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빳사나 지혜(vipassana ñāna) 계발 단계
빅쿠 대운]-1
Ⅰ. 서 론
작년 가을 산철에 전북 진안에 있는 담마코리아 고잉카 수행 센터에 다녀왔다.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미리 수행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고민하다가 고잉카 수행센터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행에 대한 고민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경전 공부와 함께 수행을 같이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단계별 정리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되었고, 이번을 계기로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처음 접하게 된 것이 아신 빤딧짜 스님의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을 보게 되었고, 이 내용이 ‘청정도론 3권’에 200p 정도의 설명이 있었으며, 비구 일창 편역 인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백문백답’에 소개가 되어 있었다. 고잉카 센터에서의 수행을 생각하며 이 3권의 서적을 기준으로 위빳사나 지혜의 계발 단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우선 수행의 두 종류로서 사마타 수행과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알아보고, 위빳사나 지혜 계발 단계를 14단계로 나누어 정리하게 되었다. 14단계로 구분한 것은 개인적 판단 기준에 따른 것임을 밝힌다.
Ⅱ. 사마타 수행과 순수 위빳사나 수행
사마타 수행(samatha-yāna)은 표상(nimitta)을 대상으로 근접삼매나 본삼매를 닦아 선정에 들어간 후 선정에서 출정한 뒤 선정 속에서 일어난 선의 각지들을 무상∙고∙무아라고 관찰하는 수행이다. 순수 위빳사나 수행(suddha-vipassanā -yāna)은 선정 본삼매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생멸하는 물질과 정신의 연속인 담마들을 근접삼매와 유사할 정도의 관찰 대상에 밀착하여 집중 할 수 있는 찰나삼매(khaṅika – samādhi)로 무상∙고∙무아라고 관찰하는 수행이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잊어버린 마음이나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 마음을 관찰할 필요 없이 호흡 등의 원래의 대상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다른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 마음들도 관찰하여 그 마음들이 사라지면 다시 호흡 등의 원래의 대상을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 마음들의 특성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아야 그런 마음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 기술이 익으면 달아난 마음들을 아는 순간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 멈춘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그걸 바로 보는 순간 사라지고, 또 보면 사리지게 되는데 그 자리가 마음의 자리(토대)이고 심수심법 중에 심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자나 순수 윗빳사나 수행자나 수행의 전제로서 계를 잘 지녀 계목과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생계를 청정히 해야 한다. 그래야 신구의 삼업이 흩어짐 없고 유익한 법들의 토대가 되어 수행의 기반이 된다.
Ⅲ. 위빳사나 지혜(vipassana ñāna) 계발 단계
1. nāmarūpa-pariccheda-ñāna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아는 지혜)
마음과 마음부수로 이루어진 정신(nāma)과 사대와 파생물질로 이루어진 물질 (rūpa)을 칼로 자르듯이(cheda) 완벽하고 자세하게(pari) 구별하여 아는 지혜 (ñāna)를 의미한다.
18계, 12처, 오취온이라는 이 삼계에 속하는 모든 법들은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만 있을 뿐이지 그 이외 나라고 할만한 아상, 인상, 중생상 등의 일체 상이 없음을 알고 사견이 사라져 견해가 청정해지는 위빳사나 지혜의 첫 단계이다.
예를 들어 호흡 중에 따뜻하고 차가움, 공기의 움직임, 딱딱하고 부드러움 등의 지수화풍 사대를 느낄 때 호흡에 와 닿는 물질과 그것을 인식하는 정신을 구별하여 알게 된다. 더 나아가 호흡을 더 깊게 관찰해 들어 가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마음이 일어나는 과정까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수행 중인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도 정신과 물질이 나누어 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정신과 물질은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볏단 두 개가 서로 의지해 서있거나, 막대기로 북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서로가 조건이 되어 생긴다.
