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대
문경여자중학교 교사,예천여자중학교교사역임
용문면 상금곡리 054-652-6742
bau55@hanmir.com
장편소설 <기류>,<아!백두여>,<올가미>,
<부평초>,<대역> 및 단편을 여러 권 펴냄
<독후감>
박치대 : <대역>
출판사 : 월드컴미디어 / 출판일 : 2000/10/15 / 쪽수 : 320
<민족의 미래를 꿈꾼 아니키스트 박열 의사>
사관대모를 쓰고 일본 법정에선 민족 자존심. 일제 식민 통치 35년은 우리 민족사에 나라를 빼앗긴 고통 못지않게 수많은 지식인들을 친일 변절자로 만든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변절의 역사가 8ㆍ15광복으로도 끝나지 않고 그 후 5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잔재들이 남아 역사의 진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대역>은 상처 입은 민족사에 하나의 자긍심을 일깨워 줄 수 있는 통쾌하고 매력적인 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 민족에 독립지사도 많았고 애국지사도 적지 않았지만, 소설 '대역'의 주인공 박열(朴烈) 열사만큼 확고한 사상과 당당한 행동으로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까지도 감동시킨 매력적인 독립운동가도 흔치 않았다.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暴殺)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제국의 대배심원 법정에 서면서,
"나 박열이 법정에 서는 것은 피고로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을 대표해서다. 따라서 재판관이 일본 천황을 대변하여 법의(法衣)를 입고 나오니, 나 박열은 조선의 전통예복을 입겠다"는 주장을 관철시켜, 사모관대(紗帽冠帶)에 부채까지 들고 재판을 받은 그 기개와 당당함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철학을 가진 아나키스트 민족의 미래를 꿈꾼 혁명가 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이며 혁명가였다. 그는 여느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 인권이란 사상적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은 물론, 천황의 허상을 무너뜨림으로써 일본 사회의 혁명적 변혁까지 기대했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의 정치철학과 조국의 미래, 민족이 가야할 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신조선혁명론(新朝鮮革命論)>(일어판)을 읽어보면, 박열 열사가 단순히 행동만 앞세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준비된 민족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뛰어난 지성과 행동하는 용기를 겸비한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박열 열사는 행동하는 독립운동가라 하기에는 정치․경제․철학․문학 등에 두루 통달한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고뇌하는 지식인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행동적인 혁명가였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기에는 너무나 휴머니스트였으며, 휴머니스트의 우유부단함을 연상하기엔 너무나 단호한 역사의 심판자였다. 소설 '대역'은 이같이 다양한 한 인간의 삶의 역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처] 박치대 : <대역> |작성자 재봉틀
함께 생각해 봐요1
안녕하십니까. 느림보 얼바우가 이제 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박열(朴烈) 의사의 한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乾坤車輪轉 (하늘과 땅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데)
本來無尊卑 (본래는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도다)
世界渾圓球 (세계는 전부가 하나 둥근 공인 것을)
何處有邊鄙 (어느 곳에 하찮은 변방이 있으리오)
이 시는 박열 의사의 기본 사상으로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은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하고...
그러한 구분이 없이 다 공평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뜻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 함께 생각해 봐요 2
안중근 의사가 즐겨 쓰던 말을 함께 생각해 볼까요.
見利思義 (이익을 보거든 의리를 생각하고)
見危授命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익만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회가, 나라가, 민족이 위기를 맞아도 당리당략에만 눈이 어두워 날뛰는 정치꾼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함께 생각해 봐요 3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조했던 말입니다.
愛己 (먼저 자기를 사랑하라)
愛他 (그리고 남을 사랑하라)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겠지요.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아름답게 갈고 닦는 수양의 길을 말하겠지요.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기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진정 서로 도우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상생(相生)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함께 생각해 봐요 4
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유교가 아니라 유교의 조선이 되고
불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조선이 되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지요.
그 말을 더 이어가면 이렇게 되겠지요.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조선이 되고
자본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조선이 되고
공산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조선이 되고......
