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고생이 있지 않고서야
장차 어찌
길을 얻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박종(朴琮)의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에서】
작은 봇짐 하나만 들고
오래 앉아있기만 해서 그랬던가, 평소의 기울(氣鬱)증이 더한 듯싶어 산수를 찾아 답답한 기분을 풀어보려고 벼르던 차에 마침 지리하던 장마가 걷히었다. 바람도 새로워 지팽이를 끄는 것도 이때라고 생각했다. 박종명(朴宗溟)군과 함께 떠날 약속을 해두었는데, 황혼 후 박군이 찾아와 자못 반가웠다.
이튿날 아침 함께 떠나는데, 행구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나의 두 다리가 있을 뿐이다. 나는 작은 필연을 주머니에 넣고, 지팽이 하나만 끌고 나서니 모든 시름을 벗은 듯 몸도 가쁜하였다. 박군이 나를 위해 간단히 옷과 책과 돈을 싸서 봇짐을 만들어 몸소 지고 떠나니, 그의 의기도 알만하다. 옥봉(玉峰)으로 길을 들었을 때, 그 꼭대기에 올라서 보니, 누른 구름 한 빛으로 파도치는 풍년 든 들판과 만리 창해가 하늘에 닿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흉금이 환히 열려 그지없이 시원하였다. 나의 아들이 옥봉까지 따라와서 바래고 돌아갔다.
미곡(美谷) 냇가에 이르러서는 폭양을 피해 서늘한 솔그늘 아래에 누워서 한숨 자고 일어났다. 미곡을 지나 두어 마장 더 갔을 적에 검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더니 어느덧 푸뜩푸뜩 비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장차 큰 비가 쏟아질 징조였다. 옥천 재사(齋舍)에 들어 비를 긋는데, 날이 늦어져서 이날은 이 집에서 유숙하였다. 누각이 헌출하고 안계도 좋은데, 마침 비 지난 뒤라서 기분도 상쾌하거늘, 산빛과 물소리 유난히 아름답고 즐거웠다. 어두워진 뒤 재지기가 밀밥을 지어왔기에 동전 너 푼을 주었다.
이튿날 새벽 길을 떠났는데, 풀이 깊고 이슬이 많아 바지가 다 젖었다. 십리쯤 가서 김생을 방문하니, 움집이라 손님 들일 자리가 없어 우리를 울 밑에 앉게 하고 조반을 내왔다. 다시 서곡과 백곡을 지났는데 여기서부터는 산봉우리들이 기이하고, 시냇물은 돌을 차고 소리쳐 흘렀다. 한 굽이 맑은 못을 만나, 옷을 벗고 몸을 씻으니 몸도 마음도 상쾌하여 신선인 양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이곳의 밭은 까마득히 높은 산에 가파르게 매달린 땅이었지만 산협농민들은 이 밭을 일구어 곡식을 가꾸었다. 간난 신고와 싸운 산간 농민들의 피와 땀이 배인 낟알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언덕 위 조그만 마을에 들어 잠을 잤다.
다음날, 나무 숲은 높고 이슬은 깊어 해낮이 된 뒤에야 떠났다. 영마루가 잘려 구름 속에 들어갔다. 고개 위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우리가 지나온 인동(仁同), 상암(商巖) 일대는 구름과 비로 자욱해졌건마는 봉우리 위에는 파란 하늘에 햇빛이 빛나고 있으니, 내가 오른 이곳이 인간세상에서 높이 벗어났음을 비로소 알았다. 서쪽으로 큰 계곡을 더듬어 내려가니 돌을 타고 흐르는 두어 줄기의 시내가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못이 되기도 한다. 걷고 걸어 시냇가를 따라 내려가면서 혹은 갓끈도 빨고, 혹은 발도 씻었다. 북으로 이십리쯤 갔는데 중도에서 소낙비를 만나 언덕 위 인가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다. 날이 저물어 이날은 한천(寒川) 주막에서 잤다.