하지만 호흡 관찰, 배의 부품 관찰, 몸 거동 관찰 등을 통해 정신과 물질을 각각으로 인식하는 지혜 과정은 똑같지만, 사람마다 표현은 다양하여 체험을 말로 옮길 때 완벽하게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밖에 없다는 점에서 부처님 수행 기록인 경전의 중요성은 대단하다고 본다.
2. paccaya-pariggaha-ñāna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 =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정신과 물질에 대한 조건(paccaya)을 파악하는∙가지는(pariggaha) 지혜(ñāna)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가리킨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아는 지혜가 깊어지면서 뭔가를 알기 전에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걷기 전에 걷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들숨에서 들이쉼 하기 전에 들이 쉬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새소리 들려오면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이 동시에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아는 지혜가 깊어져 사견이 많이 사라지고 일체 상이나 개념들이 깨지면서 궁극적인 실제를 파악하다 보면,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있고, 저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생겨나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12연기를 이해하는 지혜가 생기고 업과 업의 과보를 알게 된다. 이는 무명과 갈애와 업의 과보를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만이 현재에 존재 하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삼세에 대한 의심들을 극복하게 된다. 또한 결과를 일으킨 원인의 배후에 다른 행위자라 할만한 것은 없고 단지 그런 상황을 만든 조건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도의 지혜만 있어도 그 사람의 심리는 크게 바뀌어 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면서 용서하는 마음과 지극히 선량한 마음으로 가득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지혜를 갖춘 이를 부처님 교법에 안식을 얻고 발판을 얻은 자로서 두번째 생까지 사악처로 안가는 작은 수다원(cūḷa- sotāpanna)이라 부른다.
3. sammasana-ñāna (명상∙숙고의 지혜 =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
sammasana(saṃ+masati손대다,만지다)는 파악, 숙달, 숙고, 명상의 뜻으로 여기선 무상∙고∙무아를 명상∙숙고하는 지헤(ñāna)를 의미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을 정신과 물질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즉 한 생이나 10년, 1년, 하루, 한 시간 단위로 무상∙고∙무아를 관찰하거나 찰나적인 순간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를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단계에선 더위, 추위, 딱딱함, 부드러움, 아픔 같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매우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관찰하는 대상들이 쏟아지듯이 많아져서 관찰이 힘들고 바쁘게 된다. 대상을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에 계속 사라져버리니 모든 것이 변하고 항상하지 않는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몸이 부분적으로 사라진 것처럼 느끼며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관찰하면 그것들이 해체되어 흩어지는 느낌으로 변한다. 처음에 알고 있던 모양과 크기가 없어지고 나중에는 지수화풍의 느낌들인 따뜻함, 차가움, 가벼움, 무거움 등의 느낌만 남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물질적 느낌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무상한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관찰하는 대상들에 대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어찌 할 수 없음을 느끼며 무아를 명상∙숙고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무상을 한번 보게 되면 머리로 무상을 수없이 그려보고 반복해서 숙고하고 명상하기 때문에 지혜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몸과 마음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정도이다. 그러나 성향에 따라 원래 마음이 아주 평온하거나 화가 적거나 사마타 집중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은 크게 아프지 않고 넘어간다.
그 힘든 고비를 넘어서면 수행에 어려움이 사라져서 흔들림이 없어지는데, 너무나 행복에 겨워 깨달은 줄 착각하기도 한다. 빛이나 광명, 경안, 희열, 평온 등이 생겨날 수 있지만 이것들은 무르익지 않은 생멸의 지혜로써 아직 특별한 법이 아니므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관찰하기만 하는 것이 특별한 법을 얻기 위한 위빳사나의 바른 길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도와 비도를 청정하게 보는 수행자이다.
4. udayabbaya-anupassanā-ñāṇa (생멸을 관찰하는 지혜)
생겨난 정신과 물질의 생기는 특징, 태어남, 일어남, 새로 생기는 모습을 ‘생(生, udaya)’이라 하고, 변하는 특징, 부서짐, 무너짐을 ‘멸(滅, vyaya)’이라고 관찰 (anupassanā)하는 지혜(ñāṇa)이다.