어떤가요. 말장난일까요.
우리 함께 생각해 봐요 5
* 박열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여사가 감옥생활 중에서 쓴 단가입니다.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풀을 뽑네
감옥의 한낮은 참으로 조용하구나
손 끝에 잡히는 이름없는 풀, 쏙 뽑으면
들릴 듯 말 듯 울먹이네, 나도 살고 싶다고
뽑히지 않으려고 제자리에서 몸부림치는
그 모습 정말이지 밉고도 애처롭구나
* 작은 풀은 일본제국의 횡포에 짓눌려 시들어 가는 자신을 비유한 말이 아닐까요.
박치대 소설 출판기념회
1. 때 : 06.12. 15(금) 6시
2. 곳 : 전통복어집(보생당한약방 뒤)
3. 책 이름 : '철쭉으로 피어나리'
4. 참가 범위 : 한내, 민예총, 예천문화길라잡이 회원들
더부살이
---박치대
지난밤 꿈자리에서 본
어메 얼굴
한평생 힘겨운 삶에
주름 투성이로 찌든 모습
거기에 피어난 잔잔한 웃음이
나를 이끌었다
여름 한철 다 가도록
문안 드리지 못한 부끄러움에
초가을 잠자리를 거느리고
도둑처럼 발소리 죽여 찾아간
어메 무덤 한곁
쑥부쟁이 몇 그루
가난한 연보라 꽃을 피웠다
얼마나 못 났으면
제 이름 하나 온전히 얻지 못하고
쑥에 부쟁이를 붙여
쑥부쟁이 되었나
우리 어메도
여자 이름 온전히 얻지 못해
남자 더부살이로 차남이라 이름 달고
한평생 그래 살았으니
쑥부쟁이하고 다를게 뭐 있노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 소설가, 별세...명복을 빕니다.
박치대(便히 잠드소서. 삼가 弔意를 表합니다! 얼바우 朴致大 先生 깊은 잠에 드시다...) [記事] :
충효의 고장인 예천군의 이 시대 최고의 선비로 통하던 얼바우 박치대 선생이 운명을 달리했다.
박치대 선생은 "철쭉으로 피어나리, 대역, 올가미, 아! 백두여, 부평초" 등 많은 글을 남긴 소설가이기도 하다.
경북작가협회, 민예총예천지부, 한내글모임 회원이었던 박치대 선생은 권병원 영안실 3층에 안치되어 있으며 장례는 2009년 2월 14일, 장지는 금당실 선산이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13 오전 10: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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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대(朴致大) : ?~2009,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본관은 함양, 노문(魯文)의 2자, 교수 치정(致正)의 동생, 용문초, 대창중고 졸업, 65년 경희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6.3사태 때 학교를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재건학교 운동을 폈다. 그 후 은풍중(殷豊中), 대창고(大昌高), 한알고, 문경서중, 예천여중 영어 교사를 지냈다. 1975년부터 문예지 활동을 하여 1977년 장편소설 <기류(氣流)>를 낸 다음 유신 말기와 6공화국까지 글을 내지 못하다가, 1985년부터 <지그미>, <용바우>, <밀도살꾼>, <당골이야기>, <토종(土種)>, <잡종(雜種)>, <고삐>, <18세기> 등의 연작 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89년에 장편소설 <아! 백두(白頭)여>를 대구일보에 연재했다. 92년에는 <올가미>, 그 후 <진달래 피고 지고>, <대역> 등의 장편소설을 내었고, 96년에는 예문연(醴文聯)의 2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계간 '사람과 문학'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소설 <부평초(浮萍草) 상권(1997)>을 출간하였다. 1980년부터 '한내글모임'에 함께하여 지방 문화의 발전에 힘써 왔고, 대구경북민족문학의 '교육문예창작회' 등을 통하여 국적있는 글쓰기운동을 추구해 왔다.(醴泉鄕土新聞 199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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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상과 박열(趣旨文) [記事] : 예천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한 지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여 충효의 고장이라고 내세울 때는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충효사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토양과 뿌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천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큰공을 세운 약포 정탁 선생이 충(忠)을 대표하고, 명심보감에 오를 정도로 효행이 지극했던 도시복 선생을 효(孝)의 대표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 뿌리 깊게 이어져 가는 일관성과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침탈로 모진 수난을 겪었던 시절이 어느 때보다 힘겹고 어려운 고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구한말에 예천 지역의 의병운동을 이끌어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예천의 긍지와 자존심을 살리는 데 앞장섰던 의병장 박주상(朴周庠) 선생과 엄혹한 식민지배 아래서 일본제국의 중심적 상징인 천황 부자를 폭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역범으로 몰려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 없이 떨쳤던 박열(朴烈) 의사의 기녑비를 세워 오늘날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를 제대로 살리고 올바른 민족교육 활동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박주상 선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에 발맞추어 65세의 고령에 예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이강년, 김하락 등 혁혁한 의병장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고종이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자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지친 몸을 