뉘라서 너의 군자다움을 알까
영현(英縣)에 5리 못미쳐서 작은 연못이 있고, 연꽃이 찬란히 피어 있었으며 그 위로 석벽 사이 아득하게 외로운 암자가 보였다. 못가에 앉아 있다가 나는 한송이 연꽃을 따가지고는, '지금은 무극옹(無極翁)이 없으니 뉘라서 너의 군자다움을 알까보냐'고 말했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좀 환히 트인 시냇가에, 날아갈 듯 한 서당이 서있다. 이곳이 조승선 옥천공(趙承宣玉川公)의 옛마을로서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글공부하는 곳이다. 단곡의 신사인(申士人)을 만나 그 집서 잤다. 이날은 50리를 걸었다.
처음엔 청량산으로 바로 가기 위해 어제 간탄(澗灘)까지 왔지만 이곳에 와서 듣건대 청량산으로 바로 가는 길을 이미 잃고 잘못 들었다 한다. 우리는 부득불 태백산으로 직행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청량산을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더니, 주인 노인장이 "어제의 폭우로 산골물이 차고 넘쳐 태백산은 못간다"고 말하므로, 우리는 길을 에돌아 다시 청량산으로 향하였다.
인곡에서 조반먹고 고개를 넘는데, 그 위에 옛성터가 나타났다. 이 지방 사람의 말로는, 이 성은 동남쪽 가파른 산협을 에둘러 서북의 산머리까지 이르렀으니 청량산도 이 성 안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흉적을 피해 와있던 곳이라 한다. 산 남쪽 언덕엔 궁전의 옛터가 있고, 그 아래는 천길 절벽이 있는데, 왕이 피란하여 있을 적에 죽일 죄인이 있게 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바로 이 절벽에 던졌으니 절벽 아래엔 지금도 백골이 수북하여 날이 흐리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엔 귀신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몇 마장 더 들어가니 문득 좌우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서고, 늙은 나무숲과 등넝쿨이 얽혀 해와 달이 보이지 않으니 묻지않아도 이미 청량산 경내에 들어온 줄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중이 나와서 손을 모으고 맞아 절하고는 산포도 두어 송이를 준다. 수십보를 들어가니 천만길 절벽이 머리 위를 눌러 섰는데, 그 아래 한 암자가 있다. 육화암(六和菴)이다. 암자에 앉아 사방을 둘러 보니 층층한 바위, 첩첩한 석벽이 기기괴괴하여 사람을 놀래준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서 다 구경을 못하고 자게 되었는데, 밤에 산 달이 창으로 새어 드니 과연 청량산의 정취가 청량한 줄을 알겠다.
꿈같은 세상 일, 중 생활도 부러워
다음날 조반 후, 어젯밤 담론을 나누기도 했던 웃방의 중이 안내를 맡아 외청량(外淸凉)길로 앞을 섰다. 오리쯤 되는 돌길이 만길 절벽의 허리로 돌아나갔으니 아슬아슬하여 감히 아래를 내려다 볼 수는 없지만, 등넝쿨과 머루덩굴, 나무숲이 어우러져 아래 쪽을 막고 있으므로 벼랑이 보이지 않게 된 덕으로 그래도 마음을 놓고 갈 수가 있었다. 잠시 어풍대(御風臺)에 앉아서 마치 묶어 세운듯한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을 구경한 뒤, 다시 수십보를 가서 한 낭떨어지를 겨우 올라가니 거기 풍혈대가 있다. 그 구멍진 데를 최치원대라 하는데 그 안에 목판이 있고 이를 최치원이 바둑두던 데라 일렀다.