무명, 갈애, 업, 음식 등이 일어나거나 멸하는 조건에 따라 오취온인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보는 지혜이다. 또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멸할 때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다. 이 지혜는 조건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멸하는 순간을 통해서도 생기고 변하는 특징이 있다.
사성제, 12연기, 무상∙고∙무아가 분명해지고, 생멸은 상속되고 항상 변하므로 단견∙상견∙무관심이 사라지면서 물거품처럼 항상 새롭고 잠시만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멸을 파악하여 상속이 분열되어 변하게 될 때 무상의 특상이 나타나고, 계속되는 압박을 마음에 새겨 행동거지가 드러날 때 괴로움의 특상이 나타나며,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견고함이 분해되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 무아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그래서 이 지헤를 얻게 되면 진정한 위빳사나를 시작한 자로서 경계에서 벗어나 생멸을 각자의 성품에 따라 고찰하게 된다.
이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온 몸의 느낌이 어디에서나 똑같고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몸이라고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몸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생멸하여 변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생기는 것 보다 사라지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명상∙숙고의 지혜 단계에서의 아픔이 없어지면 대상이 희미하게 느껴지면서 허전한 마음이 들고 자신의 수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대상이 전혀 다르게 바뀌어서 새로운 대상을 못 잡고 있는 상태일 뿐이므로 편안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미세해진 대상을 차분히 따라가서 관찰하면 된다. 그러면 마침내 생멸을 관찰하는 지혜가 시작되고 미세해진 대상을 관찰하게 되므로 집중은 더 깊어진다.
이 단계에선 명상∙숙고의 지혜 단계보다 더 큰 희열을 느끼게 된다. 마치 솜에 기름 한 방울이 번져 나가듯 온 몸에 균일한 진동을 느끼며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편안해 지고 부드러워지고 평온해지며, 몸에 독한 냄새들이 없어지고 땀도 많이 안나게 된다. 또한 덜 지치게 되고 사띠가 엄청나게 좋아져 지금껏 살아온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단계를 제대로 수행하는 자는 빛이나 광명이 보이거나 희열이 생길 때, 그 현상들을 왜곡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바르게 관찰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5. bhaṅga-anupassanā-ñāṇa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
정신과 물질의 관찰을 반복해서 무상∙고∙무아라고 고찰하다 보면 그 지혜가 예리하게 작용해서, 나타난 상카라들(모든 존재, 모태, 운명, 거주처 같은 형성된 것들)의 일어남이나 머묾이나 진행이나 표상을 내려놓고 오직 무너짐∙부서짐 (bhaṅga)을 관찰하는 지혜(ñāṇa)이다.
대상을 깊이 고찰한 다음 소멸하지 않은 것은 소멸할 것이고 무너지지 않은 것은 무너질 것이라고 마음에 새길 때, 모든 상카라들의 일어남과 머묾과 표상을 내려놓고 오직 무너짐을 보는 것이 마치 물거품을 보거나 깨지기 쉬운 도자기가 깨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무상∙고∙무아 관찰에 숙련되면 역겨워하면서 즐김을, 탐욕을 여위면서 탐욕을, 소멸하면서 일어남을, 놓아버리면서 취함을 버리게 되고, 무너짐으로 사라짐으로 공으로 나타남에 능숙하게 되어 여러 사견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이 단계 초기에 몸의 느낌을 관찰 할 때 마치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거나 머리에 물을 부어 온 몸에 흘러 내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몸의 형태를 아주 작게도 아주 크게도 하여 물질의 경계가 무너진 것처럼 느낀다.
