(1941~) 5대는 남농의 손자 허진(1962~)으로 5대째 화가를 배출하고 집안에서 배출한 화가가 30여명에 이른다. |
의성김씨 내앞(川田)파 종택 -학봉(김성일) 부친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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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안동 시내에서 동쪽으로 반변천을 따라 30리를 올라가면 국도 좌측에 있슴) |
문중 제사에는 전국의 후손들이 참례하고, 외부손님이 오면 바쁜일이 있어도 내색 않고 정성을 다해 맞이하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으며 |
500년의 역사를 지닌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한 곳이 의성김씨 집성촌 중 청계 김진(1500~1580)을 중시조로 모시는 내앞파 종택은 선비의 강력한 정신이 어려있다 |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종택 -자존심이 곧 목숨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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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금계마을 |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에는 종 15,000점이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중 교장만 30여명으로 선비집안의 후손이 진출할 가장 원만한 직업을 선생으로 보았다 학봉 김성일 11대 종순 김흥락의 치욕이 독립운동의 불씨 양자로 종손잇기 작전 문중원의 종부에게 올리는 신년세배
학봉 후손들의 종가 돌보기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1677~1750)은 영의정이고 증조부 김한식(1720~1758)은 영조의 장녀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가 되어 영조의 각별한 배려와 화순옹주의 물려받은 개인재산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 육해로의 교통의 요지인 용궁리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을 때 충청도 53군현에서 한칸씩 부조하여 53칸 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화재로 인하여 추사의 필적과 유물및 건물이 불타고 1968년 다른 사람에게 팔린 것을 1976년 충청남도에서 매수하여 새로 지은 건물인데 인간문화재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하여 지방문화재 43호로 지정된 것이나 주련이 대문에서 현관 기둥과 담벼락을 감싸 추사고택은 주련의 집이 되었다 |
전북 왕궁면 장암리 |
객사중에 가장 오래된 전주객사(고급 호텔급)는 조선시대에 건축하고 1471년 중건한 것인데 정문에 가로 466cm 세로179cm의 풍패지관(豊沛之官) 이란 현판은 중국인 사신 주지번이 쓴 글씨인데 이에 얽힌 사연으로 송씨 집안이 호남의 명문으로 알려졌다 |
전주이씨 완풍종가인 강릉 경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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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주택으로 처음 국가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대지가 30,000평에 건물은 열화당(큰사랑채) 작은사랑, 행랑채(23칸),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채 활래정 서별당까지 10여동에 120여 칸에 달해 99칸을 초월한 장원을 표방하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장인데 고급 사랑채는 열화당이고 중급은 중사랑 하급사랑채는 행랑채 이다. 선교장 솟을 대문의 선교유거((仙嶠幽居: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의 현판은 조선말기 서예가인 소남 이희수의 글씨인데 경포호가 메워지기건에는 배를 타고 건너던 선교(船橋)의 발음을 넣은 작품으로, 터는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잡았고 손자인 오은 이후 때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즐겁게 이야기 하는집)과 연못을 파고 네 개의 돌기둥을 박아 활래정(活來亭)을 만들었는데 열화당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 열친척지정화(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에서 유래 했다고 한다 열화당이 발행한 강릉선교장에서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을을 가르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넘펴 출렁이고 그 물위를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안채뒤 대밭에 죽순이 움트고 매화가 그 짙은 자태를 드러낸다. 