쉬면서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조선 합병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국적으로 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니, 선생은 다시 예천 의병장으로 나서서 침략군과 맞서 싸웠으나 워낙 고령으로 무리하게 싸운 데다가 병환이 겹쳐 1908년 7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1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과 함께 이장되어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박열 의사는, 누대를 금당실에 터 잡고 살아온 집안으로 조부 때 문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기미년에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쫓겨 일본에 건너가서 사상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제국 최고 권력자인 천황 부자를 폭살할 계획으로 폭탄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던 가운데 때마침 일어났던 관동 대지진으로 일이 무산되었고, 의사는 대역범으로 몰려 일본 대심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3년 간의 오랜 세월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다음 일본의 패전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의사는 재일교포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하여 애쓰다가 고국에 돌아와 장학 사업에 힘쓰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으로 잡혀가 거기에서 평화통일을 위하여 힘쓰다가 1974년에 세상을 떠나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습니다. 그러자 서울에서 박열 의사 추모식을 거국적으로 거행하였으며,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십 없이 자신을 바쳐 싸웠던 박주상 의병장과 박열 의사의 기념비를 두 분의 본고향인 용문 금당실 마을에 세우려고 합니다. 금당실은 전통 문화마을로서 앞으로 예천 지역의 문화 답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기념비 건립은 예천의 정체성을 찾고 정신적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천 지역의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민과 관이 마음을 함께 모아 뜻깊고 실속 있는 사업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朴致大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02-02 午後 8: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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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대 [記事] : 예천 배드민턴클럽 한천회 카페/ 강해원 잡글방/ 글쓴이: easter/ 2008.02.02 10:39/ 바쁘신 가운데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백병구 문화원장님, 김각년 교육장님, 도의원님, 군의원님, 영주 안동, 인근의 문학 동호인, 기쁘게 먼 걸음해 주신 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 여러분, 박열의사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원, 그리고 작가의 가족 친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박치대의 소설 <대역>은, 박열 의사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수십 년간의 자료수집과 각고의 집필로 작가가 다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애정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해서 우리는 마땅히 이 책의 출간을 기리며 축하하는 바입니다. 박열 의사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분단상태에서는 조국 통일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며 민족을 위해 싸우다 가신 분입니다. 참으로 당당하고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으로 갈라져 온갖 수난을 겪어오면서,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통일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박열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조국통일을 향한 그의 열정적인 삶은 우리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로운 박열 의사의 행적을, 다른 누구가 아닌, 소설가 박치대가 썼다는 것을 저는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박치대 선생은 그의 작품 못잖게 정의롭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인간됨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작가의 이런 따뜻한 인간성에 끌려 오신 분이 많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남들 어려운 일에 한번도 외면하지 못하며, 어리석도록 바른길을 걸어온 작가의 삶은 그의 소설 대역의 박열 의사와 무척 닮아 보입니다. 