그리고 대상을 관찰할 때마다 형체나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고 획획 계속 사라지는데, 관찰하여 알고 있는 마음도 그 대상과 함께 쌍을 이루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지혜가 아주 강할 때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모든 것이 계속 사라지는 듯이 생생하게 느껴져 바닥을 보면 바닥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나무를 보면 나무가 해체되는 것처럼 흩어져 보이고, 점 같은 미세한 대상들은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을 봐도 사람의 윤곽이 또렷하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6. bhaya-upaṭṭhāna-ñāṇa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
무너짐을 관찰하는 지혜를 반복하여 닦을 때 과거의 상카라들(모든 존재, 모태, 운명, 거주처 같은 형성된 것들)은 소멸했고, 현재의 상카라들도 소멸하고, 미래의 상카라들도 소멸할 것이다라고 계속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되면서 공포∙무서움 (bhaya)으로 나타나는(upaṭṭhāna) 지혜(ñāṇa)이다.
그러나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 그 자체는 무서운 것이 아니다. 마치 눈을 가진자가 아카시아, 철, 금으로 만든 세 개의 창을 보면서도 그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여기에 찔린 자들은 적잖은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조사하여 알뿐인 것이다. 공포로 나타나는 무서움은 상카라들의 표상이 무너지면서 무상을 보고, 그 무상으로 괴로움이나 무아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공포와 무서움 때문에 수행을 하지 못하고 사띠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지 못하고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것이다.
7. ādīnava-anupassanā-ñāṇa (위험함을 관찰하는 지혜)
무너짐을 관찰하고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를 반복하여 닦을 때, 나타난 상카라들(모든 존재, 모태, 운명, 거주처, 사대, 오온, 12처와 같은 형성된 것들)에는 종기처럼 질병처럼 통증처럼 맹수들이 들끓는 숲처럼 바램도 만족도 부귀영화도 없다라고 통찰하면서 위험함∙비참함∙재난(ādīnava)을 관찰하는 지혜(ñāṇa)이다.
매 순간 무너지기 때문에 너무나도 무섭고 그것을 위험하고 비참하다라고 알면서,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이 착각임을 알게 되고, 있는 사실 그대로 보게 되고, 물질과 정신에 대해 완전히 정이 떨어지게 되는 단계이다. 괴로움을 알면 집착이 계속 무너지는 것과 같다.
8. nibbidā-anupassanā-ñāṇa (역겨움을 관찰하는 지혜)
위험함을 관찰하는 지혜를 반복하여 닦을 때, 나타난 상카라들(모든 존재, 모태, 운명, 거주처 같은 형성된 것들)의 역겨움∙염오∙환멸∙지루함(nibbidā)을 관찰하는 지혜(ñāṇa)이다.
너무 심심하고 뭐든지 하기 싫어 먹기도 잠자기도 싫고, 자꾸 화가 나고 세상이 싫어지고 심지어 자살충동까지 생겨 수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제대로 관찰하는 사람은 이 상태가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는 동안에 생기는 현상으로서의 지루함이나 혐오감으로 알고서 이 마음의 상태를 계속 놓치지 않고 집중 관찰하면, 이 지루하고 역겹운 생을 끝내고 다신 윤회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강하게 일으켜 해탈로 향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
공포로 나타나는 지혜와 위험함을 관찰하는 지혜와 역겨움을 관찰하는 지혜는 문자만 다르지 뜻은 같다라고 무애해도에서 설하고 있다.
9. muñcitu-kamyatā- ñāṇa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
역겨움∙지루함을 관찰하는 지혜로써 역겨워하고 만족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을 때, 나타난 상카라들(모든 존재, 모태, 운명, 거주처 같은 형성된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마음이 집착하거나 묶이거나 고착되지 않고 해탈하기를(muñcituṃ) 벗어나기를 원하는(kamyatā) 지혜(ñāṇa)이다.
이 몸과 마음, 오취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계속 보면서 지루하고 역겨워 벗어나 해탈하고 싶어하는 지혜이다.
(다음에 이어서...)
=================
아래 첫 번째 자료 사진은
설명과 함께 교수사 스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심청정 지자현
(心淸淨 智自現)
마음이 맑고 깨끗하니
지혜가 절로 드러난다