못에는 연잎이 솟으며 활래정 뒷산에 오죽순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이곳 골짜기는 한 겨울의 동명으로부터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앞냇가 아지랑이가 움트는 버들까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술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고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옷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은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선교장을 지켜온 14대 종부 성기희(82)여사 선교장 장손 이강룡씨는 공무원생활도 하고 개인사업도 하다 집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선교장을 지키는 차남 이강백씨는 2002년이면 집역사로 300주년이고 공개한 것으로는 20주년이 되는데 목조건물은 사람이 거주해야 생기를 유지하는데 건물들이 급속히 낡아 가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하며 선교장 보다 애착을 느끼는 것은 수령이 300년~600년된 금강송 20여주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소나무에 들어 간다고 한다. |
뜻있고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
저자 : 문태중 출판사 : 지식과 경영 |
저자소개 |
문태준(德巖) 서울의대졸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 수학 연대의대주임교수 겸 신경외과장 국회의원 4선 대한의사협회장 세계의사협회장, 보사부장관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남평문씨 대종회장 역임 |
추천사 |
김집(金潗 전 체육부 장관)님은 전통적인 노인상은 공경받는 어른이었으나 인구중 65세 이상 노인은 7%이며 10년후면 14%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것인 노인들은 평생을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셨으나 핵가족화, 산업화, 도시화 영향으로 어른들이 역할이 없어지면서 소외되어 빈곤과 고독속에 있다고 하시고는. 이책은 의사들은 물론 사회복지관계자및 복지정책을 다루는 정치인 및 공무원 사회복지 전공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고 |
추천사 |
이종윤(李鍾尹 홀트아동복지회장)님은 평균연령이 1960년도 52.4세에서 2000년도에는 75.9세이며 고령사사회에 진입했으나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반비례하여 가정에서 노인문제 해결은 어려워지고 있으며, 정보화 혁명후 노인들에게 정보격차를 가져와 소외감과 무력감을 키우고 있다고 하시면서 노년이 상황과 문제를 정밀분석과 외국의사례를 들어 고령사회 대비를 위한 현시점에 귀하고 유익하다고 했다 |
저자는 서문에서 고독과 고통속에서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많은 어르신들과 함께 여생을 즐거우면서도 뜻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에 대한 미약한 대비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 적었다고 하시면서 나는 이책을 충선공파 문영훈회장님께서 구입해 충선공파 임원 및 이사들에 증정한 것을 빌려서 읽었는데 20년후에는 남녀의 평균수명은 80세며 65세 이상은 15%로 국민연금 등의 제정파탄 우려와 노년의 체프린에게 베스트 작품을 물었을 때 다음작품이라고 답하였고 나이를 물었을 때, 70세의 답변은 30세 건강으로 40년을 살고 있다고 답했다고 하는데 고령자의 판단은 본인이 늙었다는 생각을 하면 노인이요,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산정상을 거뜬이 오르거나 노력의 결과를 인정받는등으로 자부심과 의욕을 느끼면 노인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어르신들께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노년의신호는 시력이 좋지 않고 안경을 찾느라 고생하거나 전화번호나 약속시간을 종종 잊게된다 고령자의 금기사항은 타인의 결점잡아내기, 충고나 잔소리및 변명, 명예및 감투와 과거에 대한 집착, 무병장수를 위해서는 많이 걸을 것이며 등산은 장수운동이며 머리쓰는 노인은 치매가 없다 암은 3.3명중 1명의사망원인이며 치료는 외과적 요법 방사선요법 화학요법, 면역요법중 노년의 사고는 사망원인의 4위로 높은 편인데 치매는 65세 이상의 10%로 5세증가시 2배로 늘어나며 건망증은다시 알려주면 기억을 하지만
독거노인 증가 :1990년은 자식과 살겠다는 사람이 한국61.4% 일본53.8 독일15.4 미국3.4 2000년에는 한국도50% 인데 녹거노인은 외로움,빈곤 상실감등으로 원만한 생활이 어려우며 가정에서 해결하기 어려워 국가국 문제 외국의 경우 1. 스웨덴은 고령화율 10% 노인홈(빈곤노인 간호소)건립했으나 환경취약등의 문제로 홈헬퍼 제도(정부보조로 자택치료)로 변경하고 지방자치단체에 고령자 평의회 구성하여 격월회의 결과를 반영 4. 한국에는 노인전문병원 59개가 있으나 노인질병인 중풍,치매,관절염, 요통 고혈압등 장기입원을 기피하는 이유는 3개월이후는 과잉진료라는 판정으로 보험료 20%삭감되고 기간이 길어질수록 삭감율 높아지고 민간단체나 국민의 도덕심에 의존하고 국가적 대책없고 버스비지원,국공립공원, 철도등에 노인우대가 있으나 노인기피풍조가 만연되고 요양시설 부족 노인의료정책의부재 한국노인복지제도 해결책 보건의료문제를 징치 이슈화 올바른 건강교육(비만예방,콜레스테롤검사와 조절,당뇨 및 고혈압관리 실버산업 전망: 미국 종자산70%이상을 50세 이상이소유하며 고급승용차48%이상 호화여행50% 의약품소비 회원권 35% 식품및잡화의 개인소비량많다 알콜음료 25% 신문구독많고 젊은층보두 고급유아복구입 총소비의 40% 점유 젊은이에 당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