곁에는 맑은 샘물이 석벽 사이에서 솟구쳐 석굴에 괴어 흘러 물빛이 말갛게 투명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孤雲)이 이 물을 마셔서 더욱 총명하였으므로 '총명수'라고 한다는 것이다. 손으로 움켜 마셔보니 물맛이 심히 깨끗하며 차다. 그 위로 수십보 올라가니 깎아지른 석벽의 중턱에 암자가 있고, 금불 셋과 나한 열여섯을 앉혀 놓았다. 여기를 외청량이라 한다. 그 높은 바위, 기이한 돌이 별세계를 이루었는데 석벽 위에는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바위 하나가 외롭게 서 있으니 이를 동석(動石;흔들바위)이라 한다. 중의 말로는, 이 바위는 한 사람이 건드리거나 천 사람이 건드리거나 움직임이 같고, 바람만 불어도 움직이는 까닭에 동석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절에선 암자 뒤 석굴에서 떨어지는 맑은 샘물을 나무 홈으로 끌어다 음료수로 쓰고 있다. 절간에 좀 앉았노라니 세상 일이 꿈같으며, 중과 더불어 이야기를 해보니 비록 변변찮아도 누가 없는 중의 생활이 부럽기도 하였다.
한낮이 되어서야 온 길을 더듬어 경일봉 동쪽에 이르니 철벽같은 천길 벼랑에 굴이 하나 있는데, 몇 간 집을 지을만큼이나 되었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마치 굵은 비가 내리는 듯하였다. 옛적엔 이곳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어서 김생이 일찍이 여기에 은거하여 금자로 불경을 쓴 것이 지금도 절에 보존되어 있으므로 이를 김생굴이라고 한다. 특히 그가 쓴 '백월선사비'는 본디 이 산중에 있었더니, 중국에서 그 서기가 뻗힌 것을 바라보고 찾아 온 사람이 있어 "이 글씨의 서기가 북두성을 찌르고 있으니 진실로 천하의 절보"라며 비를 뽑아 구성(龜城)까지 옮겨갔는데, 돌이 너무나 무거워 버려두고 갔으니 지금도 구성관(龜城館)에 있다고 한다.
淸凉散人은 이 산의 주인이라
자소봉 아래 만월암을 둘러보니 중은 없다. 백운암 옛터도 그 위에 있지만 그곳까지 올라가는 길이 천길 절벽이어서 위태롭기가 외청량길보다도 더하다. 목숨이 귀한 것을 생각하면 어찌 한 때의 구경을 위해서 험지를 갈 수 있겠는가. 이미 눈으로 그 승경을 다 보았거늘 꼭 애써 가봐야만 하겠는가.
이 산은 태백산으로부터 갈려나와서 여기에 우불꾸불 자리잡았는데, 그 여러 봉우리들의 마치 다투듯 솟아있는 모습이 수많은 죽순들이 솟아나온 듯하다. 기이한 봉우리가 열을 넘고, 기이한 대(臺)도 열둘을 족히 헤아리며, 기이한 굴도 다섯이나 된다. 경일봉 남쪽으로는 금탑봉이 있고, 만길 절벽이 세층으로 주름잡아 이루어졌는데, 옛적에는 여러 암자들이 중층으로 건축되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하청정 하나 뿐이다. 그외 산봉우리, 대, 굴들의 이름없는 것과 이름있는 것 혹은 암자와 절의 옛터 등이 많으니 이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 산의 여러 승지들이 전에는 명칭이 없었는데, 주신재(周愼齋)가 그 실경에 따른 이름을 짓고 글을 지어 기록하였으니 지금의 명칭은 다 그로부터 시작된다.
송재(松齋), 온계(溫溪)가 글을 지었으며, 퇴계선생 또한 이 산을 몹시 좋아하여 젊었을 적엔 백운암에서 글을 읽으며 <백운암기>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만년엔 매년 봄·가을로 집과 벗에게도 알리지 않고 표연히 홀로 산에 들어 며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의 시문 중엔 이 산을 두고 지은 것이 많았고,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淸凉散人)이라고 짓기도 하였다. 정말 선생이야말로 이 산의 주인이라 할만하며, 우리나라에서 이 산이 이름나게 된 것 또한 선생에게서 비롯된다고 할 만하다. 그 이전엔 최고운과 김생의 입을 빌린 것이 고작이었다.