또한 작가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옛 선비들이 3년 시묘살이 하듯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빈소를 지킨 일로 아직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 겨울밤 더러 우리와 함께 밤을 보내다가도 헤트라이트도 없는 고물 자전거로 어두운 20리 龍門 본가까지 달려가 빈소를 돌보고, 엄동의 추운 새벽길을 달려와 출근하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식의 도리와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올곧은 선비의 면모를 보여왔습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말없는 행동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어왔으므로, 이런 일화는 아마 빙산의 일각에 불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아름답고 고매한 정신과 한 시대를 살고 한내라는 같은 울타리에서 함께 호흡하게 된 것을 더 없는 영광이며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디 드러내는 걸 싫어해 조그만 효행상이나, 그 흔한 문학상, 문화상 하나 받지 않고 생활해 왔지만 진실되고 겸허한 이런 풍성한 인격을 겸비한 작가가 있기에 글모임 한내는 더 깊이 더 멀리 흘러갈 것이며 나아가 예향 예천의 그윽한 맥을 이어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끝으로, 박치대 선생이 이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말없이 내조해주시고, 또 훌륭하게 자제분들을 키워오신 부인 정경순 여사께도 우리 한내 사람들은 이 자리를 빌어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다시 한번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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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상)(大逆(上)) [冊]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朴致大, ?-2009, 龍門初, 大昌中高 卒業, 小說家)의 저서로, 320쪽, A5, 월드컴미디어에서 2000년 10월 15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 하려다 일경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생을 다룬 장편소설. 난세에 태어나 치열한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한 인물의 인생 여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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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하)(大逆(下)) [冊]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朴致大, ?-2009, 龍門初, 大昌中高 卒業, 小說家)의 저서로, 320쪽, A5, 월드컴미디어에서 2000년 10월 15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를 폭살 하려다 일경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의 생을 다룬 장편소설. 난세에 태어나 치열한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한 인물의 인생 여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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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상) [冊]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朴致大, ?-2009, 龍門初, 大昌中高 卒業, 小說家)의 저서로, 402쪽, A5, 대림기획에서 1992년 6월 1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고삐> <아! 백두여> 등을 발표했던 저자가 교육문제를 다룬 현장소설. 평범한 한 교사의 눈을 통해 우리시대의 교육문제를 조명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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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하) [冊]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朴致大, ?-2009, 龍門初, 大昌中高 卒業, 小說家)의 저서로, 328쪽, A5, 대림기획에서 1992년 6월 1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고삐> <아! 백두여> 등을 발표했던 저자가 교육문제를 다룬 현장소설. 평범한 한 교사의 눈을 통해 우리시대의 교육문제를 조명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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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백두여(아! 白頭여) [冊]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박치대(朴致大, ?-2009, 龍門初, 大昌中高 卒業, 小說家)의 저서로, 302쪽, A5, 유림사에서 1990년 1월 1일에 출간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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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960) : 금당실 출신 소설가(박치대) 저술들(附 예천서악사 석가모니후불탱, 오늘 도지정문하재 지정대상 선정/용궁중 풍양중, 도평가 최우수)(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01-02 照會 1127)
출 처 : 예천군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장병창님 글
제목 | 자랑1841:정찬수敎授(弔박치대/예천방문367) | ||
이름 | 장병창 | 부서 | |
날짜 | 2009-02-13 (14:26) | 조회 | 80회 |
첫댓글 별 하나를 잃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희상이 형, 지난날 추억이 아련하구만. 이렇게라도 안부를 알 수 있으니 정말로 다행하고 반가운 일이지. 언제나 무고하시고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
아쉬운 이별 - 죽은 후에 봄이 온들 돌아오지 못할 그 먼길 홀로 가자고 그리하셨을까? 너무도 아쉬운 사람......
治正 治大 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치(治) 가 치(致) 로 바꾸었는지 금시초문?. 오기(誤記)인듯 하네요. 이름 字가 얼마나 중요한데 함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