동구밖을 나와 큰 절에서 잤다. 절은 방이 넷이며 누각과 불전이 매우 장대하였다. 김생이 썼다는 불경 몇 권을 구경하였고, 또 은자(銀字)불경도 몇 권 있는데, 중의 말로는 이것이 최고운의 글씨라 하나 내가 보기엔 다 김생의 글씨다.
초파일, 한가롭게 절의 누각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은 뒤, 시내를 끼고 서쪽으로 가다가 큰 강이 가로 흐르는 것을 만났으니, 이것이 곧 태백산 황지(黃池)의 하류이고, 낙동강의 상류이다. 여기서 도산(陶山)까지 삼십리이며 고산(孤山), 단사(丹砂)가 다 이 강가에 있건만 내가 지금 태백산을 찾아가는 터이니 그곳을 들리자면 길을 멀리 돌게 되므로, 귀로에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자주 돌아보았다. 시내를 거슬러 십리를 올라가서 강을 건너 서편 산협으로 오리쯤 들어간 곳에 초방사(草房寺)가 있으니 이곳은 봉화(奉化) 땅이다. 절은 고작 방 두 개이지만 누각은 자못 넓다. 들어앉은 지 한참이 지난 후 뇌우가 쏟아졌다. 밤엔 향로전(香爐殿)에 들어 잤다.
(이후 그는 여러 날에 걸쳐 춘양(春陽)과 순흥(順興)을 거쳐 부석사, 무량수전도 탐승하고, 백운동서원도 돌아보고, 예안의 도산서원도 찾아보는 등, 매일 사,오십리씩 걸어서 경상도 내륙의 여러 고장의 풍속과 유적들을 들러보았다. 그리고 이해 추석이 지난 8월 24일,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그날의 감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주인은 비 온다고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한 달이나 자식을 떼어두었으므로 마치도 송아지를 떼어둔 어미소와 같아 비를 무릅쓰고 떠났다. 석양녘에 재사(齋舍)에 이르니 아들애가 나와서 맞는다. 일가 집 아이도 들어와서 절한다. 마치 고향에나 돌아간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 수십일동안은 객지 중에서도 또 객이 되었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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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종(朴 琮 1735-1793). 함경북도 경성군 주촌(朱村)에서 태어나 자람. 호는 당주( 洲), 그는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나 벼슬엔 뜻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영해(寧海)로 정배되어 16년간 고생하다가 59세를 일기로 배소에서 타계하였다.
그는 백두산을 비롯한 여러 곳의 명산대찰을 탐승하였으며, 유려한 문장으로 이 탐승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그의 문집 < 洲集>에는 백두산기행, 칠보산 기행, 동경(경주)기행, 청량산기행 등이 유록(遊錄)으로 수록된 바 있으며, 한문으로 되어 있지만 실로 조선기행문학의 걸작이라 할만한 것들이다.
특히 그의 <백두산기행>은 당시 그리로 오르는 길도 나있지 않고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형편을 고려할 때 '탐승'이라는 말보다는 '탐험'에 가까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백두의 영봉에 올랐다. 그는 천지의 삼지연에 막을 치고 하루를 지내면서 그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풍경, 웅대한 풍모, 백두산에 꽂힌 정계비를 본 느낌을, 경탄과 감흥, 묘사와 형상으로 그려냈으며 이는 조선조의 탁월한 기행문학의 하나이다.
<청량산 기행>은 1780년 8월 1일부터 23일까지, 23일동안 680리를 걸으며 명산대천을 탐승하면서 선현들의 유적을 찾아본 유람기이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문헌과 고전을 고증하고, 열읍의 풍토와 습속을 알았으므로 소득이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방랑의 유람에 대해 비웃음을 살까 염려되어 그랬던 것일까, 이 기행문의 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부터 또 다시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촌가를 아껴 공부한다면 동(動)과 정(靜이 서로 표리가 되어 보람찬 성과를 가져옴으로써 우주의 발전법칙에 어긋남이 없으리니, 내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으랴!>
비교적 긴 글이어서, 번역하고 현대말로 고쳐 옮길 적에 절실하지 않은 부분은 중간중간 빼기도 하였음을 밝혀둔다.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